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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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민련과 486정치인.
대의민주주의.
그리고, 광장민주주의의 한계.
그보다 더 무력한 정당주의.
약자의 차별에 찬성하는 청년들.
재난의 책임을 대통령에게 묻지 말라는 이들.
잊혀질 수 없는 사건들 앞에서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
그들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을 
과하다고 불쾌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
이 복잡하고 다층적인 현실 앞에서 할말을 잃는다.
하고픈 말은 많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생각들과
질책들. 나를 향한 내 내면을 향한, 
그리고 공감 혹은 비판들. 우리 각자의 입장에 대한,
무엇보다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많은 현실들이, 그렇지 않을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낙심으로 변해간다. 
정말, 파랑새는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인지...
2014/08/10 20:06 2014/08/1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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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발밑에서 독서 중.
2014/08/01 00:34 2014/08/0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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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낯선 일이다. 이성을 보고 불현듯 가슴이 설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그 사람을 계속 떠올리며 히죽거리고, 만나면 자주 ‘정줄’을 놓게 되고,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여름에도 찰싹 붙어 다니는 이 기이한 현상들... 지금도 주변을 둘러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전국에서는 주말마다 남남이었던 수백 쌍의 커플이 결혼을 한다. 결혼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그 기저에 '므흣한' 스킨십과 섹스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그것이 이전에 가능했다 해도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즐거움이 분명 존재한다. 뭐랄까, 이제는 부모에게 쉬쉬하지 않아도 되는 쾌락이라는 점에서 결혼이라는 굴레가 더 은밀한 자유를 허락하는 역설적인 묘미가 있는 셈이다.

사실 이번 글은 쓰면서도 도대체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지금도 쓸 말보다는 쓰지 않을 말들에 대한 머릿속 계산 속도가 더 빠르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부터 나는 여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그건 마치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의 확신'처럼 내겐 자명한 진리 같았다. 나는 부드러운 남자고 여자들과 말도 잘 통하고 이성교제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으니, 이 결혼이 아내에겐 참 '남는 장사'일 거라는 황당한 자기확신 같은 게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기대와는 달리 우리 부부는 여전히 육체적으로 친밀하지 않다. 오히려 대화로 더 즐거움을 얻는 편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 청년시절에 꿈꾸던 '나쁜 짓'을 대놓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그 '나쁜 짓'이라는 게 삶의 다른 일상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사이의 온갖 정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불행히도 남성으로서의 내 문제도 발견했다. 성관계를 몸의 대화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아내와의 기나긴 대화 끝에 갖는 ‘스트레스 해소’의 시간으로 여겼다. 그래서였을까. 아내와 몸으로‘도’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내겐 피곤하면서도 일정 부분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그 무엇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결혼 직후에는 야릇한 긴장감을 즐기며 섬세하게 배려하고자 노력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적 본능 사이에서 나는 심한 내적 분열을 경험했다.

솔직히 나는 부부관계에서 육체적 교감에 관한 어떤 지식도 경험도 없었다. 물론 책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욕구를 참는다거나 아내의 반응을 살핀다거나 하는, 이런 식의 몸의 대화가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았다. 매순간 아내와 교감을 나눠야 하는 상황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몸은 잘 따라오지 않았다. 아니 그 상황 자체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는 '몸을 통해' 즐거운 날들도 있었지만 나의 즐거움이 아내에겐 도리어 불쾌감을 주기도 했다. 아내 또한 성적인 대화가 편하지 않았기에 대놓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간혹 정서적 불편함을 표현하곤 했다. ‘여자는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몸의 대화가 점점 불편해졌다. ‘구원의 확신’만큼 확실하던 내 성적 자존감은 어느덧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 어딘가를 서성이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내 고민은 우리 사회의 보다 깊은 영역에 똬리를 틀고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른바 부부 사이의 성적 역학관계라고 해야 할까. 

