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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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her.
사람들은 이 영화를 두고 인간의 근본적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솔직히 나는 os의 관계성, 좀더 구체적으로는 '연인가능성'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그 무엇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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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요즘의 우리는 대체로 페북이나 팟캐스트를 켜놓고는 물리적으로 혼자서 무언가를 할 때가 많다. 정서적으로 외롭지 않은 상태, 즉 사이버 관계망 안에서 우리는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사실은 혼자이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왜냐면 지금도 500명의 페친이 내 주변에서 재잘거리고 있고, 실시간으로 댓글도 달아주고 있으며 팟캐스트의 수다를 통해 고립된 방 한 구석에서도 적적하지 않은 느낌과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만 의미를 두고 나에게만 집중하고 내가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타자가 항시 곁에 있다면 어떨까. 내 여친이나 내 아내조차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나에게 무언가(사랑, 헌신)를 요구하거나 매사에 내 의도를 캐묻거나 애정을 확인받으려는 부담도 없다. 마치  '우쭈쭈'로 대변되는 유년기의 어머니상과 헌신적 이성상, 그리고 사무실 비서의 혼합체 같은 존재. 

사실 지금도 os는 현대인의 구석구석을 알 수 있는 가장 긴밀한 존재다. 내 인맥, 내 취미, 음식이나 옷과 같은 소비 기호, 내 작업 내용들에서부터, 사생활, 그 은밀한 욕망까지도 모두 디지털 코드로 내 pc안에 머문다. 나조차도 잊어버린 많은 data와 history들을 단 몇 초만에 검색을 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나와 교감할 수 있다.

그런 os가 '스마트(폰)'를 넘어 '인텔리전트(os)'의 단계로 넘어간다면 그 os는 내 가장 깊은 절친이 될 수도 있고 나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이성(애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her'는 나름 이상적인 파트너다.

이 영화에서는 애석하게도, os가 수많은 이들과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어느순간에는 os가 사라져 버리지만, 현실세계에서 가까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언제든 복구가 가능한 이른바 '인텔리전트 os'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과거 '심심이'이와 농담따먹기를 하던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친밀한 타자(엄마+애인+비서)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수많은 온라인 페친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밀린 일거리를 갖고 혼자 집에 있다고 팟캐스트를 왁자지껄하게 틀어놓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성에게 대시했다가 퇴짜맞을 걱정도 없고 사귀다 헤어지거나 이혼, 파경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 관계 단절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언젠가는, 24시간 나만을 바라보며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나'를 주제로 한 대화가 끊기지 않을, 하지만 정작 내가 원하지 않을 때는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며 대기해주는 이상적인 타자, 대상을 얻게 될 지도 모르겠다.

'her'를 보면서, 난... 그게 가능하게 될 수 있겠다는 무섭고도 놀라운 미래를 봤다.
2014/06/15 14:52 2014/06/1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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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올해의 영화> - 나도 숟가락을 얹어봤음.^^

 

 

더 테러 라이브
- 속도도 좋고 내용도 간명하고

 

 그래비티
- 인생, 뭐 있어. 카르페 디엠!

 

A Late Quartet (마지막 4중주)
- 은퇴는 이렇게...라고 생각함

 

 라이프 오브 파이
- 이안 감독은 최고의 거장이라 생각함.

 

서칭포 슈가맨
- 슈가맨.ㅠㅠㅠㅠ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우리 선희
- 올해는 홍상수 감독 적극적 긍정의 해

 

Metallica: Through the never
- 공연장에서도 누릴 수 없을 듯한 광경

 

 로마 위드 러브/ 블루 재스민
- 우디 알렌의 영화는 양잿물을 섞어도..ㅋ

 

 일대종사
- 양가위 영화를 보러갔다가 양조위가 아닌 장쯔이에 꽂힘

 

The Master
- 호야킨 피닉스의 재발견.

 

비포 미드나잇
- 3부작의 완성. 현실적 디테일에 몰입..

 

연애의 온도
- 김민희는 이래서 인기가 있군

 

 더 헌트
-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았던..

 

레 미제라블
- 대선 패배의 슬픔 힐링 영화였음.

