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서평

아내가 지금껏 이런 일을 해왔단 말인가
웹툰 <미생>에 공감... 남편, 아내의 일상적 책임부터 나눠가져야


 

 

최근 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 121회(4월 19일)를 보면서 갑자기 예전에 '귀남이'로 유명했던 드라마 <아들과 딸>이 생각났다. 가부장적인 창작물의 대명사였던 <아들과 딸>을 넘어서는 디테일에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미생>(프로기사만을 목표로 살아오던 주인공 장그래가 '회사'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겪는 일들을 그린 웹툰) 121회분 에서도 보여주듯, 이 나라의 여자들은 일상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직장생활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어야 살아남는다.

 

그래서 성공신화의 여성 임원들은 모두 수퍼우먼들이다. 열정적인 실무자이면서도 자상한 어머니상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남는다. <미생>에 나오는 여성도 가사 육아를 모두 해내면서 대기업 '차장'으로 진급했지만 엄마의 역할을 강요받으며 가장 인정받아야 할 가정에서마저 그 자리를 위협받는다.

 

남성은 '가장'이라는 명분으로 더 좋은 직장을 위해 몇 개월의 '잉여생활'도 이해받을 수 있고, 진급을 위해 집에서도 모든 노동에서 면제받는다. 진급 문제가 아니어도 직장에서의 '생존' 그 자체의 명분을 위해서도 집에서는 피로회복을 위해 낮잠도 자고 사람도 만나러 다니고 회사 단합대회로 낚시나 등산도 한다. 반면 여성은 퇴근 후 엄마의 부재에서 오는 아이의 '정서적 결핍'에 노심초사하며 짜투리 시간 모두를 쏟아 붓는다. 그도 모자라서 직장생활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남성은 결혼 이전부터 공부만 하면 모든 가정일에서 면제 혜택을 누렸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남성들은 밤새도록 공부만 해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오고 과일도 깎아주고 행여 방해될까 부모들이 TV도 꺼주고 과외학원도 알아봐줬다.

아이돌 가수 키우듯 대학 입학 때까지 공부 외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던 남성들은 결혼을 한 후에도 직장이라는 또 다른 '장'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생존 경쟁을 한다. 그 동일한 방식이라는 것이 자신의 목표를 위해 주변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희생의 대상은 자주 '아내'의 몫이 되곤 한다.

 

아내는, 한 회사의 모범 직원이자 가정의 성실한 가사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일들을 잘 소화하고도 '엄마'로만 남기를 종용당한다. 그리고 그 논리는 '여성' 그 자신이 아닌 누구의 엄마로서, 대출을 갚는 식구로서, 남편의 성공을 돕는 아내로서의 정체성일 뿐. <미생>은 이런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잘 담았다. 나도 많이 배웠다. 여성문제에 더 고민하고 더 좋은 조력자가 되기 위해. 갈 길이 멀다.

 

 

많고 많은 집안일... 하지만 티가 안 난다
<미생>에서 개인적으로 주의깊게 지켜본 부분은 남편과 아내가 말다툼을 하는 과정에서도 아내가 쉴 새 없이 집안 일을 하는 대목이었다. 남편은 '그만하자'며 자리를 피하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아내는 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하고 방을 닦은 후 가계부를 펴고 계산기를 두드리다 새벽 2시 즈음에나 잠자리에 든다. '혼자 낭만 다 차지하고 앉아서 나만 현실과 싸우란 거야, 뭐야' 그녀의 넋두리가 들린다.

 

우리 부부도 만화 속 장면에 공감하게 된 계기가 있다. 신혼 초에 아내가 직장을 잠시 그만 두었고 나는 갑자기 회사일이 바빠져서 자연스럽게 어영부영 집안 일은 아내 몫이 되었다. 나는 작은 일을 해도 생색을 내는 게 익숙한 캐릭터라 집안일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아내에게 생색내기 일쑤였고 아내도 초반에는 그런 나를 다독여줬다. 허나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아내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당신도 집안일의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실제적으로 나에게 다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아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집안일을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난 그 둘의 '차이'를 알지 못해 아내와 많이 다퉜다.

 

지금도 아내의 기대에는 못 미치겠지만 요즘은 빈말이라도 간간이 칭찬도 해줄 때도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제서야 고백하건대 집안 일은 정말 지랄같다. 회사원 마인드로 보자면 맨아워(1인 1시간의 노동량)는 끊임없이 드는데 티가 정말 하나도 안 나는 일이다. 젠장.

 

요즘 주말 매식비가 많이 들어 한 번은 이틀간 밥 여섯끼를 다 만들어 먹어보았다.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일단, 아침 점심 저녁을 먹으려면 식단을 짜야 한다. 5살 아이가 있으니 대충 먹더라도 영양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고로, 하루 한두 끼는 밥상을 제대로 차려야 한다. 밥상을 차리고 나면 먹는 건 10~20분이지만 다시 끼니마다 설거지가 쌓인다. 설거지를 다하면 음식 쓰레기를 모아서 버려야 한다.

 

밥 뿐이랴. 누가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속옷과 아이 옷은 삶아야 하니 따로 분리하고 울빨래거리와 걸레들도 따로 돌리니 분류할 때부터 나름 손이 많이 간다. 빨면 널고, 마르면 거둬서 갠다. 세탁기의 세탁망도 주말에는 뜯어서 찌꺼기를 제거해야 한다. 침대 시트도 갈아야 하고 주 1~2회는 침구 청소기를 돌린다. 침구 청소기는 망을 매번 빨아야 한다.

 

가습기 물도 매일 보충해야 하고 매번 깨끗이 행궈야 균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여 매번 열과 성을 다하여 행군다). 청소기 돌리고 집안 구석구석 먼지를 제거하는 일도 해야한다. 그 외에도 휴지통 비우기,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 식수 채우기 등 자잘하고 귀찮은 일들이 부지기수고 왔다갔다 하며 그런 일들 하다보면 두세 시간은 금방 가버린다.

 

아이 어린이집 준비물에 독서 숙제도 있고 날짜마다 입금해야 하는 돈도 많고, 씀씀이가 커질까봐 작년부터 시작한 가계부 쓰기도 해야 한다. 키우는 강아지도 주 1회는 목욕을 시켜줘야 하고 간간이 산책을 다녀야 이 녀석도 우울해하지 않는다. IT기기들도 펌웨어, OS업그레이드에 그간 찍은 사진 정리, 자료 정리, 아이 동영상 파일 정리들을 수시로 해줘야 나중에 지워지거나 분실할 염려가 없다.

