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6)
/김용주
(5) IVF 사회참여 교육지침
간사회에서는 이러한 혼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IVF 사회참여 지침 마련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동안 학원사역부에서 작업해오던 내용을 당시 황성수 간사의 발제로 정리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IVF 사회참여 교육지침’(이하 사침)이라 불리는 문건이다.
“간사회는 독립적으로 방향성 논의를 진행했는데 이것과는 별도로 6개대 학생들과의 계속적인 대화를 위해 간사대책위를 구성하였다. 방향성 논의는 황성수 간사의 발제안(6월 이전까지 고직한 간사와 논의해왔던 결과물)을 중심으로 크게 (1)복음주의 안에서의 사회참여의 위상 (2)IVF의 사회참여의 범위 등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예정되었던 간사수련회를 포기하면서 총 3차(9일)에 걸쳐 논의한 결과물이 '사회참여 교육지침(사침)'으로 나오게 되었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사침은 복음주의 사회참여의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신학적 근거와 학원 IVF 운동에서의 사회참여 지침을 방대하게 집대성한 자료로서 당시 간사회의 신학적 깊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사침은 학생들 입장에서는 IVF가 복음전도의 사명에 치중한 단체임을 재천명하였고, 실천 각론에서 학생들의 집단적 사회참여를 막는 방향으로 서술됨으로서 갈등을 증폭시키는 문건이 되고 말았다. 당시 간사들이 이 사침을 가지고 미숙한 방식으로 지부 학생들의 동의를 묻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는 여러 지부에 치명타를 안겨줬다.
“강: 사회참여지침으로 인한 부작용이 많았어요. 내용이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참 간사들이 그걸 들고 학교에 가서 문제 있는 학생들에게 동의여부를 물었는데, 그 때문에 떨어져 나가게 된 학생들이 많아요./ 이: 연세대의 경우는 90, 91학번이 많이 없어졌죠. 6개대 사태의 여파가 6개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사회참여에 의식이 있었던 여러 학교에 치명타를 줬어요.”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이 지침에 대한 동의여부를 묻는 과정에서 1명의 전담보조 간사(최진영 간사, 이대 담당)와 3명의 수습간사(정진훈(경희대 광운대), 황호동(건국대), 장은경(이대))가 동의하지 않았다. 정진훈, 장은경 간사는 사회참여에 있어서 로날드 사이더의 입장을 IVF가 취해야 한다는 이의를 제기하였고, 황호동 간사는 '사침' 중 하나님나라 확장 부분에 동의할 수 없음을 밝혔으며, 장은경 간사는 교육방법론에도 이견이 있었다. 이들은 논의 후 문제가 된 6개대를 특화된 공동체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간사회가 동의한 '사침'을 거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이의서(‘사회참여 지침에 대한 이의서’)의 형태로 간사회와 학생회에 전달하였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6) 9인 대책위
“학협에서는 서울지역 임시 대표자협의회를 개최하여 IVF 방향성 논의를 위한 9인 학생대책위원회(이하 '9인대책위')를 구성하였다.(7월1일) 9인대책위에서는 2차에 걸쳐 자료수집 및 연구일정을 계획했고(7월3일, 9일), 농활을 마친 후 본격적인 연구와 토론에 들어갔다.(중략) 9인대책위는 방향성 논의 중 6개대측 3인 위원들의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이해와 IVF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6개대 측의 3인 위원과 논의해왔던 서남/동북의 6인 위원들은 6개대 측 3인 위원들의 IVF 운동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논의기간 중 간간히 표명했으며, '사침'을 가지고 9인대책위와 논의하던 자리(8/10)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6개대측 3인 위원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도 복음주의이며 IVF의 정체성은 논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서남/동북의 6인 위원들은 IVF의 신학적 입장과 정체성은 논의할 부분이 아니라 교육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9인대책위 토론에서는 사회참여 방향성 외에도 학생자발성에 대한 논의시 간사들을 배제하고자 하는 의중을 드러냈다. 한 학생은 “간사님들이 학생운동의 중심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셔야 한다. 개척지부는 간사중심적일 수 밖에 없지만 준지부 이상에서는 간사님이 뒤로 물러서고 학생중심적이어야 한다. 즉 집단적 결정권에서 간사님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리더 모임에서 또는 아래에서 수렴된 내용인 간사님 선에서 한마디에 무시될 수 없다. 대표나 리더를 통해 간사님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지만, 논의 구조에 직접적 발언권을 행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생각도 드러냈다. 특히 학생들 중에는 신앙적 전제 자체가 다른 급진적인 부류도 있었다.
