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내놀이터. | |
ⓒ 김용주 |
실내놀이터 풍경
아이와 실내놀이터에 있다 보면 본의가 아니게 주변 엄마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대화는 몇 개의 주제로 범주화되는데 사실 범주화라기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패턴을 갖는다는 말이 더 적절할 듯하다.
처음엔 아이에 관한 이야기-내 아이 자랑, 혹은 걱정-으로 시작해서는 남편의 험담으로 번져간다. 내가 주로 아이와 실내놀이터를 오는 시간이 주말이다 보니 주말에도 육아를 도와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한 상태로 대화는 남편 성토대회가 된다(그럴 때마다 나는 그네들의 남편도 아니면서 자주 식은땀을 흘린다).
남편의 험담이 끝나갈 무렵이 되면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어서인지 드디어 화자인 본인에 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이 엄마들의 학력이나 이른바 '스펙'이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스펙에도 다수 엄마들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 없는 속내를 내비치곤 한다.
개중 몇몇은 부모님의 도움으로 꿋꿋이 회사를 다니는 이들도 있었지만, 석사 논문을 앞두고 출산 후에 과연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 회의감을 보이는 엄마도 있다. 또 직장에 육아 휴직을 냈지만, 여의치가 않아 퇴직을 고려하거나 이미 퇴직상태인 엄마들도 더러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아내도 결혼과 임신, 출산을 거치면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직장을 바꿔야 했고 진로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처음으로 남편인 나는 출산 이후 육아 과정 중에 한 번도 직업에 대한 고민 내지는 어떤 위기감을 느낀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남자도 육아휴직을 낼 수 있다. 하지만 한 번도 내 주변에서 아빠가 되었다고 육아 휴직하는 직원을 본 적은 없다.
▲ 성별 육아휴직자 수. | |
ⓒ 여성가족부·통계청 |
반대로 출산 이후 팀을 옮기거나 복직하지 않은 여자 직원들은 자주 보았다. 엄마가 아빠에 비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떨어져있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건가.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은 그리 아름답지는 않은, 그리고 남편이나 아내의 사적인 이유 그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 우리나라 성별 대학 진학율 추이 | |
ⓒ 여성가족부·통계청 |
지난 6월 통계청에서 발표된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별 대학 진학율 추이를 보면 여성이 74.3%, 남성은 68.6%로 2008년부터 남녀비율이 역전되었고 이제 그 차이가 5%를 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알파걸(엘리트집단 여성을 지칭하는 새로운 단어)'들이 캠퍼스에서 수석을 하는 등 두각을 나타날 법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별 경제활동인구는 남성 73.3%, 여성 49.9%로 남성이 23.4% 높게 나타났으며 이 수치는 과거 10여 년간 변화가 미미한 수준이다. 왜 그럴까.
통계청에 의하면 가사육아 전담자는 721.9만 명이며 이 수는 비경제 활동인구 1580.7만 명의 45.6%에 해당한다. 또한 가사전담자가 1999년 456만 명에서 2012년 576.5만 명으로 10여 년 사이에 그 수가 120만 명이나 증가했다. 경력단절 여성의 수가 197.8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기혼여성의 20.3%이며 전년대비 4.1%가 증가한 수치다.
경력단절 사유는 결혼(46.9%), 육아(24.9%), 임신출산(24.2%)로 나타났다. 결국 여성 교육의 기회가 늘어난 반면 실제로 사회에 진출한 많은 여성들은 결혼, 출산, 육아를 거치면서 경력단절을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흥미롭게 읽은 책 중 하나인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스 벡-게른스하임 부부의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그 원인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먼저 저자들은 자국인 독일에서도 여성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건 68년 '5월 혁명' 이후지만 77년에 이르러서야 가족법과 결혼법의 발효를 통해 여성의 실제적인 평등이 실현되었고 현재까지도 높아진 교육기회가 여성의 고용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는 현실에 주목한다. 이유가 뭘까.
저자들은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 엄밀히 말해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개인 자유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닌 그저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노동 조건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다름 아님을 주시한다. 봉건적 위계질서에서 갓 해방된 개인이 또다시 노동시장이라는 구속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자율적 개인'은 주중이든 주말이든 가리지 않고 노동을 제공할 수도 있는,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언제라도 원할 때 회사로 뛰쳐나올 수 있는 존재다.