 

이런 모든 일들이, 하나하나 적어보면 많아도 정작 해도 생색낼 거리가 하.나.도. 없.다. 안 하면 티가 확 나지만 200%를 해도 차이를 잘 모를 일들이다. 차라리 자크 라깡 같은 사상가의 책 한 권을 읽고 서평 몇 줄 끄적이는 것만 못하다(때로 인터넷에서 파워블로거나 서평의 달인으로 인정받는 남편들이 키보드에 붙어사는 동안 아내는 허드렛일로 앉을 새도 없이 왔다갔다 분주한 건 아닌지 관찰할 필요가 있다).

 

 

남편이 아내의 일상적 책임부터 분담해야

사실 신혼 초에도 나는 위에 언급한 모든 일 중 많아야 두세 가지의 일만 했다. 이유는 아내가 휴직을 했다는 것. 공학도인 내 입장에서 나름 공평한 업무 분배였다. 그 몇 가지의 일을 하면서도 나는 내심 내가 '아내가 할 일'을 돕는 좋은 남편이라고 으쓱댔다. 언젠가, 부부싸움 끝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내가 다 하겠다고 큰소리 치고는 아내가 하는 일을 일일이 따라 해보았다. 물론 매일매일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집안 일은 내 회사 업무량과 비슷했다. 특히 출산과 육아 초반의 가사노동량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나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아내에게 얘기한다. 내가 자취할 때 난 이런 프로세스로 살지 않았다고(더럽게 살았다는 말이다). 아내는 대답한다. 아이와 자기와 함께 살려면 내가 자취하던 그 프로세스로는 살 수 없다고. 물론,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를 분담하고 때때로 전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동료가 계속 허드렛일을 하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다들 걱정한다. 그가 혹여 '내가 이런 일 하러 고생하며 이 회사 들어왔나' 하는 생각을 할까봐, 그러다 퇴사를 하거나 팀을 옮길까봐 그렇다.

 

집에서 아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 받아줄 사람은 남편 밖에 없다. 짐을 나눠질 사람도 남편 밖에 없다. 등산도 다니고 낚시도 다니고 동호회 활동도 할 수 있는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자기계발을 해서 더 나은 사회적 입지를 얻을 아내를 만들어 줄 사람은 남편 뿐이다. 이른바, 남편이 가사와 육아를 모두 전담할 수 있는 탁월한 '엄마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면 아내의 자기계발, 혹은 2~3일의 정줄(정신줄) 놓은 외출이 가능하다.

 

이제 나의 아내는 외출이 가능하다. 며칠 친구들과 놀다와도 일상에 별 지장이 없다. 이 사실이, 가부장적 한국사회에서 의미하는 바는 크지만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만 한정해서 말한다면, 내가 가정에서 '엄마역할'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간간이 쓰는 현학적인 글들보다 더 의미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내가 낼 수 있는 생색은 이런 거라고 본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8131

2013/04/26 00:50 2013/04/26 00:50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또봇10기의 주제는 '떡볶이, 다문화가정 그리고 여자경찰 오순경'이다.
 
악당들은 도시의 유명 떡볶이집을 폭파하여 아이들을 혼란에 빠뜨릴 계획을 세운다. 하나와 두리(또봇 파일럿)는 도시를 벗어나 교외로 이사를 가게되고 거기에서 만난 남자아이와 여동생과 친구가 된다.
 
이사간 동네 떡볶이집을 운영하는 아줌마는 베트남 사람인데 특이한 떡볶이맛에 아이들은 그집을 선호하지만 베트남말을 흉내내며 그 아줌마를 놀려대는데 알고보니 그녀는 새로 사귄 남자아이의 새엄마이자 여자아이의 친엄마였고 그 일로 아이들은 심하게 싸운다.
 
남성중심 공간인 경찰서에서 오순경은 어리버리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자상하고 모성애가 강한 그녀는 정작 중요한 순간에 또봇을 돕는 핵심 인물이다. 또봇을 만든 두 남자 리모와 도운은 오순경의 부서진 자동차를 수리하다가 경찰차 또봇을 새로 만드는데 오순경의 어리버리함을 걱정하는 리모와는 달리 도운은 그녀의 천성적인 선함을 높이 평가한다. (또봇의 모든 주제의식은 도운을 통해 드러난다)
 
나는 거대담론적 애니메이션들의 비판으로서 에반게리온이나 공각기동대처럼 또봇 시리즈도 하나의 멋진 애니로 평가한다. 게다가 또봇은 재패니메이션 특유의 가오잡는 모습이 없다. (인류보완계획이니 하는 일반인은 이해조차 못할 거대한 음모는 없고 악당들은 10살짜리 애들도 다 파악할 수 있는 사사로운 계획만이 넘쳐난다)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건 기껏해야 떡볶이집, 만화방, 식당 등 그들의 일상 공간이다.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한부모가정, 가출 청소년, 장애인, 다문화가정, 말단 경찰 등 사회적 약자다. 그들에게 주어진 또봇이라는 기계도 처음 설계를 한 도운이 정서적 지지를 통해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개념으로 개발된 존재다.
 
9기 엄마의 자장가를 보다가 눈물을 훔쳤던 나는 이번 10기도 촉촉히 젖어드는 마음으로 봤다. 물론 경찰차 또봇이 너무 변신을 늦게해서 성하는 좀 지루해하더라만 .-_-;;;;;;

 

주말 감상기 끝.

2013/04/16 23:01 2013/04/16 23:01
Posted
Filed under 컨텐츠/페미니즘
서평을 쓰려던 <한국교회와 여성>은 서평을 쓰기에는 좀 거시기한 구석이 있어서 간을 보는 중.
일단 3개의 발제문 중 이정숙 교수의 "우리 딸들이 즐겁게 예배하기 위해"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그녀가 언급한 '젠더타협' 혹은 '젠더협상' 이론에는 별로 동의가 되지 않았지만 아래 내용들은 유익했고 공감할 부분이 많았다. 여성신학도 갈 길이 멀구나...

