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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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결국 결혼에 골인하자 두 사람이 싱글일 때는 전혀 고민해 보지 않았던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그녀는 '아내'와 '며느리'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는데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썩 좋은 위치는 아닌 듯 했다.

첫 명절에 아내는 내게 왜 처가가 아닌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야 하는지를 물었다. 불행히도 나는 아내의 간단한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해주지 못했다. 다행히 우리 집안은 명절 제삿날에 남자 여자고 할 것 없이 음식을 나르고 치우는 일에 함께 하는 집이었다.

아내가 설거지를 할 때 큰어머니는 나에게 함께 도우라고 눈치를 주는 센스있는 분이었지만, 처가에 먼저 갈 수 없는 근본적인 상황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단순히 우리 부부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명절이 끝나면 매번 직장, 친구들 모임에서 며느리의 낮은 사회적 지위에 관한 성토대회가 자주 열리곤 했다.

아내가 임신을 했다. 생명의 신기함과 아빠됨의 설렘을 만끽하고 있을 즈음 지방에 사시는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우리 부부에게(엄밀히 말하자면 나에게만) 당신이 이미 아이의 이름을 지었노라고 말했다. 그것도 집안의 '돌림자'에 맞춰서. 따지고 보면 내 이름도 집안 돌림자의 법칙에 맞아 떨어지는 이름이다.

얘길 전해들은 아내는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에도 아내는, 남편의 성을 따는 것도 모자라서 이름 두 글자 중에 하나마저 남편 집안 룰을 따르는 것이 불합리하지 않냐고 물었다. 10개월 동안 정성스레 품었다가 해산의 고통 후에도 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아내의 처지에서 볼 때, 특정 집안의 대를 잇는 과정에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존재감 없는 며느리의 처지를 제대로 인지하게 된 듯 했다.

나 또한 아내의 속상함에 공감했다. 이렇듯 매사에 논리에 능한 나였으나 아내의 질문은 항상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 이름짓기 사건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아내가 마음에 들어함으로써 하나의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나는 출생신고를 하기 직전까지 이런저런 걱정에 잠을 뒤척였다. 만약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아내가 끝내 원치 않았다면, 결국에 나는 아내와 상의해서 아이에게 한글 이름을 지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하기까지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으로 평소에 관심도 없던 우리 집안의 어떤 강한 힘이 나를 옥죄는 느낌을 경험했다. 희한하게도 부모님과 집안 친척들이 선한 의도로 우리 가정에 개입을 하였으나 자주 아내는 집안 대소사에 상당한 참여와 기여를 함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 문제의 구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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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나고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기 시작한 이야기는 이미 이전 글에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결혼 이후에 감지된 이런 불합리한 느낌의 실체를 알고 싶어졌다. 더욱이 아내를 이해하려고 들면 들수록 내 어머니의 평생에 대한 안타까움 또한 커져갔다. 이러한 정서들은 머리 속에서 더욱 자라나서, 만약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이런 처우들이 내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법한 일들인지 더욱 고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란 존재에 대한, 전에는 갖고 있지 않던 낯선 생각들이 내 이성을 자극했다.

나는 대체로 궁금한 영역이 있으면 책을 찾아 읽는 편이다. 지금도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면 입문서나 개론서를 읽고 유명한 강사들의 강의를 찾아서 듣기도 한다. 여성 문제는 아내와 결혼하고서 얻은 간접 경험을 통해 관심이 커졌으나 단순히 경험에 그치는 가정 안에서의 처세나 개인의 윤리로 치부하기엔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가 태어난 이후부터 최근 2, 3년간 많은 여성주의 학자들, 저자들의 책을 읽으며 이 문제를 좀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질문은 내 아내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 논리적인 모순을 풀어내는 지적 작업의 상당 부분은 책 속 여성 구루(힌두교, 불교, 시크교 및 기타 종교에서 일컫는 스승으로 자아를 터득한 신성한 교육자를 지칭)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서, 이번 글에서는 나에게 도움을 준 여성주의 관점의 선생들 두 사람을 언급하고 그 외에 도움을 준 책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의 말미를 갈음할까 한다.