"종교개혁 덕분에 사람들은 교회와 신이 정해준 봉건적 위계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산업적인 세계로 들어섰다…(중략)…노동시장이 모든 사람이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은 실은 모든 사람이 이러저러한 압력에 순응하고 취업시장의 요구 조건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노동시장에서의 자유이다."(29쪽)
이러한 거짓된 '개인의 자율성'은 여성의 직장생활, 경력단절과는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답은 간단하다. 한 가정에 속한 남녀 모두가 자기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이 두 사람은 가정과 노동시장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하나의 노동 시장 일대기와 평생의 가사노동 일대기는 조화시킬 수 있지만 두 개의 노동 시장 일대기는 조화시킬 수는 없는 가족 모델의 실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동시장 일대기는 내적으로 두 배우자가 모두 자기를 우선시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개의 원심적 일대기를 서로 연결하는 일은 아슬아슬한 공중 곡예로 중심잡기가 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중략)…따라서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바로 그 조건들이 새롭고 낯선 의존들을 생산한다. 즉 스스로의 존재를 표준화하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개인들은 전통적 강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노동시장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 (29~31쪽)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는 것은 여성
중요한 건, 이때 두 배우자 중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는 것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통계치가 말해주듯 결혼, 임신, 출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시장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다. 책의 저자들은 교육기회의 평등이 사회적 지위의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나아가 산업사회에서조차 자신의 미래가 요람에서부터 결정된다고 말한다.
"여성들의 조건은 지난 세대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더 좋은 일자리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으로 교육받은 남편들은 이미 직장에서 훨씬 앞서 나가고 있으며, 여성들은 전과 다름없이 평생 가사 노동을 선고 받는다…(중략)…바로 여기에 산업 사회의 봉건적 중핵이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운명, 즉 평생 가사 노동을 할 것이냐 아니면 노동 시장에 적응해 돈벌이를 할 것이냐는 원칙적으로는 산업사회에서조차도 요람에서부터 결정된다."
유감스럽게도 당시 독일 모습이 현재 우리나라와 겹친다. 고도의 산업사회에서도 노동시장에서 남녀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지적재산권이나 환경규제의 명분을 내세워서 개발도상국이 침범할 수 없는 이미 확보된 기술 장벽을 통해 시장 진입을 막는 선진국의 현실과도 닮았다. 따지고 보면 참정권조차 없었던 여성에게 성 평등, 성해방운동의 실제적인 열매(법적 효력)를 경험한 것이 불과 반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
다시, 실내놀이터 사색
다시 우리 동네 실내놀이터로 돌아오자. 왜 남편들은 주말에도 아이를 전담하지 못하고 실내놀이터에서 뭇 아내들의 비난 대상이 되는 것인가. 사실, 다수 남편들은 더욱 치열해진 경쟁 속에서 직장생활을 견디고 주말에는 '배터리 방전 상태'다. 하지만 아내들은 그 경쟁 끼어들 틈조차 없음에 무력감을 느낀다.
우리 동네에도 즐비한 '알파걸' 엄마들은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으며 화려하게 사회에 '데뷔'했지만,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생각지도 못한 삶의 전환점을 경험하고 있다. 자기계발이나 경력관리는 고사하고 아이를 잠시 떼어놓고 가까운 카페에 한 번 나가기도 쉽지 않다.
남자는 노동시장이, 여자는 가사전담 구조가 각자의 '면역체계'를 허물어뜨리고 결국 그 두 사람이 한 조직(가정) 안에서 다투고 서로를 비난하는 결과를 낳는다. 아마도 육아를 책임져주지 않는 한국사회는 점점 더, 구조적으로 부부를 갈등관계로 밀어넣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끔 유럽의 선진 육아 시스템을 엿보면서 놀라움과 더불어 어서 빨리 그런 사회구조가 우리나라에도 자리 잡기를 기대하지만, 이미 천금보다 귀한 '젊은 엄마들'의 시계는 육아와 함께 2~3년이 훌쩍 지나간다. 남자는 남자대로 가사, 육아에 깊이 관여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미 직장 경쟁이 내 생존을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는 내 생존이 아닌, 우리 가족의 생존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시장 하에서의 새로운 가부장제 조짐도 보인다. 여성이 먼저 경제논리에 따라 사회의 성역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남편에게 넉넉한 수입만을 요구하고 자신은 오롯이 육아의 짐을 떠안는 것이다. 이게 출산과 육아를 둘러싼 우리들의 현실이 아닐까.
물론 답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련의 거시적 상황들을 부부가 공부하고 함께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내의 실직이나 경력 단절이 남편의 탓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적으로 발생한 아내의 '분노'(우울)를 이해하고 아내의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한 고민을 함께 해 나갈 필요가 있다.
반대로 전쟁터 같은 노동시장에서 겪는 남편의 고충과 심적 부담감에 대해 아내가 공감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이상적인 방향으로는 서로가, 사회가 규정짓는 성역할에서 벗어나 남성도 육아의 즐거움(괴로움)을 경험(분담)하고 아내도 노동시장에 발붙일 수 있는, 나아가 감히 여성이 사회에서 자아실현을 꿈꿀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현재로선, 내 생각은 이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