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서평


비교 의식 극복을 위한 핸드북 
코넬리아 마크 <네 모습 그대로 괜찮아>

 

모든 비극은 비교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물론 그 반대로 자신을 넘어서는 노력은 비슷한 실력의 상대와의 지속적인 비교에서 꽃피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비교 의식은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긍정적이기보단 부정적인 뉘앙스를 자주 갖는다. 여러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비교에는 '덫'에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지를 따르자면 그것도 무려 세 가지의 덫이 존재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비교의 분야와 긍정적 측면, 그리고 인간관계에서의 네 가지 태도(건강, 우울, 독재, 염세적 사고)를 소개한 후 책의 나머지 모든 부분은 이 세 가지의 덫에 대한 정의와 사례들을 언급하고 그 덫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제시한다. 결국 논지의 끝은 매력적이고도 탁월한 제목에서 드러나듯 "네 모습 그대로 괜찮아"이다.

 

이 책은 분량도 짧고 내용도 많지 않다. 느낌상 <비교 의식 극복을 위한 포켓 핸드북>이라고 제목을 정해도 될 법하다. 연역적이고도 구획이 잘 나뉜 명제들로 특정 심리를 분류하고 그 개별 사항에 대한 대안들을 사례들과 함께 엮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성경 속 인물들을 나열했지만 모더니즘적이면서도 계몽적인, 참 착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실 마인드맵으로 요약하기에 가장 적합한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제로 마인드맵을 구성해 보았다! 아래 사진 참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심리적인 이슈들은 좀 더 들어가면 미궁에 빠지기도 하고 그 명제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개별 개인에게 어떤 일반론적인 대답, 행동 지침이 되지 못하는 수가 많다. 성경 속 많은 인물들을 비교 심리의 갈등 구도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옳은 자와, 그른 자를 나누는 행위는 결과론적으로는 옳을 수 있겠지만 과정 가운데에서 체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더 많은 사적 내러티브(이야기)를 간과하고 무시할 위험이 있다.

 

이 책을 평가절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시작에는 어떤 유의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질투심과 비교 의식, 그것을 처음 인지했을 때 붙잡고 싶은 어떤 일반적이고도 간결한 명제들은 입문자들에게는 언제나 유용하다. 책의 분량이나 내용 면에서 이 책은 그런 입문자들을 위한 가이드를 제시한다. 그 이상의 질문에 대해서는 좀 더 비싸고 두껍고 고민을 더 해야 하는 책들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필요가 있겠다.

2013/12/10 00:58 2013/12/10 00:58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서평

자기 계발서의 덕후, 자기 계발 비평서를 읽다

   
▲ <거대한 사기극> / 이원석 지음 / 북바이북 펴냄 / 252면 / 1만 3500원

 

고백하건데 나는 이른바 '자기 계발서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인'이다. 스티븐 코비와 하이럼 스미스의 책을 읽고 프랭클린 플래너를 10년간 사용했다. 최근 2~3년간은 데이비드 알렌의 GTD('Getting Things Done'의 약자로 우리나라에서는 '끝도 없는 일 깔끔하게 해치우기'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방식을 익힌 이래로 좋은 도구로 지금까지 쓰고 있다. 그 외에도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 라이어>라거나 토니 부잔의 <마인드맵>, 그리고 황병구의 <관계 중심 시간 경영>까지, 스스로가 직장 생활, 사회생활에 유효한 자기 계발서들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고로, 만약 자기 계발 비평서에 대한 독후감을 써야 한다면 나 같은 자기계발서 '덕후'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원석의 <거대한 사기극>은 부제가 암시하듯 '자기 계발서 권하는 사회의 허와 실'을 밝히는 책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자주 느끼지만 재미있고 유익했던 책이 항상 서평 혹은 독후감을 쓰기 좋은 책은 아니라는 거다. 정말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고 주변에 권하고 싶은 책인데 정작 책에 대한 감상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한두 줄 이상의 문장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사실 나는 최근 김용민의 <한국 종교가 창피하다>를 읽고 서평을 쓰겠다고 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책도 재밌게 읽었고 김용민 교수의 최근 행보에도 지지하는 마음 간절했으나 그 책에 대해서는 끝내 한두 줄 이상의 문장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윤리적 패러다임 vs. 신비적 패러다임

본서도 그런 의미에서 할 말이 별로 없는 책이었다. 논지뿐만 아니라 200쪽을 살짝 넘긴 분량에 웬만한 자기 계발서들을 다 언급한 부분은 놀랍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본서의 최대 장점은 자기 계발서의 시대적 흐름을 짚고 그에 따라 분류하여 그 특징들과 배경이 되는 가치관들을 규명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 계발서는 미국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하며 크게 두 가지의 패러다임으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윤리적 패러다임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적 패러다임이다. 윤리적 패러다임은 청교도 윤리를 강조한 막스 베버로부터 시작해서 벤저민 프랭클린과 그의 사상적 계보를 잇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스티븐 코비, 데일 카네기의 책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윤리적 패러다임 기반의 자기 계발서들은 근면의 힘을 신뢰하며 외부의 환경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성실한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반면 신비적 패러다임은 19세기 미국에서 번성했던 두 운동 흐름, 즉 초절주의와 신사고 운동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전자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이, 후자는 메리 베이커 에디가 창시한 크리스천 사이언스로 대변된다. 이런 흐름 속에 있는 책들이 론다 번의 <시크릿>,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같은 류이다. 신비주의 패러다임 자기 계발서들의 특징은 상상(긍정)의 힘을 신봉하며 원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노력을 내려놓고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이루어진다고 강변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자기 계발서

