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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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결혼일기
"우리집은 아들만 셋이에요. 아빠나 아들 둘이나 어쩜 하는 짓이 똑같은지."
"우리집은 딸만 둘이에요. 퇴근하면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주변 부부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다. 우리 부부도 가끔씩은 서로를 ‘딸-아빠’, ‘아들-엄마’의 관계로 환원시켜놓고 은근슬쩍 상대방을 갈구기도 하는데 이런 농담이 자칫 지나치면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농담처럼 얘기한다 하더라도 상대를 아들, 딸로 치부하는 대화의 기저에는 내심 상대를 도움이 필요하고 보살펴야 하는 수직적 관계의 대상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화점을 다녀온 아내에게 “애나 엄마나 돈 아까운 줄 모른다”라고 말하거나, 아이를 훈육하려는 남편에게 “애랑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놀아라”라며 툭 던지는 말을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발끈하여 결국엔 부부싸움의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부부 사이 연륜이 쌓여서 이런 모종의 역할극을 잘 주고받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잘만 대처한다면 아빠 같은 남편, 엄마 같은 아내의 위치에서 이른바 ‘베푸는 자’의 뿌듯함을 누리게 된다. 내 아내는 어릴 때부터 남동생이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탓에 성인이 되어서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가질 수 없었던 물건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나는 그런 물건들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기념일 같은 날 깜짝 선물을 해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진심으로 기뻐하곤 했다. 그 행복한 얼굴과 상기된 목소리라니. 그때 내게 보여준 아내의 웃음과 고맙다는 말들, 그 따뜻한 느낌은 지금도 선물 자체가 무색하리만치 소중한 기억이다. 반대로 내가 두통에 시달릴 때면 아내는 나를 자기 무릎에 눕혀서 머리를 안마해주고 새벽까지 끓인 배숙을 챙겨주었을 때는 마치 다시 보살핌을 받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를 떠나왔지만 이제는 새 엄마처럼 아내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그런 안정감이 서른을 한참 넘긴 나이에도 솔직히 싫지 않았다.

하지만 부부 간의 이런 ‘엄마, 아빠 역할극’을 계속 즐기다 보면 아들과 딸이라는 미숙한 상태에 머무르고 싶은, 혹은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욕망이 커져 어느새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상대방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들곤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약했던 건강을 빌미로 몸이 아플 때는 주변 사람들이 마치 엄마가 나를 대하듯 걱정해 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물론 대놓고 타인에게 표현한 적은 없다.) 그래서 아내에게도 평소엔 내가 헌신적일 수 있지만 적어도 몸이 아플 때는 좀 과하리만치 나를 아들 대하듯 ‘우쭈쭈’라도 해줬으면 하는 기대가 내심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어릴 때부터 건강했던 아내는 전혀 공감할 수 없어 하는 눈치였다. 도리어 아내는 내가 건강상의 적신호를 어느 정도는 알면서도 그냥 방치해 버리는 내 습관을 읽어냈다. 아플 기미가 보이면 쉬면서 몸을 보호하거나 병원에 가서 약을 먹어야 하는데, 나는 의도적으로 더 과로를 했고 병을 키웠다. 그리고는 머리를 싸매고 비장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곤 했다. 안쓰러운 얼굴로 머리에 손이라도 얹어주길 바라며. 물론 아내는 그럴 때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병원에 보냈다.

