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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5)

 

/김용주

 

 

 

 

(3) 강경대 사망과 시국선언

1991 4 26, 학원자주화 투쟁에 참여한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1학년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 소속 사복경찰에게 쇠파이프로 구타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부터 강경대의 유해가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히기까지 25일간 한국은 대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4 29일엔 전남대생 박승희가 강경대 치사사건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회중에 분신했고(5 19일 사망), 5 1일에는 안동대생 김영균이(5 2일 사망), 그리고 3일에는 경원대생 천세용이(5 3일 사망), 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서강대 옥상에서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는 등 모두 11명의 목숨이 사라져갔다. 이른바 공안정국에서 치사정국으로, 그리고 다시 분신정국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강경대 사망은 공권력의 살인행위 혹은 당사자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측면 외에도 기독학생운동사에서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87 6.29선언 이후로 사회주의 노선의 급격한 쇠퇴에 따른 학생운동의 위기감과 기독학생들에게는 암울했던 80년대에 자신들이 침묵해야 했던 죄책감, 신앙적 양심이 묘하게 교차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공권력이 쇠파이프로 1학년생을 때려죽인 사건은 운동권과 기독학생 두 진영 모두의 행동을 촉발시켰다. 또한 이후의 분신정국은 앞서 언급한대로 예수대행진이라는 보수적 기독학생 집회라는 다분히 반대 극단의 형태 또한 양산했다. 이러한 교회의 전반적인 보수회귀의 분위기는 IVF에서 이미 사회참여의 논리를 획득한 학생들로 하여금 이 보수회귀의 흐름을 막는 것이 자신들이 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라고 인식하였다.

 

 

강경대 사망 사건 이후 학생들의 혼란을 우려한 간사회는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제안'이라는 문건을 작성하여 학생들의 IVF 행동지침으로 삼고자 했으나 고직한 간사가 문건 내용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NCD와 사전 협의된 바 없는 내용이므로 교육 불가하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나아가 고 간사 스스로가 선교단체 연합기도회에서 행한 현정권에 대한 비판조의 시국선언이 매체를 통해 IVF NCD라는 공식 명칭으로 게재되면서 사태가 커지게 되었다.

 

 

국회위원 외유사건, 수서특혜사건, 페놀유출사건 등에 휘말려 있던 캠퍼스에 강경대씨의 죽음은 큰 위기감을 몰고 왔다. 급변하는 캠퍼스 상황에서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할 경우 나타날 학생들의 혼란을 우려한 서울지역의 간사회에서는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제안'이라는 문건을 작성, 일부 배포하는 한편, 53~4일로 예정되어 있던 대표자 수련회에서 대표들의 동의를 거쳐 이후 캠퍼스 상황에 대처하는 공식 문건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위의 모임에 NCD로 참석했던 고직한 간사는 문건 내용에 몇 가지 문제 제기하면서 더불어 NCD와 사전 협의된 바 없는 문건으로 교육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다. 그 후, 몇몇 대표들의 문제제기가 있었기에 이 문건에 대한 동의 요청을 철회하였다. 그리고 캠퍼스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하에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회의 활동으로 인해 신촌에서 있었던 강경대씨의 장례식에 200여명, 영동교회에서 있었던 연합시국기도회에 300여명의 회원들이 참여하였다. 5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비상대책위원회가 제시한 행동원칙을 따르지 않는 일부 학생들이 나타났고 그 동안 최진영 간사의 지도를 받아왔던 학협 산하 사회부가 연합시국기도회에서 '현 시기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제기'라는 문건을 사전협의 없이 배포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한편 다른 선교단체들과 가진 시국 연합기도회의 강사로 초청받았던 고직한 간사의 발언이 기독교연합신문에 보도(‘나단의 심정으로 노태우 정권에 대해서 심판을 선언한다’고 설교한 내용이 기독교연합신문에 실림. 기사에 ‘IVF NCD’라는 공식적인 명칭이 게재)되면서 이것 역시 문제화되었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이때 간사회측에서 작성한 문건은 IVF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공동체적으로 지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기도할 것을 종용했으나, 동시에 각자의 신앙적 양심에 따른 정치적 행동에 대한 자유를 천명했다.

