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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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유독 T.P.O.(옷을 상황에 맞게 입는 것)에 약합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큰 행사 외에는 장소에 어울리게 입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죠."


술자리에서 주도를 지키지 않은 이에게는 정정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장소에 맞는 복장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 되려 겉치레가 심하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한국에서 좋은 패션이란 아직까지는 검소한 옷이지, 상황에 맞는 옷은 아닌 것이다. '권력=악, 저항=선'의 도식이 '복장규제=악, 자율복장=선'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무엇이 사무실 복장으로 적당한지에 대한 철학이나 지식없이 그저 눈에 익은 것은 선호하고 낯선 것에는 눈살을 찌푸리니 복장 규제에 대한 반발이 들끓을만하다.

 

- '넥타이는 좋고 짧은 치마 나빠? 오늘도 사무실은 세대 전쟁',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 (2013. 9/12)

 

 

한국에서 드레스코드가 사회적 이슈를 탄 대표적인 케이스가 몇 가지 있다. 축구선수 안정환이 이전 선수들과는 달리 경기 입장시 정장을 입어서 운동선수의 계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흔들었던 경우. 반대로 유시민 전 장관이 국회의원이 되고서 당선자 선서식에 면바지를 입고 나타나 공직자들의 의복을 통한 보수성향에 경각심을 주었던 일. 마지막으로는 나꼼수의 수트빨 날리는 멤버들 모습. 진보는 멋을 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역행하는 그들의 세련된 패션 코드는 대중에게 신선함을 선사했다.

 

이것을 어떤 진영 논리나 계급 논리 혹은 권력 관계에서의 억압 구도를 잠시 접어둔다면, 나는 한국사회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비슷한 시기에 수입되면서 겪은 문화코드가 고스란히 드레스코드에도 묻어난다고 보는 편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나라는 한복을 벗은 후로 유럽이나 미국처럼 어떤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의 긴 양장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서양의 문화에 어떤 합의로 녹아든 '상황에 맞는 의복 문화' 경험이 없다. 그저 어떤 공적 자리에서 입어야 하는 의무적 드레스 코드가 있을 뿐.(결혼식, 장례식, 기업 킥오프미팅, 논문 발표장, 관료 사회의 특정 회의 등)

 

서양의 드레스코드는 오랜 전통(모더니즘, 혹은 그 이전)과 파격(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시간차가 큰 만큼 그 안에서 상당한 규칙과 규칙의 파괴를 대중이 스스로 결정하고 상대를 배려한다. 규칙은 규칙대로 존중하고 파격은 파격대로 허용된다. 물론 정장 안에서도 문화전쟁은 있다. (일례로 미국 백인은 흑인들의 화려한 색을 천박하게 여기고 유럽(영국) 백인은 미국 백인들의 펑퍼짐한 수트를 양키들의 옷으로 폄하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드레스코드에 관해 윤리와 눈치와 권력관계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양장에 대한 교양이 없다. 사실 그럴 여유?랄까 그럴 필요? 엄밀히 말해 그런 게 없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미국을 사랑하면서도 미국을 증오하는 우리의 이중성이 서양의 잘나가는 세련된 패션코드를 동경하면서도 정작 대중들의 문화 소비 영역에서는 강한 거부감 혹은 겉치레가 심한 된장남, 된장녀로 매도하게 되는 습속이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기업이나 국가가 의복에 어떤 규정, 가이드를 제시하는 순간 권력의 억압으로 여기고 '내맘대로' 캐주얼 복장이 진보와 자유의 코드로 읽힌다. (근데 그 자유함이 때론 어색하고 뽀대도 안 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대중이, 대중의 확신이 서양의 의복문화를 흡수하면서 그다지 주체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모던, 포스트모던의 공존 속에서 그저 옷은 치마의 길이나 넥타이의 유무, 검은색은 점잖고 빨간색을 화려하고.... 이런 기초적인 수준에서 논의가 된다고 본다. 게다가 타인의 드레스코드에 대해 쉽게 삿대질을 하는 강한 윤리의식, 진영논리, 권력논리마저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근데 그 기저에 한 백년도 채 되지 않은 양장 문화에 대한 사색, 주체적 수용, 여유로운 수용이 없지 않았나 싶다.

 

정답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다만 기업이 캐주얼 정장의 가이드를 제시할 때 지나치게 억압의 기제로 받아들이거나 결혼식, 장례식에 양장의 정석을 수용하지 않았다고 험담하거나 타인이 빨간 바지를 입었다고 SNS에서 '이건 좀 아니자나요'라고 공유하거나, 진보진영에서 수트빨 날리는 인물에 대해 그 사람의 인격마저 한심하게 치부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생각. 물론 그런 생각 자체를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양장을 대하는 한국인인 나의 스탠스, 나의 철학 같은 걸 고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흥미로운 기사를 읽으며 들었던 잡생각은 이 정도...?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309/h2013091221253186330.htm

2013/09/15 23:28 2013/09/15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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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진영의 신앙적 고민들이 매체를 타면서 개신교 내에서도 회자되는 일이 잦다. 이에 대한 내 심정은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불편하다. 아마도 내 주변 개신교인들은 나의 불편함을 더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해서 내 불편함의 실체를 조금은 풀어낼까 한다.

솔직히 나는 가수이자 JYP의 대표인 박진영의 갑작스러운 '인생의 궤도 수정', 이른바 기독교로의 회심 조짐에 대한 우려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매체에서 언급한 대로 3년간의 공부 내용 중에 창조, 진화, 그리고 지적설계 이론을 언급한 대목에서 그리 긍정적인 생각을 갖질 못했다.(대체로 창조-진화 논쟁에서 현재까지는 기독교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지적설계 이론이 과학의 탈을 쓴 신학으로 치부되고 있다.)

