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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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30대의 전쟁터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한 지 6년째다. 현재 나는 자동차 연구소에서 부품 설계 업무를 하고 있다. 지금도 종종 지인들은 내게 설계가 적성에 맞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전공이 싫었던 건 아니지만 졸업을 앞두고는 기독교 단체 주변을 기웃거렸다.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그런 일이 더 신앙적이고 가치 있어 보였나 보다. 마지막까지 전공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 졸업반이 된 후, 문득 4년 동안 공부한 전공을 살리지 않겠다고 결정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부모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으면서 4년간 써먹지도 않을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전공 살리기는 대학원 생활을 거쳐 자동차 연구소에서 설계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지금의 직업이 천직이라거나 소명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내 직업은 공학에 호감을 느껴 전공으로 선택한 데 대한 책임으로 시작한 것이었고 솔직히 아직도 확신은 없다.

나의 일상은 이렇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서서 밤 11시에 퇴근한다. 그래도 주5일제 시행으로 주말에는 쉬지만 연차가 올라가면서 늘어난 업무량으로 인해 그마저도 요즘은 여의치가 않다. 회사에서는 점점 인원을 줄여가고 있으며 그만큼 축소된 인원으로 더 많은 업무를 시키고 있다. 또한 직급이 높아질수록 진급하는 인원도 극히 일부분이라 정년까지 회사를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업무 시간 중에는 도통 짬이 나지 않기 때문에 사내에서 어학 공부 같은 자기계발, 혹은 성경 공부나 독서를 하려면 식사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간혹 글이라도 쓰려면 끼니를 거르고 퇴근 버스 안에서라도 짬짬이 시간을 내야만 한다. 정년을 생각하면서 전세 대출금을 갚기 위해 돈 계산을 해 보면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서는 몇 년 내로 서울에서 작은 평수의 ‘내 집 마련’은 고사하고 대출금을 다 갚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대기업 사정이 이러니 2차, 3차 협력 업체는 더 열악하리라. 일정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상사의 지시에 의해 업체 직원에게 과도한 업무를 떠넘기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퇴사하는 이들도 많다. 급여는 대기업에 비해 적으면서 며칠 밤, 심지어 몇 달씩 밤을 새워야 하는 경우도 잦아서 몸과 마음이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는 것이다.



육아라는 이름의 부부 프로젝트

최근 비슷한 연배의 동료나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이제 아이를 낳기 시작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삶의 모든 것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내는 임신 후 육아 휴직 문제로 사내의 암묵적인 압력 때문에 자신의 경력을 포기한 채 직장을 그만두었고 출산한 이후에는 늦은 퇴근으로 육아를 돕지 못하는 나 때문에 육아에 부담을 느껴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주중에는 퇴근이 늦기 때문에 주로 주말에 육아를 많이 돕는 편이다. 문제는 직장에서 일주일의 피로가 가득 쌓인 내 입장에서도 이틀간의 육아가 버거운 게 사실인지라 때로는 사소한 일로 부부 간에 서운해 하며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요즘은 출산 후 바쁜 남편과 점점 커져 가는 고부 갈등, 육아에 대한 심적 부담감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이 주변에도 부쩍 많아졌고 그러한 문제로 연고지 근처나 근무시간에 여유가 있는 직장으로 이직하는 남편들도 생겨나고 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들의 경우에는 육아 도우미를 쓰거나 기관에 보내기도 하는데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이유로 기피하기도 하고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드는 비용이 만만찮다.

이렇듯 육아라는 프로젝트를 놓고 부부가 서로 동역자가 되어 이를 감당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지칠 때까지 업무를 하고 있는 30대의 부모들은 이제 자기들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어둔 채 직장 생활과 육아에 올인하며 이 시간들을 간신히 버티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도 이전에는 신앙 서적도 꽤나 읽었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때때로 시간을 내어 참여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수면 시간을 줄이는 방법 외에 이런 일에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대기업과 같은 제조업 관련 직종에게 국한된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직장의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좀 더 자라거나 직종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상황이 변화될 것 같지 않다.

 

 

개인 영성에 매몰된 기독 학생 운동

선교단체 시절, 내가 경험한 가장 큰 갈등은 사역의 방향성 문제였다. 내부적으로 길고 지루했던 논쟁도 있었고 암묵적으로 제재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갈등의 주요 원인은 이러했다. 나의 주장은 개인 영성 훈련과 더불어 사회참여의 문제를 학부 때에 사역 방향에 포함시켜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자는 것-이것이 내가 이해한 복음주의 학생 운동의 방향성이었다-이었으나 선교단체 분위기는 개인 영성을 먼저 다진 후에 사회에 나가서 각론을 실천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주변 선후배들을 보더라도 그들이 졸업 후에 사회참여의 각론을 잘 실천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지성 사회 복음화’를 모토로 내걸었던 선교단체의 일원으로서 나 또한 여전히 부끄럽다. 하지만 이것이 비단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개인 영성과 사회참여의 균형성 문제를 거론했을 때 캠퍼스에서 개인 영성에 집중할 것을 주장했다면 분명 졸업 이후에 사회참여 각론에 있어서의 어떤 방향성에 대한 지침 내지는 훈련의 장이 필요했을 법한데 기독 학생 운동에서는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모델 제시가 없었고 훈련의 장도 아니었으며 현장에서의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듯하다.

앞서 언급했던 직장과 육아 같은 현실적 문제들이 30대 직장인에게는 분명 커다란 부담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요즘의 내가 그렇다. 전에는 목회 세습 문제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청 광장에 나가는 것을 혼자 결정했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도 내 개인의 문제니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좋다는 책과 기사들은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꼼꼼히 읽었고 실시간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회사 생활을 하면서 시의 적절하게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학부 때부터 철저하게 고민하고 관련된 논의들을 공부했어도 사회에 나가서 그러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고 실천해 옮기기가 쉽지 않은데, 물리적 시간과 심적 여유가 많았던 캠퍼스에서조차 그러한 고민과 참여의 경험이 없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갑자기 사회에 나가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직장에서의 총체적 복음

학부 시절 고민했던 총체적 복음에 대한 실천으로서의 직업과 신앙 문제의 거창한 통합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두 가지 고민이 있는데, 첫째는 앞서 말한 신앙과 전공, 신앙과 업무의 통합 문제다. 효율성과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서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신앙과 업무를 아우르는 적용점을 찾기란 참 어렵다. 가끔은 전공 분야에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채 의욕만 앞세우는 기독교인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신앙적인 잣대로 자신들의 분야와 조직을 성급하게 비판하면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이제야 조금 설계에 익숙해진 ‘초짜’ 설계자이니 말이다. 둘째는 환경문제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 문제다. 소형차의 가격을 낮추기 위한 부품의 원가 절감 방안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낸다거나 연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 혹은 부품 업체에서 제조 공정상 폐기물이나 폐수들을 줄일 수 있는 재질과 공법 연구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만일 부품 설계자가 아닌 차종 프로젝트 기획자라면 단품을 넘어 좀 더 거시적인 영역에서 이런 방향들을 추진해 갈 수 있을 듯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직장에서 다른 팀과 적대 관계에 있거나 경쟁에 놓이는 경우, 그 팀의 직무 유기를 부각시키거나 우리 팀의 성과를 과대 포장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업무 분장에 있어서도 나와 우리 팀의 책임을 축소하고 다른 팀을 최대한 이용해야 업무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다. 동료 간에는 어떠한가. 고과를 높게 받기 위해 연구 성과를 먼저 보고하려고 애쓰거나 아예 후배 사원의 기술이나 보고서를 가로채기도 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는 개인이나 팀의 알력 다툼을 넘어 노조 문제나 협력 업체에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와 같은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에까지 나아간다. 일보다 사람을 중시하고 성공보다 동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에 힘쓰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직장에서는 인정받지 않으면 쉽게 도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과 사회의 윤리적 문제들을 깊이 사유하고 작은 일부터 신앙적 양심에 걸맞은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직장에서 만난 기독교인의 경험

회사 안에도 기독교 관련 단체들이 많다. 많은 경우 사내 신우회가 있고 각 선교단체의 학사모임도 있으며 BBB(직장인성경공부모임)라는 전국적인 직장인 모임도 있다. 부서 내 기도모임부터 로비에서 일대일로 큐티 나눔을 하는 이들도 간간이 보인다. 직장에서 기독교인을 만나서 대학 시절 선교단체에서 활동했다고 하면 어떤 기대감으로 나를 대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난 그런 부류를 싫어했다. 직장에서 내가 만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신앙 색깔을 가지고 있거나 술자리를 거부하는 ‘왕따’에, 업무가 급한데도 불구하고 예배나 기타 신앙 모임에 우선순위를 둬서 다른 동료들에게 누를 끼치는 이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독교인들과 신앙적인 이유로 의견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솔직히 내 ‘고매한’ 신앙을 그들 때문에 흐리기 싫다는 일종의 신앙적 우월감도 작용했다.

 

얼마 전 함께 일하던 다른 팀의 수석연구원 한 분이 사무실 내 책상에서 신앙서적을 보고는 함께 식사를 청했다. 그분은 내가 예상한대로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라고 권했다. 나는 간간이 참석하는 건 모르겠지만 업무가 바빠서 부서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그 모임에 나가고 싶지 않노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분은 더는 권하지 않고 개인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셨는데, 그 이야기에 솔직히 적잖이 놀랐다. 그는 이제 자신의 나이가 많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급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이 남은 시간 동안 이 직장에서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의 결론은 젊은 시절에는 업무가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못한 사내 전도에 매진하기로 마음을 먹고 직원들을 열심히 전도했는데 그로 인해 수많은 직원들이 회심을 했다고 했다. 합리적이면서 강압적이지도 않고 늘 직급에 관계없이 예의를 갖추고 상대를 대하는 그분의 성품으로 볼 때, 그의 인격에서부터 나온 전도가 효과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날 난 내가 참 하찮게 느껴졌다. 사실 그분과 식사를 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내 신앙생활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내가 선교사가 되지 않은 솔직한 이유가 선교지로 가기 싫어서라는 명백한 이유를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했다. 요즘은 힘들다는 핑계로 주일 예배를 빠지기도 하고 헌금이나 후원금을 내며 손을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그뿐이랴. 스스로 균형 잡힌 신앙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구분 지으려고 애쓰는, 답답하고 보수적인 신앙인들이 직장에서 모이기에 힘쓰고 주변 동료들을 전도하는 동안 정작 나는 한 명의 지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했다. 그것도 하루 10시간 넘게 ‘회사’라는 신에게는 온 몸과 온 정성을 다 하면서 말이다.



기독 직장인의 소통과 공감, 연합과 참여를 꿈꾸며
직장인의 입장에서 졸업 후에 신앙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학부 시절 그렇게 존경하던 선배들이 학사가 되고 나면 수면에서 사라지곤 하는 일들을 보면서 실망도 많이 했지만 정작 30대 중반의, 중간 직급의 위치에서, 그리고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조차 버겁고 힘듦을 경험한다. 매순간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고 고민한다. 이런 치열함 때문에 과거에 사회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기독교인들이 이 시기에 어떤 교계의 중추 세력으로 거듭나길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전도와 봉사에 국한된 지역 교회와 선교단체의 방향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또한 나를 포함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담을 쌓고 그들과의 교류를 비기독교인들과의 교제보다 더 꺼리는 편협한 행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수적 기독교인들 중, 본이 될 만한 몇몇 분들의 일상에서의 성실함과 금욕적인 삶, 자기와 다른 의견에 공격적이지 않고 매순간 상대를 포용하려는 성품에 깊이 감동해 나를 돌아볼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이 모든 면에서 옳다는 말은 아니다. 때때로 역사에 대한 몰이해, 신앙적‧정치적인 면에서의 잘못된 편견 등이 답답할 때도 많지만 따지고 보면 나 또한 그들에게 신앙적으로 완전하고 본이 되는 존재였던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학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내가 느끼는 소명은 복음주의권 안에서의 참여와 연합이다. 또한 요즘 들어 자주 고민하게 되는 것은 우리 세대 기독교인들 사이의 소통과 공감이다. 아직은 다소 무력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기독 직장인들은 나름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삶에 파묻혀서 자신의 일상에 매몰되기도 하고 자기가 속한 영역 안에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이들이 대다수다. 소통과 공감을 통해 이들을 연합의 장이자 실천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운동과 그에 대한 참여 방법들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다.

 

 

 

*이 글의 일부는 <공부하는 그리스도인>(IVP)에 실린 ‘기독 지성과 삶의 일치를 향하여’와 복음주의연구소가 주관한 기독 지성 집담회 발제문, ‘현장에서 느끼는 기독 지성 운동’을 부분적으로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필자 주)

2010/07/12 00:20 2010/07/1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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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슈퍼, SSM으로 바뀌다!

작년부터 시작된 SSM, 즉 기업형 슈퍼마켓(Super Supermarket)이 동네의 영세 상인들 사이에 지속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우리 동네에도 말로만 듣던 기습 개점이 몇 개월 전에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기습 개점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대기업 로고가 들어간 매장의 모습을 드러낸 지 불과 며칠 사이에 공사는 완료되었다. 그 맞은편에는 할머니 한 분이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슈퍼 마켓이 개점하는 날, 그 앞에는 대학교에서나 보던 빨간 글씨로 쓴 '지역 장사를 죽이는 대기업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가 걸렸고 동네 사람 몇 명이 팔짱을 낀 채 그곳을 지켜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다수의 동네 사람들이 대기업의 슈퍼마켓을 찾았다. 처음에는 동네 할머니의 구멍가게를 지나서 슈퍼마켓을 가야 하는 그 길을 지날 때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거나 걸음을 빨리 걷곤 했지만 곧 그런 사람들도 없어졌다. 일주일이 지나서 구멍가게는 문을 닫았다.

사실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의 구멍가게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그 가게에는 먼지 낀 과자들과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식품들이 많았고 불량 식품 과자들이 항상 진열되어 있었으며 할머니가 앉아 있던 평상에는 색소가 짙은 '슬러시'가 돌아가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색소로 가득한 음료를 먹고는 입 주변이 보라색으로 변해서 돌아다니곤 했다. 결국 할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그 불량 식품 가득한 구멍가게를 살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매일 거대한 유통망으로 새 물건이 들어오고 늦은 저녁에는 할인까지 해 주는 슈퍼마켓을 동네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용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이렇게 SSM 업계 1위인 대기업은 동네의 후줄근한 가게들을 공략하고 있다. 그들은 기습 출점이라는 공격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작년 3분기 매출 3,000억, 영업이익 70억을 보이는 등 작년 대비 36.6%의 영업이익을 냈고 아마도 새해엔 이익률이 더 높아질 것 같다.