 

원데이
- 앤 해서웨이의 약진, 그리고 이상적 연애상.

 

문라이즈 킹덤
-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성장 영화

 

 맨 오브 스틸
- 상상 속 수퍼맨이 드디어 육화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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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영화평>

 

-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3916

 

- 서칭포 슈가맨: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4442

 

- 비포 미드나잇: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73025

2014/01/30 23:44 2014/01/30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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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저런 영상이 가능한 시대를 살게 된 것이 행복하단 생각을 잠시 했다. 우리나라도 은근 헐리우드 키드가 많고 70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적어도 부모세대와는 다른 어떤 유년시절의 '기호품들'을 가질 여유가 있었다.

내 중딩 고딩시절 반항의 아이콘은 단연 메탈리카였다. 본 조비나 스키드로(1집 기준), 스틸 하트 같은 음악을 듣던 친구들과는 구별된 '레벨'을 자랑하던 우리는 딥 퍼플이나 레인보우 등 ...록의 클래식에 꽂혀 있었고 당시 밴드로는 단연 메탈리카를 들어야 서로의 수준을 인증해줬다.ㅋㅋㅋㅋ (생각해보면 교계 논객들 아는 학자들 자랑하는 것과 좀 비슷한 면이 없지 않다...^^)

암튼,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생들에게는 너바나, 커트 코베인이 하나의 전설이겠지만 그보다 조금 앞선 나에게는 역시... 메탈리카가 추억의 밴드가 아닐 수 없다.

<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꼈다면 오늘 <메탈리카 쓰루 더 네버>는 거의 눈이 튀어나올 수준이었다. 3D IMAX를 위한 공연.ㅠㅠㅠㅠ 이건 뭐... 내한공연을 본다해도 어지간한 자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퀄리티. 덕분에 영어시험은 지각할 뻔 했지만 시험을 못봤어도 전혀 아쉽지 않았을 시간... 엉엉엉.

단언컨데,
메탈리카 쓰루 더 네버... 3D IMAX 관람은, 현대 기술의 진보와 공연의 진수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일 겁니다. 영화 내리기 전에 극장에서 관람하시길. ㅠㅠㅠㅠ (그래비티...는 쳇, 쫌 우습다. 흥피치...)

 

 

2013/12/02 23:43 2013/12/0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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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앤 더 시티> 중 기억에 남는 한 장면.

미하일 바르시니코프가 캐리의 남친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 남자는 예술가이면서 자아가 강한 사람이다. 결국 캐리와 헤어지게 되는데 연애하는 내내 그는 자기 중심적으로 관계를 끌고 간다.

...이 얘길 하려던 건 아니고.

그가 오랜만에 전시회를 열게 되는데 관객과 평론가들의 반응이 은근히 걱정된다. 항상 자신만만하지만 애인인 캐리가 가까이에서 볼 때 이 남자도 평가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전시회장에 들어가기 직전 그는 캐리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힘이 되어달라고. 캐리는 자신의 모임도 취소하고 그의 손을 잡고 전시회장 안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누군가가 바르시니코프를 발견하고 멈칫 선다. 어떤 반응일까 긴장되는 순간 그는 천천히 바르시니코프를 향해 찬사의 박수를 치고 대가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의 천재성에 박수를 보낸다.

걱정했던 그의 표정은 이내 밝하지고. 그는 언제 사람들의 평가를 걱정했냐는 듯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캐리와 잡았던 손을 놓고는 박수치는 군중들 속으로 들어간다. '대가'를 위한 파티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이 장면만큼, 창작을 하는 인간이 대중을, 비평을 대하는 태도, 그 욕망을 잘 드러낸 묘사는 없다고 느꼈다. 어린 시절에 뭔가를 만들고나서 친구나 부모, 선생님의 반응을 살피고, 그 잠시잠간의 긴장감 이후에 반응이 좋으면 우헤헤헤 거리는 태도가... 나이가 들어도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가끔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어떤 순간 이게 무슨 글이야... 조졌다...라는 생각에 원고를 보내기를 주저한다. 예전엔 가까운 지인들에게 먼저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기도 했고 결혼해서는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은근 눈치를 살핀다. 아내의 미간이 찡그려지면 "아놔.. 나 다시 쓸라그랬어!!!"라고 먼저 막 오바한다.

