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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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진료를 마치고 약국에서 약을 기다리던 중 어린 아기를 둔 엄마와 여성 약사 사이에 큰 소리가 오갔다.

"손님. 여기 있어요. 약을 복용하시는 중에는 모유 수유를 하시면 안 되세요."
"네? 뭐라고요?"

"모유 수유하시면 안 되신다고요."
"참내."

"네?"
"이것 봐요. 어떻게 수유를 안 해요? 아이 낳아봤어요?"

"아니요. 아직…."
"그러니까 저런 소리를 해대지. 애가 없으니까 팔자 좋은 소리하구 있어."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솔직히 그 약사는, 결혼은 안 했다지만 그녀보다 나이가 적어보이진 않았다. 무엇보다 약사의 처방에 대해 인신공격적인 말을 해대는 아이 엄마의 반응에 내 심장마저 쿵덕거렸다. 그것도 같은 여성으로서 자기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상대에게, 저런 언행은 좀 아닌 것 같았다. 약사는 상기된 얼굴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우리나라는 대다수가 일상적으로 분노의 대상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인터넷에도 빈번하게 OO녀, OO남 이야기가 퍼지면 순식간에 그들의 신상이 털리고 만 하루가 되지 않은 시간에 포털사이트에 검색어가 뜬다.

사실 나는 이 약국 손님을 두고, 그런 상황을 얘기하고 재현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를 둔 엄마 손님도 그녀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이에 대해서는 첫 기사, '마트서 아이 등짝 때린 엄마, 쉽게 손가락질 마시라'에 충분히 생각을 풀어냈으므로 긴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임신과 육아에 많이 찌들어 있는 기혼 여성들이 종종 싱글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우려를 조금 언급하고 싶을 뿐이다.


아줌마에 관한 '뒷담화'

SNS를 하다 보면 '아줌마'로 통칭되는 기혼 여성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중년 여성의 엽기적인 행동에 관한 '뒷담화'를 종종 읽게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 수단에서 서둘러 자리를 잡거나 식당에서 큰 소리로 대화하거나 백화점, 대리점에서까지 물건은 깎는 일 등은 이미 고전이 되었고 직장 내 여자 선배 직원의 과한 처세술부터, 육아 경험이 없는 싱글 여성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언행에 대한 분노의 글들도 자주 접한다.

'애 안 키워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는 어법이 주는 호전성은, 때로 원치 않게 결혼·육아 경험을 할 수 없는 싱글 여성들에게는 상처를 넘어선 분노를 자극하기도 한다. 물론 내 경험상으로도 육아는 힘들고 내 아내는 나보다 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육아를 경험하지 않는 부류를 향한 어떤 호전성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같은 여성에게.

육아 경험의 유무뿐만 아니라 그 확장도 자주 경험한다. 우리 집은 아이가 하나인데 놀이터에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아이 하나는 육아도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는 마치 남자들이 군대생활을 최전방에서 했느냐 후방 부대에서 했느냐에 대한 반응과 유사하다.

놀이터에 모인 엄마들 사이에서 아이 하나인 엄마는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묘한 스탠스를 갖게 되는데 이는 마치 공익근무를 한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를 할 수 없는 처지와 같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아이들도 다들 제 각각이고 첫째를 키울 때 쓰던 육아 방식이 전혀 먹히지 않음에서 오는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자주 아내도 나도 어떤 부모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는 듯한 압박감에 나름의 어려움을 토로하지도 못한 채 '맞아요, 우린 아이 하나고 그마저도 순해서 어릴 때부터 거저먹기였어요'라며 아이 많은 집 부부들 사이에서 '영혼 없는' 대화를 나누곤 한다.

아이가 셋인 엄마는 아이를 하나 둔 엄마의 고충에 '팔자 좋다'는 반응을 보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보며 세월 참 좋아졌다고 비판한다. 이렇듯 서로 간에 분노, 증오로 뒤섞인 관계의 긴장감은 슬프게도 비기득권 진영 내에서 더욱 심하다.


비기득권 진영 내에서의 갈등, 좋지 않아요

'싱글 여성'과 '육아 중인 기혼 여성',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갈등 등 이른바 비기득권 진영 내의 갈등은 앞서 말한 대로 가부장제나 보수적 사회구조를 유지시켜주고 나아가 '남성', '기업'과 같은 기득권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자주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어려움에 직면할 때 가장 가까운 이들과 함께 그 문제를 풀어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들을 - 더 연약하면 연약하다는 이유로 덜 어려움에 처했다면 그것에 어떤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서 - 비난하고 상처를 주고 결국은 분리의 수순을 밟게 된다.

유사 페미니스트의 삶을 추구하는 나는, 솔직히 말해 여성이 남성을 적으로 여기는 상황들도 불편하지만 그보다 더 (기혼) 여성과 (싱글) 여성이 서로를 구분 짓고 서로에게 가해하는 상황이 더 불편하기만 하다. 또한 이는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시키는데 일조한다는 측면에서 전략적으로 지혜롭지도 않다고 본다.

싱글 여성이 임신, 육아의 지식을 공유하고 먼저 선배들의 고충을 배려해주고, 기혼 여성은 싱글 여성에게 상처가 될 만한 언행을 조심해주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여성의 성평등에 남성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지만 이보다 선행될 부분은 이런 것이 아닐까.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2013/09/26 23:11 2013/09/26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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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가 시기인 만큼 광화문 촛불 집회가 한창이다. 집회가 있는 날이면 SNS를 통해 집회 소식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다들 비오는 날씨에도 고생이 많으신 듯). 이렇게 집회 자리에 있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다. 올해 들어서는 집회에 참석을 못 했다. 작년 대선 때 몇 차례 시도해봤으나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움직이는 게 만만치가 않았다.

결국 아이를 두고 가야 할 텐데 아내도 집회를 참석하고 싶어하므로 (다소 어색하긴 해도) 주말 육아를 전담하는 내가 아이를 맡는 게 논리적으로 맞다. 그렇게 나는 남고 아내는 집을 나섰다.

아내가 별 걱정하지 말라며 씩씩하게 떠나고 나면, 나는 집에서 아이와 만화영화 주제가를 같이 흥얼거리며 아내가 주중에 못다 한 집안 일을 하며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든다. 중간중간 아이가 밥 먹을 때나 놀이터를 전전하며 SNS에 올라오는 소식들과 기사들을 읽는다. 마음 깊이 공감하며.


황득순, 집에 남는 자

사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상이다. 예전 연재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민초들이 들풀처럼 일어나길 기대하며 집회 장소를 누비던 함석헌 선생의 활동 뒤에 가려졌던 아내 황득순씨의 일상도 이랬겠구나 싶다. 나는 내 의지대로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았었다. 싱글일 때 혹은 아이가 없을 때 전혀 고민해보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들, 그로인한 선택과 그에 따르는 감정들을 대면해야 한다. 이렇듯 내 정서는 새 국면을 맞이한다.

물론, 조만간 아이가 클 것이고 우리는 가족 모두가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설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촛불을 들고 있는 것과 아이의 장난감을 들고 있는 것 사이에 경중을 따질 수 없다. 유사(pseudo) 페미니스트로서, 아내가 아닌 내가 반드시 촛불을 들어야 할 어떤 논리나 당위도 없다. 누군가는 집회의 자리에 서 있고 누군가는 그 시간에 야근을 하고 또 누군가는 집에서 '아무개의 엄마'로 가사와 육아를 돌본다. 때때로 사람들은 서로의 위치가 뒤바뀌기도 할 것이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신앙적인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을 위해 프란시스 쉐퍼가 만든 공동체인 라브리에 찾아온 수많은 청년들에게 지적인 대답을 주기 위해 노력한 쉐퍼 자신보다 예산 없이 매일매일 수십 명이 되는 청년들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애간장을 태운 그의 아내 에디스 쉐퍼가 더 대단해 보인다. 또 함석헌 선생이 비운 집안에서 군소리 없이 "나야 뭐…"라며 쑥스럽게 가정을 보살핀 황득순 여사의 일상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엄밀히 말해 나는 고작 몇 차례의 시간 동안 아이와 집에 있었을 뿐인데 삶의 대부분을 그렇게 산 그(녀)들의 삶을 절절히 공감했다는 표현은 다소 '오바'일 게다.


