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나는 스스로를 인터넷 논쟁 문화 1세대라고 생각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진중권 교수와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와의 기나긴 게시판 논쟁이었다.
그 뜨겁던 논쟁이 용두사미처럼 끝맺었고
진중권은 그 논쟁 자체를 허무하게 여겼지만
그때의 강렬한 기억 이후 나는 논쟁의 묘미, 냉소의 효용성(?)을 충분히 공감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인터넷 안에서의 논쟁을 즐겼고 그것 자체를 가치있게 여겼다.
언어유희나 지식자랑의 향연이 아닌 계급장을 땐 민주적인 방식의 진정한 배움,
논쟁을 통해 더욱 도드라지는 이슈, 진리...실제로도 자주 그런 것들을 경험했다.
물론 종종 뚜껑을 열리게 만드는 이들이 있었지만, 내 바닥에서 그런 이들은 소수였고
정말 대화가 되지 않는 경우는 주변에서 알아서 자정능력을 발휘해주었다.
최근 몇년 사이 나는 그런 내 믿음에 회의감을 갖게 만든 여러 사건들을 겪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경험, 인간이 인간을 대하고 있지 않다는 절망감,
못 가진자가 더 못가진자를 까대는 황당함... 그것을 넘어서는 실망감.
정말 정성들여 쓴 글에 단 몇 글자로 굴욕감을 선사하는 쿨한 이들.
그 쿨한 무수한 댓글들 속에서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경험들, 경험들.
세상은 아름답고 모두가 희희낙낙인데 내가 무슨 스파이더맨도 아니고
이렇게 인간의 악함을 고민해야 하는 건가,
오지랖을 떨다가 내가 미치고 말겠구나 하는 반성, 자성, 비이성.
한때 나에게 있어 논쟁은 '인터넷'을 떼어내고는 말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 공간은 무지했던 나에겐 인정사정 없는 거친 선생이었고 평등한 대화의 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습게도 지금도 내겐 정든 고향 같은 느낌, 나름의 향수 같은 게 남아 있다.
하지만 그 향수에 젖어 있다가는 질식할 것 같은 위협, 혹은 똑같이 괴물이 될 것 같은
분노, 미움, 그에 따르는 죄의식, 그렇게 이어지는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감...
그런, 그런 멜랑꼴리.
어떤 연속적, 혹은 단속적 과정이 있었겠지만 어느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그렇게 결국,
나는 인터넷 댓글 문화를 혐오하게 됐다...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좀 있다. 나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많은 비평 자체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 설정에 있어-스스로도 최대 수혜자라고 여기는-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적 관점, 리차드 니버의 '변혁모델'로서의 문화 비평에 회의적이다. 기독교인들은 스스로가 진리를 아는 자, 진리를 가진 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자주 현실 세계에서 아마추어리즘에 만족하며 지내는 모습을 보여 왔다. 오히려 세속화를 배척하거나 격리되는 방식을 사용하는 종교 근본주의적 성향의 신자들과 달리 세속 사회 언저리를 배회하며 어정쩡하게 삿대질이나 해대는 존재, 뭐 그런 느낌을 자주 받았다.
▲ <아이갓 iGods> / 크레이그 뎃와일러 지음 / 황영현, 황규준 옮김 / 아바서원 펴냄 / 408면 / 1만 9500원 |
일례로 몇몇 뛰어난 연주자들을 제외하고 나는 CCM이라는 장르의 '아마추어리즘'이 싫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수의 CCM 가수들은 기똥차게 노래를 잘하지도, 나름의 철학이나 내러티브를 가진 완성도 높은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닌, 세속 음악계에 진입하기에는 모자란 역량을 '신심'으로 커버하려는 어떤 욕망이 느껴질 정도로 실력 면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여 줄 때가 많았다. 결국 CCM이란 게, 음악 자체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에, 한때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던 착한 교회 청(소)년들의 일시적인 소비 대상, 혹은 해소책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급격히 그 시장이 축소된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메타 비평의 형식을 빌어서 풀어내는, 이른바 '기독교적 관점으로 본 OO'이라는 비평들도 CCM과 마찬가지로 태생 자체가 B급이라는 편견을 가져다 줄 때가 많았다. 심리학, 과학(특히 진화론), 인문학, 사회학, 비교종교학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문화의 변혁자를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은 한 꺼풀만 벗겨 보면 근본주의자들의 텍스트와 맞닿는 듯한 착각 아닌 착각을 하게 만들었고,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나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속 사회를 바라보겠다는 '돈키호테' 식의 메타 텍스트들에게서 점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서론이 길었다. 본서 <아이갓 iGods>은 부제 'IT 기술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말해 주듯 전형적인 기독교 메타 비평서다. 솔직히 앞서 말한 이유에서 본서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허나 단적으로 말해 이 책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유익하게 읽었다. 특히, 우리가 최근에 열광하는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의 개별 기업이나 사이트를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 사회 전반적인 부분까지 나아간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상당히 진지하고 깊이가 있었다. 게다가 개별 기업들의 분석의 깊이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IT 역사를 이해하는 개론서로 이 책과 더불어 <거의 모든 IT의 역사>를 권하고 싶다.)
