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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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어머니는 신문을 유심히 보다가 급하게 옷을 차려입고 누나와 나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렇게 시간에 쫓기듯 따라나섰다. 웬 횡재인가, 하는 마음으로 누나와 즐겁게 끌려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게다가 영화관 앞에서 당시에는 1개에 2000원이나 하던 바나나도 사이좋게 하나씩 입에 물었다(어머니는 바나나가 싫다고 하셨어.^^;;).

그렇게 급하게 본 게 바로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영화였다. 영화와 같은 제목으로 삽입된 노래 때문에 꽤 유명했지만, 정작 영화는 초등학생인 내가 보기에 별 재미가 없었다. 영화 스토리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 후, 그렇게 그 사건은 오래도록 잊혔다.

나는 자랐고, 대학에 갔고, 직장에 갔고,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육아에 관심이 많은 아내 덕에 육아에 관한 책들을 읽고 좋은 부모, 좋은 아빠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생길 즈음, 문득 그 노래가 떠올랐고 그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났다. 무료했던 영화보다는 그날의 어머니가 자꾸 떠올랐다. 어머니는 그날 신문에서 '장난감만 사주면 그만인가요,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영화의 타이틀을 보고 아이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라는 생각에 무작정 우리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던 듯하다.

내 어머니는 여느 부모처럼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 한 아이의 아빠가 되고 나니 가끔 떠오르는 어머니의 행동에 놀랄 때가 있다. 이제 갓 육아에 들어선 초보 아빠인 나는 벌써 매사에 아이의 나쁜 버릇을 교정하고 아이가 바른 길로 자랄 수 있도록 훈육하려는 기미가 보인다. 따지고 보면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이의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보려고 애썼던 노력이 이제는 조금 읽힌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 온몸으로 말하는 아이를 느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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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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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주말 육아는 오롯이 아빠의 몫이다(아내는 아이에게 주중에 충분히 시달렸으므로). 평소와 달리 아이가 짜증을 냈다. 날이 덥긴 했으나 매사에 구시렁거리고 미운 말을 해댔다. 함께 장을 보러 나왔다가 다음부터 이럴 거면 따라 오지 말라고 했다. 그 짜증이 저녁 시간까지 이어졌다. 3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에 저녁 밥을 만들어서 아이에게 차려줬더니 점심때 과자를 먹어서 그런지 먹으려 하질 않는다. 끝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내 눈치를 보며 억지로 조금 더 먹었다.

씻기고 재우려는 데 아이가 짜증 내는 수준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몸을 만져보니, 열이 심하게 났다. 39도를 훌쩍 넘긴 고열상태. '아…. 얘가 아팠구나.' 밤새도록 해열제를 먹이고 물로 몸을 닦아주면서 아이를 바라본다. "아파서 짜증이 났었구나. 아빠가 미안해"라고 말하는 순간, 내 눈 주위가 화끈거린다. 분노의 주말 육아가 순식간에 심한 죄책감에 빠져들게 한다.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었는데 아이에게 그 분노가 향해 있다가 갑자기 깨달은 내 잘못으로 인한 절망감에, 주말 밤 끝내 멘붕 상태가 되었다.

청년 시절 스스로 가졌던 긍정적인 생각들은 결혼하고 아내와 살면서 한 번 무너지고, 육아하면서 또 한 번 무너진다. 난 살면서 매 순간은 아니지만, 삶의 상당 부분에서 스스로 참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자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아빠 노릇, 아이가 태어나서 장성하기까지 그 아이가 상하지 않고 잘 자라도록 돕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느낀다. 정서적인 것은 고사하고 몸뚱이만이라도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지. 특히나 오늘처럼 아픈 아이를 인지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된다.

영화 <비포 미드나잇>에서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가 호텔 방에서 육아 이야기를 하며 심하게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 제시가 출장을 다니고 외부 활동할 때, 셀린느는 두 쌍둥이를 낳고 어쩔 줄을 몰라하며 불안해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한 아이의 성장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 매 순간 커가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해해야 하는 한 엄마의 심리가 잘 드러난 장면이었다.

육아를 전담하는 세상의 많은 엄마들은 오죽할까 싶다. 고로 이 공포를 부모 중 한 사람에게만 짐 지워서는 안 되는 이유가 나름 자명한 셈이다. 하지만 죄책감에 사로잡힌 오늘은 이조차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아이가 커서도 나에게, 적어도 막연한 고마움을 갖는 부모로 남을 수 있을까. 가끔 조바심이 난다. 자신이 없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본 <어른들은 몰라요>가 떠올랐다. 그래, 어른들은 모른다. 일상에 지쳐서 아이들의 세밀한 표현과 손짓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다.

이번 주말처럼 아이의 상태도 모른 채 버릇없이 군다고 호통을 칠 때도 있다. 몸의 질병은 낫더라도 자라서 그런 서운함과 억울함이 아빠를 바라보는 아이의 정서에 어둡게 자리 잡지 않기를 뒤늦게 바라곤 한다. 내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부모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온몸으로 하는 아이의 말을 매 순간 좀 더 귀담아 들어야겠다.
2013/08/16 23:04 2013/08/16 2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