가부장적인 한국사회 남자들의 대다수는 섹스에 관한 한 여전히 일방적인 성향이 강하다. 자신의 욕구에 대해 매순간 여성이 이해하고 받아줄 것을 기대한다. 통계적으로 여성들의 상당수가 자신은 즐겁지 않더라도 남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성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섹스가 두 사람 사이의 또 다른 대화의 형태가 아닌 아내의 일방적 봉사인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주변에서는 육아에 지친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한다고 불평하는 남편들의 당당한 하소연도 종종 들린다. 한때 아내가 가입했던 인터넷 출산육아 카페에서 남편의 성욕해소를 위해 임신 중에 유흥업소 출입을 방관했던 엄마들 이야기를 읽었다.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 글에 공감의 댓글을 다는 아내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교회 안의 결혼예비학교에서도 사역자들이 공공연하게 남편의 성욕을 아내가 ‘긍휼한 마음’으로 해소시켜줘야 한다는 말도 한다. 이렇듯 부부간의 섹스는 내 세대에서조차도 여전히 남편의 성욕을 받아주거나 아니면 받아줄 수 있는 다른 방법마저도 허용하는 느낌이 강하다.

남성의 성욕을 언제나 긍정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남성의 전부인 것처럼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 말이 불편하다면 고쳐 말해서 성욕이 해소되지 않을 때 그의 전 인격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할 때면 그 순간만큼은 전 존재가 거부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성욕의 좌절 그 이상의 감정적 동요에 휩싸였다. 나는 이것이 남성의 성욕을 절대시하는 이 사회가 개별 남성 한 명 한 명의 깊은 내면에 뿌리내린 부정적 영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흔한 말로 부부싸움 후의 섹스에 대한 농담이 그런 단적인 예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로 잠자리(성욕의 해소)를 들지만, 이것이 아내의 입장에서는 ‘신앙적 긍휼함'이었거나 '굴욕적 외교행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교회는 자주 부부관계를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관계에 비유하곤 했다. 미숙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것을 기대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줄 땐 환호했지만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길 원할 때는 불편해 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이라 일컫기도 했다. 혹은 아예 하나님을 떠나 풍요를 빌어주는 이방신을 섬기기도 했다. 나는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성경 속 백성들이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남편들과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결혼생활의 전 영역에서 모범 남편이 되고 싶어 하는 기대와는 달리, 나는 성적인 부분에 있어 왜곡되어 있고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현실적 문제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사실 아직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 그것이 남성인 내겐 구원이자 희망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계속)
2014/07/31 21:30 2014/07/3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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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글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물론 여전히 애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허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내가 썼던 글들에 대한 집착, 애착이 심했다.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노력도 많이 했고 쓴 글은 거의 대부분 PC나
 블로그에 정리해두곤 했다.
그리고 자주 글로 사람을 평가했다.
서로 비교를 일삼기도 했고 글의 수준이 높지
않은 경우에는 마치 글과 사람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물론.
머리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신영복 교수가 어떤 강연에서 했던 말씀처럼
 집을 짓는 목수는 그림을 그릴 때 지붕의 기와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소위 지식만을 쌓은 자신과 같은 백면서생들의 문제를
 감옥에서 충격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일화들.

한국의 많은 교회들,
유독 많은 신학교와 넘쳐나는 신앙 양서들.
그것들을 소비하고 더 정화된 더 날카로운 지성.
거품을 걷어낸, 지나친 신비주의나 지나친 개인주의,
물질주의, 사회와 격리된 신앙을 경계하는 양질의 설교들.
그 정교하고도 옮은 말들, 글들.

그것들의 홍수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침몰해가고.
많은 논객과 글쟁이들의 담론 속에서도 사회는 후퇴한다.
물론 그것이 그들의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말과 글의 힘을
 담론의 힘을 너무 맹신했거나 우상시했던 건 아닐까.

