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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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더 말이 필요없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으로 <빌리 엘리어트>와 <디 아워스>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스티븐 달드리의 세 번째 작품이다. 성장기 소년이 연상인 여인과 사랑을 나눈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청춘>과 비교되곤 하는데 사실 이 작품은 그 영화가 지향하는 바와는 다르며 플롯은 두 사람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 속으로 확장된다. 이 영화가 비교적 많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남녀 사이의 사랑이 이루이지지 못한 채 여자 주인공이 자살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남자 주인공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전개해 가기 때문에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두 사람의 심리, 특히 여자 주인공의 심리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마이클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한나에게 성적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하는데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으며 마이클을 만나고 나서는 그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요청한다. 이 두 사람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과 더불어 함께 책을 읽으면서 둘 사이의 연인관계를 형성해간다. 그녀의 성실한 성품으로 인해 사무직으로 진급을 하게 된 한나는 자신이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조용히 직장을 그만두고 그 지방을 떠나려 하고 마이클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마지막으로 마이클의 몸을 씻겨주고 사랑을 나눈 후 사라진다. 마이클은 그녀의 집을 다시 찾아가지만 그 곳엔 아무도 없다.

 

시간이 흘러 마이클은 법대생이 되었고, 우연히 참관인으로 참석했던  재판에서 홀로코스트의 전범으로 서게된 한나를 지켜보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이 영화(소설)은 빛을 발하게 되는데 - 마이클의 심리 갈등은 8년만에 만난 한 여인으로 인해 극대화된다. 시대적 정황으로 볼 때 그 당시의 독일 학생들은 홀로 코스트, 즉 유대인 학살에 크게 분노했고 자신의 부모들과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크게 반성했다. 전범들은 가차없이 처형되었으며, 그것은 정의를 실현하는 진보적인 젊은이들에게는 마치 맹목적인 신앙과도 같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8년 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한나에 대한 그의 이중적 감정은 법정이 지속되는 가운데 점점 커져만 간다.

'왜 아무 말도 없이 떠난 걸까', '왜 유대인을 학살하는 감옥 관리자로 자원한거지?', '다 지난 일이야,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며칠 밤동안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매일 지속되는 학교 내의 법정 토론에서 한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치부되었다. 마이클은 아직 그의 몸 속에 각인된 한나의 체취에 대한 애정과 증오의 감정들로 괴로워하다가 지도 교수에게 가서 우회적으로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고, 결국 그는 한나를 설득하러 가기로 결심한다. 그녀를 만나러 가기 전 그가 찾은 포로 수용소. 그 곳에서 셀 수조차 없는 죽은 유대인들의 신발들을 발견한 마이클은 그 신발 주인들의 목숨을 해치는 일에 가담한 한나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결론짓고 그녀를 설득하기를 포기한다. 그가 돌아와서 같은 과 여학생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한나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정죄이자 깊은 한 구석에 담아둔 그녀를 떠나보내겠다는 다짐인 듯 하다.

 

마이클은 그 여학생과 결혼하지만 금방 이혼하게 된다. (한나에게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준 테입을 교도소로 보내는 장면에서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이클은 한나에 대한 이중적 원망-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을 떠나버렸던 사랑에 대한 원망, 그리고 나치의 전범으로 자신조차 용서할수 없는 유대인 학살의 중심에서 아무런 도덕적인 행동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기에 겪은 사랑의 열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여전히 상처받기 쉽고 꼬여있는 한 소년으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풀려나기 직전 교도소에서는, 그녀와 연락이 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마이클에게  퇴소 후 그녀를 맡아줄 것을 요청한다. 몇 십년 만에 그녀와 만난 마이클. 연인으로 자신의 앞에 선 줄 알았던 마이클은 그녀로 하여금 주변 사람들과 똑같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도덕적 반성과 참회를 요구한다. (영화에서는 과거 생각을 많이 하냐는 마이클의 질문에 대한 한나의 반응으로 표출된다.)

 

마이클에게 한나는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무심하게 떠나버린 연인이었다. 그가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마 이 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타인들처럼 그녀의 죄명으로 그녀를 비난하려 했고 그것에 대한 사죄를 들으려 했다. 한나는 자신의 연인으로, 세상 가운데 버려지고 세상 그 누구와도 소통이 어려운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주변을 맴돌았던 그에 대한 마지막 믿음이 상실되는 순간, 그녀의 삶의 의미를 잃었다. 갑자기 자살이라는 결론을 맺은 한나의 돌발행동은 전혀 돌발적이지 않다. 그녀의 일상은 책읽어주는 그에 대한 기대감이 버팀목이 되어왔고 세상 속에 혼자 남겨진 듯한 느낌 속에서도 심리적으로 그에게 의지해왔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정죄했던 세상과 동일시될 때, 그리고 그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셈이다.