 

물론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부분은 이런 거다. 나는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 궤도를 수정할 때, 반대 극단으로 달려가는 현상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회귀현상이 뒤따른다고 보는 편이다. 하나의 유행이나 기호가 아닌, 종교성으로 대변되는 한 인간의 가치관, 세계관이 변할 때는 사실 스스로도 충분한 검증의 시간이 필요하더라는 사실이다. 그 변화에서 자신의 이성과 정서, 그리고 습관 모두가 어느 정도 합일점에 이르렀을 때 변화된 가치관, 종교관이 어떤 일상적 행동으로 드러난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매체에서 보여준 박진영의 돌발(의도된) 발언은, 적어도 내겐 꽤나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 발언들이 자신 새앨범의 컨텐츠와 함께 공개되었을 때 솔직히 우려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의 신앙적 고민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인데 그의 말들이 편집되어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순식간에 기독교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그것은 다시 대중적인 복음주의 개신교권에서 확장, 증폭되고 소비될 조짐마저 보였다. 그에게조차 아직 잘 맞지 않는 옷을 개신교가 서둘러 반기며 오히려 적극적인 홍보(전도)에 동원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체로 한국 개신교권은 이런 대형 스타에 의존하는 몹쓸 습관이 체화되어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탁월한 말주변(설교)에 현혹되고 대형교회에 모여들고 대규모 찬양집회, 대형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다. 물론, 나또한 그런 배경에서 자라왔다. 보수 개신교권에 국한된 얘기만도 아니다. 한국 복음주의권도 1세대 몇몇 소수의 목회자들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결국 2, 3세대의 리더들은 현재 진보진영의 정치권과 비슷하게 그 리더십이 전수되지 못하는 느낌도 받는다.

 

우리가 박진영이라는 유명 가수의 변화를 반길 경우, 이른바 JYP라는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대표를 개신교의 홍보 수단으로 적극 수용할 경우, 나는 그들의 진정 어린 어떤 기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가 박진영 본인의 신앙마저 망치는 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도 본다. 솔직히 우리는 과거에도 '대도' 조세형이나 '보스' 조양은, 전병욱, 오정현에 '환호하여' 그들의 신앙이 무르익어서 열매를 맺기도 전에 더욱 이전 삶의 형태로 복귀, 질주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나는 그런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개신교 안에 없다는 점도 불편하다.

 

매체에서 보여준 그의 신앙적 고민. 나는 그 진정성을 믿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박진영이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이 상당히 우려스럽다. 내적 고민들이 깊어지기 전에 대형 자본에 길들여진 상품(음반)을 들고 기독교에 관한 이성적 동의 수준의 메시지를 '동일한 플랫폼'(이른바 뮤직 엔터테인먼트, 혹은 지상파 연예 프로그램) 위에 올려 놓은 상황이 불편하고 불안하다. 물론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자신의 변화를 표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도 흔들리고 그가 회심의 증거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대중적 개신교계도 함께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유명인의 신앙은 더 내재화되고 더 그 가치가 축소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수는 대중이 모이면 불편한 이야기로 그들을 흩으셨다. 나는 그가 매체에 자신의 상품과 함께 전달되는 말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일상이 변화되는 소소한 경험들 속에서 신앙이 싹트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신앙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닌, 무대 밖에서 조금씩 열매 맺길 기대한다. 그 때까지. 그의 신앙이 그의 몸에 잘 맞을 때까지 개신교는 잠잠히 그의 곁을 그저 지켜주기를 기대한다. 섣불리 먼저 박수치기 보다는, 함께 걸어주기를 기대한다. 내 생각은 그러하다.

2013/09/15 23:27 2013/09/1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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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앤 더 시티> 중 기억에 남는 한 장면.

미하일 바르시니코프가 캐리의 남친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 남자는 예술가이면서 자아가 강한 사람이다. 결국 캐리와 헤어지게 되는데 연애하는 내내 그는 자기 중심적으로 관계를 끌고 간다.

...이 얘길 하려던 건 아니고.

그가 오랜만에 전시회를 열게 되는데 관객과 평론가들의 반응이 은근히 걱정된다. 항상 자신만만하지만 애인인 캐리가 가까이에서 볼 때 이 남자도 평가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전시회장에 들어가기 직전 그는 캐리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힘이 되어달라고. 캐리는 자신의 모임도 취소하고 그의 손을 잡고 전시회장 안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누군가가 바르시니코프를 발견하고 멈칫 선다. 어떤 반응일까 긴장되는 순간 그는 천천히 바르시니코프를 향해 찬사의 박수를 치고 대가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의 천재성에 박수를 보낸다.

걱정했던 그의 표정은 이내 밝하지고. 그는 언제 사람들의 평가를 걱정했냐는 듯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캐리와 잡았던 손을 놓고는 박수치는 군중들 속으로 들어간다. '대가'를 위한 파티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이 장면만큼, 창작을 하는 인간이 대중을, 비평을 대하는 태도, 그 욕망을 잘 드러낸 묘사는 없다고 느꼈다. 어린 시절에 뭔가를 만들고나서 친구나 부모, 선생님의 반응을 살피고, 그 잠시잠간의 긴장감 이후에 반응이 좋으면 우헤헤헤 거리는 태도가... 나이가 들어도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가끔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어떤 순간 이게 무슨 글이야... 조졌다...라는 생각에 원고를 보내기를 주저한다. 예전엔 가까운 지인들에게 먼저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기도 했고 결혼해서는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은근 눈치를 살핀다. 아내의 미간이 찡그려지면 "아놔.. 나 다시 쓸라그랬어!!!"라고 먼저 막 오바한다.

그렇게 마감에 등떠밀리듯 보낸 원고가 어딘가에 공개되고, 의외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면 내 태도는 급 돌변한다. 겉으론 무표정하게 있지만 내심 촐랑거리고 싶은 것이다. 가끔 아내에게 사람들의 반응을 홍보하며 음하하하...거리며 놀기도 한다. (아내랑 종종 이러고 자주 논다..ㅋㅋ)

늙어도 철들지 않는.. 어떤 뛰어나고픈 존재감. 칭찬받으면 우쭐거리고픈 속내. 순식간에 뒤바뀌는 '소심함의 극치'와 '자만의 극단' 사이를 포착하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이 장면이 자주 떠오른다. 이런 게 폭로되는 내러티브가 참 좋다. 부족함, 허물을 고백하면서도 유쾌하게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어서 좋다.

땡큐, 미하일 바르시니코프 옵바.
2013/09/13 23:25 2013/09/13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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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내가 육아를 분담한다거나 가사 기여도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 주로 받는 질문이 있다. 맞벌이 하죠? 아내가 파트타임으로 일한다고 대답하면... 다시 묻는다. 그럼 아내는 집에서 뭘해요? -_-;;;

 

내가 '전담'이라고 했거나 '육아가사 기여도가 높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상황은 곡해되고 상대의 관심은 여지없이 아내의 잉여시간에 꽂힌다. 더 흥미로운 건 남자들이 아니라 여자들도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는 거다.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고,,, 아내는 짬이 나도 안 되고 한시도 멍때리고 있으면 안 될 기세다.

