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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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 영화도 스릴러도 아닌 이 영화. 하지만 보는 내내 긴장감과 불편함이 이어진다. 이윽고 기나긴 갈등 국면 끝에 앤드류의 신들린 드럼 연주가 울려 퍼지고, 연주가 끝나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자리를 뜰 수가 없는 압도감, 뒤이어 긴장했던 온몸으로 전달되는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해방감이 찾아온다. 

하지만 영화를 본 누구도 선뜻 이 영화가 '좋은' 영화였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무리 그래도 플렛처 선생이 너무 가혹하다', '결국 앤드류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 훌륭한 드러머가 됐으니 잘 된 것 아닌가', '앤드류의 성공 욕심에 버림받은 여자친구가 안 됐다', '꼭 뺨을 때려야 했나', '또 한 명의 찰리 파커가 되기 위해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살아야 하나' 등등 영화 전반에 걸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두 주연의 행보 때문에 몸(감성)이 반응한 마지막 10분의 감동을 머리(이성)가 눌러댄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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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플래쉬>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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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러티브를 복기해보면, 사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서로의 관계에서 처세라고 할 법한 우회적인 소통이 없다. 이 지점이 평소에 그렇게 남의 눈치를 살피며 사는 우리에게는 꽤 낯설다. 우리 대부분은 관계를 맺을 때 상대에 대한 배려를 통해 친분을 쌓고 관계가 깊어지는 동안 '그 정도면 좋아!'라고 말하며 발전해간다.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욕망을 표현하기 보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어떤 윤리적 판단이 선행해야만 어떤 사건과 어떤 관계를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플렛처 교수는 윤리적 하자가 많은 캐릭터다. 학생을 매번 극한으로 내몰고 실력 없는 이들에게는 모멸감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고 뺨을 때리기도 한다. 그의 교수법의 피해자로 보이는 제자의 죽음 앞에서도 현실을 외면한 채 제자의 연주만을 칭송한다. 

이런 욕망은 약자인 앤드류에게도 뚜렷하다. 플렛처에게는 일개 학생이지만, 플렛처가 밴드의 다른 드러머인 라이언이 아닌 자신을 인정해줄 때마다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다.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애써 사귄 여자 친구에게 '성공에 방해가 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매정한 말로 결별을 통보하기도 한다. 

극단으로 내몰린 앤드류는 결국 대회에서 연주를 못하게 되자 급기야 분노가 폭발하고 플렛처 교수에게 린치를 가한다. 나아가 플렛처 교수를 파면하기 위한 학생 증인 요청을 수락한다. 플렛처뿐 아니라 앤드류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에너지, 이기적인 감정의 표현들을 지켜보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 사회에서 매순간 그런 욕망을 꼭꼭 숨기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도 누구나 한 번쯤은 나보다 뛰어난 학생이 실수할 때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먼저 승진하는 동료가 미워지거나, 절친의 멋진 애인에 질투심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던가.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고 싶지만, 육아를 위해 포기하거나 부모나 배우자의 건강 문제로 꿈이 좌절됐을 때도 우리는 그 감정을 '어른스럽게' 숨겨야 했고 그에 더해 성공한 이들을 축하해 주거나 도와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매사에 너무도 쉽게 인륜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이 남자들은 뭐냔 말이다.

정글의 법칙, 경쟁의 긴장감 일깨운 또 다른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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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렛처는 학생들을 매번 극한으로 내몰고 실력이 없는 이들에게는 모멸감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고 뺨을 때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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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곳곳에서 앤드류에게 드럼의 의미가 각별하다는 것을 자주 보여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드럼에 재능이 있었고 대학에서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하는 노력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주말에 아들과 팝콘을 먹으며 옛날 영화를 보며 시간 보내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그가 편하고 무난한 삶을 살길 바란다. 사실 어머니가 없는 앤드류에게 아버지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고 해를 가하려는 거친 세상에서 몸을 던져 그를 보호해주는 존재, 그의 거친 훈련과 성취욕을 격려하기보다는 걱정하는 존재로서의 아버지는 정서적 모성의 상징이다. 어쩌면 어머니가 없는 앤드류에게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수컷의 냄새를 내기 시작한 이 아이는 열여덟 살의 나이에 경쟁이란 걸 체험한다. '더블타임 스윙'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엄밀하게 평가하는 매정한 선생을 경험한다. 정글의 법칙이 존재하고 그 정글의 법칙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고 채찍질(whiplash,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해주는 '남자 아버지'인 플렛처 선생. 

그는 모멸감을 주는 언행은 기본이고 의자를 집어던지거나 자신의 템포를 가르쳐 준다며 뺨을 사정없이 때리기도 한다. 그는 '그 정도면 됐어'라는 모성의 세상에서 알을 깨고 '찰리 파커'처럼 비상하고 싶은 순수한 욕망의 화신이다. 너의 재능을 증명하려면 그 정도로는 부족해, 더 빨리, 더 빨리. 