 

 

우리가 공동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기도하는 것인가 또는 기도만 하고 앉아있을 것인가 물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기도할 것이고, 이 기도를 가장 중요한 일과 행동으로 믿는다. 우리는 이미 서울지역 학생들에게 공고된 서울지역 학생 사회참여 지침에 따라 이 사건 자체에 대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나 어떤 정치적 행동을 공동체적으로 지지, 촉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각 개인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올바른 신앙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각자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그에 따르는 개인 나름대로의 정치적 표현 예로 성명서, 대자보, 단식, 농성, 시위 등 을 행할 자유를 존중한다.” (간사회,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제안’)

 

 

당시 6개대 사태를 겪은 이재천 간사는 학생들이 개별적인 동참 이상을 원했었다고 말한다.

 

 

“1991년에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에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하는 상황이었는데, IVF의 사회참여를 열심히 부르짖었던 학생들이 그 시위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간사회에서도 성명서를 내고 같이 참여를 했는데, 학생들은 그 이상을, 즉 정치참여를 원했어요. 간사회도 사회참여에 동의했지만, 당시 학생들의 요구를 현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전체 IVF 리더십에서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이재천, 소리 ‘소리가 만난 사람, IVF와 함께 한 꿈과 열정의 시간’)

 

 

민감했던 시기에 고직한 간사의 시국선언 등 행보로, 학생들은 보다 적극적인 참여의 열망을 키워갔으나 이내 전해진 고 간사의 직위해제 소식은 학생들을 카오스 상태로 만들었다. 특히 학생들은 이 방향성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다소 과도한 목소리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고 간사 자신도 당시 상황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는 세계사적으로 소련이 붕괴되어 탈이데올로기의 분위기기 조성되었기 때문에 제 3세계 학생운동이 위축되던 시기였습니다.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도 1991년 강경대 사망 사건 이후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었습니다. 이에 6개대 IVF는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학생운동의 흐름이 자신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버팀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고직한 간사님이 직위해제를 당합니다. 이에 6개대 IVF는 가만히 있으면 IVF가 사회참여성을 잃어버리겠다고 생각하였고 연합학생회를 장악해서 연합학생회를 통해서 구속력을 발휘하려고 하였습니다. IVF가 기독교 선교단체지만 사회문제에 주력하는 팀을 만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 그것이 시대적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학적 이탈, 경건성 상실, 간사와 마찰 등을 황성수 간사님(당시 연대 간사님)과 함께 고직한 간사님도 우려하셨습니다.”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학생들 입장에서는 고직한 간사의 직위해제 이후 IVF의 보수회귀에 대한 우려감을 가질만한 개연성이 다분히 존재했다. 6개대 사태로 인해 결국에는 서울대 지부취소 결정을 하면서 공개한 당시 총무의 서신을 보면 당시 간사회와 이사회의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남 총무는 서신에서 “IVF는 다른 선교단체들보다 앞서 기독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왔지만, “IVF는 신학적으로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가르친다고 해서 IVF의 정체성을 사회참여를 하는 단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간사회 자료와 당시 한국 기독교 전반적인 분위기로 볼 때 간사회와 이사회는 IVF가 사회참여적인 신학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심적 부담을 느낀 것 같다.

 

 

“80년대 초반 기독인의 사회적 책임을 무시하거나 백안시 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IVF, 다른 선교단체들보다 앞서 기독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온 것과 복음만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쳐온 것, 그리고 기독성을 가지고 운동권 논리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의 잘못된 이해와 적용 때문에 IVF가 사회참여를 하는 단체로 오해 받는 결과가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IVF가 신학적으로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가르친다고 해서 IVF의 정체성을 사회참여를 하는 단체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일부에서 이러한 신학적 입장과 정체성 간의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현재의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남진선, ‘IVF 현사태에 대한 총무의 공개서한’)

 

 

 

 

 

(4) 수련회 보이콧, 중재 노력, 6개대 대체수련회

고직한 간사의 직위해제를 뒤늦게 간접적으로 접한 일부 학생들은 이 문제가 보수회귀적인 상대협 간사들이 학생들의 사회참여 요청을 수용해왔다고 판단되는 고직한 간사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았다. 특히, 이전부터 IVF가 사회참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문제제기 해왔던 6개대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열리던 동북, 서남 수련회 조장모임(622)에서 '고직한 간사 직위해제와 수련회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수련회 거부 움직임을 구체화하였다. (6개대에서는 대체수련회 준비 과정에 대해 충분히 밝히지 않았다) 이후 6개대 학생들은 비상모임을 통해 대체 수련회를 준비해 간 것으로 보인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간사회는 고 간사의 직위해제가 IVF의 방향성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고 말했지만 대책위는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으며 일련의 사건들이 IVF 보수회귀라고 판단했다.