 

사실, 주중 대부분의 가사육아는 아내가 챙긴다. 나는 퇴근 후에 아이를 씻기고 재운다. 주말에는 원칙적으로 내가 아이를 전담하고 짬이 나면 가사를 돕는다. 따라서 내 육아 분담 비율은 높으면 3:7, 낮으면 2:8 수준. 그런데 2~3의 기여도에 의해 자주 아내는 집에서 뭐하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move! move! 잠시도 가만있으면 안돼..) 그것도 여자들에게.

 

얼마전 길고양이가 상태가 안 좋아서 아내가 성하를 잠시 편의점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동물병원에 다녀왔다. (아내는 편의점 아주머니와 친하다) 황당했던 건 돌아오다가 동네 엄마와 마주쳤는데 그 반응이 <성하를 길거리에 내팽겨치고는 지 볼일 보고 온 엄마>취급 하더라는 거였다.

 

나는 자주 '여자의 적은 여자'라거나 '이이제이'(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제압함)같은 생각을 종종 해왔다. 그리고 그것을 자주 현실세계에서 확인한다. 나의 상식으로 남편이 육아의 일부분을 분담하여 아내에게 잉여시간을 만들어주면 주변 엄마들은 자신의 잉여시간을 만들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잉여시간을 확보한 엄마를 한량 취급한다.

 

 '엄마라면 한시도 자기 아이와 떨어져서는 안 된다', '아내라면 남편 밥은 차려줘야 한다', '딸이라면'... 안타깝게도 이런 윤리가 약자(여성)측에서부터 아주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대체로 강한 분노는 주변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톱니바퀴에서 이탈한 사람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비난이 쏟아진다. '엄마가 되서는 쯧쯔..', '아내가 그것도 안 하다니..'

 

1억 로또 당첨된 사람보다는 주식으로 천만원 번 사람에 대한 질투가 크다. 그 결과 주식으로 돈을 번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일도 열심히 안 하고 주식질이나 해댔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정치도 여야 정쟁보다는 진보당 내에서의 다툼이 더 잔인하고 치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에서의 젠더 문제는... 갈 길이 멀다.(라고 쓰고 쫌 막막하다..라고 읽음)

2013/09/13 01:23 2013/09/13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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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팔아서라도 이 책을 사라, 지금 당장!"
[서평] 백소영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옷을 팔아서라도 이 책을 사라. 지금 당장."

 

이 문구는 제임스 패커가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읽고 했다는 유명한 말이다. 백소영 교수의 이 책을 읽은 직후, 나는 페이스북에 같은 문구를 남겼다. 아마 지인들 몇몇은 농담처럼 여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당신이 신앙을 가진 한국교회의 교인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기를 권한다. 물론 이 책은 신학 책은 아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에 대한 사적인 경험, 182명의 여성의 인터뷰를 다룬 책이다. 하지만 본서는 엄마라는 존재의 미시사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사회와 개신교 내 여성 문제의 큰 화두들을 아우르고 있다. (고로, 만일 누가 나에게 개신교, 여성주의, 육아, 자녀 교육에 관한 한 권의 책을 권하라면 나는 주저함 없이 이 책을 꼽을 것이다.)

 

저자는 먼저 이 사회에서 '엄마'라는 존재가 대체 불가능한 사회 계급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엄밀히 말해 전업주부는 현대 이후에 고안된 일이라는 말이다. 아침 8시에 차를 몰고 도시로 나가서 저녁이 늦도록 가정과 격리된 공간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현대 사회는, 점점 더 일을 남성만의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봉건사회에서 노예나, 종들이 하던 일을 무보수로 대신해 줄 존재가 현대 사회에는 절실하게 필요해졌고, 따라서 남편이 경제력을 유지하도록 내조하고 무한 경쟁 속에서 자녀의 발전을 위해 최상의 교육 환경을 만들어 줄 존재로서의 '엄마'라는 계급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여성이 직장 내 경쟁 체제에 끼어들어 경쟁률을 높이는 것도 괴로운 일이며 저녁에 칼퇴근이 불가한 아빠의 부재를 메울 '전문 엄마'(전업주부)가 절실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를 낳은 여성은 점점 회사에 있어도 미안하고 집에 있어도 미안한, 양쪽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죄인 취급받고 있으며 점점 자녀 교육은 고학력의 전업주부만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그 결과로 점차 자신의 꿈을 접는 여성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때 여성들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잘 해 온 일', '하면 즐겁고 신나는 일'을 접고 이제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삶을 살게 되며 그 옥죄는 일상 속에 엄마들은 몸도 마음도 병들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전업주부가 되면) 아프거나 ('직장 맘'이 되면 바빠서) 미치게 된다고 표현했다. (이 책의 초판 제목이 <엄마 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개신교는 어떨까. 1990년대 이후 개신교에서 가정 회복 세미나를 통해 가정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런 한국교회의 많은 세미나들이 여성을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가부장적 여성성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강조되고 있다고 말한다.

 

서울 근교의 한 복음주의적 대형 교회에서 나누어 준 <가족 사랑 실천 노트>라는 소책자의 내용을 보자. (…) 남편의 아내 사랑 실천에는, 출근길에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출근길에 사랑하는 아내를 따뜻하게 안아 주기, 퇴근길에 꽃 한 송이 사 들고 아내에게 전해 주기, 아내의 음식 솜씨 칭찬하기. 아내에게 "오늘 내가 집안일 도울 것 없어?"라고 물어본 뒤 아내의 요청 들어주기, 함께 장보러 가기, 아내가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을 함께 보면서 아내의 정서 공감해 주기 등등이 묘사되어 있다.