글이나 말로 사람을 판단하는 습속을 버리면서
 나는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발견한다.
이 어둡고 막막한 세상속에서도 여전히 가슴뭉클하고
 애정을 갖고 싶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을 대하고 판단했던 내 작은 우주가 허물어지는 느낌.
아마 내가 아니라면 누구도 이 느낌을
전적으로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어떤 정서가 생겼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글과 말들에 대한 과했던 어떤 애착.
그것을 자제하려는 노력을 넘어선 심드렁함...
어느덧... 부지불식간에 내게 그런 정서가 생겼다.
물론 부지불식간이라고 하기엔
 기억나는 몇몇 사건들과 몇몇 사람들이 있다.
내 우상들이 무너져 내리게 만든 따뜻하고 성실한 인격들이.

2014/07/28 23:48 2014/07/28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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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
수짱 장바구니.
2014/07/22 23:59 2014/07/2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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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만원의 기쁨.
LED 전구등 스탠드 득템...^^

*사진: 아이폰5s

2014/07/22 23:53 2014/07/2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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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성하: 아빠 내일 회사가?
나: 응
성하: 안가면 언돼?
나: 그럼 돈없어서 니 장난감도 못 살텐데?
성하: 괜찮아.
나: 정말?
성하: 응. 아빠는 집에서 푹 쉬어. 내가 돈 주워올게.
(ㅋㅋㅋㅋ)
나: 돈을 어디서 주워와?
성하: 음.. 소파 밑에서도 줍고 냉장고 밑에서도 줍고 방에 청소기 안에서도 주우면 돼. 밖에 주차장 차밑에서도......
나: (급감격하여...) 고마워.ㅠㅠㅠㅠㅠㅠㅠ
...
그러다 금새 잔다. 나도... 금새...
2014/07/19 19:32 2014/07/19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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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정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목사라는 집단에게 창조진화나 동성애, 나아가 사회구조나 우리나라의 역사, 기술의 폐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물어보거나 답을 들으려 애쓰지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가끔 교수가 신문에 칼럼을 쓸 때도 느끼는데 특정 분야의 좁은 전문지식을 가진 교수가 역사나 정치 이슈, 사회 전반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느끼는 당혹감, 주관적인 논지, 감정적 스타일이 존재하는데 목사들에게는 이 모든 것에 더해서 '하나님의 뜻'까지 버무려서 말할 특권을 주는 건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

사실 나는 초중고 시절에 배운 세계사와 국사 외에 몇백권에 달하는 역사책과 특정 학자들의 역사관과 그들의 입장에 대해 검토하고 나서야 지금의 내 스탠스를 정했고 ...그 안에서 내 신앙과의 연관성을 찾고 있다. 사실 그 스탠스 마저도 나는 확정적이지는 않은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과거와 달리 권력이 다양화, 음성화, 고도화된 사회에서 특정 사안과 특정 분야에서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나아가 대안을 내세울 때 물리적으로 많은 분석과 정교한 논리,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고민이 요구된다. 부끄럽게도 학문적으로 충실하지 않은 비전문적 종교인들이 '베지밀반, 분유반'을 적당히 섞어서 대충 그럴 듯하게 설교를 먹이려는 경향을 자주 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여전히 목사들에게서 어떤 해답을 들으려고 턱을 괴고 앉아 있는 형국이다.

한때 한국사회는 목사로 대변되는 교계 지도자들이 사회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정교 분리를 투철하게 지키며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집중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안이 명확한 상황에서도 침묵하거나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이 만연했고 그 안에서 우리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양립가능성을 타진해야 했다.

물론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서 공적신앙에 대한 담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허나 여기서도 잠재된 문제는 작금의 목사들로 대변되는 비전문 종교인들이 너도나도 나라를 걱정하며 해대는 아마추어 사회비평에 피로감이 몰려와 몸살이 날 지경이다.

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줍잖게 성경구절 몇개로 정치, 사회, 역사, 퀴어담론 등을 끼고 싶다면, 되도록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신앙적인 표현에 버무려서 자기 영향력 아래 있는 성도들을 구워삶을 생각을 버리고 신학공부 하듯 제대로 성실하게 논지를 전개할 필요(책임)이 있다.