정희진. 내 여성주의 관점의 지적 여정에서 '텍스트' 격에 속하는 저자는 정희진 선생이다. 최근 <경향신문>과 <한겨레>에서도 신선하고 날카로운 기고 글들을 선보이는 그녀는,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단연 내 최고의 '구루'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녀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은 두고두고 다시 곱씹을 만한 가치가 있다.

"각 분야에서 여성 1호가 된 여성이나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바깥일을 하지만 애들 아침밥은 꼭 차려주고 나와요." 그리하여 나처럼 출세도 못했으면서 아침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주눅들게 하고, '나쁜 여자'인 여성운동가의 이미지와 확실한 선을 긋는다." (37-38쪽)

인용문 외에도 공감할 내용이 많다. 본서에서 선생은 마오쩌둥, 마르크스 모두 중산층 지식인이었지만, 언제나 페미니스트만 중산층 지식인인 것이 시비거리가 된다며 이렇게 말하는 남성들도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인 경우가 많은데 여성운동가 중 일부가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못견뎌 한다고 지적한다(39쪽). 또한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라고 못박는다(41쪽).

특히 그녀는 정신대 '할머니'와 장기수 '선생님'의 차이를 언급하는데 전자는 역사의 피해자, 전쟁의 부산물이면서 불쌍한 존재지만 후자는 역사의 치열한 주체이며, 인간의 신념과 의지를 상징하는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존재로 취급받음을 꼬집는다(53쪽). 그리고 무엇보다 공감했던 대목은 우리나라 '어머니'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 '시키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 하고(피해자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자녀들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62쪽)

백소영. 일반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화여대 백소영 교수의 책 <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는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깊이있는 육아의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최근 <엄마되기, 힐링과 킬링사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사실, 책을 읽는 도중 너무 참조하고 싶은 내용이 많아 책의 사방에 검은 줄이 그어졌다. 책 속에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언급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생각할 거리들이 넘쳐난다.

유대 한 랍비가 "만일 한 남자가 그의 딸에게 토라를 가르친다면 그건 그녀에게 음탕함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 성종은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큰 일"이라고 했다는 과거 이야기에서부터, 의대에서 전공의가 되기 전까지는 임신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 산부인과에서 딸을 낳으면 한국의 간호사들이 "예쁜 공주님이에요. 한 번 더 고생하셔야겠어요"라고 말한다는 최근 이야기까지 정말 여성들의 깊은 좌절과 아픔을 공감할 만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그중 유독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함석헌 선생의 아내 황득순 여사의 이야기였다.

"할머니 세대야 손가락에 꼽을 만한 신여성들이 있기는 했으나 다수의 여성들은 신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20세기 대표적 지성이라는 함석헌 선생님의 아내 황득순 여사도 겨우 글을 읽을 정도인 초등교육만을 받은 채 부모들에 의해 정해진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례는 당시의 '보편'이었다. 평생 "나야 뭐" 하며 사셨다는 황득순 여사. 남편이 "생각하는 백성만이 산다"고 "모든 씨알(민초)이 다 깨어나고 비판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느라 외부 강연을 숱하게 다니는 동안, 그러느라 고정적인 생활비도 준 적 드문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저 묵묵히 아이들과 가정을 책임지고 산 그런 '황득순스러운' 여자들의 삶은 우리 할머니 시대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수적인 면에서 볼 때 '보편'이었다."