'이마트 피자' 논쟁

다 행히 최근 기업형슈퍼마켓(SSM) 규제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SSM 기습 개점엔 제동이 걸리겠지만 그간에도 영세 상인들은 많은 피해를 보았다. 또한 이러한 피해 이면에는 그간 영세 상인들의 취약한 부분들, 이를테면 친절한 서비스, 원활한 유통망, 반품의 용이성, 늦은 시각까지 매장 운영 등에 변별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하반기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마트 피자 문제로 불거진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과 나우콤 문용식 대표 사이에 트위터 논쟁도 사실상 이러한 대기업 마케팅의 문제를 좀 더 고민하게 만들었다. 특히 정 부회장의 "본인은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시나요?"라는 질문은 트위터 안에서도 수많은 네티즌들이 RT(리트윗)를 하면서 그에 대한 의견들을 쏟아 내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시골의사'로 널리 알려진 박경철이 제기한 이마트 피자의 문제점은 대기업의 영세 상권 침범 문제를 보다 깊숙이 짚어 주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면에 있습니다. 신세계 이마트에 피자를 독점 공급하고 내부 입점해서 빵을 판매하는 조선호텔베이커리는 원래 신세계 관계사인 조선호텔의 소속이었으나 조선호텔에서 분사를 해서 별개의 회사로 독립을 했고 그 과정에서 정용진 부회장의 동생인 정유경씨가 45%의 지분을 가진 개인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 개인 회사가 이마트에 독점적으로 베이커리 사업을 하면서 베이커리 매출액이 조선호텔의 매출액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는 조선호텔이 수익을 크게 낼 수 있는 사업을 사주 가족에게 분할해 준 사적 이익 편취의 사례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마트 역시 사주의 특수 관계인이 운영하는 회사에게 독점적으로 사업권을 줌으로써 경쟁 납품의 기회를 포기했기 때문에 조선호텔과 신세계 양사의 이익이 주식회사 주주의 이익을 대주주 가족에게 양도한 것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삼성이나 현대 등 재벌 기업들이 자녀들의 불법적 자산 증여와 자산 증식을 위해서 사용해 온 전형적 수단들이기도 합니다. 재벌가의 윤리의식을 보여 주는 모습이기도 한데 앞으로는 상생을 외치고 뒤로는 이런 모습을 보이면서 이념적 소비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 한국 부자들의 모습에서 상생과 공정이 공허한 화두로 들린다면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겪는 불편함

솔 직히 나는 SSM과 이마트 피자 문제를 바라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진보적인 이들은 대기업의 기습 출점이나 재벌가들의 독점적 사업권 문제 등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을 거시적 형태로 비판했다. 하지만 퇴근길에 SSM을 가 보면 그 늦은 시간에 그곳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이들로 붐비기 일쑤였고, 주말에 마트를 가면 이미 '그 유명한 피자'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사실 나도 이 글을 쓰기 위해 피자를 한 판 사 먹어 봤다. 동네 피자를 주문하면 가격은 비교적 저렴했지만 재료들이 부실하거나 신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결국엔 돈을 더 주고서라도 다시 브랜드 피자를 시켜 먹곤 했는데 마트에서 산 피자는 더 저렴한 가격에 훨씬 재료도 좋았고 맛도 있었다.

나는 마트에서 피자를 사는 이들과 SSM에서 장을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기업을 선호하고 신세계 정 부회장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느끼기에 대다수의 30~40대 직장인들은 은연중에도 대기업이나 재벌에 비판적이고 그 누구보다 그들의 윤리의식이나 부정행위에 냉정하다. 하지만 나는 그 다수의 사람들이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고 이마트 피자를 사 먹고 동네 SSM을 이용한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의 일상이 너무 피곤한 반면, 대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너무나도 편하기 때문이다. 결국 머릿속의 문제의식과 손과 발이 머무는 공간 사이의 괴리감이 발생한다.

일 례로 나는 한때 마트가 24시간 운영된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편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묶여 있는 입장에서 밤 12시가 넘어서도 장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모른다. 선진국은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간지에서 마트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문제를 다룬 기사를 읽었다. 그들의 부당한 근로 조건과 불규칙한 근무 시간들이 얼마나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조명했고 나는 그 기사를 읽은 후에야 마트에서 내 편의를 위해 새벽까지 근무해야 하는 직원들의 피곤한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대형 마트 이용을 끊기로 결심했다. 동네에서 장을 보고 영세 상인들의 가게들의 물건을 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처음 몇 달은 비교적 괜찮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몇 달을 가지 않고 결국 다시 소비 습관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동네 상인들의 시간에 내가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네에 장이 서기도 하는데 그런 날은 주중이고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많은 물건을 사는 일을 자주 힘들어했다.

반면에 SSM은 물건 하나를 사도 집까지 배달해 주었고 대형 마트의 물건은 매일매일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들어오는 반면 동네 가게는 묵은 물건들을 며칠씩 되팔았다. 게다가 내가 자주 가는 동네 가게는 아줌마가 물건을 팔 때와 아저씨가 물건을 팔 때 가격이 달랐다. 주인아저씨는 자주 적은 양의 채소를 살 때 나에게 바가지요금을 받곤 했고 나는 매번 가격 흥정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물론 지금은 전적으로 대형 마트에 의존하지는 않지만 그 소비 행태 자체를 끊지 못했다. 사실 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소비자, 과연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을까

영세 상인을 보호하는 문제는 사실 구조적으로 보호가 필요한 부분이다. 대기업으로부터 그들의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사회 구조적, 법적인 보호가 필요하다. 허나 미시적으로 볼 때 우리는 어떤가. 정말로 우리는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일상의 변화를 꿈꾸고 있는가. 혹, 비판 의식을 가지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고 디테일한 일상의 불합리함은 눈감고자 하는 건 아닐까. 나만 의지력이 약한 사이비 진보주의자인 걸까. 나는 이런 일련의 일들을 계기로 SSM을 비판하고 이마트의 독점 행위를 문제 삼는다면, 일상적 소비생활에 있어서 상당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

지인에게 이런 얘길 했더니 그분도 결연한 마음으로 대기업 가전제품 대신 중소기업의 물건을 샀다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대기업 물건을 사게 되더라는 비슷한 얘길 했다. A/S가 너무 다르더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중소기업 물건은 수리 절차도 복잡하고 기간도 오래 걸린 데다가 고치고 나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대기업은 문제의 물건을 아예 새 제품으로 바꿔 줬다고 했다. 이런 서비스 앞에서 중소기업이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동네 구멍가게에서 개봉한 물건, 며칠 써 보고 문제가 있다고 우기는 물건을 바꿔 줄 수 있을까. 대기업은 해 줬다. 그것도 지나치게 친절하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환상적인 대기업 서비스의 이면에는 누군가 손해 보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반품된 제품은 OEM에 납품했던 하청업체의 손실이 되고 더 낮은 가격에 더 양질의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 많은 생산자와 도매업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불합리한 거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이런 불합리, 부조리는 고스란히 그 하청업체의 직원들의 낮은 복지와 수당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이면의 부조리는 잘 감추어 둔 채 대기업은 소비자가 원하는 완벽한 고객 감동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셈이다.

문제는 대기업을 대놓고 비판하는 많은 진보적 소비자들이 이런 서비스에 길들여져 정작 소비 자체는 자신들의 '이념적'으로 하지 않는 묘한 기현상이 발생한다. 과연 우리 소비자들은 이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을까. 다수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많은 대기업 슈퍼마켓과 피자와 치킨들이 주변을 채워 갈 것이다. 나는 요즘 점점 더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그 진의를 의심하게 된다. 여전히 인터넷에는 많은 이들이 멋지고 탁월한 언변으로 글을 쓰고 트위터에서 지저귀지만 SSM은 늦은 밤까지 성황을 이루고 이마트 피자, 통큰 피자는 더 잘 팔린다. 대기업이 이런 '이념적 소비자'를 과연 두려워할지 의문이다.
2010/04/12 00:19 2010/04/12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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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편들 vs. 아버지 세대의 남편들

요즘은 업무 중에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면 살짝 아줌마들 수다 떠는 분위기가 난다. 야근에 특근까지 하고 주말 내내 두 아이를 보느라 힘들었다는 이야기, 고부간 갈등이 생겨 중재하느라 진땀 흘린 남편들 이야기가 제법 들린다. 흔히 하는 소리로, 요즘 남편들은 두 부류가 있다고 한다. 진짜로 헌신적인 남편과 가짜로 헌신적인 남편이 바로 그 두 부류다. 결국 속내야 어떠하든 간에 헌신적이지 않은 이른바 '간 큰 남자'는 없다는 말이다.

집안일과 육아의 경우, 나도 신혼 초에는 집안일에 익숙지 않아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에게 미루다가, 폭발 직전의 아내에게 정신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이후 많이 변했다. 육아 문제도 회사 일이 바빠도 육아는 함께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 남편들 다들 참 잘하는 것 같다. 야근하고 집에 가서 아이 목욕시키고 재우고 새벽에 분유 먹이고, 주말에는 아예 아이를 전담하는 남편도 많아서 월요일 아침엔 유독 눈이 충혈되거나 조는 남편들도 종종 보인다. TV 뉴스에서 아이랑 나들이 나와 쓰러져 조는 남편들 모습이 나오자, 아내도 남편들의 고충을 아는지 '남편들 참 고생이 많다!'고 한 소리 거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요즘은 가족이 모이거나 명절이 되어 세대 간에 친척들이 모이면 아버지 세대의 남편들을 답답하게 느끼는 젊은 부부들이 많다. 식사 준비할 때는 TV를 보며 무심하게 있다가 음식 투정을 하는가 하면 요즘 아들딸들이 버릇이 없다고 일장 훈계를 몇십 분씩 늘어놓는 분들도 있다.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드시고 만취하여 실수하거나 그런 상태에서도 굳이 운전대를 잡겠다고 큰소리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말끝마다 "어디 여자가~"라며 대놓고 여성 차별적인 말들을 쏟아 내는 분들은 어떤가. 보고만 있어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주변에서 나는 여성 차별에 대해 문제 제기를 많이 하기로 알려져 있는 편이다. 교회에서 작성하는 모든 가족 카드, 주보 글에도 아내의 이름을 먼저 쓰는 편이고(물론 이럴 경우에도 굳이 순서를 바꾸어 편집하는 분들이 계신다) 집안일에 적극적이지 않거나 가부장적인 말들을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직설적으로 문제를 삼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조금 생각이 바뀐 부분들도 있다.


'진상 남편', '혐오스런 아버지'가 되기까지

처음 내가 아버지 세대 남편들을 곱씹어 보게 된 건 회사에 들어와서다. 회사에서 임원회의 서기로 자주 들어가는 동기가 요즘 아버지들 너무 불쌍하단다. 자기네 팀장이 나이가 쉰인데 임원회의 끝나고 뒤풀이 가서 임원들 비위 맞추느라 노래방에서 머리에 넥타이 매고 트로트를 불러 대는데, 그 순간 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서 측은한 마음에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내 아버지도 술을 드시면 전쟁 얘기, 군대 얘기, 그리고 30~40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쏟아 내곤 하셨다. 가장 많이 하시던 말은 "그땐 깡패 같은 세상이라…."였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사셨던 70~80년대는 깡패 같은 세상이었다. 부정부패도 많았고 정치적으로는 암흑기였던 그 시절에 촌지, 인맥, 파벌, 노동 운동, 유흥 문화 등 성장기의 한국 사회에서 스무 살 청년의 흔들리는 사회의 첫걸음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순수하게 그분들 세대의 입장에서 해 본다. 군대에서와 동일하게 직장에서도 상명하복을 강요받고 '쪼인트를 까여 가며' 청년 시절의 젊음을 회사에 바친 아버지들은 집에서는 그만큼 소외되어 갔다. 집에서는 설거지 수세미나 바느질할 실·바늘 하나 찾을 줄 몰라 아내의 비난을 듣는다. 자녀들 교육은 이미 아내가 전담한 지 오래다. 자녀들이 과하게 공부하는 거 같아 지적을 하려 들면 우리나라 교육 실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순진한 말을 한다며 구박하기 일쑤다.

아들딸도 아버지가 집에 있는 게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잘 보이지 않던 집에서 가끔씩 존재하는 아버지의 위치는 낯선 손님의 그것만큼이나 낯설고 어렵다. 이미 가정은 어머니의 주도하에 잘 돌아가는 공동체이고, 아버지는 그 공동체에서는 한낱 이방인이자 갈수록 권력도 약해지는 중년 아저씨에 불과하다. 직장에서는 중간 관리 정도라서 자신의 지시에 말대꾸를 상상조차 못하는 신입 사원이 있는 반면, 가정에서는 자신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결국 자기 말을 관철시키려고 과하게 화를 내거나 자녀들에게 폭력을 쓰게 되기도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가족들과는 심정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매번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해 대고 자신의 치부를 찌르며 철저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존재로 굳어지면서, 아버지들은 집보다 회사에 있는 게 편한 탓에 점점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귀가 시간이 늦어진다. 간혹 업무상으로 가던 유흥 주점에서 돈을 주면 웃어 주고 술도 따라 주는 젊고 예쁜 여성들의 접대 서비스로 위로를 받는다. 아내와 달리 자기가 술에 만취하면 할수록 더 좋아하고, 옆에서 술잔도 받아 주고 허세 섞인 말에도 도리어 추켜세워 주는 여성들의 접대에 중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남편들은 돌이키지 못할 실수도 하고 그것이 밝혀져서 가정에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남자들은 점점 더 '진상 남편'에 '혐오스런 아버지'가 되어 간다.


아버지 세대를 위한, 그리고 우리 남편들을 위하여

교회 공동체건 사회 공동체건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고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공통적으로 만들어지는 아버지상이라는 게 있다. 다소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직장·친구들·교회 가족들을 통틀어 앞서 설명한 케이스에 가까운 아버지들이 꽤나 많았다. 아마 내 주변 30대 중반 전후의 자녀들 중 상당수는 이와 비슷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을 법하다. (물론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또한 그런 아버지와 살아가는 자녀들은 대부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항상 힘들어했고, 담을 쌓고 살거나 매번 집안싸움으로 크게 번지는 일이 많았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는 자주 부모를 위한 육아 학교 같은 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물건 하나를 사도 사용 설명서란 게 있고 자동차를 몰 때에도 면허 시험을 패스해야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하고 위험할 수도 있는 아이를 키우는 법은 왜 의무적으로 가르치지 않는지 지금도 여전히 의아하다. 동일하게 나는 우리 세대의 아버지를 위한 사용 설명서나 면허 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내가 설명서를 쓰게 된다면 세 가지를 반드시 넣고 싶다. 첫째는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존경한다는 표현을 자주 하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그 마음 깊숙한 곳에 아내로부터 자녀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설령 그런 자격이 없는 상황에서도 인정받고 싶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지인들에게 받고 싶은 욕구가 있으므로, 존경한다는 말을 자주 표현해주는 게 남편이 가정일에 참여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둘째는 관계 중심적 대화 시간을 만들라는 것이다. 남자는 피하려고 하겠지만, 그럼에도 깊은 대화 시간을 자주 갖는 게 좋다. 남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자신의 고민들을 가정에 털어놓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때때로 말동무, 술친구가 되어 주어서 가정이 한 남자의 꿈과 이상, 그리고 현실적 고민과 상처들을 들어주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만의 안식의 동굴로 들어감을 허락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대다수의 남자는 자기만의 동굴로 숨는 시간이 있다. 그것은 심리적 곤경에 처해 있거나, 중대한 결정을 두고 고민하는 경우거나, 혹은 지나치게 에너지를 소모하고 잠시 쉬기 위해 숨는 시기일 수도 있다. 이 시기 대다수의 아내는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느껴서 오히려 조바심을 내기도 하지만, 남편은 아내와 지인들에게조차 생각이 정리되어야만 꺼내어 말할 수 있다.

