[복음과상황] 회색지대 보고서 (7): 개인생활 보고서 (2003. 11.)
/김용주
하루
알 람을 3개나 맞추어도 요즘은 쉽사리 일어나 지질 않는다. 새벽에서야 잠이 드는 생활이 익숙한 지라 역시 아침은 그리 달갑지 않다. 얼마 전에는 시계를 snooze 기능이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 5분 간격으로 다시 벨이 울리기 때문에 최소한 이 친구가 있으면 늦게라도 일어나지는 장점이 있다! 대학교 때는 손수 아침식사를 만들어 먹고 나가는 일도 많았건만, 대학원 생활이 시작된 이후로는 직장인들의 아침 생활과 비슷해져 버렸다. 전에는 눈에도 띄지 않던 길거리 포장마차의 김밥과 토스트가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침을 거르지 않아야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항시 하기 때문인 듯 하다.
학교 가는 길은 1시간 정도 걸리는데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서 30분 정도가 더 걸리는 편이다. 보통 전반 30분은 영어회화 테이프를 들으면서 가고, 후반 30분은 근처에서 산 <한겨레> 신문을 읽으면서 간다. 물론 전날 연구실 일이 늦어져서 막차를 타고 들어가서 새벽까지 잠을 못 잔 경우에는 음악을 들으며 버스를 타고 지하철에서는 앞사람에게 인사하듯 졸기도 한다.
도착해서는 200원이 채 되지 않는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자리에 앉아 간단하게 성경을 읽는다. 귀납적 성경공부에 한창 정신을 잃던 시절에는 아침 Q.T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기면서 주변을 충동질하던 적도 있었고 Q.T 교제가 없으면 책 없이 등교한 학생처럼 어딘가 불안한 마음에 집중이 안되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냥 관주성경을 가지고 짧은 본문을 반복해서 읽는 것도 묘미가 있는 것 같다. 항상 많은 것들을 종합해서 어떤 결론을 내려야 직성이 풀리던 나에게 작다면 작은 변화인 셈이다. 연구실에서는 대체로 오전에는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수업과 연구실 일들을 하다 보면,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를 하게 되고 저녁을 먹은 후에야 깊이 있는 주제의 연구가 가능하다. 물론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이르는 경우에는 그 조차도 쉽지 않다. 그런 연유로 식사 후의 시간에는 대다수의 동료들이 사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웹 사이트에서 스포츠 신문이나 물건을 구매하는 일이 많다. 나는 주로 그 시간에 <뉴스앤조이>나 <복음과상황>의 게시판, 혹은 다른 기독 매체의 토론방이나 진보 잡지의 게시판들을 둘러보고 관심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때로 글들을 남기는 일도 있다. 인터넷 상거래는 주로 책을 구입할 때 많이 쓰는데, 읽고 싶은 책들의 명단을 틈틈이 만들다가 마일리지가 쌓였거나 행사기간에 구매를 하는 편이다.
대체로 10시와 11시 사이에 연구실을 나오게 되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정기 구독하는 잡지나 읽고 싶던 책을 읽는다. 전에는 구독하는 잡지가 많았으나 지금은 금전적, 시간적 여력이 없어서 <복음과상황>, <인물과 사상>, <객석> 정도를 읽고 있다. 그나마 <객석>의 경우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만만찮은 가격 때문에 격월 간격으로 사서 본다고 하는 게 맞다.
예전엔 신앙서적을 많이 보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고종석, 진중권 같은 논객들의 글이나, 제레미 리프킨, 노암 촘스키 같은 운동가적 기질의 학자들이 쓴 책들, 그밖에는 사상서적, 심리학 책들에 더 관심이 가는 편이다.
집 에 오면 음악을 들으면서 방 정리를 한다. 밤 시간에는 과제나 프로젝트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주로 논문을 읽거나 노트 정리를 요하는 책들을 읽는다. 대충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에는 묵상집을 읽으면서 영육간의 쉼을 갖는다. 자기 전에는 하루를 정리하면서 기도 시간을 갖는데 기도 시간이 뜨겁거나 열정적이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하루를 돌아보며 내 생각으로 가득했던 머리를 비우는 작업들이 내가 계획하지 않은 좋은 것들로 채워질 수 있게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름대 로 충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나의 하루에는 몇 가지의 좋은 기반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미혼(?)이기 때문에 아직은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아직 완전하게 경제적으로 자립한 상태는 아니지만 공대 대학원생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서 일정한 수입이 있다는 점이다.
