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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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에 영화를 두편 봤다. <남쪽으로 튀어>와 <더 헌트>.

 #1.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사회가 밀어내는 캐릭터들이다. <남쪽으로 튀어>의 최해갑은 국가로부터 그리고 자기가 대학시절 함께했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조차 불편해하는 캐릭터다. <더 헌트>에서 루카스는 유치원 교사인데, 친구 어린 딸의 거짓말로 인해 성추행범으로 몰리면서 동네의 절친들 대부분에게 비난을 받게 된다.

이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는 사실 별로 힘들지 않았다.(레미제라블 때와는 달리) 두 편의 영화 모두 나름 해피엔딩인 이유도 있다. 최해갑은 국가의 눈을 피해 달아난 채로 생활을 계속하고 루카스는 결국 자신의 누명을 벗는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해피엔딩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두 영화가 너무 개연성있는 현실을 보여줘서, 내 주변 그 누군가가 겪은 사건을 잘 풀어내면 이런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그 진영이 같건 다르건 원래 그 사람의 편이었건 아니었건 그 사람에게 일어난 위협 혹은 누명, 혹은 오명, 나쁜 평판이 불거지면 대체로 주인공을 등진다. 영화속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최해갑의 주변이 그렇고, 루카스의 친구들이 그랬다. 그 둘의 명약관화한 상황이, 어떤 대세랄까 혹은 지배적 정서에 소수의 올곧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묻히는 느낌이 강하다.
 


 #2.
하지만 나는 이 두편의 영화를 보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다. 그 사람 주변 소수의 사람들이 그의 진심을 헤아리고 실제적으로 도와주고 그들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극'소수다. 또한 대체로 어떤 진영을 대변하는 부류가 아니라 그를 인간적으로 잘 알고 아끼는 이들이다. 그들은 그의 오명에도 흔들림이 없다.

예전에는 오정현 목사같은 길을 걷게 될 때 나를 깨우쳐줄 냉정한 비판자들이 주변에 많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살아보니 내 진영 사람들의 냉정함 또한 공포스럽다. 패자부활전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도 언행 하나 흐트러지면 끝장이다.

지금은 좀 자유로워졌는데 한동안 나는 글쓰기에 조금 짓눌려 있었다. 반론을 예상하는 글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고나 할까. 때로 내 글은 지나치게 방어적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게다가 교계에서 신학자도 운동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 때문에 글 자체에 대한 열등감도 높았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옹호해야 할 시점에서 나는 머뭇거렸고 눈치를 봤다.
 
어느순간 이 모든 긴장감이 지겨워졌다. 내가 방어해야하는 논리의 치밀함이 사안을 둘러싼 사람들, 인격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 정작 내가 해야할 말들은 가려가며 해대고, 안 해도 될 말들을 만들어 내는 긴 시간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나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3.
 물론 지금도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회사에서도 그렇고. 페북에서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도 불편하고 페친이었다가 아닌 상태가 되는 사람들이 생겨도 불편하다. 어떤 이슈에 따라 진영이 나뉘거나 누군가를 옹호하면 그로 인해 호불호가 갈라지는 대목에서 특히 그렇다. 여전히 나는 신경이 쓰이고 글을 쓰고서도 후회가 될 때도 있다.

누군가의 반응에 신경을 쓰고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나의 '옳은' 생각, 나의 기호, 나의 삶의 태도를 대중에게 호소하고 싶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중의 지지와 칭찬에 대한 욕망이 어느정도 전제된 행위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진영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며 운동성을 얻고자 애쓴다.
 
하지만 당사자가 오명을 얻을 때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오명이 아니라 정말 잘못을 한 것이라면 더더욱이 재기가 쉽지 않다. 말실수 하나로도 텍스트 독해 자체를 못하는 비전문가가 될 수 있고 누군가를 옹호하다가 당신이 그럴 줄은 몰랐다며 순식간에 친구에서 친구-아님으로 변할 수 있다. 루카스는 하지도 않은 아동 성희롱으로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아는 친구에게 멱살을 잡힌다. 그게 정상적인 인생이고 삶이다.
 