제이언니의 추천 도서
1.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은이) | 교양인 | 2005년 11월

2.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백소영 (지은이) | 대한기독교서회 | 2013-05-30

3. 남자의 탄생
전인권 (지은이) | 푸른숲 | 2003년 5월

4. 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르처 (지은이) | 이프(if) | 2001년 5월

5.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크리스티안 노스럽 (지은이) | 강현주 (옮긴이) | 한문화 | 2011-09-23

6. 대한민국 부모
이승욱 | 신희경 | 김은산 (지은이) | 문학동네 | 2012-06-15

7. 내가 사랑한 여자- 공선옥.김미월 산문집
공선옥 | 김미월 (지은이) | 유유 | 2012-07-20

8.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가정 폭력과 여성 인권
정희진 (지은이) | 또하나의문화 | 2001년 8월

백소영 교수의 책은 개신교 여성으로 한정지어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이라면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고 또한 그녀가 제안하는 '공동 육아'와 같은 대안들도 진지하게 고려해볼 법하다. 

그 외. 대표적으로 두 사람을 꼽았지만 이들이 전부는 아니다. 독일에서 여성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여성주의 운동가의 대모 알리스 슈바르처의 대표작인 <아주 작은 차이>도 손꼽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가정 안에서의 성폭력과 그에 따른 아내들의 무기력함에 대해서도 깊이 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크리스티안 노스럽 박사가 쓴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에서 드러난 많은 사례들을 통해 여성의 마음이 여성의 몸에 끼치는 악영향을 직시하게 되었다. 남성 저자로는 전인권씨의 유명한 책 <남자의 탄생>을 통해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인 한 가정 안에서 이루어진 미시 정치와 그를 통해 사회전반에서의 남성의 문제, 여성의 문제를 통찰하는 혜안을 얻었다.

여성의 문제에 국한된 책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상담을 통해 한국의 병든 가정을 무섭게 파헤친 <대한민국 부모>를 통해 이 시대의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경험해보지 않은 중년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간접 경험한 소중한 책들과 저자들을, 동일한 문제로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주저함 없이 권하고 싶다.
2013/07/25 23:00 2013/07/2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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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토요일 오후. 모처럼 한산하게 재즈 음악을 들으며 아이랑 피자를 시켜먹던 중. 카페 같은 분위기에 나른한 햇살을 맞으며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다섯 살이 된 요즘은 대화가 좀 된다) 피자를 먹여주고 있는데 아내가 우리 둘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 둘… 데이트하는 커플 같아."

#2.
꽤 많은 로맨스 영화를 봤고 적지도 많지도 않은 연애를 해보았지만, 실제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상대가 열심히 말을 하는데 갑자기 주변의 영상이 멈춘 것 같이 느껴진다거나 '뽀샵처리'가 된 영상이 소리없이 흘러가는 느낌 같은 걸 경험한 적은 솔직히, 없었다. 이 아이를 만나기 전까진.

저녁시간. 아이를 재우느라 누워있는데 쉴새없이 내게 이야기를 해댄다. 찰진 두 볼살과 긴 속눈썹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정겨운 톤으로 쫑알쫑알 조그만 입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순간 입모양만 보이고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느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 나는 막 '하하하'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젠장, 나 우는 거냐).

"아빠 내 말 듣고 있어?"

아이의 물음에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웃었다. 난, 이 아이 참 사랑하는 것 같다.

남편의 육아 분담은 헌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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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든 아이의 모습, 가끔 말도 하고 꺄르르 웃기도 한다.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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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남편의 육아 분담에 대해 희생 내지는 헌신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가부정적 성역할이 남성에게 육아의 짐을 덜었다기보다 오히려 어떤 '결핍'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편이다.

내가 요리한 음식을 아이의 입에 넣어줄 때의 느낌, 한 숟갈 입에 넣고 아이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최고!"라고 소리를 지를 때 드는 묘한 성취감, 어린이집에 데리러 가면 아이들 속에서 놀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놀던 장난감들을 다 내려놓고 달려와서 작은 팔로 목을 끌어안아줄 때.

토닥여주며 재울 때 하던 옹알이들, 이제는 제법 또렷한 단어들, 문장들. 그 시시콜콜함에 자주 '빵터지는' 아내와 나의 웃음소리. 숨쉴 때 몸의 오르내림. 까딱이는 손가락, 꿈을 꾸는지 뭘 먹기도 하고 뭐라고 입모양을 만들다가 내 겨드랑이 속으로 얼굴을 파묻을 때 그 작은 몸뚱이의 촉감. 수시로 변하는 얼굴 표정과 발달 단계마다 보이는 특유의 표현들.

