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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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빌워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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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원작<시빌워> 시리즈에 환호했던 우리는, 영화화된 <왓치맨>에 환호할 수 있었지만 이번 <캡틴아메리카: 시빌워>는 다소 불편할 법한 각색이 즐비했다. 이에 대해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즉각적으로 원작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드러낸 비판글을 썼으나 댓글들을 보니 마블 원작의 '세계관'에 그다지 관심 없는 지금 세대들에게는 평론으로 포장된 꼰대질, 평론가의 자격지심, '그냥 잘난 척'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의 평론을 그렇게 대하기엔 부족함이 있어서 그의 논의 중심으로 시빌워의 감상기를 풀어보련다. 그의 글은 아래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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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허지웅의 평대로 영화의 스케일에 대해서는 이제 마블 시리즈에서 굳이 폄하할 부분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게다가 얼마전 수퍼맨과 배트맨이 모여서도 이렇게 비주얼로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해서 그런지, 더더욱 그 흥망의 대조는 크게 느껴진다. 문제는 내러티브, 스토리라인인데, 원작에 열광한 나로서도 허지웅의 비판에 공감하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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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그의 말대로 세계관의 스케일이 줄어들었다. 스티브는 어벤저스 멤버들로 국한되지 않은 무수한 초인들의 신분과 자유를 보장하려는 '캡틴'으로서의 숭고함은 사라지고 새 친구 '토니'보다 옛 친구 '버키'를 편애하는 인간으로 전락했다. 시빌워(내전)는 구색만 갖춘 채 대충 싸우는 어벤저스의 내분이 되었고, 정작 진지했던 전쟁은 부모를 잃은 토니와 친구를 보호하려는 스티브의 사적 복수극으로 달려간다. 게다가 토니가 '소코비아 협정'에 동의하려는 동기는 아이언 수트를 안 입어야 페퍼포츠와의 관계가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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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워의 원작은 10년전에 만들어졌다. 이른바 '초인등록법'에 대한 찬반에 의해 갈라진 무수한 초인들의 입장 차이를 가지고 마블코믹스는 자기들이 수십년 전부터 보유해온 초인들을 어른들의 눈높이에 맞춘 정치사회적 내러티브로 발전시키는데 성공했다. DC가 프랭크 밀러의 <다크나이트 리턴즈>와 <저스티스 리그>를 통해 재도약의 시발점을 만들었다면, 마블은 <어벤저스>와 <시빌워>의 내러티브를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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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를 관통하는 코믹스의 세계관은 '진영' 논리였다. 초인들을 한 곳에 모은 후 진영을 나누고 그 각각의 입장에 대한 내러티브를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베이비붐 세대를 겪은 중년층들은 열광했다. 그들이 경험한 냉전시대에 대한 추억, 그 이후에 이뤄지는 세상의 진영논리를 기반으로, 어릴적 하나씩은 가지고 놀던 초인 영웅들이 화려하게 '재'등장하자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정도로 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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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각설하고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지금 세대, 그리고 마블이 나아갈 세대의 영화는 원작의 세계관과는 구별될 것이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캡틴 아메리카> 1편에서 3편을 관통하는 세계관은 제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비판적 메타포로 대변된다. 9/11 테러 직후 미국의 착한 시민들은 왜 세계가 우리나라를 미워하는지 의아해했고, 이 재난에 대해 오히려 냉대받는 이유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런 미국적 스탠스는 영화 속 '어벤저스'로 대변되는, 특히 애국심 돋는 '캡틴 아메리카'로 상정된 인물에 의해 극도로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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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경구 수준이 되어버린 '큰 힘에는 큰 의무가 따른다(스파이더맨)'는 말은 이제 '큰 힘을 가진 자의 의무감을 개개인의 판단에 맡겨둘 수 없다', '큰 힘에는 견제될 통제 영역이 필요하다'는 말로 대체되었다. 마블 영화 속 초인들은 완벽하지도 않고, 완벽할 수도 없다. 그들은 서로를 신뢰할 수 없고, 정보는 (더 높은 권한을 가진자에 의해) 공유되지 않는다. 나아가 거대담론(제국)은 미시담론(소수부족)을 무시하고 개별, 개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그 안에서도 몇십만 명을 살리기 위해 수십 명의 희생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혹은 그럴 수 없다는 입장 차이가 발생한다. 그 와중에도 많은 미시사적 개별 복수극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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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더 큰 힘은 또다른 도전을 낳는다'는 비전의 대사는 일면 타당하다. '개별적, 미시적 복수극을 감내해야 하는가', '큰 힘은 견제와 통제 아래 둬야 하는가' 사이에서 고민하고 분리의 조짐을 보이던 초인들 자신들이 급기야 복수극에 휘말린다. 초반과 중반, 후반에 반복되는 교통사고는 생체실험이라는 거대담론에서 내 부모의 죽음이라는 개별 미시사로, 돋보기의 한 점처럼 편광된다. 그 모인 한 점의 섬광이 종이를 태우듯, 두 초인은 자신의 미시사적 이해에 근거한 혈투로 치닻는다. 원작의 격돌이 매크로 스케일의 무게감으로 다가왔다면, 영화 속 격돌은 마이크로 스케일의 마음 속 사무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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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이것이 세계관의 스케일이 작아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내가 허지웅의 비평에 공감할 수 없었던 대목은 이 지점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이야기하듯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만약 이 영화의 주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 마블이 기획한 세계관의 '영화적 변주'라면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이 세계관이 왜 세계가 '우리-초인-제국-미국'을 싫어하는가에 대한 자성과 고민을 담고 있다면 나는 매크로 스케일로 '진영 논리'를 불태운 원작에서 비껴나간 영화적 내러티브에 환호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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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세계 평화는 진영의 승리, 패배와 같은 조직 논리가 아니라 미시사의 복수극의 고리를 끊는 '블랙 펜서'의 선택으로부터 변화한다는 것이 이 세계관의 결론이라면 나는 더더욱 영화판에 공감한다. 레미제라블과 같은 고전에서부터 반복되어 온 문제, 인류의 구원은 복수가 아닌 용서에 기인한다는 주제의식에 공감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블의 변형된 세계관은 '시시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러러 보던 거대담론,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 세계 자체가 시시한 복수극의 현현일 따름이다. 결국 우리 중 누군가가 '발톱'을 접어야 세상의 복수가 멈출 것이라고 <시빌워>는 말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렇게도 잘 나가는 '제국'의 영화를 굳이 내가 또 지지할 필요가 있나 싶기는 하다. (끝)
2016/05/05 23:56 2016/05/05 2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