나는 내 지지자가 많아지길 간절히 원하는 20대를 보냈다. 30대에는 20대의 구호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하게 좌절하고 주눅이 들었다. 지금은 그저... 거품을 빼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도 나는 여전히 눈치를 보는 내 모습을 전지적작가 시점으로 돌아본다.^^ 이 두 영화는 내 고질적 고민을 돌아보게 만든다. 지지자를 넓히는 삶은 위험하다. 그저 내 주변을 밝히는 삶이 더 유익하고 가치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2013/02/12 23:33 2013/02/12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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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 장발장, 혹은 레미제라블이라고도 하는 서바나 영상을 본 페친들이 무리에게 이르되 너희가 대선 이후에 이것을 보면 다 울리라 이는 기록된 바 너희 마음이 다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라

28 그러나 영상을 다본 후에도 멘붕이 쇠하지는 않으리라

29 제이언니가 대답하되 나는 마음이 돌같은 자라 절대 울지 아니하리이다

30 페친 중 하나가 이르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영화관이 밝아지기 전에 네가 세번 울리라

31 제이언니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성전환 수술을 할지언정 절대 울지 않겠나이다 하고 주위의 몇몇 마초 페친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14:66 주위가 어두워지고 제이언니는 썩소를 날리며 서바나 영상을 주시하는데

67 삼십분이 채 되기 전에 흐느낀지라

68 정신을 가다듬고 혼자말로 이르되 내가 왜 우는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69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울더라

70 스스로를 질책하며 심히 괴로워하며 다시 이르기를 내가 미쳤구나 이제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 하였으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물이 목젖을 타고 내려감을 깨닫더라

71 화면이 어두워져 아무 것도 안보이고 때로 길거리를 보여주는 영상에서조차 울되 이미 정줄을 놓은 후였더라

72 정신을 차리니 주변이 밝아지고 페친들이 자기에게 한 말 곧 네가 세번 울리라 함이 기억나서 그 일을 생각하고 또 울었더라

 

(레미제라복음 14장)

 

2013/01/29 22:12 2013/01/2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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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6년"을 보는 게 참 괴로웠다. 사실 시대적 아픔은 내 이십대가 더 민감했던 것 같다. 굴곡진 현대사를 배우며 피끓는 분노를 떨쳐버릴 수 없어 잠못 들던 기억도 새삼 떠올랐지만... 그건 마치 아내의 처음 모습을 떠올릴 때처럼 조금은 먼발치에서 보듯 아련하다.

정작 내가 괴로웠던 건 그 하나하나 가족사의 비극이었다. 예전엔 내 부모가 그렇게 죽었을 때 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지를 생각하곤 했는데 요즘은 내가 죽으면 성하가 보내야할 고통의 세월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 속이 지옥과 같다. 그것도 분노로 점철된 성장기를 성하가 감내해야 한다면... 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세상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어서 도래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생기는 저녁이다. 그것을 믿지 않는 이들도 오늘은 함께 기도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광주의 부모와 자녀들에게도 국가와 세상이 주지 못한 평화가 임하길 기도한다.

2012년 12월 3일
2012/12/03 21:56 2012/12/03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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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ting de Corazon>을 봤다. 이 영화는 스페인 영화라는 걸 빼면 전형적인 2류 불륜 영화다. 원래 이 영화는 중년 남성의 일탈이나 욕망에 집중되었저만 '젊은 여성' 입장에서 조금만 썰을 풀고 싶다.

스토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중년 남성은 자신에게 손자가 생겼다는 얘길 들을 때 즈음 젊은 여잘 만나게 되고 그 여자에게 빠져든다. 젊은 여자는 원래 사귀던 중년 남친이 있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어 감정에 충실하게 달려가고 두 사람의 불륜을 알게된 중년남자의 아내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자 남편과 별거에 들어가고 그녀도 상담하던 남성과 교제를 시작한다. 결국 젊은 여자는 중년남자가 아내와 헤어지지 못할 거란 사실을 직감하고 중년남자도 아내가 떠나자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일탈은 끝나고 중년부부는 손자를 맞는다.
 