본서는 IT 기술 자체에 대해 비판적이다. 제목이 말해 주듯 'IT 신들'(iGods)은 진정하고도 유일한 신인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으로 대변되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 자체를 바꾸었고 제프 베조스의 아마존은 온라인상으로도 양서를, 나아가 세상의 모든 좋은 상품을 구별할 수 있는 심미안을 가져다 주었으며, 페이스북은 또 하나의 사이버 커뮤니티를, 트위터와 유튜브는 인터넷 민주화의 도구로 활용되는 등의 순기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관점은 기술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나는 대부분의 각론에 있어 저자의 우려감에 크게 공감한다.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있는 현대 IT 기술에 관한 해박하고도 방대한 분석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특히 한때 트위터가 정치-사회적 민주화의 도구가 될 것으로 여겨졌으나 반대로 국가기관에 의해 적극 활용될 소지가 있음을 주의 환기시켜 주는 대목이라거나, 페이스북을 바라보는 관점과 분석으로부터 기인한 깊은 영적 성찰은 북미가 아닌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혜안이었다. 특히 페이스북 특유의 문법, 이른바 '나는 자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선언은 우리가 쉽게 포스팅하는 페이스북의 글들이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꽂히는지를 오랜 시간 동안 조용히 묵상해야 할 화두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는 저자가 기술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에는 상당 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나는 기술을 비판하는 기독인들의 이중성 자체에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들이 자주 신봉하고 인용하는, 자끄 엘룰의 <기술 사회>에서 말하는-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스스로가 생명력을 가진 채로 팽창하려는 습성을 가진-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려감이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듯한데, 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주머니와 가방 속에 스마트폰, 태블릿, 킨들 같은 것들이 들어있음을 알고 있다. 고로 그 이중적 태도의 근저에는, 스스로는 통제를 잘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일반 대중, 평신도들에게 IT 기술은 위험한 존재라고 믿는 어떤 선민의식이 깔려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당수의 엘룰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또한 나는 'iGods'와 하나님 사이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접근에 회의적이기도 하다. '두 주인'론은 흔히 말하는 돈, 섹스, 권력과 같은 현대사회의 우상이 될 만한 어떤 대상과도 대립 구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도 한때 초콜릿, 왈츠, 록 음악, 진화론, 정신분석 등과 같은 피조물과 하나님은 양립할 수 없었다. 지금도 게임, 입시, 스포츠 등 모든 피조물과 유일신은 세속 사회에서 경합을 벌이고 '능력 대결'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입장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고 한동안 바뀔 성 싶지 않다. 사실 어딜 가나 무얼 하나 인간 그 자체가 문제라는 거다. 고로 나는 여전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IT 기술은 도울 뿐, 정작 악한 것은 인간이다'라고.
이럴 땐 페북/카톡/문자가 고맙고나...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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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Bae님.
생일 축하합니다
맛난 음식이 있으니 더 기쁜날이었겠네요~^^
김성수님.
늦었지만 축하해요.^.^
Jae Yoon Um님.
수고하셨습니다, 생일 축하드려요!!!
Soojin Kim님.
축..경축!
Emily Lee님.
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생각해보니 오늘은 저희 오빠의 버스데이이자 교주님의 버스데이더군요!!!
용주 오라버뉘~ 미녀 아내님, 미남 성하님과 늘 복되고, 건강하며,
기쁨이 가득한 나날들 되시고,
오라버뉘도 (아내님이나, 성하님 처럼) 더더더 미남 되세효~! — 엄청 좋아요
한지식
생일 축하드려요^^
가만 생각해보니 전 이미 용주님의 친필 사인(?)을 가지고 있는 럭키가이더라구요ㅎㅎ
다음엔 저서의 저자친필사인 받을 날을 고대하겠습니다.!ㅎ
앞으로도 좋은 교제,더욱 기대하겠습니다^^
진심으로 생일 축하드려요
조영미님.
앗. 회장님 탄생 축하 인사도 제때 못 드렸네요.
기쁘고 복된 하루 되셨는지요? 항상 좋은 글과 만화(!) 감사합니다. ㅎㅎ
Jae Young Kim님.
용주씨, 생일축하드립니다.
강성호님.
생일 축하드려요. 용주님. ^^
Jeongyeol Bae님.