 

 

“56일 시국 연합기도회의 강연내용과 IVF 참여부분에 대한 기사가 기독교 연합신문에 실린 것으로 인해 이사회에서는 고직한 간사를 직위 해제시켰다. 이것은 고간사 사역의 방향성에 대해 내린 결정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간사 주도의 수련회 준비과정에서의 내용의 전면적 퇴보, 의견수렴 차단 등으로 IVF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던 6개대 학생들은 고간사 직위해제라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이 IVF 보수회귀라는 판단을 하고 고직한 간사 직위해제와 IVF의 보수회귀에 대한 대책위’(이하 대책위)를 구성하였다. 대책위는 수련회 보이코트를 결정하고 수련회 준비 중에 있는 간사님들과 조장들에게 알렸다. 우리에게는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할만한 아무런 장도 없었다. 장시간에 걸쳐 찬반의 의견들이 나오고 토론한 후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수련회는 6개대 학생들과 서남, 동북지방으로 나뉘어져 치르게 된다.” (대책위, ‘IVF 현 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

 

 

수련회를 앞두고는 간사와 학생 간의 갈등이 극대화되었고 급기야는 특정 학교의 리더들과 특정 학생에 대한 비난과 해당 학생들의 제명 가능성이 언급된다.

 

 

서남부 수련회를 앞두고 수련회 리더훈련에서 서울대 리더들을 배제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인즉슨, 서울대는 IVF 활동에 특히 내용에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수련회에 오면 서로가 곤란하니 오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이유였다. 특별히 사회참여에 적극적이던 학생 한 명을 거론하며 도저히 그런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수련회에서의 이런 움직임과 함께 IVF는 복음전도를 위한 단체이니, 생각이 다르면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대책위, ‘IVF 방향성과 고간사 직위해제에 대해’)

 

 

고직한 간사 직위해제 결정 후 서울지방 1~3년차 간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간사협의회를 구성하여 고 간사 문제의 중재 및 대체수련회 준비 중인 6개대 학생들과의 합의점을 찾고자 노력한다.

 

 

고직한 간사와 상임대표간사협의회(이하 상대협) 간사들이 방향성 문제로 갈등하고 있다고 본 서울지역의 1~3년차 간사들 역시 비상 전국간사모임(619)이 끝난 후, 그리고 학생들이 수련회를 거부하고 대체수련회를 준비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 후(620) 비상 평간사협의회(이하 '평간사회')를 구성하였다. 평간사회에서는 (1)고직한 간사 직위해제 문제 중재 (2)대체수련회 측과의 대화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는데 아래와 같은 활동 결과가 있었다. (1)과 관련하여, 수련회 기간 중 고직한 간사의 직위해제문제를 규명하는 공청회를 준비하였으나 문제가 방향성과 관련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시 수련회 강사로 와있던 송인규 전총무가 중재의 노력을 보임에 따라 이 문제를 상대협에 다시 위임하였다. (2)와 관련해서는, 학생들의 입장과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담당간사들과 함께 논의하면서 학생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모색하였다. 수련회 최종 조장모임이 끝난 후, 이상인 간사는 비공식 학협임원모임에 참석하여 대체수련회 개최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수련회 안에서 같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수련회 첫날 오전에는 평간사회 4명의 간사들이 대체수련회를 준비하던 김병규(학협회장) 및 박용덕(경희대87)과 만나 (1)수련회 내의 언론의 자유 보장, (2) 간사-학생 간의 동등한 발언권, (3)이후 문제에서 평간사 협의회와 연계, (4)서남/동북의 동등한 발언권 등을 조건으로 학생들이 수련회를 참석하겠다는 동의를 얻었고, 6개대 대표들은 최소한 화요일까지 수련회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모임 이후의 접촉에서 6개대 대표들이 평간사회의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결국 대체수련회가 독립적으로 개최되었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평간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체수련회가 독립적으로 개최되자 서남, 동북 수련회도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진다. 이에 간사회에서는 두 지방의 학생대표 3인을 각각 선출하여 대체수련회측과 대화에 임한다.