때때로 젊은 여성들은 또래 남성보다는 심정적인 여유가 느껴지는 성공한 남성, 혹은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안정적인 중년 남성에게 끌리는 것 같다. 이성에게 호감을 느낄 때를 전형적인 방식으로 분석할 수는 없겠지만 중년 남성에 호감을 느끼는 여성들은 자신의 unstable한 상태를 stable한 반려자를 통해 확보하려는 욕망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자신의 늙음에 대한 자각과 함께 점점 커지는 일탈의 욕구와 관련이 깊은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지적(질)은 여기에서 시작되는데...) 따라서 어떻게 불륜이 시작됐든 대체로 남성은 젊은 여성이 일탈적 존재에서 일상적 존재가 되는 시점에 정신을 차린다. 영화에서도 젊은 여성은 중년 남자와 아이를 낳고 함께 살기를 원한다. 남자는 그 일상의 무상함에 짓눌려 시작된 관계가 다시 삶의 '정상 루프' 안으로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나면 일상적 영역 안에서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중년 남성이라면 대체로 익숙함과 보수성이 고개를 쳐든다. 아내가 차려준 식사, 아내와 함께 힘들게 키워낸 자녀, 그 아이들과 함께 사는 스윗홈... 그 게임 룰 안에서는 이 영화에서처럼, 아내가 이기게 되어 있다. 이 영역에서 젊은 여자는 철저하게 타자이고 미지의 세계이며 지금까지의 안정화된 삶을 뒤집는 불안 요소가 된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출산 육아 공부 차, 함께 자주 들락거리던 인터넷 카페에서 듣게 된 이야기가 있다. 유부남과 교제하는 여성들의 비밀 카페가 있는데 그 카페에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유부남과 사귀는 여성들의 고충이 많이 올라온다고 한다. 가끔씩 읽는 holicatyou.com 블로그에도 간간이 유부남과 사귀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본다. 비슷한 패턴은 첨엔 미친듯이 들이대다가 시간이 지나면(일탈이 일상이 되는) 그 관계가 역전되고 종국에는 젊은 여성들만 상처를 입는 것이다.

이 2류 영화와 사례들을 자질구레하게 언급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자 결론이다. '젊은 여성이여, 유부남과 절대 엮이지 말라.' 첨엔 따스한 정서와 공주같은 대접을 받을 지는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의 경우 홀로 남겨지는 건 젊은 여성이다. 유부남은 가정으로 돌아가고, 아내는 그 남편을 용서하고 젊은 여성은 버려진다.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고 내가 아는 한 이는 다분히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2012/07/27 22:51 2012/07/27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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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밤에 보긴 좀 우울한 감이 있었지만, 영화 <뱅뱅클럽>을 봤다. 이 영화는 포토저널리스트가 피사체를 단지 찍어서 알리는 일에 그쳐야 하는가, 아니면 피사체의 현실에 개입해야 하는가의 화두를 던진다. 영화 속 실존인물인 케빈 카터는 퓰리쳐 수단의 기아 사진으로 퓰러처상을 수상한다. 허나 그의 사진은 사진가의 현실 개입에 관한 윤리적 논란에 휩싸이게 되고 퓰리처상을 수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조금 다른얘기지만 한편으로 저널리즘은 역사 속에서 사진 영상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선정적인 사진은 인간정서를 자극하여 이성적 판단 자체를 방해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현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 한 예로 광주항쟁에서 무기로나 수적으로 터무니없이 열세였던 시민이 군인에 대항하는 한 장면의 프레임을 취하는 것. 이런 게 전형적 영상의 왜곡, 진실의 왜곡에 속한다. 영화 속에서도 사진가들은 자신의 사진이 그 자체만으로도 정부군을 옹호하거나 반군을 옹호하게 되는 상황을 염려한다.