 

영화 속에서 데이빗 크로스, 혹은 랄프 파인즈(마이클 역)은 비교적 플롯의 진행방향대로, 즉 서사적인 방식으로 캐릭터를 드러내 주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정보와 단서를 주지만 케이트 윈슬렛(한나 슈미츠 역)은 관찰자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심리를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 나서도 계속 한나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어찌보면 한나는 많은 남성들의 고통스런 첫사랑의 환타지와 같다. 아무런 설명 없이 떠나버린 첫 사랑이 언젠가 자신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으로 세상에 존재하리라는. 그 첫 사랑에 대한 증오와 사랑의 이중적 감정을 가진 남성들의 끝나지 않는 질문을 떠올리게 만드는, <더 리더>는 그런 영화다. (끝)

2009/07/26 20:49 2009/07/26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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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감독을 처음 알게 된 건 엄정화와 감우성이 주연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통해서였다. 물론 10년전에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란 영화가 있긴 하지만 제목만큼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등의 흥행세를 몰아 최근에 <쌍화점>을 내놓았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쌍화점>이 그저 그랬다. 많은 이들이 공감했겠지만 주진모의 연기력을 확인한 것 외에 쌍화점은 조인성과 송지효의 베드신을 보여주기 위한 2류 영화에 다름 아니었다. 그 외에는 사극으로서의 스케일만 커졌을 뿐 감독의 시야는 오히려 후퇴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나는 유하 감독이 남자들 세계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이 싫다. <비열한 거리>에서도 병두(조인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황회장(천호진)과 민호(남궁민), 그리고 그의 조직원이었던 종수(진구) 중, 감독의 페르소나를 대변하는 듯한 영화감독 민호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병두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이 남자들의 우정을 피도 눈물도 없는 '조폭'의 세계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평면적인 접근이다.

유하 감독의 또다른 작품인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남자들 사이의 배신이 판친다. 우식(이정진)을 따르는 현수(권상우)는 우식을 아끼지만 1인자의 자리를 다투는데 있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경쟁하는 데에 있어서는 서로 무심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냉정하다. 또한 우식의 꼬봉격인 햄버거(박효준)는 순간의 욱한 심정에 우식에게 상처를 입혀 싸움 끝에 결국 학교를 떠나게 만드는 장본인 역할을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조차 우식이 떠나고 소식이 없어도 현수와 햄버거는 재수학원 앞에서 취권을 휘두르며 즐거워한다.

<쌍화점>에서도 이런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왕(주진모)과 연인 관계에 가까운 홍림(조인성)은 왕을 목숨처럼 지키는 친위부대 수장이었다가 왕후(송지효)와의 대리합궁으로 왕후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왕을 배신하기에 이른다. 왕의 고뇌와 질투, 그리고 분노는 효과적으로 전달되지만 홍림의 정사와 배신은 왕후와 육체적인 사랑 그 이상의 무엇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왕과의 관계가 파경으로 치닫는데 대한 설명력을 잃는 듯 하다. 또한 만일 왕후와 홍림의 관계가 육체적 사랑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색계>에서 펼친 양조위와 탕웨이의 베드신처럼 왕후와의 정사가 캐릭터의 심리까지 전달될 정도로 농염하지도 않다.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는 반복적 베드신은 반복되는 파격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자주 등장하는 베드신이 의아하게 느껴진다.(베드신을 위한 영화?) 결국 거세당한 분노로 배신의 칼을 뽑아든 홍림의 비장함은 플롯을 잃어버린 채 때때로 코믹하게 보이기까지한다.