행동하는 존재 Vs.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존재

솔직히 고백하건대 과거에 나는 집회에 나서지 못하면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 반대 급부로 자연스럽게 집회 참석에 관심이 없거나 사회 문제 자체에 의식 없는 청년들에 대한 반감도 꽤 있었다. 그저 소심한 마음에 내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자리에 동참하는 것이 내겐, 그리고 내가 타인을 대하는 꽤나 중요한 이슈였다. 헌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뻔뻔하게도 이런 글을 쓸 정도로 '날라리'가 됐다. 그것도 함석헌보다 황득순을 더 강조하려는 논리까지 내세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런 내적 변화가 싫지 않다.

그날, 나는 아이와 칼싸움을 하고 그네를 밀어주고 저녁밥을 차려주고, 씻기고 재우면서도 SNS에 올라온 집회 사진과 글들을 보며, 어느 때보다 평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집회 장소에 있던 분들을 응원했다.

물론 나는 집회에 나선 이들이 다치거나 어려움에 처하지 않도록 매순간 기도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정에서 노심초사하면서 귀가를 기다리는 많은 이 땅의 '황득순 여사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행동하는' 존재만큼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존재도 강조될 이유가 있다는 생각. 조금씩 생겨난다.

노심초사한 마음조차 생경한 밤 시간. 아내가 돌아왔다(휴…).
2013/09/16 23:09 2013/09/16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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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시간관리·자기계발 분야의 책들에 관심이 많을 무렵이 있었다. 당시 읽은 책 <관계중심 시간경영>에서 저자 황병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시간 개념을 구분해 사용한 것을 주목했다. 여기서 크로노스는 '시계 시간' 혹은 흘러가는 시간을 뜻한다. 그리고 카이로스는 '사건 시간', 즉 무수한 시간들 중 의미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대다수의 자기계발서가 제안하는 시간 관리는 대체로 시계 시간을 보다 촘촘하게 관리하는 것에 기반한다. 하지만 정작 인간은 같은 시간도 다르게 인식한다. 누구와 만났고 어디를 갔고 무슨 일을 했느냐에 따라 그 시간의 의미는 달라진다. 고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른바 한 개인의 삶에 있어 '사건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고 또 앞으로도 그와 비슷한 시간들이 흘러갈 것이다. 이 모든 양적 시간들 중에 사실상 나에게 의미 있게 각인된 특정한 사건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업고 병원으로 뛰던 기억, 아내와 처음 데이트하던 장소, 아이가 태어나던 날, 폐렴으로 입원했던 기억, 회사에서 몇 주 동안 밤새 준비했던 보고서를 결재받던 날….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우는 것이 많다.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와 미래를 조명하는 좋은 스승이다. 그런 소소한 깨달음 때문인지, 나의 정리'벽'은 기억들을 종이에 노트에 그리고 컴퓨터에 저장해두는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이건 덧칠이다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앨범을 신청하라는 안내문을 받았다. 허걱, 앨범 가격 무려 6만 원이란다. 나는 그래도 신청할까 고민했으나 아내는 '상술'이 엿보인다며 끝내 앨범을 신청하지 않았다. 물론 돈 때문만이 아니다. 어린이집에서 하는 활동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아이의 아이다움'을 저해한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

일례로 지난 어버이날에 아이가 만든 카네이션에는 '엄마 아빠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어쩌고 하는 무슨 틀에 박힌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다. 정말 우리 아이가 쓴 내용이었다면 아마도 '아빠 똥꼬나 먹어' 내지는 '아빠 스티커 다 모으면 큰 장난감도 사줘야 해'라고 쓰지 않았을까.

문제는 아이의 아이다움에 어른들이 '윤리적인 덧칠'을 해대는 것이다. 따라서 성장기에 어린이집 아이들이 어떤 기억의 저장으로 담아오는 많은 추억들도 천편일률적이다. 그저 수많은 아이들 속의 내 아이, 남들에게 처지지 않게 성장하는 내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장 앨범을 경제논리에 따라 고가의 비용을 주고 구입해야 한다.

내 어릴 적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어디에 살았는지, 그 시절 내 친구는 누구였는지, 나는 어릴 때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사실 지금도 나는 유년기에 어떤 성격을 가진 아이였는지 가끔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자료는 없다. 빛바랜 사진 몇 장에 기댄, 그저 풍문 속에 전달되는 내 영유아기의 사건들. 그것조차 어른들의 가치관으로 채색된, '넌 어릴 때부터 착했지, 점잖았지, 공부를 잘했어…' 그들의 욕망에 기댄 평가들.
내 아이만의 앨범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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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집 친구가 그려준 그림에 친구 이름을 함께 넣었다.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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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자료들은 자료를 선별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된다. 나 또한 내 아이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내 시각으로 내 가치관으로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린이집에서 막 찍어내는 앨범이 아닌, 내 아이가 나중에 자신의 영유아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그 시절의 특징들 그리고 자라면서 경험한 환경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주고 싶다.

그것이 10대나 20대에는 별 의미 없는 자료일 수 있겠지만 30대가 넘어 내 나이 즈음이 돼서는 스스로에게도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성격심리학 분야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간의 고유한 성격과 기질은 30대에 꽃을 피운다고 한다. 10대나 20대에는 여전히 주변의 눈치(환경에 적응)를 보느라 본유적 성격이 죽는다고.

아이에게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얼마나 이 아이를 보호해줄 수 있을까. 얼마나 이 아이가 편하게 고지를 선점하게 만들 수 있을까. 부모라면 그런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정작 아이에게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만들고 자기의 과거를 통해 미래의 삶을 스스로가 개척할 내적인 힘을 길러주는 게 아닐까. 부모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게 해주려면 부모와 사회의 가치관으로 덧칠한 기성 성장 앨범들이 아닌 부모의 눈으로 자세히 관찰한 내 아이의 특징들을 잘 기록해 주는 게 정작 더 중요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아이의 성장책을 만들어본다. 아이와 앉아서 옛날 어린이집 친구들의 이름을 물어보고 받아적었다. 어린이집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서 친구들의 이름을 같이 적은 뒤 육아일기 한쪽에 넣어둘 생각이다. 아이에게 간간이 보여주며 나의 추억에는 없는, 선명한 이미지를 남겨주고 싶다. 나도 안다. 이런 것들의 이면에는 나의 어떤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가 깔려있다는 것을. 그래도, 아이가 나이가 들어 네다섯 살 시절을 추억할 때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른다면 나도 기쁠 것 같다.
2013/09/14 23:07 2013/09/14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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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내놀이터.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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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놀이터 풍경

아이와 실내놀이터에 있다 보면 본의가 아니게 주변 엄마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대화는 몇 개의 주제로 범주화되는데 사실 범주화라기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패턴을 갖는다는 말이 더 적절할 듯하다.

처음엔 아이에 관한 이야기-내 아이 자랑, 혹은 걱정-으로 시작해서는 남편의 험담으로 번져간다. 내가 주로 아이와 실내놀이터를 오는 시간이 주말이다 보니 주말에도 육아를 도와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한 상태로 대화는 남편 성토대회가 된다(그럴 때마다 나는 그네들의 남편도 아니면서 자주 식은땀을 흘린다).

남편의 험담이 끝나갈 무렵이 되면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어서인지 드디어 화자인 본인에 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이 엄마들의 학력이나 이른바 '스펙'이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스펙에도 다수 엄마들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 없는 속내를 내비치곤 한다.