영화에서 '템포'로 대변되는 것은 다름 아닌 능력의 증명이다. 정글이 인정하는 플렛처, 그의 템포에 적합한 연주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그에게는 진정한 부성애이자 세상을 향한 비상이다(그런 의미에서 앤드류의 친부가 플렛처에게 가졌던 감정은 분노가 아닌 일종의 질투심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플렛처의 템포, 그리고 앤드류의 템포 

결국 이 긴박감 넘치는 두 사람의 갈등은 이 영화의 백미인 마지막 10분, 앤드류가 '자신의 템포'를 고집하며 둘 사이의 주도권이 뒤바뀌는 것으로 비춰진다. 그는 언제든 자신을 안아주고 감싸줄 아버지를 뒤로한 채 자신을 재즈 음악계에서 다시는 발 붙일 수 없게 만들려는 플렛처 술수를 알면서도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제 '그의 템포'가 무대를 압도한다. 혹자는 이것이 앤드류가 플렛처를 이겼다고, 플렛처의 템포를 파기하고 앤드류가 자신의 템포를 주도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때문에 이 영화를 청출어람, 제자의 복수극, 젊은 승부사의 비상이라는 코드로 읽어 마치 무협 영화의 전형적인 플롯을 대입하려고 하지만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마지막 장면의 진정한 감동은, 두 사람의 승부에 있다기 보다는 예술로 승화된 '찰나의 순간' 그 자체에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앤드류는 여전히 플렛처의 템포 안에 있다. 'CARAVAN'이라는 곡의 틀 안에서 앤드류는 자신의 즉흥 연주를 통해서 그의 템포, 자신의 재량을 발휘할 수 있다.

만약 그가 플렛처와 제대로 된 승부를 원했다면 찰리 파커처럼 조 존스를 뒤로한 채 돌아가 자신만의 화려한 데뷔를 꿈꿨을 것이다(그것이 플렛처와 앤드류가 그토록 신봉하는 재즈 신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앤드류는 플렛처의 템포로 돌아왔다. 도리어 플렛처의 밴드라는 제약 안에서 자신의 템포를 점유하려 한다. 이는 플렛처의 템포 아래에서 자신의 템포를 보여주려는 앤드류에게 있어 여전히 플렛처가 중요한 존재임을 반증한다. 그토록 미워하던 플렛처의 연주가 있는 재즈바를 서성이던 그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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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렛처 뿐만 아니라 앤드류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에너지, 이기적인 감정의 표현들을 지켜보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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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플렛처와 무관한 승부에는 관심이 없다. 정글의 세계를 열어준 '남자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는 그의 집요한 노력이 이 영화를 스릴러에 버금가는 긴장감을 조성해준다. 당신이 말한 바로 '그' 찰리 파커는 내가 되어야 한다. 보는 내내 우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이 내러티브의 말미가 극적인 감동을 가져다 주는 이유는 플렛처와 앤드류 두 사람 모두가 인정하고 공유한 연주의 절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학교에서 쫓겨나게 만든 제자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고 싶었던 이 냉정하고 잔인한 플렛처는 앤드류의 연주를 듣다가 어느 지점에서 자기의 목적도 잊어버린 채 그의 템포에 빠져든다. 앤드류는 또 어떤가. 뺨을 맞고 차 사고에 퇴학까지 당하게 만든 당사자가 다시 자신의 음악 인생을 종치게 만들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주에 몰입하다가 어느 순간 그의 템포에 자신의 템포를 맞춘다. 서로의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의 연주에 플렛처가 미소를 보낸다. 앤드류도 마치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다. '이 남자들, 좀 모자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이런 경험은 남 일이 아니다. 대가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종종 겪는다. 밤 새워 선배와 야근을 하면서 마친 일이 회사에서 채택되는 순간, 무명 가수가 신곡을 만들어 리허설 끝에 연주자, 엔지니어와 제대로 녹음을 마친 순간, 하다 못해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아이와 입을 맞춰 자장가를 함께 부르는 순간에도 이런 '찰나의 상승' 경험은 존재한다. 

그 경험이 힘들거나 인간 관계마저 어긋날 때 도리어 그 찰나의 시간이 빛나는, 다소 씁쓸한 인생의 진실이 이 영화에 담겨있기 때문일까. 사실 살면서 자주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그 정도면 됐어'가 아니라 '바로 그거야'를 말해줄 누군가를 열망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복잡하고 불안한 관계를 넘어선 '결정적 템포'의 미학이,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 아닐까.