대작이라 불릴만한 영화 속 캐릭터들은 그저 선하거나 그저 비열하기만 하지는 않다. 잔인하기 그지 없는 마피아 영화에서조차 배신자의 심리는 복잡하기만 하다. 일례로 <원스 어폰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누들스(로버트 드 니로)를 제외한 나머지 동료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고 다른 이름의 삶을 살아가는 맥스(제임스 우즈)는 말년에 누들스를 초대해서 자신의 비리를 폭로하고 자살을 한다. <대부>의 마이클 콜리오네는 아버지인 비토 콜리오네(말론 브랜도)의 사후 권력 다툼에서 자기 형을 죽인 죄값으로 평생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배신자의 복합적 심리를 파고드는 것은 단지 얼마나 파격적이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얼마나 감독이 캐릭터들을 마음으로 감싸고 이해하려 드느냐 하는 것에 있으며 감독은 이 부분을 자주 간과한다.

오히려 여성 캐릭터들은 정반대로 너무 지고지순하고, 일편단심으로 남자 주인공들을 따른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엄정화)는 준영(감우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캐릭터이다. 결국 준영은 연희를 자신을 섹스 상대 정도로만 여기는 속물로만 보다가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그녀가 의사인 남편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과 결혼하여 변변찮은 삶을 살 마음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은주(한가인)도 친구들이 모두 등을 돌린 우식이 찾아오자 현수를 버리고 우식을 따라서 사라진다. <비열한 거리>에서 병두를 사랑하는 현주도 마찬가지고, <쌍화점>에서도 대리합궁으로 육체적인 정을 나눈 홍림에게 왕후는 마음까지 허락하여 함께 도망가자고 권하기도 하며 결국 홍림의 신변을 위협하는 왕마저 해칠 계획을 세운다. 강자에게 순종적인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환타지를 충족시킬 수는 있겠지만 시대에 맞지 않게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내비치는 대목으로 읽히기도 한다.

감독은 이렇듯 주인공을 둘러싼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중 잣대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남자들의 세계는 단순히 비열하고 냉정하고 차갑기만 하다. 마치 남자들의 세계가 그렇다는 듯. 때로 주인공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배신할 때는 가차 없다. 2인자는 자주 배신하며 그 배역 자체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있지 않아 보인다. 반대로 강자를 사랑하는 여인들은 너무나도 순종적이고 헌신적이다. 강자가 되기 위해 경쟁하는 남자들의 세계는 지나치게 단순한 캐릭터로 달려가고 그를 따르는 여성은 가부장적 권위에 순종하는 감독의 전반적인 영화 흐름이 나는 불편하다. 설령 가부장적 가치관의 팩트들을 끌어감에 있어서도 사건들을 풀어가면서 그 사건에 개입된 이들의 동기와 심리, 그리고 행동의 원인들을 찾아가지 않는 한, 캐릭터의 극단적 평면성은 스케일이나 촬영기술, 시각효과의 뛰어남으로도 커버되지는 않을 것이다. (끝)

2009/01/15 19:31 2009/01/15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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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유명한 시트콤 <프렌즈>의 전편을 다 보았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미국의 유명했던 시트콤에 지난 몇 년간 나도 참 많이 끌렸고 한 시즌 한 시즌 재미있게 본 기억이 아직도 많이 남는다. (물론, 프렌즈에 관한 한 아내의 '집착'을 빼 놓고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나에겐 이 코믹한 드라마가 흥미와 즐거움 이상의 것이었다. 물론, 몸값이 오를 대로 오른 배우들에게서 풍기는 매력이라거나, 각 시즌마다 짜임새있게 쓰여진 시나리오의 구성, 재치있는 입담들을 빼 놓을 순 없겠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 내가 깊이 매료되었던 건 내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것은 그 시기가 한창 내가 '일'에 파뭍혀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던 듯 하다.

나이가 2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냥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주변에서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나는 항상 학교, 교회, 선교단체와 같은 어떤 조직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일을 꽤 잘 하는 사람의 범주에 속했기 때문에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어느 시점에선가 나는 사적으로 받는 전화가 거의 없는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연락처가 쓰여진 플래너를 펼친 어느 날을 잊을 수 없다. 내게 소중한 우정을 가진 이들이 누구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무심코 펼쳐든 플래너에서 나는 도대체 누구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누구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주고 있는지 사실 나조차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내던져진 이후로 나는 세상이 나를 이끄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을 스쳐가듯 대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중요했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고 때로는 전혀 몰랐던 사람들도 갑자기 친해지곤 했다.