 

한편 아내가 남편에게 실천해야 하는 덕목으로는 남편이 오케이 할 때까지 안마해 주기, 출근길 칭찬과 격려의 말 전하기,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사랑이 담긴 격려와 칭찬 문자 보내기, 출근길 칭찬을 적어 놓은 쪽지를 남편 주머니에 살짝 넣어 주기, "여보,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밝은 미소와 함께 남편 퇴근 맞이하기, "여보, 당신 건강해야 해요. 당신 건강이 우리 집 행복이에요. 일찍 들어오세요" 격려의 말 전하기, 퇴근한 남편의 가방(겉옷)을 들어 주고 시원한 물 한 컵, 주스 한 잔 대접하기, 특별 요리 준비하기, 남편이 하는 모든 말에 "예" 혹은 "당신 생각이 참 멋있네요"하고 반응하며 모든 요구 들어주기 등이 제시되었다. (본문 중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의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게다가 여기서의 모든 요구는 성관계를 암시하기도 하는데, 주변에서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내는 남편이 원하면 언제나 성행위에 응하는 것이 기독교 가정의 행복이라고 얘기하는 세미나가 여전히 성행한다고 전해 듣기도 했다. 저자는 마틴 루터도 아내의 또 다른 기능은 '유혹으로부터의 예방책 기능' 즉, 남편이 정욕을 그릇되게 다스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 아내는 성적 헌신으로 그에게 예방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러한 주장은 아내에게 남편이 요구할 때 언제나 응해야 한다는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르침이었다고 지적한다. 이쯤 되면 아내는 육아, 가사 전담뿐 아니라 '감정 노동자' 수준으로 봐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그러니 농담처럼 직장 여성들 사이에서는 우리도 퇴근하면 차도 타주고 목욕물도 받아주고, 저녁상도 차려 주는 아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사실, 책을 읽는 도중 너무 참조하고 싶은 내용이 많아 책의 사방에 검은 줄이 그어졌다. 책 속에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언급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생각할 거리들이 넘쳐난다. 유대 한 랍비가 "만일 한 남자가 그의 딸에게 토라를 가르친다면 그건 그녀에게 음탕함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 성종은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큰 일"이라고 했다는 과거 이야기에서부터, 의대에서 전공의가 되기 전까지는 임신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 산부인과에서 딸을 낳으면 한국의 간호사들이 "예쁜 공주님이에요. 한 번 더 고생하셔야겠어요"라고 말한다는 최근 이야기까지 정말 여성들의 깊은 좌절과 아픔을 공감할 만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그중 유독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소개할까 한다.

 

할머니 세대야 손가락에 꼽을 만한 신여성들이 있기는 했으나 다수의 여성들은 신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20세기 대표적 지성이라는 함석헌 선생님의 아내 황득순 여사도 겨우 글을 읽을 정도인 초등교육만을 받은 채 부모들에 의해 정해진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례는 당시의 '보편'이었다. 평생 "나야 뭐"하며 사셨다는 황득순 여사. 남편이 "생각하는 백성만이 산다"고 "모든 씨알(민초)이 다 깨어나고 비판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느라 외부 강연을 숱하게 다니는 동안, 그러느라 고정적인 생활비도 준 적 드문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저 묵묵히 아이들과 가정을 책임지고 산 그런 '황득순스러운' 여자들의 삶은 우리 할머니 시대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수적인 면에서 볼 때 '보편'이었다. (본문 중에서)

 

최근 100년 사이 여성의 지위는 비약적으로 신장되었다. 반대로 말한다면 여성이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은 지가 불과 1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역사 속에서 노예제가 해방되고 여성의 지위도 나아지는 걸 보면 문명이 진보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겠지만, 사회의 거대 담론 안에서 천명한 여권이 미시적인 개별 여성들에게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도리어 현대 사회, 신자유주의 경쟁 구도 속에서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여성은 자주 전업주부의 삶을 종용당하는 추세다. 함석헌 선생의 민초에도 포함되지 않은 '아내'라면 더할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

 

저자는 말미에 엄마들에게 이른바 공동육아로 대변되는 몇 가지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그 이상을 보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여성 문제에 있어서 한국 사회,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정 내의 미시 담론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현대 거대 담론의 한 축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 책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2013/09/05 00:55 2013/09/05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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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교회, 세가지를 버리면 산다?! 
 진 에드워드 <오래된 교회, 가정집 모임>


초등학교 시절, 하루는 늦잠을 자서 부모님과 함께 '대'예배를 참석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어머니는 화장과 몸단장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고 아버지는 회사를 가지도 않는데 정장을 입었다. 교회에 도착하니 안내에 따라 긴 의자에 차례차례 앉고 나면 찬양인도자가 찬양을 했다. 모두가 앞사람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는데 앞사람은 결코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잠시 후 내 키의 세 배는 높아 보이는 강대상에 목사님이 나타났다. 이어지는 설교. 내 기억에 그 시간은 '세상 그 무엇보다' 지루했다. 아마도 나는 어머니에게 "이제 끝이야?"라고 열 번은 물어 본 것 같다. 예배를 마치고 다들 서로 친하지 않은 듯 어색한 눈인사를 한 채 교회당 밖으로 물밀듯 빠져나갔다. 어렴풋이 나도 어른이 되면 대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개신교 예배의 오랜 전통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아마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회중 예배의 형식에 대한 거부감이 덜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여전히 익숙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이런 형태의 예배에 회의감을 갖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의 저자인 진 에드워드도 이러한 고착화된 미국 복음주의 예배의 전형을 비판하고, 오랜 시간 가정 교회 운동(house church movement)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세 왕 이야기>와 <크리스천에게 못 박히다>의 저자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그가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 형태를 강하게 비판한 사람임을 아는 이들은 의외로 적은 것 같기도 하다.

책의 시작부터 저자는 강한 논조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가 처음 예로 든 사례는 알바니아의 개방과 함께 찾아든 복음주의 전도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다.

