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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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시간관리·자기계발 분야의 책들에 관심이 많을 무렵이 있었다. 당시 읽은 책 <관계중심 시간경영>에서 저자 황병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시간 개념을 구분해 사용한 것을 주목했다. 여기서 크로노스는 '시계 시간' 혹은 흘러가는 시간을 뜻한다. 그리고 카이로스는 '사건 시간', 즉 무수한 시간들 중 의미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대다수의 자기계발서가 제안하는 시간 관리는 대체로 시계 시간을 보다 촘촘하게 관리하는 것에 기반한다. 하지만 정작 인간은 같은 시간도 다르게 인식한다. 누구와 만났고 어디를 갔고 무슨 일을 했느냐에 따라 그 시간의 의미는 달라진다. 고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른바 한 개인의 삶에 있어 '사건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고 또 앞으로도 그와 비슷한 시간들이 흘러갈 것이다. 이 모든 양적 시간들 중에 사실상 나에게 의미 있게 각인된 특정한 사건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업고 병원으로 뛰던 기억, 아내와 처음 데이트하던 장소, 아이가 태어나던 날, 폐렴으로 입원했던 기억, 회사에서 몇 주 동안 밤새 준비했던 보고서를 결재받던 날….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우는 것이 많다.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와 미래를 조명하는 좋은 스승이다. 그런 소소한 깨달음 때문인지, 나의 정리'벽'은 기억들을 종이에 노트에 그리고 컴퓨터에 저장해두는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이건 덧칠이다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앨범을 신청하라는 안내문을 받았다. 허걱, 앨범 가격 무려 6만 원이란다. 나는 그래도 신청할까 고민했으나 아내는 '상술'이 엿보인다며 끝내 앨범을 신청하지 않았다. 물론 돈 때문만이 아니다. 어린이집에서 하는 활동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아이의 아이다움'을 저해한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

일례로 지난 어버이날에 아이가 만든 카네이션에는 '엄마 아빠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어쩌고 하는 무슨 틀에 박힌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다. 정말 우리 아이가 쓴 내용이었다면 아마도 '아빠 똥꼬나 먹어' 내지는 '아빠 스티커 다 모으면 큰 장난감도 사줘야 해'라고 쓰지 않았을까.

문제는 아이의 아이다움에 어른들이 '윤리적인 덧칠'을 해대는 것이다. 따라서 성장기에 어린이집 아이들이 어떤 기억의 저장으로 담아오는 많은 추억들도 천편일률적이다. 그저 수많은 아이들 속의 내 아이, 남들에게 처지지 않게 성장하는 내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장 앨범을 경제논리에 따라 고가의 비용을 주고 구입해야 한다.

내 어릴 적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어디에 살았는지, 그 시절 내 친구는 누구였는지, 나는 어릴 때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사실 지금도 나는 유년기에 어떤 성격을 가진 아이였는지 가끔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자료는 없다. 빛바랜 사진 몇 장에 기댄, 그저 풍문 속에 전달되는 내 영유아기의 사건들. 그것조차 어른들의 가치관으로 채색된, '넌 어릴 때부터 착했지, 점잖았지, 공부를 잘했어…' 그들의 욕망에 기댄 평가들.
내 아이만의 앨범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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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집 친구가 그려준 그림에 친구 이름을 함께 넣었다.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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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자료들은 자료를 선별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된다. 나 또한 내 아이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내 시각으로 내 가치관으로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린이집에서 막 찍어내는 앨범이 아닌, 내 아이가 나중에 자신의 영유아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그 시절의 특징들 그리고 자라면서 경험한 환경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주고 싶다.

그것이 10대나 20대에는 별 의미 없는 자료일 수 있겠지만 30대가 넘어 내 나이 즈음이 돼서는 스스로에게도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성격심리학 분야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간의 고유한 성격과 기질은 30대에 꽃을 피운다고 한다. 10대나 20대에는 여전히 주변의 눈치(환경에 적응)를 보느라 본유적 성격이 죽는다고.

아이에게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얼마나 이 아이를 보호해줄 수 있을까. 얼마나 이 아이가 편하게 고지를 선점하게 만들 수 있을까. 부모라면 그런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정작 아이에게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만들고 자기의 과거를 통해 미래의 삶을 스스로가 개척할 내적인 힘을 길러주는 게 아닐까. 부모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게 해주려면 부모와 사회의 가치관으로 덧칠한 기성 성장 앨범들이 아닌 부모의 눈으로 자세히 관찰한 내 아이의 특징들을 잘 기록해 주는 게 정작 더 중요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아이의 성장책을 만들어본다. 아이와 앉아서 옛날 어린이집 친구들의 이름을 물어보고 받아적었다. 어린이집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서 친구들의 이름을 같이 적은 뒤 육아일기 한쪽에 넣어둘 생각이다. 아이에게 간간이 보여주며 나의 추억에는 없는, 선명한 이미지를 남겨주고 싶다. 나도 안다. 이런 것들의 이면에는 나의 어떤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가 깔려있다는 것을. 그래도, 아이가 나이가 들어 네다섯 살 시절을 추억할 때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른다면 나도 기쁠 것 같다.
2013/09/14 23:07 2013/09/14 2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