“6개대의 학생들도, 급진적인 친구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에 모두를 통으로 보기는 어려워요. 그 중 급진적인 지도 그룹들은 한신연(한국신학연구소) 쪽에서 나온 책을 주로 학습했기 때문에, 6개대 쪽에 전제가 다른 사람들이 있긴 했어요. 당시의 보수적인 사람들한테는 충격적이었을 고백이나 내용들이 있었고(창세기를 신화로 믿는다든지), ‘죄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얘기하지 말라’는 등 복음주의적 확신에서는 떠나버린 이야기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고요, 우후죽순처럼 있었어요. 또 91년 LTC 때 3분의 1 정도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들었는데요, 사회참여 얘기는 많았지만 정작 기초적인 복음은 거의 못 들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못 만난 친구들이 많았던 거예요. 그걸 문제시 하지 않는 분위기가 6개대 중에 있었던 게 사실이고요.” (이시종,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특별히 기초적인 복음조차 훈련되지 않은 학생들이 당시 6개대에 속해 있었지만 6개대측이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던 분위기는 당시 간사들이 심각하게 우려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리더수련회(LTC)에서 대상자의 1/3이 영접을 했던 당시 상황은 성경연구와 신앙훈련에 충실했던 간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신앙적 기본기 없이 교만하기만 한 존재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IVF에는 구체적인 방법이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신학적으로 부족했으며 각론과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모델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모델을 기존 운동권에서 따오게 되었고 노동자나 농민에 대해서 이해하고 고민했어야 했는데, 사실 복음주의권내에서는 이에 대한 충분히 논의가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서 이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신실한 선배들은 복음주의와의 균형 속에 이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지만, 후기 후배들은 기초 영성이 부족하여 복음주의적 마인드의 기초 없이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신학적 전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89년에서 90년 LTC때 대상자의 삼분의 일이 그제서야 영접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참여 운동론의 이론을 바깥에서 들여오다 보니 신학적 이탈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학생운동은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 IVF 지부 중 10개 대학 정도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특히 8월24일 대표자협의회 회의록에는 간사들의 불편한 심기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회의에 참석한 간사들은 “사회참여 지부, 혹은 복음전도 지부식의 편차는 인정할 수 없고 지부 내에서 특수 Cell의 운영은 장려한다”고 언급하면서도 “신앙적인 기초가 없는 사람이 실천의 영역에 뛰어드는 것이 문제가 있다”며 운동성향 학생들의 무너진 신앙적 기초를 지적했고 “간사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다. 학생의 입장에 동의되는 부분에서만 도움을 주는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며 불편한 심기를 표했다. 이 대목은 공동체 안에서 세대간의 인간적인 신뢰가 무너진 토론의 전형으로서, 개인적으로 6개대 사태를 통틀어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6개대 쪽 세 명의 학생들과 함께 사태를 해결해보기 위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결성해서 여름방학 내내 세계신학의 흐름, 복음주의 신학, IVF의 역사와 정신 등을 스터디했는데, 스터디 하는 내내 서로의 방향성이 다르다는 걸 확인했어요. 그런데 막바지에 그쪽(6개대쪽 세 명) 친구들은 우리와 방향성이 같다는 거예요. 교리기초에도 다 동의한다면서요. 