"알바니아가 개방되고 얼마 되지 않아 서방 세계 곳곳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인 수백 명이 물밀듯이 알바니아로 몰려들었다. 곧 여기저기서 복음 전도가 활발하게 벌어졌다. 알바니아의 관계 당국에서 집계한 바에 의하면, 알바니아 전역에 있던 기독교 단체들이 첫해에 3만 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고 한다. 첫해에 회심한 3만 명 중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몇 명이나 교회 모임에 참석했는지 아는가? 200명이었다. 3만 명의 회심자 중에 겨우 200명이 교회 모임에 참석했다.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의해 소개된 교회는 우리에게나 알바니아인들에게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수출해서 알바니아의 기독교인들을 미국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나 새로운 회심자들이나 다 '교회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정장을 입고 성직자, 목회자로 대변되는 인도자가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는 예배, 모두가 긴 의자에 앉아 앞에서 설교하는 목회자의 말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 지루하고 따분한 예배의 형태가, 많은 회심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장본인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진부한 관습이 칼벵과 루터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 혹은 강요된 것이며 이와 달리 초대 교회는 인도자의 주도가 아닌, 그들 스스로 예배의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다. 고로 각 나라마다 교회 스스로가 북미 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모임을 가져야 하며 그 방식은 특정한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본능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무엇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서에서 그가 말하려는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바울의 전도 여행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단기간 안에 교회가 아무런 지도자 없이 남겨져야 하고 어떤 건물을 사용하지 않고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방식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귀가 시간이 정해지지도 않으며 더 탄탄한 설교를 찾아 돌아다니는 일에 관심이 없다. 저자는 작금의 예배를 초대 교회의 그것과 달리 진부하고 지루하고 정작 공동체의 풍성함에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핵심 요소가 교회 건물 중심, 설교 중심, 회중석의 구분이라고 보고 있다. 진 에드워드는 이것들이 완전히 파괴될 때에만이 새로운 예배가 시작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의 감정적이면서도 때론 극단을 치닫는 논조를 읽으며 다소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나에게 있어 개혁주의(칼빈주의), 복음주의는 폐기처분될 그 무엇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예배 형식의 원흉이 오로지 루터와 칼뱅이라는 주장 또한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나는 현대 교회의 침체, 기독교인들마저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이 예배 자체가 재미없어서, 혹은 수동적인 자세를 강요하기 때문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재미, 신선함의 부재가 문제라기보다는 교회의 세속화에 더 큰 원인이 있지 않은지, 가난을 말하지만 중상류층이 득세하고, 진부하기보다는 쇼와 더 달콤한 메시지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하는 반감도 다소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믿는다. 논리 전개나 학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반론의 여지가 많겠지만,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저자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런 생각도 든다. 눈 딱 감고 교회 건물, 회중석, 설교자(담임목사) 이 세 가지를 교회에서 없애면 정말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 않겠냐는 아주 현실적인 기대감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어느새 균형을 말하면서 개혁을 저지하는 보수 기독인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자성과 함께. 저자는 현대 교회를 한참 비판하고는 그 대안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논의를 끝내 버린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그룹은 아래의 주소로 편지하면 다음 단계에 대해 알려 주겠다." 그리고는 주소가 적혀 있고 책은 끝난다. 이런, 유머러스한 분이라니. 내 추측이긴 하지만 실제 그의 생각대로 실천한다면, 굳이 연락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이후에는 어떤 지침이 없이도 자연스레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김용주 /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전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2013/09/05 00:52 2013/09/05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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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페미니즘
장에서도 자주 여성의 적은 여성이 되곤 했다.
왜 그럴까.
마치 비정규직 노동자의 적은 사측이 아닌
정규직 노동자인 것과 같은 논리? 그걸론 부족하다.
그 와중에 눈에 띈 책이 <나쁜 그녀들의 심리학>이었다.

냉큼 사서 오늘 2시간을 투자해서 2/3를 읽었다.
간단히 평을 하자면 이 책에 실린 사례들, 즉 개별 여성들의
고충을 읽는 것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저자의 범주화라던가
어떤 직장 내 여성 동료들을 대하는 지침은 별로였다.
...
이 책을 읽다보니 이건 마치 이이제이 같은 느낌.
정작 빅브라더는 다른 곳에 있는데 을들의 싸움 속에서의
어떤 윤리, 논리, 지침 같은 걸 풀어내는 느낌이랄까.

가장 큰 문제는 일터에 여성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고
가뜩이나 일자리가 빠듯한데
파이 열 조각 중 한조각이 배당된 그룹 내에서 게임을 뛰니
당연히 '나쁜 그년(그녀)'들이 생기는 셈이다.
물론 하루하루가 여성 동료들과의 불화로 지옥같은
직장인들에게는 현실적인 도움이 되겠지만
좀더 넓고 깊게 파고들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2013/07/13 01:21 2013/07/13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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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성적인 줄 몰랐어... 그저 고약한 인간인 줄"
[서평]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를 읽고

 


돌이켜보면 주변엔 항상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흥을 깨는 사람들,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고는 전화조차 받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맥주나 한잔 더 하자고 할 때 꼭 자기는 집에 가겠다고 해서 맹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약속시간이 지났든데 연락이 두절되어 당황했는데 간신히 연락이 되자 그 시간에 특별한 일 없이 집에 있었다는, 그런 속을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 주변에 종종 있지 않던가.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문제아 내지는 사회부적응자라고 칭한다.

"우리는 네가 내성적인 줄 몰랐어. 그저 고약한 인간인 줄 알았지"

어디서 자주 듣던 얘기가 책에 나온다. 어느 내성적인 성향의 사람이 저녁식사 자리에서 식구들에게 내향성을 설명하려 하자 그녀의 친오빠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향성이라. 무심코 집어든 책을 읽다가 갑자기 과거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혹시 내가 답답해하고 자주 비난했던, 무책임하고 게으르고 악의적으로 약속을 깨던 그 사람들이? 혹시나 하던 마음이 역시나 그러했다. 이렇게 나는 이 책,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에 몰입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소피아 뎀블링은 <사이콜로지투데이>에서 쓴 내향성의 사람들에 관한 에세이로 최고 조회수를 기록한 심리학자다. 그는 결국 내향성에 관한 책까지 쓰게 되었고 국내에도 번역서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칼 융의 가장 큰 업적은 외향성과 내향성을 구분함과 동시에 내향성을 가치중립적인 성격으로 정의했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어떤 사회든 매사에 밝고 적극적이고 조직에 적응력이 뛰어난 기질을 긍정하고 그 반대의 기질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개개인을 윤리적으로 옥죄지 않았던가.