 
‎그런 이유로 르몽드는 신문에 일절 사진을 게재하지 않는다. 선정적 사진이 사건의 객관성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진이 발명된 이래 포토저널리즘은 사회에 많은 화두를 던져왔다. 게다가 미술작품과는 달리 수많은 똑같은 복사물을 찍어낼 수 있는 사진들은 발터 벤야민으로 하여금 '아우라'에 관한 사색을 더하기도 했다. 사진과 인간, 뷰파인더로 바라보는 피사체는 나와 타자의 관계성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는 낯설면서도 닮은 구석이 있다.


덧글.
 라이언 필립은 인물이 많이 망가졌다지만 그의 얼굴과 연기가 좋았다.

2012/07/16 22:49 2012/07/16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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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교]를 봤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제외하고는 20년만에 처음 보는 소설인 것 같다. 은교를 보게된 건 영화 [은교]를 보고 영 찜찜했기 때문이다. 영화 [은교]는 사실 별로였다. 아니 나쁘지 않았지만 플롯이 좀 성글게 느껴졌달까. 결국 열흘을 보내고 소설을 전자책으로 다운받아 읽었다.

일단 소설과 영화는 다르다. 영화에 나오는 단편 '은교'란 소설은 없다. 영화에서는 서지우가 자기 스승 이적요가 몰래 써 놓은 은교(에 관한 개인의 기록)을 자신의 이름으로 공개함으로써 갈등이 심화된다. 문제는 소설은 영화에서처럼 이적요가 불같이 대노하거나 두 사람의 갈등이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은 사제간이며 글쟁이들인지라 미묘하게 얽히는 - 물론 중간에 은교라는 17세의 소녀를 두고서도 - 갈등이 서서히 고조되어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싸이클이 존재하는데 영화는 이 흥미로운 내러티브를 뭉개버린다.

 

특히 마치 은교를 사이에 두고 욕정과 질투에 불타는 두 남자의 대결처럼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는, 마지막 서지우의 차사고 장면에서도 이적요가 미리 자동차를 고장낸 사실을 알고 분노의 질주를 하다 중앙선을 고의로 넘으면서 사고가 나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소설에서는 그 사실을 안 서지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한다. 이는 오랜 스승이자 마음의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보여준 데 대한 깊은 슬픔의 표현이다. 그렇게 서지우는 죽기 직전까지 이적요를 놓지 못했다. 이적요 시인 또한 차를 타려는 서지우에게 허겁지겁 달려가 잠시나마 차를 타는 것을 말리려했다. 은교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둘은 서로 많이 아꼈노라고 회상한다.

은교와의 관계도 그렇다. 영화는 후반에 이적요가 이마에 키스를 하자 그를 재우고 서지우와 섹스를 나누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소설에서는 은교가 먼저 이적요에게 자신에게 키스를 해도 된다고 말한다. 허나 이적요는 이마에만 키스를 하고 은교 또한 이적요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방을 나온다. (이 차이는 크다) 소설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 이적요의 내외적 갈등들도 모두 삭제되었다. 소설에서 이적요는 은교와 만나기로 하지만 은교의 남친 행세를 한 서지우의 지인에게 길바닥에서 고딩을 희롱한 노인으로 개망신을 당하고 그 사건으로 이적요는 심한 상처를 받는다. 이후에도 은교와 함께 들어간 카페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며 그 과정에서 겪는 노년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특히 이적요의 과거사. 이렇다 할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겪지 못한 그가, 서지우를 질투하는 가운데에서도 셋이서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행복해하는 장면이나, 어릴 적 동네의 인민군 학생들에게 피터지게 맞던 자신을 구해준 D라는 처녀.(그녀가 이적요의 이상적인 여성의 원형이다) 얼마 전까지 만났던 후배 여성 시인과의 밀회가 자신이 원할 때 발기되지 않는 나이로 접어들면서 관계를 끊은 일 등. 은교보다는 이적요에게 상당히 많은 지면과 묘사를 할애하고 있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그의 인생(인간성)을 잘라내버리고 은교에게 호감을 주는 '시적 천재성'(기능)만을 부각시켰다.