역할극만이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 더 미묘한 부부 사이의 우월감과 열등감도 존재한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고 아내와 나는 미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되었다. 연애를 할 때, 아니 신혼 초까지만 해도 콩깍지가 씌어서인지 서로가 좋게만 보였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서 시간이 꽤 흐르자 나는 아내가, 마치 한 공간을 함께 쓰는 룸메이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조용한 집에 단둘이 있으면서도 서로가 각자의 일에 몰두할 때면, 적절한 표현이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뭐랄까, 어떤 친밀함, 에로틱한 느낌과는 사뭇 다른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거기엔 라이벌 관계에서 생기는 미묘한 경쟁심마저 존재했다. 배우자가 가진 어떤 재능이나 성격, 직관력, 풍성한 인간관계, 사회적 자본(아비투스)을 은근히 부러워하기도 하고 유년시절 부모와의 친밀도가 뜻밖의 질투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마치 그림자에게 쫓기듯 아내는 나와, 나는 아내와 보이지 않는 경쟁을 했다. 솔직히 우리는 상대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보다 정직하게 내면 깊은 곳에서 인지되는 어떤 우월감과 열등감을 직면하는 날엔 함께 살을 부비며 누워 있어도 서로에게서 일정한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아내를 통해, 아니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 미묘하고도 복잡한 감정선을 보다 세밀하게 경험하며 산다. 나도 알지 못했던 나를 대면하는 경험을 한다. 물론 지금도 그 경험은 ‘현재진행형’이다. 때론 아내에게 아들이고 싶은 내 모습과 더불어 아내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않는 아빠가 되고 싶은 내 이중성을 본다. 때론 그보다 더 창피한 우월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은 나름의 꿈을 꾼다. 그런 거창한 꿈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좋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한다. 특히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많은 교인들이 ‘공동체’를 말하고 ‘관계중심적’인 담론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한 인격을 통해 나의 내면을 투영해볼 만큼 깊은 관계에 집중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라는 역학관계는 여전히 아내와 나에게 많은 화두를 던지는 듯하다. 나는 기대해 본다. 이 모든 감정선의 기복을 털어내고 아내에게 그저 사랑하는 남편이자 진정한 친구로 자리매김할 날을, 그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아내와 한 공간 안에서 일상을 보낸다.
2014/10/01 19:58 2014/10/01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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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때때로 나는 여성의 평등 혹은 어떤 면에서는 남성보다 더 우월하다는 입장을 가졌음에도(나는 자주 자끄 엘룰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물이 인간이고 그 중에도 여성이라는 점을 흥미롭게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여성 저자를 추천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솔직히 당시에 몇몇 이름난 여성의 책을 일부러 읽어보았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저자)에 대한 내 생각과 현
실 사이의 거리감 같은 게 솔직히 없었다고 할 수 없다.

2. 
불과 몇 년 사이에 나는 혼자 있을 때조차 자주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의 여성 저자들을 많이 접하고 있다. 물론 그 동안 내 책읽는 스타일의 변화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내적 변화와 별개로 몇 년 사이에 걸출한 여성 글쟁이들이 여러 곳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들어 어떤 (남성) 논객들에게서도 큰 배움을 얻지 못했다고 '자부'(?)했는데 그런 여성들의 관점과 스타일 모두에서 나는 참회의 눙물을 흘리곤 했다. 

3.
여성을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흥미로운 점도 있다. 남자들을 글을 쓸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정량의 허세가 글 전반에 배치가 되어 있다. 지식의 양을 자랑하거나 인맥을 자랑하거나 문화자본을 자랑하거나. 대놓고 자랑하거나 두괄식으로 자랑하거나 '퍼기깔대기'를 들이대거나, 하다못해 '추신'으로 자랑하거나... 어쨌든 허세를 부린다. 그게 어떤 모종의 글쓰는 방법처럼 익숙했고 나도 은연 중에 그런 '허세 운율'을 따르곤 했다.

