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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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이와 놀다 보면 아이가 "아빠, 그냥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줘"라고 말할 때가 있다. 과자를 많이 먹거나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나는 즉시 물러선다. "어… 알았어." 사실 나는 아이의 놀이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몹쓸 모범생 기질 때문에 정해진 룰을 아이에게 강요할 때가 종종 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어떤 정형화된 방식을 '부드럽지만 교묘하게' 강요하면, 눈치가 9단인 다섯 살의 아이는 즉시 그것을 감지하고 아빠에게 항의한다. 내가 이게 바른 방법이라고, 더 재미있는 방법이라고 혹은 이렇게 '해야 한다'며 아이를 교정하려 애를 쓰면 쓸수록 사실상 아이는 위축되고 재량은 줄어든다. 이런 개입이 반복되면 아이는 점점 외부 세계에 주어진 룰부터 찾으려고 하며 주변 눈치를 보고 불안해한다.

결국 아이는 자기가 즐기는 놀이에서조차 주도권을 잃게 되고, 아빠가 노는 방식을 곁에서 지켜보다가 정작 본인은 금세 흥미를 잃고 만다. '아빠주도형 놀이'의 탄생이랄까. 솔직히 나는 드러나지 않게 내심 이 모든 과정을 아이가 체화(體化)하길 기대하며 은근히 아이에게 강요하는 편이다. 내가 '범생처럼' 자라왔기 때문에 아들에게도 그렇게 내 DNA를 전수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강요에도 자기주장을 분명히 해주는 아이가 신기하고 고맙다. 아이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내게 말을 건넨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을 정도의 소리로. 오늘도 나는 한걸음 물러서서 대답한다.

"아, 미안. 네가 혼자서 해봐."

실내놀이터, 부모의 아바타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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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의 창의력은 '방해받지 않음'에 있다.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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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배우는 게 많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몰입'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학습한다. 재미가 있으면 친구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30분이 넘도록 집중력을 가지고 특정한 관찰과 행동을 지속한다.

때론 과학자를 방불케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다가 때로는 꺄르르 혼자 빵 터져서 몇 분을 구르기도 한다. 이때 가장 큰 방해꾼은 유감스럽게도 나 같은 '부모들'이다. 부모의 놀이 방식과 아이의 놀이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아이의 놀이 방식은 무질서하거나 위험하고 더럽기 때문에 종종 '틀린 방식'으로 치부된다.

놀이터에서 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몰입 단계에 들어가기 직전, 부모들의 개입이 시작된다. "OO야, 그거 입에 물면 안돼", "OO야 소리지르지마, 시끄러워", "OO야, 일어나 바닥 더러워" 등과 함께 아이들이 노는 순간에도 부모들은 적극적으로 아이들 사이를 중재한다.

"OO야 빨리 장난감 친구에게 줘. 니가 형이잖아."
"OO야 저기 동생이랑 같이 블록 쌓아봐."

멀리서 보고 있으면 마치 아이들은 부모의 아바타가 된 것처럼 부모의 룰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이내 자율성을 잃은 채 불안해하며 노는 중간중간 부모의 눈치를 본다.

불안해진 아이들은 부모를 찾게 되고, 이제 부모는 아이 곁에 아예 붙어 앉아서 제대로 놀이 지침을 교육시킨다. "OO야 우리 블록으로 집을 만들어볼까" 부모는 아이에게 집을 만들어주고 자동차를 만들어준다. 아이는 부모의 작품을 감상하고 그 작품을 가지고 잠시 놀다가 이내 싫증을 낸다.

악순환으로 점점 엄마 아빠가 바빠진다. '엄마, 이거 해줘' '집 만들어줘' '여기에 올려줘' '나는 잘 못하니까 아빠가 이걸 해줘' 등등. 부모는 잠시라도 자기가 없으면 아이가 혼자 놀 줄 모른다고 한숨을 내쉰다. 놀이터에서조차 내 시간 없이 아이에게 '올인'한다고 주변 부모들에게 하소연을 한다. 그러다 이내 자기 아이를 보고 소리친다.

"OO야 그렇게 만들면 안돼. 집이 무너지잖아!"