특별히 저자가 주목한 점은 이 두 가지의 흐름이 미국의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경기가 부양되었을 시기에는 성실하게 노력하기를 권하는 윤리적 패러다임이 강조되었다면 최근 경기 침체와 불황의 시기에는 다분히 믿음의 도약을 요구하는 신비적 패러다임이 중흥기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자기 계발서들도 결국은 사회와 경제적인 영향 아래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계발서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하는 배경에는 미국 사회보장 시스템의 부재에 그 원인이 있음도 지적할 부분이다. 사회보장 인프라조차 없는 사회는 개개인에게 불안을 조장하고 국가가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가 발전(자조, self-help) 하도록 독려하는 어떤 도구로 자기 계발서들이 소비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는 미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통해 이제 전 세계가 이 철학을 수용하도록 권하고 있다. 결국 자기 계발서들은 스스로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구조의 불합리성을 방기한 채 개인에게 초점을 돌리게 만들고 개인에게 자기 세뇌를 시키고 무한책임을 지운다는 점에서 악한 측면이 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자기 계발서들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가. 저자는 자기 계발서의 넓은 스펙트럼을 전제한 후 그 활용 측면에서 긍정적 역할이 있음도 언급한다. (부정적으로만 다루었다면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실패다.) 단적으로 말해 신비적 패러다임의 책들은 진통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므로 권하지 않으나 윤리적 패러다임의 책들은 읽되 습관이나 인격을 다루는 책보다는 기술을 다루는 책이 낫다고 평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보여 준 자기 계발서의 '거대한 사기극'을 하나하나 규명하면서 보다 더 근본적인 고민으로 이끈다. 요는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더욱 가속화시킨 위계와 경쟁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회 안정망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회에서 불안을 느껴 자기 계발서에 환호하고 열심히 그 논리와 방법론을 섭렵하려고 애쓰는 집단은 직장인(세일즈맨), 여성(우먼 파워, 재테크), 어린이들(영어 유치원, 독서 지도)이다. 정작 사회의 상위 집단은 세습된 부와 부모의 취득된 문화 권력(아비투스)으로 인해 손쉽게 자녀들을 '성공'으로 이끈다. 80%였다가 이제는 99%로 대변되는 비기득권층 사이에서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비약하거나 죽도록 애쓰는 형국이다. 물론 그중 소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그 증거를 바라보며 대중은 사기극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그게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이자 나 또한 동의하는 미국과 미국을 사랑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한마디만 첨언한다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계발서는 적절히 읽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사실상 자기 계발서는 거대 담론보다는 미시 영역에서 효과가 있다. (물론 저자도 습관이 아닌 기술로서의 자기 계발서를 긍정한다.) 나는 학문이나 사회 흐름으로서 이른바 사상적 배경에서 자기 계발서를 소비한다기보다는 내 하루하루의 산적한 업무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간 관리 도구로서의 자기 계발서들에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3~4년차 직장인일 때 자주 과도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없었고 업무에 우선순위를 매기지 못했고 시간 배분에 실패해서 죽도 밥도 아닌 삶에 허덕였다. 당연히 시간 관리, 자기 계발서들은 당시 과로로 흐트러진 내 삶을 정리해 준 비서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둘째로 나는 긍정의 힘을 믿는 편이다. 문제는 긍정의 힘, 긍정적 사고방식을 '누가' 요구하는가의 문제다. 종단 연구를 통해 노년의 삶의 만족도를 다룬 것으로 유명한 조지 베일런트의 <행복의 조건>을 비롯하여 많은 장년층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개개인의 긍정적 사고가 그들의 행복한 삶을 추동하였음을 언급한다. 사실, 사회가 불합리한 순간에서조차 긍정, 순응, 복종을 요구하는 것과, 개인이 일상적으로 낙천적으로 긍정적으로 살기를 권장받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억압사회이고 후자는 한량사회일 테니. 정작 문제는, 후자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낮춰야 하는데 자기 계발서들이 오히려 불안을 조장하면서도 긍정 흉내 내기를 권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긍정의 메시지는 <욕망해도 괜찮아>,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당신으로 충분하다> 같은 게 아닐까.

 

김용주 / 현대·기아자동차연구소 연구원, 전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2013/12/10 00:57 2013/12/10 00:57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제이언니의 아빠일기' 열두 번의 연재 기사를 쓰고 나니 아쉽게도 더 이상 풀어낼 만한 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자들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는 매일 쓸 이야기가 넘쳐난다는데, 반복되는 일상에서 어떤 혜안을 얻고 그것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일은 내게 쉽지 않았다(우리 가족과 내 아이가 즐길 만한 이야기들은 더러 있지만 공유하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연재기사의 시작은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여기게 된 굵직한 몇몇 사건들에 기인했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남자와 여자는 여러 가지로 사소한 불평등이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 아이들의 번호는 1, 2, 3번으로 시작했지만 여자애들의 번호는 41, 42, 43번이었다. TV에서 보던 재미있는 드라마 속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계급은 분명했다. 하다못해 우리말 더빙이 된 외국 드라마에서도 남편은 반말을 했지만 아내는 존댓말을 썼다. 나는 이런 상황이 글로벌 표준인 줄 알았다.

