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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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륜 스님은 과거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하소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나 책임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딸을 폭행한 아버지에게 어떻게 감사하라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겠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내 고통은 점점 깊어집니다. ‘아버지가 나를 성추행했다’는 생각도 사실은 하나의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던 그 순간에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한 남자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매일매일 어머니한테 108배, 아버지한테 108배, 오직 감사하다는 기도만 하세요."
 
"물론 그의 행위가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성추행을 당했다는 그 생각이 나를 더러움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껴안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사랑을 받았다고 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면 성추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성추행을 당했는지 사랑을 받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이 도리를 깨쳐 버리면 어릴 때 상처를 담박에 벗어날 수 있고 이 도리를 못 깨치면 죽을 때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2.
 내가 최고 중 하나로 꼽는 영화 <여자, 정혜>에서 정혜는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기억을 묻어두고 사는 여자다. 그는 결혼 첫날밤 남편과 원치않는 상황에서 관계를 갖고 나서 그녀가 처녀가 아님을 안 남편의 비아냥 대는 듯한 추궁에 그날 새벽 짐을 싸서 호텔방을 나온다. 그녀의 일상은 '비정상적'이다. 딱히 어떤 광기어린 행동은 없지만 매사에 의욕도 없어보이고 존재감도 없다. 호감이 가는 남자가 생겼지만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어느 날 그녀는 칼을 들고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정작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지도 못하고 뛰쳐나오다 넘어지고는 울음을 토하고 만다.
 
#3.
 한동안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교육 교재는 남성들의 비아냥 거림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당사자가 성적 굴욕감을 느끼면 성희롱이다'라는 대목이 그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남성들은 공공연하게 여성들에게 무안한 질문을 하고는 "굴욕감을 느꼈냐" 내지는 "이것도 성희롱이냐", "OO씨는 괜찮다는 데 니가 불쾌한 건 왜 그런거냐" 등등 당사자가 불쾌감을 느끼면 성희롱이라는 내용에 대해 남성들을 이해하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때로는 부하 여직원들에게 사소한 일로도 분노를 표출해댔다.
 
성희롱, 성추행, 나아가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빨리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을 가능한 빨리 잊는 것이다. 피해를 입기 전 상태로 몸도 마음도 회복하는 길이다. 폭행 사건에 연루되거나 교통사고 등에 의해 물리적으로 몸을 다친 것과 달리 성폭행은 다분히 경미하게 다치더라도 그 정신적 내상이 크다. 남성들은 쉽게 여성을 위로한답시고, 평상시에도 하는 성관계를 강제적으로 한 셈 치고 잊어라, 그것에 매몰되고 괴로워해봐야 니 손해다 라는 류의 이야기로 다독인다. 하지만 그녀는 주변에서 정상적인 여성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당사자는 잊기를 강권하고 주변인들은 오래토록 잊지 않는, 참 이율배반적인 반응이다.

 

#4.
 개인적으로 나는 법륜 스님의 결론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가해자가 있었고 피해가 있었고 나는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고통 속에 침잠해있어봐야 나만 손해다. 털고 일어나야 한다. 특히 이런 정신적인 문제는 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성폭행을 당했지만 그 기억을 잊자, 그저 어느 남자와 하루 잤다고 생각하자... 내 마음이 평정심을 찾는다면 그 일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생각에 영화 속 정혜는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여자다. 없던 일이다. 돌이켜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불쑥불쑥 올라오는 이해할 수 없는 우울함과 굴욕감, 스스로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원인이 있었기에 현상이 있다. 정신도 몸과 다르지 않게 고통에 신음한다. 내가 어떤 고통에 매몰되는 것은 그 원인으로 인해 내 마음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5.
 때로 건강한 여성들은 특히 '아버지'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란 딸들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 혹은 사회적인 상황에 대해 비교적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편이지만 아버지의 격려와 애정이 부족했거나 나아가 '아버지'에 의해 성적 유린을 당한 딸들은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자라면서 에너지를 충족시켜줘야할 대상이 에너지를 빼앗는 가해자 역할까지 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여성에게 먼저 공감해주고 그녀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태도 없이 득도한, 혹은 '외란에 강한'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처방을 던져주는 법륜 스님의 말들이, 내게는 고통스럽게 읽혔다. 적어도 칼럼에 쓸 정도로 누구에게나 공정하거나 보편적이지 않은 처방이라 여겼다.

 

내가 법륜 스님같은 훌륭한 멘토도 아니고 전문 상담가도 아니지만 적어도 내 경험과 상식으로 판단하건데, 성폭행을 당한 여성에 대한 진정한 힐링은, 그녀가 겪은 사건이 정말 큰 일이었음을 공감하고 더불어 피해 여성을 여전히 가치있고 아름다운 존재라고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계속 아껴주는 것이다. 그 고단하고도 반복적인 일상적 치유들이 그녀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3/02/12 22:40 2013/02/12 2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