*기사 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91731
2015/03/25 20:40 2015/03/2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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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제시장을 봤다.
극장에서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권해서 봤다. 참고로 아버지는 평생에 내게 뭘 하라고 압력을 준 적이 별로 없었기에. 가족과 함께 보러가라고 했지만 가족 대표로 나만 봤다.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몇몇 장면에서는 눈물을 쏟았다.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은 소년의 죄책감. 그리고 네가 이제 가장이니 가족을 보살피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평생 한 소년의 어깨를 짓눌렀으리라는 부분이 그러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많은 아버지세대의 평범한 가장들이 부모나 가족을 잃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전쟁 후의 비정상적인 삶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국제시장은 그런 평범한 한국의 아버지세대의 미시사를 관통하고 있다.논객 허지웅으로 인해 이슈가 됐던 대목 "이 어려운 시대를 내 자식들이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부분도 맥락에서 충분히 공감이 갔다. 주인공은 가족에 헌신적이어야 하는 자신의 삶을 팔자처럼 받아들이고 아내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 아들이 겪는 것보다 낫지 않냐라고 위로하는 맥락의 말이었다.

정작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준엄하게 가오잡고 훈계하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처럼. 그저 뜬금없이 욕을 하거나 대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뒷걸음질친다. 그런 디테일들이 잘 살아있다고 생각했다.


#2.
하지만 정작 이 영화를 대작의 반열에 놓을 수 없는 부분은 논란이 된 세대 갈등이나 보수-진보갈등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겐. 이 영화의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영화가 IT기기로 치자면 '샤오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플 짝퉁.

영화가 끝날 때 나는 이 영화가 <포레스트 검프>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국판이란 비평만 남았다. 백인이 입어서 사랑받은 옷을 아시아인에게도 입혀본 느낌. 뭐 옷이 좋으면 아시아인도 멋져보이는 그런 느낌. 깃털이 나비가 되고 존 레논이 남진이 되고, 애플이 현대건설로, 이만기로 대체되고 마지막에 아버지를 떠올리며 우는 장면은 라이언 일병이 죽은 상사의 무덤 앞에서 우는 장면과 정확하게 교차했다.

흥행을 위해 영화도 흥행을 담보하는 규칙을 세워서 공용가능한 플랫폼을 짜고 모듈을 만들어서 한국인의 컨텐츠에도 옷처럼 영화를 입히는구나. 게다가 그게 대중에게 먹히기까지 하는구나. 뭐 이런 생각 때문에 진영논쟁, 세대논쟁에는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건 예술인가 상품인가. 어쨌든 짝퉁도 많이 팔리면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씁쓸함이 흘린 눈물을 무색하게 만든다.
2015/02/21 19:56 2015/02/2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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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her.
사람들은 이 영화를 두고 인간의 근본적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솔직히 나는 os의 관계성, 좀더 구체적으로는 '연인가능성'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그 무엇을 읽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상 요즘의 우리는 대체로 페북이나 팟캐스트를 켜놓고는 물리적으로 혼자서 무언가를 할 때가 많다. 정서적으로 외롭지 않은 상태, 즉 사이버 관계망 안에서 우리는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사실은 혼자이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왜냐면 지금도 500명의 페친이 내 주변에서 재잘거리고 있고, 실시간으로 댓글도 달아주고 있으며 팟캐스트의 수다를 통해 고립된 방 한 구석에서도 적적하지 않은 느낌과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만 의미를 두고 나에게만 집중하고 내가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타자가 항시 곁에 있다면 어떨까. 내 여친이나 내 아내조차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나에게 무언가(사랑, 헌신)를 요구하거나 매사에 내 의도를 캐묻거나 애정을 확인받으려는 부담도 없다. 마치  '우쭈쭈'로 대변되는 유년기의 어머니상과 헌신적 이성상, 그리고 사무실 비서의 혼합체 같은 존재. 

사실 지금도 os는 현대인의 구석구석을 알 수 있는 가장 긴밀한 존재다. 내 인맥, 내 취미, 음식이나 옷과 같은 소비 기호, 내 작업 내용들에서부터, 사생활, 그 은밀한 욕망까지도 모두 디지털 코드로 내 pc안에 머문다. 나조차도 잊어버린 많은 data와 history들을 단 몇 초만에 검색을 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나와 교감할 수 있다.

그런 os가 '스마트(폰)'를 넘어 '인텔리전트(os)'의 단계로 넘어간다면 그 os는 내 가장 깊은 절친이 될 수도 있고 나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이성(애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her'는 나름 이상적인 파트너다.

이 영화에서는 애석하게도, os가 수많은 이들과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어느순간에는 os가 사라져 버리지만, 현실세계에서 가까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언제든 복구가 가능한 이른바 '인텔리전트 os'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과거 '심심이'이와 농담따먹기를 하던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친밀한 타자(엄마+애인+비서)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수많은 온라인 페친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밀린 일거리를 갖고 혼자 집에 있다고 팟캐스트를 왁자지껄하게 틀어놓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성에게 대시했다가 퇴짜맞을 걱정도 없고 사귀다 헤어지거나 이혼, 파경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 관계 단절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언젠가는, 24시간 나만을 바라보며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나'를 주제로 한 대화가 끊기지 않을, 하지만 정작 내가 원하지 않을 때는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며 대기해주는 이상적인 타자, 대상을 얻게 될 지도 모르겠다.