장면들도 영화에서는 들쑥날쑥하다. 집청소 알바를 하기로 한 은교가 바로 다음에 이적요의 집에서 잠을 자고 그날 밤 천둥소리에 이적요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자는 장면은 소설 속에서는 한참 후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는 대시인 이적요가 17세의 은교에 대한 욕망이 발전하고 급속도로 안에서 번지다가 내적 갈등 후 그 아이를 내면 깊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개연성있게 전개되지만 영화에서는 70대 노인의 '로리타 애착' 정도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이 다분하다.

서지우와의 관계도 삼각관계임에는 분명하나 둘의 갈등의 주변 상황들을 잘라내어 그 갈등의 깊이를 무디게 만들었다. 일례로 서지우는 인세 중 육천만원을 가로채지만 그 사실을 이적요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은교라는 단편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비평매체에 싣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소설에서는 그가 이적요의 단편 소설 몇 개를 훔친 뒤 그 결론 부분을 살짝 개작하여 발표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적요가 불편해하는 것은 서지우가 도둑놈일 뿐 아니라 자신의 소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말을 수정하여 그 소설 자체의 통일성을 무너뜨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느 인터뷰 상에서 원작 소설가 박범신은 동명의 영화에 대해 비교적 좋게 평했지만, 내 생각에 그는 영화 은교에 대해 서지우의 각색처럼 불편하게 여긴 점들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소설 은교는 참 좋았고 영화 은교는 아주 나쁘진 않았지만 뭔가 잘못 손댄 '덧칠'처럼 느껴졌다.


사족)
영화 은교는 노출로도 홍보가 많이 되었지만 다시 한번 아쉬운 점을 짚자면 소설 은교에서는 서지우와 한은교의 섹스 장면을 디테일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적요 시인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장면을 적나라한 영화 노출신의 하이라이트로 설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내 생각에 영화의 대중성을 고려해서 굳이 강한 베드신을 넣어야했다면. 서지우가 한은교를 모텔로 데리고 가서 억지로 잠자리를 갖는 장면이어야 했다고 본다. 그게 임팩트도 있고 서지우의 심리 묘사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2012/05/14 22:41 2012/05/14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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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저스'를 봤다. 흥미로운 영화임에 분명하다. 이 영화는 각 만화의 주인공들을 불러서 종합선물세트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별개로 보더라도 이 영화는 가장 '포스트모던한' 헐리웃 블록버스터가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어벤저스가 최첨단 시대에 외계인이나 신화를 스토리의 메인 모티브로 삼은 부분이 인상적이다. 기술문명과 신화가 통합(synthesis)되는 영화 속 내러티브는 갈등을 넘어 이제는 공존을 이야기한다. (첨단을 달리는 '아이언맨'과 구시대 히어로 '캡틴아메리카', 그리고 신화속에나 나올법한 천둥의 신 '토르'가 서로 소통하며 갈등을 풀어간다.)