"스탠리 그렌츠는 보수적 기독교에서 교회 내 여성문제에 대해 두 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양극화 현상을 보인다고 전한다. 즉 사역의 모든 면들이 여성에게도 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평등주의자들과, 여성은 오직 도와주는 역할로서만 합당하게 공헌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보완주의자들이다. 보완주의자들을 1987년 성경적 남성과 여성을 위한 협의회를 결성하고 1988년에 ...덴버성명서를 작성했다. 이들 그룹과 관련된 신학자들로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제임스 패커, 웨인 그루뎀, 페이지 페터슨, 로버트 갓프리, 존 파이퍼 등이 있다.

여성의 교회 사역에 관한, 또 부부관계에 관한 이들의 입장은 성명서의 다음 부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내들은 남편의 권위에 저항하지 말고 남편의 리더십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순종해야 한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한 축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다스리고 가르치는 어떤 일들은 남성에게 제한되어 있다." (113~114쪽)

교회 여성들조차 여성신학 관련 연구가 너무 학자연하여 공감하기 어려운 데다가 과격하고 또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 신학이라기보다는 일부 진보적이거나 상아탑 안의 여성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여성 신학자들의 메시지가 신학적 색깔론에 가려져 여성들에게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면서 충분한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109쪽)

2000년 이후 지식층이며 진보적 인사를 자칭하는 남성들 중 여성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학문적으로 지지하는 듯 했지만 구체적인 헌신없는 관심으로 끝났다. 반면 복음주의 남성들은 여성주의를 멸시하거나 은근히 두려워하기도 했다. 마치 몇몇 여성주의자들이 온 세상을 타락시키고 전복시킬지 모른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들도 막상 자신의 딸들이 사회적 지위를 갖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했고 예외적 여성이라고 평가받기 원했다. 교회 여성들의 경우는 진보나 보수를 떠나 비교적 유사해 보인다. (111쪽)

여성들은 교회 사역에서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양성 평등적 사고가 부족해 뎡등하지 못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다. 설문조사에 응한 절반의 여성들(51.0%)은 교회에서 주로 하는 일이 '청소와 음식 만들기'라고 하며, '교사, 예배 기도, 설교' 등의 항목에서는 모두 합해 1.7%의 여성들만이 참여한다고 답했다. 이는 교회 내에서 여성의 위치가 결코 평등한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문제가 문제로서 인식되지 않으니 더욱 심각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설문조사에서 교회 여성들의 '하고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차이를 인상깊게 보았다.(129쪽)

신대원을 졸업한 H는 남편의 이해를 얻지 못해 예전처럼 평신도로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H의 경우 남편은 오히려 교회에서 다양한 사역을 하는데 비해 신학을 공부한 자신은 제한된 사역을 하고 있다고 했따. 동기동창인 남편이 평소 자신을 은근히 경쟁상대로 생각해 질투하며 불편해 하는 것을 감안해, 남편이 좀더 신앙적으로 성숙해져 자신의 사역을 인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중략) 그런데 H의 주저함이 남편의 머리됨을 인정해서인지 가정의 평화를 위함인지는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다.(137쪽)"

(<한국 교회와 여성> 중 2장 '우리의 딸들이 즐겁게 예배하기 위해', 이정숙)
2013/04/07 01:20 2013/04/07 01:20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서평

스트레스를 조장하는 '피로사회', 그 해결책은
한병철의 <피로 사회>를 읽고

 

/김용주

 

작년 즈음인가. TV에서 직장인 두 사람의 스트레스에 관한 검사를 하는 내용을 보며 흥미로워했던 적이 있다. 기억을 더듬고 약간 나름의 각색을 더한다면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한 사람은 회사에서 항상 웃는 얼굴이다. 팀원들이 무슨 부탁을 해도 매사에 적극적이며 일이 주어지면 주도적으로 한다. 회식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기막히게 뽑아낼 수 있는 몇 곡의 노래가 있는데 이는 아마 집에서 연습도 많이 한 것 같다. 사적인 대화에서도 주식투자부터 문화예술 분야까지 상당히 많은 영역에서 화제거리를 곧잘 풀어낸다. 살짝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동료들과 함께 담배피는 10분 동안의 대화는 은근 감칠맛이 난다.

 

다른 한 직원은 그와는 다르다. 아침에도 무표정한 모습으로 출근을 해서는, 상사나 선배 동료가 지시하는 일 하나하나를 왜 자기가 그 일을 해야하느냐고 따져대기 일쑤다. 팀원들의 부탁을 다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별 이유없이 타인에게 자기 시간을 내주는 걸 꺼려한다. 퇴근 후에 갑작스런 회식이 잡히면 그는 선약이 있다고 자리를 피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집단생활에 적응을 못한다고,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라며 뒤에서 수군거리기곤 한다. 누군가가 그는 취미생활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악기 레슨을 받는다고 했다.

 

이 두사람의 스트레스 지수를 검사했다. 결과가 어땠을까. 놀랍게도, 매사에 긍정의 힘이 넘쳐나고 적극적인 직원이 심각한 우울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판명났다. 스트레스 지수도 높았고 자살 충동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매일 얼굴을 찌푸리며 까칠하기 그지없는 다른 직원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팀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로사회
한병철 교수는 자신의 유명한 책 <피로 사회>에서 이런 현대 직장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문제를 신선하게 접근한다. 과거 모더니즘 시대는 규율과 법칙, 원리, 강제를 통한 관리체제가 개인을 구속하고 일하게 만들고 압박을 주었다면, 현대는 그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진단한다.

 

바로 긍정의 힘, "예스 유 캔"의 마법이 그것이다. 진위를 따지던 시대, 서구사회의 문명이 진리 그 자체였던 시기를 지나 문화적 다양성, 서로의 기호가 진리를 상대화하는 현대(포스트모던 시대)의 사회 구성원들은 타인, 타문화, 타업무와 같은 기타 자극에 대해 보다 유연한 접근을 요구받는다. 일단 다 긍정하고, 모두를 정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흡수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고로 어떤 조직에서의 이질성과 타자성은 축소되고 대기업에서 그렇게 부르짖는 소통과 협력 그리고 무한한 자기 긍정과 자신의 능력의 과잉을 고양할 것을 요청받는다. 긍정의 힘이나 자기개발, 다양한 분야를 어우르는 통섭적 접근, TRIZ, 어학, 시간관리, 멀티테스킹, 하다못해 두통이나 심한 피로가 몰려와도 약물(포도당 링겔, 피로회복제, 두통약)을 먹어가며 자신을 혹사시킨다. 이렇게해서 자기과잉을 성취하는 자가 글로벌 시대에 진정한 승자이자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된다.