개중 몇몇은 부모님의 도움으로 꿋꿋이 회사를 다니는 이들도 있었지만, 석사 논문을 앞두고 출산 후에 과연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 회의감을 보이는 엄마도 있다. 또 직장에 육아 휴직을 냈지만, 여의치가 않아 퇴직을 고려하거나 이미 퇴직상태인 엄마들도 더러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아내도 결혼과 임신, 출산을 거치면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직장을 바꿔야 했고 진로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처음으로 남편인 나는 출산 이후 육아 과정 중에 한 번도 직업에 대한 고민 내지는 어떤 위기감을 느낀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남자도 육아휴직을 낼 수 있다. 하지만 한 번도 내 주변에서 아빠가 되었다고 육아 휴직하는 직원을 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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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육아휴직자 수.
ⓒ 여성가족부·통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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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출산 이후 팀을 옮기거나 복직하지 않은 여자 직원들은 자주 보았다. 엄마가 아빠에 비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떨어져있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건가.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은 그리 아름답지는 않은, 그리고 남편이나 아내의 사적인 이유 그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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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성별 대학 진학율 추이
ⓒ 여성가족부·통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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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통계청에서 발표된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별 대학 진학율 추이를 보면 여성이 74.3%, 남성은 68.6%로 2008년부터 남녀비율이 역전되었고 이제 그 차이가 5%를 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알파걸(엘리트집단 여성을 지칭하는 새로운 단어)'들이 캠퍼스에서 수석을 하는 등 두각을 나타날 법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별 경제활동인구는 남성 73.3%, 여성 49.9%로 남성이 23.4% 높게 나타났으며 이 수치는 과거 10여 년간 변화가 미미한 수준이다. 왜 그럴까.

통계청에 의하면 가사육아 전담자는 721.9만 명이며 이 수는 비경제 활동인구 1580.7만 명의 45.6%에 해당한다. 또한 가사전담자가 1999년 456만 명에서 2012년 576.5만 명으로 10여 년 사이에 그 수가 120만 명이나 증가했다. 경력단절 여성의 수가 197.8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기혼여성의 20.3%이며 전년대비 4.1%가 증가한 수치다.

경력단절 사유는 결혼(46.9%), 육아(24.9%), 임신출산(24.2%)로 나타났다. 결국 여성 교육의 기회가 늘어난 반면 실제로 사회에 진출한 많은 여성들은 결혼, 출산, 육아를 거치면서 경력단절을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흥미롭게 읽은 책 중 하나인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스 벡-게른스하임 부부의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그 원인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먼저 저자들은 자국인 독일에서도 여성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건 68년 '5월 혁명' 이후지만 77년에 이르러서야 가족법과 결혼법의 발효를 통해 여성의 실제적인 평등이 실현되었고 현재까지도 높아진 교육기회가 여성의 고용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는 현실에 주목한다. 이유가 뭘까.

저자들은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 엄밀히 말해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개인 자유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닌 그저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노동 조건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다름 아님을 주시한다. 봉건적 위계질서에서 갓 해방된 개인이 또다시 노동시장이라는 구속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자율적 개인'은 주중이든 주말이든 가리지 않고 노동을 제공할 수도 있는,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언제라도 원할 때 회사로 뛰쳐나올 수 있는 존재다.

"종교개혁 덕분에 사람들은 교회와 신이 정해준 봉건적 위계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산업적인 세계로 들어섰다…(중략)…노동시장이 모든 사람이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은 실은 모든 사람이 이러저러한 압력에 순응하고 취업시장의 요구 조건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노동시장에서의 자유이다."(29쪽)

이러한 거짓된 '개인의 자율성'은 여성의 직장생활, 경력단절과는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답은 간단하다. 한 가정에 속한 남녀 모두가 자기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이 두 사람은 가정과 노동시장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하나의 노동 시장 일대기와 평생의 가사노동 일대기는 조화시킬 수 있지만 두 개의 노동 시장 일대기는 조화시킬 수는 없는 가족 모델의 실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동시장 일대기는 내적으로 두 배우자가 모두 자기를 우선시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개의 원심적 일대기를 서로 연결하는 일은 아슬아슬한 공중 곡예로 중심잡기가 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중략)…따라서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바로 그 조건들이 새롭고 낯선 의존들을 생산한다. 즉 스스로의 존재를 표준화하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개인들은 전통적 강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노동시장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 (29~31쪽)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는 것은 여성

중요한 건, 이때 두 배우자 중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는 것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통계치가 말해주듯 결혼, 임신, 출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시장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다. 책의 저자들은 교육기회의 평등이 사회적 지위의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나아가 산업사회에서조차 자신의 미래가 요람에서부터 결정된다고 말한다.

"여성들의 조건은 지난 세대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더 좋은 일자리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으로 교육받은 남편들은 이미 직장에서 훨씬 앞서 나가고 있으며, 여성들은 전과 다름없이 평생 가사 노동을 선고 받는다…(중략)…바로 여기에 산업 사회의 봉건적 중핵이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운명, 즉 평생 가사 노동을 할 것이냐 아니면 노동 시장에 적응해 돈벌이를 할 것이냐는 원칙적으로는 산업사회에서조차도 요람에서부터 결정된다."

유감스럽게도 당시 독일 모습이 현재 우리나라와 겹친다. 고도의 산업사회에서도 노동시장에서 남녀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지적재산권이나 환경규제의 명분을 내세워서 개발도상국이 침범할 수 없는 이미 확보된 기술 장벽을 통해 시장 진입을 막는 선진국의 현실과도 닮았다. 따지고 보면 참정권조차 없었던 여성에게 성 평등, 성해방운동의 실제적인 열매(법적 효력)를 경험한 것이 불과 반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

다시, 실내놀이터 사색

다시 우리 동네 실내놀이터로 돌아오자. 왜 남편들은 주말에도 아이를 전담하지 못하고 실내놀이터에서 뭇 아내들의 비난 대상이 되는 것인가. 사실, 다수 남편들은 더욱 치열해진 경쟁 속에서 직장생활을 견디고 주말에는 '배터리 방전 상태'다. 하지만 아내들은 그 경쟁 끼어들 틈조차 없음에 무력감을 느낀다.

우리 동네에도 즐비한 '알파걸' 엄마들은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으며 화려하게 사회에 '데뷔'했지만,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생각지도 못한 삶의 전환점을 경험하고 있다. 자기계발이나 경력관리는 고사하고 아이를 잠시 떼어놓고 가까운 카페에 한 번 나가기도 쉽지 않다.

남자는 노동시장이, 여자는 가사전담 구조가 각자의 '면역체계'를 허물어뜨리고 결국 그 두 사람이 한 조직(가정) 안에서 다투고 서로를 비난하는 결과를 낳는다. 아마도 육아를 책임져주지 않는 한국사회는 점점 더, 구조적으로 부부를 갈등관계로 밀어넣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끔 유럽의 선진 육아 시스템을 엿보면서 놀라움과 더불어 어서 빨리 그런 사회구조가 우리나라에도 자리 잡기를 기대하지만, 이미 천금보다 귀한 '젊은 엄마들'의 시계는 육아와 함께 2~3년이 훌쩍 지나간다. 남자는 남자대로 가사, 육아에 깊이 관여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미 직장 경쟁이 내 생존을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는 내 생존이 아닌, 우리 가족의 생존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시장 하에서의 새로운 가부장제 조짐도 보인다. 여성이 먼저 경제논리에 따라 사회의 성역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남편에게 넉넉한 수입만을 요구하고 자신은 오롯이 육아의 짐을 떠안는 것이다. 이게 출산과 육아를 둘러싼 우리들의 현실이 아닐까.

물론 답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련의 거시적 상황들을 부부가 공부하고 함께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내의 실직이나 경력 단절이 남편의 탓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적으로 발생한 아내의 '분노'(우울)를 이해하고 아내의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한 고민을 함께 해 나갈 필요가 있다.

반대로 전쟁터 같은 노동시장에서 겪는 남편의 고충과 심적 부담감에 대해 아내가 공감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이상적인 방향으로는 서로가, 사회가 규정짓는 성역할에서 벗어나 남성도 육아의 즐거움(괴로움)을 경험(분담)하고 아내도 노동시장에 발붙일 수 있는, 나아가 감히 여성이 사회에서 자아실현을 꿈꿀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현재로선, 내 생각은 이러하다.
2013/08/24 23:06 2013/08/24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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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어머니는 신문을 유심히 보다가 급하게 옷을 차려입고 누나와 나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렇게 시간에 쫓기듯 따라나섰다. 웬 횡재인가, 하는 마음으로 누나와 즐겁게 끌려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게다가 영화관 앞에서 당시에는 1개에 2000원이나 하던 바나나도 사이좋게 하나씩 입에 물었다(어머니는 바나나가 싫다고 하셨어.^^;;).