아이가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고, 아이가 듣는 것을 듣고 아이가 세상을 인식하는 순서대로 세상을 인식하는 경험들, 그 일체를 하루하루 일에 찌들은 아빠들은 무시로 박탈 당하는 셈이다. 이렇듯 아이와의 교감은 일상을 함께하지 않으면 금전적 후원이나 관조적인 자세로는 결코 깊어지지 않는다.

주면서 치유되는 '셀프 쓰다듬'

어떤 의미에서 좀 더 내 내면을 깊이 돌아본다면,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나누는 이런 행복감 그 이면에는 내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터치'가 있음을 자주 깨닫는다. 아이를 간지럽히고 안아주고 만져주고 쓰다듬어주고 '폭풍뽀뽀'를 쏟아부을 때 아이의 입장에서 느낄 감정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 감정을 추정하면서, 나또한 나름 즐거워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아버지가 나를 아끼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내가 잘 때가 지나서야 퇴근했다. 늦은 밤 자주 술에 취해서 들어왔고 어머니와는 금슬이 좋지 않았다. 또한 내 친구의 이름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일절 알지 못했다.

가끔 아내에게 내 아이가 참 부럽다는 고백을 한다. 물론 그건 아내가 나보다 아이를 더 부드럽고 애정 가득하게 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내 스스로가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뺨을 부비면서 잠들거나 함께 웃으며 흥겹게 놀던 경험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아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내 정서의 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아이에게 좋은 교훈이나 법칙, 지식보다는 좋은 유년 시절의 정서를 주고 싶은 아내와 나의 바람. 한편으로 그 씁쓸한 바람은 내가 아들에게 해주면서도 유체이탈하여 그것을 누리고 있는 '셀프 쓰다듬'에 다름 아니다.

단 한 번도 아버지는 내가 울 때 나를 꼭 안아준 적이 없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아이가 울길래 일어나서 꼭 안아줬다. 진정, 주면서 치유되는 '셀프 쓰다듬'이다.
2013/07/18 22:58 2013/07/18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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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출산, 육아. 이전에는 몰랐던 여성문제에 눈을 뜨게 된 남편의 반성과 성찰을 담았습니다. 육아를 통해 얻는 소소한 즐거움과 더불어 조금씩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언니', 내지는 '엄마'의 정체성을 발견해 가는 과정 중에 쓰는 사적이지만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글들을 모았습니다. - 기자 말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와는 영영 '빠이빠이'일 줄 알았는데 웬걸 30대에도 여전히 직무 관련 교육부터 프레젠테이션, 어학까지 여전히 배워야 할 게 많다. 인터넷에 떠도는 자기계발서 사진 속 책 제목들이 '10대,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 '20대, 공부에 미쳐라',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 '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 '공부하다 죽어라'인 걸 보고 많이들 웃던데 정작 나의 일상만 봐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다. 30대에 공부는 전쟁이다.

얼마 전 기한 내에 마쳐야 하는 온라인 수업이 있어서 새벽녘에 간신히 잠을 깼으나 알람 소리를 들은 아이가 하필 그 시간에 깨서 뒤척이며 우는 바람에 끝내 수업을 못 들었다. 아내가 달래보았지만 주로 잘 때는 내가 아이를 재우는 탓에 끝내 내가 자리에 누워서야 아이도 잠이 들었다. 싱글일 때나 신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때때로 육아로 인해 해야 할 일을 못하거나 발이 묶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내는 뭐하고 네가 아이를 데리러 가냐?