어느날 <프렌즈>를 보면서 카페에서 편안하게 매일같이 만나서 아무 이유없이도 서로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더 이상 세상에 내 몸을 맡기고 내 인간관계를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속 그들에게 있어서도 우정이 지속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그들의 환경을 변화시킨다. 이사를 하거나 직장을 먼 곳으로 옮긴다거나 친구들 간의 삼각관계.. 하지만 그들은 우정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친구들의 요구에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는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결국 우정을 키워가는 데에도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드라마는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그들은 시트콤의 출연으로 맺어졌지만 스튜디오를 나와서도 서로 간의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건, 시간이 지나면 선천적으로 가진 장점들과는 별개로 자신이 노력해서 가꿔가야 할 부분이 점점더 커진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의 인간관계,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나는 너무 힘들게, 먼 길 돌아가듯 깨달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더더욱 가까운 사람들이 소중하며 나에게 주는 의미도 그만큼 크다.

나란 사람은 원래 혼자 있길 즐기고 외로움을 많이 타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도 친구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안다. 우정없이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만큼 나에게 당신은 소중하다. 아니, '당신'이 아닌 '우리'는 소중하다.

2008/12/27 19:29 2008/12/27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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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Sam"을 보면서 마음 한 편이 껄끄러웠다. 사실 당시에는 샘의 모습, 변호사의 변화, 딸의 말과 부녀간의 애절한 관계를 풀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감정이입에 충실 하느라 그냥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껄끄러웠던 감정들은 가벼운 분노의 마음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처음에 비치는 장면은 스타벅스 커피샵이다. 샘은 지능이 낮은 아버지로 등장하며 스타벅스에서 주문을 받거나 청소를 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후반에는 피자헛으로 그 직장을 옮기게 되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은 실제 프랜차이즈 안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바쁘게 주문이 오고 가며 빠르게 움직이는 점원들을 유심히 보면서 매니저를 제외한 사람들 중에 샘과 같은 사람은 고사하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들을 거의 찾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샘은 복잡한 주문이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파들이 무서워서 근처 단골 식당이 아니면 식사를 하지 않으며 딸의 고집에 못 이겨 따라갔던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서는 급기야 당혹스러움을 표현한다. 그런데 왜 그 곳보다 더 분주하고 주문도 복잡하게 받는 스타벅스와 피자헛은 편안한 직장으로, 따뜻한 분위기로 비춰질 수 있었을까.

한편,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가장 중요한 대사들 속에는 미국 팝음악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비틀즈 맴버들과 노래들 제목으로 가득 차 있다. 배경음악으로도 쓰이고 있는 비틀즈의 음악은 가장 핵심적인 대사 가운데에서도 맴버들의 사생활이라거나 비틀즈의 음악 세계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코드들이 즐비하다. 게다가 마지막의 감동적인 샘의 대사는 미국에서 영화의 고전으로 받아들이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대사를 외운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기위해 미국인이 선호하는 영화들까지 봐줘야 한다.

영화는 은근히 미국적인 것이 참으로 따뜻하고 안락하며 뭔가 의미 있는 코드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그 위에다 모자란 아버지와 영리한 딸이라는 안타까운 플롯을 얹은 셈이다. 제3세계에 속한 우리를 포함한 여러 나라의 황색 인종들은 스타벅스나 피자헛에서 안락함과 인간적인 면들을 발견해야 하고 비틀즈의 음악 세계에 빠져들어야 하고 그 맴버들의 이름은 물론 히트친 노래들과 가사들을 암기하고 맴버들의 관계들도 추가로 이해한 후에 뿌듯함을 느껴야만 한다. 결국 가장 미국적인 무엇을 알아야만 이 영화는 우리에게 휴머니즘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혹시, 이 영화의 주제는 "휴머니즘"이 아니라 "팍스 아메리카나"가 아니었을까..

2008/12/27 19:27 2008/12/2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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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70-80년대를 살면서 시대의 사건들을 크게 느끼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여염집 며느리 마냥 장님 3년,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을 보내고 나니, 국민투표로 대통령도 뽑고 경제도 어느 정도 발전하여 거리에는 헐리우드 영화에서만 보던 프랜차이즈들이 즐비한데다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 분야와 영화, 미디어들, IT와 같은 첨단 기술들이 발전하면서 그것을 따라잡고 향유하는 데에도 정신과 시간, 물질을 투자하기 바빴을테니 말이다.