최소한 두 세 마디를 말하더라도 그 전후 논리가 좀 매칭이 되는 수준은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정말 신앙과 논리의 비약, 그 널뛰기에 현기증이 날때가 많다. 약사와 의사가 다르듯 목사라는 존재에게도 너무 많은 '짐'을 지워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목사의 구원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그 짐을 걸거나 나눠질 필요가 있는 듯 하다...



첨언하며)
전문가 집단에게만 전문분야에 권위를 주어 담론을 말할 수 있게하는, 이른바 엘리트주의적 접근에는 당연히 반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문가집단을 옹호하는 토마스쿤보다는 아나키스트적인 파이어아벤트에 가까운 입장이다.

내가 목사의 비전문성을 비판하는 근저에는 비전문가의 입을 막고 싶다기보다는 비전문가에게 너무 많은 언로를 주고 그 입장에 과한 의미부여를 하는 행태에 방점을 찍고 싶은 마음이다. 비전문가가 더 냉철하고도 깊이있는 통찰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목사 특유의 아우라는 벗었으면 좋겠다는거다.
2014/07/02 23:05 2014/07/02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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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일 중 하나는 단연... 아이와의 약속이다. 요즘 성하는 하루종일 쫑알쫑알 말도 많고 원하는 것도 많다. 집에 있으면 내가 전담하므로 간단히는 물줘..에서 시작하여 배고파 밥줘, 뭐 사줘, 이거(치킨, 돈까스) 시켜줘, 실내놀이터 가자, 어디 놀러가자, 장난감 사줘, 과자 사줘 등등 입 안에 무슨 순서대로 원하는 걸 말하는 스피커가 달린 것처럼 쉬지 않고 말을 해댄다.

문제는 내가 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인데, 아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대충 대답할 때도 있고 밤늦게 뭘 먹고 싶다고 우기면 쉽게 내일 사준다고 달랜다거나 어딜 놀러가고 싶다고 하면 오늘은 안 되고 다음에 가자고 둘러댄다. 이건 마치 어정쩡하게 친한 지인을 만났을 때 간단한 안부를 묻고는 헤어지는 인사로 '담에 밥...이나 먹자고'라고 하는 말과 유사한 '중요도'를 같는 표현이다.

더 큰 '문제는' 나는 그 시간을 무마하는 용도로 사용한 표현들을 아이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자주 놀라곤 하는데, 아빠 지난 번에 내가 원하는 날에 OO에 놀러간다고 했지? 라고 말하거나 어제는 늦어서 내일 아침먹으면 아이스크림을 준다고 했지? 라고 말할 때... 솔직히 나는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어떤 면에서는 내가 내게 있어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혹은 권력구도에서 흔히 '약자'라고 표현되는 이들을 대하는 어떤 바로미터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착하지 않다는 걸 경험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선악의 개념으로 아이를 판단하는 건 옳지 않다.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해 포장하지 않을 뿐이다. 그 원초적 욕구, 욕망에 대해 옳고 그름의 당위를 입히는 건 어른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노동자, 농민, 장애인이 선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혹은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약한 것이지 약한 것이 선한 것으로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로 동물의 왕국이건 문명화된 사회집단이건 간에 약자의 목소리는 간과되거나 축소되거나 무마되기 싶다. 약자의 도덕성에 결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약자이기 때문에 고려되어야 할 무엇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부분의 고과권자는 자신이 개별 직원들에게 어떤 등급을 줬는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하위 고과를 받은 직원만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왜 저새끼가 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는지를 두고 수십개의 시나리오를 세운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적대적일 때 권력자는 왜 이들이 이렇게 사납고 거친 모습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 지점이 내가 불편한 어떤 지점인 것 같다. 사실상 나도 나름대로 너무도 바쁘고 주말에는 좀 늘어져 있고 싶은데, 아이에게는 또 나름대로 좋은 아빠라고 불리고 싶다. 결국 나는 그런 타협점을 찾기 위해 그 시간들을 무마할 수 있는 가장 그럴 듯하고도 부드러운 방식, 다음에 OO할게, 내일은 꼭...이라는 말을 쓴다. 다음에는 좋은 고과를 줄게, 다음엔 꼭 내가 밥을 사지, 다음엔 국민이 원하는 방식의 구조를 세우겠어. 뭐 여러 표현들이 있지만 다 일관된 본질을 갖는다는 말이다.