그렇게 급하게 본 게 바로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영화였다. 영화와 같은 제목으로 삽입된 노래 때문에 꽤 유명했지만, 정작 영화는 초등학생인 내가 보기에 별 재미가 없었다. 영화 스토리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 후, 그렇게 그 사건은 오래도록 잊혔다.

나는 자랐고, 대학에 갔고, 직장에 갔고,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육아에 관심이 많은 아내 덕에 육아에 관한 책들을 읽고 좋은 부모, 좋은 아빠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생길 즈음, 문득 그 노래가 떠올랐고 그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났다. 무료했던 영화보다는 그날의 어머니가 자꾸 떠올랐다. 어머니는 그날 신문에서 '장난감만 사주면 그만인가요,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영화의 타이틀을 보고 아이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라는 생각에 무작정 우리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던 듯하다.

내 어머니는 여느 부모처럼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 한 아이의 아빠가 되고 나니 가끔 떠오르는 어머니의 행동에 놀랄 때가 있다. 이제 갓 육아에 들어선 초보 아빠인 나는 벌써 매사에 아이의 나쁜 버릇을 교정하고 아이가 바른 길로 자랄 수 있도록 훈육하려는 기미가 보인다. 따지고 보면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이의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보려고 애썼던 노력이 이제는 조금 읽힌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 온몸으로 말하는 아이를 느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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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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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주말 육아는 오롯이 아빠의 몫이다(아내는 아이에게 주중에 충분히 시달렸으므로). 평소와 달리 아이가 짜증을 냈다. 날이 덥긴 했으나 매사에 구시렁거리고 미운 말을 해댔다. 함께 장을 보러 나왔다가 다음부터 이럴 거면 따라 오지 말라고 했다. 그 짜증이 저녁 시간까지 이어졌다. 3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에 저녁 밥을 만들어서 아이에게 차려줬더니 점심때 과자를 먹어서 그런지 먹으려 하질 않는다. 끝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내 눈치를 보며 억지로 조금 더 먹었다.

씻기고 재우려는 데 아이가 짜증 내는 수준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몸을 만져보니, 열이 심하게 났다. 39도를 훌쩍 넘긴 고열상태. '아…. 얘가 아팠구나.' 밤새도록 해열제를 먹이고 물로 몸을 닦아주면서 아이를 바라본다. "아파서 짜증이 났었구나. 아빠가 미안해"라고 말하는 순간, 내 눈 주위가 화끈거린다. 분노의 주말 육아가 순식간에 심한 죄책감에 빠져들게 한다.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었는데 아이에게 그 분노가 향해 있다가 갑자기 깨달은 내 잘못으로 인한 절망감에, 주말 밤 끝내 멘붕 상태가 되었다.

청년 시절 스스로 가졌던 긍정적인 생각들은 결혼하고 아내와 살면서 한 번 무너지고, 육아하면서 또 한 번 무너진다. 난 살면서 매 순간은 아니지만, 삶의 상당 부분에서 스스로 참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자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아빠 노릇, 아이가 태어나서 장성하기까지 그 아이가 상하지 않고 잘 자라도록 돕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느낀다. 정서적인 것은 고사하고 몸뚱이만이라도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지. 특히나 오늘처럼 아픈 아이를 인지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된다.

영화 <비포 미드나잇>에서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가 호텔 방에서 육아 이야기를 하며 심하게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 제시가 출장을 다니고 외부 활동할 때, 셀린느는 두 쌍둥이를 낳고 어쩔 줄을 몰라하며 불안해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한 아이의 성장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 매 순간 커가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해해야 하는 한 엄마의 심리가 잘 드러난 장면이었다.

육아를 전담하는 세상의 많은 엄마들은 오죽할까 싶다. 고로 이 공포를 부모 중 한 사람에게만 짐 지워서는 안 되는 이유가 나름 자명한 셈이다. 하지만 죄책감에 사로잡힌 오늘은 이조차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아이가 커서도 나에게, 적어도 막연한 고마움을 갖는 부모로 남을 수 있을까. 가끔 조바심이 난다. 자신이 없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본 <어른들은 몰라요>가 떠올랐다. 그래, 어른들은 모른다. 일상에 지쳐서 아이들의 세밀한 표현과 손짓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다.

이번 주말처럼 아이의 상태도 모른 채 버릇없이 군다고 호통을 칠 때도 있다. 몸의 질병은 낫더라도 자라서 그런 서운함과 억울함이 아빠를 바라보는 아이의 정서에 어둡게 자리 잡지 않기를 뒤늦게 바라곤 한다. 내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부모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온몸으로 하는 아이의 말을 매 순간 좀 더 귀담아 들어야겠다.
2013/08/16 23:04 2013/08/16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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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이와 놀다 보면 아이가 "아빠, 그냥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줘"라고 말할 때가 있다. 과자를 많이 먹거나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나는 즉시 물러선다. "어… 알았어." 사실 나는 아이의 놀이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몹쓸 모범생 기질 때문에 정해진 룰을 아이에게 강요할 때가 종종 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어떤 정형화된 방식을 '부드럽지만 교묘하게' 강요하면, 눈치가 9단인 다섯 살의 아이는 즉시 그것을 감지하고 아빠에게 항의한다. 내가 이게 바른 방법이라고, 더 재미있는 방법이라고 혹은 이렇게 '해야 한다'며 아이를 교정하려 애를 쓰면 쓸수록 사실상 아이는 위축되고 재량은 줄어든다. 이런 개입이 반복되면 아이는 점점 외부 세계에 주어진 룰부터 찾으려고 하며 주변 눈치를 보고 불안해한다.

결국 아이는 자기가 즐기는 놀이에서조차 주도권을 잃게 되고, 아빠가 노는 방식을 곁에서 지켜보다가 정작 본인은 금세 흥미를 잃고 만다. '아빠주도형 놀이'의 탄생이랄까. 솔직히 나는 드러나지 않게 내심 이 모든 과정을 아이가 체화(體化)하길 기대하며 은근히 아이에게 강요하는 편이다. 내가 '범생처럼' 자라왔기 때문에 아들에게도 그렇게 내 DNA를 전수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강요에도 자기주장을 분명히 해주는 아이가 신기하고 고맙다. 아이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내게 말을 건넨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을 정도의 소리로. 오늘도 나는 한걸음 물러서서 대답한다.

"아, 미안. 네가 혼자서 해봐."

실내놀이터, 부모의 아바타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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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의 창의력은 '방해받지 않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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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배우는 게 많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몰입'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학습한다. 재미가 있으면 친구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30분이 넘도록 집중력을 가지고 특정한 관찰과 행동을 지속한다.

때론 과학자를 방불케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다가 때로는 꺄르르 혼자 빵 터져서 몇 분을 구르기도 한다. 이때 가장 큰 방해꾼은 유감스럽게도 나 같은 '부모들'이다. 부모의 놀이 방식과 아이의 놀이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아이의 놀이 방식은 무질서하거나 위험하고 더럽기 때문에 종종 '틀린 방식'으로 치부된다.

놀이터에서 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몰입 단계에 들어가기 직전, 부모들의 개입이 시작된다. "OO야, 그거 입에 물면 안돼", "OO야 소리지르지마, 시끄러워", "OO야, 일어나 바닥 더러워" 등과 함께 아이들이 노는 순간에도 부모들은 적극적으로 아이들 사이를 중재한다.

"OO야 빨리 장난감 친구에게 줘. 니가 형이잖아."
"OO야 저기 동생이랑 같이 블록 쌓아봐."

멀리서 보고 있으면 마치 아이들은 부모의 아바타가 된 것처럼 부모의 룰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이내 자율성을 잃은 채 불안해하며 노는 중간중간 부모의 눈치를 본다.

불안해진 아이들은 부모를 찾게 되고, 이제 부모는 아이 곁에 아예 붙어 앉아서 제대로 놀이 지침을 교육시킨다. "OO야 우리 블록으로 집을 만들어볼까" 부모는 아이에게 집을 만들어주고 자동차를 만들어준다. 아이는 부모의 작품을 감상하고 그 작품을 가지고 잠시 놀다가 이내 싫증을 낸다.