4.
그런데 정말 재밌게도 내가 좋아하는 다수의 여성 저자들은 그런 허세가 없다. 물론 더러는 자학성 겸손이 몸에 밴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면에서조차 나는 배우는 부분이 많다. 여전히 허세문법이 나에겐 중요한 부분인데 여성 저자들의 글에 젖어들다보니, 글을 쓸 때마다 마치 은연 중에 'ㅎㅎ 지금 너 무협지 쓰니? 허세 쩐다'라고 말하는 듯한 환청마저 들린다. 흥미롭게도 이런 성찰 아닌 성찰은 남성들의 글쓰기 공간, 장 안에서는 전혀 인지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P.S
오늘도 정희진 선생의 토요 칼럼을 읽으며 행복한 마음에 몇 자 끄적여본다. 허세 없는 담백한 글쓰기를 꿈꾸며.
2014/09/21 15:15 2014/09/2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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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성하랑 주일에 기도하는 재미에 쏙...
나: 오늘은 뭐라고 기도할거야?
성하: 음... 아빠랑 재미있게 놀았던 일 잊지 않게 해달라고. 내가 커도.
나: 성하가 커도?
성하: 응. 나중에 아빠가 하늘나라에 가도.
나: 어...^^;;;
기도 중...
나: 기도 다했어?
성하: 응. 근데 한번 더 할래.
나: 그래.
잠시 후...
나: 뭐라고 기도했어?
성하: 음, 너무 길게 말해서 다 말해줄 수 없겠어.
나: 어,,, 그래...
성하: 마지막에는 이렇게 기도했어. 엄마아빠 안 싸우게 해주세요.
나: 음,,, 그랬구나...(아놔, 찔린다...)
집으로 가는 길...
성하: 아차, 기도 하나 안 했다.
나: 무슨 기도?
성하: 뛰다가 안 넘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려고 했는데.
나: 맞아. 너 요즘 잘 넘어지더라.
성하: (시무룩..)
나: 다음에 와서 또 기도해.
성하: 근데 말이야, 기도했으니까 아이스크림 사줄거야?
나: 아.니.거.든.
2014/09/13 21:22 2014/09/1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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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릴레이에 관한 짧은 생각.

이 릴레이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막연하게나마 아이스버킷 릴레이와 유사하게 3명을 지명하는 트렌드를 따르는 것 같고, 나도 최근 페친들을 통해 이 릴레이를 간간이 접하고 있다. 주변을 보면 릴레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분들도 있고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는 분들, 자신의 생각대로 다소 변형하여 동참하는 분들, 이 정도로 나뉘는 듯 하다.

내 생각을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감사를 공적 릴레이로 끌고 가는 것에 대해 우려감을 갖고 있다.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흔히 주변에서 가끔씩 자신 혹은 주변에서 일어난 성공이나 다행스러운 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하는 분들을 본다. 당연하다. 우리는 범사에 창조주에게 감사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오늘 먹은 맛있었던 식사나 만났던 친구와의 행복했던 대화, 자녀의 건강, 나아가 명문대를 입학하거나 큰 돈을 벌거나 치명적인 질병에서 낫거나 가족에게 경사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그것이 성도에게 혹은 대중에게 드러내 놓고 하나님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릴만한 일인지 따져볼 필요도 있는 부분이다. 누군가의 자녀는 명문대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다면 명문대에 낙방한 부모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없다. 열차 사고나 공공장소에서의 위협에서 누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만 누군가는 그냥 목숨을 잃기도 한다. 누군가의 가족은 병에서 회복되지만 누군가의 가족은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실제로 4월 이후로 우리의 주변은 세월호 참사의 자장에서 직간접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나또한 유감스럽게도 이 상황 가운데서 도저히 감사를 표할 수 없다.) 