'her'를 보면서, 난... 그게 가능하게 될 수 있겠다는 무섭고도 놀라운 미래를 봤다.
2014/06/15 14:52 2014/06/1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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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올해의 영화> - 나도 숟가락을 얹어봤음.^^

 

 

더 테러 라이브
- 속도도 좋고 내용도 간명하고

 

 그래비티
- 인생, 뭐 있어. 카르페 디엠!

 

A Late Quartet (마지막 4중주)
- 은퇴는 이렇게...라고 생각함

 

 라이프 오브 파이
- 이안 감독은 최고의 거장이라 생각함.

 

서칭포 슈가맨
- 슈가맨.ㅠㅠㅠㅠ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우리 선희
- 올해는 홍상수 감독 적극적 긍정의 해

 

Metallica: Through the never
- 공연장에서도 누릴 수 없을 듯한 광경

 

 로마 위드 러브/ 블루 재스민
- 우디 알렌의 영화는 양잿물을 섞어도..ㅋ

 

 일대종사
- 양가위 영화를 보러갔다가 양조위가 아닌 장쯔이에 꽂힘

 

The Master
- 호야킨 피닉스의 재발견.

 

비포 미드나잇
- 3부작의 완성. 현실적 디테일에 몰입..

 

연애의 온도
- 김민희는 이래서 인기가 있군

 

 더 헌트
-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았던..

 

레 미제라블
- 대선 패배의 슬픔 힐링 영화였음.

 

원데이
- 앤 해서웨이의 약진, 그리고 이상적 연애상.

 

문라이즈 킹덤
-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성장 영화

 

 맨 오브 스틸
- 상상 속 수퍼맨이 드디어 육화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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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영화평>

 

-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3916

 

- 서칭포 슈가맨: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4442

 

- 비포 미드나잇: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73025

2014/01/30 23:44 2014/01/30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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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저런 영상이 가능한 시대를 살게 된 것이 행복하단 생각을 잠시 했다. 우리나라도 은근 헐리우드 키드가 많고 70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적어도 부모세대와는 다른 어떤 유년시절의 '기호품들'을 가질 여유가 있었다.

내 중딩 고딩시절 반항의 아이콘은 단연 메탈리카였다. 본 조비나 스키드로(1집 기준), 스틸 하트 같은 음악을 듣던 친구들과는 구별된 '레벨'을 자랑하던 우리는 딥 퍼플이나 레인보우 등 ...록의 클래식에 꽂혀 있었고 당시 밴드로는 단연 메탈리카를 들어야 서로의 수준을 인증해줬다.ㅋㅋㅋㅋ (생각해보면 교계 논객들 아는 학자들 자랑하는 것과 좀 비슷한 면이 없지 않다...^^)

암튼,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생들에게는 너바나, 커트 코베인이 하나의 전설이겠지만 그보다 조금 앞선 나에게는 역시... 메탈리카가 추억의 밴드가 아닐 수 없다.

<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꼈다면 오늘 <메탈리카 쓰루 더 네버>는 거의 눈이 튀어나올 수준이었다. 3D IMAX를 위한 공연.ㅠㅠㅠㅠ 이건 뭐... 내한공연을 본다해도 어지간한 자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퀄리티. 덕분에 영어시험은 지각할 뻔 했지만 시험을 못봤어도 전혀 아쉽지 않았을 시간... 엉엉엉.

단언컨데,
메탈리카 쓰루 더 네버... 3D IMAX 관람은, 현대 기술의 진보와 공연의 진수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일 겁니다. 영화 내리기 전에 극장에서 관람하시길. ㅠㅠㅠㅠ (그래비티...는 쳇, 쫌 우습다. 흥피치...)

 

 

2013/12/02 23:43 2013/12/0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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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앤 더 시티> 중 기억에 남는 한 장면.

미하일 바르시니코프가 캐리의 남친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 남자는 예술가이면서 자아가 강한 사람이다. 결국 캐리와 헤어지게 되는데 연애하는 내내 그는 자기 중심적으로 관계를 끌고 간다.

...이 얘길 하려던 건 아니고.

그가 오랜만에 전시회를 열게 되는데 관객과 평론가들의 반응이 은근히 걱정된다. 항상 자신만만하지만 애인인 캐리가 가까이에서 볼 때 이 남자도 평가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전시회장에 들어가기 직전 그는 캐리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힘이 되어달라고. 캐리는 자신의 모임도 취소하고 그의 손을 잡고 전시회장 안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누군가가 바르시니코프를 발견하고 멈칫 선다. 어떤 반응일까 긴장되는 순간 그는 천천히 바르시니코프를 향해 찬사의 박수를 치고 대가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의 천재성에 박수를 보낸다.