우리네 가정은 참 문제가 많다. 문제가 많은데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만 많고,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하거나 어려움을 감수하고 헌신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한 번쯤 아버지 세대의 문제를 돌아보고 그 풀리지 않을 법한 실타래를 풀어 보자는 의도이다. 우리 세대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정서와 보수성, 가정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정서의 이면을 살펴보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세대 간의 갈등의 폭을 줄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호하게 아버지 세대만을 탓하며 그들과 소통 자체가 불가하다는 섣부른 판정을 내리기보다는, 서로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노력해야 할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2010/04/12 00:18 2010/04/12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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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결혼하다
아내와 결혼한 지 6년째다. 흥미로운 건 내가 사랑한 한 여성과 결혼 후에 그녀가 '아내'라는 호칭을 얻게 되자, 두 사람이 싱글일 때는 전혀 고민해 보지 않았던 일들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혼 후 아내에게 생긴 변화 중 하나는 예전엔 명절 때 자기 집에서 편히 드러누워 음식을 끼고 TV를 보며 지냈는데, 갑자기 남의 집에 옷을 차려 입고 제사 음식까지 만들어 가야 하게 된 것이다. 우리 집안 손자들 중에 내가 첫 결혼이었으므로 제사 때 일을 거들 여자라고는 내 어머니를 포함하여 큰어머니, 작은어머니들 외엔 유일한 며느리인 내 아내뿐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큰집이나 우리 집이 가부장적인 정서가 비교적 적은 편이라 대부분의 일을 서로 나눠서 했고 설거지도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분위기라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없었지만, 명절에 정작 지방에 있는 아내의 집에는 가지도 못한 채 얼굴도 익숙지 않은 큰아버지 댁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내를 심정적으로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결혼한 첫 해에, 자기 부모님에게조차 밥상 한번 변변히 차려 본 적 없는 아내는 얼굴도 모르는 남편 친척들의 명절 음식을 하다가 서러운 마음에 급기야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말았다! 난 가부장적이지 않은 현대 남성이라 여겼지만, 오랫동안 명절 음식 차리기에 지친 우리 집안 어머니들의 일을 덜어 드리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그 노동의 일부가 아내에게 넘겨지는 것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내와의 긴 대화 끝에 나는 이 일이 아내가 나를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제사 음식을 만드는 일은 내가 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명절에 처가에 못 가는 문제는 다행히 우리 집이 신정에 제사를 지내는 터라 구정에는 일순위로 처가에 가기로 했다. 이렇게 이 의무가 남편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자 감사하게도 아내는 점점 자발적으로 나를 '도와주게' 되었다.



'아내'라는 이름 아래 생겨난 차별들
명절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아내'라는 이름 아래 생겨난 불합리한 상황들은 이후에도 자주 발생했다. 솔직히 나는 내가 알던 것보다 나 자신이 더 꽉 막힌 마초라는 사실을 결혼하고 나서 절절하게 깨달았다. 불합리하게 여겼던 호주제는 다행히 2008년에 없어졌지만, 가사 노동의 분배부터 양가 부모님 용돈 문제까지, 화두가 될 때마다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때마다 나는 나의 잘못된 생각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함을 깨달았다. 집 청소를 미루던 나의 습관에서부터 아내가 우리 집 대소사를 챙기길 원하는 어머니의 잦은 전화까지. 한국 사회에서 남편으로서 아내가 결혼 후에도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가장 큰 사건은 아내가 임신을 하고 생겼다. 우리 부부에게 새 생명이 생겼다는 기쁨에 하염없이 들떠 지내던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집안의 '돌림자'를 넣어서 말이다. 그 얘길 들은 아내는 겉으로 보기에도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내는 남편 성을 따라 아이 이름이 정해지는 것도 모자라서 이름 석 자 중에 두 자가 남편 집안의 룰을 따르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10개월 동안 정성스레 품었다가 해산의 고통 후에도 육아의 대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아내 입장에서, 자기 자식의 이름에 자신의 어떤 '의도'도 반영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속상할지 공감이 되었다. 며칠 동안 잠을 설치며 고민한 끝에 그냥 아내와 둘이서 한글 이름을 지어 주기로 결정했다. 아버지가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버럭 화를 내실 일이 눈에 선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아내를 배려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이야기를 해야지 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이 지은 아이의 이름을 알려 주었는데 다행히도 그 이름을 아내가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당시에 무뚝뚝하기만 한 아버지가 아내에게 평소 안 주던 용돈을 주신 것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다행히 결과적으로는 아내가 부자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을 막아 준 셈이 되었지만, 나는 이 일을 통해 우리나라의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에서 아내의 존재감을 살려 주려면, 미시적인 현장에서 그 구조 속에 얽혀 있는 다른 가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부장적 사회적 굴레를 넘어서

아내와 살면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매 순간 얼마나 잦은 차별을 경험해야 하는지를 실감했다. 물론 이런 생각의 흐름을 하염없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앞선 세대에 여성들이, 아내들이, 어머니들이 당한 불합리한 차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어머니 세대에는 이 모든 불평등과 불합리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던 세대가 아니던가. 내 어머니와 큰어머니, 작은어머니는 우리 집안에 시집왔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명절에 처가엔 자주 가지도 못한 채로 음식을 만들었고, 자식들 이름을 남자 집안의 족보에 따라 지었다. 돌이켜 보면 명절에 어머닌 항시 나를 업고 보따리를 들곤 했고, 아버진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거나 뒷짐을 지고 유유히 담배를 태우시고 먼저 걸음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자식과 가정에 대한 어머니 세대의 노동과 헌신은 지금의 내 상식 선에서는 노예 수준의 '그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떤 모성애 내지는 여자의 지고지순함 혹은 현모양처라는 표현으로 미화하는 것에 나는 불편함을 느낄 정도다. 이 시대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미시적인 시각으로 볼 때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의 최대 피해자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의 문제는 이전 세대 차별과 불합리함의 악순환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다수의 어머니들이 자신이 당한 고통을 자신의 딸이나 며느리에게 그대로 되갚아 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닐 게다. 오히려 자신이 경험한 가부장적 질서에 익숙해진 많은 어머니들은 그 질서는 지키되 그 강도를 약화시키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다. 흔히들 하는 말로 자신이 며느리에게 시키는 것들은 시어머니에게 받은 것의 반의 반에도 안 된다고 하는 말이 그런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대가 다른 아내 세대는 부모 세대의 배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가부장적 질서 자체가 불합리한 데다가 세대 차이가 나는 윗세대의 방식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하다. 결국 가부장적 질서의 고착화가, 여성이 도리어 여성을 억압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세대의 아내들을 보며,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나의 아내를 보며, 많은 고민과 대안을 찾고자 여전히 애쓰고 있다. 결혼 연차가 높아질수록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 '아들'이자 '남편'인 내가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작은 일부터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된다. 나의 고민과 대안들이 내 세대에서 세대 간의 악순환을 완전히 끊지는 못하더라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나와 많은 남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짐에 앞서, 이 두 세대의 여성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서로의 관계성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존재가 되면 좋을 것 같다. 아내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가정을 위해서도. 그리고 이런 변화들이 종국에는 가부장적 사회의 부조리를 푸는 아래로부터의 변혁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2010/04/12 00:17 2010/04/12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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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의 경험

나도 그렇지만 또래 친구 부부들도 육아에 정신이 없다. 만나면 나누는 대화도 이제는 아이들 이야기가 반 이상이다. 한번은 친한 친구 한 녀석이 지난 주말에 놀이터에 나가 아이랑 노는데 자기 애보다 몸집이 큰 애들이 괴롭히는 걸 보고 있자니 화가 나더라고 이야기했다. 애들이 다 그렇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하며 웃었지만, 사실 나도 요즘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 애지중지하는 내 아이를 다른 부모가 막 대해서 울린다거나, 다른 아이들이 내 아이를 때려서 울리면 애처롭기 그지없다. 솔직히 내가 대신 맞아 주고 싶은 심정이랄까. 이러다 아이 버릇 나쁘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매번 자주 조심하게 되지만, 아이가 없었을 때 자신했던 것만큼 아이를 강하게 키우는 게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뿐이 아니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던 TV 채널에서, 유아 살해 사건이나 고질병에 걸린 영· 유아, 전쟁 중인 나라에서 다치는 아이들 보도를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 아이의 부모가 되었을 때 갖게 될 심정적인 아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전라도 조교에 대한 기억

돌이켜 보면 대학 새내기 시절 실험 수업 조교는 유독 무서웠다. 실험에 사용하는 약품이나 시편, 장비들이 위험했기 때문이었는지, 혹은 단지 고가의 장비들을 망가뜨릴까 봐 노심초사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자한 교수님의 이론 수업이 끝나면 실습 조교가 들어와서는 '군기'를 잡곤 했다. 그중 유난히 물리학 수업 조교가 특이했는데, 우리는 그를 '전라도 조교'라고 불렀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그를 '전라도 사이코'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수업 시간 중에도 실습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간혹 길게 했다. 그것은 약간 악순환 같아 보였는데, 특유의 사투리를 쓰면서 고향에서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할 때면 학생들이 하나둘씩 수근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눈치를 살피던 그는 점점 더 흥분하여 우리들에게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전라도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거란 말을 되뇌곤 했다. 우리는 그나마 부족한 실습 시간에 대수롭지 않은 일로 자꾸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그가 이상해 보였다. 우리는, 아니 나는 전라도 조교인 그가 많이 이상해 보였다.

 

 

5·18이 뭐길래

지난 5월18일은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었다. 기념행사에 대통령도 불참했고 끝날 때 방아 타령을 연주한다 하여 논란이 일기도 한 이날은, 벌써 3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젊은 세대 다수가 5·18에 대해 모른다는 기사가 간간이 나올 때면 마음이 답답하다. 다행히 몇 년 전 5·18을 직접 다룬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로 인해 대중들은 좀 더 가까이 5·18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극장을 나오면서 '우리나라에서 정말 저런 일이 있었냐'며 눈시울이 붉어진 학생들이 다소 놀란 듯이 대답하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난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어린 나이에 경상도에 살면서 겪은 80년대는 우리나라에 빨갱이가 있다더라, 학생들이 과격한 시위를 한다더라, 전라도 사람들이 유별나다더라,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지역감정이 나쁘다더라, 김대중 씨는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라더라,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남한이 빨갱이 나라가 된다더라 하는 정도의 이야기들이었다. 때론, 대부분의 말들이 정부가 유포한 잘못된 이야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스포츠 신문을 대하듯, 사실 그런 면이 있으니까 그런 소문이 떠도는 것 아니겠냐고 이야기하면서 어느 정도는 긍정을 하는 느낌을 자주 받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광주'를 모르고 자랐다.

 

 

5·18, 지옥 같은 기억들

5·18은 알다시피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 운동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 보안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하나회가 12·12 사태를 통해 정권을 탈취하고 개헌을 막기 위해 전국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980년 5월 17일에는 광주에 2개의 대대가 진주했고, 18일 오전 10시에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시작된 비상계엄 반대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시위는 점차 시내 중심가로 퍼졌고, 시위가 거세지면서 공수 부대원들이 시위대와 시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강준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학생들은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대치 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돌격 앞으로' 하고 명령을 내렸고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파고들면서 곤봉을 휘둘렀다. 그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 곤봉으로, 이를 맞은 몇몇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 차 위에서는 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즉시 발가벗기고 굴비 엮듯 엎으리게 하고는 계속 난타했다. … 공수부대 병사들은 …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 대며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1권' 중,122~123쪽)

 

"당시 시민군에게 붙잡힌 공수부대원은 광주에 배치받기 전 3일 동안이나 식량 배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기 직전에는 소주를 공급받았다고 증언했다. … 사람을 죽인 건 순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잡혀 온 시민들을 대상으로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 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오줌 먹이기, … 송곳으로 맨살 후벼 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트기, 손톱 밑에 송곳 밀어넣기 등과 같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같은 책, 127~128쪽)

 

"도청에서 철수한 공수부대는 …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서 인근 지역에 장난삼아 총질을 가했다. … 이 학살에 대해 송기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농부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중학교 1학년짜리를 오리 사냥하듯 쏘아 죽였으며, 배수관 밑으로 숨어 들어가는 여인에게 6발이나 총을 쏘아 죽이고, 도망치다 벗겨진 고무신을 줍는 국민학교 4학년짜리한테 10여 발이나 총을 갈겨 몸뚱이를 걸레로 만들었다.'" (같은 책, 148쪽)

 

 

역사가 내 삶으로 들어오기까지

내가 처음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새내기 때의 그 '전라도 조교'가 떠올랐다. 그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피해 의식, 자기와 자신의 부모님들이 경험한 일들을 너희가 겪는다면 알게 될 거라던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글자로 접한 그 사건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땠을까. 만일 내 아버지가 내 앞에서 피를 흘리며 구타를 당했다면, 만일 내가 그 지방에 살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 조교보다 더 멀쩡한 모습으로 살 수 있었을까. 아내와 나는 지금도 내 아이가 잘못되지 않을까 지나치게 걱정하고 조바심을 낸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하나의 객관적 사건이 아닌 관계적 아픔으로 다가온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감정 이입이 된다.

 

그렇다면 5·18은 끝난 사건인가.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뒤에서 자주 듣던 말 중 하나는 '저 사람 고향이 전라도래'였다. 전라도가 고향인 지인 중 하나는 아버지가 아들이 차별받을 것을 걱정하여 주민등록상의 주소지를 서울로 옮기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얼마 전 강준만 교수 책을 읽고 약간 흥분하여 서평을 쓴 적이 있었는데, 댓글을 쓴 어떤 이는 자신이 전라도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전라도 사람들은 더 이상 광주를 언급하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차별을 받는 것도 연민의 눈으로 대하는 것도 피한 채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처럼 상처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우리 역사의 한편이 너무 답답하다.

 

우리는 너무 역사에 둔감하다. 냄비 근성으로 대변되는 초고속 사회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과거를 잊은 채, 혹은 모른 채로 현재를 사는 일에 너무 익숙하다. 때때로 역사가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의 한 사건들은 우리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일그러진 방향들이 지속적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것을 먼저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이웃과 사회를 이해하는 길이며 내 삶으로 들어온 역사를 끌어안는 길이다.