 

하지만 실상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기 긍정의 최면에 빠져 이전 세대와는 다른 병리현상을 경험한다. 면역, 자기방어의 벽을 허물고 무방비상태로 쏟아지는 정보, 대인관계, 처리할 일들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한병철 교수의 진단대로 현대인이 겪는 심리적 문제, 즉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라는 것이다. 결국 긍정의 시대, 시장 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한 개인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학대하며 자책하며 썩어간다.

 

 

해결책은, 탈진에서 무위로

이러한 지식, 문화, 업무의 과잉 속에서 한 개인은 매순간 효율적, 유연한 습득이 요구되기 때문에 멈춰서서 깊은 사색을 할 시간적 여유는커녕 잠시 멍 때리고 있을 시간도 없다. 회사에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라고 닥달하지만 그것은 한 영역 안의 정보를 다른 영역에 카피하거나 적용하는 영역을 넘나드는 모방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현대인은 방만한 일들을 처리하지만 산만하고 불안하며 스스로 마음의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따져보고 걸을 시간이 없는 탓에 등떠밀려 앞으로 전진한다. 결국 지금 한참 잘 나가는 능력자는 어찌보면 빠르게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격이다.

 

저자가 결론이나 대안을 명시적으로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도는 명확하다. 긍정의 힘을 기반으로한 성과사회는 결코 '규율 사회'보다 진보한 패러다임이 아니다. 종국에는 개인 스스로를 (내적 암시를 통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만드는 악순환을 조장할 뿐이다. 인간은 멀티태스킹이나 치밀한 시간관리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병리적 고통 속에 빠질 뿐이다. 따라서 충분한 사색과 여유, 적당한 내적 면역체계의 복구, 나아가 '탈진의 피로'가 아닌 '무위의 여유'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나또한 저자의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6185

2013/04/05 00:49 2013/04/05 00:49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전설의 귀환... '슈가맨'의 투어소식이 반갑다
[리뷰]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을 보다

 

/김용주

 

서칭 포 슈가맨을 보다!

극장에서 보는 건 끝내 놓쳤던 <서칭 포 슈가맨>. 아카데미 수상 소식을 듣고서야 황급히 '챙겨서' 보았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수작이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슈가맨, 식스토 로드리게즈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묘미는 뮤지션으로 실패하고 평범한 노동자의 삶을 살던 한 사람이 알고보니 남아공에서는 비틀즈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그의 반응에 있다. 남아공의 많은 이들에게 전설로만 여겨졌던 수퍼스타 슈가맨, 로드리게즈가 사실은 버젓이 살아있었고 그에 더해 남아공에서 콘서트를 열게된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수많은 팬들 뿐 아니라 당사자인 로드리게즈 자신도 흥분한다.

로드리게즈는 오랜 시간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팬들의 존재를 듣고 다소 당황스러워하지만 정작 공연장에 나타나서는 마치 그동안 계속 공연을 해오던 사람처럼 침착하고 평온한 모습의 공연을 보여준다.

 

'헐리우드 문법'과 차별화된 이 영화의 주인공 슈가맨은, 남아공 음악계의 전설이 되고 각종 차트를 석권하고 매니저가 생기고 차기 음반과 월드 투어를 개최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그저, 공연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노동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더 윤택한 삶을 살거나 더 음악적인 고민을 하며 창작욕을 불태우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습관, 문법을 밟지 않는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시종일관 슈가맨, 바로 자신이다.

 

그는 어떻게 젊은 시절에 그런 탁월한 가사를 쓰고 노래를 했고, 그의 음악인생이 실패하고 나서도 사회의 가장 낮은 계급의 삶을 살면서 영혼의 고결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갑작스런 성공에 매몰되지 않고 미친듯한 함성과 환호를 뒤로한채 돌아와서 다시 일상에 만족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사람들이 전율하는 그 인격의 무서움이다.

 

로드리게즈는 무서운 사람이다. 내면이 참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그는 갑작스런 환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고고함, 겸손함을 굳이 표현하거나 강조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왕자가 된 기분'이라며 해맑게 웃었던 그는 사실 평범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그를 인간적으로 더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단 90분만에, 나는 슈가맨을 사랑하게 됐다.

 

 

'전설의 귀환', 그의 2013년 투어 소식을 듣고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인터넷을 뒤져본 결과 그는 올해들어 활발한 활동에 들어갔다. 이 영화가 나온 작년 즈음부터 방송이나 공연장에 게스트로 출연하더니 올해부터는 본격적인 투어에 들어갔다. 전설적인 남아공 콘서트인 <Dead men don't Tour>가 1998년에 있었으니 그가 '발견'되고 무대에 선 지 15년만이다.

 

1998년 공연 이후 그는 다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간간이 방송에 출연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음악을 다시 한 건 15년만이다. 그의 늦은 공연은 나에게 다른 묵상을 가져다준다. 짐작컨데 15년전 대중의 호출은 그의 '과거'의 재연, 재현을 기대했기에 그는 그 공연 외에 더 보여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 환호와 갈채, 많은 접촉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상으로 돌아간 건 그가 음악인으로 들려줄 이야기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음악을 사랑해준 이들에게 들려줄 무언가가 생겼기 때문을 아닐까.

 

그는 올해로 72세가 된다. 어쩌면 13년 투어 콘서트는, 자신의 음악 인생을 정리할 의도일 수도 있겠다. 뮤지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혹은 확인받으려는, 혹은 '선언'하려는 행보일수도 있겠다.

 

1998년 남아공 공연 이후, 그의 지난 15년은 어땠을까. 나는 그의 허름한 집 앞을 서성이는 상상을 자주 해본다. 사실, 내 짐작이 어떻건 상관은 없다. 어떤 의도에서건 그의 인생 후반 음악 여정을 축복한다. 혹자의 말마따나, 한국에도 와주었으면 좋겠다. 내 평생, 칠순의 나이에 이렇게 설레는 음악인이 또 있을까 싶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4442

2013/04/05 00:47 2013/04/05 00:47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이런 마초들이 왜 안 밉지? 환장할 노릇
홍상수 감독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김용주


홍상수 감독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봤다. 영화는 재밌었다. 이선균은 원래 좋아하는 배우고 정은채라는 여배우는 원래 모르던 배우였다. 그런데 영화 속 그녀의 얼굴에서 시종일관 빛이 났다. 누구지? 정유미 이후로 기대되는 배우급이었다고나 할까. 영화는 삼일절 조조로 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찜찜했다. 왜였을까.