 

 

학생들은 이미 6개대가 방향성 문제를 제기하여 수련회를 거부하고 있음을 알고 수련회에 참석했다. 학생들은 수련회에 집중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정상적인 수련회 운영이 어려움을 알게 된 간사회에서는 6개대 학생들의 일방적인 의견만을 듣고 수련회 진행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부 학생들과 만나 대화하는 한편, 당일 밤 긴급히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그동안 있었던 사태전개 과정과 평간사회의 중재과정을 보고하고 이후 대책에 대해 논의하였다. 서남지방의 경우, 월요일 저녁에 있었던 대표-간사모임에서는 3인 대표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수련회 기간 중 소그룹 리더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간사회, 동북수련회, 대체수련회를 오가며 수 차례의 모임을 가지며 사태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수요일, 서남지방의 3인 대표와 동북 대표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1)간사와의 협력, (2)양수련회의 연계, (3)대체수련회와의 대화를 위해 총 6인의 위원들(서남, 동북지방 각 3)을 추가하여 대체수련회 측과의 대화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대체수련회에서 제안한 방학 중 방향성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북, 서남 6인 대책위의 노력으로 여러 사람의 권고가 받아들여지고 대체수련회측의 방향성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져 공시적인 방향성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간사회와 대체수련회측 사이에는 화해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간사대책위에서는 (1)간사회를 근거 없이 보수회귀로 규정하였던 것에 대해 사과문을 발표하고 (2)자숙하여 농활의 전면에 나서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73) 6개대 대표 중 이때 참석하였던 4인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간사들 입장에서는 학생들을 찾아 다니며 중재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수련회 문제 외에도) 힘들게 이루어낸 합의나 구두 약속 후 실제로는 학생들이 합의한 내용을 이행하지 않는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더욱 학생들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고 이는 간사-학생 간의 갈등을 키우는 요소로 작용한다.

 

 

 

 

**고직한 간사 면직 사유

간사회와 대책위의 중요한 입장 차이 중 하나는 고 간사의 면직 사유이다. 대책위는 이것이 고간사의 사역의 방향성 문제이며 따라서 이는 IVF 보수회귀의 시발점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간사회는 방향성의 차이가 아닌 간사회 내부의 문제였다고 말한다. 고직한 간사가 제출했던 서신은 현재 자료집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당시 IVF 총무의 서신에서만 그 이유가 비교적 간략하게 언급되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고직한 간사는 오랫동안 IVF의 간사로서 학생운동을 통한 복음화 사역에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에 고직한 간사가 IVF를 떠날 수 밖에 없게 된 것에 대해 저를 비롯한 모든 간사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고직한 간사가 마치 기존의 간사들과 방향성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기존의 소위 보수회귀적인 간사들이 고직한 간사를 몰아낸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고직한 간사와 기존의 다른 간사들은 신학적인 면에서 또 방향성 면에서, 약간의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큰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고직한 간사가 면직되게 된 것은 단순히 간사회 내부의 문제였습니다.” (총무, ‘고직한 간사 면직에 관하여’)

 

 

간사회에서 발표한 문건 ‘6개대 형제자매들의 대체 수련회를 바라보며에는 좀더 자세히 그 사유를 밝히고 있다.

 

 

고간사님의 징계사유는 6개대 대책위가 주장하는 바 시국기도회 참여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이후 빚어진 결과 즉, 기독교 연합신문에 왜곡 보도된 사실에 대해 고간사님이 아무런 도의적 책임이 없다고 하시며, 그에 따라 이사회에서 요청한 정정보도 내지는 사과광고 개재요구를 거부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동시에 기청협(기독교청년협의회), 복음과상황 편집인 등의 일을 이사회의 사전 동의 없이 한 것에 대한 중지요청 중 복음과상황 편집인만은 계속하겠다고 한데 대한 징계였습니다. 또한 이와 별개로 상임대표간사협의회와의 대립이 있어왔으며 이는 NCD의 업무 부장에 대한 견해차이와 고간사님의 사역평가에 대한 이견으로 빚어졌습니다. 따라서 6개대 대책위의 주장대로 방향성 문제와 관련된 징계나 평가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간사회, ‘6개대 형제자매들의 대체 수련회를 바라보며’) (계속)

2012/10/13 21:06 2012/10/13 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