2010/04/12 00:14 2010/04/12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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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대 담론에서 미시적 일상으로

90년대 중반인가, 내적 치유와 상담 사역이 한차례 한국교회를 한 번 휩쓸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영향이 크게 줄진 않은 것 같지만 그때처럼 관심이 컸던 적은 없었던 듯하다. 내적 치유나 상담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한국교회가 그간 조직의 논리에 따라 무조건적인 순종과 헌신을 강요한 나머지 사역자 개개인들의 미시적 삶의 문제들을 등한시하고 내면의 문제를 방치한 것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무엇보다 조직과 일 중심의 사역에서 관계 중심적이고 인격적인 교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는 정권 교체 이후 민주화 투쟁이 수그러들었고 포스트모던 담론이 대중들에게까지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조직이나 거대 담론에 대한 관심이 점차 개인과 미시적 일상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문제들, 이를 테면 과거 부모로부터 받은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과 자신의 기질, 개인 영성의 성장 등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부작용도 있었다. 반대급부적으로 생겨난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기독 지성 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과 같은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 주었고,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오히려 신앙적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기현상마저 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미시적 영역의 결핍에서 출발한 내적 치유와 상담, 개인 영성과 일상적 영역에 대한 관심이 교회 내에 끼친 긍정적인 면들은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2. 진보적인, 일상의 '귀남이들'

생각해 보면 겉으로 보기에 진보적인 이들 중에서도 일상생활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경우가 참 많았던 것 같다. 비교적 여러 교회를 전전했던 나는 예배가 끝난 식사 자리에서 여성도들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주변을 정리할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목사님들도 보았고(사실 대부분이 그랬다), 교계에 좀 더 깊이 발을 들여놓은 후 평소에 글이나 책을 통해 호감을 갖거나 존경했던 분들도 평상시에는 주변에 지나치게 가부장적이거나 마초 기질을 보이는 등 기대 이하의 행동을 보이는 일도 있었다. 대개 이런 경우는 평신도가 시중들고 목사나 신학 교수님은 대접받는 것이 익숙해 보였는데 결국 교회가 세상 조직 문화와 다를 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이 우리 세대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유년기 시절을 돌아보면 명절에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누나를 한 손에 잡은 채, 다른 손에는 보자기 짐을 들었던 반면 아버지는 코트에 손을 넣고 유유히 앞서 가던 모습이 가끔 생각난다. 나 또한 집에서는 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는 '귀남이'로 자랐다. 어머니는 세탁기 하나 없이 손빨래를 하다가 급기야 허리 디스크로 쓰러지셨는데, 그제서야 나도 집안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동안 나는 왜 집안일을 안 했을까.' 돌이켜 보면 남자가 집안일을 돕는다는 것에 나도 모르게 거부감을 갖게 된 것 같다. 주변에는 꽤나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진보성을 드러내는 이들 가운데 여전히 일상적 '귀남이'들이 많다. 이는 가부장적인 정서로 똘똘 뭉쳐진 우리 세대가, 진보적인 거대 담론의 습득과는 별개로 일상은 제자리 걸음인 경우가 많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3. 기독교 관조주의의 언행 불일치

한때 교회에서 유행했던 용어 중에 '기독교 관조주의'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던 보수적인 신앙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용어로, '하나님나라'로 대변되는 기독교적 이상(理想)은 세상에서의 어떤 구체적 행동 너머에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물론 살면서 관조적인 자세로 한 걸음 물러서서 현상이나 상황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객관화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관조적 자세가 일상적으로 겪는 많은 일들을 방관하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당시에 청년들의 입에서조차 이러한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 대다수의 교인들이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득도한 사람처럼 매사에 수수방관하는 경우가 과하게 잦다. 마치 너무 천국의 삶을 동경한 나머지 현세의 희로애락을 무의미하게 느끼는 사람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런 부류일수록 일상 영역에서 기성세대의 보수성이나 가부장적 정서와 같은 인습에 얽매인 현실을 부지불식간에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젖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입에서 내뱉는 말은 하늘 끝에 올라가 있는데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을 보면 저질인 언행 사이의 불균형이 생기게 된다. 신앙적으로 보면 이런 언행 불일치는 세속주의적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이원론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4. 거시 영역과 일상 영역의 통합을 위한 글쓰기

어릴 때부터 매사에 약간은 방관적인 기질을 가진 나는 회심을 경험한 이후로 '거시적 영역'에서의 정치와 사회 참여, 사회봉사에 대한 관심을 가짐과 동시에 '일상 영역'에서 익숙하게 여겼던 내 안의 차별 의식이나 가부장적인 정서, 말만 앞세우고 실천을 게을리하는 등의 잘못된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자주 스스로를 돌아보곤 한다. 내 오랜 경험상 이 두 영역이 따로 놀아도 큰 고민이나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이유에서다. 특히 일상 영역은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공인의 위치에서는 좀처럼 사람들에게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은 고사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수준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거나 때론 치밀하게 숨기거나 속이면서 살아갈 확률이 높다. 나 또한 살면서 자주 그래 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정치, 사회 문제에 무심해지고 일상에 파묻힌 채 삶의 큰 방향성을 잃어버리는 것 또한 문제이다. 그렇다. 이러한 통합 혹은 균형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영역의 통합은 나의 지속적인 고민거리이자 관심거리며 지금은 우리 기독인들이 이 두 영역의 통합에 대해 좀 더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또한 이는 앞으로도 내 글쓰기의 주된 화두가 될 것이다. (계속)

2010/04/12 00:13 2010/04/12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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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회 참여의 역사
기독교 내의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단순한 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개 복음주의권에서 통용되는 이 단어는 항상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라는 두 개의 축 혹은 새의 양쪽 날개 중 하나로 이해하여야만 한다.

물론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는 역사적 흐름이 있다. 종교 개혁 시기부터 사회 참여, 세상의 변혁과 같은 문제가 신학적으로 잘 정립이 되어 왔고,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변되는 제1차 영적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을 통해서도 그 흐름이 이어진다. 그러나 제2차 대각성 운동에 이르러 기독교는 감정과 체험에 치중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영향보다는 개인의 영혼 구원에 치중한 경건주의적 신앙의 형태로 변모해 갔고, 이로 인해 복음주의 역사 속에서 빈번히 복음과 사회의 연결 고리가 느슨해지거나 단절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오랫동안 사회나 정치, 학문에 대한 관심이 배제된 이런 부정적 영향이 개신교 전통 속에서 지속되어 오다가, 20세기 중반 <Christianity Today>의 편집장이자 풀러신학교의 초대 교수인 칼 헨리가 자신의 저서 <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에서 당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사회 참여를 선언함으로써 개인 복음 전도와 더불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이른바 '신복음주의' 태동의 시발점이 된다.

칼 헨리와 신복음주의의 태동은 기독교의 사회 참여라는 이슈에 크게 기여했고, 1974년 7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에서 채택한 '로잔 선언'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 사이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 대회는 10일간 지속되었고 150개 국가에서 2700여 명의 복음주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였다.) 이 선언은 전도와 사회 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전도와 사회, 정치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했다. 또 로잔 언약은, 사랑에서 나온 예수님의 전도(word)와 봉사(deed)를 이분화하거나 고립시킬 수 없음을 강조했는데, 당시 대회에 참여했던 조종남 박사도 "원색적 복음주의가 귀한 유산으로 간직해 오던 사회적 책임을 로잔 언약에 이르러 되찾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위대한 공헌'이라고 언급했다.

물론 로잔 선언에서는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의 관계에 있어 소위 '복음 전도의 우위성, 우선성'을 명확히 하였는데, 이는 사살상 사회적 책임보다 한 영혼 구원이 더 중요하며 순서상 우선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후 복음주의권의 지도자인 존 스토트가 예수님의 사역, 그리고 제자들의 사역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 사이에서 어떤 우위성도 발견할 수 없으며, 단지 이 두 주제는 신앙의 두 측면으로 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수정된 견해를 '마닐라 선언'에서 재차 강조하게 되는데,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이후 새가 양쪽 날개를 모두 사용하여 난다는 의미에서 '양 날개 이론'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결국 복음주의 내부에서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복음 전도의 한 가지의 방법이 아니라 동일한 신앙의 두 측면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신학적으로 정립된 셈이다.


기독교 사회 참여, 문제점들
이렇듯 역사적인 신학적 입장 정리를 살펴보았으나 실재로 기독교는 얼마나 사회 참여에 운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전반에 걸친 실천적 열매를 맺고 있는가. 존 스토트가 자신의 책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밝혔듯이, 정직하게 우리를 돌아볼 때 여전히 그 운동성이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역사 속에 그 흐름이 지속되어 온 기독교 사회 참여가 아직도 소원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1. 사례의 부족
단적으로 말해서 사례들이 희박하다. 외국의 경우(물론 대부분이 북미에 한정되어 있다) 1차 대각성 운동 시기에 부흥이 일어난 지역에 술집이 문들 닫았다는 류의 이야기나,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제 폐지 운동 정도만을 아직까지도 언급하는 일이 다반사이며, 우리나라도 기독교 세계관과 복음주의 신학이 정착한 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실상 사회 참여의 이상적 모델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국내에서 가장 사회 참여의 이상적 모델로 평가하는 사례는 1990년대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낙천낙선 운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정치인의 면밀한 조사와 함께 각각의 의원에 대한 낙천낙선 운동이 일반 시민 단체와 협조 체제를 구축하면서 그 추진력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 발휘되었다.

하지만 당시 협력 관계에 있었던 진보적인 시민 단체들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정치적 이슈들이 약해진 가운데 기윤실이 문화 영역에서 영화 <거짓말> 상영 금지 요청, 가수 박지윤의 <성인식> 뮤직비디오 방영 금지 운동을 전개하자 성적 보수성을 비판하며 돌아서게 되었고, 이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회 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소극적으로 대응함에 따라 기윤실로부터 교회개혁실천연대가 독립하는 등, 90년대 후반부터 그 운동성과 영향력이 상당 부분에서 수그러들게 된다.



2. 신학적 입장과 실천의 장 사이의 괴리감
또한 기독교가 사회 참여적인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다 하더라도 신학적 입장과 그 실천 사이의 괴리감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국에서의 신사 참배 문제, 군사 정권 아래에서의 조찬 기도회 참여, 한기총의 극우 편향성과 권력 친화적인 행보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바 있으므로 굳이 이 글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사례들에 덧붙여, 개신교 신앙의 선배이자 종교 개혁의 두 주역인 루터와 칼뱅도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만을 첨언하고 싶다. 최근에 교회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담은 김두식 교수의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루터도 칼뱅도 종교 개혁 과정에서 철저하게 세속 권력에 의존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 왕국은 구별된다는 신학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정치권력의 그늘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세속 권력인 독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토마스 뮌처의 반란이 시작되자 루터는 완전히 군주들 편으로 입장을 선회하여 무고한 농민들의 처형을 묵인했고, 심지어 반란자들을 죽이고 쳐부수고 목 조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영혼이 사탄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루터의 주장에 고무된 자들의 손에 7만 5,000여 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네바를 정치적으로 장악하여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칼뱅도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그노 전쟁을 통해 조국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획득하려 했고, 신학적인 반대파를 화형으로 제압했습니다. 정치권력과 손잡은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칼뱅이었지만, 정치적 기반 없이 투쟁에 나선 농민 반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있어서 기독교인이 현실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을 때 그 실천적, 입지적인 한계나 편향성으로 인해 오히려 세상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3. 실천을 주저하는 개신교
기독교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스탠리 하우어와스는 그의 책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에서 미국이 리비아에 있는 민간인에게도 폭격을 가했을 때 있었던 토론을 자세히 소개한다. 토 론에 참석한 한 학생이 하우어와스에게 그 의견을 묻자 그는 기독교의 응답은 바로 내일 아침에 리비아로 미국 교회가 1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얘길 들은 학생이 미국 정부가 위험 지역인 리비아에 비자를 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하우어와스는 정작 비자가 안 나와서 못 가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이러한 담대한 일을 감당할 사람을 세우는 교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글을 읽고 나는 한동안 충격에 사로잡혔다. 내 기억으로는 2003년 이라크 전쟁 중에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기독교인들이 '인간 방패'라는 이름으로 반전 평화 팀으로 평화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을 때, 그들의 모교회인 복음주의권 어느 곳도 파송해 주지 않아 전전했던 그들을, 아나뱁티스트(재침례교의 하나) 교회가 아무런 단서나 조건 없이 끌어안았던 일이 있었던 터라 더 충격이 컸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상황을 <뉴스앤조이> 주재일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유은하 씨는 편지 한 장만 들고 알지도 못했던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라크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여기 아니면 아무도 나를 이라크로 보내 주지 않을 거예요.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없나요.' (...) 이재영 간사는 아나뱁티스트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평화 운동가로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나 평화 운동에 대한 신념은 분명하다. 우리가 파송하지 않아도 그는 이라크에 갈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모든 이들이 '파송하자'고 회신을 보냈다. 캐나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들도 유은하 씨를 위해 기도하며 모금 활동을 펼쳤다. 유은하 씨는 든든한 기도의 동역자들을 만나 이라크로 향했다. (.. ) 전쟁이 끝나 생사의 문제가 부담이 안 되는 지금에야 비로소 다들 유은하 씨와의 관계를 들춰내고 있다. 유은하 씨는 분명 몸은 '복음주의 진영'에 있었지만 파송은 평화주의 교회로부터 받았다." (주재일, <뉴스앤조이> '유은하가 전쟁터로 떠난 이유는?')

당시 나는 처음 이 기사를 접했을 때 마음이 착잡했다. 사회 참여를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친정과도 같은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내쳐진 반전 평화 팀을,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흔쾌히 받아 주고 그들을 파송하고 진심으로 기도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리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몸소 실천한 재침례파 교회를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교파 정도로 평가 절하하는 것을 보면서, 문득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마친 후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인가"를 묻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글을 마치며
기독교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과거 신앙 선배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게도 20세기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사회 문제에 무심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신학적으로 그 입장이 정립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다행히 이제 우리는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의 두 영역에서 사회 참여를 배제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한쪽으로 처박아 두지는 않겠지만 과거 개신교의 역사와 한국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도 빈번히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고 오히려 세상의 논리로 사회 문제에 개입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일삼기도 했다. 또한 이라크 전쟁 당시 반전 평화 팀 사례와 같이 정작 나서야 할 때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용기 있는 행동의 장애 혹은 방해 요소가 되기도 했다.