되돌아 보면 어릴 적 우리 부모님도 그렇지만 집집마다 부부싸움이 심했고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도 많았는데,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을 도리어 남편이 좋은 말로 돌려보내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부부문제는 가정사이니 가장인 남자가 잘 해결하겠다고 몇 마디만 건네면 경찰은 잘 알았다는 듯, 혹은 귀찮게 이런 일로 오게 하지 말라는 듯 무심한 발걸음을 돌렸다.

여자는 짐짝처럼 남편의 강한 손에 붙잡힌 채로 집안으로 끌려들어 갔고, 나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실례라는 생각이 어슴푸레 들었다. 따지고 보면 대놓고 '남편(남자)은 하늘'이라는 가부장제도 교육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체화할 수 있는 많은 암시들이 그 시절에는 참 많았던 것 같다.

친누나와 나 사이의 차별도 꽤 심각했다. 나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내가 아들이란 사실에 대해, 자라면서 내가 누나보다 많은 혜택을 입은 것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있다. 내가 누나를 해코지한 건 없으므로 사적으로 미안한 건 없지만, 자라면서 아들로서 받은 혜택을 누나는 덜 받았거나 거의 받지 못했다. 이런 것에 대한 찜찜함은 참 오래갔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수가 남녀차별을 경험했음을 깨닫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청년기 시절, 남녀문제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읽어낼 만한 그릇이 못 됐다. 여성은 '연애'의 대상 혹은 어떤 '공략'의 대상이었지 여성문제 자체가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한 어떤 에티켓이나 여성 심리가 궁금했지 성평등 이슈나 가부장제 속 여성의 인권 등의 개념은 없었다. 그보다는 더 진지하고 중요한(혹은 중요하다고 알려진) 정치 이슈나 내 개인적인 학업, 취업 이슈가 더 중요했던 시기였다. 또, 군대도 가야 했으므로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2년 넘게 병역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 자체도 은근히 불만스러웠다.

시간은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게 되면서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자주 보던 백마 탄 기사 '코스프레'를 하게 됐다. 책에서 읽었거나 어디선가 주워들은 로맨스의 정석대로 여자친구에게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게 해주겠다' 따위의 참으로 아름다운 동화 같은 약속을 했다.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100일, 200일을 지나 프러포즈도 하고 양가 부모님도 잘 설득하고, 그렇게 내 연애는 아름답게 결혼으로 골인하는 듯했다.


여성에 보수적이었던 내가 변한 결정적 계기는 '결혼'

하지만 결혼이 답 없는 대서사극의 시작이었음을 점점 깨닫게 됐다(여기서부터가 개략적으로나마, 내가 연재글에서 풀어내던 이야기의 시작인 셈이다). 글에서 자주 언급했듯 결혼 이후 나는 완전히 '카오스 상태'를 경험했다. 물론 그 카오스, 혼돈 상태라는 게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30년간 쌓아온 어떤 나만의 체계가 무너지는 느낌, 내가 경험해온 체계로는 이 상황들을 합리적으로 헤쳐나갈 수 없을 것 같은 혼돈,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빨간약을 먹고 깨어난 새로운 세상과의 대면 같다고나 할까. 어쨌든 적어도 나 잘난 맛에 '시크'하게 살았던 과거는 그렇게 갔다.

아내는 자주 질문했다. 왜 명절에 자기 집에는 갈 수가 없는지, 처가에 가면 김 서방은 쉬고 시댁에 가면 며느리는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아이가 태어나면 왜 엄마의 성은 쓸 수 없는지, 돌림자는 꼭 넣어야 하는지, 호주는 왜 남자여야 하는지, 왜 남자는 육아휴직을 하지 않는지, 일상적으로도 왜 주말에도 남자는 아이를 전담할 수 없는지, 여성은 왜 임신 기간 동안 소화제나 두통약 하나도 제대로 못 먹고 맥주도 한잔 할 수 없는 상황을 감내해야 하는지….

처음에는 그냥 대답하기 싫었다. 내 삶도 충분히 피곤했으므로. 스물아홉의 나이에 취업을 해서 이제 막 직장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그저 가정과 회사 양쪽에서 샌드위치로 압박 받는 불쌍한 남자가 된 느낌을 받았다. 부모와는 분리되는 게 마땅하나, 누군가에게는 의지하고 싶은 미성숙한 남자아이로 세상에 던져진 것 같은 억울한 정서도 있었다.

게다가 성평등 이슈는 처음부터 남성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었다. 대부분의 남성에게 있어 여성은 내가 책임질 대상, 돌봐줘야 할 화분 같은 존재로서 아끼고 사랑해주는 것이지 나와 어깨를 맞대고 경쟁하고 팀워크를 맞춰가야 할 위치로 올라올 때는 더 이상 배려의 대상일 수 없다.

많은 남성들이 여성을 대하는 이중적 태도가 이런 측면에서 기인한다. 어리바리한 신입 여사원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동네 오빠 혹은 삼촌 같은 모습이지만, 자신과 진급이나 고과를 두고 경쟁하게 되는 '커리어우먼'(이 단어 참 묘하다)들에게는 뒷담화가 장난이 아니다.

역차별을 운운하거나 '상사에게 꼬리를 친다' 등의 듣기조차 불쾌한 말까지 내뱉으며 내면의 부정적 정서들을 가감 없이 쏟아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성은 수동적이면서도 저자세이고, 얌전하고, 가부장제에 잘 적응하며 출산·육아의 천명을 군말 없이 잘 수행하는 '현명함', '현숙함'이 전제돼야 나이가 들어도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는다. 그에 더해서 일도 잘하면 사회가 준남성으로 받아줄 용의가 있다.

