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컨텐츠/IVF 6개대사태

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4)

 

/김용주

 

 

 

 

4. IVF 6개대 사태

앞의 기사는 당시 기독진보매체였던 복상이 바라본 ‘IVF 6개대 사태의 전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좀더 자세히 그리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물론 완전히 중립적인 입장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본 사건을 다룸에 있어 서울지방간사회(간사회)가 발행한 ‘6개대 사태 자료집’(이하 자료집) IVF <소리>지 특집 ‘91, 6개대 사태 돌아보기를 주로 인용하였다. 자료집 인용은 서울지방간사회와 6개대의 고직한 간사 직위해제와 IVF의 보수회귀에 대한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의 입장 차이로 인해 각 사건별로 간사회와 대책위의 입장을 함께 서술하였다.

 

 

(1) IVF 당시 분위기: 진보적인 간사 주도의 사회참여 바람

사회적 정의와 그리스도인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던 중에 IVF 간사님께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적 그리스도인은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회 참여에 대해 고민하던 청년들에게는 복음과 같은 말씀이었죠. 그것은 자기 삶에 정당성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청년들은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을 양심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IVF는 다른 선교단체보다 먼저 이런 고민을 활동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공정선거감시단으로 활동(: 공정선거감시단에 IVF 멤버들이 참여. 복음주의 학생운동권에서는 전례 없던 정치 참여)하기도 했고 1988년에는 농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6개대 사태를 설명하려면 당시 IVF 내부의 사회참여 흐름과 학생자발운동 성향의 태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시종 간사는 당시 보수성 일변의 다른 선교단체와 달리 IVF는 몇몇 간사들에 의해 기독교세계관을 가르쳤고 당시에 공정선거감시단과 농활 등을 통해 사회참여 활동을 추진했음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당시의 신앙과 괴리되었던 시대적 상황을 함께 고민하면서 갈급함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 중심에는 특히 6개 대학(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건국대, 경희대, 광운대)이 도드라진 활동을 하게 된다.

 

 

기독대학생들도 자기 신앙을 지키면서 동시에 사회적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섹트(sect) 안으로 도망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IVF는 약간 중간지대에 위치해 있었죠. 학생들이 공동체에 들어와 있지만 사회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문제, 당시 시대가 던져주는 문제의식을 끌어안으려고 했으니까요. 대부분의 지부는 끌어안았지만, 그걸 실천적으로 이끌어 가려고 했던 팀들은 방법론을 거의 학생운동 쪽에서 많이 찾았죠.(중략) 당시 간사들 중에 급진적인 한두 분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강의내용 자체가 전통적인 신앙관 자체를 뒤흔드는 굉장히 급진적인(radical) 내용이었어요. 그런 분들이 건대와 경희대를 이끌었고, 고대와 서울대가 그 뒤를 따라갔죠. 광운대는 개척 지부라서 리더십이 강하지는 않았는데 농활을 같이 다니면서 그 네 학교와 친하게 지냈어요. 6개대 중에서 광운대와 이대는 방향성이 달랐다기보다는 단지 그 네 대학과 친했을 뿐이었죠.” (이시종,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앞서 살펴본 바대로 이 진보적 운동의 중심에는 당시 복청의 멤버였던 고직한 간사가 있었다. 그는 IVF 내부에서 사회참여의 방향성을 연 선구자로 평가된다. (당시 고직한 간사의 평가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을 인용한 이시종 간사의 시각에 의지하였음을 밝힌다.)

 

 

고 간사님의 리더십 스타일이 독특하긴 했지만, 이분은 70년대 학번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적극적으로 당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쳐 뚫어내신 분이시죠. 시대를 앞서가는 사고를 하셨고요. 고 간사님이 IVF에서 사회참여에 대한 부분을 열지 않았으면 오늘의 위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IVF는 없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죠. 선교한국 운동, 학복협 운동도 견인해내셨고 90년대를 연합의 시대로 여신 분이니까요. IVF에서 고 간사님의 역할은 굉장히 큰 것이었죠. IVF운동이 80년대 후반에 놀랍게 성장할 수 있도록 시대의 이슈를 잡아낸 것도 고 간사님의 역할이었어요.” (이시종,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고직한 간사는 당시 IVF에서 사회참여의 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학생자발성을 고취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고 간사가 꿈꾼 복음주의 연합학생회는 전향적인 시도였지만 몇 년 뒤 그가 직위 해제된 이후 연합회는 간사회와의 심한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

 

 