하지만 그 소통과 공존 사이에서 구영웅주의와 신영웅주의의 충돌을 야기한다. 이른바 수정-자경주의로 일컫는 흐름을 말하는데 구영웅주의가 사명감이 투철하고 대의를 위하여 헌신하는 캐릭터였다면, 신영웅주의는 자신의 한계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 그러면서도 매순간 복합적 권력구도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때로는 대의를 저버리거나 위기에 빠진 시민을 구하지 않는-'왓치맨'의 코미디언처럼 도리어 공격하기도 하는-불완전한 존재로 그려진다. 어벤저스에서도 구영웅으로 대변되는 '캡틴 아메리카'와 신영웅으로 대변되는 '스타크'(아이언맨)의 관점 차이도 흥미롭게 지켜볼만한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할만한 캐릭터는 퓨리 국장이다. 그는 내 생각에 니체가 말한 '초인'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는 지도자로서 강인한 모습,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의 소유자다. 시민들이나 심지어 히어로들에게도 국방부의 비밀 계획에 대해서는 함구하며 친구의 죽음도 전쟁의 동력으로 쓸만큼 전략가와 행동가로 모자람이 없다. 심지어 권력자들이 반대하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강압에도 흔들임없이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해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에서 히틀러를 본 건 아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그가 불편했던 건 열등한 인간들을 다스릴 '초인'을 기다려온 역사의 실패 때문일까. 혹은 만화속에서조차 마키아밸리즘의 단면을 보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일까. 만약 현실세계에서 무법의 자경단을 만들어내고 시민들을 불법사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감금시키고 권력에 무릎꿇게 만드는 초인이 있다면 그들이 멋있어 보일까. ('배트맨'에서 존 웨인은 악당을 잡기 위해 시민들의 휴대폰 통화를 감시하며 그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는 그 일로 그를 떠난다) 그들에게 엄청난 부와 엄청난 군사력, 그리고 정보력을 허락한다면 그들은 만화속 어벤저스처럼 스스로 자정능력을 가진 집단으로 진보할까. 사실상 그저 시민들을 탄압하고 괴롭히다가 결국은 비토 세력으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벤저스나 왓치맨 같은 무법의 자경단들이 현실에서는 반드시 은퇴해야 한다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왓치맨'에서는 히어로들은 시민들의 시위로 공권력을 경찰들에게 이양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2012/04/20 22:40 2012/04/20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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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으로 말해 이 영화는 음악 영화의 최고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틈이 많다. <아마데우스>나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마틴 스코세지의 <더 블루스> 등등을 떠올렸다면 이 영화는 기대 이하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더 콘서트> 다분히 상업적인 영화다.

하지만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너무 좋아한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호감을 키웠고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잘 짜여진 느낌이라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바이올리 협주곡 전곡을 13분에 압축하여 펼치는 편집도 나름 괜찮았다. (물론, 30년 동안 한번도 맞춰보지 않은 곡을 솔리스트의 '비상'에 힘입어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심한 과장이다.)

소련 시절 자신이 세운 솔리스트가 감옥에서 죽게 되고, 단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며 자신은 볼쇼이 극장의 청소부로 전락하게 된 주인공 안드레이. 그 오랜 후회와 고통 그리고 답답했던 시간을 일소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그는 그 무모한 작업에 뛰어든다. 30년간 연주조차 하지 못했던 단원들을 모아서 감옥에서 죽어간 솔리스트의 딸과 바로 '그 곡'을 지휘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협연을 하려는 안느-마리 자케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협연에 참여하게 되고 여러차례 우여곡절 끝에 포기하려 마음 먹지만 자신의 부모를 알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최종 결정을 번복하고 바이올린 협연에 나선다.

30년전 부러뜨린 지휘봉을 테입으로 감고 나오는 부분이나 지휘봉을 부러뜨린 바로 그 소련 간부의 도움으로 다시 공연장에 서게 되는 설정, 가망이 없어보이는 일을 꾸미는데도 자신의 일을 뒤로 한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안드레이의 아내, 매 순간 그의 의지를 북돋워주는 오랜 친구들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참 훈훈했다.

인간은 참 흥미로운 존재다. 얼짱 몸짱의 솔리스트(멜라니 로랑은 정말 바이올린 솔리스트라고 보기엔 너무나 완벽한 미모를 자랑한다)에, 디즈니랜드에서나 가능할 법한 해피엔딩 등등 여러모로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영화의 중간중간 나는 유쾌했고 때때로 감동했다. 내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7점도 주기 어려운 이 영화를 나는 참 재미있게 보았다. 그래서 유럽 및 미국개봉에서도 평단 및 관객들의 환호를 얻어낸 게 아니겠나. 냉전시대의 비극을 시종일관 위트있게 풀어낸 것도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추천한다.