그렇게 마감에 등떠밀리듯 보낸 원고가 어딘가에 공개되고, 의외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면 내 태도는 급 돌변한다. 겉으론 무표정하게 있지만 내심 촐랑거리고 싶은 것이다. 가끔 아내에게 사람들의 반응을 홍보하며 음하하하...거리며 놀기도 한다. (아내랑 종종 이러고 자주 논다..ㅋㅋ)

늙어도 철들지 않는.. 어떤 뛰어나고픈 존재감. 칭찬받으면 우쭐거리고픈 속내. 순식간에 뒤바뀌는 '소심함의 극치'와 '자만의 극단' 사이를 포착하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이 장면이 자주 떠오른다. 이런 게 폭로되는 내러티브가 참 좋다. 부족함, 허물을 고백하면서도 유쾌하게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어서 좋다.

땡큐, 미하일 바르시니코프 옵바.
2013/09/13 23:25 2013/09/13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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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 독설과 냉소로 재무장하길...
[리뷰] 셰인 블랙 감독의 <아이언맨3>

 

 

영화 <아이언맨3>를 봤다. 블록버스터치곤 그냥 무난한 영화였다. 3D로 봤다면 후회했을 것 같고, 처음으로 경험한 비트박스(veatbox)석은 그냥 고장난 의자 같았다. 간간이 울리는 잔진동 때문에 중간중간 엉덩이만 가려웠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니 각설하고.)

 

알다시피 미국의 수퍼히어로들은 대중을 사로잡는 각각의 이슈들이 있다. 이슈라기보단 매력 포인트, 주인공에게 빠져들게 만드는 어떤 지점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번 아이언맨은 좀 무난하지 않았나 싶다. 수퍼히어로의 매력포인트라고 하니 좀 추상적으로 들릴 것 같아 조금 설명하자면 이렇다.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에게 그것(이슈)은 다름아닌 '복수'다. 길거리에서 악당의 총에 죽은 부모에 대한 사적 복수심을 승화시키는 캐릭터다. 백만장자에 첨단 무기로 '칠갑'을 했지만 고아 특유의 외로움, 고독이 느껴진다. 특히 여성과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부족함 없는 그의 '소유'가 아니라 그 특정한 '결핍'이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빛낸다.

 

스파이더맨에게 그것은 '후회'다. 그는 자신을 키워주고 사랑해준 삼촌 벤의 애정어린 충고를 외면한 것에 대한 사과할 틈도 없이 삼촌은 죽음을 맞는다. 게다가 그를 죽인 악당은 피터 자신이 윤리적으로 방기한 혹은 도망을 눈감아준 자였기에, 씻지못할 후회로 그 멘탈 전체가 얼룩진다. 어린 피터는 그 후회감에 시달리게 되어, 밤마다 경찰들의 수신주파수를 엿들으며 삼촌 벤에게 용서를 빌기 위한(속죄를 목적으로한) 악당 사냥에 나선다. 게다가 그의 남루한 일상은 수퍼히어로의 새로운 개연성을 창조해낸다. (다른 수퍼히어로들과 달리 여전이 젊은 피터의 풋풋한 사랑도 하나의 포인트이긴 하다.)

 