 

한때 나는 홍상수를 싫어했다. 7년쯤 전에 쓴 글을 보니 나는 홍상수가 이래서 싫었단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인간사(人間事)를 미시적으로 파헤치는 그의 시각은, 영화를 보는 내내 현미경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본 후 그것을 여과 없이 스크린에 담아낸 듯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신선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관이 싫다. 아니, 그의 세계관이 싫다. 그에겐 모든 것이 형이하학적이다. 영화의 주제의식은 거칠게 표현하자면,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정도랄까. 영화 속 인물이 교수이건 학생이건, 어떤 사회에 어떤 시대에 몸담고 있건, 결국 사람은 직장을 얻어 먹고 사는 문제, 남녀관계에서의 육체적 사랑, 질투심 따위만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귀결된다.

 

이는, 마치 모든 생물들과 온 세상의 물질들이 결국에는 원자와 분자들의 운동으로 귀결된다는 환원주의적 시각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인간은 태생적으로 원초적인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먹고 사는 문제, 남녀 간의 사랑, 질투심, 돈, 집, 직장.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결국 이것들은 실제로 우리 삶의 큰 영역을 차지하는 부분이며,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하찮게 여기지만 무의식 속에는 사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역임을 홍상수의 현미경 같은 카메라는 꼬집어 드러낸다. 사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본질적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과 함께."

 

지금은 그때처럼 홍상수의 작품에 비판적이지는 않다. 그동안 그의 영화를 보는 내 시각이 많이 달라졌고, 또 그의 최근 몇 년간 작품들도 완성도나 스타일 자체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 즈음 문득 이 영화가 찜찜한 이유를 알았다.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인 '정은채'라는 배우를 검색하다가 그녀가 영화에서 설정처럼 영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화에서 그녀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아 다른 학생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래서 따돌림을 당한다. 그런데 또래집단에서는 불편한 캐릭터인 그녀가 중년 남성들의 눈에는 정말 통통 튀고 매력적이다.

 

젊은 여대생인데다가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다. 게다가 이국적으로 생겼는데 외국생활을 오래해서 문화적으로도 외국 느낌이 난다. 게다가 또래 집단과 거리감도 있다. 친구들에겐 '악마'같은(해원은 자기를 악마라고 말한다) 존재지만 지도 교수, 주변 아저씨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그런 여대생과 남자교수의 불륜이라니. 
 

두 사람과 그들을 둘러싼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흥미를 자극하고 교수들의 위선과 학생들의 시선, 행인처럼 지나가는 인물들을 통해 반복되는 행동들이 영화를 맛깔나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이 영화의 원초적 몸뚱아리는 중년 남성들의 판타지, 여신같은 여대생 '해원'이다.

 

사실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정작 중년 마초들은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여성들에게도 호소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나는 그 이유를 그가 '패를 보여주는' 영화를 찍기 때문이라고 본다. 홍상수의 내러티브는 마초적인데 그 내러티브의 디테일이 정작 마초들을 까발리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속 남자들은 다 속물스럽다. 그런데도 영화 속 남자들이 그리 밉지가 않다. 환장할 노릇이다.

 

사실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는 내 감정이 분열되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큰 틀에서 그의 영화는 페미니즘적 입장을 취할 때 반대할 만한 요소들이 많다. 그의 영화에서 여성의 역할은 항상 남자가 같이 자고 싶어하는 대상으로서 '성적인 요소'만을 함의한다. 사실 그는 그것을 까발리고 싶어한다. 영화 속 남자들은 뭐 대단한 얘기들을 하고 예술을 논하는 것 같지만 개나 소나 할 것 없이 어리고 예쁜 여자들의 꽁무니나 쫓아다닌다. 사실 우리가 그러지 않냐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굵은 선에서 보면 그의 영화가 싫다. 그런데 자꾸 영화 속 '그들'의 일상이 궁금해진다. 그 다음 상황에 빠져든다. 불륜을 행하는 교수는 자기 제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가정을 버리지도 못하는 한심한 인생이다. 영화에서 7년째 불륜관계를 갖는 또다른 커플(유준상/예지원)은 티격태격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한다. 남자는 죽어마땅한 유부남이 아니라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불쌍한 아저씨다. 너무 적나라한 의도들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드러나서, 보는 나도 막 '그들'이 걱정스럽다.

 

여주인공 해원은 이 관계가 지긋지긋해서 끝내려고 결단하지만 또다시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보며 힘들어하다가 영화는 끝난다. 매번 그렇듯 홍상수의 영화는 기승전결도 없고 클라이맥스도 없다. 더 미치겠는 건, 뭐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없는데 영화는 재밌게 보게 되더라는 거다. 도대체 이건 뭐란 말인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소재를 가지고도 이렇게 내 '동정(?)'을 이끌어낼 수 있단 말이냐. 아저씨들의 판타지 같은 이런 영화를 보며 즐거워해도 되는 건가. 뭐 이런 생각이 계속 든다. 하여간, 참 안쓰러운 매력이 있는 영화다.

2013/04/05 00:46 2013/04/05 00:46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서평

'중년의 위기' 그 은밀한 욕망을 털어내려면
크리스토프 포레의 <마흔앓이>를 읽고

 

/김용주

 

'크리스토프 포레? 누구지?' 책 검색을 하다가 찾아낸 책의 저자 이름이 낯설다. 아마존에서 검색을 해도 이 프랑스 저자의 책에 대한 평을 접할 수 없었다. 원제가 <Maintenant Ou Jamais! La Transition Du Milieu De Vie>인 이 책의 번역서 제목은 <마흔앓이>였다. 마흔이란 숫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내 눈을 사로잡았으니 이 책의 편집자는 내용에 상관없이 일단은 제목 선정에서 성공한 셈이다. 원제는 중년의 전환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40대 전후의 전환기를 경험하는 중년을 대상으로 쓴 심리학 책이니 번역서 제목과 그리 동떨어진 건 아니다.

 

순전히 제목에 대한 호감으로 구입하여 읽기 시작한 책은 첫 페이지부터 빠져들어서는 2-3일 만에 다 읽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대단히 좋았다. 누가 내게 요즘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물론 30대 중반을 넘긴 이들에 한하여.