 

2011/09/14 21:31 2011/09/14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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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개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3시간 안에 무엇이든 배달하는 정체 불명의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알게 된 국정원 요원들은 그를 이용하여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고위층 간부의 애인을 데려오려 하고 그로 인해 이 남자는 남한과 북한의 요원들의 포로가 되어 이용당하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김훈의 에세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남한 요원과 북한 요원에게 번갈아가며 잡혔을 때마다 묻는 질문이 '너는 어느 쪽이야, 북이야 남이야?'였다. 남자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표면적 정보는 전혀 없다. (그 대목에서는 김기덕의 전작 '나쁜 남자'의 깡패 주인공과 닮았다.)

하지만 영화는 남자의 행동과 내면 연기를 통해 그를 유추할 수 있게 만든다. 휴전선 근처에서 이산가족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어주는 이 남자에게 분명 나름의 사연이 있어 보인다. 그는 자신이 죽이려던 북한 고위층 간부가 흐느끼며 자신의 애인 인옥을 죽기전에 한번만 보고 싶다고 하자 그를 죽이지 않고 인옥을 만나게 해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는 오열하는 할아버지의 영상을 담아 마지막 휴전선 넘기를 감행하여 북에 있는 할머니에게 그 영상을 보여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람, 편지, 영상 그 어떤 것이든 남북을 가르며 전달한다. 그의 인생 동력은 '사랑'이며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그는 일신의 돌봄 없이 남북 요원 사이의 이전투구의 장에 자신을 던진다.

 

영화의 플롯은 대체로 '레옹'과 많이 닮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프로페셔널 해결사에게 어느날 찾아온 사랑은 그의 자기관리를 허물고 그 감정의 흔들림 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위험한 상황 속으로 내달린다는 점에서 그 감정선이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시나리오는 그에 더하여 남북한 분단 상황 가운데 처한 주인공의 고뇌와 복수가 우리의 피부에 와닿게 느껴진다.

특히 탈북한 고위 간부의 암살에 대한 위협과 불안, 그리고 정보를 캐내려는 남한 요원의 시선으로 인한 압박으로 자신의 애인에게 집착하고 그녀를 꺼내준 남자에게 강한 질투심을 보이는 장면들이 미시적 측면에서도 개연성 있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김기덕 사단의 화려한 재기와 배우로서 윤계상의 약진도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마음은 무겁지만 여러 면에서 풍성했던 점에서 나름 유쾌한 영화라 평하고 싶다.

2011/09/01 21:29 2011/09/01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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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의 신작[부당거래]가 개봉되고 PD수첩의 [검사와 스폰서]편이나 김두식 교수의 저서인 [불멸의 신성가족]을 언급하는 글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건설회사 사장의 로비와 검사 접대, 경찰 비리가 함께 어우러져 있어 소재로 보나 이야기의 전개로 보나 PD수첩과 김두식 교수 책의 영화화로 인식할 수도 있을 법 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플롯을 잘 뜯어보면 스토리 라인의 중심에 최철기(황정민)가 서 있음을 보게 된다. 첫 장면에서 이미 단호하고 딱딱한 인상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그의 이미지는 어떤 압력에도 자신의 소신에 따라 범인을 잡는 경찰의 전형으로 보여진다. 그는 자신의 매제에게 돈을 건네줬다고 하소연하는 해동건설 회장인 장석구(유해진)를 조사할 때에도 거침이 없었다.

 

이 영화가 흡인력 있게 다가오는 주된 이유는 다름아닌 최철기라는 캐릭터의 변화에 기인한다. 사실 이 영화를 통틀어 최철기 외에 등장 인물 중 평면적 캐릭터를 벗어나는 인물은 없다. 이야기의 발단과 전개, 절정에 이르기까지 최철기의 심리에 따라 사건이 변화무쌍하게 전개된다. 영화 초반에 그 강인하고 굽힘이 없던 모습의 최철기는 왜 극단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을까.