솔직히 요즘 나는, 오늘을 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세월호로 대변되는 재난 앞에서 뭐 대단한 걸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꼭 해야겠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되도록 즉시 하고, 내가 (그저 타인에게)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어떤 류의 loss는 신경쓰지 않고 산다. 그 분투에는 소박하게도 내 아이와의 아주 사소한 약속도 '관리'하는 것이 포함된다. 협력업체의 나이어린 사원 대리와의 업무 분장도 그렇다. 내가 잘못한 건 사과하고 그들이 잘해준 건 반드시 메일로 감사한다. 오늘을 살지 않으면 그들은 내일 회사를 떠나고 나는 다시 그의 선의를 잊은 채 일상에 매몰될 게 분명하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스티븐 코비의 유명한 시간관리의 법칙이 있다. 나는 자주 되묻는다. 내가 과연 소중한 게 무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내가 승진이 명백한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 분투했던 과정에 들인 시간을 쏟을 수는 있지만 아이가 지나치듯 말했던 사소한 선물을 기억해서 어느 저녁에 아이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빠른 승진이 빠른 퇴사를 부를 수도 있겠고 노년의 어느날 내 아이가 그 사소한 선물을 기억해주며 고맙다고 말할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뭐, 모를 일이다.

중요한 건, 중요하지 않다고 굳게 믿는 어떤 관계가 살면서 정말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6살난 아이를 통해 매일매일 경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내겐 꽤 불편하다.
2014/06/30 23:07 2014/06/3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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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좀더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퍼스타K 같은 오디션 프로의 위너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듯 하다. 이는 마치 민주주의적인 방식을 통해 일반인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이를 발굴하는 값진 프로그램처럼 보이지만 정작 재능을 단기간에 고갈시키는 일종의 포이즌이라고도 볼 수 있다.

1등은 재능도 확인받고 상금도 받고 게다가 엔터테인먼트사와 계약까지 체결하는 일타삼피를 누리는 게 아니다. 몇개월동안 이뤄지는 살떨리는 경합 속에서 개별 참가자는 자기의 능력의 최고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 그 집중력 때문에 대중은 주목하고 프로그램은 매주 뜨겁게 달아오른다. 마치 불꽃놀이를 한번에 터뜨리듯 그 순간은 다들 눈을 떼지 못하지만 그 이후에는 느슨한 속도나 작은 섬광에는 반응하기가 쉽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 오디션 프로그램은 숨은 재능인을 찾아내서 그의 전부를 몇개월 안에 전소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을 가졌다. 그 엄청난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소비한 대중은 대부분 그 이후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본 참가자들에게 관심을 갖기가 어려워진다. 특히나 1위나 상위 참가자들은 마치 중견 연예인을 보듯 그의 모든 쇼맨십을 이미 다 겪은 듯한 착각마저 갖는다. 대중문화 속 연예인들은 재능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어필하는 신선함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한의 경쟁이 사라진 공간,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능을 전소해버린 무대에서 오디션 위너들이 경험해야하는 이른 피로감, 무력감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관성적으로 느끼는 즐거움 가운데에는 사실상 상당히 악의적인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설령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것은 기어 이빨들이 척척 물려돌아가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망가뜨린다. 이렇듯 우린, 재능이 있는 이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타 없어질 수 있는 시대에 살고있다. 문득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2014/06/30 23:05 2014/06/30 2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