걱정했던 그의 표정은 이내 밝하지고. 그는 언제 사람들의 평가를 걱정했냐는 듯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캐리와 잡았던 손을 놓고는 박수치는 군중들 속으로 들어간다. '대가'를 위한 파티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이 장면만큼, 창작을 하는 인간이 대중을, 비평을 대하는 태도, 그 욕망을 잘 드러낸 묘사는 없다고 느꼈다. 어린 시절에 뭔가를 만들고나서 친구나 부모, 선생님의 반응을 살피고, 그 잠시잠간의 긴장감 이후에 반응이 좋으면 우헤헤헤 거리는 태도가... 나이가 들어도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가끔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어떤 순간 이게 무슨 글이야... 조졌다...라는 생각에 원고를 보내기를 주저한다. 예전엔 가까운 지인들에게 먼저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기도 했고 결혼해서는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은근 눈치를 살핀다. 아내의 미간이 찡그려지면 "아놔.. 나 다시 쓸라그랬어!!!"라고 먼저 막 오바한다.

그렇게 마감에 등떠밀리듯 보낸 원고가 어딘가에 공개되고, 의외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면 내 태도는 급 돌변한다. 겉으론 무표정하게 있지만 내심 촐랑거리고 싶은 것이다. 가끔 아내에게 사람들의 반응을 홍보하며 음하하하...거리며 놀기도 한다. (아내랑 종종 이러고 자주 논다..ㅋㅋ)

늙어도 철들지 않는.. 어떤 뛰어나고픈 존재감. 칭찬받으면 우쭐거리고픈 속내. 순식간에 뒤바뀌는 '소심함의 극치'와 '자만의 극단' 사이를 포착하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이 장면이 자주 떠오른다. 이런 게 폭로되는 내러티브가 참 좋다. 부족함, 허물을 고백하면서도 유쾌하게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어서 좋다.

땡큐, 미하일 바르시니코프 옵바.
2013/09/13 23:25 2013/09/13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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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 독설과 냉소로 재무장하길...
[리뷰] 셰인 블랙 감독의 <아이언맨3>

 

 

영화 <아이언맨3>를 봤다. 블록버스터치곤 그냥 무난한 영화였다. 3D로 봤다면 후회했을 것 같고, 처음으로 경험한 비트박스(veatbox)석은 그냥 고장난 의자 같았다. 간간이 울리는 잔진동 때문에 중간중간 엉덩이만 가려웠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니 각설하고.)

 

알다시피 미국의 수퍼히어로들은 대중을 사로잡는 각각의 이슈들이 있다. 이슈라기보단 매력 포인트, 주인공에게 빠져들게 만드는 어떤 지점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번 아이언맨은 좀 무난하지 않았나 싶다. 수퍼히어로의 매력포인트라고 하니 좀 추상적으로 들릴 것 같아 조금 설명하자면 이렇다.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에게 그것(이슈)은 다름아닌 '복수'다. 길거리에서 악당의 총에 죽은 부모에 대한 사적 복수심을 승화시키는 캐릭터다. 백만장자에 첨단 무기로 '칠갑'을 했지만 고아 특유의 외로움, 고독이 느껴진다. 특히 여성과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부족함 없는 그의 '소유'가 아니라 그 특정한 '결핍'이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빛낸다.

 

스파이더맨에게 그것은 '후회'다. 그는 자신을 키워주고 사랑해준 삼촌 벤의 애정어린 충고를 외면한 것에 대한 사과할 틈도 없이 삼촌은 죽음을 맞는다. 게다가 그를 죽인 악당은 피터 자신이 윤리적으로 방기한 혹은 도망을 눈감아준 자였기에, 씻지못할 후회로 그 멘탈 전체가 얼룩진다. 어린 피터는 그 후회감에 시달리게 되어, 밤마다 경찰들의 수신주파수를 엿들으며 삼촌 벤에게 용서를 빌기 위한(속죄를 목적으로한) 악당 사냥에 나선다. 게다가 그의 남루한 일상은 수퍼히어로의 새로운 개연성을 창조해낸다. (다른 수퍼히어로들과 달리 여전이 젊은 피터의 풋풋한 사랑도 하나의 포인트이긴 하다.)