글을 접으면서 나는 최우선적으로 한국교회가 더욱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표준 선(善)보다 더 부정부패가 많고 암암리에 세상과 결탁하고 세상의 부와 권력을 나눠 갖고 있는 한국 교회는 사회 참여 자체가 오히려 기독교 세속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한국교회가 주도권을 가진 중심 세력으로서의 사회 참여, 세상 변혁을 이끌기보다는 세속화한 세상을 견제, 비판하고 세상이 때때로 불의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바른 방향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압력 단체로서의 '참여'를 권하고 싶다.

세상 속에서 변혁의 중심 세력이 되었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앙 고백과는 별개로 실천의 장으로서의 세상 속에서 한계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압력 단체로서의 실천을 하는 것조차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더 복잡해지고 섹트화한 포스트모던 사회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분석하며 대안들을 고민함과 동시에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실천들을 실행해 보는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원론적으로 옮은 말들을 세련되게 되뇌이지만 정작 실천의 장에서는 방관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멈추고, 겸손하게 우리의 할 바를 작은 실천 영역에서부터 성실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 사회 참여의 모습이다

2010/04/12 00:11 2010/04/1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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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지성과 삶의 일치를 향하여
/ 김용주


공부기계, 대학에 들어가다!
중 고등학교 때 나는 이른바 모범생 계열의 학생이었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누리게 되는 혜택이 솔직히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럴수록 친구들 사이에서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 사물함은 종종 반 친구들에 의해 심하게 찌그러져 교실 바닥을 나뒹굴었으니 말이다. 점수와 등수로 학생을 평가하던 고등학교 시절, 나는 입시를 위해 친구들을 포기했고 불편하기만 한 학교생활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기나긴 입시 교육을 마치고 1995년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전교 등수가 나보다 한참 뒤였던 반 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너처럼 공부해도 나랑 똑같은 곳에 입학한 걸 보니 고등학교 때 너처럼 공부 안 하길 잘했다”며 비웃었다. 그의 빈정거림에 번번이 짜증이 났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친구와 같은 종착역에 내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이젠 모든 게 끝났으니 털어 버리자고 마음을 추슬렀다.


처음엔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이 신기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느슨해졌다. 여전히 주기율표를 외우고 물리학과 각종 역학들을 배워야 하는 수업은 지루하기만 했다. 나는 공부에 지친 새내기였고 공부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거의 매일 포켓볼을 치고 맥주를 마시다가 밤늦게야 집에 들어가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그 생활도 조금씩 지겨워졌다. 시간은 넘쳐나는데 딱히 할 일은 없고 친구들과 어울려도 공허한 마음만 커지는 게, 은퇴한 노인이 된 기분이었다. 내 인생의 종착역은 대학이었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기독교 세계관을 접하다
10 년도 넘은 과거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건, 대학을 처음 들어갔을 때의 혼란했던 상태를 독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어서다. 지금도 여전히 시행착오와 혼란, 그리고 무력감을 경험하지만 내 삶에서 그때만큼 혼란스러웠던 시기는 없었다. 대학 공부에 열심을 내거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여력이 없었던 내가 다시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기독교 세계관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공 허함을 달래 줄 무언가를 찾고 있던 차에 교회 목사님이 한 캠퍼스 선교단체를 권해 주셨다. 그곳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처음 접했고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신앙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서 머리에 금빛 고리를 달고, 성가대가 주일마다 걸치는 하얀 옷을 입고,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줄 알았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조차도 나에겐 다분히 형이상학적이고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망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신학과 철학 책들을 공부한 후 기독교를 버리고 교회를 떠나신 나의 아버지의 영향으로 지적 성실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나는, 지성의 사용이 오히려 신앙을 견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됨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금 학문 연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과 더불어 역사와 교회사, 신학 서적들을 스펀지가 잉크를 빨아들이듯 닥치는 대로 읽어 댔다. 건성으로 읽던 성경은 깊이 연구할수록 매력적인 책으로 다가왔고, 성경의 ‘난제’에 부딪히면 결론이 날 때까지 두문불출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전공 이외의도 다양한 수업을 들었고 그때마다 조금씩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고민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필독서와 참고서적은 물론 복음주의권 책들을 병행해서 읽었고 그것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물론 A+를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종교적 시각을 드러내는 글은 처음부터 평가 절하되기 일쑤였다. 참고서적에 기독교 관련 책들이 포함되는 것 역시 학문적 신뢰도를 낮추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수업 분위기와는 별개로 신앙과 학문의 통합된 관점을 갖는 훈련들이 지금의 내 신앙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철학과 사회학, 인문학 고전들과 전공 분야의 책들을 비롯하여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룬 책들까지 두루 읽었는데, 그때부터 대학생으로서 캠퍼스와 한국교회, 나아가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사회참여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는 이후에 기독매체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기독학생연합회나 기독총학 진출모임, “복음과상황” 독자모임,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전히 캠퍼스에서 학업과 신앙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기독학생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대학교를 전도의 대상이자 영적 전쟁터로만 인식하여 학업보다는 기독공동체 활동에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기독공동체 내에서 인정받는 리더들이었다. 이들은 신앙과 학문을 대립구도로 설정한 후 학업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그것이 신자의 ‘고난’이자 포기해야 할 ‘이기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른 리더들은 지금 함께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는데 시험 기간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시험공부를 포기하더라도 기도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의무이자 기쁨이 아니겠는가? 시험 전날 공부를 포기하고 캠퍼스 예배와 아침 기도회에 참석했더니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간증하는 학생들이 실제로 많이 있었다.


삶의 변화를 향해
나는 대학 졸업 때까지 성경은 열 권 정도, 책은 대략 천 권 정도를 읽었다. 부끄럽게도 그때는 자주 나의 독서량을 자랑하고 다녔는데, 지식의 양보다는 인격 성숙과 실천적 삶의 열매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절감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부족한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내게 기독교는 교양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백화점에서 심사숙고하여 고른 명품 청바지처럼 내가 선택한 종교가 나를 빛내 주길 내심 바랐다. 하나님을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여기지는 않았지만 착하고 바르게 살면 보상을 해주시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기독 지성이 내 안에 싹트면서 신앙은 나를 변화시켰다.


대학 시절, 타일공장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는데 생색내기를 좋아했던 나는 한 집회에서 낮아짐을 훈련하기 위해 공장에 간다고 간증했다. 사실 공장 일은 군복무를 대체하는 것이었고, 사장님이 아버지 친구 분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편한 곳이었다. 하지만 공장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예상치 못한 이질감이 있었다. 대화중에 그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가 나올 때면 최대한 아는 만큼 설명해 주려고 애썼는데, “그래, 너 잘났다”라고 호통 치는 직원들의 비난과 따돌림으로 인해 결국 3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에 나는 공장 이야기만 나오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그들을 비난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어렸고 사회 경험도 없었으며 교만했다. 기독교 세계관을 접하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당돌하고 어설프고 어리석었는지 인정하게 되었다. 의도하지 않은 변화였다.


시간이 흘러 다시 군복무를 위해 행정직 공무원의 행정 보조로 일할 때였다. 여느 때처럼 한 공무원이 잔심부름을 시키려고 날 불렀다. 다른 일들로 정신이 없던 나는 죄송하지만 다른 급한 일이 있다고 말했는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내 얼굴을 향해 던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날아오는 신발을 한 손으로 잡아냈고, 신발을 가져가 무릎을 굽힌 채 태연히 그의 발 앞에 내려놓고는 조용히 사무실을 나왔다. 신기하게도 그날 나는 그의 모욕적인 행동에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들은 나를 예전보다 더 잘 대해 주었고 신발을 집어 던진 사람을 제외한 직원들과 더욱 친해졌다.
공장에서 악동이었던 내가 이제는 겸손한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날 이전에는 한 번도 나에게 악한 마음을 품은 사람을 조건 없이 용서해 본 적이 없었다. 겉으론 참았어도 마음으로 살인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날 ‘신발 사건’을 계기로 내 마음의 변화를 체감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직장과 소명
CCM 가수를 꿈꾸기도 하고 미디어 비평에 흠뻑 빠져 신문방송학과로 전과 계획을 세우기도 하던 나는, 지금 자동차 연구소에서 부품 설계 업무를 하고 있다. 지금도 종종 지인들은 내게 설계가 적성에 맞느냐고 묻는다. 전공이 싫었던 건 아닌데 졸업을 앞두고는 기독교 단체 주변을 기웃거렸었다.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그런 일이 더 신앙적이고 가치 있어 보였나 보다. 마지막까지 전공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 졸업반이 된 후, 문득 4년 동안 공부한 전공을 살리지 않겠다고 결정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부모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으면서 4년간 써먹지도 않을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전공 살리기는 대학원 생활을 거쳐 자동차 연구소에서 설계를 하고 있는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가능성 있어 보이는 일들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말로 논리를 세우는 일들을 곧잘 했던 것 같다. 창피하지만 때로는 실행해 보거나 경험해 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도 마치 겪어 본 양 과장을 하기도 했다. 난 가끔 내가 공대생이 아니었다면 더욱 허풍이 세져 과장법에 능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내 본성이 그랬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소한 것들을 꼼꼼히 챙기고 책임감 있게 마무리 짓는 데는 서툰 사람이었다. 지금 나는 자동차를 구성하는 2만 개의 부품 가운데 한 시스템을 설계하면서 지성적 성실함에 대해 배워 가고 있다. 특히 말단 연구원 자리에 있으면서도 마치 CEO라도 된 것처럼, 큰 방향을 설정하고는 사소한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내 모습을 날마다 직시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직업이 소명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내 직업은 공학에 호감을 느껴 전공으로 선택한 데 대한 책임으로 시작한 것이었고 솔직히 아직도 확신은 없다.


전공과 신앙에 있어 좀더 거창한 통합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두 가지 고민이 있는데, 첫째는 앞서 말한 신앙과 전공, 신앙과 업무의 통합 문제다. 효율성과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서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신앙과 업무를 아우르는 적용점을 찾기란 참 어렵다. 가끔은 전공 분야에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채 의욕만 앞세우는 기독교인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신앙적인 잣대로 자신들의 분야와 조직을 성급하게 비판하면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이제야 조금 설계에 익숙해진 경력 5년차의 설계자이니 말이다.


둘째는 환경 문제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 문제다. 소형차의 가격을 낮추기 위한 부품의 원가 절감 방안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낸다거나 연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 혹은 부품 업체에서 제조 공정상 폐기물이나 폐수들을 줄일 수 있는 재질과 공법 연구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만일 부품 설계자가 아닌 차종 프로젝트 기획자라면 단품을 넘어 좀더 거시적인 영역에서 이런 방향들을 추진해 갈 수 있을 듯하다.


윤리적 문제
기 독 지성을 이야기하면서 첨언하고 싶은 부분은 윤리적인 문제다. 석사 논문을 마칠 즈음 최종 발표를 앞두고 나는 논문에서 제안한 방법의 효율성 여부를 판단하는 압축률에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류가 수정된 방법은 그간 발표된 논문보다 압축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발표가 한 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교수님께 사실대로 말하면 졸업을 못할 게 뻔했고, 만약 이 논문 주제로 개선된 결과를 얻을 수 없다면 다음 학기 졸업도 기약할 수 없었다. 이미 직장은 최종 면접까지 합격한 터라 더 죽을 맛이었다. 간혹 논문에 수치를 조금씩 고치는 경우를 봐오던 터라 대충 임기응변으로 이 상황을 넘기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추후에 발견된다 해도 석사 논문에서 발견된 수치 오류를 누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까 싶기도 했다.


그날 저녁, 문득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멍하게 한참을 있었다. 석사 2년을 공부하고도 중요한 시기에 결과를 속여 가면서까지 졸업하려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결국 교수님에게 사실대로 말씀드렸고 일주일간 압축률을 개선하지 못하면 논문 발표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개선 방법을 고심한 지 사흘 째 되던 날 새벽에 손쉽게 개선이 되었다! 사흘 만에 개선할 수 있었던 것을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평생 죄 의식에 눌려 지냈을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직장에서 다른 팀과 적대 관계에 있거나 경쟁에 놓이는 경우, 그 팀의 직무 유기를 부각시키거나 우리 팀의 성과를 과대 포장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업무분장에 있어서도 나와 우리 팀의 책임을 축소하고 다른 팀을 최대한 이용해야 업무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다. 동료 간에는 어떠한가. 고과를 높게 받기 위해 연구 성과를 먼저 보고하려고 애쓰거나 아예 후배 사원의 기술이나 보고서를 가로채기도 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는 개인에서부터 팀간의 알력 다툼을 넘어 노조문제나 협력 업체에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와 같은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에까지 나아간다. 일보다 사람을 중시하고 성공보다 동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에 힘쓰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직장에서는 인정받지 않으면 쉽게 도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과 사회의 윤리적 문제들을 깊이 사유하고 작은 일부터 신앙적 양심에 걸맞은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시대의 대학생들에게
아 직도 신앙적으로 갈 길이 먼 내가 이 책을 읽을 대학생 독자들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건 어떤 결론을 내기보다는 함께 고민해 볼 것을 제안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디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몇 가지의 조언 아닌 조언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1. 관심 분야의 도서 목록을 만들라. 전공에 상관없이 호감이 가는 분야의 도서 목록을 만들라. 어떤 분야든 입문서와 개론서 그리고 참고서적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2. 두꺼운 책을 많이 읽어라. 군복무 중에 틈틈이 책을 읽던 내게 총무과장님이 했던 말이다. 나이가 들면 두꺼운 책을 볼 시간도, 그럴 능력도 떨어지게 되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으라고 권하셨다. 정말 맞는 말이다.


3. 책을 읽고 요약하고 자기 생각을 메모하라. 대학 이전까지 책 읽는 습관이 안 들어 있던 나는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남지 않아 고생을 했었다. 각 장별로 요약하고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을 A4 한 장 정도로 정리해 두면 한 권의 책을 머릿속에 넣어둘 수 있다.


4. 실천적 지성을 훈련하라. 지적 탁월함을 좇다 보면 자신의 인격이나 실천성과는 무관하게 유희적인 차원에 머무르게 되는 수가 많다. 노엄 촘스키나 제레미 리프킨 같은 실천적 지식인을 본으로 삼으라. 또한 지식을 자랑하기에 앞서 주변에 가까운 이들부터 어려운 이들에게 작은 것부터 몸으로 섬기는 것에 더욱 열심을 내자.


5. 진로를 정하면 최소 2년은 매진하라. 나는 회사에 들어간 첫날부터 후회가 밀려왔다. 다른 일이 더 좋아 보였고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그러나 1, 2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업무에 대해 명확히 알기 어렵다. 업무가 익숙해져서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는데도 후회가 된다면 그땐 즉시 다른 길을 모색하라.


6. 코람데오를 기억하라. 내가 결정한 모든 일들이 그분 앞에서 이루어짐을 직시하라. (끝)


**이 글은 <공부하는 그리스도인-도널드 오피츠/IVP> '부록3'에 실린 원고입니다.


김용주
대 학원에서 CAD 분야를 전공했고 학부시절 IVF, 한양대기독학생연합, 복상독자모임 활동을 했다. 지금은 현대기아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선행차량의 부품 설계 업무를 하고 있으며 그동안 <복음과상황>에 '도발적인 캠퍼스보기', '기독교세계관 운동에 대한 소고' 등을 연재한 바 있다.