이렇듯 어떤 성공이나 특정한 구원이 신자들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 현실 앞에 우리는 특별히 우리에게 임한 특혜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면 누군가는 배제됨의 저주를 하나님께 돌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렇게 되면 고전적인 욥의 문제, 나의 고통과 나의 실패는 모두 나의 죄성에 기인하는 것인가. '나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타 성도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은 왜 나에게는 임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된다. (혹은 욥과 같이, 합당한 탄식과 저주가 상황과는 무관하게 범사 감사하지 않음에 대한 불신앙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사실상 예수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러 왔기에 기독교는, 불평등한 상황 가운데 특혜받는 성도를 표지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신은 모든 사람을 예수의 구원 안에 두고자 하는 종교다. 이렇듯 불행히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많은 사례들은 '범사 감사'의 특수 사례를 넘어 기독교의 본질을 뒤흔든다. 또한 실제로 그 영광에 가려진 성도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물론,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므로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다. 허나 동일하게 인간은 주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타인을 더 좌절하게 만드는 감정 표현을 절제할 필요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감사는 내밀한 침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고 느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4/09/13 21:22 2014/09/1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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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성하: 아빠..
나: 왜..
성하: 아빠는 약점이 뭐야.
나: 음... 너무... 멋있다는거?
성하: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나: ...;;;;
...
기분나빠-_-
2014/09/13 21:21 2014/09/1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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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은 고가의 브랜드 선물을 받은 적도 있지만
그것조차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장지갑은 얇지만 길고 접는 지갑은 너무 두껍고.
가볍고 얇은, 하지만 너무 비싸지 않은 지갑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ALL-ETT 오리지날.
1년 남짓 쓰고 있는데 정말 마음에 쏙 든다.
홍보 문구가 'The thinest wallet in the world' 이라니.

*지갑 적정 금액: 10만원 이내
*구입 고려 사이트: 핫트랙스, 펀샵 5.8~5.9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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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1 00:32 2014/08/21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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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에어의 가벼운 무게 장점을 살리기 위해 
기존에 쓰던 스마트 케이스 타입을 포기하고 
고민하다가 구입한 케이스. 
COTEetCIEL의 편안한 디자인에 시간이 갈수록 정이 든다.

*케이스 적정 금액: 5만원이내.
*구입 고려 사이트: 무진사 1.9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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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9 23:01 2014/08/19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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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넘게 신고 있는 단화.
운동화보다 더 편한 허시파피 구두.

*구두 적정금액: 15~20만원선
*구입처: 이마트 할인점 8~9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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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9 22:56 2014/08/19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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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알게된 이후로 책갈피는 모두 이것으로 대체되었다.
하나를 사면 번갈아 쓰기 때문에 10년은 족히 쓰게 된다.
가격대 성능비 우수했던 물건.

*악세사리 적정금액: 만원~이만원선
*구입 고려 사이트
펀샵 50pcs 13,900원
알라딘 75pcs 13,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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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9 00:11 2014/08/19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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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페이지는 12년도에 쓴 하나의 초안에 기인해서 한번 만들어봤다. 그 때 쓴 글은 '언젠가 기독인들의 소비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제목이었는데 그 글에서 나는 내가 나름대로 정한 물건의 가용금액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 룰을 항상 잘 지켰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후로 내 소비의 어떤 가이드라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이 페이지는 그런 소비 속에서 마음에 들었던, 그리고 지금도 애정하는 물건들을 소개하는, 나름대로는 positive 방식의 소비 공간이다. 쉽게 말해 지름신 성공기라고나 할까.^^ 특별히 이 페이지에서는 브랜드와 구입 가격도 공유하기도 하려고 한다. (예전에 썼던 글은 아래에 옮겨둔다.)


<언젠가 기독인들의 소비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

12. 11.

언젠가 기독인들의 소비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지금까지 생각한 걸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상대적 박탈감이 큰 편인데 기독인들 사이에서는 잘 드러나질 않는다. 가끔 나는 수백만원짜리 명품 가방에 명품 옷을 입은 사람과 9900원짜리 티셔츠 입은 사람이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었다. 혹은 물욕이 많은 이들을 암암리에 비난하는 교인들도 종종 봤다.