악순환으로 점점 엄마 아빠가 바빠진다. '엄마, 이거 해줘' '집 만들어줘' '여기에 올려줘' '나는 잘 못하니까 아빠가 이걸 해줘' 등등. 부모는 잠시라도 자기가 없으면 아이가 혼자 놀 줄 모른다고 한숨을 내쉰다. 놀이터에서조차 내 시간 없이 아이에게 '올인'한다고 주변 부모들에게 하소연을 한다. 그러다 이내 자기 아이를 보고 소리친다.

"OO야 그렇게 만들면 안돼. 집이 무너지잖아!"

두세 살 난 유아를 키우는 부모나, 고3 입시생을 키우는 부모나, 어떤 길을 만들어놓고 아이를 그 길로 걷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부모들은 아주 초기 단계부터 아이의 자발성을 왜곡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유아를 돌봄에 있어 위험한 상황들이 있다. 어릴수록 질병에 노출되기 쉽다. 그렇다고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온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아이를 매순간마다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 항균 티슈로 닦은 장난감만을 가지고 놀게 할 수는 없다.

아이 입장에서 그것은 스스로가 즐거운 놀이일 리 없다. 그저 하나의 역할극 내지는 무선 조종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아이의 몰입에 의한 학습 발달을 방해하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잦은 개입과 방치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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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에게는 아이의 몰입을 위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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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반대의 극단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를 놀이터에 던져 놓고 자신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책을 읽는다(솔직히 내가 종종 그렇다, 흑…) 때때로 부모는 '개입하지 않음'과 '방치'를 오해한다. 나 또한 일상적으로 아이와 겪는 일이기도 하다. 하루는 아이와 자려고 누웠는데 하품을 하고는 눈물을 닦더니 갑자기 '눈물'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 "아빠. 눈물에서 기름 냄새가 나."
: "무슨 눈물에서 기름 냄새가…. (말 멈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나는 입을 닫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성하의 말을 막고 싶지 않았다.)

아이: "눈물이 줄줄줄 내려오면 입안에 들어가는데 그때 여러 가지 냄새가 나거든. 햄 냄새도 나고, 치킨 냄새도 나고, 어… 어… 막 그래…."
: "크크크, 아, 그렇구나. 아빠는 잘 몰랐네. 눈물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구나. 너 어떻게 알았어?"
아이: "나…, 나 먹어봐서 다 알아.(뭔가 무게 잡는 듯한 눈빛)"

사실 아이가 첫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무슨 눈물에서 기름 냄새가 나니? 냄새가 아니고 '맛'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그건 소금 맛이야"라고 말하려고 했다. 아마 그랬다면 소심한 우리 아이는 '눈물은 소금 맛'이라는 아빠의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눈물을 냄새로 표현했다는 점 그리고 눈물의 맛(냄새)이 기름·치킨·햄과 같았다는 말에 놀랐다. 눈물이 짜기는 하지만, 소금 맛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서, 아이는 간이 밴 음식들을 떠올린다는 사실에 나는 전율하기까지 했다.

사소한 일로도 우린 부모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훼손하고 난도질하고 있을까. '정답'에 이르는 빠른 길을 알려준다며 부모의 언어와 생각을 자녀에게 이식시키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참으로 아이의 자라남은, 오름직한 동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처럼 예민하게 느끼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공감되지 않는 움직임이 많다. 내가 매일을 분주하게, 그리고 어딘가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마다 지나치는 많은 아이의 몸짓과 속삭임이 있으리라.

매번 명시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순간에도 부모는 아이를 교육할 수 있다. 부모는 자주 아이의 세밀한 행동들을 관찰해야 한다. 아이는 도약하기 직전의 선수나 멀리 뛰기 위해 잠시 몸을 웅크린 개구리 같다. 아이의 작은 몸짓·표정·손길·한마디 툭 내뱉은 말을 읽으면서 내 아이의 독특한 성격과 욕구 그리고 성장의 속도를 유추할 수 있다. 때때로 적당한 수준의 부모의 개입은 벽을 향해 계속 걸어가는 모터 로봇의 방향을 돌려놓은 것 같은 효과를 준다. 작은 매듭에 걸려 헝클어진 실의 한쪽 끝을 풀어주면 긴 실타래가 한번에 풀리는 것처럼 아이는 더 높게 멀리 뛸 수 있다.

잦은 개입과 완전한 방치의 극단 사이에서 적당한 수준의 거리 두기와 적당한 개입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관찰자'로서 부모가 자리매김하는 게 아이의 '창의력 돋는 몰입 행위'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아직 더 배울 것이 많겠지만 현재로서 내가 느끼는 부모의 자리는 그렇다. 오늘도 내 식이 아닌 아이의 방식을 생각하며, 아이와 함께 있는 순간만은 아이의 언어에 더 귀를 기울이자고 다짐하는 날이다.
2013/08/04 23:02 2013/08/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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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결국 결혼에 골인하자 두 사람이 싱글일 때는 전혀 고민해 보지 않았던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그녀는 '아내'와 '며느리'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는데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썩 좋은 위치는 아닌 듯 했다.

첫 명절에 아내는 내게 왜 처가가 아닌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야 하는지를 물었다. 불행히도 나는 아내의 간단한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해주지 못했다. 다행히 우리 집안은 명절 제삿날에 남자 여자고 할 것 없이 음식을 나르고 치우는 일에 함께 하는 집이었다.

아내가 설거지를 할 때 큰어머니는 나에게 함께 도우라고 눈치를 주는 센스있는 분이었지만, 처가에 먼저 갈 수 없는 근본적인 상황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단순히 우리 부부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명절이 끝나면 매번 직장, 친구들 모임에서 며느리의 낮은 사회적 지위에 관한 성토대회가 자주 열리곤 했다.

아내가 임신을 했다. 생명의 신기함과 아빠됨의 설렘을 만끽하고 있을 즈음 지방에 사시는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우리 부부에게(엄밀히 말하자면 나에게만) 당신이 이미 아이의 이름을 지었노라고 말했다. 그것도 집안의 '돌림자'에 맞춰서. 따지고 보면 내 이름도 집안 돌림자의 법칙에 맞아 떨어지는 이름이다.

얘길 전해들은 아내는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에도 아내는, 남편의 성을 따는 것도 모자라서 이름 두 글자 중에 하나마저 남편 집안 룰을 따르는 것이 불합리하지 않냐고 물었다. 10개월 동안 정성스레 품었다가 해산의 고통 후에도 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아내의 처지에서 볼 때, 특정 집안의 대를 잇는 과정에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존재감 없는 며느리의 처지를 제대로 인지하게 된 듯 했다.

나 또한 아내의 속상함에 공감했다. 이렇듯 매사에 논리에 능한 나였으나 아내의 질문은 항상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 이름짓기 사건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아내가 마음에 들어함으로써 하나의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나는 출생신고를 하기 직전까지 이런저런 걱정에 잠을 뒤척였다. 만약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아내가 끝내 원치 않았다면, 결국에 나는 아내와 상의해서 아이에게 한글 이름을 지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하기까지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으로 평소에 관심도 없던 우리 집안의 어떤 강한 힘이 나를 옥죄는 느낌을 경험했다. 희한하게도 부모님과 집안 친척들이 선한 의도로 우리 가정에 개입을 하였으나 자주 아내는 집안 대소사에 상당한 참여와 기여를 함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 문제의 구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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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나고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기 시작한 이야기는 이미 이전 글에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결혼 이후에 감지된 이런 불합리한 느낌의 실체를 알고 싶어졌다. 더욱이 아내를 이해하려고 들면 들수록 내 어머니의 평생에 대한 안타까움 또한 커져갔다. 이러한 정서들은 머리 속에서 더욱 자라나서, 만약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이런 처우들이 내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법한 일들인지 더욱 고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란 존재에 대한, 전에는 갖고 있지 않던 낯선 생각들이 내 이성을 자극했다.

