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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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택배가 주말에도 온다. 주중에 해결이 안 되는거다. 부끄럽게도 택배가 밤에 오면 기뻤다. 퇴근하고 좀 있으면 기다리던 물건을 갖다주니 희희낙낙이다.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 나라에서 내 상품을 가져다 주기 위해 누구네 집 아빠는 밤늦게까지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인터넷을 고치고 전자제품 A/S를 한다. 사실 같은 직장인으로서 퇴근시간 이후에는 방문 서비스가 야근임을 직시해야 하는데 그게 잘 연결이 안 된다.

손학규 전 후보의 모토 '저녁이 있는 삶'... 아빠~ 하며 달려나와 아이가 안아주고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오늘 같은 날 함께 빼빼로나 입에 물고 동화책을 읽고 싶은 평범한 가정생활을. 총알배송이니 당일수리니 하는 매직같은 이야기를 현실화시켜 그것을 대한민국의 경쟁...력으로 담론화하려 한다.

편하면 싱글벙글하게 되는 우리네 삶이 아니, 내 삶이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진행되고 있다. 나또한 그것을 위해 불철주야 일한다. '내 저녁'을 버리는 것이 경쟁력이 되어버렸다.

'총알배송이고 나발이고.'

이 나라는 '타인의 저녁'을 서로가 배려해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각박하고도 견고한 사회구조가 갖춰졌다. 누군가가 해주려는 과한 서비스에 눈쌀을 찌푸릴 수 있는 시민의식이 필요할 정도로 말이다.

30분 이내에 음식을 배달해야 하는 청소년들의 알바 스쿠터들이 도로에서 부딫혀 나뒹굴고 누군가가 괴로워 자살을 해도, 빠름빠름~ 노래할 수 있는 너와 나의 멘탈... 자국민이 힘들어하면 타국민을 시켜서라도 동일한 성과를 내고자하는 글로벌 시장.

책으로만 읽던 이야기. 정서적으로, 머리속 망상 속에서만 좌파행세를 하면 되던 시기를 지나 이제 이 담론들은 점점 내 일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내 양심과 정서가 더 무뎌져야 한다고 속삭인다.

오늘도 나는 내 택배가 오고 있나 인터넷을 뒤져봤다. 어떤 사람이 내 택배를 들고 있는지, 어디쯤 내 택배가 오고 있는지, 내 택배를 든 사람의 휴대폰 번호가 뭔지, 나는 다 알고 있다. 정말 우리 나라 좋은 나라지? 젠장.
2013/11/13 23:30 2013/11/1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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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요즘 젊은 사람들 스마트폰만 본다고 삿대질을 한다. 나는 이것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뭘하는지 무슨 이유에서 스마트폰에 몰입하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그것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에 마냥 비판적이다.

물론 부정적인 영향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비판이 있으면 깊어져야 할 담론이 너무 간단하게 끊긴다. 만약 젊은 것들이 요목조목 스마트폰의 활용을 설명한다면 아마도 건방지다는 비난을 받기 쉽다. 어른이 말하면 네 해야지 어디서... 한국사회의 담론은 이렇게 지위와 서열, 나이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 까라면 까야지 변명질이나 해대고 있어?

이렇게 건강한 논쟁은 어리고 지위가 낮고 서열이 아래인 사람의 구차한 변명이 되고 담론은 '비판이 가능한 서열의 존재'가 정한 이슈에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체화해야 하는 로고스로 전락한다.
2013/10/22 23:29 2013/10/22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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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의 친구들은 대체로 가짜들이다.' 페북에 정말 정성을 들이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어 솔직히 유감스럽긴 해도 내 생각은 그렇다.

내 페친 중 오랜시간 아내의 병간호를 하신 목사님이 계시다. 대체로 내 주변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얼마나 오랜시간을 아내의 병간호로 자책과 어려움의 시간을 보냈는지 안다. 내가 그분의 책을 읽지 않고 그 분의 포스팅을 자주 보지 않는 이유는 그 고통이 나에게 전이될까봐서다. 그 일상의 어려움에 마음을 뺏기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얼마 전 그 분이 아내를 요양소로 보낼 결정을 하셨다. 더 나은 돌봄도 이유이고 목사님을 비롯한 가족이 지쳐서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결정에 대한 상당수 페친들의 반응이다. 한 줄, 두 줄의 글로 '그러시면 안 돼요', '...아내를 더 돌보셔야죠', '사모님을 그런 곳으로 보내지 마세요', '더 힘을 내세요'.

그런 직관적인 댓글을 다는 이들에게 그 목사님이 오랫동안 경험했던 일상을 넘겨주면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는 쉽사리 댓글을 쓸 엄도조차 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음이 힘드시겠습니다...정도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써지지 않았다.

페북의 친구들은 이슈가 되는 인물들에게 자신이 바라는 이상형을 투사한다. 그리고 그가 그 이상형을 계속 유지하길 바라고 응원하고 댓글달고 칭찬하고 지지하고 아름답게 미화한다. 하지만 그가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우울해하고 힘들어하고 다수가 보기에 실망스러운 행동을 할 때 더이상 '친구'일 수 없다. 때론 말 한마디를 듣고는 친구관계를 정리한다.

네 말은 쓰레기야. 네 그 한마디만 봐도 네 정체를 알겠어...
30년 넘게 살아온 내 정체를 나도 모르는데 친구라는 이름의 불특정 다수들은 어찌나 나를 잘 아는지 그 사람을 잘 아는지 모두가 인간 심리, 인간 존재의 전문가들이다. 좋아요의 남발만큼 싫어요가 아닌 넌 내 친구도 아냐의 남발이 성행한다.

페북의 친구들은 함께할 때 성장할까. 나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내 생각에 이는 마치 영어회화 학원을 다닌다고 영어가 늘지 않는 것과 같다. 회화반 수업시간에는 공부가 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공부한 영어가 유효한 영어인지를 네이티브를 통해 검증받을 순 있다. 그룹이 서로 대화하며 내 영어가 통하는지를 확인받을 수 있다.