유후 생신 축하드려요
안병훈님.
뵌지 참 오래되었지만 페북 통해 계속 만나는 느낌이 듭니다
생일축하를 빌미로 인사드리며.. 생축해요~
정한철님.
용주 쌤, 생일 축하드려요!
Eundeuk Kim님.
생일 축하해요 ㅋㅋ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KimMandy님.
우왓 생일이시굼요!!
먼가 듬직한 제이언냐니이이임 생일축하드로용
헤헤헤헤헤헤
조경윤님.
언뉘~^^ 생일 축하해~!!
곽명손님.
어라.. 생축글을 남기지 않았다니. 이상하네. ㅠㅜ 기억이 안나요. ㅋㅋㅋ
우짜든동 생축하며 ~ 경하드리오니, 건강챙기며 글도 삶도 맛나시길 축복해요~
제이 언니뉨~ 뵈옵기를 곱게 기대하며~
Pax Tecum님.
생일 축하드려요~ 행복한 날 보내시길..^^
오수경님.
제이님 생축 행렬에 참여... ^^
한 번도 뵌적은 없사오나 팬심을 곱게 간직하고 있겠나이다.
생일 축하드려요!
JeongJae Wie님.
생일 축하드려요^^
김진형님.
오오.. 마이제이님의 생신!!
축하드립니다~ 맛난거 많이 드시고
가족들과 좋은 시간 되세요 ^^
강은수님.
생일^^ 축하해요!
김승신님.
형님 생일 축하드려요.
따뜻한 하루 되시길요.^^
정한신님.
학사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김승중님.
오우 생일 축하해요.
나랑 날짜가 붙어있네^^ 왜 몰랐지?
기분좋아요. 즐건날 되세요
조창훈님.
우왕... 학사회장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ㅎㅎㅎ
오늘도 연구소에서 열근하고 계시겠네요.
즐거운 마음과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 보내시길...
언제나처럼 많은 사랑 받는 날 되세요~~
서형석님.
용주 학사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심정희님.
생일이라고 페북이 알려줬어요. 생일 축하합니다!! ^^
Daeil Lee님.
용주형제 생일 축하합니다
Jino Kim님.
생일축하드리옵니다. 언뉘님~~
축하해드리고 떠날수있어 행복해요~~
박지선님.
완전 완전 멋지고 재밌는 울 회장님..!
생일을 감축드리옵니다 ^.^★
ㅎㅎㅎ(생신은 너무 먼것 같아 시려요!)
곽명손님.
제이~ 언뉘~ 예뻐지세요~ ^^
생축하며~ 경하드립니다~ ㅎㅎㅎㅎ
Sung Woo Kim님.
존경하는 용주야 생일축하한다.
나이를 먹는게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끊임없이 성장하는 너는 축하받을 만하다고 느껴진다.
그걸 느끼는 나는 늙어가는거고^^.
너로 인해 행복한 일인!
Claire Park님.
해피해피 버스데이!!
Yong Jung님.
생일축하드려요~~~~
천서진.
용주 님, 생일 축하합니다.
언제 한 번 사당에서~^^
DongUk Noh님
학사님~ 생일축하해요. 복된 하루 되시길 바래요~~~
김장호님.
생일 축하해~ ^^
William Song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
Eun Young Lee님.
용주야~ 지금은 한국 날짜로 미리 생!일!축하!해!^_____^
내일 이곳 날짜로 한번 더 축하해 줄게~
Yang-Seok Lee님.
생일축하합니다 캬캬캬.
Jongsuk Park님.
저두요.
이종범님.
생일 축하드려요~ ^^
Won-Seok Lee님.
오, 용주야! 생일 축하한다!
오늘 하루 행복해라!!
인생의 남은 시간들도 늘 행복해라!!!
그리고 곧 보자꾸나^^
이은주님.
생신 감축 하여요~
Eun-Jin Choi님.
앗! 생일이시군요! +_+
박종찬님.
대선배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소리 지도 잘 보고 있습니다 ㅎ
권경우님.
형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지난번 모임 못했던거 형 생일 축하자리로 한번 봐요~
오늘하루는 조금더많이 행복하세요!
이평직님.
저도 축하드립니다요.
조종현님.
오옷 오늘 생신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
이근현님.
생일 축하하우~~~
윤창서님.