 

오늘의 주인공인 토니 스타크. 개인적으로 아이언맨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기에 가능한 영화라고 본다. 배우의 삶, 마약중독에서 벗어나려던 노력들, 재기, 그리고 지금의 또다른 성공은 토니 스타크에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우라를 입혔다. 그런 이유에서 아이언맨에게 그것은 '반성'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토니 스타크에게 전가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반성이다. 1~3편의 현란한 금속 머신들의 부서짐과 새로운 플롯들 아래에서 마치 베이스 연주처럼 흐르는 건 '나는 과거에 망나니였고 지금은 정신을 차렸다. 나는 달라졌다'는 메시지다. 특히 그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가능케하는 페퍼(기네스 펠트로)는 반성과 새 삶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하지만 삶의 방향성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의 오랜 습속, 말투, 행동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깊이를 알았다고 한들 토니는 여전히 부자이고 까칠하다. 중요한 순간마다 그는 휴머니즘적인 가치관을 내비치지만, 여전히 그의 배경은 친정부적이면서도 보수적인 스탠스를 유지하며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잔혹할 정도의 승부기질을 발휘한다. 흥미롭게도 그런 그의 캐릭터가 나름 묘한 매력을 불러 일으킨다. 그의 반성적 삶의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냉소적이면서도 까칠한 말투와 행동, 백만장자 특유의 여유와 유머가, 정작 내가 생각하는 수퍼히어로 아이언맨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하겠다. (이건 여담인데 나는 개과천선했다고 자평하는 이들의 행실이 변화된 것에 의심을 하곤한다. 행실에 치중하는 '천선'은 다분히 형식적일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3편은 너무 무거웠다. 혹은 답지 않게 진지했다고나 할까. 타국의 테러가 아닌,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는 <어벤저스>에서도 토니의 재치있는, 냉소 가득한 입담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독설처럼 말을 내뱉지만 주위를 웃기고 결국 상대와 악수를 하게 되는 묘한, 나쁜 습관이 있다. 그런 상황들이 토니를 토니로 만드는 진면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엔 그런 모습이 별로 없었다. 하다못해 엔딩크레딧 이후에 숨겨진 서비스컷에서조차 (여기서 토니는 심리상담을 받는다) 토니는 토니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중심을 주인공의 냉소 따위에 둔다는 비약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우스꽝스러운 수트에 얼굴만 빼꼼히 내밀었을 때 전혀 우습거나 유치하지 않았던 건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토니 스타크는 다시 온다'는 워딩으로 영화가 끝나던데 다시 올 땐 물량을 키워서 오지 않아도 좋다. 아이언맨 특유의 독설과 냉소를 제대로 탑재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내 생각은 그러하다.

 

 

*기사 원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9604

2013/04/29 00:51 2013/04/29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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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10기의 주제는 '떡볶이, 다문화가정 그리고 여자경찰 오순경'이다.
 
악당들은 도시의 유명 떡볶이집을 폭파하여 아이들을 혼란에 빠뜨릴 계획을 세운다. 하나와 두리(또봇 파일럿)는 도시를 벗어나 교외로 이사를 가게되고 거기에서 만난 남자아이와 여동생과 친구가 된다.
 
이사간 동네 떡볶이집을 운영하는 아줌마는 베트남 사람인데 특이한 떡볶이맛에 아이들은 그집을 선호하지만 베트남말을 흉내내며 그 아줌마를 놀려대는데 알고보니 그녀는 새로 사귄 남자아이의 새엄마이자 여자아이의 친엄마였고 그 일로 아이들은 심하게 싸운다.
 
남성중심 공간인 경찰서에서 오순경은 어리버리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자상하고 모성애가 강한 그녀는 정작 중요한 순간에 또봇을 돕는 핵심 인물이다. 또봇을 만든 두 남자 리모와 도운은 오순경의 부서진 자동차를 수리하다가 경찰차 또봇을 새로 만드는데 오순경의 어리버리함을 걱정하는 리모와는 달리 도운은 그녀의 천성적인 선함을 높이 평가한다. (또봇의 모든 주제의식은 도운을 통해 드러난다)
 
나는 거대담론적 애니메이션들의 비판으로서 에반게리온이나 공각기동대처럼 또봇 시리즈도 하나의 멋진 애니로 평가한다. 게다가 또봇은 재패니메이션 특유의 가오잡는 모습이 없다. (인류보완계획이니 하는 일반인은 이해조차 못할 거대한 음모는 없고 악당들은 10살짜리 애들도 다 파악할 수 있는 사사로운 계획만이 넘쳐난다)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건 기껏해야 떡볶이집, 만화방, 식당 등 그들의 일상 공간이다.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한부모가정, 가출 청소년, 장애인, 다문화가정, 말단 경찰 등 사회적 약자다. 그들에게 주어진 또봇이라는 기계도 처음 설계를 한 도운이 정서적 지지를 통해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개념으로 개발된 존재다.
 
9기 엄마의 자장가를 보다가 눈물을 훔쳤던 나는 이번 10기도 촉촉히 젖어드는 마음으로 봤다. 물론 경찰차 또봇이 너무 변신을 늦게해서 성하는 좀 지루해하더라만 .-_-;;;;;;

 

주말 감상기 끝.