페북은 공개된 공간에서 나의 사적 영역을 오픈한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하다. 내 내면이 잘 정리되어 있어야 사적공간들이 공개된 SNS에서도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단어로도 상대를 심한 좌절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고 스스로도 자주 친구아닌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이것이 예의의 문제인지 실존적 문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페북의 친구는 상당수가 '가짜'같다. 그렇게 밖에는 그 충격적 댓글들을 이해할 수 없다.
2013/10/20 23:28 2013/10/20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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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 여자 아닐까요? 기사를 보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이제 16개월짜리 아들을 키우며 직장맘 체험(?)을 톡톡히 하고 있는 후배 편집기자가 연재 '제이언니의 아빠일기' 기사를 보며 던진 말입니다. 이런 생각, 남자라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면서요. '주 1회도 힘든데, 아내는 오죽했으랴', '마트서 아이 등짝 때린 엄마, 쉽게 손가락질 마시라', '"애 안 키워봤으면..." 그런 말 하지 마세요'까지 연재 10회 동안 쓴 기사 제목만 봐도 스스로 '제이언니'라고 칭하는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집니다.

'위로는 상대에게 내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라는 글을 최근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요. 일주일 내내 직장에 다니면서 주말육아까지 책임져야 하는 힘든 와중에도 연재기사를 통해, '남편도 아이들도 몰라주는 당신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는 제이언니와 이메일로 나눈 인터뷰 내용을 싣습니다.

☞ 김용주 시민기자가 쓴 기사 보러가기

"일과 육아로 힘든 직장맘, 남편의 지지도 많이 못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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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언니의 아빠일기> 연재하는 김용주 시민기자, 아이와 함께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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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언니'라는 호칭이 꽤 자연스럽다. 집에서는 아내가 뭐라고 부르는 지 궁금해졌다. 설마 아이가 언니라고 부르는 건 아니죠?
"아내는 저를 평소에는 '여보야'로 부르고요. 제 이름 때문에 '용파리'라고 할 때도 있고 감정 상태에 따라 여러가지 표현으로 달라지기도 합니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부를 때 재미있는 증상이 하나 있는데요, 엄마를 부를 땐 "아빠…음…아니 엄마!", 아빠를 부를 땐 "엄마…아니, 아빠!" 이래요. 아이도 좀 혼란스러운 거죠. (ㅎㅎ) 사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밖에서 듣고 보고 배우는 엄마, 아빠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역할과는 많이 다르니까요. 아내와 저는 취향에서부터 성격까지 일반적인 부부들의 모습과 다르다는 말을 종종 듣는 편이거든요."

- 편집부 내 직장맘도 넷이다. 그 사이에서 김용주 기자님이 자주 거론된다. 뭐 이런 '언니'가 다 있냐는 반응이랄까. 주변 여자들 사이에서 어떤 남자라는 소리를 듣나.
"페이스북 친구들 중 여성들도 많은 편이고요. 대체로는 저를 지지해주는 편인데 종종 그런 경우가 있어요. 부부동반 모임에서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한데요, 기혼 여성분들 중에 제가 육아 얘기를 하면 아내가 직장을 나가는지 제가 주말이나 퇴근 후에 육아를 전담하면 그동안 아내는 뭘 하는지 물어봐요. 조금 퉁명스럽게. 처음엔 그 부정적인 감정이 이해가 안 되니까 그냥 성격이 그런 분들이겠거니 하고 넘겼죠. 저는 제가 나서서 부부간 육아 분담에 대한 남편 설득을 하려는 의도도 있는데 도리어 여성분까지 그러니까 생각이 참 많아지더라고요. 근데 사실 대체로 기혼 여성들이 일과 육아 사이에서 힘든 상황인데 남편의 지지나 도움을 못 받는 경우가 많잖아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부정적 감정의 표출은 사실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제 아내를 향한 것이었던 거죠. 제 아내도 그런 소리를 종종 듣는다고 하더라고요. 주중에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데 남편이 가사와 육아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 아니냐구요. 사실 가사와 육아 문제는 단순히 물리적인 분배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육아 중인 부모도 각자의 욕망, 꿈을 가진 독립적인 인격이니 그 부분에서의 배려가 필요한 거고 그걸 잘 이해해주는 관계가 아내와 남편 사이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 깊은 '동지애'를 전제로 했을 때 자연스럽게 공동체 생활의 패턴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보고요. 그런데 대체로 그 관계 설정이 잘 이뤄지지 않으니 니가 힘드냐 내가 힘드냐, 니네 아내는 뭐하냐 같은 부차적인 문제들에 매몰되는 것 같아요. 그런 이유로 이런 황당한 '아빠가 언니되는 연재물'을 시작하게 된 것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이런 이야길 사석에서 좀 꺼내놓고 싶어도 상대가 불편해하면 더 얘기를 안 하는 경우가 많죠."

- 반면 이런 김용주 기자님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할, 혹은 이상하다고 여길 남자들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여성들의 반응은 멜랑꼴리(우울증)의 측면이 강하고요, 반면 남자들은 좀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죠. 면전에서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 '남자 망신 시키지 말고, 불알 떼고 살아라'라고 욕하는 게 다 느껴집니다. (ㅎㅎ) 일단 분노하는 거죠. 왜 잘 유지되고 있는 가부장적인 질서를 흩트려 놓느냐는 거죠. 거기엔 아버지 세대와 비교해서 내가 얼마나 아내와 아이에게 잘하는데 호강에 겨웠다는 나름의 비교의식도 한몫하는 것 같고요.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끼리 서로 의리를 다지는데 애를 많이 쓰잖아요. 근데 '의리'를 제대로 배우고 싶으면 가정에서 아내와 먼저 의리를 다지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제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특별히 진보적인 사고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남성들의 그러한 비합리적인 일상에 실망감, 회의감이 강하게 들기 시작한 거거든요."

주변 눈치 많이 보는 소심남, 애 낳고 달라졌다

- 사실 이런 커밍아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보수적인 시각에서 보면 어쩌면 더욱? 어떤 계기로 대놓고 기사를 쓰게 된 건가.
"제가 사실 굉장히 소심하고 주변의 눈을 많이 의식하는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로 자라왔거든요. 생각은 진보적이긴 한데 사람 자체는 소심하고 보수적이고 좀 그래요. 글에서도 썼지만,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 생각과 삶의 패턴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한 여성과 삶을 공유하면서 제가 이전에는 안 보이던 시야가 넓어졌다고 할까요. 아이를 낳게 된 건 더 유의미한 사건이었죠.