나는 대체로 궁금한 영역이 있으면 책을 찾아 읽는 편이다. 지금도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면 입문서나 개론서를 읽고 유명한 강사들의 강의를 찾아서 듣기도 한다. 여성 문제는 아내와 결혼하고서 얻은 간접 경험을 통해 관심이 커졌으나 단순히 경험에 그치는 가정 안에서의 처세나 개인의 윤리로 치부하기엔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가 태어난 이후부터 최근 2, 3년간 많은 여성주의 학자들, 저자들의 책을 읽으며 이 문제를 좀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질문은 내 아내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 논리적인 모순을 풀어내는 지적 작업의 상당 부분은 책 속 여성 구루(힌두교, 불교, 시크교 및 기타 종교에서 일컫는 스승으로 자아를 터득한 신성한 교육자를 지칭)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서, 이번 글에서는 나에게 도움을 준 여성주의 관점의 선생들 두 사람을 언급하고 그 외에 도움을 준 책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의 말미를 갈음할까 한다.

정희진. 내 여성주의 관점의 지적 여정에서 '텍스트' 격에 속하는 저자는 정희진 선생이다. 최근 <경향신문>과 <한겨레>에서도 신선하고 날카로운 기고 글들을 선보이는 그녀는,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단연 내 최고의 '구루'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녀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은 두고두고 다시 곱씹을 만한 가치가 있다.

"각 분야에서 여성 1호가 된 여성이나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바깥일을 하지만 애들 아침밥은 꼭 차려주고 나와요." 그리하여 나처럼 출세도 못했으면서 아침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주눅들게 하고, '나쁜 여자'인 여성운동가의 이미지와 확실한 선을 긋는다." (37-38쪽)

인용문 외에도 공감할 내용이 많다. 본서에서 선생은 마오쩌둥, 마르크스 모두 중산층 지식인이었지만, 언제나 페미니스트만 중산층 지식인인 것이 시비거리가 된다며 이렇게 말하는 남성들도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인 경우가 많은데 여성운동가 중 일부가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못견뎌 한다고 지적한다(39쪽). 또한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라고 못박는다(41쪽).

특히 그녀는 정신대 '할머니'와 장기수 '선생님'의 차이를 언급하는데 전자는 역사의 피해자, 전쟁의 부산물이면서 불쌍한 존재지만 후자는 역사의 치열한 주체이며, 인간의 신념과 의지를 상징하는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존재로 취급받음을 꼬집는다(53쪽). 그리고 무엇보다 공감했던 대목은 우리나라 '어머니'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 '시키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 하고(피해자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자녀들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62쪽)

백소영. 일반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화여대 백소영 교수의 책 <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는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깊이있는 육아의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최근 <엄마되기, 힐링과 킬링사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사실, 책을 읽는 도중 너무 참조하고 싶은 내용이 많아 책의 사방에 검은 줄이 그어졌다. 책 속에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언급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생각할 거리들이 넘쳐난다.

유대 한 랍비가 "만일 한 남자가 그의 딸에게 토라를 가르친다면 그건 그녀에게 음탕함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 성종은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큰 일"이라고 했다는 과거 이야기에서부터, 의대에서 전공의가 되기 전까지는 임신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 산부인과에서 딸을 낳으면 한국의 간호사들이 "예쁜 공주님이에요. 한 번 더 고생하셔야겠어요"라고 말한다는 최근 이야기까지 정말 여성들의 깊은 좌절과 아픔을 공감할 만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그중 유독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함석헌 선생의 아내 황득순 여사의 이야기였다.

"할머니 세대야 손가락에 꼽을 만한 신여성들이 있기는 했으나 다수의 여성들은 신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20세기 대표적 지성이라는 함석헌 선생님의 아내 황득순 여사도 겨우 글을 읽을 정도인 초등교육만을 받은 채 부모들에 의해 정해진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례는 당시의 '보편'이었다. 평생 "나야 뭐" 하며 사셨다는 황득순 여사. 남편이 "생각하는 백성만이 산다"고 "모든 씨알(민초)이 다 깨어나고 비판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느라 외부 강연을 숱하게 다니는 동안, 그러느라 고정적인 생활비도 준 적 드문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저 묵묵히 아이들과 가정을 책임지고 산 그런 '황득순스러운' 여자들의 삶은 우리 할머니 시대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수적인 면에서 볼 때 '보편'이었다."

제이언니의 추천 도서
1.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은이) | 교양인 | 2005년 11월

2.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백소영 (지은이) | 대한기독교서회 | 2013-05-30

3. 남자의 탄생
전인권 (지은이) | 푸른숲 | 2003년 5월

4. 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르처 (지은이) | 이프(if) | 2001년 5월

5.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크리스티안 노스럽 (지은이) | 강현주 (옮긴이) | 한문화 | 2011-09-23

6. 대한민국 부모
이승욱 | 신희경 | 김은산 (지은이) | 문학동네 | 2012-06-15

7. 내가 사랑한 여자- 공선옥.김미월 산문집
공선옥 | 김미월 (지은이) | 유유 | 2012-07-20

8.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가정 폭력과 여성 인권
정희진 (지은이) | 또하나의문화 | 2001년 8월

백소영 교수의 책은 개신교 여성으로 한정지어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이라면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고 또한 그녀가 제안하는 '공동 육아'와 같은 대안들도 진지하게 고려해볼 법하다. 

그 외. 대표적으로 두 사람을 꼽았지만 이들이 전부는 아니다. 독일에서 여성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여성주의 운동가의 대모 알리스 슈바르처의 대표작인 <아주 작은 차이>도 손꼽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가정 안에서의 성폭력과 그에 따른 아내들의 무기력함에 대해서도 깊이 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크리스티안 노스럽 박사가 쓴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에서 드러난 많은 사례들을 통해 여성의 마음이 여성의 몸에 끼치는 악영향을 직시하게 되었다. 남성 저자로는 전인권씨의 유명한 책 <남자의 탄생>을 통해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인 한 가정 안에서 이루어진 미시 정치와 그를 통해 사회전반에서의 남성의 문제, 여성의 문제를 통찰하는 혜안을 얻었다.

여성의 문제에 국한된 책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상담을 통해 한국의 병든 가정을 무섭게 파헤친 <대한민국 부모>를 통해 이 시대의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경험해보지 않은 중년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간접 경험한 소중한 책들과 저자들을, 동일한 문제로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주저함 없이 권하고 싶다.
2013/07/25 23:00 2013/07/2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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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토요일 오후. 모처럼 한산하게 재즈 음악을 들으며 아이랑 피자를 시켜먹던 중. 카페 같은 분위기에 나른한 햇살을 맞으며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다섯 살이 된 요즘은 대화가 좀 된다) 피자를 먹여주고 있는데 아내가 우리 둘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 둘… 데이트하는 커플 같아."

#2.
꽤 많은 로맨스 영화를 봤고 적지도 많지도 않은 연애를 해보았지만, 실제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상대가 열심히 말을 하는데 갑자기 주변의 영상이 멈춘 것 같이 느껴진다거나 '뽀샵처리'가 된 영상이 소리없이 흘러가는 느낌 같은 걸 경험한 적은 솔직히, 없었다. 이 아이를 만나기 전까진.

저녁시간. 아이를 재우느라 누워있는데 쉴새없이 내게 이야기를 해댄다. 찰진 두 볼살과 긴 속눈썹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정겨운 톤으로 쫑알쫑알 조그만 입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순간 입모양만 보이고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느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 나는 막 '하하하'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젠장, 나 우는 거냐).

"아빠 내 말 듣고 있어?"

아이의 물음에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웃었다. 난, 이 아이 참 사랑하는 것 같다.

남편의 육아 분담은 헌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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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든 아이의 모습, 가끔 말도 하고 꺄르르 웃기도 한다.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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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남편의 육아 분담에 대해 희생 내지는 헌신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가부정적 성역할이 남성에게 육아의 짐을 덜었다기보다 오히려 어떤 '결핍'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편이다.

내가 요리한 음식을 아이의 입에 넣어줄 때의 느낌, 한 숟갈 입에 넣고 아이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최고!"라고 소리를 지를 때 드는 묘한 성취감, 어린이집에 데리러 가면 아이들 속에서 놀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놀던 장난감들을 다 내려놓고 달려와서 작은 팔로 목을 끌어안아줄 때.