한 달
시간 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내게 처음 일깨워준 분은 고든 맥도날드 목사다. 스무 살의 나이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대학 초년생의 티를 벗지 못하고 여기저기 배회하던 내 손에 잡힌 첫 신앙서적은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었고, 그 책의 저자로부터 지금껏 큰 빚을 진 사람처럼 그 분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다. 나는 매달 하루 정도는 안식과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집이 비는 날이면 집에서 쉬는 편이지만,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근교의 조용한 공간이나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곳을 찾아간다. 그런 날은 책을 주로 가지고 다녔었는데 요즘은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편이다. 어떤 일에 몰입하거나 시간에 쫓겨 바쁘게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무엇이 중요한 일이고 무엇이 주변적인 일인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 결국 그 목적과 가치가 어떠한지에 대한 생각을 잊게 되거나 혹은 그런 생각들이 희미해져 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나와 나의 주변을 관조적(觀照的)인 태도로 혹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둘러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특히 요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서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지내려고 해도 시시각각으로 시간 절약(time-saving)과 기술(technology)에 대한 무조건적인 가치부여에 휘둘리게 되는 게 사실이다. 직장에서도 특정한 기한 내에 일을 처리하는 것이 기업의 진정한 가치이자 목적이며, 연구실에서도 연구분야는 프로그램이나 알고리듬의 실행(run time) 시간이 절약되거나 여러 가지 일들을 한꺼번에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시스템(multi-tasking system)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런 분위기에서 시간 죽이기를 시도하는 이들은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무능하다는 딱지를 달고 다니는 게 지배적인 분위기인지라 나도 모르게 그런 분위기 안에서는 호흡이 빨라지고 그런 가치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모습도 심심찮게 직면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매 주기마다 한 번 정도, 일주일 중의 반나절, 한 달 중의 하루, 일년 중의 한 주간, 그런 식으로 잠깐씩 달리던 길에서 멈춰 서서 이제껏 걸어온 궤적을 돌아보고 그 흐름을 객관적으로 차근차근 짚어보면서 수정할 부분은 수정하고 바른 방향은 키워주는 일이 필요하다.
단순히 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회 봉사와 사회 참여라는 대목에서도 이 한 달의 주기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물론 일 주일의 주기가 더 적당하겠지만. 나는 "복음주의 바이러스"라는 작은 모임을 하고 있다. 귀납적 성경공부를 하기도 하고 스터디 모임도 갖지만 주로 우리가 하는 일은 수다를 떠는 거다! 내가 홍세화님의 책에서 접한 프랑스 문화 중 가장 부러워했던 대목은 식사 시간이 충분히 길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충분히'는, 대화가 어느 정도 깊어질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시간을 감안한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식사 중에 "그 영화 어땠니?"라는 질문에 "난 별로였어."라거나 "정말 죽여주던걸?"이라는 대답 몇이 오고 가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는 인스턴트 문화에 젖어있는 내 주변 분위기에서 "나는 그 영화가 좋았어. 왜냐하면, 그 감독이 찍은 이전의 작품을 보면.."이라며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충분히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치, 신학, 문화, 영화, 심지어 연애에 대한 이야기까지 좀더 자세히 조목조목 이야기할 수 있는 모임이 기독 청년들에게는 절실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들이 정립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의 일관성에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연유로 바쁜 와중에도, 그리고 그리 많이 모이지 않는 독자 모임도 지속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지적 유희 아니냐,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가끔씩 듣는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문제의식을 갖게 만드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행동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지만 믿음 또한 들음에서 난다고 하지 않던가. 결국 문제의식을 나누던 이들이 인적 인프라로 어떤 참여적인 형태의 일들을 해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하고 있는 많은 행보들에는 되도록이면 참여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대해서는 언젠가 더 깊게 이야기할 때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사회 봉사의 문제는 최근 내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학부 시절에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도서 워드 입력이나, 음성 녹음과 같은 일들을 곧잘 했었다. 학교 주변에 그런 연결점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고, 바쁘다는 핑계를 자주 대긴 했지만 실제로 대학 생활에서 시간을 내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는 게 훨씬 정직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굳이 감추지 않는 것이다. 유일한 변명거리라고 한다면 그런 것이다. 곧 나의 대학원 생활이 마무리될 것이고 또 어딘가에 정착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봉사할 단체를 찾아서 주기적으로 찾아가겠다고. 하지만 지금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구두 속에 들어간 작은 돌맹이처럼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되고 있다. 사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불편함이 어느 정도 익숙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또한 느끼고 있다. 내 대학원 이후의 생활에서 아무런 봉사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내 주변에서 누군가는 나의 안일함을 질책해주기를 바란다. 이 글을 들이대면서 말이다(웃음).
일 년, 그리고..