인문학 내지 사회학을 하는 사람들의 어설픈 흉내를 내지 않더라도 우리는 흔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하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가까운 집에서 이혼을 했다거나 아이가 죽었다거나, 부모님의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이사를 갔던 일들에 대한 유년기의 기억들을 되내어 보면 소문만 무성했지 정작 그 사람들의 손을 맞잡거나 이사를 도와주거나 어려웠던 부분들을 함께 짊어지기 보단 쉽게 이야기하고 가볍게 넘기던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시작은 어떤 의미에서 나를 심하게 짜증나게 만들었다. 3.15 부정선거에 주인공 성한모(송강호역)는 그 동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야산에 투표함을 묻거나 투표용지를 먹어버리는 일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믿는 이발사였다. 가까이 일하는 이발사 보조(문소리역)를 강간하여 동거를 시작하는 구도도 그러했다. 코믹한 설정이지만 내심 그게 그렇게 우습게 치부할 성질의 일들이냐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웠던 장면은 1960년 4월 19일에 있었던 부정선거 철회 집회의 스케치였다. 사사오입을 억지로 갖다 붙여 임신한 아이를 낳게 되는 당일에 군인들은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질을 해댔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성낙안이라는 아이의 코믹한 출산의 배경으로만 지나치는 개그씬에 다름아닌 장면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반면 영화를 보는 내내 조금씩 집중할 수 있었던 대목이 있었다면 그런 코믹한 장면들 뒤로 무덤덤하게 보도되는 왜곡된 라디오 뉴스 때문이었다. '사실은 이러했는데 사람들은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살고 있었다'는 느낌을 주는.. 너무나 담담한 보도였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영화가 <개그 콘서트> 분위기에서 <송환>의 분위기로 전환하는 대목은 성한모의 아들 성낙안이 전기고문을 받고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면서부터다. 사실 암울한 시대의 여러 사건들이 효자동에 사는 이발사에게는 별 생각없이 웃을 수 있는 일상이었지만, 옆집 사람들이 잡혀가게 되고 그들이 병신이 되어 돌아오거나 감옥으로 가게 될 때에는 그러한 거리감이 조금씩 좁혀지게 된다. 결국 자신의 아들이 돌아오지 않게 되자 영화는 코미디의 색을 잃는다. 잿빛 하늘처럼 어두워진 플롯은 결국 아들이 영원히 주저앉은 채로 일어서지 못하는 대목에서 객관성도.. 무덤덤함도 잃어버린채 울분의 정서가 폭발하고 만다. 일개 이발사에 불과한 성한모가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자르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나라를 욕하는 장면에서 이제 더이상 이 영화는 세상을 타자화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다.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주검이 되고 병신이 되어 돌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은폐하기도 하고 흥미로워하기도 하고 대부분이 그렇듯이 무관심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이 병신이 되거나 주검이 되어 돌아왔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역사이며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탓이다. 영화는 무엇을 말해주려고 했을까. 이러한 인간들의 간사함과 그로인해 겪은 사회의 비참함을 피부로 느끼게 해 주려고 일부러 처음에는 바보처럼 웃어 재끼도록 설정을 한 건 아닐까. 아무 생각없이 웃고있던 많은 사람들이 종국에는 간사하고 이기적인 자신을 쳐다보며 느끼게 될 당혹감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괴롭고 아프지만, 귀하디 귀한 선물은 아니었을까..

2008/12/27 19:24 2008/12/2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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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중반까지>

로이는 약간의 정신질환을 보이는 사기꾼이다.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서 생계를 유지하는 그는 그런 자신이 불편하다.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의 정신적 문제가 자신과 헤어진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던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에 기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아이의 행방을 찾는다.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다시 만나게 된 딸 안젤라. 안젤라는 아버지 로이를 만나자 반가워하며 그의 공간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자신의 딸 안젤라를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로이의 정신 질환들은 호전을 보이며 딸과 있는 시간을 통해 큰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자신을 닮아가는 딸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자신의 일을 정리하려 마음을 먹는다. 결국 그가 사기치는 일을 정리하려고 하지만, 정작 함께 일하던 가장 친한 친구가 그를 배신한다. 그 친구는 로이에게 가짜 정신과 의사를 붙여 주었으며 그가 자신의 딸이라고 믿던 안젤라도 사실은 그 친구가 로이를 속이기 위해 고용한 여자였다. 로이는 이미 전 재산이 있는 곳을 안젤라에게 알려주었고 모든 것을 알고 난 로이는 크게 놀란다.