아마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아내와 일상을 살면서 이 모든 담론들을 체험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성 문제에 관해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했을 것이다. 더 섬뜩한 건,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진보적이고 개화된 남성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았을 것이라는 점.

왜냐하면 나는 담론으로서의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생각들에 대해서는 항상 열려있고, 새로운 지식들을 열정적으로 습득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삶과 별개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함에 있어 나는 관대했다. 하지만 내 일상에 들어온 부조리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을 때 나는 회피하고 싶었고, 불편했고, 때로는 힘들었다. 하지만 자주 '내가 아내라면', '내가 여자라면'이라는 생각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내는 남편을 더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모든 갈등의 해결점은 '이해'가 시작이라 생각한다. 물론 대다수의 가정학교·아빠학교에서는 '이해'를 종착역으로 가르친다. 아내를 이해만 해줘도 아내는 정서적으로 만족해서, 그 결과 가부장제가 유지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혹은 강요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남편을 '족칠' 필요는 없다. 이해가 되면 남자들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을 찾는 지점에서 아내는 많은 이야기들로 남편을 불편하게 만들고 자극을 줄 필요가 있다. 어차피 부부관계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부부가 다양한 방향으로 해결책을 내 자신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전제가 남편과 아내가 동등한 주체, 평등한 위치라면 그 개별 삶의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건강하게 발전하리라고 예측하는 것이다.

나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그 작은 소망, 그 사소한 시발점으로부터 주변 관계의 다발이 줄줄 엮여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관계의 다발들이 풀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로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느낌이 들었고, 그 사회가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의 담론 곳곳에서 고질적인 문제들을 일으킨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됐다.

'제이언니의 아빠일기'를 통해 언니(여성)의 시각으로 아빠(부모)의 삶을 솔직하게 풀어내고 싶었다. 작게는 출산·육아를 둘러싼 소소한 일상에서 시작해 남녀 성평등, 가부장제도, 나아가 자녀에게 '올인'하는 가족구조의 미래 등을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다. 거창한 욕심과는 달리 경험한 이상의 것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아 여기서 연재를 덮는다. 읽어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2013/12/09 23:15 2013/12/09 23:15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Front Loading 프론트 로딩
차주 월요일 임원 주간업무 회의를 위해
금주 화요일 파트주간업무회의, 수요일 팀주간업무,
목요일 센터주간업무, 금요일 최종 수정한다.
결국 월요일 회의를 마친 다음날 차주 업무보고를
준비하는 셈. 진정한 프론트로딩이라 하지 아닐 수 없다.

2. Concurrent Engineering 동시공학
1항에서 언급한대로 업무보고서를 한주 내내 써야 하기
때문에 보고서만 쓰고 있으면 일은 언제하냐는 지적을
받기 십상이다. 고로 하지도 않은 일을 주초부터 할 것처럼
보고서를 쓰는 것과 더불어 진짜로 일도 같이 해야 한다.
이른바 예측보고서를 쓰면서 실행보고서로 업데이트 하기.
진정한 동시공학의 꽃이라 칭할 수 있겠다.

3. Reverse Engineering 역공학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의 제품을 가져다가 뜯어보고
그대로 카피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따라잡는 기법이다.
이 기법이 가장 잘 활용되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보고서쓰기.
임원 보고 및 결재가 잘 되는 보고서를 입수하여 색깔, 폰트,
배치, 문구들을 그대로 재활용한다. 이 기술력을 내재화하면
템플릿을 만들어서 숫자와 상황에 따른 단어만 조금 수정해도
뛰어난 성과를 보장한다... 진, 진짜다.
2013/12/06 23:33 2013/12/06 23:33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저런 영상이 가능한 시대를 살게 된 것이 행복하단 생각을 잠시 했다. 우리나라도 은근 헐리우드 키드가 많고 70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적어도 부모세대와는 다른 어떤 유년시절의 '기호품들'을 가질 여유가 있었다.

내 중딩 고딩시절 반항의 아이콘은 단연 메탈리카였다. 본 조비나 스키드로(1집 기준), 스틸 하트 같은 음악을 듣던 친구들과는 구별된 '레벨'을 자랑하던 우리는 딥 퍼플이나 레인보우 등 ...록의 클래식에 꽂혀 있었고 당시 밴드로는 단연 메탈리카를 들어야 서로의 수준을 인증해줬다.ㅋㅋㅋㅋ (생각해보면 교계 논객들 아는 학자들 자랑하는 것과 좀 비슷한 면이 없지 않다...^^)

암튼,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생들에게는 너바나, 커트 코베인이 하나의 전설이겠지만 그보다 조금 앞선 나에게는 역시... 메탈리카가 추억의 밴드가 아닐 수 없다.

<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꼈다면 오늘 <메탈리카 쓰루 더 네버>는 거의 눈이 튀어나올 수준이었다. 3D IMAX를 위한 공연.ㅠㅠㅠㅠ 이건 뭐... 내한공연을 본다해도 어지간한 자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퀄리티. 덕분에 영어시험은 지각할 뻔 했지만 시험을 못봤어도 전혀 아쉽지 않았을 시간... 엉엉엉.

단언컨데,
메탈리카 쓰루 더 네버... 3D IMAX 관람은, 현대 기술의 진보와 공연의 진수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일 겁니다. 영화 내리기 전에 극장에서 관람하시길. ㅠㅠㅠㅠ (그래비티...는 쳇, 쫌 우습다. 흥피치...)