스터디 하는 내내 우리 쪽에서는 서로 방향성이 다르다는 걸 절감했는데, 마지막에 와서 그 친구들이 ‘우리는 같다’고 하니까 어찌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문제해결이 안 되고 그 뒤에도 갈등이 계속됐어요.” (이시종,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6개대 학생들은 이 토론에서 강한 반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이나, 마지막 협의 시에 자신들이 기존 IVF와 방향성이 같으며 그 신학적 교리들에도 동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간사들과 서남, 동북 학생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6개대 학생들은 간사회에서 이미 그들을 IVF에서 분리시키기를 원했음을 간파했고 스스로가 분리되는 사태는 막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6개대와 나머지 학교들이 분리되지 않은 것은 6개대 학생지도그룹은 작은 규모로 갈라져 나갈 생각이 아니었거든요. 전략적으로 IVF를 장악하면 영향력이 커지니까 분리하지 않고 전체로 함께 가길 원했죠. ‘연합학생회를 하려고 했던 이유도 어떻게든 학생협의회의 4개대, 6개대 중심의 멤버들을 연합학생회 쪽으로 데려오기 위한 거거든요. 가령 학협 회장선거만 봐도, 6개대 외의 친구들은 별 생각 없이 오는데 이 친구들은 어떻게든 자기들 세력을 심으려고 계획적으로 접근했지요. 스스로 분리되어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지요. 이 때는 세계사적으로 소련이 붕괴되어 탈이데올로기의 분위기기 조성되었기 때문에 제3세계 학생운동이 위축되던 시기였습니다.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도 1991년 강경대 사망 사건 이후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었습니다. 이에 6개대 IVF는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학생운동의 흐름이 자신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시종, '6개대 세미나')
(7) 농활 갈등
“방향성에 대한 심각한 갈등 속에서 예정대로 진행된 농활(7월11~19일) 역시 갈등이 표면화되고 심화되는 연속성 상에 있었다. 농활과 관련하여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이외에도, 사전 협의된 바 있는 농활 전반에 관한 원칙들을 농준위에서 실행하지 않았으며, 농활명칭('농촌복음화 현장훈련')과 농활기간 동안 대원들이 지켜야 할 행동원칙을 놓고 몇몇 학생들과 논란이 있었다. 또 농활기간 중 6개대 학생들은 작업시 타학교 학생들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들의 방향성 문제제기가 정당함을 홍보했으며, 간사들의 지도력을 배제한 상태에서 농활을 진행한 마을들이 있었다.(중략) 농활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간사로서 무책임하다고 판단하여 농활학교에서의 ‘농활지침’ 강의를 하고 농활에 모든 간사가 참여키로 했다. 일부 학생들이 의도적으로 간사들을 방해, 배제함으로 효율적인 지도가 어려웠으며 일부 간사들은 심각한 인격적 모멸까지 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대책위는 간사회측에서 만든 ‘농촌복음화 훈련지침서’가 사침과 마찬가지로 그간 학생자발적 사업이었던 농활에 대한 새로운 ‘체계’(굴레)로 이해했다. 특히 농활 실무자들에 대한 간사회의 징계가 결정되자 이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농활학교 중 황성수 간사의 ‘서울지역 IVF 농촌복음화 훈련지침서(이하 농훈)’가 농준위 실무자에게 배포되고 일반 학생들에게 강의돼 학생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았다. 농훈에 따르면 학생들의 농촌활동은 교육적 훈련일 뿐이며, 따라서 학생은 우선 배워야 하고 졸업 후에나 진로를 결정해 현장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농활의 역사를 무시하고 새로운 체계를 잡아가려는 의도에 학생들의 반발은 컸다. 또한 이 기간 중 공식적으로 농준위 실무자 중 6개대 대책위 위원들에 대한 징계를 간사회에서 결정, 통보하였다.” (대책위, ‘IVF 서울지역 농활 학교 개최’)
당시 농활에 참가한 간사들은 참아내기 힘든 대우를 경험해야 했다. 기록된 일화 중에는 “농활 첫째 날 간사들을 소개하던 중 대원으로 소개하며 형제 자매, 혹은 간사님으로 부르지 않고 대원으로 부름”, “동네 이장님께 대원 소개를 하던 중 황성수 간사가 자신을 지도간사로 소개하자, 소개가 끝난 후 학생들이 황간사에게 항의하며 대원의 자격으로 농활에 참여할 것으로 요구” 등의 사건이 있었고 “그날 늦은 밤 평가화에서 황간사님이 해야 할 문건 작업으로 노동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겠다고 하자 함께 대원으로 똑같이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평가회에 발언권을 줄 수 없다고 함”으로써 결국 간사회는 이와 함께 여러 사유를 들어 징계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