솔직히 당시에 저는 육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요, 반면 아내는 아이가 생기면 닥칠 문제들을 미리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임신도 하기 전부터 육아서적을 쌓아놓고 보기 시작하더군요. 지금도 '내가 그때 성경 읽을 때보다 더 경건한 자세로 육아 책을 읽었다'고 농담반 진담반 얘기하곤 해요. 저도 그 덕을 톡톡히 본 거구요. 육아에 익숙지 않아 혼란스러운 일상이 시작되었고 책을 통해 간접체험을 하게 된 거죠. 사실 책을 읽을 때도 지적 유희를 위해 읽을 때와 절실한 상황 가운데 읽을 때의 그 흡입력이 다르잖아요.

이런 상황에서의 무게감이 결국 육아와 여성문제에 눈을 뜨게 만들었고 결국 소심한 저를 넘어선 커밍아웃을 하게 만든 건 아닌가 싶어요. 일단 '그래, 나는 팔불출이야!' 대놓고 말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한 부분도 있고요. 생각과 일상의 변화는 그렇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기사를 쓰게 된 계기에는 그런 기대감도 좀 있었어요. 남성이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어떤 범퍼,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무래도 남녀 성평등 이슈는 여성이 남성과 대결구도로 가는 것과는 별개로 남성이 기득권을 내려놓는 행동도 포함된다고 보는 편이라 남성은 남성이 설득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 있었죠."

- 기사를 쓰게 되면서 달라진 생활습관 같은 것도 있을 것 같다.
"읽고 쓰는 걸로 에너지를 풀어내는 스타일이긴 한데, 매주 연재 글을 쓰려니 좀 힘들더라고요. 특히 요즘은 <오마이뉴스>가 월간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어떻게 안 될까요?)"

- 제이언니가 보는 시월드의 세계는 어떤지 궁금하다. 시댁 문제 있어 아내와의 인식 차는 어떻게 좁히려고 애쓰나.
"제게 '시월드'는 과거 30년간의 베이스캠프였죠. 문제는 그게 '과거'라는 점이고 이후에는 이 베이스캠프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아내의 시각으로 내 베이스캠프를 '낯설게 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실 아내는 나라는 한 개인을 선택한 건데, 갑자기 고구마 넝쿨처럼 남편을 잡았더니 '시월드의 멤버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오잖아요.

그 넝쿨이 딸려 올라와서는 도리어 권력구도로 볼 때 아내 위에서 군림하게 되잖아요.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죽었다 깨어나도 진급이라는 게 없는 서열상 맨 하위 계급이 되는 거고. 쉬운 예로, 보통 장모님에게 사위는 귀한 손님 대접을 받잖아요. 처가에 가도 '김서방 일하느라 힘들 텐데 방에 들어가서 편하게 쉬라'고 권하고 씨암탉도 잡아서 먹여주고. 근데 며느리는 같은 직장생활을 해도 시댁에 가면 '짤없이' 노동을 해야 하잖아요. 그 불합리함부터 먼저 부부간에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는 거 같아요.

여느 젊은 부부처럼 저희도 세상 물정 모르고 갓 결혼하고는 신혼기간 동안 이틀에 한 번꼴로 밤이 새도록 끝장토론을 벌이곤 했어요. 서로의 밑바닥까지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우리 부부가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격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서로의 생각을 가감없이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거예요. 반복적으로 다투다 보면 부부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어떤 패턴이 있다는 걸 알게 돼요.

그 대표적인 이슈 중의 하나가 '시월드'죠. 그 이후부터 아내와 저는 손발이 척척 맞는 한 팀이 됐죠. 때에 따라선 부부사기단 수준으로 부모님들을 상대로 '선의의 뻥'도 잘 칩니다. 시댁문제를 풀어가는 키워드는 팀워크죠.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분은 저보다 아내가 더 전문가죠. 아내는 억압받는 위치에서 자유로운 위치로 비약한 흔치 않은 대한민국 아줌마의 모델라고 봐요, 저는.

- 모든 '엄마들의 언니'를 자처하는 남자로서 '시댁공략 노하우' 뭐 이런 게 있을까? 제이언니네서 하는 특별한 모습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결국 시댁 문제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 문제'잖아요. 근데 좀 관습적으로 억압적인 측면이 있는 게 문제인 거고요. 사실 남편이야 내 사람이지만 남편의 가족들은, 시작은 남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의 지인 그룹일 뿐이거든요. 처음엔 서로를 잘 모르니까 낯설고 경계심이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근데 그것을 부정하고, 급하게 시부모들이 무르익지 않은 관계에서 '딸 같다, 아들 같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곪아터져서 결국 서로 미워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우리 사회는 결혼하자마자 서로 가족처럼 친해져야 한다는 부담을 조장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는 가족처럼 대해 주지도 않으면서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남편이 처음에는 아내를 자신의 뒤에 두고 아내가 내 가족들에게 익숙해지길 기다려줘야 한다고 봐요. 며느리의 포지션이 아닌 손님의 포지션으로. 아내들이 분위기에 휩쓸려서 오버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행동을 하는데, 대개 한국 여성들이 그런 식으로 사랑 받고 칭찬받는 삶을 강요 받으며 자라서 그런 것 같은데 좀 지나면 다들 힘들어 하잖아요.

이번 추석 때도 기사를 보니 명절 전후에 이혼율이 더 높대요. 앞서 말했듯 남편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한팀을 이루는 게 그래서 참 중요한 것 같구요, 그러고 나면 부부간의 룰이 생기고 그 룰 안에서 자연스럽게 남편의 가족들에게도 익숙해지고 감정적인 친밀함도 쌓이게 되는 거죠. 각자의 부모에 대한 효도와 사랑을 상대 배우자가 지지하고 '도와주는' 시스템이 건강하다는 거죠. 상당히 상식적인 선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는 특히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지배를 그만큼 강하게 받는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는 생각 많이 해요."