오늘의 주인공인 토니 스타크. 개인적으로 아이언맨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기에 가능한 영화라고 본다. 배우의 삶, 마약중독에서 벗어나려던 노력들, 재기, 그리고 지금의 또다른 성공은 토니 스타크에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우라를 입혔다. 그런 이유에서 아이언맨에게 그것은 '반성'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토니 스타크에게 전가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반성이다. 1~3편의 현란한 금속 머신들의 부서짐과 새로운 플롯들 아래에서 마치 베이스 연주처럼 흐르는 건 '나는 과거에 망나니였고 지금은 정신을 차렸다. 나는 달라졌다'는 메시지다. 특히 그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가능케하는 페퍼(기네스 펠트로)는 반성과 새 삶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하지만 삶의 방향성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의 오랜 습속, 말투, 행동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깊이를 알았다고 한들 토니는 여전히 부자이고 까칠하다. 중요한 순간마다 그는 휴머니즘적인 가치관을 내비치지만, 여전히 그의 배경은 친정부적이면서도 보수적인 스탠스를 유지하며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잔혹할 정도의 승부기질을 발휘한다. 흥미롭게도 그런 그의 캐릭터가 나름 묘한 매력을 불러 일으킨다. 그의 반성적 삶의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냉소적이면서도 까칠한 말투와 행동, 백만장자 특유의 여유와 유머가, 정작 내가 생각하는 수퍼히어로 아이언맨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하겠다. (이건 여담인데 나는 개과천선했다고 자평하는 이들의 행실이 변화된 것에 의심을 하곤한다. 행실에 치중하는 '천선'은 다분히 형식적일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3편은 너무 무거웠다. 혹은 답지 않게 진지했다고나 할까. 타국의 테러가 아닌,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는 <어벤저스>에서도 토니의 재치있는, 냉소 가득한 입담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독설처럼 말을 내뱉지만 주위를 웃기고 결국 상대와 악수를 하게 되는 묘한, 나쁜 습관이 있다. 그런 상황들이 토니를 토니로 만드는 진면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엔 그런 모습이 별로 없었다. 하다못해 엔딩크레딧 이후에 숨겨진 서비스컷에서조차 (여기서 토니는 심리상담을 받는다) 토니는 토니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중심을 주인공의 냉소 따위에 둔다는 비약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우스꽝스러운 수트에 얼굴만 빼꼼히 내밀었을 때 전혀 우습거나 유치하지 않았던 건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토니 스타크는 다시 온다'는 워딩으로 영화가 끝나던데 다시 올 땐 물량을 키워서 오지 않아도 좋다. 아이언맨 특유의 독설과 냉소를 제대로 탑재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내 생각은 그러하다.

 

 

*기사 원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9604

2013/04/29 00:51 2013/04/29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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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10기의 주제는 '떡볶이, 다문화가정 그리고 여자경찰 오순경'이다.
 
악당들은 도시의 유명 떡볶이집을 폭파하여 아이들을 혼란에 빠뜨릴 계획을 세운다. 하나와 두리(또봇 파일럿)는 도시를 벗어나 교외로 이사를 가게되고 거기에서 만난 남자아이와 여동생과 친구가 된다.
 
이사간 동네 떡볶이집을 운영하는 아줌마는 베트남 사람인데 특이한 떡볶이맛에 아이들은 그집을 선호하지만 베트남말을 흉내내며 그 아줌마를 놀려대는데 알고보니 그녀는 새로 사귄 남자아이의 새엄마이자 여자아이의 친엄마였고 그 일로 아이들은 심하게 싸운다.
 
남성중심 공간인 경찰서에서 오순경은 어리버리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자상하고 모성애가 강한 그녀는 정작 중요한 순간에 또봇을 돕는 핵심 인물이다. 또봇을 만든 두 남자 리모와 도운은 오순경의 부서진 자동차를 수리하다가 경찰차 또봇을 새로 만드는데 오순경의 어리버리함을 걱정하는 리모와는 달리 도운은 그녀의 천성적인 선함을 높이 평가한다. (또봇의 모든 주제의식은 도운을 통해 드러난다)
 
나는 거대담론적 애니메이션들의 비판으로서 에반게리온이나 공각기동대처럼 또봇 시리즈도 하나의 멋진 애니로 평가한다. 게다가 또봇은 재패니메이션 특유의 가오잡는 모습이 없다. (인류보완계획이니 하는 일반인은 이해조차 못할 거대한 음모는 없고 악당들은 10살짜리 애들도 다 파악할 수 있는 사사로운 계획만이 넘쳐난다)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건 기껏해야 떡볶이집, 만화방, 식당 등 그들의 일상 공간이다.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한부모가정, 가출 청소년, 장애인, 다문화가정, 말단 경찰 등 사회적 약자다. 그들에게 주어진 또봇이라는 기계도 처음 설계를 한 도운이 정서적 지지를 통해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개념으로 개발된 존재다.
 