토닥여주며 재울 때 하던 옹알이들, 이제는 제법 또렷한 단어들, 문장들. 그 시시콜콜함에 자주 '빵터지는' 아내와 나의 웃음소리. 숨쉴 때 몸의 오르내림. 까딱이는 손가락, 꿈을 꾸는지 뭘 먹기도 하고 뭐라고 입모양을 만들다가 내 겨드랑이 속으로 얼굴을 파묻을 때 그 작은 몸뚱이의 촉감. 수시로 변하는 얼굴 표정과 발달 단계마다 보이는 특유의 표현들.

아이가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고, 아이가 듣는 것을 듣고 아이가 세상을 인식하는 순서대로 세상을 인식하는 경험들, 그 일체를 하루하루 일에 찌들은 아빠들은 무시로 박탈 당하는 셈이다. 이렇듯 아이와의 교감은 일상을 함께하지 않으면 금전적 후원이나 관조적인 자세로는 결코 깊어지지 않는다.

주면서 치유되는 '셀프 쓰다듬'

어떤 의미에서 좀 더 내 내면을 깊이 돌아본다면,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나누는 이런 행복감 그 이면에는 내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터치'가 있음을 자주 깨닫는다. 아이를 간지럽히고 안아주고 만져주고 쓰다듬어주고 '폭풍뽀뽀'를 쏟아부을 때 아이의 입장에서 느낄 감정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 감정을 추정하면서, 나또한 나름 즐거워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아버지가 나를 아끼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내가 잘 때가 지나서야 퇴근했다. 늦은 밤 자주 술에 취해서 들어왔고 어머니와는 금슬이 좋지 않았다. 또한 내 친구의 이름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일절 알지 못했다.

가끔 아내에게 내 아이가 참 부럽다는 고백을 한다. 물론 그건 아내가 나보다 아이를 더 부드럽고 애정 가득하게 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내 스스로가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뺨을 부비면서 잠들거나 함께 웃으며 흥겹게 놀던 경험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아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내 정서의 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아이에게 좋은 교훈이나 법칙, 지식보다는 좋은 유년 시절의 정서를 주고 싶은 아내와 나의 바람. 한편으로 그 씁쓸한 바람은 내가 아들에게 해주면서도 유체이탈하여 그것을 누리고 있는 '셀프 쓰다듬'에 다름 아니다.

단 한 번도 아버지는 내가 울 때 나를 꼭 안아준 적이 없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아이가 울길래 일어나서 꼭 안아줬다. 진정, 주면서 치유되는 '셀프 쓰다듬'이다.
2013/07/18 22:58 2013/07/18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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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출산, 육아. 이전에는 몰랐던 여성문제에 눈을 뜨게 된 남편의 반성과 성찰을 담았습니다. 육아를 통해 얻는 소소한 즐거움과 더불어 조금씩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언니', 내지는 '엄마'의 정체성을 발견해 가는 과정 중에 쓰는 사적이지만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글들을 모았습니다. - 기자 말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와는 영영 '빠이빠이'일 줄 알았는데 웬걸 30대에도 여전히 직무 관련 교육부터 프레젠테이션, 어학까지 여전히 배워야 할 게 많다. 인터넷에 떠도는 자기계발서 사진 속 책 제목들이 '10대,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 '20대, 공부에 미쳐라',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 '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 '공부하다 죽어라'인 걸 보고 많이들 웃던데 정작 나의 일상만 봐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다. 30대에 공부는 전쟁이다.

얼마 전 기한 내에 마쳐야 하는 온라인 수업이 있어서 새벽녘에 간신히 잠을 깼으나 알람 소리를 들은 아이가 하필 그 시간에 깨서 뒤척이며 우는 바람에 끝내 수업을 못 들었다. 아내가 달래보았지만 주로 잘 때는 내가 아이를 재우는 탓에 끝내 내가 자리에 누워서야 아이도 잠이 들었다. 싱글일 때나 신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때때로 육아로 인해 해야 할 일을 못하거나 발이 묶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내는 뭐하고 네가 아이를 데리러 가냐?

최근 아내도 꼭 듣고 싶은 강의를 발견했는데 시간이 좀 애매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강의인데 어쩔 수 없이 내가 조금 일찍 퇴근해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와야 하는 상황. 처음엔 일찍 퇴근하면 회사 눈치를 봐야하는 게 싫어서 반대하려 했지만 며칠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내는 육아를 위해 거의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사는데 주 1회 퇴근을 조금 앞당긴다는 걸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건 부부 사이에 공평하지 않은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강의가 영원히 지속될 것도 아닐텐데, 처음부터 막기보다는 일단 해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상의를 해보자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그조차도 아내가 어린이집에다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까지 아이를 봐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일단 그러자고는 했는데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매주 같은 날 회사를 일찍 빠져나오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두 주는 이리저리 둘러대면 그만인데 매주 같은 날 다른 직원들보다 일찍 의자에서 '엉덩이를 쳐 들어야' 하는 상황이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 어린이집에 아이 데리러 나간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아마 다수는 '아내는 뭐하고 네가 아이를 매번 데리러 가냐'고 물을 것이고 내 상사는 그런 나를 배려하기보다는 도리어 나를 주시하게 될 게 뻔했다. 매주가 첩보작전 같은 이 상황이란.

아빠가 이럴진대 엄마는...

'아빠가 이럴진대 엄마는 오죽할까.'

퇴근길을 도망쳐 나오는 몇 주간의 경험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간헐적인 매주 한 번의 이른 퇴근. 게다가 지속적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지 않아도 되는 내(남편) 입장에서 이건 그저 하나의 육아 체험, 혹은 '엄마 코스프레'에 불과하겠지만, 매일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저녁이면 '짤없이' 데리러 가야 하는 직장 여성들은 출퇴근 그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 '만땅'일 것 같다.

듣기로 최근에 몇몇 수도권에서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3~4시 이후로는 안 봐준다고 하여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엄마의 퇴근 전까지만 봐주는 직업도 성행한다고 한다.

임신 때부터 직장에서는 업무 능력이 떨어졌다고 눈치 주기 일쑤고 출산 후 최소 2~3년은 아이를 돌보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 대부분을 쏟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처럼 아이를 낳으면 사회가 제대로 책임져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은 쉽지가 않다. 아이를 데리러 가려고 일찍 퇴근하거나 회식 자리를 빠지면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다. 따가운 수준을 넘어 임신, 출산 전후로 퇴사를 종용하는 회사도 넘쳐난다.

이렇듯 복직을 하면 하는 대로, 일을 그만두게 되면 그만두는 대로 엄마들의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온라인 수업 하나만 제대로 못 들어도 답답함을 느끼는데 출산 후에 자신의 사회경력이 멈춰버린 엄마들은 오죽할까.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다음 세대의 진보와 행복을 위해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도 정말 중요한 일일텐데 정작 사회구조적으로는 이 핵심과제를 방기한 채 여성에게만 그 의무를 무한정 부담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 한창 뜨는 용어 중에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란 말이 있다. 이는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성장을 담보로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나는 이 용어가 한국사회의 엄마들에게 더 강조되어야 할 용어가 아닌가 싶다. '알파걸'들이 넘쳐나던 캠퍼스에서 사회로 직장으로 스며들어간 많은 대한민국의 딸들은 출산과 육아를 맡을 시점에서 원치 않게 사회와 격리된다. 한때 잘나가던 여성들도 아이를 낳고 그 자리를 유지하려면 슈퍼우먼이 되어야만 한다.

아빠된 나조차도 5일 중에 하루를 흔쾌히 맡아주지 못하고 망설였는데 엄마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남편인 나부터 우리 사회 전체가, 여성이 임신과 출산, 육아에 배분된 에너지를 당연하게 여기고 이를 허용하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거창한 담론들은 뒤로 한 채, 무엇보다 여성이 이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내 아내부터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지 않은 시간에 아이의 일상을 경험하는 것

오늘은 아이를 데리러 가는 날. 어린이집에서 "아빠아아~" 하고 아이가 뛰어 나온다. 요즘은 이 녀석도 은근히 아빠가 데리러 오는 날을 기다린다. 가끔 아침 출근할 때 "오늘은 아빠가 데리러 와?" 하고 묻고는 그렇다고 하면 좋아서 껑충껑충 뛴다.

