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영화도 스릴러도 아닌 이 영화. 하지만 보는 내내 긴장감과 불편함이 이어진다. 이윽고 기나긴 갈등 국면 끝에 앤드류의 신들린 드럼 연주가 울려 퍼지고, 연주가 끝나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자리를 뜰 수가 없는 압도감, 뒤이어 긴장했던 온몸으로 전달되는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해방감이 찾아온다.
하지만 영화를 본 누구도 선뜻 이 영화가 '좋은' 영화였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무리 그래도 플렛처 선생이 너무 가혹하다', '결국 앤드류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 훌륭한 드러머가 됐으니 잘 된 것 아닌가', '앤드류의 성공 욕심에 버림받은 여자친구가 안 됐다', '꼭 뺨을 때려야 했나', '또 한 명의 찰리 파커가 되기 위해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살아야 하나' 등등 영화 전반에 걸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두 주연의 행보 때문에 몸(감성)이 반응한 마지막 10분의 감동을 머리(이성)가 눌러댄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
▲ <위플래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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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욕망을 표현하기 보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어떤 윤리적 판단이 선행해야만 어떤 사건과 어떤 관계를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플렛처 교수는 윤리적 하자가 많은 캐릭터다. 학생을 매번 극한으로 내몰고 실력 없는 이들에게는 모멸감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고 뺨을 때리기도 한다. 그의 교수법의 피해자로 보이는 제자의 죽음 앞에서도 현실을 외면한 채 제자의 연주만을 칭송한다.
이런 욕망은 약자인 앤드류에게도 뚜렷하다. 플렛처에게는 일개 학생이지만, 플렛처가 밴드의 다른 드러머인 라이언이 아닌 자신을 인정해줄 때마다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다.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애써 사귄 여자 친구에게 '성공에 방해가 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매정한 말로 결별을 통보하기도 한다.
극단으로 내몰린 앤드류는 결국 대회에서 연주를 못하게 되자 급기야 분노가 폭발하고 플렛처 교수에게 린치를 가한다. 나아가 플렛처 교수를 파면하기 위한 학생 증인 요청을 수락한다. 플렛처뿐 아니라 앤드류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에너지, 이기적인 감정의 표현들을 지켜보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 사회에서 매순간 그런 욕망을 꼭꼭 숨기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도 누구나 한 번쯤은 나보다 뛰어난 학생이 실수할 때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먼저 승진하는 동료가 미워지거나, 절친의 멋진 애인에 질투심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던가.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고 싶지만, 육아를 위해 포기하거나 부모나 배우자의 건강 문제로 꿈이 좌절됐을 때도 우리는 그 감정을 '어른스럽게' 숨겨야 했고 그에 더해 성공한 이들을 축하해 주거나 도와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매사에 너무도 쉽게 인륜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이 남자들은 뭐냔 말이다.
정글의 법칙, 경쟁의 긴장감 일깨운 또 다른 아버지
▲ 플렛처는 학생들을 매번 극한으로 내몰고 실력이 없는 이들에게는 모멸감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고 뺨을 때리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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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곳곳에서 앤드류에게 드럼의 의미가 각별하다는 것을 자주 보여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드럼에 재능이 있었고 대학에서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하는 노력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주말에 아들과 팝콘을 먹으며 옛날 영화를 보며 시간 보내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그가 편하고 무난한 삶을 살길 바란다. 사실 어머니가 없는 앤드류에게 아버지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고 해를 가하려는 거친 세상에서 몸을 던져 그를 보호해주는 존재, 그의 거친 훈련과 성취욕을 격려하기보다는 걱정하는 존재로서의 아버지는 정서적 모성의 상징이다. 어쩌면 어머니가 없는 앤드류에게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수컷의 냄새를 내기 시작한 이 아이는 열여덟 살의 나이에 경쟁이란 걸 체험한다. '더블타임 스윙'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엄밀하게 평가하는 매정한 선생을 경험한다. 정글의 법칙이 존재하고 그 정글의 법칙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고 채찍질(whiplash,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해주는 '남자 아버지'인 플렛처 선생.
그는 모멸감을 주는 언행은 기본이고 의자를 집어던지거나 자신의 템포를 가르쳐 준다며 뺨을 사정없이 때리기도 한다. 그는 '그 정도면 됐어'라는 모성의 세상에서 알을 깨고 '찰리 파커'처럼 비상하고 싶은 순수한 욕망의 화신이다. 너의 재능을 증명하려면 그 정도로는 부족해, 더 빨리, 더 빨리.