형~ 생축드립니다.ㅎㅎ
즐거운 하루 되소서~~ ^^
누구에게나 사랑이란 감정이 찾아온다. 나에게도 몇 차례 연애 기회가 있었고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그렇게 조금씩 경험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당시에 유행하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같은 가벼운 책에서부터 게리 콜린스, 폴 투르니에의 책들을 읽었으니 나름 선행학습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선교단체 소그룹 리더를 하면서 얻은 교제의 노하우들은 연애에 도움이 됐다. 자주 우려먹는 내면 깊은 곳의 이야기 하나를 풀어내다 보면, 몇 번 만나지도 않았지만 금세 상대방과 내면의 깊은 대화로 발전하곤 했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다분히 왜곡된 연애 판타지 같은 게 있었는데, 백마 탄 왕자라거나 키다리 아저씨, 혹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이상형에 나를 동일시하곤 했다. 그렇게 내 연애는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맞춰 주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정형화되었고, 그런 경험들은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졌다. 게다가 이런 헌신과 배려의 태도는 신앙적으로도 권장할 만한, 인간관계의 어떤 모범처럼 느껴졌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나아가 상대방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연애에서도 바람직한 자세로 보였다. 그 결과, 내게 연애는 필연적으로 지속될 수 없는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가는 설렘이 지나면 내 일방적 배려가 지속될 수 있을 때까지만 유지되는 어떤 불연속적 이벤트가 되곤 했다.
'내' 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고 '너'의 안에서만 정서적 위로를 주려는 이런 ‘시스템’은 결혼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허물어졌다. 결혼은 관계의 수위를 조절할 수 없는 어떤 특이한 물리적, 정서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일례로, 사소한 부부싸움 중에 꼭꼭 숨겨둔 내면의 상처를 공격받으면 무시하고 획 돌아서 갈 곳이 없었다. 한 침대 안에서의 일상은 에로틱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벼랑 끝 같은 곳이기도 했다. 심리적 도피 공간이 없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말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제대로 말해봐.”... 이런 단순한 질문 앞에 나는 자주 망설였고 이내 말문이 막히곤 했다. 솔직히, 살면서 타인에게 스스로가 정한 내면의 선을 한 번도 허락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내라는 이름의 이 ‘무례한 타자’는 사소한 일에서조차 그 선을 침범했다.
독립적인 두 남녀 사이를 넘나든다. 불행히도 사랑은 할리우드 영화처럼 젊은 두 사람이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누고 서로 키스를 하고 눈이 맞아 잠자리로 이어지는, 그런 ‘샤방샤방’한 경험에서 끝나지 않는다. 주변을 보면 연애의 설렘이 다할 즈음 결혼 준비에 정신을 쏟고 결혼하여, 신혼의 설렘이 끝날 즈음 임신과 육아에 정신 팔려 살다가, 이내 자녀교육에 ‘올인’함으로써 부부 관계에서 오는 빈 공간을 채워가는 모습을 본다.
영적으로 더 깊어져야 할 사랑의 감정은 외부의 분주함에 기대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중년의 심리를 다루는 많은 저자들이 지적하듯 자녀가 둥지를 떠나고 나서야 부부는 낯선 상대의 모습들을 대면하게 되고 그제야 미뤄둔 실존적 질문에 직면한다. 우리는 왜 사랑에 빠졌던가, 우리가 결혼을 통해 얻으려던 지향점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부부가 한 몸이 된다는 표현을 그저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했던 건 아닐까. 혹은 섹스 그 자체로 이해했거나 반대로 선교의 베이스캠프라는 영적인 개념으로 비약하려 했던 건 아닐까.
곧 불혹의 나이가 되는 나는 여전히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다. 아내와 영혼을 대면하는 경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다. 육아의 늪에서 빠져 나오고 나니,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서로에 대해 또 다른 낯선 모습을 경험한다. 아내의 거친 ‘야수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내 안의 지질하고 연약한 여성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당혹스러움도 맞닥뜨린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이렇듯 사랑하던 사람의 낯선 영혼과 대면해야 하며 나아가 나조차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단 말인가.
사랑, 그 친밀한 관계의 원형은 삼위일체의 신적 교제 그 자체에 있다. 나아가 하나님 스스로만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조물 간에도 더 깊은 교제를 지향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서로를 지향하는, 영혼이 대면하는 지점에서 각자가 그 민낯을 편하게 드러내기엔 우리가 감내해야 할 두려움과 고통의 수위는 높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는 ‘페르조나’를 쓰고 역할극에 익숙해지려 한다. 이른바 부모-자식 노릇, 김과장 노릇, 교인 노릇 등, 그 겉보기 등급의 삶을 분주하게 만든다.
다행히 그 두려움 속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사랑이 찾아온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주기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한다. 영혼의 민낯을 대면하는 경험으로 내몰린다. 사회는 결혼이라는 꽤나 보수적인 울타리 안에서 그 고통을 대면하도록 이끈다. 그 안정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조차 영혼의 민낯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영 이 사회에서 답답한 가면을 벗어 던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결혼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신적 경험이자 최고의 도전이다. 물론 내겐 ‘아직도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