9기 엄마의 자장가를 보다가 눈물을 훔쳤던 나는 이번 10기도 촉촉히 젖어드는 마음으로 봤다. 물론 경찰차 또봇이 너무 변신을 늦게해서 성하는 좀 지루해하더라만 .-_-;;;;;;

 

주말 감상기 끝.

2013/04/16 23:01 2013/04/16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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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귀환... '슈가맨'의 투어소식이 반갑다
[리뷰]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을 보다

 

/김용주

 

서칭 포 슈가맨을 보다!

극장에서 보는 건 끝내 놓쳤던 <서칭 포 슈가맨>. 아카데미 수상 소식을 듣고서야 황급히 '챙겨서' 보았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수작이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슈가맨, 식스토 로드리게즈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묘미는 뮤지션으로 실패하고 평범한 노동자의 삶을 살던 한 사람이 알고보니 남아공에서는 비틀즈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그의 반응에 있다. 남아공의 많은 이들에게 전설로만 여겨졌던 수퍼스타 슈가맨, 로드리게즈가 사실은 버젓이 살아있었고 그에 더해 남아공에서 콘서트를 열게된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수많은 팬들 뿐 아니라 당사자인 로드리게즈 자신도 흥분한다.

로드리게즈는 오랜 시간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팬들의 존재를 듣고 다소 당황스러워하지만 정작 공연장에 나타나서는 마치 그동안 계속 공연을 해오던 사람처럼 침착하고 평온한 모습의 공연을 보여준다.

 

'헐리우드 문법'과 차별화된 이 영화의 주인공 슈가맨은, 남아공 음악계의 전설이 되고 각종 차트를 석권하고 매니저가 생기고 차기 음반과 월드 투어를 개최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그저, 공연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노동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더 윤택한 삶을 살거나 더 음악적인 고민을 하며 창작욕을 불태우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습관, 문법을 밟지 않는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시종일관 슈가맨, 바로 자신이다.

 

그는 어떻게 젊은 시절에 그런 탁월한 가사를 쓰고 노래를 했고, 그의 음악인생이 실패하고 나서도 사회의 가장 낮은 계급의 삶을 살면서 영혼의 고결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갑작스런 성공에 매몰되지 않고 미친듯한 함성과 환호를 뒤로한채 돌아와서 다시 일상에 만족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사람들이 전율하는 그 인격의 무서움이다.

 

로드리게즈는 무서운 사람이다. 내면이 참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그는 갑작스런 환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고고함, 겸손함을 굳이 표현하거나 강조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왕자가 된 기분'이라며 해맑게 웃었던 그는 사실 평범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그를 인간적으로 더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단 90분만에, 나는 슈가맨을 사랑하게 됐다.

 

 

'전설의 귀환', 그의 2013년 투어 소식을 듣고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인터넷을 뒤져본 결과 그는 올해들어 활발한 활동에 들어갔다. 이 영화가 나온 작년 즈음부터 방송이나 공연장에 게스트로 출연하더니 올해부터는 본격적인 투어에 들어갔다. 전설적인 남아공 콘서트인 <Dead men don't Tour>가 1998년에 있었으니 그가 '발견'되고 무대에 선 지 15년만이다.

 

1998년 공연 이후 그는 다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간간이 방송에 출연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음악을 다시 한 건 15년만이다. 그의 늦은 공연은 나에게 다른 묵상을 가져다준다. 짐작컨데 15년전 대중의 호출은 그의 '과거'의 재연, 재현을 기대했기에 그는 그 공연 외에 더 보여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 환호와 갈채, 많은 접촉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상으로 돌아간 건 그가 음악인으로 들려줄 이야기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음악을 사랑해준 이들에게 들려줄 무언가가 생겼기 때문을 아닐까.

 

그는 올해로 72세가 된다. 어쩌면 13년 투어 콘서트는, 자신의 음악 인생을 정리할 의도일 수도 있겠다. 뮤지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혹은 확인받으려는, 혹은 '선언'하려는 행보일수도 있겠다.