일년을 주기로 고려해야 하는 일은 주로 경조사이다. 가족의 생일이나 결혼식, 스승의 날에 스승을 찾아 뵙는다거나 하는 일이 여기에 속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의 생일은 미리 메모를 해 두었다가 의미 있게 챙기는 것이 좋은 듯 하다. 나는 이런 일을 잘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결혼식에 잘 가지 못하는 일도 많고, 생일은 가벼운 선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 무의식 깊은 곳에는 인맥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 이유도 큰 듯 하다. 자주 겪는 일이지만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인맥의 병폐들에 큰 환멸감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인맥의 관리 차원에서 일어나는 주변 분위기를 잘 참아내지 못하는 것이 내 성격의 모난 점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공적인 일들에 그런 주변 사람들의 일들이 파묻히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진중권씨가 자기 동문 선배에게 표를 주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개새끼'라는 욕을 먹었다는 글을 읽고 한참을 웃은 적이 있었는데, 나도 그런 전철을 밟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즘은 자주 든다.
다음 얘기를 하기 전에 잠깐 얼마 전에 들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한국 학생들과 미국 학생들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개의 예문이 있다. 먼저 미국 학생들의 대화다.
A: 나 어제 시험을 망쳤어. 정말 기분 꽝이다.
B: 과목이 뭐니? 수학이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고 다른 과목은 잘하는 조교를 소개시켜줄 수도 있거든.
다음은 한국 학생들의 대화다.
A: 나 어제 시험을 망쳤어. 정말 기분 꽝이다.
B: 그럴 수도 있지 뭐. 인생이 다 새옹지마 아니겠어? 술이나 마시러 가자.
시험을 망친 후에 생각하는 학생들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다. 한쪽은 이미 지난 문제에 대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다른 한쪽은 지난 문제를 잊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사 실 일년을 주기로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 망년회다.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의 연장선 상에서 나는 망년회라는 말 자체부터 싫어하는 사람이다. 이름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좋지는 않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그 내용을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망년회는 정말 짜증나는 이름이다.
나는 역사에 관한 책들을 재미있게 보는 편이다. 사상에 관한 책도 흐름과 시대상이 반영된 시각을 주는 저자의 책이 좋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때론 너무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항상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버팀목이나 발판이 된다는 점에서 좋은 행위임에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 해를 잊어버리겠다는 느낌이 강한 망년회라는 말보다는 한 해를 깊이있게 돌아보겠다는 회년(懷年)회가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한 해를 한 달 정도 남긴 시간에 한 해를 돌아보고 나머지 한 달 동안 새해에 대한 계획들을 세워보는 것이 일년의 마지막에서는 참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이 나올 때 즈음이면 어느 정도 시의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에 11월 말에 내가 속한 모임에서 만들었던 회년회 모임 자료의 토론 문항들을 소개해 본다.
<회년모임 나눔 자료> 2002. 11. 30.
1. 올 해의 가장 즐거웠던 일은?
2. 올 해의 가장 힘들었던 일은?
3. 올 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어디어디인가?
4. 공동체로부터 공급 받은 것들은 무엇이며, 공급한 것들은 무엇인가?
5. 올해 자신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어떤 노력들과 어떤 어려움들이 있었나?
6. 올해 자신이 중점적으로 노력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예. 제자 양육, 학업, 직장 사역, 사회봉사, 안식 등)
7. 올해 자신이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부분, 혹은 균형이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었는가?
8. 내년의 계획을 간단하게 세워보자.
9. 내년의 계획들을 통해서 자신이 5년, 혹은 10년간 이루어갈 일들을 생각해보자.
개 인의 삶이 드러나는 일은 나에게도 참 불편한 무엇이다. 놓치는 일도 많고 연륜이 없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달려드는 일도 아직은 상당수임을 감안하면 이런 류의 글들이 과연 좋은 글인가 하는 자성도 해본다. 하지만, 간혹 만나는 선배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끝에 다급한 마음으로 "형은 어떻게 살고 있어요? 직장인으로서 기독인으로서 사회를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하거든요."라는 물음에 "뭐, 사는 게 다 그렇지."라거나 "내 삶을 나누면 은혜가 안 되서."라고 한 발 물러서는 이들도 많다. 혹은 괜히 튀려고 하지말고 큐티나 열심히 하라는 권면도 듣는다. 아직은 자신이 바르게 살고 있지 못하니 자신을 추스리고 신앙의 연륜이 좀 쌓이면 그 때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쓰겠다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간단하게 대답하자면 그런 류의 반응은 몸부림치면서 하루하루를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고민하는 기독청년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과정 중에 일어나는 다이나믹한 고민들, 그 복잡다단한 선택과 일상의 문제들이 드러나지 않는 한, 청년들의 고민은 한 번 펼쳐지지도 못한 채로 머리 속에서만 꿈틀대다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개인 생활 보고서를 써 내려가 보았다. 자신의 로맨스가 타인의 불륜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직장인의 농 섞인 얘기가 있다. 내 삶도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실제 삶보다는 조금 포장이 되었을 수 있다. 감안하고 읽으면서 자신의 생활 보고서도 한 번 스케치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