더 큰 문제의식은 교회를 가보면 실제로 중산층 이상이 다수고 극빈층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게 사실 은근히 돈없는 사람들이 위화감 때문에 교회 오는 게 꺼려지는 요인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따라서 내 생각은 자연히 그럼 소유, 소비 자체를 적절하게 절제하고 검소하게 사는 게 올바른 방향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관심사는 그렇다면 맘몬(물질의 우상화)을 섬기지 않는다는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적정한 소유는 과연 어느정도일까 하는 문제였다. 이건 절대 수치인가 아니면 연봉에 기인하는 건가, 혹은 공동체의 수입 평균에 맞춰야 하는 건가. 넌 교인인데 너무 물질적이야 라고 말할 때의 그 물질적..이라고 말하는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

사실 이러한 소유의 문제는 이미 청부론, 청빈론이라는 주제로 교계에서도 한참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나도 해답이라고 부를 만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정답, 즉 청빈론이 옳다한들 교회가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은데, 실제로 주일마다 만나는 이들의 개인 소비 문제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나도 청빈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일단 나는 남 비판하기 전에 내 소유부터 따져보기 시작했다. 내 소비성향과 소유성향을 따져보고 나는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 그 물건 금액의 상한치를 정했다. 이를 테면 냉장고를 살 때 내가 생각하는 상한 금액은 얼마이고 그 이상은 과하다는 식으로. 혈액형이 A형이자 다분히 계획적인 내 성격이 적나라하게 반영된 이 프로젝트는 척척 진행됐다. 바지는 3만원 전후, 신발은 5만원 전후, 코트와 구두는 15만원 이하, 노트북은 100만원이하, 책은 부부가 합쳐서 매달 10만원, 외식비는 한번에 5만원이하, 매달 20만원 이하...

이런 걸 계산하고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에 대한 물가 차이도 생기고 모든 물건을 다 이렇게 정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여 어느 정도까지 하다가 포기했지만.. 사실 지금도 내 심중에는 어떤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에 대한 상한치의 금액을 정한다. 물론 그 룰에 맞게 매번 물건을 산 것도 아니고 또한 그 물건 자체가 필수품이냐 사치품이냐도 중요하니 사치품에 상한선을 정해서 많이 사재낀다면 그것도 문제 아닌가.

이런 고민을 오랜시간 하다보면 물건을 사는 금액보다 물건을 살 수 있는 금전적 여유의 문제가 점점 부각되고 그 여유는 결국 근본적인 연봉, 수입, 소유의 문제가 된다. 근본적인 교인들의 경제문제인 셈이다. 나는 소그룹 나눔에서 입고 오는 옷이나 주말에 식당에서 먹은 음식, 아이들에게 사준 고가의 장난감, 그 아이들이 입은 옷, 이런 작은 부분에서 교인들이 상당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는 것을 알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 교인들의 다수는 듣기만 할 뿐 그다지 공동체로서 도와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더욱이 그 도움이라는 게 치명적인 상황이 아닌 경우, 생활 자체가 안될 정도는 아니지만 매번 소비에 심적 부담을 느낄 정도, 혹은 중산층이 다수인 교회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초라함을 느낄 정도인 경우에 말이다.

난 버젓하게 직장이 있지만 전세 이사를 네번했다. 이제는 미친듯이 오른 전세값으로 아예 전세를 빼고 사택으로 이사했다. 교회를 가면 우리 아이보다 좋은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그 장난감에 눈독을 들이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조금 심난하다. 내 동기는 아내와 맞벌이를 하고 부모가 사준 아파트가 있어 같이 시작한 직장 생활에 벌써 모은 돈만 몇억이랜다.

사실 교인 중 누군가는 내가 내 동기를 부러워하듯 내 아이가 입은 옷이나 내 직장, 사택을 갈수 있는 내 형편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이 예배를 드리나 우리는 다른 상상을 한다. 난 교계에 쏟아지는 담론들 중 이런 얘기를 콕 찍어서 하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역사니 내러티브니 하는 신학 논쟁이나 정치이야기들, 물론 중요한 담론이지만 나는 매주 나가는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그런 건 것보다는 이런 일련의 생각들을 하게되는 나눔과 사건들이 더 잦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모두가 '아멘'이고 '샬롬'이다. 집에가서 어떤 가정은 호텔 뷔페를 먹지만 누군가의 아내는 울고 누군가의 아빠는 한숨쉰다.
2014/08/19 00:04 2014/08/19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