 

1998년 남아공 공연 이후, 그의 지난 15년은 어땠을까. 나는 그의 허름한 집 앞을 서성이는 상상을 자주 해본다. 사실, 내 짐작이 어떻건 상관은 없다. 어떤 의도에서건 그의 인생 후반 음악 여정을 축복한다. 혹자의 말마따나, 한국에도 와주었으면 좋겠다. 내 평생, 칠순의 나이에 이렇게 설레는 음악인이 또 있을까 싶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4442

2013/04/05 00:47 2013/04/05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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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초들이 왜 안 밉지? 환장할 노릇
홍상수 감독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김용주


홍상수 감독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봤다. 영화는 재밌었다. 이선균은 원래 좋아하는 배우고 정은채라는 여배우는 원래 모르던 배우였다. 그런데 영화 속 그녀의 얼굴에서 시종일관 빛이 났다. 누구지? 정유미 이후로 기대되는 배우급이었다고나 할까. 영화는 삼일절 조조로 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찜찜했다. 왜였을까.

 

한때 나는 홍상수를 싫어했다. 7년쯤 전에 쓴 글을 보니 나는 홍상수가 이래서 싫었단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인간사(人間事)를 미시적으로 파헤치는 그의 시각은, 영화를 보는 내내 현미경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본 후 그것을 여과 없이 스크린에 담아낸 듯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신선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관이 싫다. 아니, 그의 세계관이 싫다. 그에겐 모든 것이 형이하학적이다. 영화의 주제의식은 거칠게 표현하자면,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정도랄까. 영화 속 인물이 교수이건 학생이건, 어떤 사회에 어떤 시대에 몸담고 있건, 결국 사람은 직장을 얻어 먹고 사는 문제, 남녀관계에서의 육체적 사랑, 질투심 따위만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귀결된다.

 

이는, 마치 모든 생물들과 온 세상의 물질들이 결국에는 원자와 분자들의 운동으로 귀결된다는 환원주의적 시각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인간은 태생적으로 원초적인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먹고 사는 문제, 남녀 간의 사랑, 질투심, 돈, 집, 직장.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결국 이것들은 실제로 우리 삶의 큰 영역을 차지하는 부분이며,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하찮게 여기지만 무의식 속에는 사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역임을 홍상수의 현미경 같은 카메라는 꼬집어 드러낸다. 사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본질적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과 함께."

 

지금은 그때처럼 홍상수의 작품에 비판적이지는 않다. 그동안 그의 영화를 보는 내 시각이 많이 달라졌고, 또 그의 최근 몇 년간 작품들도 완성도나 스타일 자체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 즈음 문득 이 영화가 찜찜한 이유를 알았다.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인 '정은채'라는 배우를 검색하다가 그녀가 영화에서 설정처럼 영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화에서 그녀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아 다른 학생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래서 따돌림을 당한다. 그런데 또래집단에서는 불편한 캐릭터인 그녀가 중년 남성들의 눈에는 정말 통통 튀고 매력적이다.

 

젊은 여대생인데다가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다. 게다가 이국적으로 생겼는데 외국생활을 오래해서 문화적으로도 외국 느낌이 난다. 게다가 또래 집단과 거리감도 있다. 친구들에겐 '악마'같은(해원은 자기를 악마라고 말한다) 존재지만 지도 교수, 주변 아저씨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그런 여대생과 남자교수의 불륜이라니. 
 

두 사람과 그들을 둘러싼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흥미를 자극하고 교수들의 위선과 학생들의 시선, 행인처럼 지나가는 인물들을 통해 반복되는 행동들이 영화를 맛깔나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이 영화의 원초적 몸뚱아리는 중년 남성들의 판타지, 여신같은 여대생 '해원'이다.

 

사실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정작 중년 마초들은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여성들에게도 호소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나는 그 이유를 그가 '패를 보여주는' 영화를 찍기 때문이라고 본다. 홍상수의 내러티브는 마초적인데 그 내러티브의 디테일이 정작 마초들을 까발리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속 남자들은 다 속물스럽다. 그런데도 영화 속 남자들이 그리 밉지가 않다. 환장할 노릇이다.