2010/01/01 23:48 2010/01/01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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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 이재철 목사, 이단 되어 돌아오다

몇 달 전 지인으로부터 이재철 목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교단과 관련된 문제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솔직히 그냥 흘려들었다. 그렇잖아도 개인적으로 바쁜 요즘에, 교단 문제는 교단에서 행정적으로 알아서 처리하면 되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좀 흘렀을까, 얼마 전 이재철 목사가 속해 있던 예장통합 서울서노회가 기소위원회에 이재철 목사를 '이단적 행위와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책 <성숙자반>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은 자를 위해 기도조차 해줄 수 없다면 그것이 과연 복음인가. 그런 상황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따뜻하게 기도해 주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다"라고 한 구절이 이단적인 주장이라는 것이었다.

"차광호 목사 외 8인은 이재철 목사가 교단 헌법 제1편 제3장 6조와 제10장 4조를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제3장 6조는 '택한 자 외에 누구도 그리스도에게 구속받지 못 한다', 제10장 4조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본성과 믿는 종교의 율법을 좇아서 근면하게 생활할지라도 다른 아무 방법으로도 구원을 못 얻는다'는 내용이다." (<뉴스앤조이>, "예장통합 서울서노회, 이재철 목사 이단으로 고발")

내 눈을 의심할 만한 기사였다. 이재철 목사가 누구던가. 그는 교계의 주목받는 출판사인 홍성사의 발행인이었으며, 신앙 양서들을 저술한 탁월한 목회자가 아니던가. 개인적으로 이재철 목사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그가 2000년에 자신의 모교인 장신대 신학대학원 신앙사경회에서 사흘간(3/29~3/31) 행한 설교 <비전의 사람>을 들으면서부터였다. 당시 사경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을 통해 이재철 목사의 설교 마지막 날 참석한 이들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는 후문까지 듣던 터였다. 나도 그 설교를 테이프로 세 번이나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뿐인가. 이재철 목사는 주님의교회를 개척했을 때, 임기 이후에는 사임할 것을 약속했다가 10년 후에 약속대로 교회를 떠남으로써 교계의 본을 보이기도 했었다.

이 재철 목사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많은 내겐 이 상황이 의문투성이로 다가왔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사실 그런 적도 많았다. 교계를 깊이 알아가면 갈수록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조금만 그 사람을 면밀히 살펴보면 실망스러운 분들도 종종 있지 않았던가. 이재철 목사도 그런 부류가 아니었을까. 머리가 복잡하던 차에 이단 고발에 대해 이재철 목사 측에서 직접 해명을 했다.

"이에 대해 100주년기념교회는 보도자료를 내고 "이재철 목사는 <성숙자반> 291-292쪽에서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시고'를 근거로 '예수 믿지 않고 지옥에 간 사람들도 전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섣불리 속단하거나 확대해석'하는 것은 안 된다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사항이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라고 명명백백하게 밝혔다"며, "서울서노회가 거두절미하고 이재철 목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 말씀과 신조에 나와 있는 내용을 전적으로 부인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순한 의도의 사실 왜곡이자 음해가 아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경직 목사가 1974년 고 육영수 여사 국민장 영결식에서 한 안식을 비는 기도,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가 1979년 불교 신자였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장 영결식 때 개신교를 대표해 한 기도, 지난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 때 권오성 목사(KNCC 총무)의 기도와 명성교회(김삼환 목사) 성가대의 조가 등을 언급하며, "서울서노회에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경직 목사, 강신명 목사, 그리고 김삼환 총회장이 담임하는 명성교회도 '이단적 행위'를 한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뉴스파워>, "서울서노회, 이재철 목사 고발 파문")

물론 이단 시비에 대해서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판단할 일이겠지만 <성숙자반>의 문맥을 따져보더라도 "예수 믿지 않고 지옥에 간 사람들도 전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섣불리 속단하거나 확대해석하면 안 된다"고 설명하면서, 구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점을 밝히 드러내고 있는 그의 논지를 애써 무시하려는 서울서노회 측의 의도를 잘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서울서노회가 고발한 <성숙자반>이라는 책은 내가 알기로 초판 발행일이 2006년 3월로, 3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 그간에는 노회에서 이 책에 관심이 없었다가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셈이다. 노회는 왜 갑자기 이재철 목사의 책이 신학적으로 이단인지 아닌지가 궁금해졌을까. 내 상식선에서는 이단 문제로 고발이 시작되었다기보다는 다른 이유로 인해 뒤늦게 이재철 목사의 책에서 논란거리를 찾아내려고 한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든다. 



이단 혐의 이전부터 이재철 목사를 기소한 서울서노회

실제로 이재철 목사를 고발했다는 기소위원회는 이미 이단 시비 이전부터 이재철 목사를 기소했다. 처음 서울서노회가 기소위원회에 이재철 목사를 기소한 건 '장로 권사 호칭제'를 문제 삼아서였다.

" 예장통합이 애초에 문제 삼았던 것은 100주년기념교회가 하는 '장로 권사 호칭제'다. 100주년기념교회는 교회 등록 후 일정 기간이 지난 어른들을 장로와 권사로 호칭하기로 정했다. 100주년기념교회가 한독선연 소속이므로 자체적으로 운영위원회에서 정한 정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예장통합은 담임목사가 예장통합 소속임을 강조하며, 교단 헌법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노회 허락을 받아 교인 투표로 선출해야 하는 장로'를 호칭제로 만들어, 장로와 권사로 불리기 원하는 타 교회 교인을 유인해 수평 이동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서울서노회는 '장로 권사 호칭제'를 문제 삼아 이 목사를 기소했다." (<뉴스앤조이>, "이재철 목사, "양화진 지키기 위해 교단 탈퇴"")

이단 문제로 기소되기 이전에도 교단 헌법을 어기는 행위를 저지르다니, 이재철 목사가 문제가 많은 모양이다. 기사를 꼼꼼히 읽어보니 교회는 독립 교단 소속이라 예장통합 교단 헌법을 따를 필요는 없으나, 이재철 목사가 예장통합 소속이라 투표로 뽑지 않는 장로, 권사 호칭제도에 대해 서울서노회가 기소를 했고, 이러한 호칭제로 인하여 이재철 목사와 100주년기념교회가 장로, 권사가 되고 싶은 교인들의 수평 이동을 조장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특히, 서울서노회의 노회장인 차광호 목사는 이재철 목사가 장로, 권사 호칭제로 장로와 권사를 '쓰레기 모으듯 긁어모은다'고 말했을 정도로 가혹하게 비판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 양화진 연구원으로 있는 지강유철 선임 연구원이 해명을 한 바 있다.

"100주년기념교회의 장로, 권사 호칭제는 이재철 목사님이 독단적으로 시행한 것이 아닙니다. 2006년 4월 4일에 열렸던 (재)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제22회 정기이사회에서, 그러니까 통합 측 이사인 이종윤 목사님과 김삼환 목사님을 대리한 김상학 목사님께서 참석했던 바로 그 이사회에서, 100주년기념교회는 교회의 창립 경과, 교회 운영과 교인 호칭, 즉 장로, 권사 호칭제에 관한 것을 모두 상세하게 보고하였습니다. …… 2007년 3월 22일에 있었던 제23회 정기이사회는 …… 100주년기념교회 창립 등에 관한 전권위원회의 처리 결과를 보고한 그대로 가결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백보 양보하여, 예장통합 교단의 주장처럼 100주년기념교회의 장로, 권사 호칭제에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하다면 왜 통합 측 이사 목사님들은 2006년과 2007년의 이사회 때 문제를 삼을 수 있었는데도 침묵하셨는지요. 때문에 저는 2009년에 와서야 예장통합 총회나 6개 노회가 갑자기 100주년기념교회의 장로, 권사 호칭제를 문제 삼는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뉴스앤조이>, "예장통합 서울서노회장 차광호 목사님께 드리는 공개편지")

그렇다. 기사를 검색하면 할수록 나도 그 '저의'가 궁금해진다. 게다가 기사에 의하면 서울서노회 측은 6월 26일 이미 교단을 탈퇴한 이재철 목사를 기소하고 7월 16일에 출석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100주년기념교회가 독립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재철 목사가 예장통합 목사이기 때문에 장로, 권사 호칭 문제로 기소하려 했다면 교단을 탈퇴하는 것으로 사태가 매듭지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탈퇴라는 극약 처방까지 결심한 목사를 놓아주지 않고 2차에 거쳐 거듭 출석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결국 교단 문제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더욱이 서울서노회 측은 뭔가 논리가 다소 안 맞더라도 급하게 이재철 목사를 '처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의구심마저 들게 하고 있다. 사실 나는 그간 기사를 검색하면서 이미 기소 이전부터 그 의문들이 풀리고 있었는데, 최근 기소위원장인 장찬호 목사와 서울서노회 노회장 차광호 목사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그 이유를 해명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양화진 문제였다.

"장찬호 목사는 "기소 중에 탈퇴하면 면직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100주년기념교회가 양화진에서 손을 뗄 때까지 면직할 수 없다"고 했다. 장 목사는 "모든 문제가 양화진에서 시작했다. 이 목사가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양화진에서 떠날 것을 용단해야 한다"고 했다. 차 목사는 "이 목사가 양화진에 대해 꿍꿍이가 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재철 목사를 '이단'으로 다루기에는 '준비 미흡'")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

정 리하자면 서울서노회에서 이재철 목사를 기소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양화진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단 혐의가 됐든 장로, 권사 호칭제가 됐든 간에, 그 본질적인 문제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문제로 환원되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단 혐의뿐 아니라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재철 목사가 항복을 선언하고 양화진을 떠날 때까지 교단에서는 제삼, 제사의 기소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차광호 목사의 지적대로 이재철 목사는 양화진에 대한 무슨 꿍꿍이가 있으며, 그는 이재철 목사를 왜 양화진에서 떠날 것을 주장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5월 예장통합에서 양화진묘원과 관련하여 성명서를 아래와 같은 발표한 바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통합 총회장 김삼환)가 성명서를 통해 양화진묘원을 100주년기념교회(이재철 목사)에게 '전권 위임'한 것은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이사장 정진경) 기본 정신에 어긋난 처사라고 주장했다. 예장통합은 5월 6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유니온교회가 25년간 사용한 예배 장소 양화진묘원을 상실케 하고, 선교사 후손들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소란이 언론 매체에 오르내리는 것은 한국교회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키는 일"이라고 표명했다. 또한 유니온교회가 25년 동안 양화진묘원의 관리를 소홀히 한 부분에 대해서는 "유니온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개신교 20개 교단 및 26개 기독기관의 공교회적 연합인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의 책임이며 곧 한국교회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예장통합은 "한국교회의 발전과 묘원을 둘러싼 갈등의 근본 해결을 위해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개편되고 보완할 것"을 촉구했다." (<뉴스앤조이>, "통합, '양화진묘원 처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장통합의 주장대로라면 양화진묘원의 전권을 100주년기념교회에 위임한 것은 기본 정신에 어긋난 처사이며, 유니온교회가 그간 사용한 예배 장소를 상실케 하고, 선교사 후손들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등 문제가 많아 이를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개편, 보완할 것을 촉구한 것이며, 이러한 요구는 비교적 정당해 보인다. 예장통합의 주장에 대해 100주년기념교회에서도 기자회견을 하여 해명한 내용이 있지만, 이에 앞서 양화진에서 벌어진 갈등을 처음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선교사묘지공원'은 한국교회가 성지로 내세우는 곳으로,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해 헐버트와 헤론을 비롯해 16개 나라 206기의 선교사와 가족들이 안장돼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자랑스럽게 성지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한동안은 관리가 매우 허술했다.

<뉴스앤조이>의 이승규 기자에 의하면, 100주년기념교회가 들어오기 전 양화진은 그야말로 '종(관리는 하지 않고)은 없고 주인(권리만 내세우는)만 많은' 곳이었다고 한다. 선교사의 후손들이 속해 있는 유니온교회가 관리를 해왔으나 금전적인 이유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서, 그 사이 선교사가 아닌 이들의 묘들도 다수 발견되었고 대형 교회들의 기념비들이 들어서거나 묘지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등의 문제들이 나타났다. 게다가 기사에 따르면 양화진선교회에서 임의로 안내를 해주고 안내비를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양화진선교회'(대표 신호철 장로)가 이곳을 실질적으로 이용했다. 양화진선교회는 지난 2002년 설립됐다. 신호철 장로가 만들었고, 양화진을 찾는 이들에게 안내를 해주고 있다. 소위 말하는 '가이드'다. 또 양화진과 관련된 책도 여러 권 펴낼 정도로 이곳과 관련해서는 전문가다. 그러나 문제는 양화진선교회가 양화진 묘지를 이용만 하고 있지, 관리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묘지의 관리는 원칙적으로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와 유니온교회가 맡아서 해야 하지만, 이곳을 이용한 신 장로에게도 최소한의 관리를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양화진선교회를 통해 양화진을 찾은 사람은 3만 명이 넘는다. 신호철 장로는 2006년 5월이 되면 5만 명이 넘을 예정이라고 했다. 이들은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방문 예약을 받고 있고, 이들을 대상으로 안내를 해주고 있다. 안내에 걸리는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 물론 소정의 '안내비'도 받고 있다. 신 장로는 그 돈은 후원회비라면서도 구체적으로 얼마를 받는지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기자에게 '돈'과 관련된 얘기는 쓰지 말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그 누구도 돌보지 않은 양화진")

결국 양화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서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1980년 20개 교단과 26개 기관 및 단체가 참여해,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초대 이사장 한경직 목사)를 만들었고, 5년 뒤 '경성구미인묘지회'는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에 묘지 소유권을 넘겼다. 소유권을 넘겨받은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2003년부터 시작됐으나, 2005년까지는 다소 지지부진했다가 이재철 목사가 2005년 7월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100주년기념교회에 유니온교회 대신 묘지 관리를 맡기게 된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의욕적으로 묘지 관리에 나서기 시작했고 지난 2년 동안 25억 원을 들여 양화진묘를 한국교회의 성지로 복원시키는 작업에 착수한다. 양화진묘 안내도 안내비 없이 행했고 교인들이 묘비를 닦고 청소하는 일에 봉사자로 나섰다. 100주년기념교회는 2006년에 마포구청과 협의하여 홍보관 건립에도 나섰다. 홍보관 건립에 들어가는 예산(30~40억 원 추정)은 모두 100주년기념교회가 부담하고, 운영은 마포구청이 맡는다는 조건이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이 홍보관을 마포구청에 기증하고 19년 정도 사용하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뉴스앤조이>, "선교사 묘지공원, "우와~"") 



유니온교회와 100주년기념교회의 갈등

이렇게 의욕적으로 시작한 100주년기념교회의 활동에 힘입어 양화진은 2006년 말부터 2년 7개월간 약 11만 7,000명이 묘지를 방문하여 명실공히 한국교회의 명소가 되었다. 문제는 그간에도 유니온교회와의 갈등이 있어왔고, 결국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예장통합에서도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발단은 예배 처소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100 주년기념교회가 들어오자 교인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선교기념관에서 예배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약 200명. 2007년 9월 기준으로 100주년기념교회는 약 2,000명의 교인이 출석했다. 협소한 장소 문제가 골칫덩어리가 됐다. 어쩔 수 없이 100주년기념교회 쪽은 2007년 5월 유니온교회에 예배 시간을 오후로 옮겨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8월 첫째 주일부터 예배 시간을 오후 4시 30분 이후로 변경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전까지 유니온교회는 주일 오전 9시 30분에, 100주년기념교회는 오후 1시 이후에 예배를 했다. 교인이 늘어나니 100주년기념교회 쪽은 선교기념관 전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니온교회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지난 20여 년 동안 편하게 사용해오던 예배 장소를 내주는 것도 쉽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100주년기념교회, "더 이상 당할 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예배 처소의 문제였지만, 이재철 목사는 100주년기념교회 소식지의 인터뷰 기사에서, 근본적으로 유니온교회가 양화진 관리자로서의 100주년기념교회를 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내가 판단하기에도 이 갈등은 결국 100주년기념교회가 위임 받은 관리 주체로서의 소명에 대해 유니온교회는 크게 인식하지 못한 듯하다.