 

 

2013/12/02 23:43 2013/12/02 23:43
Posted
Filed under 정보들/사용기
필 받은 김에 최근 태블릿, 단말기 동향에 관한 혼자 생각을 끄적여본다.

1. 7인치 시장엔 누크 HD 199불, 킨들파이어 HD 139불, HDX 229불. 넥서스7 229불. 그리고 내 사랑 레노버 아이디어패드 A3000 149불. 저가형 안드로이드 단말기들의 역습이 꽤 무게감이 있다. 물론 비스킷탭도 있고, 삼송 제품도 있지만... 그건 패쓰.

2. 7인치는 일전에도 자주 언급한대로 reading tool이다.(반대로 10인치는 writing tool로 본다) 따라서 기능상 전자책 단말기와 겹친다. 그 말인 즉슨 전자책 단말기 시장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본다.

전자책 단말기가 가독성이 우수하지만 무게의 매력도 점점 줄고 있고 무엇보다 출판시장의 상당수의 책들은 '칼라'다. 잡지도 '칼라'고...... 난 그게 킨들이나 크레마 류의 가장 큰 하향지점이 되리라고 본다.

3. 전자책 시장은 성장할까. 지금은 잘 모르겠다. 미국처럼 아마존의 독주인 경우 독자포멧의 라이센스 유지가 가능하지만 국내에는 교보, 한국이퍼브, 개별 출판사 등등 라이센스가 중구난방이라...

결국 소비자는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편인지라 쉽지 않을 것 같음. 즉, 전자책 시장의 파이는 기대만큼 커지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고로 난 스캔북으로 가게 되었음.

4. 레티나 디스플레이의 가장 큰 장점은. 내 짐작과 달리 스캔북을 볼 때에 차이가 극명했음. 결국 전자책이나 스캔문서를 보기 위해서 레티나가 절실한 상황. 영화나 기타 영상의 화질에 연연하지 않아 아이패드 미니로 2년을 버틸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레티나가 꼭 필요한 상황이 되고 말았음.

5. 화질을 볼 때는 IPS, 레티나 적용 여부를 보면 된다. 물론 해상도를 보는 방법도 있지만 ppi로 따져 보는 게 가장 적절할 듯. 최근 제품들은 무려 300ppi를 쉽게 넘어서는 추세. ㅎㄷㄷ

6. 레노버 A3000을 사고 나서 알게된 건데. 310g과 345g의 차이가 느껴진다. 요는 300g 초반대의 무게가 가볍다고 느껴지는 감성중량인 듯.

7. 안드로이드의 가장 큰 장점은 USB처럼 폴더에 접근가능하다는 점일 듯. 아이튠즈 안 쓰니까 편하긴 겁나게 편함. 게다가 2만원만 더 내면(32G microSD 장착시) 16G가 48G로 업그레이드된다. (땡 잡았다...뭐,,, 그런 느낌?)

8. 감성중량 얘기하다보니 애플 제품이 H/W든 S/W든 손에 착착 감기는 맛이 있다. 안드로이드 태블릿은 왠지 마감재가 허술한 건물을 보는 느낌이랄까. 감성 측면에서는 참... 공학도스러운 면이 강하다.ㅋㅋㅋ

...
난 왜 이런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걸까.-_-a
2013/12/02 23:42 2013/12/02 23:4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나는 커서 뭐가 될까'

여전히 고민한다고 어디에선가 툭하고 던진 말이
회자가 되었다. 아직도 그런 생각하냐고...
얼마전 강의로 만난 윤태호 작가도 장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조금 놀랐고,
며칠 전 아는 분이 '그래, 너는 커서 뭐가 될거니'
라고 말해서 한참을 웃었다. 마음이 통했달까.

요 며칠 사이, ...
여전히 꿈이야기,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는 글들을
페북에서도 종종 읽었다.
여전히 내가 어떤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유아기적
욕망 때문이 아니다.
반복되는 그저그런 하루를 살아내는 것에 안주하지
않는 삶. 익숙한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일부러 불편하게
만드는 삶의 태도랄까 방향성이랄까.

아직 다 가지 못했다고 느끼는 어떤 방향을 향해
여전히 갈급함을 느끼고.. 예전같지 않은 나,
그 존재의 현실을 살짝 잊는 것, 혹은 잃는 것...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를 보면서 나의 늙어감에
기죽지 않는 것.

그렇게 오늘밤도 나는 커서 뭐가 될까를 고민한다.
2013/12/02 23:32 2013/12/02 23:32
Posted
Filed under 정보들/사용기

1. 구입 이유?
네네. 미니2 기다리다 지쳐서 질렀습니다. 그게 주된 원인이구요. 대부분의 책을 태블릿으로 읽는 편인데 정말 불편하더군요. 그러면 왜 a3000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렴한 안드로이드 기반의 레노버 태블릿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장점은 역시...
가격입니다. 149불이며 국내에서는 199,000원에 판매됩니다. 여기에 케이스와 액정필름, 32G 마이크로SD 메모리 포함가가 239,000원입니다. 16+32G이므로 48G에 추가 악세사리 가격이 불필요한 태블릿인 셈입니다. 저는 놀고있는 SD카드가 있어서 케이스+필름 사양으로 주문했습니다. (M포인트도 쓰고.)