 

사실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는 내 감정이 분열되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큰 틀에서 그의 영화는 페미니즘적 입장을 취할 때 반대할 만한 요소들이 많다. 그의 영화에서 여성의 역할은 항상 남자가 같이 자고 싶어하는 대상으로서 '성적인 요소'만을 함의한다. 사실 그는 그것을 까발리고 싶어한다. 영화 속 남자들은 뭐 대단한 얘기들을 하고 예술을 논하는 것 같지만 개나 소나 할 것 없이 어리고 예쁜 여자들의 꽁무니나 쫓아다닌다. 사실 우리가 그러지 않냐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굵은 선에서 보면 그의 영화가 싫다. 그런데 자꾸 영화 속 '그들'의 일상이 궁금해진다. 그 다음 상황에 빠져든다. 불륜을 행하는 교수는 자기 제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가정을 버리지도 못하는 한심한 인생이다. 영화에서 7년째 불륜관계를 갖는 또다른 커플(유준상/예지원)은 티격태격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한다. 남자는 죽어마땅한 유부남이 아니라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불쌍한 아저씨다. 너무 적나라한 의도들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드러나서, 보는 나도 막 '그들'이 걱정스럽다.

 

여주인공 해원은 이 관계가 지긋지긋해서 끝내려고 결단하지만 또다시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보며 힘들어하다가 영화는 끝난다. 매번 그렇듯 홍상수의 영화는 기승전결도 없고 클라이맥스도 없다. 더 미치겠는 건, 뭐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없는데 영화는 재밌게 보게 되더라는 거다. 도대체 이건 뭐란 말인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소재를 가지고도 이렇게 내 '동정(?)'을 이끌어낼 수 있단 말이냐. 아저씨들의 판타지 같은 이런 영화를 보며 즐거워해도 되는 건가. 뭐 이런 생각이 계속 든다. 하여간, 참 안쓰러운 매력이 있는 영화다.

2013/04/05 00:46 2013/04/05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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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에 영화를 두편 봤다. <남쪽으로 튀어>와 <더 헌트>.

 #1.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사회가 밀어내는 캐릭터들이다. <남쪽으로 튀어>의 최해갑은 국가로부터 그리고 자기가 대학시절 함께했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조차 불편해하는 캐릭터다. <더 헌트>에서 루카스는 유치원 교사인데, 친구 어린 딸의 거짓말로 인해 성추행범으로 몰리면서 동네의 절친들 대부분에게 비난을 받게 된다.

이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는 사실 별로 힘들지 않았다.(레미제라블 때와는 달리) 두 편의 영화 모두 나름 해피엔딩인 이유도 있다. 최해갑은 국가의 눈을 피해 달아난 채로 생활을 계속하고 루카스는 결국 자신의 누명을 벗는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해피엔딩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두 영화가 너무 개연성있는 현실을 보여줘서, 내 주변 그 누군가가 겪은 사건을 잘 풀어내면 이런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그 진영이 같건 다르건 원래 그 사람의 편이었건 아니었건 그 사람에게 일어난 위협 혹은 누명, 혹은 오명, 나쁜 평판이 불거지면 대체로 주인공을 등진다. 영화속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최해갑의 주변이 그렇고, 루카스의 친구들이 그랬다. 그 둘의 명약관화한 상황이, 어떤 대세랄까 혹은 지배적 정서에 소수의 올곧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묻히는 느낌이 강하다.
 


 #2.
하지만 나는 이 두편의 영화를 보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다. 그 사람 주변 소수의 사람들이 그의 진심을 헤아리고 실제적으로 도와주고 그들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극'소수다. 또한 대체로 어떤 진영을 대변하는 부류가 아니라 그를 인간적으로 잘 알고 아끼는 이들이다. 그들은 그의 오명에도 흔들림이 없다.

예전에는 오정현 목사같은 길을 걷게 될 때 나를 깨우쳐줄 냉정한 비판자들이 주변에 많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살아보니 내 진영 사람들의 냉정함 또한 공포스럽다. 패자부활전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도 언행 하나 흐트러지면 끝장이다.