- 기사만 보면 이런 남자와 사는 '여인'이 참 궁금하다는 반응이 많다. 공개적으로 아내 자랑할 기회를 드리겠다.
"아내에게 질문지를 보여주니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소리치네요.(ㅎㅎ) 소설가가 꿈이구요, 동물을 아주 좋아해서 집에 키우는 동물이 무척 많습니다. 몸으로 배우고 바로바로 실천하는 타입이고, 관습이나 통념에 얽매이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어찌 보면 저와 참 상극에 있는 사람이죠. 연애할 때 눈꺼풀에 뭐가 씌어지지 않았으면, 거북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근처엔 얼씬도 안 했을 것 같아요(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잘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자유로운 생각에 유연한 편이지만 일상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소심하고 안정적인 반면 아내는 자유로운 영혼인데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무모함도 좀 있고. 아내는 자기의 자유로운 내면을 점점 삶에서 확장시켜가고 있고 저는 또 그것을 보면서 제 안에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는 벽을 허물어가고 있고요. 우린 나름 좋은 팀인 것 같아요. 운이 좋았죠. (ㅎㅎㅎ)"

- 기사를 쓴 적 얼마 안 되었을 때, 딸아이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들이더라. 굉장히 스킨십을 많이 하고, 친화적이던데. 설사 그것이 기자 말마따나 '결핍의 흔적'이라 하더라도 아들 둔 아빠들 입장에서 그러기가 어렵다던데, 언니 감성이라도 공부해야 하는 건가.
"저는 아빠와 아이와의 스킨십은 가부장적인 정서, 특히 집안에서 남자와 여자, 아빠와 엄마의 고정된 성역할에서 자유로워져야 가능하지 않나 싶어요. 어떤 의미에선 가부장제가 아빠와 아이의 스킨십의 즐거움을 빼앗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결핍의 흔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제 내면과 가정 배경에 대해 더 고민할 요소가 있는 것 같고요.

아버지, 어머니와 저의 심리적인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는 거죠. 아이러니한 건 이런 관계의 결핍이 결국 제 아이와의 친밀한 관계를 맺게 도와주었잖아요. 그런 것도 있어요. 스킨십을 많이 하고 자녀 친화적인 제이언니에게서 아이가 떠날 때 나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과연 심리적으로 건강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아마 그게 저에게 남은 내면의 숙제겠죠."

- 주말 육아도 스트레스가 있을 것 같다. 그걸 어떻게 푸는지? 혹시 기사쓰기?
"우리 부부는 교대로 자기 시간을 가져요. 처음엔 아이와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이것저것도 해보고 여기저기 가기도 했는데 요즘은 함께 외출을 하는 일은 별로 없고요. 저나 아내가 아이를 전담하고 한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거죠. 아내는 친구를 만나거나 정줄 놓고 맥주 한 잔하거나 집에서 동물들을 돌보거나 하고요, 저는 영화를 보거나 카페에 나가서 책을 읽거나 몇몇 모임에 나가거나 합니다. 물론 글을 쓰는 걸 좋아해서 글쓰기로도 스트레스가 풀리기도 해요."

아내도 만족하는 육아기사, 직장맘 힘내세요

- <오마이뉴스>에서 육아일기 연재가 있는데, 본적 있나? 혹은 <오마이뉴스>에서 이런 기사는 꼭 본다 하는 것들이 있다면?
"다른 기자님들의 육아 일기도 많이 읽었어요. 아무래도 아이 키울 때는, 다른 집 아이 키우는 이야기도 관심이 가고 다른 집 아이도 덮어놓고 막 귀엽고 그렇잖아요. 그 외에는 신정임 시민기자의 <아줌마 구직자의 취업실패기> 챙겨서 읽었어요. 아, 정말 글쓰신 기자님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 기사를 읽다보면 참 센스가 돋보인다. 글쓰기 공부, 따로 한 적 있나.
"감사합니다. 그런 글들은 어떤 공부를 해서 얻어진다기 보다는, 제가 가진 소심한 성격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다 보면 도리어 어느 순간 유머 코드로 읽히게 되는 것 같아요. 만약 소심한 성격을 숨기고 '있어 보이는 척' 하면 어떨까요. 20대에는 글을 쓸 때, 신영복 교수 특유의 서간문을 흉내내어 보기도 하고 진중권의 스타일을 따라해 보기도 했는데 결국 글은 사람의 '결'을 따라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 기사쓰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면, 혹은 부족함을 느끼는 게 있다면?
"저는 글은 빨리 쓰는데 생각 자체는 좀 오래해야 하는 성격이거든요. 머리 속에 대략적인 구조가 정리가 되어야 쓸 수가 있는데. 아무래도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죠."

- 만족하는 기사, 혹은 반응 좋았던 기사…. 혹은 아내가 가장 좋아했던 기사가 있었다면 소개해달라.
"최근 직장맘 관련 글에 대한 댓글을 읽다가 맘이 짠했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누군가 제 입장에서 말해주면 위로가 되거든요. 그런데 직장맘들은 그런 식의 위로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기사 한 토막에 절절한 마음을 담은 댓글들을 읽으면서 순간 같은 직장인으로, 같은 애를 키우는 입장에서 속상하더라구요.

아내도 이번 육아 연재물을 대체로 좋아해요. 간혹 서평이나 시사 이슈 관련 글을 쓸 때는 아내에게 미리 보여주면 "니가 회사에 매여 오랫동안 착취를 당하다 보니 직접 경험하지 않은 걸 대충 쓴 게 글에 다 보인다. 진정성이 없어!"라고 독한 평을 종종 하거든요. (흑흑) 그런 의미에서 최근 가장 깊숙이 경험하고 관여한 육아에 대한 글이 아내가 보기에 가장 저다운 글일 수밖에 없죠. 혹평도 덜받고. (ㅎㅎ)"

- 본인의 육아 철학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글쎄요, 정리가 잘 안 되네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면 연재글을 쓰지 않았겠죠. 전 촌철살인, 뭐 이런 거 잘 못해요. 글도 좀 장황하게 쓰는 편이고."

- 육아일기는 끝이 없을 것 같다, 본인의 글이 어떤 육아일기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비슷한 내용일 수 있는데, 어떤 남편, 어떤 아빠이고 싶은가.
"언젠가 아이가 커서 제 연재글을 보게 되었을 때, 휙 읽다가 '아빠가 이걸 썼어? 쫌 의외인데'라고 말하게 되는 상상을 하기도 하거든요. 주변에 자식이 커서도 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 혹여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서 내 글을 읽어도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냉소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줄 정도의 좋은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이와의 관계와 별개로 '김용주'라는 한 인간으로 인식되고 싶어요. 부모들은 다들 직장에 헌신하고 육아, 자녀교육에 헌신하다가 어느새 중년이 되고 나면 '나'란 존재는 없는 경우가 많잖아요. 남편이기 이전에, 아빠이기 이전에 '김용주'라는 한 인간으로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평생 깊고 즐거운 관계를 맺어가고 싶어요."