3. 비교 w/ipad mini
일단 단점부터. 미니보다 무겁습니다. 물론 둘다 300g대이지만 미니를 쓰던 입장에서는 무거워진 느낌이 살짝 들 정도입니다. 두번째는 감성적인 측면. 윈도우와 맥의 차이처럼 안드로이드 기반의 디자인이 아쉽습니다. 특히 아이폰/패드의 특허인 스크롤 끝에서 바운스되는 모드 자체가 없으니 은근 거슬립니다. 사이즈는 장단점이 모두 있는데 7.9인치인 미니 대비 7인치가 가로가 좁습니다. 따라서 한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정도라 휴대성이 좀더 좋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화면이 좁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배터리 시간이 미니가 10h인 반면 a3000은 8h입니다.

 

그럼 장점은. 아무래도 sd카드를 지원하고 iTunes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파일의 저장과 실행이 용이합니다. 안드로이드 계열의 편리함이겠지요. 그리고 흥미롭게도 해상도가 괜찮은 편입니다. 사실상 미니와 비슷한 수준인데 pdf를 보니 확실히 선명합니다. ppi가 조금 높아서인지 adobe s/w가 안드로이드에 더 적절한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판형이 큰 책도 7인치에서 보는데에 불편함이 없는 수준? 그리고 아무래도 h/w적으로 저가임에도 사양이 높습니다. 쿼드코어에 메모리 1G(미니는 듀얼코어에 512Mb)로 당분간은 쓰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4. 간단 총평
 스마트폰/패드로 안드로이드 기반 제품을 써본 적이 없어서 사실 무슨 변절자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있었고요.ㅋ (특히 삼송제품들로 인한 비호감) 하지만 안드로이드 기반 제품들에 대한 호기심이 좀 많았던 차에 적절한 기기가 눈에 띄어서 재밌게 만져봤습니다. 레노버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노트북 업체로서의 강자의 위치, 그리고 고사양의 제품들을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는 기업 이미지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2-3년째 레노버 노트북을 쓰는 저로서는 그런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요.

 

엄밀히 말해 제가 미니를 쓰기 위해 투자한 비용이 레노버 a3000의 3배 이상입니다. 물론 불과 1년 전만 해도 스마트패드는 아이패드가 가장 이상적인 제품이었고 킨들 파이어는 아마존 전자책을 사용하지 않는 저에게는 s/w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레노버는 그런 면에서 태블릿의 가격 거품을 거둬낼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저처럼 다이어리(캘린더, 에버노트)+전자책+영화 정도를 보는 사용자에게는 군더더기없이 적절한 태블릿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최근에 레노버는 태블릿 요가라는 신상품을 내놓았습니다. 가격은 30만원 초반인데 디자인이 좀 새롭고 배터리 시간이 18h인 점을 빼고는 10만원 정도를 더 줄 이유를 못 찾겠더군요. 특히 해상도 측면에서 곧 레티나 미니2가 나오는데 그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30만원을 주고 2세대 넥서스7을 사는 게 낫겠지요.

 

결론적으로 20만원을 주고 미니 수준의 태블릿을 사고 싶다면 저는 a3000이 딱이라고 봅니다. 특히 레노버빠인 분들에게 레노버 태블릿은 참 매력적인 것 같네요. 노트북과 사진도 한장 찍어보고...ㅋㅋㅋ 아마도 당분간 애플은 7인치이지만 10인치와 동일한 고사양, 고가의 제품을 내놓을 것이고 넥서스와 킨들 파이어, 누크, 그리고 레노버는 중저가 태블릿 시장을 공략할 것 같습니다. 레노버를 써본 지금 생각은 조만간 태블릿을 아이패드라고 부르지 못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래 링크는 아이패드 미니와 비교
http://www.phonearena.com/phones/compare/Lenovo-IdeaTab-A3000,Apple-iPad-mini/phones/7739,7523

2013/11/24 23:39 2013/11/24 23:39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놀이터에서 아이가 놀고 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두 살 많은 다른 아이가 감옥놀이를 한다며 아이의 멱살을 잡고 끌고 다니다가 좁은 공간에 가둬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대체로 놀이터에서 또래 애들끼리 놀 때는 개입을 안 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심하다 싶어서 그 아이에게 동생들을 가둬두는 놀이는 하지 말라고 훈계 아닌 훈계를 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아이를 괴롭히는 상황을 목격하니 눈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잠시나마 '이 자식이 어디서…'라는 생각과 함께 그 아이에게 똑같이 멱살을 잡고 끌어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자기가 괴롭힌 아이의 아빠가 나타나 훈계를 해댄 탓에 당황했던지 그 아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하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갔다.

동네 장난꾸러기를 '악의 축'으로 만들진 않았나요?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가는 일이 일상인지라 그 다음부터는 그 아이가 눈에 자주 들어왔다. 그 아이는 또래 동생들보다 몸집도 커서 매번 같이 놀다보면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형국이 되곤 했다.

가만히 보니 이 아이는 동생들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곳에서 놀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으나, 동생들을 돌보기에는 아직 어렸다. 게다가 동생들 또래 애들과 놀기에는 너무 차이가 나서 종종 문제를 일으켰고, 이미 동네에서는 다른 부모들의 경계 대상이 되곤 했다. 사정을 알고 나서는 그 아이에게 먼저 말도 걸고 인사도 하고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자연히 그 아이도 나와 내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때론 친동생들과 더불어 내 아이를 챙겨주기까지 했다(역시 아이들이란!).