최고의 에세이스트답게 저자는 내향성의 문제를 일상적인 묘사와 평이한 문장을 통해 과한 끄덕임을 유발한다. 나는 스스로가 내향성이 아니면서도 책을 읽으면서 과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가장 가까운 예는 전화 혐오증이다. 내향성의 사람들은 전화가 울리는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문제는 전화에 대한 회피는 쉽게 도덕적 결함으로 취급되더라는 사실이다. 친구와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들과 통화하는 것도 좋아하리라고 믿고 나아가 직장에서는 언제든 휴대폰이 울려도 받아야 할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향성의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 없이 불쑥 불쑥 사람들이 자신과 대면하길 원하는 이 몹쓸 기계에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전화기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성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에너지 관리'인데 그것이 잘 관리되지 않으면 사람들과의 만남이 전혀 즐겁지도 않고 잘못하면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말실수나 극단적인 표현으로 상대를 위협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성적인 사람들을 외향적인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비극의 시작이다. 설상가상으로 내향성의 사람들은 마치 듣는 것을 좋아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수다쟁이들의 만만한 대상'이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들은 불필요한 대화 자체를 꺼려하는데 이런 수다쟁이들에게 걸리면 십중팔구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언제나 비난의 대상은 싹싹하지 않고 대화의 의지조차 없어보이는 까칠한 내향성의 사람들이 된다.

저자는 내향성의 사람들이 잘못되었거나 무례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창의적이고 침착하고 계획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문제는 외향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줄 수 없기 때문에 내성적인 사람들이 평가절하, 나아가 비난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내성적인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들에 대해 설명하고 그에 대한 간단하지만 강력한 팁들을 제시한다. 그 실수라는 것은 크게는 이런 것들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다, 곧바로 진지한 대화로 뛰어든다, 정신없이 이야기한다, 내향성과 두려움을 혼동한다, 지나치게 적은 사람에게 의지한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소제목에 딱 맞는 내향성의 사람들이 꽤 많이 떠올랐다는 사실에 또한번 놀랐다.)

슬프게도 내향성의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비난을 받는 경우가 너무 많다. 가족들이 내향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탓에 당사자보다 더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게다가 가족이 퍼붓는 비난은 여간해선 무시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런 비난은 곧장 자기비하의 늪으로 향하게 만든다. 남편, 아내 또한 그렇다. 내향성의 사람들은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만 상대가 원할 때조차 절실하게 부부동반 모임에 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으며 배우자와 떨어져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물론 외향성의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을 밀어내는 일이라고, 사랑없는 행동으로 치부하여 배우자에게 실망하고 그를 비난하고 급기야 이혼에 이르기도 한다.

책을 덮으면서 정말 많은 수의 사람들의 얼굴들과 행동들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행동을 성격으로 이해했다면 아마 나는 더 풍성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때로 그들을 무례하게 생각하기도 했고 심지어 병리적으로 치부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사실 나에게도 내향성의 성격이 약간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나는 즉흥적이지 않고 판단을 잠시 유보한다. 가벼운 질문의 문자를 받고 다음날 회신을 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주변에서는 나에게 한소리씩 해댔다.

그래, 이런 게 한 사람의 전반적인 성격이자 기질이라면? 상상만으로도 정말 많은 반성을 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학을 하는 나에게 내향성의 사람들은 포스트프로세싱에 강한 존재처럼 다가왔다. 즉각적인 반응이나 솔루션을 줄 수는 없지만 자신이 준비가 되기만 하면 어떤 외향적인 사람들보다 더 치밀하고 적극적일 수 있는 사람들이란 사실. 당신이 외향적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으라, 그리고 주변을 보라, 그러면 단지 성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78734

2013/06/25 00:52 2013/06/25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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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게다가 정작 크고 중요한 일은 회사에서 더 많았습니다만. 오늘 제 고민은 이 글을 쓸까 말까에 관한 것으로 압축됩니다. 처음엔 이슈를 잘 모른 상태에서 소소한 반응을 보였을 뿐인데 정작 제 페친이 두 갈래로 나뉘어 '좋아요' 진영을 구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뭐랄까요 중재 욕구랄까요. 혹은 고질병이 도졌다고나 할까요. 어느덧 아이 목욕을 씻기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1.
시작은 이렇습니다. 지강유철님이 본인의 담벼락에 <1993>이란 제목의 짧은 단문을 올렸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최근 강사 섭외를 위해 알아보던 중 연애 문제에 관한 강의로 주가가 폭등하는 유명 강사인 김지윤님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되...었는데 그 분의 달변과 과도한 스케줄 관리를 위해 비서를 둔 것이 맘에 걸리셨던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강의를 보시면서도 위기감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으나, "기독교 지성과 기독교 인권, 한국교회 성차별 현실"에 있어서 책임을 느껴야 할 주변 지식인이 침묵하는 형태에 대해서도 의아함을 느끼셨다는 표현에서 상기 부분에서 비판점을 발견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강유철님은 자신이 1993년에 지켜본 '한 분'과 김지윤님이 오버랩되는 경험을 하였다고 토로합니다. 그 분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셨으니 누구인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재 상한가의 김지윤 간사님의 수직 상승에 대한 팬덤현상, 무비판적 지지와 관련하여 그 분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우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말은 1993년의 그 분의 결말이 좋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김지윤님도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소리를 했다는 의도이겠지요.

이에 대해 김지윤 간사님도 본인의 담벼락에 그 글에 대한 심경을 밝혔습니다. 컨텐츠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시겠다는 말을 하셨지만 "차 한잔 마시고 진심어린 대화 한번 나누지 않았으면서 나에 대한 인격적인 공격을 하는것은 비판이 가진 한계 비난과의 경계를 생각하게한다"고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고 그 글을 읽고 먹던 식사조차 마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2.
참고로 이 건을 풀어내기 전에, 저의 스탠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만 합니다. 저는 IVF 출신이고 한때 복음과상황(이하 복상) 필진이자 편집위원이었습니다. IVF출신인 김지윤님과도 인맥이 겹치고 복상의 간판 필진이었던 지강유철님과도 그러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지강유철님과 관련된 몇 차례의 논쟁에 뛰어든 바 있고 상당히 많은 부분 지강유철님의 입장을 옹호한 바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IVP에서 출간한 존 스토트의 책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입장에 선 바 있습니다. 저는 지강유철님에 비해 나이로는 한참 아래이고 필진으로 복상에서 글을 쓸 때도 그의 글쓰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배운 것이 많습니다.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은 저의 인맥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강유철님과 저의 친밀함에 대한 사전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논란의 핵심 외적으로도 분명 호불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없이 텍스트 비평이 이루어진다는 게 어불성설이라는 의미입니다.)