2013/04/16 23:01 2013/04/16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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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귀환... '슈가맨'의 투어소식이 반갑다
[리뷰]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을 보다

 

/김용주

 

서칭 포 슈가맨을 보다!

극장에서 보는 건 끝내 놓쳤던 <서칭 포 슈가맨>. 아카데미 수상 소식을 듣고서야 황급히 '챙겨서' 보았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수작이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슈가맨, 식스토 로드리게즈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묘미는 뮤지션으로 실패하고 평범한 노동자의 삶을 살던 한 사람이 알고보니 남아공에서는 비틀즈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그의 반응에 있다. 남아공의 많은 이들에게 전설로만 여겨졌던 수퍼스타 슈가맨, 로드리게즈가 사실은 버젓이 살아있었고 그에 더해 남아공에서 콘서트를 열게된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수많은 팬들 뿐 아니라 당사자인 로드리게즈 자신도 흥분한다.

로드리게즈는 오랜 시간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팬들의 존재를 듣고 다소 당황스러워하지만 정작 공연장에 나타나서는 마치 그동안 계속 공연을 해오던 사람처럼 침착하고 평온한 모습의 공연을 보여준다.

 

'헐리우드 문법'과 차별화된 이 영화의 주인공 슈가맨은, 남아공 음악계의 전설이 되고 각종 차트를 석권하고 매니저가 생기고 차기 음반과 월드 투어를 개최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그저, 공연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노동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더 윤택한 삶을 살거나 더 음악적인 고민을 하며 창작욕을 불태우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습관, 문법을 밟지 않는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시종일관 슈가맨, 바로 자신이다.

 

그는 어떻게 젊은 시절에 그런 탁월한 가사를 쓰고 노래를 했고, 그의 음악인생이 실패하고 나서도 사회의 가장 낮은 계급의 삶을 살면서 영혼의 고결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갑작스런 성공에 매몰되지 않고 미친듯한 함성과 환호를 뒤로한채 돌아와서 다시 일상에 만족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사람들이 전율하는 그 인격의 무서움이다.

 

로드리게즈는 무서운 사람이다. 내면이 참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그는 갑작스런 환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고고함, 겸손함을 굳이 표현하거나 강조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왕자가 된 기분'이라며 해맑게 웃었던 그는 사실 평범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그를 인간적으로 더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단 90분만에, 나는 슈가맨을 사랑하게 됐다.

 

 

'전설의 귀환', 그의 2013년 투어 소식을 듣고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인터넷을 뒤져본 결과 그는 올해들어 활발한 활동에 들어갔다. 이 영화가 나온 작년 즈음부터 방송이나 공연장에 게스트로 출연하더니 올해부터는 본격적인 투어에 들어갔다. 전설적인 남아공 콘서트인 <Dead men don't Tour>가 1998년에 있었으니 그가 '발견'되고 무대에 선 지 15년만이다.

 

1998년 공연 이후 그는 다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간간이 방송에 출연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음악을 다시 한 건 15년만이다. 그의 늦은 공연은 나에게 다른 묵상을 가져다준다. 짐작컨데 15년전 대중의 호출은 그의 '과거'의 재연, 재현을 기대했기에 그는 그 공연 외에 더 보여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 환호와 갈채, 많은 접촉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상으로 돌아간 건 그가 음악인으로 들려줄 이야기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음악을 사랑해준 이들에게 들려줄 무언가가 생겼기 때문을 아닐까.

 

그는 올해로 72세가 된다. 어쩌면 13년 투어 콘서트는, 자신의 음악 인생을 정리할 의도일 수도 있겠다. 뮤지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혹은 확인받으려는, 혹은 '선언'하려는 행보일수도 있겠다.

 

1998년 남아공 공연 이후, 그의 지난 15년은 어땠을까. 나는 그의 허름한 집 앞을 서성이는 상상을 자주 해본다. 사실, 내 짐작이 어떻건 상관은 없다. 어떤 의도에서건 그의 인생 후반 음악 여정을 축복한다. 혹자의 말마따나, 한국에도 와주었으면 좋겠다. 내 평생, 칠순의 나이에 이렇게 설레는 음악인이 또 있을까 싶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4442

2013/04/05 00:47 2013/04/05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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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초들이 왜 안 밉지? 환장할 노릇
홍상수 감독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김용주


홍상수 감독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봤다. 영화는 재밌었다. 이선균은 원래 좋아하는 배우고 정은채라는 여배우는 원래 모르던 배우였다. 그런데 영화 속 그녀의 얼굴에서 시종일관 빛이 났다. 누구지? 정유미 이후로 기대되는 배우급이었다고나 할까. 영화는 삼일절 조조로 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찜찜했다. 왜였을까.