최근 아내도 꼭 듣고 싶은 강의를 발견했는데 시간이 좀 애매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강의인데 어쩔 수 없이 내가 조금 일찍 퇴근해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와야 하는 상황. 처음엔 일찍 퇴근하면 회사 눈치를 봐야하는 게 싫어서 반대하려 했지만 며칠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내는 육아를 위해 거의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사는데 주 1회 퇴근을 조금 앞당긴다는 걸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건 부부 사이에 공평하지 않은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강의가 영원히 지속될 것도 아닐텐데, 처음부터 막기보다는 일단 해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상의를 해보자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그조차도 아내가 어린이집에다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까지 아이를 봐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일단 그러자고는 했는데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매주 같은 날 회사를 일찍 빠져나오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두 주는 이리저리 둘러대면 그만인데 매주 같은 날 다른 직원들보다 일찍 의자에서 '엉덩이를 쳐 들어야' 하는 상황이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 어린이집에 아이 데리러 나간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아마 다수는 '아내는 뭐하고 네가 아이를 매번 데리러 가냐'고 물을 것이고 내 상사는 그런 나를 배려하기보다는 도리어 나를 주시하게 될 게 뻔했다. 매주가 첩보작전 같은 이 상황이란.

아빠가 이럴진대 엄마는...

'아빠가 이럴진대 엄마는 오죽할까.'

퇴근길을 도망쳐 나오는 몇 주간의 경험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간헐적인 매주 한 번의 이른 퇴근. 게다가 지속적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지 않아도 되는 내(남편) 입장에서 이건 그저 하나의 육아 체험, 혹은 '엄마 코스프레'에 불과하겠지만, 매일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저녁이면 '짤없이' 데리러 가야 하는 직장 여성들은 출퇴근 그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 '만땅'일 것 같다.

듣기로 최근에 몇몇 수도권에서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3~4시 이후로는 안 봐준다고 하여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엄마의 퇴근 전까지만 봐주는 직업도 성행한다고 한다.

임신 때부터 직장에서는 업무 능력이 떨어졌다고 눈치 주기 일쑤고 출산 후 최소 2~3년은 아이를 돌보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 대부분을 쏟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처럼 아이를 낳으면 사회가 제대로 책임져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은 쉽지가 않다. 아이를 데리러 가려고 일찍 퇴근하거나 회식 자리를 빠지면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다. 따가운 수준을 넘어 임신, 출산 전후로 퇴사를 종용하는 회사도 넘쳐난다.

이렇듯 복직을 하면 하는 대로, 일을 그만두게 되면 그만두는 대로 엄마들의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온라인 수업 하나만 제대로 못 들어도 답답함을 느끼는데 출산 후에 자신의 사회경력이 멈춰버린 엄마들은 오죽할까.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다음 세대의 진보와 행복을 위해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도 정말 중요한 일일텐데 정작 사회구조적으로는 이 핵심과제를 방기한 채 여성에게만 그 의무를 무한정 부담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 한창 뜨는 용어 중에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란 말이 있다. 이는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성장을 담보로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나는 이 용어가 한국사회의 엄마들에게 더 강조되어야 할 용어가 아닌가 싶다. '알파걸'들이 넘쳐나던 캠퍼스에서 사회로 직장으로 스며들어간 많은 대한민국의 딸들은 출산과 육아를 맡을 시점에서 원치 않게 사회와 격리된다. 한때 잘나가던 여성들도 아이를 낳고 그 자리를 유지하려면 슈퍼우먼이 되어야만 한다.

아빠된 나조차도 5일 중에 하루를 흔쾌히 맡아주지 못하고 망설였는데 엄마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남편인 나부터 우리 사회 전체가, 여성이 임신과 출산, 육아에 배분된 에너지를 당연하게 여기고 이를 허용하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거창한 담론들은 뒤로 한 채, 무엇보다 여성이 이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내 아내부터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지 않은 시간에 아이의 일상을 경험하는 것

오늘은 아이를 데리러 가는 날. 어린이집에서 "아빠아아~" 하고 아이가 뛰어 나온다. 요즘은 이 녀석도 은근히 아빠가 데리러 오는 날을 기다린다. 가끔 아침 출근할 때 "오늘은 아빠가 데리러 와?" 하고 묻고는 그렇다고 하면 좋아서 껑충껑충 뛴다.