3.
각설하고, 저는 김지윤님의 강의와 동영상을 어느 정도 보았습니다. 찾아다니면서 보지는 않았고 페친들이 공유하는 것들을 함께 보며 공감도 하고 웃기도 많이 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걱정스러운 지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스스로를 (유사)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곤 하는데 김지윤님의 강의는 남녀 성역할을 어떤 고정된 구조로 상정하고 현실적인 접근들에 집중을 하는 느낌이 자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에 크게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로 페미니스트들의 담론은 정작 일반 여성조차 어렵다고 배척을 당하기 일쑤인데 김지윤님의 강의는 여성들, 그리고 여성들과 연애를 잘 해내고픈 남성들에게까지도 긍정적인 '행동교정' 효과를 갖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비슷한 얘기인데 한번은 제가 성역할에 걸맞는 연애학 강의를 배척하는 입장의 책에 완전 꽂힌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이 제 입장과 잘 맞는다 여겨서 주변에도 많이 추천했었지요. 헌데 페친 한분이 그 책을 읽고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 비판의 요지는 간단히 말해, 정작 본인은 연애를 시작하지조차 못하고 있는데 성역할 자체를 비판하면 남성이 호감갖는 여성이 되기 어렵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김지윤님의 연애상담을 더이상 나쁘지 않게 보았습니다. 이는 마치 작년 한해동안 '나꼼수'를 긍정했던 제 입장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비판의 지점은 명확하지만 정작 '식자'라고 떠드는 연애학 교수들이 해결하지 못한 현실적 문제들을 건드리고, 유쾌하게 풀어내는 스타일이 좋았던 겁니다. 이는 제가 나꼼수와 더불어 김지윤님에게도 흔쾌히 팬덤현상을 즐기는 일원이 되어줄 수 있겠다는 의미이지요.

4.
저는 이번 사건에서 김지윤님을 옹호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김지윤님이 언급한 분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알고보니 지강유철님이 그 당사자라는 사실에 좀 당황했습니다. 네, 잘못된 만남인거죠.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뭐, 이런 얘길 할 사람이 저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오지랖 작렬이지요. (아내도 지랄말고 가만히 있으라더군요. 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네요.)

먼저는 페북에서 제3자에 대한 비판의 부적절성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로 논란의 '실체'가 있는 경우 페북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주로 매체를 이용합니다. 특히 페북에서 활동하는 사람에게 쓰리쿠션으로 비판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몇 분 정도가 마음에 걸리네요.) 쓰리쿠션으로 맞을 때가 더 억울하고 분하더라는 기억 때문입니다. 아마도 지강유철님은 김지윤님이 더이상 페이스북의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공인'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한 공인에 대해, 혹은 그 문화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단문을 썼다고 생각하시리라고 봅니다. 허나 저는 최소한 페북에선 직설화법이었어야 했다고 믿습니다.

다음으로 저는 누군가를 비판할 때 치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특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목에서는 친절한 설명과 논리전개가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상대가 다수가 공감하는 악인이 아닌 경우 생략과 비유, 단순화된 비판은 자칫 잘못하면 인신공격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강유철님의 비판에 정작 비판 내용이 없다, 혹은 과감하게 생략했다고 보며 그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문제제기한 내용은 '비서를 뒀다' 정도 입니다. 저도 주변에서 김지윤님이 비서를 뒀다는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전해들은 바 있습니다. 또한 더 나이가 많고 더 큰 교회를 운영하시는 이재철 목사님은 비서가 없기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김동호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CEO형 목회자들이 비서를 뒀다는 사실도 압니다. 개인적으로 김동호 목사님이 비서를 뒀다는 사실에 대해 저는 한번도 문제를 삼은 적이 없으므로, 이 건에 대해서도 문제삼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더 나아가서 저는 "기독교 배경의 그것도 간사 출신의 여성이 성공하니 비서를 두더라"라고 말하는 주변 분들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 있습니다. 그리고 '비서'가 매니저인지 파트너인지 그 업무영역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CEO들의 그것과 굳이 매치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그 외에 유추할 수 있는 비판의 지점은 "기독교 지성과 기독교 인권, 한국교회 성차별 현실"이라는 표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대로 기독교 지성과 김지윤님, 기독교 인권과 김지윤님, 성차별 현실과 김지윤님에 대한 텍스트비판이 이루어져야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게 이런 비판의 글이 툭 던져진다면 저또한 이 비판에 대해서 어떤 반성을 하기가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런 이유에서 지강유철님의 비판은 의도와는 다르게 "잘 나가더라도 좀 겸손하게 행동하시지"라는 뉘앙스만을 풍길 우려가 있습니다. 연배로 봐도 그렇고 교계의 위치에서도 그러합니다.

5.
물론, 제가 알기로 적어도 지강유철님은 본인의 연배나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할 소리는 하고 안 할 소리는 안 하는 분입니다. 고로 위와같은 제 표현에서 불쾌함을 느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오히려 지강유철님은 본인의 한참 후배인 젊은 청년들에 대한 비판도 열심(?)이시라 득이 될리 없는 논쟁을 하고는 괜히 인심을 잃곤 합니다. 고질병이지요. 본인은 스스로가 별존재감이 없다고 믿는 편인데 주변에서 보면 인지도 있는 교계의 인사인 만큼, 본인의 의도와 정반대로 꼰대의 인상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걸 보고 있는 저는 참 당혹스럽습니다.

그런 이유로, 솔직히 저는 김지윤님이 지강유철님의 글을 컨텐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을 때 좀 의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격적인 공격이라고 느꼈고 심정적으로 힘들었음을 토로했을 때 그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왜냐하면 제 입장에서 지강유철님의 글은 컨텐츠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컨텐츠가 없는 비판은 사양하니 강의를 듣고 문제 지점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라고 따졌거나, 아예 '비서'를 둔 게 문제로 보였냐고 되물어야 했지 않나 싶습니다.

반면 1993년의 그 분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김지윤님의 지적처럼 '인격적인 공격'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애매합니다. 비교할 인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분의 수직상승과 추락'을 인격적인 모독으로 보기에는 또다른 생략이 넘쳐납니다. 물론 그렇기에 지강유철님이 퉁친 '1993의 그분'이라는 표현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비판의 날이 들어와도 반격하기가 쉽지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내가 수직상승인 게 문제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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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상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제 페친들의 편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페북 안에서 복상 내부문제, 나꼼수, 알라딘, 안철수 등등의 이슈로 편가르기의 느낌을 종종 받아왔습니다. 예전엔 잘 견뎠는데 나이가 들수록 친한 분들과 이슈로 갈리는 분위기 자체를 감내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버티지 못하면 이것 또한 접는 게 옳겠지요.