지금은 좀 자유로워졌는데 한동안 나는 글쓰기에 조금 짓눌려 있었다. 반론을 예상하는 글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고나 할까. 때로 내 글은 지나치게 방어적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게다가 교계에서 신학자도 운동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 때문에 글 자체에 대한 열등감도 높았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옹호해야 할 시점에서 나는 머뭇거렸고 눈치를 봤다.
 
어느순간 이 모든 긴장감이 지겨워졌다. 내가 방어해야하는 논리의 치밀함이 사안을 둘러싼 사람들, 인격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 정작 내가 해야할 말들은 가려가며 해대고, 안 해도 될 말들을 만들어 내는 긴 시간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나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3.
 물론 지금도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회사에서도 그렇고. 페북에서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도 불편하고 페친이었다가 아닌 상태가 되는 사람들이 생겨도 불편하다. 어떤 이슈에 따라 진영이 나뉘거나 누군가를 옹호하면 그로 인해 호불호가 갈라지는 대목에서 특히 그렇다. 여전히 나는 신경이 쓰이고 글을 쓰고서도 후회가 될 때도 있다.

누군가의 반응에 신경을 쓰고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나의 '옳은' 생각, 나의 기호, 나의 삶의 태도를 대중에게 호소하고 싶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중의 지지와 칭찬에 대한 욕망이 어느정도 전제된 행위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진영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며 운동성을 얻고자 애쓴다.
 
하지만 당사자가 오명을 얻을 때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오명이 아니라 정말 잘못을 한 것이라면 더더욱이 재기가 쉽지 않다. 말실수 하나로도 텍스트 독해 자체를 못하는 비전문가가 될 수 있고 누군가를 옹호하다가 당신이 그럴 줄은 몰랐다며 순식간에 친구에서 친구-아님으로 변할 수 있다. 루카스는 하지도 않은 아동 성희롱으로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아는 친구에게 멱살을 잡힌다. 그게 정상적인 인생이고 삶이다.
 
나는 내 지지자가 많아지길 간절히 원하는 20대를 보냈다. 30대에는 20대의 구호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하게 좌절하고 주눅이 들었다. 지금은 그저... 거품을 빼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도 나는 여전히 눈치를 보는 내 모습을 전지적작가 시점으로 돌아본다.^^ 이 두 영화는 내 고질적 고민을 돌아보게 만든다. 지지자를 넓히는 삶은 위험하다. 그저 내 주변을 밝히는 삶이 더 유익하고 가치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2013/02/12 23:33 2013/02/12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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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 장발장, 혹은 레미제라블이라고도 하는 서바나 영상을 본 페친들이 무리에게 이르되 너희가 대선 이후에 이것을 보면 다 울리라 이는 기록된 바 너희 마음이 다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라

28 그러나 영상을 다본 후에도 멘붕이 쇠하지는 않으리라

29 제이언니가 대답하되 나는 마음이 돌같은 자라 절대 울지 아니하리이다

30 페친 중 하나가 이르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영화관이 밝아지기 전에 네가 세번 울리라

31 제이언니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성전환 수술을 할지언정 절대 울지 않겠나이다 하고 주위의 몇몇 마초 페친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14:66 주위가 어두워지고 제이언니는 썩소를 날리며 서바나 영상을 주시하는데

67 삼십분이 채 되기 전에 흐느낀지라

68 정신을 가다듬고 혼자말로 이르되 내가 왜 우는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69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울더라

70 스스로를 질책하며 심히 괴로워하며 다시 이르기를 내가 미쳤구나 이제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 하였으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물이 목젖을 타고 내려감을 깨닫더라

71 화면이 어두워져 아무 것도 안보이고 때로 길거리를 보여주는 영상에서조차 울되 이미 정줄을 놓은 후였더라

72 정신을 차리니 주변이 밝아지고 페친들이 자기에게 한 말 곧 네가 세번 울리라 함이 기억나서 그 일을 생각하고 또 울었더라

 

(레미제라복음 14장)

 

2013/01/29 22:12 2013/01/29 2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