두세 살 난 유아를 키우는 부모나, 고3 입시생을 키우는 부모나, 어떤 길을 만들어놓고 아이를 그 길로 걷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부모들은 아주 초기 단계부터 아이의 자발성을 왜곡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유아를 돌봄에 있어 위험한 상황들이 있다. 어릴수록 질병에 노출되기 쉽다. 그렇다고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온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아이를 매순간마다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 항균 티슈로 닦은 장난감만을 가지고 놀게 할 수는 없다.

아이 입장에서 그것은 스스로가 즐거운 놀이일 리 없다. 그저 하나의 역할극 내지는 무선 조종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아이의 몰입에 의한 학습 발달을 방해하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잦은 개입과 방치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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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에게는 아이의 몰입을 위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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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반대의 극단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를 놀이터에 던져 놓고 자신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책을 읽는다(솔직히 내가 종종 그렇다, 흑…) 때때로 부모는 '개입하지 않음'과 '방치'를 오해한다. 나 또한 일상적으로 아이와 겪는 일이기도 하다. 하루는 아이와 자려고 누웠는데 하품을 하고는 눈물을 닦더니 갑자기 '눈물'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 "아빠. 눈물에서 기름 냄새가 나."
: "무슨 눈물에서 기름 냄새가…. (말 멈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나는 입을 닫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성하의 말을 막고 싶지 않았다.)

아이: "눈물이 줄줄줄 내려오면 입안에 들어가는데 그때 여러 가지 냄새가 나거든. 햄 냄새도 나고, 치킨 냄새도 나고, 어… 어… 막 그래…."
: "크크크, 아, 그렇구나. 아빠는 잘 몰랐네. 눈물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구나. 너 어떻게 알았어?"
아이: "나…, 나 먹어봐서 다 알아.(뭔가 무게 잡는 듯한 눈빛)"

사실 아이가 첫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무슨 눈물에서 기름 냄새가 나니? 냄새가 아니고 '맛'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그건 소금 맛이야"라고 말하려고 했다. 아마 그랬다면 소심한 우리 아이는 '눈물은 소금 맛'이라는 아빠의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눈물을 냄새로 표현했다는 점 그리고 눈물의 맛(냄새)이 기름·치킨·햄과 같았다는 말에 놀랐다. 눈물이 짜기는 하지만, 소금 맛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서, 아이는 간이 밴 음식들을 떠올린다는 사실에 나는 전율하기까지 했다.

사소한 일로도 우린 부모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훼손하고 난도질하고 있을까. '정답'에 이르는 빠른 길을 알려준다며 부모의 언어와 생각을 자녀에게 이식시키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참으로 아이의 자라남은, 오름직한 동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처럼 예민하게 느끼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공감되지 않는 움직임이 많다. 내가 매일을 분주하게, 그리고 어딘가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마다 지나치는 많은 아이의 몸짓과 속삭임이 있으리라.

매번 명시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순간에도 부모는 아이를 교육할 수 있다. 부모는 자주 아이의 세밀한 행동들을 관찰해야 한다. 아이는 도약하기 직전의 선수나 멀리 뛰기 위해 잠시 몸을 웅크린 개구리 같다. 아이의 작은 몸짓·표정·손길·한마디 툭 내뱉은 말을 읽으면서 내 아이의 독특한 성격과 욕구 그리고 성장의 속도를 유추할 수 있다. 때때로 적당한 수준의 부모의 개입은 벽을 향해 계속 걸어가는 모터 로봇의 방향을 돌려놓은 것 같은 효과를 준다. 작은 매듭에 걸려 헝클어진 실의 한쪽 끝을 풀어주면 긴 실타래가 한번에 풀리는 것처럼 아이는 더 높게 멀리 뛸 수 있다.

잦은 개입과 완전한 방치의 극단 사이에서 적당한 수준의 거리 두기와 적당한 개입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관찰자'로서 부모가 자리매김하는 게 아이의 '창의력 돋는 몰입 행위'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아직 더 배울 것이 많겠지만 현재로서 내가 느끼는 부모의 자리는 그렇다. 오늘도 내 식이 아닌 아이의 방식을 생각하며, 아이와 함께 있는 순간만은 아이의 언어에 더 귀를 기울이자고 다짐하는 날이다.
2013/08/04 23:02 2013/08/04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