이것도 투사라면 투사라고 해야 하나. 그 아이를 보면서 내 유년기·청소년기의 어두운 기억들을 떠올려 봤다. 그리고 사회에서, 작게는 한 마을에서 쉽게 유년기의 아이를 향해 규정짓는 선입관들이 그 아이를 고립시키고 더 문제아로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보다 더 어른들의 눈치를 보면서 크는 요즘 아이들의 성숙한 표정들을 대할 때마다 무슨 이유인지 마음 한편이 못내 불편하기만 하다.

우리는 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의 아이를 벌써부터 '악의 축'으로 규정짓는 건 아닌지. 내 아이에게 해대는 못된 행동에 대해 그대로 갚아주고 싶은 마음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고 보니, 이것이 부시 정권의 반테러 정책과 다를 게 없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허허.


내 아이의 행복? 다른 아이에게서도 나온다

흥미롭게도 내 아이도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에게 때때로 과격한 행동을 한다. 불합리한 놀이의 룰을 강요해서 동네의 다른 동생들을 힘들게 만들면서 은근히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서로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동생들을 때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가서 말리기도 하지만 놀이터의 권력구도에서 내 아이가 '갑'일 때는, 솔직히 고백하긴 창피하지만 '애들이 같이 놀다보면 때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는 거지'라는 다소 여유로운 마음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놀이터에서 아이들끼리 싸울 때 피해를 입은 쪽의 부모가 서운함이 커져서 생기는 갈등을 종종 본다. 제3자의 입장에서 양쪽 부모의 스탠스가 모두 나에게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런 걸 보면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서 부모는 다 자기 새끼를 감싸고 도는 원초적 본능이 있는 것도 같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말 중에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란 용어가 유행이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성장을 담보하는 어떤 방향을 지칭하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OO 생태계'라는 말도 비슷한 의미로 자주 쓰이고 있는데 어떤 사안·전략·개별 주체 하나만 잘 돼서는 큰 효과를 내기 힘들고, 근본적으로는 그 주변 인프라가 잘 갖춰져야만 시너지 내지는 지속적인 발전이 이뤄진다는 반성에서부터 기인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조한혜정 교수가 매체에서 자주 언급하는 '창조적 공동체'라는 말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기본적으로 동네의 아이들을 내 자식같이 생각하고 남의 집 아이가 밥을 굶고 다니면 데려와서 내 아이와 함께 먹이는 이웃 공동체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잠정적 '문제아'의 소지가 있는 아이들을 동네의 어른들이 품어주고 관심을 쏟아서 우리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봉사나 나눔의 룰이라기 보다는 실용적·실리적 측면에서 '내 아이의 행복'을 담보로 하는 마을 생태계를 만들기 위함이기도 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 아이에게 위협이 되는 환경을 없애려는 실리적 측면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내가 악하고 무책임한 부모라고 전제할 때조차 내 아이가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을 줄이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내 아이가 잘 나가기를, 성공하기를, 부자되기를 욕망하고 그것에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도 아이를 둘러싼 위험 요소들은 끊임없이 피해가고 배제시키고 내 아이만 보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더 건강한 '욕망'의 발현

흥미롭게도 아이를 키우면서, 이 사회의 고질적인 프랙탈(fractal)을 경험하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마치 한참 유행하던 "바보야, 문제는 OO야" 식으로 말한다면 이 모든 문제는 내 아이를 둘러싼 '인프라', '생태계'로 환원된다.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는 스스로가 진보성향이든 보수성향이든 간에, 우리의 육아교육 전략은 환경(생태계) 파괴를 담보로 한 1970~1980년대 성장주의 전략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이를 출산할 즈음 아내와 상의해 국내와 해외 각각 한 명의 아이를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내 가정, 내 아이만을 위해 살지 않도록 경계하려는 의도였다. 솔직히 나는 구제와 봉사를 하고 있다는 심정적 안도감, 도덕적 우월감을 얻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욕망을 한다는 것 자체를 탓하기보다는 그런 욕망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는 게 더 건강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내 아이를 키우면서는 내 아이와 동시대를 살아갈 많은 아이들이 유아, 청소년 시절부터 배제되고 위협적 존재로 치부되지 않는 생태계를 조금이나마 만들어 갈 책임이 아이의 부모들에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이 조금씩 커진다.
2013/11/15 23:13 2013/11/15 23:13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나: "퇴근 안 해요?"
남자직원: "그냥 집에 일찍 가기가 싫으네요. 딱히 갈 데도 없고."
나: "왜 싫어요?"
남자직원: "집에 가면 아내가 가만 놔두지를 않아요. 첫째 아이도 제 몫이고 밀린 집안일도 도와야 하는데 오늘은 회사일로도 좀 지치네요."
나: "네…."

일이 다 끝났는데도 귀가를 미루는 유부남 동료들을 종종 본다. 귀가 후에 쉴 수 없어서 회사에 머무는 이들. 한때 간 큰 남자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곤 했는데 그와 비슷하게 유부남 직원들끼리 자주 하는 얘기가 있다.

옛날에는 마초와 마초 아닌 남자, 즉 육아·가사를 전혀 분담하지 않는 남자와 분담하는 남자로 구별이 되었다면, 지금은 영혼을 담아 육아·가사를 분담하는 남자와 '영혼 없이' 분담하는 남자로 나뉜다고들 한다. 즉, 가사·육아를 분담하지 않는 남자는 없다는 말이다.