이 당시에 IVF 사회 참여 운동에는 그 물꼬를 열었다고 할 수 있는 고직한 간사님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고직한 간사님은 탁월한 운동가였죠. 그 분은 IVF가 캠퍼스를 장악하는 꿈을 꾸셨습니다. 지금의 대학 총학생회의 연합체와 비슷한 전국적인 복음주의 학생회인 "연합학생회"를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IVF내에서 연합학생회장을 뽑고 전체 학생회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하셨죠. 또 학생들이 총학생회와 동아리 연합회장에 출마하는 것을 북돋았습니다. 많은 의식 있는 선배들이 고무되어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그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도 있다. 가장 큰 부분은 시대적 상황 가운데 전향적 시도를 많이 이루었지만 신앙의 기본적인 소양을 강조하지 않은 점과 IVF 타간사와 충분한 소통 없이 일을 진행하여 운동의 내적 추진력을 얻지 못한 점이 그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주의적 마인드가 부족했다는 것이고, 이로 인해 학생들과 간사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고직한 간사님이 간사들과 충분히 대화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간사회에서 어려움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간사회에서 내부적으로 정리를 해 내지 못한 면이 있어요./ : 아마 간사회와 합의되지 않는 내용들에 대해서 답답해하시다가, 마음이 맞는 몇 사람과 얘기하다 보니 사실상 나머지는 배제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 이분의 생각이 워낙 앞서가셨기 때문에, 다른 분들이 좇아오기 힘들었다고도 하더라고요. 간사님들 중에 로잔을 아셨던 분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호주에서 공부하고 오셔서) 로잔을 아셨기 때문에 그걸 소개하시고 원론적인 부분을 여셨죠. 그런데 그것을 실천하는 단계에서 사태가 수습이 안 되었던 거죠.”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따라서, 고직한 간사로 대변되는 진보적인 IVF 간사들이 영향력을 끼친 사회참여과 학생자발운동 방향성은 신학적 기초의 부재와 기존 학생운동과 방법론의 혼재 속에서 충분히 체화되지 못한 채 ‘6개대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IVF에는 구체적인 방법이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신학적으로 부족했으며 각론과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모델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모델을 기존 운동권에서 따오게 되었고 노동자나 농민에 대해서 이해하고 고민했어야 했는데, 사실 복음주의권내에서는 이에 대한 충분히 논의가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서 이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신실한 선배들은 복음주의와의 균형 속에 이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지만, 후기 후배들은 기초 영성이 부족하여 복음주의적 마인드의 기초 없이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신학적 전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89년에서 90 LTC때 대상자의 삼분의 일이 그제서야 영접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회 참여 운동론의 이론을 바깥에서 들여오다 보니 신학적 이탈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학생운동은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정리하자면 간사와 학생 간의 갈등으로 붉어진 6개대 사태는, 사실상 고직한 간사로 대변되는 IVF 내부의 사회참여, 학생자발성에 대한 운동 전략이 간사회와 이사회 전반적으로 소통과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시대적 사명에 갈급해있던 당시 학생들의 지지 속에 불안한 성장을 하다가 고 간사의 부재 속에서 신앙적으로 미숙했던 학생들에게 그 책임이 과하게 전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런 이유로 6개대 사태를 경험한 당사자들은 “6개대 사태에서 학생들과 관련된 부분은 미미하, “6개대 학생들한테만 문제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대안이 정확하게 없었다는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 제가 볼 때, 6개대 사태에서 학생들과 관련된 부분은 미미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미성숙한 간사회가 신학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것과, 사역 철학에 있어서 그 시대에 맞는 전략을 무엇으로 택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차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 포괄적으로는, 우리 IVF 운동이 당시 상황에서 던져졌던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던 거죠. 당시 사회참여 문제에 대해서 이론적, 신학적인 문제뿐 아니라 실천적인 부분까지 대안이 있었다면, 우리가 그런 학생들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겠죠. 원론적인 차원에서 사회참여에 대한 문제의식은 열렸는데 방법론까지는 못 나아간 거고요. 그러니까 6개대 학생들한테만 문제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대안이 정확하게 없었다는 것이고 또 어떤 면에서 더 치열하게 고민해 내지 못한 부분이 있어요.”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2) IVF 연합학생회와 학생자발성

IVF 연합학생회는 고직한 간사의 주도로 88년에 시작되었다. 6개대 대책위측은 연합회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88년 농촌활동의 문제의식과 학생자치기구로서 해야 할 사명에 대한 학생 스스로의 깊은 토론과 간사회와의 대화를 통해 역사적인 제1대 연합학생회가 대의원총회에서 인준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으며 자기 사업으로 여름농촌활동, 체육대회, 창립제 등 대중사업을 통해 연합사업의 유의미성과 학생자발성의 내용을 채워갔다. 89년 제2대 연합학생회가 그 맥을 이어가는 가운데 본격적인 부서별 활동을 통해 학생문화 역량강화와 기독운동에 대한 헌신적 인자 배출, 자발적 활동의 내용 심화를 이루어갔지만 그때부터 간사회와는 사소한 마찰들이 있어왔다.” (대책위, ‘IVF 현 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

 

 

학생자발적 사업을 위해 만들어진 연합회는 점점 사회문제를 놓고 간사회와 의견 대립을 갖는 조직으로 성장해갔고, 간사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학생들이 의사결정을 진행할 수 있는 구조의 특성 때문에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6개대 중심의 학생들이 연합회를 장악하기 위해 이 모임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이를 간파한 간사들은 추진력을 제한하기 위해 연합회를 협의회로 축소시키기에 이른다.