아내보다 내가 더 인기가 높다(보고 있나, 당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무릎에 앉은 아이의 머리에 내 턱을 대고 앉았다. 창문으로 바람이 아이와 내 뺨을 나란히 스쳐가고, 내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아이를 안은 채 해 저무는 풍경을 바라보며 집으로 가는 길.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사실 고통분담이라고 생각한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은 이렇듯 아이와의 절절한 감정을 키워주고 있다. 해가 지지 않은 시간에 아이의 일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빠에게 희생인지 아니면 기쁨인지 헷갈린다. 아내는 이런 감정을 더 자주 느끼겠지. '행복하다, 행복하다'. 언젠가 이 날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회상할 것 같다.
2013/07/13 22:56 2013/07/13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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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출산, 육아. 이전에는 몰랐던 여성문제에 눈을 뜨게 된 남편의 반성과 성찰을 담았습니다. 육아를 통해 얻는 소소한 즐거움과 더불어 조금씩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언니', 내지는 '엄마'의 정체성을 발견해 가는 과정 중에 쓰는 사적이지만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글들을 모았습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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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퇴근 없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처음 겪는 막중한 의무감과 쉼없는 일상으로 인해 여성은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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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난 직후 부부의 일상은 바뀐다. 아이 중심으로 일상이 재편되는 셈이다. 일단, 여성은 아이를 낳으면 회사를 휴직하고 집에서 육아에 집중한다. 짧게는 2시간, 길어봤자 3~4시간 간격으로 모유 수유를 해야하므로 밤이 돼도 편히 자기는커녕 집앞 가까운 곳으로 외출을 하는 것도 용이하지 않다. 아이가 돌이 될 즈음엔 상황이 어느 정도 나아지지만 이유식, 기저귀 등 하루 종일 아이의 입고 먹고 자는 행위에 계속 개입해야 한다.

그야말로 퇴근 없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처음 겪는 막중한 의무감과 쉼없는 일상으로 인해 여성은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경험한다. 출산 후에 호르몬 때문에 생기는 여성의 감정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육아 과정 내내 우울함이 이어지는 경우에는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원래 하던 집안일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장기간 휴직이 보장되지 않아 직장으로 복귀를 해야 하면, 싱글 혹은 신혼부부일 때보다 1.5배 이상의 물리적인 힘이 더 필요하다. 남편이 중간중간 도와주지만 꼭 본인(애엄마)이 챙겨야 하는 특정한 것들이 있으므로 남편은 육아에 관한 한 영원한 '조수'일 뿐이다. 게다가 둘째나 셋째가 생기면 이 무한 프로젝트는 이후로도 몇 년 간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해서 돌아가게 되고 일상의 피로도는 가중된다.

엄마가 된 여성을 옥죄는 일상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여성은 아이가 생긴 후부터 매순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 가운데 놓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친구나 동호회 모임, 혹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도 내 마음이 침체되는 날이면 그냥 잠수를 타면 그만이었다. 하다못해 회사도 하루이틀은 아프다고 '뻥을 치고' 월차를 낼 수도 있었다. 내 지옥같은 내면을 숨기기 위해 세상과 잠시 격리된 시간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사실 그땐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 후에도 남편과 심하게 다투면 다른 방에 들어가서 각자 생활을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마음이 지옥같고 내 속이 타들어가도 모유나 이유식은 반드시 먹여야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 답답한 마음에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보지만, 조금만 머리를 굴려봐도 할 일이 산더미다. 내일 입을 아이 내복도 빨아야하고 어린이집 아이 친구가 생일이라 선물도 준비해야한다.