<개입>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흐트러진 삶을, 혹은 잘못 선택된 삶을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이곤 한다. 기왕 망가진 인생, 어쩔 수 있겠냐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갑자기 그런 자신의 삶에 소중한 누군가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해, 자신은 쓰레기 더미에서 살더라도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가 좀더 좋은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소중한 사람은 허상에 불과했다. 사실 자신과는 아무 상광이 없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더군다나 그가 쓰레기 더미에서 모아온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은 채로..


<영화의 후반>

로이는 크게 흥분했고, 무슨 일을 치를 것 같아 보였다. 거기에서 그의 모습을 사라진다. 1년 후... 그는 카페트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 곳에서 우연히 안젤라를 만난다. 그는 안젤라에게 별 다른 말 없이 그녀를 용서한다. 그 돈은 원래 너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다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로이는 장을 본다. 간혹 거기에서 인사하던 여직원이 있었으나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로이는 열쇠로 문을 여는 대신 초인종을 누른다. 전에 매장에서 본 그 여직원이 그의 아내가 되어 있다. 그의 아이를 임신한 채.


<개입 II>

때때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사람들은 변한다. 그 변하는 내용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이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으로 해결하는 일에 미숙하다. 사람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 하지만 로이는 달랐다. 그는 안젤라와 있었던 시간을 통해서 진정으로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를 깨달았다. 자신의 딸을 임신했던 여자를 떠날만큼 미숙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안젤라를 통해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다. 가정의 소중함, 삶의 평안함 같은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필요한 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잃은 돈과 자신을 속인 사람들에게 그대로 되갚아 주는 일 대신, 거짓이긴 했지만 자신이 경험한 소중한 기억들을 진실되게 누릴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행복을 누리는 일에 너무 늦은 시간이란 없다!

2008/12/27 19:23 2008/12/27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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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람 포>는 빌리 엘리어트의 제이미 빌과 2007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독일예술영화조합상 수상, 2007 BAFTA 스코틀랜드 여우주연상 수상의 화려함 때문에 큰 기대감으로 본 영화다. 단적으로 말해서 빌리 엘리어트의 제이미 빌과 여주인공 소피아 마일즈의 연기가 돋보인 이 영화는 감독 데이빗 맥킨지의 명성을 한 단계 올려놓은 영화로 평가될 것 같다.

주인공 할람은 사랑하는 친 엄마의 죽음으로 사람들을 잘 대하지 못하고 멀리서 훔쳐보는 버릇을 가진 소년이다. 그는 엄마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상처, 그리고 엄마가 죽기 전부터 아빠는 새엄마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증오심은 새엄마에게 향하며 그녀가 자신의 친엄마를 죽였다는 심증을 키워간다. 한편으로 그는 아빠와 새엄마의 정사장면을 보면서 성에 대한 호기심도 키워가던 중 이를 감지한 새엄마와 관계를 갖고 자괴감에 빠져 집을 떠나 에든버러로 도망친다.

도시 한 가운데에서 엄마와 닮은 여성(케이티)을 쫓아가 그녀의 도움으로 호텔 식당에 취업한 그는 또다시 끊임없이 그녀를 숨어서 관찰하고 다가간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행각이 탄로난 할람에게 호기심과 모성애을 느끼는 케이티는 잠시 그에게 애정을 갖다가 이내 관계를 정리하려고 마음 먹는다. 할람은 다시 찾아온 새엄마의 독설에 화를 품고 그녀를 익사시키려 하지만 다시 그녀를 구해내고 달려온 아버지의 호소에 마음이 동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케이티와 헤어짐을 받아들이며 덤덤한 웃음으로 거리를 걸어가는 할람의 모습으로 장식된다. 그는 상처입은 소년의 위치에서 어느덧 성장을 경험한 것이다.