 

누구나 그렇듯 멀리 있는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문제의식을 체감하기 어렵다. 따라서 결혼을 하지 않은 자녀가 없는 이삼십대 초반의 싱글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어설프게 늙은 척하려는 젊은 작가지망생들에게도 추천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책으로 중년의 경험을 취하지 말고 몸으로 겪어나가는 것이 더 유익이다) 허나 당신이 40대 전후의 중년이라면 이 책은 매.력.적.이다.

 

이 책을 읽던 중 영화 <언페이스풀>이 떠올랐다. 그다지 좋은 영화는 아니었지만 이 영화 초반에 코니(다이안 레인)가 남편이 출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멍하게 밖을 내다보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슬픔, 무료함, 의미없음, 늙어감.…. 이 모든 것을 담은 듯한 표정. 이 한 장면은 장차 있을 그녀의 외도를 의도하며 정당화시켜준다. 그녀의 가정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남편도 성실하고 착하며 자녀도 잘 자란다. 그저, 그녀가 중년에 들어섰을 뿐이다.

 

어느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가 컸다. 뭐 하나라도 하려고 치면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던 아이가 어느새 청소년이 되어 부모의 참견을 싫어한다. 아이를 위해 나의 존재 자체를 희생했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아이는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좀 있으면 집에서 독립을 할 판이다.

 

남자는 회사생활도 이제 익숙해졌다. 익숙하다 못해 이젠 무료하다. 매일 하는 일이 똑같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가끔 숨이 막힌다. 창밖을 물끄러미 볼 때가 잦아졌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를 슬픔, 대상이 없는 원망의 감정들이 밀려온다. 부모는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주던 존재에서 도리어 내가 보호해야할 연약한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중년의 위기'인가.

 

저자는 흔히 사용하는 '중년의 위기'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는 과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40대를 전후해서 삶의 전환점이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청년까지는 부모가 원하는 삶, 국가와 사회, 배우자와 아이들,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애썼다면 이제는 다시 나에게 자신의 가치, 욕망에 대해 다시금 집중하게 되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시기가 찾아올 때 그 욕망들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말한다.

 

중년에 많은 이들이 명품 옷이나 고급 취미에 몰두하거나 젊어지려고 성형수술을 반복한다. 혹은 연하의 애인을 사귀어서 데이트를 하거나 불륜관계에 빠진다. 심지어는 술과 도박에 빠지기도 한다. 갑자기 배우자와 이혼을 하거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새로운 분야의 회사로 이직을 하기도 한다. 친절했던 사람이 한순간 괴팍해지기도 하고 헌신적이었던 엄마가 딸처럼 옷을 입고 밖에 나가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부부가 서로의 이야기에 무심해지고 각자의 취미생활과 모임활동에 열을 낸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포레는 본서에서 여러 사례들을 보여주면서 중년의 심리상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융의 심리학에 기대어 그 마음 속의 문제들, 욕망들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많은 중년의 일탈행동들이 본질적이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그런 개별 행동(외도, 술, 성형)으로도 중년의 흔들림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감기의 본질이 콧물이 아니듯 중년의 흔들림의 본질은 '나자신'의 욕망을 바르게 알고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다. 중년의 '내'가 행복해야, 배우자가 행복하고 자녀가 행복하고 나아가 가정과 사회가 행복하다. 하지만 중년의 '나'는 내 맘대로 해서는 안 되는 가정, 사회적 제약들이 너무도 많다.

 

한 1년, 5년, 나아가 10년은 참고 살 수 있다. 하지만 10년을 넘어서면서 이 삶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 때, 사람들은 무너지게 된다. 더이상 참아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타자들이 규정한 페르조나를 뒤집어쓰고 꼭두각시처럼, 노예처럼, 그렇게 늙어갈 수는 없다.

 

그것이 중년을 맞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절규다. 특히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프랑스 중년보다 한국 중년들이 더 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청년들은 점점더 취업도 혼기도 늦어지고 있다. 회사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도 전에 늙는다. 퇴직은 점점더 빨라지고 있다. 청년의 혼란, 어려움을 갓 벗어나면 중년의 흔들림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로 이 책은 우리나라 중년들에게는 더더욱 의미있는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포레의 제안은 의외로 간단하다. 풍선의 압력이 높아지면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진다. 풍선이 터져버리기 전에 미리미리 바람을 빼서 압력을 낮춰야 한다. 나에 대해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들을 천천히 그리고 많이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해나가야, 말년에 일탈행동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현재는 건강한가. 그렇지 않다면 포레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원문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3353

2013/04/05 00:38 2013/04/05 00:38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서평

대한민국 부모, '욕망해야 괜찮아'
[서평] <대한민국 부모>, 눈에 힘주고 읽었다

 

/김용주
 
#1.

책 <대한민국 부모>를 의미심장하게 읽었다. 읽는 내내 눈에 있는 대로 힘을 주고 읽어서 한동안 눈이 시릴 정도였다. 이 책은 서두에 자녀 교육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한국 사회의 왜곡된 가정문제가 모두 얽혀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공저자들이 말한 대로 '문제의 자녀에게는 문제의 부모가 아닌 문제의 부부가 있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중년의 부부들은 위기에 처한다. 소통의 문제가 생기고 자녀교육이라는 프로젝트 안에서 왜곡된 욕망을 투영한다. 아내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경험하다가 출산 후 사회생활을 접고 현실적인 선택, 즉 자녀의 매니저이자 자녀를 애정과 투자의 대상으로 규정짓는다.

남편은 40대에 혼신의 힘을 다해 직장생활을 하지만 언제 낙오될지 몰라 집안일·가사노동은 고사하고 특히 자녀교육에서 배제되다가 아이가 반항을 하게 되는 중·고교 시절 군기반장으로 투입된다. 이때는 자녀와 교감이 없는 채로 엄마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적 폭력을 행사하므로 자녀는 급속도로 아빠와 멀어진다.

 

이 부부는 각자 자신의 욕망이 배제된 삶을 강요받으며 혹은 자신의 욕망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며 40대를 자녀교육이라는 대국민 사업에 전념하다가 자주 좌초한다. 대부분 아이의 일탈이 원인이 되며 때때로 배우자의 외도로 가정은 허물어진다.

 

 

#2.