" 보아탱 목사님(유니온교회 담임)은, "100주년선교기념관은 우리가 관리하니까 너는 빠져! 이건 협의회하고 유니언교회 간의 문제지 100주년기념교회가 나설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소리를 지르더군요. 그래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냐. 지난번에 100주년기념교회가 양화진묘원과 선교기념관의 관리 주체임을 강병훈 목사님 그리고 김경래 장로님과 함께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냐"고 하니 아니라는 거예요. 그 이후 김경래 장로님께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말씀드렸어요. 말로 하지 말고, 100주년기념교회가 새로운 관리 주체임을 협의회가 문서로 정확하게 알려주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협의회가 9월 14일에 유니온교회에 공문을 보내 양화진묘원과 선교기념관의 관리 감독 및 세무와 행정 처리를 공식적으로 100주년기념교회에 위임한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저는 그때 위임받은 신분과 우리 교회의 소명을 유니온교회가 수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00주년기념교회 월 소식지 <버들꽃나루 사람들>)

기사 에 따르면, 유니온교회는 묘지 관리를 100주년기념교회에 위임하는 조건으로 선교기념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나 100주년기념교회에 지하실을 사무실로 내주는 등 주객이 전도된 행동을 일삼았고, 이에 대해 이재철 목사는 관리 주체를 명확히 하려는 목적으로 공문을 발송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해 유니온교회는 심하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00주년기념교회로부터 쫓겨났다'고 주장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5차례에 걸쳐 100주년기념교회에 소송을 걸었다가 모두 각하 내지는 기각 처리된 바 있다. (양쪽의 이러한 갈등이 언론 등에 보도가 되자, 마포구청은 2007년 8월 21일부로 선교기념관에서 예배를 하지 말라고 양쪽에 통보했고, 지금은 100주년기념교회는 홍보관에서, 유니온교회는 연세대학교 채플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장통합, 왜 양화진에 갑자기 관심을?

그렇다면 왜 양화진을 둘러싼 두 교회의 문제에 예장통합 교단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 나선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2007년 12월자 <뉴스앤조이> 기사를 보면 몇 가지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 예장통합은 겉으로는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의 후손을 제대로 대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은혜를 잊지 말자는 얘기다. 또 이 문제가 사회 법정에까지 비화되면서, 사회적 인지도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한국교회에도 심대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장통합으로서는 동역 관계를 맺고 있는 미장로교회(PCUSA)의 요청도 무시할 수 없다. 예장통합은 지난 8월 17일 미장로교회 서기인 클리튼 커크페트릭(Clifton Kirkpatrick) 목사에게서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이 편지에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하며, 예장통합이 앞장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문제는 지난 11월 27일 열린 교단장협의회 총회에서도 거론이 됐다. 일단 12월 13일 열리는 임원회에서 논의하기로 결정됐다. 교단장협 한 관계자는 "100주년기념교회와 유니온교회가 현재 대화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양쪽의 대화로 원만하게 합의가 되길 바라는 게 교단장협의 기본 입장이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양화진 묘지 둘러싼 갈등 '왜' 해결 안 되나")

하지만 양쪽의 대화로 원만하게 합의하기를 바라던 예장통합의 2007년도 입장과는 달리 지금은 양화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재철 목사를 이단으로 기소하려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 번복하는 등, 다소 조급하게 그리고 공격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당시에도 기사에 따르면 "뜯어보면 유니온교회의 손을 사실상 들어준 셈"이라는 평가를 내리고는 있으나, 당시에는 이 정도로 극단적으로 이재철 목사를 몰아낼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과연 교단이 이토록 격하고 거친 행동을 하도록 만든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예장통합에서는 100주년기념교회와 이재철 목사가 양화진을 떠나게 하기 위해 극약처방까지 일삼으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노회 입장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최소한 100주년기념교회의 그간의 행적 가운데에서 어떤 허물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주로 특정 매체의 기사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그 매체의 편향된 시각으로 인해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나는 교단이 그렇게 조급한 방식으로 강압적인 제재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만일 특정 매체의 편향된 시각이 문제라면 교단에서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기사들에 대해서 적극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해명들은 미흡해 보이며 오히려 최근에는 기자에게 촌지를 건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더욱 오해만을 살 뿐이었다. (<뉴스앤조이>, "이재철 목사를 '이단'으로 다루기에는 '준비 미흡'")

이재철 목사는 어쩌다가 이러한 진흙탕 싸움에 연루되어 이단 혐의까지 받게 되었을까. 혹 지금이라도 그가 다소 억울한 면이 없지 않겠지만 교단의 지시대로 교회를 떠나면 되지 않을까. 이단이라는 오해까지 받아가며 버틸 필요가 있을까.

이에 대해서 이재철 목사는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는 듯하다. 그에 따르면 100주년기념교회는 처음부터 양화진 관리자로서의 소명을 부여 받은 교회로 "100주년기념교회 교인들이 양화진 묘역을 둘러보고, 1년에 몇 번씩 손수 비석을 닦고 잡초를 뽑고 꽃과 잔디를 심는" 봉사를 행해왔고 "돈을 들여 축대를 쌓고 묘역 보호 철책을 두르는" 등 "양화진을 한국교회 공동 유산으로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이 100주년기념교회에게 부여한 사명"으로 이해하고 그 소명을 충실히 행해왔다고 말한다.

그는 개인의 자격으로 양화진 문제를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간 한국교회의 성지를 복원하기 위해 전심으로 노력한 헌신된 100주년기념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를 향해 쏟아지는 불의하고 악의적인 비방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묘역을 통해서 한 일은 사유화했던 것을 막은 것밖에 없다"며 "그동안은 사실이 아닌 주장에 대해 협의회와 100주년기념교회가 인내하면서 참아왔다"며 그간 속내를 드러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장통합은 왜 양화진에서 100주년기념교회와 이재철 목사를 몰아내려고 하는가. 겉으로 내세우는 대의명분처럼 선교사들의 후손들을 제대로 대접해 주기 위해서인가. 그러기에는 대화로 원만히 해결하기를 바라던 2년 전의 입장과는 사뭇 달라진 현재의 과격함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들이 그동안 유니온교회가 선교사들의 묘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다른 교회들도 선뜻 묘지 관리에 나서지 못하다가 100주년기념교회가 몇 년 사이에 수십 억 원을 들여서 단장하고 수천 명의 봉사자가 가꾸어 이제는 한 달에 거의 4,000명에 육박하는 이들이 양화진을 찾게 되어서야 갑자기 이재철 목사에게 이단 혐의까지 씌워가며 흠집을 내려는 것이 더 어색하지 않은가 말이다.

임기가 끝나면 주저 없이 교회를 떠나서 교계에 잔잔한 감동을 주었고 불과 몇 년 전에는 교단의 학교인 장신대 사경회에서 기립 박수까지 받았던 바로 그 설교자를 돌연 이제는 이단이라고, 장로를 쓰레기 긁어모으듯 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게다가 이단이라고 기소했다가 돌연 미흡하다고 이단 항목은 삭제를 하고, 취재기자에게는 촌지를 주는 등 어색하고 부산한 행동을 일삼는 것은 왜인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재철 목사의 말대로 그가 한 일이 양화진을 "사유화했던 것을 막은 것밖에 없다"면 혹시 예장통합이 양화진을 사유화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100주년기념교회와 이재철 목사를 음해하는 것은 아닌가.

결국 이 두 논리가 양립할 수 없다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게 되는 셈이 될 것이며, 아마 예장통합 측에서 앞으로 더 공격적으로 양화진 문제를 개입하면 할수록 이러한 양화진의 교단 사유화에 대한 의구심은 증폭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양화진 문제를 거론하기보다는 이재철 목사를 항복시키는 일에 더 적극적이겠지만 말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재철 목사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며

나 는 최근에 이재철 목사의 이단 시비와 양화진 문제를 보면서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동화 생각이 났다. 임금님의 나체를 보고도 모두 모른 척하고 멋진 옷을 입은 것처럼 대하는 것이, 명약관화한 양화진 문제를 두고서 이재철 목사가 이단이냐 아니냐, 교단 헌법을 어겼냐 아니냐를 따져대는 모습과 닮아 보였다. 누구도 벌거벗은 임금님을 가리키며 벌거벗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교계의 님비현상일까.

내 주변의 비교적 진보적이라 불리는 기독인들과 매체에 이야기를 해도 솔직히 그들은 별로 교단 문제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교단 문제는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등, 겉보기보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등 이런 저런 이유를 들며 공식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한 평신도 형제가 인터넷 카페에 교단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글을 쓰자 이를 본 다른 평신도가 글을 쓴 형제가 지역 교회에서 내쳐질까봐 우려하는 모습도 보았다.

내 생각에 교단에 속한, 아니 한국의 교계에서 일하는 이들 중에는 교단 문제를 비판할 사람이 없어 보인다. 모두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며 놀라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 행렬을 향해 박수만 칠 따름이다. 과연 이재철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기립 박수를 쳤던 많은 신학생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자신이 존경해 하던 한 목사가 자신의 소명을 다하다가 자신이 몸담았던 교단을 탈퇴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단 혐의로 기소까지 받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너무 조용하다. 그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비판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존경받던 한 목사의 이러한 처지에 대해 모두가 함구하는 건 왜인가. 자신이 그렇게 존경하던 목사를 성도 스스로가 지켜주지 못한다면 교회의 갱신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나는 한국의 평신도와 신학생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전직 대통령처럼 잃고 나서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고 후회해봐야 소용없다고. 그러니 지금이라도 우리가 그를 지켜주자고.

2009/09/11 23:54 2009/09/11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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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소고(5)
: 복음주의권의 보수와 진보, 그 소통과 연합을 기대하며 


기독교 세계관 운동: 1990년대
이 제까지는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 자체에 대한 논의를 주로 했다면 이번 연재에서는 세계관 운동, 특히 국내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변화와 그 원인들을 짚어보고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국내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관련된 논의에 있어서는 청어람 아카데미의 양희송 실장의 기여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2002년에 GSF에서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시작한 바 있으며 2003년에는 편집위원인 박총과 함께 본격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비판적인 시각을 정리하였고, 같은 해에 기학연과 복상 공동주최로 이루어진 기세포럼에서는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 비판적 성찰"이라는 발제문을 통해 국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이론과 실천 영역 모두를 진단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국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을 손꼽았는데 내용을 잠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당 시 국내의 ‘기세’에 실천적 모델을 결합시킨 상징적 인물로 손봉호 교수를 꼽을 수 있겠다. 목사가 아니지만 교회에서 설교자로 사역했고, 서울대 교수로 가르치는 분야뿐 아니라 기독교수 모임을 통해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창립을 주도하면서, 복음주의권에 시민운동의 한 사례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고, ‘공정선거감시운동’을 주창해 그 해 대통령선거와 이후의 선거에 복음주의권 교회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길을 트기도 했다. 한국사회에 본격적인 시민사회의 도래를 알린 시민운동 단체 <경제정의실천연합>의 창립에도 깊게 관여함으로써 종교운동의 범주를 넘어서 시민사회와 결합하는 모델을 보여주기도 했다.” (양희송, 2003년 기독교세계관 포럼,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 비판적 성찰")

1987년 창립된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복음주의권은 기윤실의 약진과 그 궤적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윤실’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주요 실천적 활동으로 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많겠으나 지면 관계상 주로 기윤실만을 다루기로 한다.) 또한 <복음과상황>의 창간과 더불어 국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시민운동과 문서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공정선거감시운동’과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도 그 활동이 각인될 만큼 어느 정도 사회에 기여하였다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기윤실은 입지가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종국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양희송은 발제문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이유로 기윤실이 입지가 줄어들었음을 논증했다.