새로운 가족의 출발점, 엄마는 고통받고 아빠는 억울하다

삼십대의 대다수 남자들은 직장에서 자기 에너지가 거의 소진될 정도로 노동력을 공급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귀가한 집은 이들이 꿈 속에서 그리는 '스위트 홈'은 아니다. 아이와 한판 전쟁을 치르고 난 카오스 그 자체의 상황. 집에 도둑이 들었나 싶을 정도의 어수선함 속에서 아내는 지쳐서 애타게 남편의 귀가 시간을 기다린다. 집 문을 여는 순간, 아내의 가사·육아 관련 지시가 떨어진다.

하지만 아내를 돕고 싶어도 띄엄띄엄 알고 있는 집안 일과 육아는 서투르기만 하다. 열심히 해보지만 그릇을 깨거나 아이를 울리거나 걸레와 행주를 헷갈려서 식탁과 주방을 더럽히거나 비싼 겉옷 빨래를 망쳐놓기도 한다. 아내는 남편의 반복되는 서투름에 짜증을 내다가 이내 '곧 죽어도 내가 하는 게 낫지, 저리가'라며 소리를 지른다. '나도 너만큼이나 힘들었어'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밖에 내면 싸움이 더 커질까봐 삼킨다.

결혼을 결심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때는 둘이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던 부부였건만, 이들은 아이가 태어나는 시점에 거대한 전환기를 맞는다. 군대를 갔다 와서 정상적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해도 20대 후반, 휴학을 했거나 대학원이라도 간 사람은 30대에 들어서고 나서야 사회 생활이 시작되므로 자리를 잡으려다 보면 결혼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요즘은 중년이 되어서야 육아가 시작되는 커플들이 늘고 있다.

변화도 많고 사색도 깊어지는 중년의 나이. 그 와중에 아이가 태어나고 직장 생활과 가사·육아의 분담 문제만 해도 이미 부부는 넋이 나간다. 사회가 육아를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가부장제도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그 역할을 강요하다 보니 여성 입장에서는 아무리 주위를 살펴봐도 하소연을 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거나 분노를 표현할 대상이 남편뿐이다.

죽고 못 살던 연인 사이가 불과 몇 년 사이에 타자화되고 분노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결국 사회에서 새로운 가족의 출발점인 출산, 육아, 자녀 교육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부부 관계는 소원해진다. 엄마는 고통 받고 아빠는 억울하다. 엄마의 고통은 말할 나위가 없으며, 아빠들 또한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나도 힘들어'라고 말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의 반복이다. 반복은 만성이 되고 그 안에서 부부의 생명력은 죽어 간다.

'영혼 없는' 가사육아 분담, 중년 남성은 어디로 가나

기사 관련 사진
 <대한민국 부모> 표지.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충격적으로 읽은 <대한민국 부모>란 책에서 저자들은 자녀 교육 문제로 일그러진 한국 사회의 가정 문제를 깊이 있게 풀어냈다.

대한민국은 자녀 교육의 늪에 빠져서 가정과 사회, 특히 부부를 찢어 놓고 있다. 따지고 보면 엄마가 매니저가 될 정도로, 아빠가 다른 가족을 이민 보내고 기러기 생활을 할 정도로 자녀 교육에 '올인'하게 된 건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과거 아이들은 특별한 조치 없이도 그냥 자랐다. 그 세대를 동경하거나 옳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한민국의 모든 부부들이 온 정성을 쏟는 육아와 자연스레 이어지는 자녀 교육, 고가의 사교육 그리고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흔들리는 중년 남녀의 삶의 방향성을 생각해볼 때, 그 효능조차 검증되지 않은 '아이 성공시키기 프로젝트'에 너무 깊이 매몰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덜컥 들곤 한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내 삶도 변했다. 나는 일상에서 더욱 보수적으로 변해간다. 진보적인 생각을 하던 청년 때와 달리 직장 생활도 '가늘고 길게' 가기를 진심으로 바랄 때도 있다. 적어도 아이가 자라는 동안은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아내와 나누던 대화의 질도 비교할 수 없이 낮아졌다.

그저 아내가 지치지 않기를, 그녀의 여가 시간을 확보해주기 위해 육아와 가사를 효과적으로 분담해주는 행위, 그 자체에 몰입할 뿐 우리 부부 관계의 깊이, 영혼의 대화, 이 사람과 진정 마음이 관통한 것 같은 느낌은… 감을 잃은 것도 같다. 잠시만 고생하면 될 것 같던 이 부모 노릇은 생각하면 할수록 단기 프로젝트가 아님을 새삼 절감한다. 우리는 그저 이 아이를 잘 기르기 위해 결혼을 했던 걸까.

다행히도 아내는 자주 나를 돌아보기를 권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내와 나의 관계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환기시켜줄 때가 많다. 요즘 특히 더 그렇다. 바꿔 말하면 나는 그만큼 육아과정에서 산만하고, 갈피를 못 잡고, 나를 잃어버리고 있고 아내와의 관계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대한민국 부모>에 등장하는 부부들이 그렇듯 나도 육아 과정에서 표류할 조짐이 보인다.

사회에서 내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집에서는 아내를 돕기 위해 '영혼 없는' 가사·육아의 분담을 선택하는 많은 남편들은 가정 안에서 정작 중요한 정서적인 유대감을 잃고 있다. 회사에서 멍 때리면서 집에 가기를 미루거나, 유흥가에서 돈을 주고 연인에게 받았던 위로와 사랑을 구걸하거나, 다른 명예나 성공을 통해 정서적 결핍을 보상받으려 노력하기도 한다. '즐거운 나의 집'을 위해 시작된 중년 남성들의 희생의 종국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요즘 나의 고민은 이런 류이다.
2013/11/15 23:12 2013/11/15 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