개인적인 얘기를 잠깐 한다면, 내 아내의 최대 장점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아내는 매순간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항상 돌아보고 그 원하는 바에 우선 순위를 두고 그 다음에야 주변과 조율과정을 거치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함께 살면서 처음에는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함께 7~8년을 함께 살아보니 자기 욕망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이 배우자 입장에서는 더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내도 처음부터 자기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사실 오랜 자기 검열과 성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자주 아내는 오히려 나의 억눌린 분노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이해하는 나의 분노는 결국 욕망의 좌절에 다름 아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부모의 기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애썼다. 뭐랄까, 내가 바르게 성장해야 우리 가정의 행복이 보장된다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나는 내가 어느 정도는 왜곡된 교육의 피해자라고 평가한다.

 

책 <대한민국 부모>를 읽으면서 나는 나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나의 꽤 많은 활동들이 사실상 외부를 향해 있다. 초자아의 준엄한 명령이 나의 일상을 지배한다. 회사에서는 '팀장님과 후배 사원들과 소통과 협력에 애써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집에서는 '아내가 힘드니 내가 육아를 분담해야 한다' '부모님이 내가 크는 동안 애를 많이 쓰셨으니 내가 항상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걱정과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그런 류의 것들이다.

 

때로는 내가 쓰는 글이나 대화 시에 드러나는 나의 일정한 논리들에서도 그런 초자아적 억압은 투영된다. 약자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니 그것을 위한 글쓰기에 노력해야 한다거나 여성이 피해자이니 내가 남성이지만 여성을 대변하도록 애쓰자거나 제3세계 사람들을 위해 공정무역 제품을 쓰려는 노력까지.

 

 

#3.

투박하게 정리하자면 나의 존재감은 초자아적인 어떤 규범을 충실히 지키고 그것을 칭찬받는 일에 전적으로 기대어 있다. '네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우리가 좋아졌어' '네 덕에 내가 행복해' 등 이런 말들을 은연 중에 바라는 마음이 있는 셈이다. 그것 또한 욕망이라면 욕망이라고 하겠다.

 

<대한민국 부모>에 나오는 남편들 중에는 죽도록 일하고 가정에서 외면당하는 이들이 있다. 약육강식의 직장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면 아내는 니가 집에서 도대체 하는 게 뭐냐, 모르면 가만히나 있어라 요즘 애들 교육이 쉬운 줄 아냐 라고 망발을 듣는다. 예전에는 공부만 잘하면 칭찬받던 '아들'에서 지금은 살벌하게 애쓰지만 원망에 비난받는 '남편, 아빠'가 된 자신을 본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외부를 향해 분투하는 에너지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인정과 칭찬, 존경과 관련돼 있고 이것들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외부로 향하지 않는 내 욕망은 무엇인가. 틈틈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고 IT제품들을 지르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 본질적인 내 안의 욕망은 무엇일까.

 

대체로 부모는 '자신의 욕망'이 없기 때문에 가정이 왜곡된다. 40대에도 설레는 어떤 존재적인 욕망없이 칭찬 없는 의무들에 눌려서, 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너무 허접한 대안들을 선택하는 건 아닐까. 자신들의 욕망이 없는 부모들이 자신 수준의 복제품을 만드는 일에 골몰하다가 자신과는 다른 존재인 자녀들을 망치고 스스로도 자멸하는 건 아닐까.

 

결국 나의 건강한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소하는 게 진정한 의미의 가정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닐까. 저 유명한 김두식 교수의 책 제목을 빌려 말한다면 "욕망해'야' 괜찮아"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3371

2013/03/13 00:39 2013/03/13 00:39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연휴에 영화를 두편 봤다. <남쪽으로 튀어>와 <더 헌트>.

 #1.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사회가 밀어내는 캐릭터들이다. <남쪽으로 튀어>의 최해갑은 국가로부터 그리고 자기가 대학시절 함께했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조차 불편해하는 캐릭터다. <더 헌트>에서 루카스는 유치원 교사인데, 친구 어린 딸의 거짓말로 인해 성추행범으로 몰리면서 동네의 절친들 대부분에게 비난을 받게 된다.

이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는 사실 별로 힘들지 않았다.(레미제라블 때와는 달리) 두 편의 영화 모두 나름 해피엔딩인 이유도 있다. 최해갑은 국가의 눈을 피해 달아난 채로 생활을 계속하고 루카스는 결국 자신의 누명을 벗는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해피엔딩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두 영화가 너무 개연성있는 현실을 보여줘서, 내 주변 그 누군가가 겪은 사건을 잘 풀어내면 이런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그 진영이 같건 다르건 원래 그 사람의 편이었건 아니었건 그 사람에게 일어난 위협 혹은 누명, 혹은 오명, 나쁜 평판이 불거지면 대체로 주인공을 등진다. 영화속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최해갑의 주변이 그렇고, 루카스의 친구들이 그랬다. 그 둘의 명약관화한 상황이, 어떤 대세랄까 혹은 지배적 정서에 소수의 올곧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묻히는 느낌이 강하다.
 


 #2.
하지만 나는 이 두편의 영화를 보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다. 그 사람 주변 소수의 사람들이 그의 진심을 헤아리고 실제적으로 도와주고 그들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극'소수다. 또한 대체로 어떤 진영을 대변하는 부류가 아니라 그를 인간적으로 잘 알고 아끼는 이들이다. 그들은 그의 오명에도 흔들림이 없다.

예전에는 오정현 목사같은 길을 걷게 될 때 나를 깨우쳐줄 냉정한 비판자들이 주변에 많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살아보니 내 진영 사람들의 냉정함 또한 공포스럽다. 패자부활전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도 언행 하나 흐트러지면 끝장이다.

지금은 좀 자유로워졌는데 한동안 나는 글쓰기에 조금 짓눌려 있었다. 반론을 예상하는 글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고나 할까. 때로 내 글은 지나치게 방어적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게다가 교계에서 신학자도 운동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 때문에 글 자체에 대한 열등감도 높았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옹호해야 할 시점에서 나는 머뭇거렸고 눈치를 봤다.
 
어느순간 이 모든 긴장감이 지겨워졌다. 내가 방어해야하는 논리의 치밀함이 사안을 둘러싼 사람들, 인격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 정작 내가 해야할 말들은 가려가며 해대고, 안 해도 될 말들을 만들어 내는 긴 시간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나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3.
 물론 지금도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회사에서도 그렇고. 페북에서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도 불편하고 페친이었다가 아닌 상태가 되는 사람들이 생겨도 불편하다. 어떤 이슈에 따라 진영이 나뉘거나 누군가를 옹호하면 그로 인해 호불호가 갈라지는 대목에서 특히 그렇다. 여전히 나는 신경이 쓰이고 글을 쓰고서도 후회가 될 때도 있다.