오늘 김지윤님의 담벼락에는 지강유철님에 대해 "시샘한다", "자기 처신이나 잘하라", "간사님을 대상으로 정치를 하려 한다", "인생이 꼬여서 그렇다" 등의 댓글들이 올라왔습니다. 모두가 김지윤님을 아끼는 분들의 격려겠지요. 허나, 누군가를 격려할 때 반대편 누군가의 인격을 따져보지 않고 해대는 표현들에 대한 불편함 또한 저를 괴롭힙니다. 지강유철님의 이번 글이 제겐 비판의 대상이지만 그분 자체가 제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이런 어정쩡한 글을 쓰고 한동안 모니터를 멍하게 보다가 잠을 청하겠지요. 매일 굿모닝이 가능한 어떤 분이 오늘은 많이 부럽네요. 두분께 또다른 결례가 되었다면 미리 사과드립니다. 샬롬.
2013/06/20 23:10 2013/06/20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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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아이언맨, 독설과 냉소로 재무장하길...
[리뷰] 셰인 블랙 감독의 <아이언맨3>

 

 

영화 <아이언맨3>를 봤다. 블록버스터치곤 그냥 무난한 영화였다. 3D로 봤다면 후회했을 것 같고, 처음으로 경험한 비트박스(veatbox)석은 그냥 고장난 의자 같았다. 간간이 울리는 잔진동 때문에 중간중간 엉덩이만 가려웠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니 각설하고.)

 

알다시피 미국의 수퍼히어로들은 대중을 사로잡는 각각의 이슈들이 있다. 이슈라기보단 매력 포인트, 주인공에게 빠져들게 만드는 어떤 지점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번 아이언맨은 좀 무난하지 않았나 싶다. 수퍼히어로의 매력포인트라고 하니 좀 추상적으로 들릴 것 같아 조금 설명하자면 이렇다.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에게 그것(이슈)은 다름아닌 '복수'다. 길거리에서 악당의 총에 죽은 부모에 대한 사적 복수심을 승화시키는 캐릭터다. 백만장자에 첨단 무기로 '칠갑'을 했지만 고아 특유의 외로움, 고독이 느껴진다. 특히 여성과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부족함 없는 그의 '소유'가 아니라 그 특정한 '결핍'이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빛낸다.

 

스파이더맨에게 그것은 '후회'다. 그는 자신을 키워주고 사랑해준 삼촌 벤의 애정어린 충고를 외면한 것에 대한 사과할 틈도 없이 삼촌은 죽음을 맞는다. 게다가 그를 죽인 악당은 피터 자신이 윤리적으로 방기한 혹은 도망을 눈감아준 자였기에, 씻지못할 후회로 그 멘탈 전체가 얼룩진다. 어린 피터는 그 후회감에 시달리게 되어, 밤마다 경찰들의 수신주파수를 엿들으며 삼촌 벤에게 용서를 빌기 위한(속죄를 목적으로한) 악당 사냥에 나선다. 게다가 그의 남루한 일상은 수퍼히어로의 새로운 개연성을 창조해낸다. (다른 수퍼히어로들과 달리 여전이 젊은 피터의 풋풋한 사랑도 하나의 포인트이긴 하다.)

 

오늘의 주인공인 토니 스타크. 개인적으로 아이언맨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기에 가능한 영화라고 본다. 배우의 삶, 마약중독에서 벗어나려던 노력들, 재기, 그리고 지금의 또다른 성공은 토니 스타크에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우라를 입혔다. 그런 이유에서 아이언맨에게 그것은 '반성'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토니 스타크에게 전가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반성이다. 1~3편의 현란한 금속 머신들의 부서짐과 새로운 플롯들 아래에서 마치 베이스 연주처럼 흐르는 건 '나는 과거에 망나니였고 지금은 정신을 차렸다. 나는 달라졌다'는 메시지다. 특히 그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가능케하는 페퍼(기네스 펠트로)는 반성과 새 삶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하지만 삶의 방향성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의 오랜 습속, 말투, 행동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깊이를 알았다고 한들 토니는 여전히 부자이고 까칠하다. 중요한 순간마다 그는 휴머니즘적인 가치관을 내비치지만, 여전히 그의 배경은 친정부적이면서도 보수적인 스탠스를 유지하며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잔혹할 정도의 승부기질을 발휘한다. 흥미롭게도 그런 그의 캐릭터가 나름 묘한 매력을 불러 일으킨다. 그의 반성적 삶의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냉소적이면서도 까칠한 말투와 행동, 백만장자 특유의 여유와 유머가, 정작 내가 생각하는 수퍼히어로 아이언맨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하겠다. (이건 여담인데 나는 개과천선했다고 자평하는 이들의 행실이 변화된 것에 의심을 하곤한다. 행실에 치중하는 '천선'은 다분히 형식적일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3편은 너무 무거웠다. 혹은 답지 않게 진지했다고나 할까. 타국의 테러가 아닌,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는 <어벤저스>에서도 토니의 재치있는, 냉소 가득한 입담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독설처럼 말을 내뱉지만 주위를 웃기고 결국 상대와 악수를 하게 되는 묘한, 나쁜 습관이 있다. 그런 상황들이 토니를 토니로 만드는 진면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엔 그런 모습이 별로 없었다. 하다못해 엔딩크레딧 이후에 숨겨진 서비스컷에서조차 (여기서 토니는 심리상담을 받는다) 토니는 토니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중심을 주인공의 냉소 따위에 둔다는 비약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우스꽝스러운 수트에 얼굴만 빼꼼히 내밀었을 때 전혀 우습거나 유치하지 않았던 건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토니 스타크는 다시 온다'는 워딩으로 영화가 끝나던데 다시 올 땐 물량을 키워서 오지 않아도 좋다. 아이언맨 특유의 독설과 냉소를 제대로 탑재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내 생각은 그러하다.

 

 

*기사 원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9604

2013/04/29 00:51 2013/04/29 0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