이 영화의 묘미는 지탄 받을만한 상황들에서조차 내면을 깊게 파고들어가서, 따뜻한 시선으로 인물들을 조명한다는 사실이다. 주인공과 정사를 나누는 새엄마조차도 악인으로 보이지 않는 캐릭터들의 설정은 과장되지 않지만 진실하다. 엄마를 닮았다는 이유로 매일 케이티를 미행하고 훔쳐보는 할람이나 유부남과 애인 관계를 갖다가 할람의 모든 행동을 알고도 그를 받아들이는 케이티도, 아내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그를 미워하고 반항하는 아들에게 끝까지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까지. 다 악한 면과 나약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공감이 가는 인물들이다. 또한 이 모든 인물들은 결국에는 서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의 문제가 드라마틱하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들은 그대로 남지만 인물들 각각이 그러한 미결의 문제 또한 받아들이는 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주인공은 새엄마를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용서하지만 자신이 일하던 호텔을 나오고 케이티와도 헤어진다. 케이티는 전 애인이었던 유부남과 헤어지고 할람을 선택하지만 할람이 아직 어리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와도 헤어진다. 상처들은 조금씩 치유되지만 모든 관계는 미결로 남아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표정은 한결 밝아보인다. 아니 극도로 흥분하며 증오심에 휩싸이거나(이 경우 영화에서 주인공은 짐승의 가죽을 쓰고 얼굴에 색을 칠하는 행동으로 대변된다), 반대로 극도로 기뻐하며 방안을 휘젓고 다니던 모습으로부터 이제는 다소 안정되고 여유있는 웃음이 뭍어난다. 큰 산을 넘긴 했지만 문제가 해결되거나 해피엔딩의 결말이 아니기 때문에 더 영화에 마음이 가는 부분이 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열린 결말이 더 현실의 일상에서 진정한 의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아닐까 싶다. (끝)

2008/11/19 19:16 2008/11/19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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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피로연에서 들러리를 섰던 여자는 담배를 피울 곳을 찾고 있고 여자를 주의깊게 보던 남자는 '작업'성 말들을 건네기 시작한다. 약간은 냉소적으로 대꾸를 하는 여자는 대화 자체를 즐기는 듯 하다. 대화를 한창 하다가 결혼하는 신부가 남자의 여동생임이 밝혀지고 이어서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임이 드러난다. 남자와 여자는 오래 전에 이혼한 커플이었고 여자는 남자를 떠나 런던에서 심장전문의와 새 삶을 시작한 것이었다.

남자는 결혼식에 여자가 오리라는 기대감과 만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비춘다. 여자는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무심함으로 대화와 하루 밤을 보내고 유유히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사라진다. 런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화는 훌륭하다. 내내 두 개의 화면을 겹쳐보이게 하는 촬영 기법은 때로는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 때로는 남녀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에 유효적절하게 사용되며 두 배우의 불안해보이는 대화와 표정 연기도 거의 절정 수준이다. (사실 이 영화는 팀 버튼의 아내인 헬레나 본햄 카터 때문에 본 것이다.)

하지만, 결말이 정작 아쉬운 부분이다. 여자는 흔들리던 마음과는 달리 정신 없이 택시에 몸을 싣고 공항으로 간다. 처음부터 여자는 하루 밤을 전 남편과 보낼 생각 외에 다른 '기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헤어짐과 혼자 런던에서 씩씩하게 살았을 그녀의 배경에 대한 어떠한 조명도 없이 남자-전남편의 작업에 흔쾌히 동행했다가 몇 시간 만에 마음을 정리하고 어떤 여운도 없이 돌아가는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 볼 여유조차 영화는 허락하질 않는 것이 아쉽다.

감정의 변화를 행동으로 예측하기 어려워서, 보는 관객들조차 안타깝고 답답하게 만드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아오이'나, 9년 만의 만남에서의 심리적인 묘사를 대화로 훌륭하게 풀어낸 [비 포 선셋]의 '셀린느'처럼, 영화 속 여자 주인공도 보여주고 싶은 내면의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에 당혹스럽다.

2008/05/15 19:06 2008/05/1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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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가십을 싫어한다. 가십보다는 냉소적이고 비꼬는 식의 말들을 더 싫어하며,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화를 내고 쌍욕을 하는 적극적인 태도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글의 시작부터가 좀 추상적이었다. 영화 <비스티 보이즈>는 보고난 후 내도록 기분이 안 좋았다. 승우가 끝내 지원을 칼로 찌르고 재현이 일본으로 떴기 때문이었을까. 이미 좋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기대'는 있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회식을 잘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빨 사이에 낀 음식 때문에 계속 혀를 감아가며 신경쓰는 것처럼 이 영화가 내겐 좀 불편했다. 왜였을까, 왜였을까..