“<기윤실>이 ‘문화소비자 운동’을 통해 초창기부터 꾸준히 펼쳐온 ‘스포츠신문 음란성 고발 캠페인’은 상당히 호응을 받고 있었으나, 이와 더불어 진행해온 대중문화 공연이나 음반, 영화 등에 대한 캠페인은 적잖은 반발을 수반했다. ‘마이클 잭슨 내한 공연’ 반대(1995), 싸이, 박지윤, 박진영 등의 음반 방송금지 혹은 불매운동, 영화 ‘거짓말’, ‘죽어도 좋아’ 등의 장면 삭제 혹은 상영제한 캠페인 등은 다른 문화운동 단체들과 상당한 논란을 빚었고, <기윤실> 문화정책을 한국 사회 보수집단의 전형적 문화취향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교회개혁 문제에 있어서 <기윤실>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교회개혁 실천연대>가 <기윤실>에서 분리해 나간 것에서도 드러나듯 ‘목회 세습 문제’ 등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미온적 자세를 보임으로써 현실인식의 긴박성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윤실>은 그 활동 전반이 갖고 있는 건강성에도 불구하고, 매우 협소한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관적 관점에서 볼 때는 이제 기독교권 내에서도 기독교적 실천 모델의 다양화가 자연스럽게 제기된 것이다... 이런 시민운동 자체가 곧 ‘기세’적 실천과 등치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렇게 대표 모델들이 선도성을 잃어가는 현상은 ‘기독교적 실천’의 부름에 단일대오로 나서는 일이 점차 더 어려워짐을 보여준다.” (양희송, 같은 글)

양희송은 기윤실로 대변되는 1990년대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문화운동에서의 보수적 취향, 교회 개혁 문제에 있어서의 미온적 입장으로 인해 입지가 줄어들었고, 기독교 세계관 자체가 개혁주의로 경도되는 현상과 정치판에서 중립을 지키기 위해 원칙론 이상의 발언을 하지 않은 것들을 위축의 주요 이유로 설명했다. 그의 지적대로 “원론에 값하는 각론이 나올 때가 되었으나, 이 지점에서 ‘기세’ 논의는 계속 지체”되었고, 90년대 후반에는 정권교체로 인해 정치적 긴박감의 해소되어 “‘기세’ 논의도 상당부분 문화분석이나 문화관 논의의 형태를 띄고 진행”되었다. 결국 문화변혁운동으로 변화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영적 비평’이라는 미명 아래 한국 사회에서 문화적 보수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전까지는 정치적으로 동질감을 가졌던 국내 진보적인 비기독인들의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렇듯 90년대 기윤실로 대변되었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초반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크게 위축되었고 기독교 세계관 내부적으로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00년대

90 년대의 정체 현상과 내부 비판에 기인하여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2000년에 들어서면서 운동의 주체 세력이 두 갈래로 분열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는데, 주로 그간 통용된 기독교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젊은 진보적인 복음주의자들과 이를 고수하려는 기성 개혁주의 전통의 교계 분위기 사이의 대립 양상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의 이론적인 내용은 그간 연재를 통해 정리하였다.) 이러한 대립 양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구 세력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특히 2003년에 있었던 기독교세계관 포럼에서 김기현과 양희송은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비판적 성찰을 발제의 주 내용으로 담았고 이승구와 최태연은 다소 열린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주된 입장은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옹호와 비판적인 입장에 대한 반론들을 내세웠다. 최태연은 정정훈, 양희송, 이원석, 김기현의 글들을 꼼꼼히 읽고 그에 대한 긍정과 비판을 다루면서 마지막에는 열린 경주를 제안했지만 이승구는 발제문에서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나는 이 글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고, 그에 근거하여 살아 나가는 일”을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규정하고, 이런 의미의 기독교 세계관은 없어지거나 치워져서도 안 되고, 수정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나는 가장 성경이 철저한 방식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고 그런 관점에서 사는 일이 더 철저하고 폭 넓게 나타나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승구,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요구들과 기독교 세계관의 요구”)

포럼에도 참석하고 당시의 글들을 읽으면서 느끼기에 당시 분위기는, 개혁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목회자, 신학자들에게 있어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비판적인 논의’가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 자체가 대단히 위험하고 건방지며 다소 성급하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어떤 교수는 이러한 논의가 학회나 전문 집단에서 얼굴이 상기될 정도로 가혹하게 당사자의 글에 대해 평가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저 젊은 세대의 ‘반란’ 정도 치부하기도 했다. 내 생각에 신구 갈등 혹은 진보-보수 갈등처럼 번진 기독교 세계관 논쟁은 기성 개혁주의자들의 신학적 보수성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 연재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가 결국 신학적인 문제로 환원되는데 대다수의 기성 개혁주의 신학자, 목회자들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개혁주의 전통의 구획 안으로 규정지었으며 이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용어 자체가 개혁주의자들의 산물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다분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 요소들을 명제적으로 제시한 것 자체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간주했으며 이렇게 제시된 기독교 세계관은 사실상 개혁주의 신학의 ‘행동 지침’에 가까웠다. 조금 과장하여 말한다면 개혁주의자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왜”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에 국한된 영역 문제만 축소하여 고민했고, 주로 그 핵심적인 명제들을 쉽게 설명하거나 세상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잣대로 제시하거나 세상을 변혁시키는 방법론으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에 집중해왔다.

 

문제는 그 신학 근본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이들이 생겨난 것인데 대부분 젊은 기독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좌파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성경의 무오성 내지는 무류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으며 에큐메니컬 진영의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등 빈번하게 기독교 세계관의 상부에 자리잡고 있는 개혁주의의 보수적인 신학 입지를 흔드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보수 교단에 속한 다수의 개혁주의 신학자, 목회자들은 이를 불편하게 느꼈음이 분명하다. 초창기에 기독교 세계관을 국내에 소개한 대표적인 이들이 이 젊은 기독인들의 주장에 무대응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심증을 더 굳히게 만든다. 이러한 분위기는 내가 알기로는 몇 년간 지속되었으며 기독교 세계관의 두 진영은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듯 했다. 그러다가 양희송이 코스타 대회와 청어람 아카데미를 통해 개혁주의자로 대변되는 교수 그룹과 여러 차례 세미나를 통해 교류와 화해(?)를 시도했고 기독교 세계관 논의는 내러티브의 강조 및 기독교 세계관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 등과 같은 문제에 있어 조금씩 어느 정도의 합의점을 찾게 되었다. 허나 내 생각에는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합의점이 여전히 미진해 보이는데 그 부분에 대한 몇몇 원인들을 좀더 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진보적 복음주의, 혹은 좌파 복음주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분열되었다고 지적을 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분열되었다기보다는 복음주의권 자체가 분열된 듯한 느낌이다. 90년대 학번인 나는 학생 시절에 기독 운동 자체에는 어떤 연합 전선 같은 것이 있다고 느꼈다. 기윤실이 됐든, 복음과상황이 됐든, 혹은 학복협이 됐든 간에 복음주의권에서의 정치, 문화, 신앙에 있어서의 어떤 광범위한 합의점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광범위한 합의점들은 신구 갈등, 신앙적 진보-보수 갈등으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나는 듯 했는데 내가 처음으로 복음주의권에서 내가 구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목창균 서울신학대학교 총장의 책인 <현대 복음주의>를 통해서였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복음주의 신앙의 전통적 경계선을 넘어 자유주의 신학 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진보적 복음주의의 특성은 개방성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비복음주의 신학자들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신학의 자원을 성경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 경험에까지 확대하는 것, 목석처럼 융통성 없는 성경 접근을 거부하는 것, 하나님의 내재성과 관계성을 강조하는 개방적 신론, 자신의 영역 수용과 보편적 구원에 대한 열망, 예수의 인간성 강조 등이다. 신학적 다원주의에 대한 더욱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성경 내 다양성에 대한 인식, 하나님의 개방성에 대한 공개적 토의, 진화 개념을 수용하는 우주 기원에 대한 설명, 불신자의 구원의 가능성, 영원한 지옥 형벌 교리를 대체하는 절멸 개념에 대한 개방, 복음주의 교리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과 협력하는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즘 등이다. 진보적 복음주의자의 수는 복음주의 공동체 전체로 보면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1990년대 이후 그 영향력이 점증하고 있으며 복음주의 신학계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왜냐하면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복음주의 학자들이 이 그룹에 속하기 때문이다. 한편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저술을 주로 출판하는 곳으로는 Inter-Varsity Press를 들 수 있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활발한 지적 활동은 통해 현대 복음주의의 최대 취약점인 반지성적 경향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경계선을 훨씬 넘우 자유주의 신학 쪽으로 이동함으로써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또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이제 같은 뿌리였던 보수적 복음주의보다 오히려 자유주의 신학에 더 가까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목창균, “현대 복음주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주변에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 다수는 진보적 혹은 좌파 복음주의자에 속한다. 그들의 특징은-목창균 총장이 지적한 대로-이전에는 보수적 개혁주의 내부에서 볼 수 없었던 신학적 ‘개방성’이다. 사실 이 책에서 언급한 사안들에 대해 하나의 그룹으로 묶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보편적 구원에 대한 열망, 에큐메니컬에 대한 입장, 진화론의 수용 등의 문제에 있어서 진보적인 복음주의자라 하더라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류될 것이 분명하다. (나또한 이 책의 분류대로라면 진보적, 혹은 좌파 복음주의자이겠지만 진보 계열 안에서는 다소 보수적인 위치로 비춰질 것이다.) 문제는 이전과는 다르게 기존 전통적 신학 입장과는 차별화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기독인들이 복음주의의 진보 진영에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이머징 교회 운동과 기독교 세계관

최 근에는 교계에서 ‘이머징 교회’라는 용어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머징 교회와 진보적 복음주의자들 간에 다소 겹치는 영역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머징 교회의 개방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복음주의권의 기독인이 진보 진영이기 때문일 것이다. D. A. 카슨은 <이머징 교회 바로 알기>에서 이머징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운동에 속한 많은 사람은 ‘새로 떠오르는’이라는 말이나 ‘신흥의’라는 말을 그들의 운동을 규정하는 형용사로 사용한다. 수십 권의 책들이 이 ‘새로 떠오르는 교회’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에 대한 이야기’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어느 웹사이트는 방문자들에게 ‘새로운 친교’를 나눌 것을 권하는데 이 말은 결국 이 운동 내에서의 친교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운동의 핵심에는 문화의 변화는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예고한다는 확신이 깔려 있다. 따라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새로 떠오르는 교회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D. A. 카슨, “이머징 교회 바로 알기”)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있어 이머징 교회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들의 특징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들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내에서 ‘이머징 교회’라는 특정 집단을 구분해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카슨의 다소 광범위한 구분에 따른다면 이교회 운동의 특징을 기성 교회에 대한 저항, 모더니즘과 모더니즘적인 신조주의, 명제주의에 대한 비판, 초교파적인 교회 운동, 포스트모더니즘적 인식론 수용, 교회 예식과 교리보다는 공동체를 더욱 강조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교회 운동은 기성 교회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일삼고 있는데 카슨은 이 책에서 이머징 교회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이 이머징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겸손한 태도로 모더니즘적인 신조주의의 참모습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고 우리의 조상들이 은혜에 힘입어 복음에 충실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점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들은 가장 나쁜 본보기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고 그런 사례를 조롱하는 듯 하다... 이머징 운동을 옹호하는 저자들이 보기에는 모더니즘은 나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좋거나 영광스런 기회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려깊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더니즘이건 포스트모더니즘이건 어느 쪽에도 완전히 동조하지 말아야 하며 그 두 실체를 전적으로 부정해서도 안 된다. 이머징 교회 운동은 조금 더 공평해져서 모더니즘의 내적인 장점을 명확히 밝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할 때 비로소 성숙한 경지로 만개할 것이다.” (D. A. 카슨, “이머징 교회 바로 알기”)

카 슨은 이외에도 여러 문제들을 다루었지만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는 부분에 있어서 이머징 교회가 균형성을 유지할 것을 경고했는데, 그는 “우리의 유한성이 지닌 함의 우리가 배우고 아는 과정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 모더니즘에 대한 유용한 비판 등을 포함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점을 간직”하면서도 참된 진리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의 보존, 즉 “객관적 진리가 들어갈 자리”를 남겨 놓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난 연재에서도 다루었듯이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 문제와 신학적인 개방성의 문제는 결국 현대 기독인들에게 큰 숙제로 다가오고 있으며 복음주의권 내의 기독인들 사이에서도 진보-보수를 나누게 만드는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이들의 개방성이 모더니즘적인 토대의 신조주의나 신학적 보수성을 고수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과할 정도로 비판적, 적대적이며 때론 냉소적이기까지 하다는 데에 있다.


복음주의권의 보수와 진보, 그 소통과 연합을 기대하며
내 가 요즘 느끼는 주된 우려감은 복음주의권 내의 진보-보수 간의 미묘한 갈등과 분열이다. 물론 교계에서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기준도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내가 제시하는 진보, 보수의 구분에 동의하기 어려운 이들도 있을 것이며 실제로도 복음주의권 내부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세력이 다양해졌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대한 입장에 따라 진보진영도 세분화되거나 중도우파와 좌파로 분류될 수 있으며 복음주의권에서 <복음과상황>의 이사로 있던 김진홍 목사가 뉴라이트 운동의 핵심인사로 분류되면서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정치적으로는 보수의 길을 걷는 등의 변화들이 있었다. 북미의 경우에는 찰스 콜슨이나 오스 기니스가 같은 복음주의권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라크 파병 문제로 정치적 보수성을 드러내었고, 그에 따라 좌파 계열로 분류되는 짐 월리스나 아나뱁티스트 신학자인 하워드 존 요더의 사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기도 했다.

 

신학적으로 구분해 본다면, 개혁주의 내부에 모든 기독인들을 보수로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 복음주의권은 다수를 개혁주의자로 등치시켜도 무방할 정도로 신학적으로는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도 사실 다양한 부류로 기독인들이 나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진화론에 대한 성경적 입장으로 복음주의권이 나뉘는데 특히 프란시스 쉐퍼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낸시 피어시가 자신의 책 ‘완전한 진리’를 통해 진화론을 전면 비판하고 지적 설계운동을 긍정하면서 이를 유일한 기독교 세계관으로 제시하여 이에 대한 찬반 양론이 뜨거운 상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경우에는 진화론에 대한 열린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우종학이 최근 자신의 책에서 진화론에 대한 열린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진화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유신론적 진화론을 소개한 바 있는 장대익 교수가 얼마전 출간한 <종교전쟁>을 통해 종교에 적대적인 리차드 도킨스를 잠정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더욱더 진화론을 긍정하는 기독인에 대한 우려감을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이러한 진화론에 대한 입장 차이는 서로에 대한 대화보다는 평행선으로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으며 이는 비단 진화론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최근 들어 나는 자주 진보 진영 기독인들이 보수적인 기성 교단의 목회자, 신학자를 ‘꼴통 보수’ 취급하는 경우를 본다. 반대 입장에서는 진보적인 기독인들의 개방적 입장에 대해 전혀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 그들을 마치 자유주의로 경도된 부류로 치부하고 그들의 신앙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 나는 요사이 기독인들이 자신의 비판적 시각을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명목으로, 무례하고 독한 말과 글들을 일삼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나의 우려는 이런 것이다. 갈수록 기독교 세계관의 수혜를 입은 공동 전선의 기독인들이 나뉘어서 서로 특정 사안을 놓고 비판하고 스스로를 구분시키는 일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것 같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비판의 중심에는 기독교 세계관 논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은 지금 이들을 아우르고 있는 테마고 또한 서로를 비판하고 구분 짓고 분열을 일으키는 뜨거운 감자이며 지금까지 복음주의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회자되고 있는 이슈인 셈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이 지루한 그리고 갈수록 점점 논의가 어려워져서 이제는 신앙인들에게 멀어져 가는 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게 된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글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분열의 사안들을 짚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더욱더 적극적으로 소통하여 종국에는 연합의 방향성을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또한 서로 다름을 이야기할 때에도 사랑과 온유함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희생의 정신을 되새기자는 것이다. 연재를 함에 있어서 글의 방향성을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는 것으로 잡았으나 중간중간 내 의견들이 많이 드러난 것 같다. 전적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설명만을 고수할 수는 없었음을 인정하며 혹자의 지적대로 비전문가 입장에서 다소 무리를 두는 논지도 있었을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끝)




**이 글은 <복음과상황> 9월호 원고입니다.

2009/09/01 23:46 2009/09/01 2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