누군가의 반응에 신경을 쓰고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나의 '옳은' 생각, 나의 기호, 나의 삶의 태도를 대중에게 호소하고 싶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중의 지지와 칭찬에 대한 욕망이 어느정도 전제된 행위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진영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며 운동성을 얻고자 애쓴다.
 
하지만 당사자가 오명을 얻을 때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오명이 아니라 정말 잘못을 한 것이라면 더더욱이 재기가 쉽지 않다. 말실수 하나로도 텍스트 독해 자체를 못하는 비전문가가 될 수 있고 누군가를 옹호하다가 당신이 그럴 줄은 몰랐다며 순식간에 친구에서 친구-아님으로 변할 수 있다. 루카스는 하지도 않은 아동 성희롱으로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아는 친구에게 멱살을 잡힌다. 그게 정상적인 인생이고 삶이다.
 
나는 내 지지자가 많아지길 간절히 원하는 20대를 보냈다. 30대에는 20대의 구호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하게 좌절하고 주눅이 들었다. 지금은 그저... 거품을 빼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도 나는 여전히 눈치를 보는 내 모습을 전지적작가 시점으로 돌아본다.^^ 이 두 영화는 내 고질적 고민을 돌아보게 만든다. 지지자를 넓히는 삶은 위험하다. 그저 내 주변을 밝히는 삶이 더 유익하고 가치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2013/02/12 23:33 2013/02/12 23:33
Posted
Filed under 컨텐츠/페미니즘

#1.
 법륜 스님은 과거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하소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나 책임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딸을 폭행한 아버지에게 어떻게 감사하라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겠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내 고통은 점점 깊어집니다. ‘아버지가 나를 성추행했다’는 생각도 사실은 하나의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던 그 순간에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한 남자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매일매일 어머니한테 108배, 아버지한테 108배, 오직 감사하다는 기도만 하세요."
 
"물론 그의 행위가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성추행을 당했다는 그 생각이 나를 더러움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껴안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사랑을 받았다고 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면 성추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성추행을 당했는지 사랑을 받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이 도리를 깨쳐 버리면 어릴 때 상처를 담박에 벗어날 수 있고 이 도리를 못 깨치면 죽을 때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2.
 내가 최고 중 하나로 꼽는 영화 <여자, 정혜>에서 정혜는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기억을 묻어두고 사는 여자다. 그는 결혼 첫날밤 남편과 원치않는 상황에서 관계를 갖고 나서 그녀가 처녀가 아님을 안 남편의 비아냥 대는 듯한 추궁에 그날 새벽 짐을 싸서 호텔방을 나온다. 그녀의 일상은 '비정상적'이다. 딱히 어떤 광기어린 행동은 없지만 매사에 의욕도 없어보이고 존재감도 없다. 호감이 가는 남자가 생겼지만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어느 날 그녀는 칼을 들고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정작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지도 못하고 뛰쳐나오다 넘어지고는 울음을 토하고 만다.
 
#3.
 한동안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교육 교재는 남성들의 비아냥 거림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당사자가 성적 굴욕감을 느끼면 성희롱이다'라는 대목이 그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남성들은 공공연하게 여성들에게 무안한 질문을 하고는 "굴욕감을 느꼈냐" 내지는 "이것도 성희롱이냐", "OO씨는 괜찮다는 데 니가 불쾌한 건 왜 그런거냐" 등등 당사자가 불쾌감을 느끼면 성희롱이라는 내용에 대해 남성들을 이해하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때로는 부하 여직원들에게 사소한 일로도 분노를 표출해댔다.
 
성희롱, 성추행, 나아가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빨리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을 가능한 빨리 잊는 것이다. 피해를 입기 전 상태로 몸도 마음도 회복하는 길이다. 폭행 사건에 연루되거나 교통사고 등에 의해 물리적으로 몸을 다친 것과 달리 성폭행은 다분히 경미하게 다치더라도 그 정신적 내상이 크다. 남성들은 쉽게 여성을 위로한답시고, 평상시에도 하는 성관계를 강제적으로 한 셈 치고 잊어라, 그것에 매몰되고 괴로워해봐야 니 손해다 라는 류의 이야기로 다독인다. 하지만 그녀는 주변에서 정상적인 여성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당사자는 잊기를 강권하고 주변인들은 오래토록 잊지 않는, 참 이율배반적인 반응이다.

 

#4.
 개인적으로 나는 법륜 스님의 결론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가해자가 있었고 피해가 있었고 나는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고통 속에 침잠해있어봐야 나만 손해다. 털고 일어나야 한다. 특히 이런 정신적인 문제는 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성폭행을 당했지만 그 기억을 잊자, 그저 어느 남자와 하루 잤다고 생각하자... 내 마음이 평정심을 찾는다면 그 일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생각에 영화 속 정혜는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여자다. 없던 일이다. 돌이켜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불쑥불쑥 올라오는 이해할 수 없는 우울함과 굴욕감, 스스로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원인이 있었기에 현상이 있다. 정신도 몸과 다르지 않게 고통에 신음한다. 내가 어떤 고통에 매몰되는 것은 그 원인으로 인해 내 마음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5.
 때로 건강한 여성들은 특히 '아버지'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란 딸들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 혹은 사회적인 상황에 대해 비교적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편이지만 아버지의 격려와 애정이 부족했거나 나아가 '아버지'에 의해 성적 유린을 당한 딸들은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자라면서 에너지를 충족시켜줘야할 대상이 에너지를 빼앗는 가해자 역할까지 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여성에게 먼저 공감해주고 그녀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태도 없이 득도한, 혹은 '외란에 강한'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처방을 던져주는 법륜 스님의 말들이, 내게는 고통스럽게 읽혔다. 적어도 칼럼에 쓸 정도로 누구에게나 공정하거나 보편적이지 않은 처방이라 여겼다.

 

내가 법륜 스님같은 훌륭한 멘토도 아니고 전문 상담가도 아니지만 적어도 내 경험과 상식으로 판단하건데, 성폭행을 당한 여성에 대한 진정한 힐링은, 그녀가 겪은 사건이 정말 큰 일이었음을 공감하고 더불어 피해 여성을 여전히 가치있고 아름다운 존재라고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계속 아껴주는 것이다. 그 고단하고도 반복적인 일상적 치유들이 그녀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3/02/12 22:40 2013/02/12 2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