영화는 그 변화를 지극히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는 단호하고 성실한 경찰이지만, 처도 아이도 없으며 자기가 아끼는 하나뿐인 누이는 힘들게 이발소를 운영하는 하류인생이다. 그녀의 남편은 경찰인 아내의 오빠 이름을 팔아 돈을 챙기는 양아치 같은 사람이지만 누이 때문에 그것마저 눈감아줄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직장에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멤버들이 경찰대학을 나오지 못한 자신이 진급 누락으로 인해 함께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이번에는 진급도 안된 자신을 경찰 내사를 통해 쳐내려는 게 분명하다고 느낀다.

 

내우외환이 겹친 그에게 강국장(천호진)은 도박같은 제안을 한다. 이미 용의자가 살해되어 해결하기 힘들어진 연쇄성범죄자 검거 건을 자신에게 맡긴 것이다. 최철기는 이것이 자신이 가지치기 당할 수도 있고 특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래임을 직감한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특기를 가지고 올바로 수사를 시작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너무 짧은 시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가짜 범인 세우기'를 감행한다.

그는 일전에 누이의 남편에게 돈을 건네준 스폰서 장석구(유해진)를 불러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가짜 자백을 할 수 있게 만들라고 지시하고, 장석구 또한 이 지시를 이행하면서 이를 빌미로 최철기를 이용하여 회사 비리를 일삼는, 이른바 부당거래가 시작된다. 최철기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비리 검사 주양(류승범)과 엮이면서 이 범인이 가짜임을 주양이 알아채자 그에게도 로비를 일삼는 파렴치한 일을 서슴치 않는 인물로 돌변한다. (영화 초반의 연기와 중후반 황정민의 연기변화는 정말 압권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후배 마대호(마동석)이 이를 알아채고 저지하려하다가 그만 최철기가 우발적으로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장면에서다. 그는 정서적으로 파탄의 상태에 직면하지만 또다시 위기모면을 위해 살인현장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아끼는 후배 마대호를 칼로 난도질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만다. 결국 최철기는 자신을 따르던 후배들의 복수로 자신의 불안했던 부당거래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숨쉴 틈도 없는 흡인력으로 전개되지만 불쾌하고 우울한 영화다. 사실적이면서도 개인의 내면 심리를 파고들기 때문에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되는 이유에서 그렇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는 검사들은 크게 해먹어도 살아남고 최철기 같은 일개 경찰들만 개고생하다가 죽는다는 사회적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한 개인 그것도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이 없이 꽤나 나름의 원칙이 있고 강인한 정신을 가졌던 한 사람이 어떻게 허물어져가는지를 지켜보면서... 나에게 그런 부분이 있지는 않은지 냉정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균열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최철기는 장석구의 비리를 알고 있었지만 누이의 초라함과 매제의 한심함으로 인해 작은 비리를 눈감게 된다. 그에게 드리운 장석구라는 어둠은 다시 자신의 목을 죄는 상황에서 좀더 손쉽게 꺼내들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처음엔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도구인 줄 알았던 어둠의 방식은 더큰 비리를 눈감아줘야 하는 존재로 성장하고 이내 자신이 그에 지배되는 반대상황에 직면한다. 최철기는 극단으로 치닫기 전 되돌릴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너무 악의 속도는 빨랐고 그 관성에 그는 손쓸 겨를 조차 없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던 시간은 자신의 목에 구멍이 뚫리는 복수의 시간이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후회할 일들이 반드시 생긴다. 이는 무지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소한 악행에 대한 심리적 균열에 관대한 면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돈문제이든 성적인 문제이든, 혹은 인간 관계의 문제이든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쉽게 속이거나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는데 익숙한 존재다. 속으로 모두가 어느 정도는 썩었다고 믿고 있으며 그 수준을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갑자기 큰 기회가 오거나 큰 돈이 생기거나 막대한 권력이 주어줬을 때 우리 내면의 균열점에서 극단적 파단으로 치닫는 속도가 가파르다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 그 기회가 오면 우리는 반드시 행복하기 보단 불행할 확률이 높다. 그런 비극이 오기 전에 자신을 한번 치열하게 파헤치는 일이 필요하다. 자아의 내사 말이다. (끝)

2010/11/22 21:13 2010/11/22 2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