일상이 엄마된 여성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싱글 때의 철없던 내가 이제 책임감도 커지고 세상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하루하루가 매번 정서적으로 기쁠 수만은 없다. 반복되는 허드렛일이 더 마음 속 어둠을 불러온다.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도 일순간 허물어질 것 같은 날들이 있고 그런 날들을 한 번 두 번, 여러 번 참다보면, 어느덧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우울이 마음 속에 똬리를 튼다.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

이게 내가 주변에서 경험하는 여성 육아 우울증의 전형적인 형태다.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 여성들은 누구나 육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털어내야 한다는 인식마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가 아는 몇몇 착한 아내들은 부부싸움을 해도 아침은 꼬박 꼬박 차려주고 출근을 시키는 반면 남편은 기분이 상해서 더욱 육아에 신경을 쓰지 않는 '기현상'을 보였다. 육아 조수인 남편은 기분 나빠서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다.

육아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이된다. 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 빨리 따라오지 않고 장난감 코너를 두리번 거리는 아이의 등짝을 때리며 끌고 가는 엄마를 보고 사람들은 쉽게 손가락질 해댄다. 하지만 그 엄마의 내면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고립된 섬'이 된 지 오래라면 어떨까.

어떤 육아책의 제목은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던데 제목 자체가 불만족스럽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사회가, 이 세상이, 그 가정이 엄마를 아프게 했고, '그래서'(그 결과로)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엄마도 안다. 자신이 별 시답잖은 이유를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분노를 쏟아낸다는 사실을. 죄책감이 얹혀진 채로 엄마의 아름답던 영혼은 침잠하고 썩어간다.

따라서 엄마가 살려면, 가장 먼저 '엄마만 할 수 있는 집안 일'이 없어져야 한다. 엄마가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가정 내 일상이 사라져야 한다. 엄마의 마음이 지옥 같을 때 훌쩍 어딘가로 사라질 수 있어야, 그 시간이 보장되어야 다시 천사의 미소로 아이에게 돌아올 수 있다. 육아 프로젝트에 있어, 엄마의 '무한책임'에서 풀려나야 한다. 그럴려면 남편이 '조수'로만 기능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단 하루 이틀이라도 아빠가 육아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장사한 지 사흘된 예수' 같았던 아내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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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 여성들은 누구나 육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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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내가 개인적인 일로 세미나를 준비할 일이 있었는데, 세미나가 끝난 후에 그간의 피로가 몰려왔던지 주말 내내 '장사한 지 사흘된 예수'처럼 누워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준비 과정 중에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결국 아이와 나는 일요일 저녁까지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아이가 가끔 누워 있는 아내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내는 정말 죽은 사람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2~3일간 아이는 가끔 내복 상의와 하의를 짝이 맞지 않게 입었고 끼니 중 한두 끼를 피자와 치킨으로 때웠으며 피곤한 아빠의 무관심에 한두 번 울음을 터뜨려야 했다. 그래도 우리 집은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일요일 저녁. 아내가 부활했다. 아내가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하자 집안이 금세 빛이 나고 아이는 웃으며 엄마를 안아 준다. 엄마는 아빠를 보며 말한다.

"수고 많았음묘. 담주에 이틀 놀다오삼."
(휴가 이틀 받았다!)

평소에는 아이를 씻기고 재우는 건 내 일이지만 피곤함을 털어낸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서 씻기고 눕혀 놓고 쓰다듬으며 재운다. 난 멍하게 풀린 눈으로 둘이 잠들기까지 지켜봤다. 그리곤 컴퓨터를 켠 뒤 미드(미국 드라마)를 한 편 때렸다(봤다). 주말 동안의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것을 깨닫는 데에는 나도 사실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나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하면서도 스스로 착한 남편이라고 굳게 믿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아내와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육아를 분담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아내'가 '엄마'가 어떤 포지션인가에 대해 실감했다.

아내와의 결혼, 출산과 육아의 경험은 나를 '유사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 간혹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나는 '제이언니'로 불린다. 아내 문제, 엄마 문제, 쉽게 말해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얻게 된 별명이다. 아빠의 위치에 있지만 '언니'의 시선으로 풀고 싶은 이슈들, 일상들이 종종 뇌리를 파고든다. 앞으로도 종종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3/07/04 22:52 2013/07/04 2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