- 그간 편집부에 느낀 것 혹은 바라는 점이 있다면.
"글쎄요. 지난 번에 기자님이 책을 보내주셨어요.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책이었는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가 육아 관련 기사를 쓰는 데에도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구요. 약간 사이버 편집부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런 경험들을 통해 편집부에 대한 느낌이 좀 훈훈해지더군요. 수많은 기사들이 올라오고 시민 기자들을 대하면서 어려움도 많으실 것 같은데 바라는 것보다는 힘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특히 직장맘 기자님들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작성: 오마이뉴스, 최은경 기자님.
2013/10/07 23:18 2013/10/07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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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진료를 마치고 약국에서 약을 기다리던 중 어린 아기를 둔 엄마와 여성 약사 사이에 큰 소리가 오갔다.

"손님. 여기 있어요. 약을 복용하시는 중에는 모유 수유를 하시면 안 되세요."
"네? 뭐라고요?"

"모유 수유하시면 안 되신다고요."
"참내."

"네?"
"이것 봐요. 어떻게 수유를 안 해요? 아이 낳아봤어요?"

"아니요. 아직…."
"그러니까 저런 소리를 해대지. 애가 없으니까 팔자 좋은 소리하구 있어."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솔직히 그 약사는, 결혼은 안 했다지만 그녀보다 나이가 적어보이진 않았다. 무엇보다 약사의 처방에 대해 인신공격적인 말을 해대는 아이 엄마의 반응에 내 심장마저 쿵덕거렸다. 그것도 같은 여성으로서 자기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상대에게, 저런 언행은 좀 아닌 것 같았다. 약사는 상기된 얼굴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우리나라는 대다수가 일상적으로 분노의 대상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인터넷에도 빈번하게 OO녀, OO남 이야기가 퍼지면 순식간에 그들의 신상이 털리고 만 하루가 되지 않은 시간에 포털사이트에 검색어가 뜬다.

사실 나는 이 약국 손님을 두고, 그런 상황을 얘기하고 재현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를 둔 엄마 손님도 그녀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이에 대해서는 첫 기사, '마트서 아이 등짝 때린 엄마, 쉽게 손가락질 마시라'에 충분히 생각을 풀어냈으므로 긴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임신과 육아에 많이 찌들어 있는 기혼 여성들이 종종 싱글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우려를 조금 언급하고 싶을 뿐이다.


아줌마에 관한 '뒷담화'

SNS를 하다 보면 '아줌마'로 통칭되는 기혼 여성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중년 여성의 엽기적인 행동에 관한 '뒷담화'를 종종 읽게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 수단에서 서둘러 자리를 잡거나 식당에서 큰 소리로 대화하거나 백화점, 대리점에서까지 물건은 깎는 일 등은 이미 고전이 되었고 직장 내 여자 선배 직원의 과한 처세술부터, 육아 경험이 없는 싱글 여성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언행에 대한 분노의 글들도 자주 접한다.

'애 안 키워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는 어법이 주는 호전성은, 때로 원치 않게 결혼·육아 경험을 할 수 없는 싱글 여성들에게는 상처를 넘어선 분노를 자극하기도 한다. 물론 내 경험상으로도 육아는 힘들고 내 아내는 나보다 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육아를 경험하지 않는 부류를 향한 어떤 호전성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같은 여성에게.

육아 경험의 유무뿐만 아니라 그 확장도 자주 경험한다. 우리 집은 아이가 하나인데 놀이터에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아이 하나는 육아도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는 마치 남자들이 군대생활을 최전방에서 했느냐 후방 부대에서 했느냐에 대한 반응과 유사하다.

놀이터에 모인 엄마들 사이에서 아이 하나인 엄마는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묘한 스탠스를 갖게 되는데 이는 마치 공익근무를 한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를 할 수 없는 처지와 같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아이들도 다들 제 각각이고 첫째를 키울 때 쓰던 육아 방식이 전혀 먹히지 않음에서 오는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자주 아내도 나도 어떤 부모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는 듯한 압박감에 나름의 어려움을 토로하지도 못한 채 '맞아요, 우린 아이 하나고 그마저도 순해서 어릴 때부터 거저먹기였어요'라며 아이 많은 집 부부들 사이에서 '영혼 없는' 대화를 나누곤 한다.

아이가 셋인 엄마는 아이를 하나 둔 엄마의 고충에 '팔자 좋다'는 반응을 보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보며 세월 참 좋아졌다고 비판한다. 이렇듯 서로 간에 분노, 증오로 뒤섞인 관계의 긴장감은 슬프게도 비기득권 진영 내에서 더욱 심하다.


비기득권 진영 내에서의 갈등, 좋지 않아요

'싱글 여성'과 '육아 중인 기혼 여성',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갈등 등 이른바 비기득권 진영 내의 갈등은 앞서 말한 대로 가부장제나 보수적 사회구조를 유지시켜주고 나아가 '남성', '기업'과 같은 기득권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자주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어려움에 직면할 때 가장 가까운 이들과 함께 그 문제를 풀어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들을 - 더 연약하면 연약하다는 이유로 덜 어려움에 처했다면 그것에 어떤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서 - 비난하고 상처를 주고 결국은 분리의 수순을 밟게 된다.

유사 페미니스트의 삶을 추구하는 나는, 솔직히 말해 여성이 남성을 적으로 여기는 상황들도 불편하지만 그보다 더 (기혼) 여성과 (싱글) 여성이 서로를 구분 짓고 서로에게 가해하는 상황이 더 불편하기만 하다. 또한 이는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시키는데 일조한다는 측면에서 전략적으로 지혜롭지도 않다고 본다.

싱글 여성이 임신, 육아의 지식을 공유하고 먼저 선배들의 고충을 배려해주고, 기혼 여성은 싱글 여성에게 상처가 될 만한 언행을 조심해주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여성의 성평등에 남성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지만 이보다 선행될 부분은 이런 것이 아닐까.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2013/09/26 23:11 2013/09/26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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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 아빠 이제 아무데도 가지마.
(어제 놀다왔더니 심심했던 둣 ㅋㅋ)
나: 아빠 내일 회사가야 되는데?
성하: 회사도 가지마.
나: 음.. 그럼...
성하: 회사는 내가 갈거야. 알았지?
나: ^^ 그래. 성하 회사 가면 아빠 장난감도 사주라.
성하: 어. 알았어. 음, 아빠 무슨 장난감 사줄까.
나: 음... 글쎄. 무슨 장난감 살까.
성하: 아빠.
나: 응.
성하: 아빠가 사고 싶은 거 다 사줄테니까 천천히 잘 생각해봐.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내 레파토리인데)
나: 어,,,, 알았어.
성하: 집에가서 천천히 생각하고 나한테 알려줘.
나: 어,,,, 알았어. (고마워 ㅠㅠㅠㅠ)
2013/09/23 00:21 2013/09/2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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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가 시기인 만큼 광화문 촛불 집회가 한창이다. 집회가 있는 날이면 SNS를 통해 집회 소식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다들 비오는 날씨에도 고생이 많으신 듯). 이렇게 집회 자리에 있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다. 올해 들어서는 집회에 참석을 못 했다. 작년 대선 때 몇 차례 시도해봤으나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움직이는 게 만만치가 않았다.