 

한때 나는 홍상수를 싫어했다. 7년쯤 전에 쓴 글을 보니 나는 홍상수가 이래서 싫었단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인간사(人間事)를 미시적으로 파헤치는 그의 시각은, 영화를 보는 내내 현미경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본 후 그것을 여과 없이 스크린에 담아낸 듯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신선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관이 싫다. 아니, 그의 세계관이 싫다. 그에겐 모든 것이 형이하학적이다. 영화의 주제의식은 거칠게 표현하자면,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정도랄까. 영화 속 인물이 교수이건 학생이건, 어떤 사회에 어떤 시대에 몸담고 있건, 결국 사람은 직장을 얻어 먹고 사는 문제, 남녀관계에서의 육체적 사랑, 질투심 따위만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귀결된다.

 

이는, 마치 모든 생물들과 온 세상의 물질들이 결국에는 원자와 분자들의 운동으로 귀결된다는 환원주의적 시각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인간은 태생적으로 원초적인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먹고 사는 문제, 남녀 간의 사랑, 질투심, 돈, 집, 직장.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결국 이것들은 실제로 우리 삶의 큰 영역을 차지하는 부분이며,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하찮게 여기지만 무의식 속에는 사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역임을 홍상수의 현미경 같은 카메라는 꼬집어 드러낸다. 사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본질적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과 함께."

 

지금은 그때처럼 홍상수의 작품에 비판적이지는 않다. 그동안 그의 영화를 보는 내 시각이 많이 달라졌고, 또 그의 최근 몇 년간 작품들도 완성도나 스타일 자체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 즈음 문득 이 영화가 찜찜한 이유를 알았다.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인 '정은채'라는 배우를 검색하다가 그녀가 영화에서 설정처럼 영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화에서 그녀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아 다른 학생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래서 따돌림을 당한다. 그런데 또래집단에서는 불편한 캐릭터인 그녀가 중년 남성들의 눈에는 정말 통통 튀고 매력적이다.

 

젊은 여대생인데다가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다. 게다가 이국적으로 생겼는데 외국생활을 오래해서 문화적으로도 외국 느낌이 난다. 게다가 또래 집단과 거리감도 있다. 친구들에겐 '악마'같은(해원은 자기를 악마라고 말한다) 존재지만 지도 교수, 주변 아저씨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그런 여대생과 남자교수의 불륜이라니. 
 

두 사람과 그들을 둘러싼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흥미를 자극하고 교수들의 위선과 학생들의 시선, 행인처럼 지나가는 인물들을 통해 반복되는 행동들이 영화를 맛깔나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이 영화의 원초적 몸뚱아리는 중년 남성들의 판타지, 여신같은 여대생 '해원'이다.

 

사실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정작 중년 마초들은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여성들에게도 호소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나는 그 이유를 그가 '패를 보여주는' 영화를 찍기 때문이라고 본다. 홍상수의 내러티브는 마초적인데 그 내러티브의 디테일이 정작 마초들을 까발리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속 남자들은 다 속물스럽다. 그런데도 영화 속 남자들이 그리 밉지가 않다. 환장할 노릇이다.

 

사실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는 내 감정이 분열되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큰 틀에서 그의 영화는 페미니즘적 입장을 취할 때 반대할 만한 요소들이 많다. 그의 영화에서 여성의 역할은 항상 남자가 같이 자고 싶어하는 대상으로서 '성적인 요소'만을 함의한다. 사실 그는 그것을 까발리고 싶어한다. 영화 속 남자들은 뭐 대단한 얘기들을 하고 예술을 논하는 것 같지만 개나 소나 할 것 없이 어리고 예쁜 여자들의 꽁무니나 쫓아다닌다. 사실 우리가 그러지 않냐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굵은 선에서 보면 그의 영화가 싫다. 그런데 자꾸 영화 속 '그들'의 일상이 궁금해진다. 그 다음 상황에 빠져든다. 불륜을 행하는 교수는 자기 제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가정을 버리지도 못하는 한심한 인생이다. 영화에서 7년째 불륜관계를 갖는 또다른 커플(유준상/예지원)은 티격태격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한다. 남자는 죽어마땅한 유부남이 아니라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불쌍한 아저씨다. 너무 적나라한 의도들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드러나서, 보는 나도 막 '그들'이 걱정스럽다.

 

여주인공 해원은 이 관계가 지긋지긋해서 끝내려고 결단하지만 또다시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보며 힘들어하다가 영화는 끝난다. 매번 그렇듯 홍상수의 영화는 기승전결도 없고 클라이맥스도 없다. 더 미치겠는 건, 뭐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없는데 영화는 재밌게 보게 되더라는 거다. 도대체 이건 뭐란 말인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소재를 가지고도 이렇게 내 '동정(?)'을 이끌어낼 수 있단 말이냐. 아저씨들의 판타지 같은 이런 영화를 보며 즐거워해도 되는 건가. 뭐 이런 생각이 계속 든다. 하여간, 참 안쓰러운 매력이 있는 영화다.

2013/04/05 00:46 2013/04/05 0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