 

 

문제는 ‘연합학생회’라는 이름이었어요. 연합학생회, 즉 연합체는 의사결정을 학생대의원들이 한다는 뜻이거든요. 간사들의 의견을 배제하고 학생들이 결정할 수 있는 정도까지 법적으로는 규칙을 만들어 놓은 거였어요. 연합학생회를 만든 이유는 당시에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 필적할 만한 학생조직 - 기독교적인 멘탈리티(mentality)를 가지고 사회변혁을 하고 복음도 전할 수 있는 - 을 만들 수 있다는 포부로 조직했기 때문에, 사회참여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거기에 올인을 했고 그랬기 때문에 파워풀하게 운동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에서 출발하니까, 특히 급진적인 지도그룹이 있었던 4개대(광운대, 이대를 제외한)의 멤버들은 연합학생회를 장악하려고 목숨을 걸었어요. 그렇게 운동에 너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거니까, 그 의도를 간파한 간사들은 ‘연합학생회’를 ‘학생협의회’(학협)로 바꾸려고 했죠. ‘연합회’는 학생들이 의사결정을 하면 모두가 다 따라야 하는 구조이지만, ‘협의회’는 모두가 따라야 할 의무는 없거든요. 그래서 협의회로 바꾸려고 했고 끝내 바꿔냈죠. 그러나 학생들은 내용적으로는 계속 이것을 연합체로 가져가려고 했어요. 6개대가 분리되어 나간 후에 6개대 쪽 학생들(지도그룹)이 ‘한기연’이라는 이름을 만든 이유도 연합학생회라는 이름의 문제의식에 자기들의 이상을 담아가려고 했던 측면이 있죠.”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간사들은 연합회를 학생협의회(학협)으로 변경한 후 간사 지도 거부 태도 등을 이유로 임원을 재선출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그리고 이후 언급하게 될 농활에서의 갈등으로 인해) 학생-간사 간의 신뢰가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으며 이 때 발생한 소통의 부재가 결국 6개대 사태를 대화로 풀지 못한 채 파국을 맞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90 10윌 서울지방에서는 제3대 연합학생회 임원구성을 준비하였다. 변성렬(고대88)은 담당간사의 사전동의 없이 학협대표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그 동안 학생이 간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왔던 태도 등을 볼 때 연합학생회 대표로서 부적절함을 들어 후보 사태를 종용하였으나 변성렬은 이를 거부하였다. 간사회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대표자회의에 정식으로 통보하여 문제 제기하였으나, 가을 대표자 수련회에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변성렬을 3대 연합학생회 대표로 선임하였다. 이에 간사회에서는 전체회의를 거쳐 변성렬의 방향성, 지도력, 자질 등을 문제로 제기하여 연합학생회의 활동을 일단 정지시키고 대의원 총회를 연기한 후, 임시 대표자협의회를 통해 연합학생회의 위상을 재검토하고 그 임원을 재선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임시대표자협의회의 논의를 거쳐 (1)연합학생회의 명칭을 학생협의회(이하 '학협')로 개칭, (2)김병규(건국88)를 학협대표로 재선출, (3)간사회의 지도하에 학협을 운영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문제가 되었던 변성렬에 대해서는 간사회의 지도를 받는다는 동의 하에 학협 총무로 임명하였다. 이상의 내용에 대해 227일 학생 대의원총회(경희대)에서 인준 받았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이에 대해 대책위는 학협 문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상대협은 제3대 연합학생회 회장, 부회장의 선거결과를 묵살하고 연합학생회는 학생협의회로 위상을 추락시키고 회장으로 추대된 학생마저 간사의 발언과 강요로 회장 선출이 무효화되었고, 연합학생의 무용론까지 거론되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제3대 학생협의회가 꾸려지고 회장 김병규, 총무 변성렬, 부회장 이정아, 서기 강병도, 회계 한명호 등이 선출되었다. 올해 들어서는 71, 학협 회장과 총무에 대한 불신임이 상정되었으나 부결로 결정이 난 상태이지만 97, 간사-대표자 협의회에서 대표간사들이 부결안을 무시하고 불신임안이 제출되고 결정을 내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기본적 일사부재의 원칙마저 무시하는 월권적 행위이며 직접적 연계가 없었던 학협기구를 개별적 사람이 암묵적 지지를 표했다는 추상적 이유로 해체시켰던 것이다.” (대책위, ‘IVF 현 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

 

 

사회참여 문제와 학협을 둘러싼 학생자발성을 두고 대립각을 세우던 학생-간사 진영은 갈등 상황 가운데에서 91강경대 사망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계속)

2012/10/13 21:04 2012/10/13 2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