결국 아이를 두고 가야 할 텐데 아내도 집회를 참석하고 싶어하므로 (다소 어색하긴 해도) 주말 육아를 전담하는 내가 아이를 맡는 게 논리적으로 맞다. 그렇게 나는 남고 아내는 집을 나섰다.

아내가 별 걱정하지 말라며 씩씩하게 떠나고 나면, 나는 집에서 아이와 만화영화 주제가를 같이 흥얼거리며 아내가 주중에 못다 한 집안 일을 하며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든다. 중간중간 아이가 밥 먹을 때나 놀이터를 전전하며 SNS에 올라오는 소식들과 기사들을 읽는다. 마음 깊이 공감하며.


황득순, 집에 남는 자

사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상이다. 예전 연재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민초들이 들풀처럼 일어나길 기대하며 집회 장소를 누비던 함석헌 선생의 활동 뒤에 가려졌던 아내 황득순씨의 일상도 이랬겠구나 싶다. 나는 내 의지대로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았었다. 싱글일 때 혹은 아이가 없을 때 전혀 고민해보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들, 그로인한 선택과 그에 따르는 감정들을 대면해야 한다. 이렇듯 내 정서는 새 국면을 맞이한다.

물론, 조만간 아이가 클 것이고 우리는 가족 모두가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설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촛불을 들고 있는 것과 아이의 장난감을 들고 있는 것 사이에 경중을 따질 수 없다. 유사(pseudo) 페미니스트로서, 아내가 아닌 내가 반드시 촛불을 들어야 할 어떤 논리나 당위도 없다. 누군가는 집회의 자리에 서 있고 누군가는 그 시간에 야근을 하고 또 누군가는 집에서 '아무개의 엄마'로 가사와 육아를 돌본다. 때때로 사람들은 서로의 위치가 뒤바뀌기도 할 것이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신앙적인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을 위해 프란시스 쉐퍼가 만든 공동체인 라브리에 찾아온 수많은 청년들에게 지적인 대답을 주기 위해 노력한 쉐퍼 자신보다 예산 없이 매일매일 수십 명이 되는 청년들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애간장을 태운 그의 아내 에디스 쉐퍼가 더 대단해 보인다. 또 함석헌 선생이 비운 집안에서 군소리 없이 "나야 뭐…"라며 쑥스럽게 가정을 보살핀 황득순 여사의 일상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엄밀히 말해 나는 고작 몇 차례의 시간 동안 아이와 집에 있었을 뿐인데 삶의 대부분을 그렇게 산 그(녀)들의 삶을 절절히 공감했다는 표현은 다소 '오바'일 게다.


행동하는 존재 Vs.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존재

솔직히 고백하건대 과거에 나는 집회에 나서지 못하면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 반대 급부로 자연스럽게 집회 참석에 관심이 없거나 사회 문제 자체에 의식 없는 청년들에 대한 반감도 꽤 있었다. 그저 소심한 마음에 내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자리에 동참하는 것이 내겐, 그리고 내가 타인을 대하는 꽤나 중요한 이슈였다. 헌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뻔뻔하게도 이런 글을 쓸 정도로 '날라리'가 됐다. 그것도 함석헌보다 황득순을 더 강조하려는 논리까지 내세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런 내적 변화가 싫지 않다.

그날, 나는 아이와 칼싸움을 하고 그네를 밀어주고 저녁밥을 차려주고, 씻기고 재우면서도 SNS에 올라온 집회 사진과 글들을 보며, 어느 때보다 평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집회 장소에 있던 분들을 응원했다.

물론 나는 집회에 나선 이들이 다치거나 어려움에 처하지 않도록 매순간 기도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정에서 노심초사하면서 귀가를 기다리는 많은 이 땅의 '황득순 여사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행동하는' 존재만큼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존재도 강조될 이유가 있다는 생각. 조금씩 생겨난다.

노심초사한 마음조차 생경한 밤 시간. 아내가 돌아왔다(휴…).
2013/09/16 23:09 2013/09/16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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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유독 T.P.O.(옷을 상황에 맞게 입는 것)에 약합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큰 행사 외에는 장소에 어울리게 입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죠."


술자리에서 주도를 지키지 않은 이에게는 정정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장소에 맞는 복장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 되려 겉치레가 심하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한국에서 좋은 패션이란 아직까지는 검소한 옷이지, 상황에 맞는 옷은 아닌 것이다. '권력=악, 저항=선'의 도식이 '복장규제=악, 자율복장=선'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무엇이 사무실 복장으로 적당한지에 대한 철학이나 지식없이 그저 눈에 익은 것은 선호하고 낯선 것에는 눈살을 찌푸리니 복장 규제에 대한 반발이 들끓을만하다.

 

- '넥타이는 좋고 짧은 치마 나빠? 오늘도 사무실은 세대 전쟁',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 (2013. 9/12)

 

 

한국에서 드레스코드가 사회적 이슈를 탄 대표적인 케이스가 몇 가지 있다. 축구선수 안정환이 이전 선수들과는 달리 경기 입장시 정장을 입어서 운동선수의 계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흔들었던 경우. 반대로 유시민 전 장관이 국회의원이 되고서 당선자 선서식에 면바지를 입고 나타나 공직자들의 의복을 통한 보수성향에 경각심을 주었던 일. 마지막으로는 나꼼수의 수트빨 날리는 멤버들 모습. 진보는 멋을 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역행하는 그들의 세련된 패션 코드는 대중에게 신선함을 선사했다.