영화에서 '템포'로 대변되는 것은 다름 아닌 능력의 증명이다. 정글이 인정하는 플렛처, 그의 템포에 적합한 연주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그에게는 진정한 부성애이자 세상을 향한 비상이다(그런 의미에서 앤드류의 친부가 플렛처에게 가졌던 감정은 분노가 아닌 일종의 질투심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플렛처의 템포, 그리고 앤드류의 템포
결국 이 긴박감 넘치는 두 사람의 갈등은 이 영화의 백미인 마지막 10분, 앤드류가 '자신의 템포'를 고집하며 둘 사이의 주도권이 뒤바뀌는 것으로 비춰진다. 그는 언제든 자신을 안아주고 감싸줄 아버지를 뒤로한 채 자신을 재즈 음악계에서 다시는 발 붙일 수 없게 만들려는 플렛처 술수를 알면서도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제 '그의 템포'가 무대를 압도한다. 혹자는 이것이 앤드류가 플렛처를 이겼다고, 플렛처의 템포를 파기하고 앤드류가 자신의 템포를 주도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때문에 이 영화를 청출어람, 제자의 복수극, 젊은 승부사의 비상이라는 코드로 읽어 마치 무협 영화의 전형적인 플롯을 대입하려고 하지만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마지막 장면의 진정한 감동은, 두 사람의 승부에 있다기 보다는 예술로 승화된 '찰나의 순간' 그 자체에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앤드류는 여전히 플렛처의 템포 안에 있다. 'CARAVAN'이라는 곡의 틀 안에서 앤드류는 자신의 즉흥 연주를 통해서 그의 템포, 자신의 재량을 발휘할 수 있다.
만약 그가 플렛처와 제대로 된 승부를 원했다면 찰리 파커처럼 조 존스를 뒤로한 채 돌아가 자신만의 화려한 데뷔를 꿈꿨을 것이다(그것이 플렛처와 앤드류가 그토록 신봉하는 재즈 신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앤드류는 플렛처의 템포로 돌아왔다. 도리어 플렛처의 밴드라는 제약 안에서 자신의 템포를 점유하려 한다. 이는 플렛처의 템포 아래에서 자신의 템포를 보여주려는 앤드류에게 있어 여전히 플렛처가 중요한 존재임을 반증한다. 그토록 미워하던 플렛처의 연주가 있는 재즈바를 서성이던 그가 아니던가.
▲ 플렛처 뿐만 아니라 앤드류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에너지, 이기적인 감정의 표현들을 지켜보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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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플렛처와 무관한 승부에는 관심이 없다. 정글의 세계를 열어준 '남자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는 그의 집요한 노력이 이 영화를 스릴러에 버금가는 긴장감을 조성해준다. 당신이 말한 바로 '그' 찰리 파커는 내가 되어야 한다. 보는 내내 우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이 내러티브의 말미가 극적인 감동을 가져다 주는 이유는 플렛처와 앤드류 두 사람 모두가 인정하고 공유한 연주의 절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학교에서 쫓겨나게 만든 제자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고 싶었던 이 냉정하고 잔인한 플렛처는 앤드류의 연주를 듣다가 어느 지점에서 자기의 목적도 잊어버린 채 그의 템포에 빠져든다. 앤드류는 또 어떤가. 뺨을 맞고 차 사고에 퇴학까지 당하게 만든 당사자가 다시 자신의 음악 인생을 종치게 만들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주에 몰입하다가 어느 순간 그의 템포에 자신의 템포를 맞춘다. 서로의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의 연주에 플렛처가 미소를 보낸다. 앤드류도 마치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다. '이 남자들, 좀 모자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이런 경험은 남 일이 아니다. 대가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종종 겪는다. 밤 새워 선배와 야근을 하면서 마친 일이 회사에서 채택되는 순간, 무명 가수가 신곡을 만들어 리허설 끝에 연주자, 엔지니어와 제대로 녹음을 마친 순간, 하다 못해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아이와 입을 맞춰 자장가를 함께 부르는 순간에도 이런 '찰나의 상승' 경험은 존재한다.
그 경험이 힘들거나 인간 관계마저 어긋날 때 도리어 그 찰나의 시간이 빛나는, 다소 씁쓸한 인생의 진실이 이 영화에 담겨있기 때문일까. 사실 살면서 자주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그 정도면 됐어'가 아니라 '바로 그거야'를 말해줄 누군가를 열망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복잡하고 불안한 관계를 넘어선 '결정적 템포'의 미학이,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 아닐까.
*기사 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91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