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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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아이가 놀고 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두 살 많은 다른 아이가 감옥놀이를 한다며 아이의 멱살을 잡고 끌고 다니다가 좁은 공간에 가둬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대체로 놀이터에서 또래 애들끼리 놀 때는 개입을 안 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심하다 싶어서 그 아이에게 동생들을 가둬두는 놀이는 하지 말라고 훈계 아닌 훈계를 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아이를 괴롭히는 상황을 목격하니 눈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잠시나마 '이 자식이 어디서…'라는 생각과 함께 그 아이에게 똑같이 멱살을 잡고 끌어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자기가 괴롭힌 아이의 아빠가 나타나 훈계를 해댄 탓에 당황했던지 그 아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하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갔다.

동네 장난꾸러기를 '악의 축'으로 만들진 않았나요?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가는 일이 일상인지라 그 다음부터는 그 아이가 눈에 자주 들어왔다. 그 아이는 또래 동생들보다 몸집도 커서 매번 같이 놀다보면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형국이 되곤 했다.

가만히 보니 이 아이는 동생들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곳에서 놀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으나, 동생들을 돌보기에는 아직 어렸다. 게다가 동생들 또래 애들과 놀기에는 너무 차이가 나서 종종 문제를 일으켰고, 이미 동네에서는 다른 부모들의 경계 대상이 되곤 했다. 사정을 알고 나서는 그 아이에게 먼저 말도 걸고 인사도 하고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자연히 그 아이도 나와 내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때론 친동생들과 더불어 내 아이를 챙겨주기까지 했다(역시 아이들이란!).

이것도 투사라면 투사라고 해야 하나. 그 아이를 보면서 내 유년기·청소년기의 어두운 기억들을 떠올려 봤다. 그리고 사회에서, 작게는 한 마을에서 쉽게 유년기의 아이를 향해 규정짓는 선입관들이 그 아이를 고립시키고 더 문제아로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보다 더 어른들의 눈치를 보면서 크는 요즘 아이들의 성숙한 표정들을 대할 때마다 무슨 이유인지 마음 한편이 못내 불편하기만 하다.

우리는 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의 아이를 벌써부터 '악의 축'으로 규정짓는 건 아닌지. 내 아이에게 해대는 못된 행동에 대해 그대로 갚아주고 싶은 마음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고 보니, 이것이 부시 정권의 반테러 정책과 다를 게 없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허허.


내 아이의 행복? 다른 아이에게서도 나온다

흥미롭게도 내 아이도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에게 때때로 과격한 행동을 한다. 불합리한 놀이의 룰을 강요해서 동네의 다른 동생들을 힘들게 만들면서 은근히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서로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동생들을 때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가서 말리기도 하지만 놀이터의 권력구도에서 내 아이가 '갑'일 때는, 솔직히 고백하긴 창피하지만 '애들이 같이 놀다보면 때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는 거지'라는 다소 여유로운 마음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놀이터에서 아이들끼리 싸울 때 피해를 입은 쪽의 부모가 서운함이 커져서 생기는 갈등을 종종 본다. 제3자의 입장에서 양쪽 부모의 스탠스가 모두 나에게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런 걸 보면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서 부모는 다 자기 새끼를 감싸고 도는 원초적 본능이 있는 것도 같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말 중에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란 용어가 유행이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성장을 담보하는 어떤 방향을 지칭하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OO 생태계'라는 말도 비슷한 의미로 자주 쓰이고 있는데 어떤 사안·전략·개별 주체 하나만 잘 돼서는 큰 효과를 내기 힘들고, 근본적으로는 그 주변 인프라가 잘 갖춰져야만 시너지 내지는 지속적인 발전이 이뤄진다는 반성에서부터 기인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조한혜정 교수가 매체에서 자주 언급하는 '창조적 공동체'라는 말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기본적으로 동네의 아이들을 내 자식같이 생각하고 남의 집 아이가 밥을 굶고 다니면 데려와서 내 아이와 함께 먹이는 이웃 공동체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잠정적 '문제아'의 소지가 있는 아이들을 동네의 어른들이 품어주고 관심을 쏟아서 우리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봉사나 나눔의 룰이라기 보다는 실용적·실리적 측면에서 '내 아이의 행복'을 담보로 하는 마을 생태계를 만들기 위함이기도 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 아이에게 위협이 되는 환경을 없애려는 실리적 측면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내가 악하고 무책임한 부모라고 전제할 때조차 내 아이가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을 줄이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내 아이가 잘 나가기를, 성공하기를, 부자되기를 욕망하고 그것에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도 아이를 둘러싼 위험 요소들은 끊임없이 피해가고 배제시키고 내 아이만 보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더 건강한 '욕망'의 발현

흥미롭게도 아이를 키우면서, 이 사회의 고질적인 프랙탈(fractal)을 경험하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마치 한참 유행하던 "바보야, 문제는 OO야" 식으로 말한다면 이 모든 문제는 내 아이를 둘러싼 '인프라', '생태계'로 환원된다.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는 스스로가 진보성향이든 보수성향이든 간에, 우리의 육아교육 전략은 환경(생태계) 파괴를 담보로 한 1970~1980년대 성장주의 전략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이를 출산할 즈음 아내와 상의해 국내와 해외 각각 한 명의 아이를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내 가정, 내 아이만을 위해 살지 않도록 경계하려는 의도였다. 솔직히 나는 구제와 봉사를 하고 있다는 심정적 안도감, 도덕적 우월감을 얻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욕망을 한다는 것 자체를 탓하기보다는 그런 욕망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는 게 더 건강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내 아이를 키우면서는 내 아이와 동시대를 살아갈 많은 아이들이 유아, 청소년 시절부터 배제되고 위협적 존재로 치부되지 않는 생태계를 조금이나마 만들어 갈 책임이 아이의 부모들에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이 조금씩 커진다.
2013/11/15 23:13 2013/11/15 2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