 

이것을 어떤 진영 논리나 계급 논리 혹은 권력 관계에서의 억압 구도를 잠시 접어둔다면, 나는 한국사회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비슷한 시기에 수입되면서 겪은 문화코드가 고스란히 드레스코드에도 묻어난다고 보는 편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나라는 한복을 벗은 후로 유럽이나 미국처럼 어떤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의 긴 양장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서양의 문화에 어떤 합의로 녹아든 '상황에 맞는 의복 문화' 경험이 없다. 그저 어떤 공적 자리에서 입어야 하는 의무적 드레스 코드가 있을 뿐.(결혼식, 장례식, 기업 킥오프미팅, 논문 발표장, 관료 사회의 특정 회의 등)

 

서양의 드레스코드는 오랜 전통(모더니즘, 혹은 그 이전)과 파격(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시간차가 큰 만큼 그 안에서 상당한 규칙과 규칙의 파괴를 대중이 스스로 결정하고 상대를 배려한다. 규칙은 규칙대로 존중하고 파격은 파격대로 허용된다. 물론 정장 안에서도 문화전쟁은 있다. (일례로 미국 백인은 흑인들의 화려한 색을 천박하게 여기고 유럽(영국) 백인은 미국 백인들의 펑퍼짐한 수트를 양키들의 옷으로 폄하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드레스코드에 관해 윤리와 눈치와 권력관계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양장에 대한 교양이 없다. 사실 그럴 여유?랄까 그럴 필요? 엄밀히 말해 그런 게 없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미국을 사랑하면서도 미국을 증오하는 우리의 이중성이 서양의 잘나가는 세련된 패션코드를 동경하면서도 정작 대중들의 문화 소비 영역에서는 강한 거부감 혹은 겉치레가 심한 된장남, 된장녀로 매도하게 되는 습속이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기업이나 국가가 의복에 어떤 규정, 가이드를 제시하는 순간 권력의 억압으로 여기고 '내맘대로' 캐주얼 복장이 진보와 자유의 코드로 읽힌다. (근데 그 자유함이 때론 어색하고 뽀대도 안 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대중이, 대중의 확신이 서양의 의복문화를 흡수하면서 그다지 주체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모던, 포스트모던의 공존 속에서 그저 옷은 치마의 길이나 넥타이의 유무, 검은색은 점잖고 빨간색을 화려하고.... 이런 기초적인 수준에서 논의가 된다고 본다. 게다가 타인의 드레스코드에 대해 쉽게 삿대질을 하는 강한 윤리의식, 진영논리, 권력논리마저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근데 그 기저에 한 백년도 채 되지 않은 양장 문화에 대한 사색, 주체적 수용, 여유로운 수용이 없지 않았나 싶다.

 

정답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다만 기업이 캐주얼 정장의 가이드를 제시할 때 지나치게 억압의 기제로 받아들이거나 결혼식, 장례식에 양장의 정석을 수용하지 않았다고 험담하거나 타인이 빨간 바지를 입었다고 SNS에서 '이건 좀 아니자나요'라고 공유하거나, 진보진영에서 수트빨 날리는 인물에 대해 그 사람의 인격마저 한심하게 치부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생각. 물론 그런 생각 자체를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양장을 대하는 한국인인 나의 스탠스, 나의 철학 같은 걸 고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흥미로운 기사를 읽으며 들었던 잡생각은 이 정도...?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309/h2013091221253186330.htm

2013/09/15 23:28 2013/09/15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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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진영의 신앙적 고민들이 매체를 타면서 개신교 내에서도 회자되는 일이 잦다. 이에 대한 내 심정은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불편하다. 아마도 내 주변 개신교인들은 나의 불편함을 더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해서 내 불편함의 실체를 조금은 풀어낼까 한다.

솔직히 나는 가수이자 JYP의 대표인 박진영의 갑작스러운 '인생의 궤도 수정', 이른바 기독교로의 회심 조짐에 대한 우려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매체에서 언급한 대로 3년간의 공부 내용 중에 창조, 진화, 그리고 지적설계 이론을 언급한 대목에서 그리 긍정적인 생각을 갖질 못했다.(대체로 창조-진화 논쟁에서 현재까지는 기독교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지적설계 이론이 과학의 탈을 쓴 신학으로 치부되고 있다.)

 

물론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부분은 이런 거다. 나는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 궤도를 수정할 때, 반대 극단으로 달려가는 현상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회귀현상이 뒤따른다고 보는 편이다. 하나의 유행이나 기호가 아닌, 종교성으로 대변되는 한 인간의 가치관, 세계관이 변할 때는 사실 스스로도 충분한 검증의 시간이 필요하더라는 사실이다. 그 변화에서 자신의 이성과 정서, 그리고 습관 모두가 어느 정도 합일점에 이르렀을 때 변화된 가치관, 종교관이 어떤 일상적 행동으로 드러난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매체에서 보여준 박진영의 돌발(의도된) 발언은, 적어도 내겐 꽤나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 발언들이 자신 새앨범의 컨텐츠와 함께 공개되었을 때 솔직히 우려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의 신앙적 고민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인데 그의 말들이 편집되어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순식간에 기독교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그것은 다시 대중적인 복음주의 개신교권에서 확장, 증폭되고 소비될 조짐마저 보였다. 그에게조차 아직 잘 맞지 않는 옷을 개신교가 서둘러 반기며 오히려 적극적인 홍보(전도)에 동원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체로 한국 개신교권은 이런 대형 스타에 의존하는 몹쓸 습관이 체화되어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탁월한 말주변(설교)에 현혹되고 대형교회에 모여들고 대규모 찬양집회, 대형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다. 물론, 나또한 그런 배경에서 자라왔다. 보수 개신교권에 국한된 얘기만도 아니다. 한국 복음주의권도 1세대 몇몇 소수의 목회자들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결국 2, 3세대의 리더들은 현재 진보진영의 정치권과 비슷하게 그 리더십이 전수되지 못하는 느낌도 받는다.

 

우리가 박진영이라는 유명 가수의 변화를 반길 경우, 이른바 JYP라는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대표를 개신교의 홍보 수단으로 적극 수용할 경우, 나는 그들의 진정 어린 어떤 기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가 박진영 본인의 신앙마저 망치는 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도 본다. 솔직히 우리는 과거에도 '대도' 조세형이나 '보스' 조양은, 전병욱, 오정현에 '환호하여' 그들의 신앙이 무르익어서 열매를 맺기도 전에 더욱 이전 삶의 형태로 복귀, 질주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나는 그런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개신교 안에 없다는 점도 불편하다.