난 영화평을 전문적으로 하진 않지만,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 중 하나로서 영화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감독이 배역들을 향한 시선이다. 그 배역 하나하나를 깊이 이해하고 파고들어서 그 배역의 내면, 심리, 그리고 행동의 이유들을 파헤쳐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포탈 사이트에 아버지를 죽인 아들 기사가 뜨면 한 줄만 읽고도 세상 말세라고 혀를 차는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서 그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고 그 아들은 왜 자신의 아버지의 숨통을 끊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주의깊게 살펴보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대가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비스티 보이즈>는 호스트들의 이야기다. 문제는 감독이 호스트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고 싶었다면, '호스트의 생활은 이렇더라'는 호기심 이상의 '개입'이 전제되어야 한다. 영화에서 승우는 집안이 망해서 호스트를 시작한 것으로 설정되었고 재현은 자신과 동거하는 승우의 누나 한별을 떠나려는 야비한 남자로 비춰진다. 그가 진 5000만원의 빚은 노름으로 날린 듯이 보인다. 지원은 폭력을 쓰는 남자를 싫어하며 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미워하는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자신에게 폭력을 쓴 재현을 떠난다. 재현은 지원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의심하다가 지원에게 집착하게되고 결국 그녀를 칼로 찔러 죽이고 만다. 영화에서 간혹 등장하는 호스티스는 호스트바에서 스트레스를 풀며 호스트들은 자기가 만나는 여자들의 등처먹을 생각만 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파편적인 장면들이 툭툭 던져지는 <비스티 보이즈>는 결국 내게 일종의 불쾌한 감정을 가져다 주었다. 이 영화는 마치 내게 회식 자리에서 "호스트바에 일하는 애들이 이렇게 산대. 골 때리지 않냐?'라고 가십을 한껏 쏟아내는 친하지 않은 회사 동료를 보는 느낌이었다. 영화는 그 어느 배역도 그 어느 상황도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끊임없이 거짓말을 둘러대는 재현에게 혀를 끌끌 차게 되며, 승우와 지원의 다툼은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싸우는 커플을 팔짱끼고 구경하는 행인들처럼 관객들 눈쌀을 지푸리게 만든다. 지원은 거짓말을 했다는 듯이 2차를 나가는 업소에서 일하면서도 별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난 영화가 끝난 지금도 한 없이 궁금하다. 왜 재현은 자신의 빚을 갚아주려는 한별을 결국 떠나 일본으로 갔을까. 승우는 왜 결국에는 지원을 칼로 찌르게 되었을까.
지원은 승우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별은 왜 재현에게 집착했을까. 호스트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여운을 두기 위해 감독은 CF나 뮤직비디오의 영상들처럼 그냥 한 장면 한 장면씩을 보여준 걸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전작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보여준 감독의 날카로움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는 <비스티 보이즈>의 하정우보다는 10년전 <태양은 없다>의 이정재가 더 그립다.(끝)

2008/05/08 19:04 2008/05/0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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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를 마치고 아내와 마이클 무어의 신작 <식코, Sicko>를 봤다. 식코는 제목처럼 미국의 의료 실태를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마이클 무어는 의료보험 민영화 이후에 미국 사회에서 환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손가락을 다쳤을 때에도 손가락 하나당 엄청난 비용을 매기는 것이나 9/11 테러 사태 때에 봉사에 힘썼던 이들이 폐질환으로 고생하는 데에도 미국 정부와 보험 회사에서는 그들에게 정당한 치료를 해 주지 않아 오랜 시간 고통 속에 몸도 마음도 상처로 가득한 경우를 보여줄 때는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마이클 무어 영화의 특성 상, 그는 과감한 생략과 극단적 사례들을 드는 경향이 있다. 특히, 미국의 민영화된 의료보험 제도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기타 국가들, 이를테면 영국, 캐나다, 프랑스의 의료 혜택의 장점만을 보여준 점, 그리고 미국의 환자들을 데리고 간 쿠바의 하바나 병원이 쿠바에서는 최고급 진료에 속한다는 점 등은 안티들의 비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분분한 반론들에도 불구하고 아파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 앞에서 그들의 상처를 먼저 돌아보지 않고 이윤과 손실액부터 따져보는 자본주의적인 사고가 무섭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이 두렵다. 그것이 한 사람의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 사람을 그렇게 내몰고 있는 상황이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고통스러웠다.

무어는 말한다. 쿠바도 할 수 있고, 캐나다도 할 수 있고, 영국, 프랑스도 할 수 있는데 미국은 못하겠냐고. 사람이 아파 쓰러질 때 그 사람부터 살리고 보는 정상적인 사회를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미국이 이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가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서 때로는 편파적으로 스크린을 채우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편파성을 지지하고 싶다.

2008/04/11 19:00 2008/04/11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