아내보다 내가 더 인기가 높다(보고 있나, 당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무릎에 앉은 아이의 머리에 내 턱을 대고 앉았다. 창문으로 바람이 아이와 내 뺨을 나란히 스쳐가고, 내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아이를 안은 채 해 저무는 풍경을 바라보며 집으로 가는 길.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사실 고통분담이라고 생각한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은 이렇듯 아이와의 절절한 감정을 키워주고 있다. 해가 지지 않은 시간에 아이의 일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빠에게 희생인지 아니면 기쁨인지 헷갈린다. 아내는 이런 감정을 더 자주 느끼겠지. '행복하다, 행복하다'. 언젠가 이 날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회상할 것 같다.
2013/07/13 22:56 2013/07/13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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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출산, 육아. 이전에는 몰랐던 여성문제에 눈을 뜨게 된 남편의 반성과 성찰을 담았습니다. 육아를 통해 얻는 소소한 즐거움과 더불어 조금씩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언니', 내지는 '엄마'의 정체성을 발견해 가는 과정 중에 쓰는 사적이지만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글들을 모았습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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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퇴근 없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처음 겪는 막중한 의무감과 쉼없는 일상으로 인해 여성은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경험한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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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난 직후 부부의 일상은 바뀐다. 아이 중심으로 일상이 재편되는 셈이다. 일단, 여성은 아이를 낳으면 회사를 휴직하고 집에서 육아에 집중한다. 짧게는 2시간, 길어봤자 3~4시간 간격으로 모유 수유를 해야하므로 밤이 돼도 편히 자기는커녕 집앞 가까운 곳으로 외출을 하는 것도 용이하지 않다. 아이가 돌이 될 즈음엔 상황이 어느 정도 나아지지만 이유식, 기저귀 등 하루 종일 아이의 입고 먹고 자는 행위에 계속 개입해야 한다.

그야말로 퇴근 없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처음 겪는 막중한 의무감과 쉼없는 일상으로 인해 여성은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경험한다. 출산 후에 호르몬 때문에 생기는 여성의 감정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육아 과정 내내 우울함이 이어지는 경우에는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원래 하던 집안일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장기간 휴직이 보장되지 않아 직장으로 복귀를 해야 하면, 싱글 혹은 신혼부부일 때보다 1.5배 이상의 물리적인 힘이 더 필요하다. 남편이 중간중간 도와주지만 꼭 본인(애엄마)이 챙겨야 하는 특정한 것들이 있으므로 남편은 육아에 관한 한 영원한 '조수'일 뿐이다. 게다가 둘째나 셋째가 생기면 이 무한 프로젝트는 이후로도 몇 년 간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해서 돌아가게 되고 일상의 피로도는 가중된다.

엄마가 된 여성을 옥죄는 일상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여성은 아이가 생긴 후부터 매순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 가운데 놓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친구나 동호회 모임, 혹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도 내 마음이 침체되는 날이면 그냥 잠수를 타면 그만이었다. 하다못해 회사도 하루이틀은 아프다고 '뻥을 치고' 월차를 낼 수도 있었다. 내 지옥같은 내면을 숨기기 위해 세상과 잠시 격리된 시간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사실 그땐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 후에도 남편과 심하게 다투면 다른 방에 들어가서 각자 생활을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마음이 지옥같고 내 속이 타들어가도 모유나 이유식은 반드시 먹여야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 답답한 마음에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보지만, 조금만 머리를 굴려봐도 할 일이 산더미다. 내일 입을 아이 내복도 빨아야하고 어린이집 아이 친구가 생일이라 선물도 준비해야한다.

일상이 엄마된 여성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싱글 때의 철없던 내가 이제 책임감도 커지고 세상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하루하루가 매번 정서적으로 기쁠 수만은 없다. 반복되는 허드렛일이 더 마음 속 어둠을 불러온다.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도 일순간 허물어질 것 같은 날들이 있고 그런 날들을 한 번 두 번, 여러 번 참다보면, 어느덧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우울이 마음 속에 똬리를 튼다.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

이게 내가 주변에서 경험하는 여성 육아 우울증의 전형적인 형태다.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 여성들은 누구나 육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털어내야 한다는 인식마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가 아는 몇몇 착한 아내들은 부부싸움을 해도 아침은 꼬박 꼬박 차려주고 출근을 시키는 반면 남편은 기분이 상해서 더욱 육아에 신경을 쓰지 않는 '기현상'을 보였다. 육아 조수인 남편은 기분 나빠서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다.

육아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이된다. 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 빨리 따라오지 않고 장난감 코너를 두리번 거리는 아이의 등짝을 때리며 끌고 가는 엄마를 보고 사람들은 쉽게 손가락질 해댄다. 하지만 그 엄마의 내면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고립된 섬'이 된 지 오래라면 어떨까.

어떤 육아책의 제목은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던데 제목 자체가 불만족스럽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사회가, 이 세상이, 그 가정이 엄마를 아프게 했고, '그래서'(그 결과로)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엄마도 안다. 자신이 별 시답잖은 이유를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분노를 쏟아낸다는 사실을. 죄책감이 얹혀진 채로 엄마의 아름답던 영혼은 침잠하고 썩어간다.

따라서 엄마가 살려면, 가장 먼저 '엄마만 할 수 있는 집안 일'이 없어져야 한다. 엄마가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가정 내 일상이 사라져야 한다. 엄마의 마음이 지옥 같을 때 훌쩍 어딘가로 사라질 수 있어야, 그 시간이 보장되어야 다시 천사의 미소로 아이에게 돌아올 수 있다. 육아 프로젝트에 있어, 엄마의 '무한책임'에서 풀려나야 한다. 그럴려면 남편이 '조수'로만 기능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단 하루 이틀이라도 아빠가 육아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장사한 지 사흘된 예수' 같았던 아내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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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 여성들은 누구나 육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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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내가 개인적인 일로 세미나를 준비할 일이 있었는데, 세미나가 끝난 후에 그간의 피로가 몰려왔던지 주말 내내 '장사한 지 사흘된 예수'처럼 누워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준비 과정 중에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결국 아이와 나는 일요일 저녁까지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아이가 가끔 누워 있는 아내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내는 정말 죽은 사람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2~3일간 아이는 가끔 내복 상의와 하의를 짝이 맞지 않게 입었고 끼니 중 한두 끼를 피자와 치킨으로 때웠으며 피곤한 아빠의 무관심에 한두 번 울음을 터뜨려야 했다. 그래도 우리 집은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일요일 저녁. 아내가 부활했다. 아내가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하자 집안이 금세 빛이 나고 아이는 웃으며 엄마를 안아 준다. 엄마는 아빠를 보며 말한다.

"수고 많았음묘. 담주에 이틀 놀다오삼."
(휴가 이틀 받았다!)

평소에는 아이를 씻기고 재우는 건 내 일이지만 피곤함을 털어낸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서 씻기고 눕혀 놓고 쓰다듬으며 재운다. 난 멍하게 풀린 눈으로 둘이 잠들기까지 지켜봤다. 그리곤 컴퓨터를 켠 뒤 미드(미국 드라마)를 한 편 때렸다(봤다). 주말 동안의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것을 깨닫는 데에는 나도 사실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나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하면서도 스스로 착한 남편이라고 굳게 믿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아내와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육아를 분담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아내'가 '엄마'가 어떤 포지션인가에 대해 실감했다.

아내와의 결혼, 출산과 육아의 경험은 나를 '유사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 간혹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나는 '제이언니'로 불린다. 아내 문제, 엄마 문제, 쉽게 말해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얻게 된 별명이다. 아빠의 위치에 있지만 '언니'의 시선으로 풀고 싶은 이슈들, 일상들이 종종 뇌리를 파고든다. 앞으로도 종종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3/07/04 22:52 2013/07/04 2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