 

매체에서 보여준 그의 신앙적 고민. 나는 그 진정성을 믿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박진영이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이 상당히 우려스럽다. 내적 고민들이 깊어지기 전에 대형 자본에 길들여진 상품(음반)을 들고 기독교에 관한 이성적 동의 수준의 메시지를 '동일한 플랫폼'(이른바 뮤직 엔터테인먼트, 혹은 지상파 연예 프로그램) 위에 올려 놓은 상황이 불편하고 불안하다. 물론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자신의 변화를 표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도 흔들리고 그가 회심의 증거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대중적 개신교계도 함께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유명인의 신앙은 더 내재화되고 더 그 가치가 축소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수는 대중이 모이면 불편한 이야기로 그들을 흩으셨다. 나는 그가 매체에 자신의 상품과 함께 전달되는 말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일상이 변화되는 소소한 경험들 속에서 신앙이 싹트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신앙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닌, 무대 밖에서 조금씩 열매 맺길 기대한다. 그 때까지. 그의 신앙이 그의 몸에 잘 맞을 때까지 개신교는 잠잠히 그의 곁을 그저 지켜주기를 기대한다. 섣불리 먼저 박수치기 보다는, 함께 걸어주기를 기대한다. 내 생각은 그러하다.

2013/09/15 23:27 2013/09/1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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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시간관리·자기계발 분야의 책들에 관심이 많을 무렵이 있었다. 당시 읽은 책 <관계중심 시간경영>에서 저자 황병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시간 개념을 구분해 사용한 것을 주목했다. 여기서 크로노스는 '시계 시간' 혹은 흘러가는 시간을 뜻한다. 그리고 카이로스는 '사건 시간', 즉 무수한 시간들 중 의미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대다수의 자기계발서가 제안하는 시간 관리는 대체로 시계 시간을 보다 촘촘하게 관리하는 것에 기반한다. 하지만 정작 인간은 같은 시간도 다르게 인식한다. 누구와 만났고 어디를 갔고 무슨 일을 했느냐에 따라 그 시간의 의미는 달라진다. 고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른바 한 개인의 삶에 있어 '사건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고 또 앞으로도 그와 비슷한 시간들이 흘러갈 것이다. 이 모든 양적 시간들 중에 사실상 나에게 의미 있게 각인된 특정한 사건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업고 병원으로 뛰던 기억, 아내와 처음 데이트하던 장소, 아이가 태어나던 날, 폐렴으로 입원했던 기억, 회사에서 몇 주 동안 밤새 준비했던 보고서를 결재받던 날….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우는 것이 많다.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와 미래를 조명하는 좋은 스승이다. 그런 소소한 깨달음 때문인지, 나의 정리'벽'은 기억들을 종이에 노트에 그리고 컴퓨터에 저장해두는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이건 덧칠이다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앨범을 신청하라는 안내문을 받았다. 허걱, 앨범 가격 무려 6만 원이란다. 나는 그래도 신청할까 고민했으나 아내는 '상술'이 엿보인다며 끝내 앨범을 신청하지 않았다. 물론 돈 때문만이 아니다. 어린이집에서 하는 활동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아이의 아이다움'을 저해한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

일례로 지난 어버이날에 아이가 만든 카네이션에는 '엄마 아빠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어쩌고 하는 무슨 틀에 박힌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다. 정말 우리 아이가 쓴 내용이었다면 아마도 '아빠 똥꼬나 먹어' 내지는 '아빠 스티커 다 모으면 큰 장난감도 사줘야 해'라고 쓰지 않았을까.

문제는 아이의 아이다움에 어른들이 '윤리적인 덧칠'을 해대는 것이다. 따라서 성장기에 어린이집 아이들이 어떤 기억의 저장으로 담아오는 많은 추억들도 천편일률적이다. 그저 수많은 아이들 속의 내 아이, 남들에게 처지지 않게 성장하는 내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장 앨범을 경제논리에 따라 고가의 비용을 주고 구입해야 한다.

내 어릴 적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어디에 살았는지, 그 시절 내 친구는 누구였는지, 나는 어릴 때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사실 지금도 나는 유년기에 어떤 성격을 가진 아이였는지 가끔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자료는 없다. 빛바랜 사진 몇 장에 기댄, 그저 풍문 속에 전달되는 내 영유아기의 사건들. 그것조차 어른들의 가치관으로 채색된, '넌 어릴 때부터 착했지, 점잖았지, 공부를 잘했어…' 그들의 욕망에 기댄 평가들.
내 아이만의 앨범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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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집 친구가 그려준 그림에 친구 이름을 함께 넣었다.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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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자료들은 자료를 선별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된다. 나 또한 내 아이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내 시각으로 내 가치관으로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린이집에서 막 찍어내는 앨범이 아닌, 내 아이가 나중에 자신의 영유아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그 시절의 특징들 그리고 자라면서 경험한 환경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주고 싶다.

그것이 10대나 20대에는 별 의미 없는 자료일 수 있겠지만 30대가 넘어 내 나이 즈음이 돼서는 스스로에게도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성격심리학 분야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간의 고유한 성격과 기질은 30대에 꽃을 피운다고 한다. 10대나 20대에는 여전히 주변의 눈치(환경에 적응)를 보느라 본유적 성격이 죽는다고.

아이에게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얼마나 이 아이를 보호해줄 수 있을까. 얼마나 이 아이가 편하게 고지를 선점하게 만들 수 있을까. 부모라면 그런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정작 아이에게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만들고 자기의 과거를 통해 미래의 삶을 스스로가 개척할 내적인 힘을 길러주는 게 아닐까. 부모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게 해주려면 부모와 사회의 가치관으로 덧칠한 기성 성장 앨범들이 아닌 부모의 눈으로 자세히 관찰한 내 아이의 특징들을 잘 기록해 주는 게 정작 더 중요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아이의 성장책을 만들어본다. 아이와 앉아서 옛날 어린이집 친구들의 이름을 물어보고 받아적었다. 어린이집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서 친구들의 이름을 같이 적은 뒤 육아일기 한쪽에 넣어둘 생각이다. 아이에게 간간이 보여주며 나의 추억에는 없는, 선명한 이미지를 남겨주고 싶다. 나도 안다. 이런 것들의 이면에는 나의 어떤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가 깔려있다는 것을. 그래도, 아이가 나이가 들어 네다섯 살 시절을 추억할 때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른다면 나도 기쁠 것 같다.
2013/09/14 23:07 2013/09/14 2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