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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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
수짱 장바구니.
2014/07/22 23:59 2014/07/2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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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만원의 기쁨.
LED 전구등 스탠드 득템...^^

*사진: 아이폰5s

2014/07/22 23:53 2014/07/2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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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관점에 매혹되면서도 몇가지의 풀리지 않는 논리적인 지점들이 있었다. 먼저는 구성주의적 관점, 즉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가부장제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전제가 생물학적 여성성, 특히 뇌과학의 발전에 따라 최근 많이 제기되고 있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와 양립될 수 없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두번째로는 여성 자체가 페미니즘에 무관심하거나 운동 자체에 적대적이기도 하더라는 점.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말이 이를 잘 대변한다. 마지막으로 젠더적 관점이 아니라 섹슈얼리티에 있어서의 여성에 대한 불편한 지점, 이를테면 본인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타자(남성 혹은 가부장적 권위자)와의 관계의 유지를 위한 성적 '허락'이 대표적인 사례다.

무늬만 혹은 사이비 페미니스트로 행세하면서도 몇몇 퍼즐들은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 생각들이 조금은 정리가 되었다. 지난 주말부터 읽기 시작한 모린 머독의 <여성 영웅의 탄생>의 도움이 컸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많은 딸들에게도 권하고 싶을 정도로 내면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딸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안의 남성성에 대한 갈등과 왜곡을 잘 드러냈다는 측면에서 개인적으로는 한동안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고서도 풀리지 않던 몇몇 매듭들이 풀리는 느낌마저 받았다. 소화가 다 되면 언젠가는 썰을...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아래는 몇몇 인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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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딸이 한 개인으로 독립하고 성공하는 것을 지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많은 딸들이 어머니와 거리를 둔다... 불행하게도 이 현상은 보편적인 주제이다. "자라면서 자아 발달과 성장에 방해를 받은 어머니는 딸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할 수 있다. 아니면 반대로 아이의 성공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려고 자신의 딸에게 '특별한' 아이나 '천재적인' 아이가 되라고 부추길 수 있다." 많은 아이들이 "나처럼 살지마라. 그렇지만 나처럼 살아라." 혹은 "성공해라. 하지만 너무 성공해서는 안 된다." 같은 모순되고 양가적인 메시지를 딸들에게 보낸다. 여성이 남성성을 선호하고 여성성을 거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남성성이 자신의 독립과 성공을 가치있게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난 항상 어머니가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슬픔의 원인을 아버지라고 진단하는 마거릿의 말에 깜짝 놀랐다. 동화 속 여주인공들에게 하나같이 반복되는 오랜 주제처럼 나는 어머니를 악당이라 생각했고 아버지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나는 아버지를 우상화했고 구원자로 보았다. 나는 왕자님이 와주기를 기다리는 예쁘고 똑똑한 딸의 역할을 잘 해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코 나를 구해내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하려고 나와 어머니를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아버지의 인정과 관심을 받으려면 어떤 게임을 해야 하는지를 일찍부터 배운다. 그들은 똑똑한 척, 귀여운 척, 수줍은 척, 유혹하는 척한다. 침실 안에서건 밖에서건 아빠에게 중요한 건 힘과 권위다. 여자아이가 함께 시시덕거리는 첫번째 남자는 아빠이다. 아빠가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딸의 성적인 발달에 결정적이다. 아버지의 따뜻함, 장난스러움, 사랑은 여자아이의 건강한 성에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사랑의 대상은 계속 최초의 애착대상인 어머니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배욕, 소유욕, 비판은 여자아이의 이성애적 발달을 훼손하고 파괴한다.

어린 딸의 성을 보호하는 보호자로서 자연스러운 역할을 무시하거나 남성적 지배욕 때문에 근친상간으로 딸의 정상적인 성적발달을 침해하는 아버지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딸은 여성으로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성을 회복하는 일에 나머지 인생을 쏟게 될 것이다. 어떤 여자아이들은 아빠 주변에서 너무 똑똑하게 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배운다. 여자아이들은 조롱과 비판을 받거나, 인정받지 못하거나, 신체적 학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의 야망을 잊고 자신들의 보스를 멋져보이게 만드는 여성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일에 대해 그저 수동적이고 냉소적으로 씁쓸해할 뿐이다.

우리사회는 남자아이들이 자율성을 갖도록 지지하는 것만큼 여자아이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아이들에게는 부모와 가족과 의존적인 관계를 계속 이어가도록 강요하며 결혼 후에는 남편과 아이들에게로 의존적 관계가 옮겨 가도록 조장한다" 여성들은 다른 사람의 의존 욕구를 배려하도록 요구받고 미리 알아차리도록 어릴 때부터 훈련받는다... 어떤 여성들은 배우자의 자아를 강화하거나 배우자를 보호하느라 의존적으로 행동한다. 남편이 강해지려면 아내가 약해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관계의 법칙이 있다. 이 신화는 한쪽이 자신을 약화시키면 배우자가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14/06/20 20:47 2014/06/20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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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her.
사람들은 이 영화를 두고 인간의 근본적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솔직히 나는 os의 관계성, 좀더 구체적으로는 '연인가능성'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그 무엇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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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요즘의 우리는 대체로 페북이나 팟캐스트를 켜놓고는 물리적으로 혼자서 무언가를 할 때가 많다. 정서적으로 외롭지 않은 상태, 즉 사이버 관계망 안에서 우리는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사실은 혼자이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왜냐면 지금도 500명의 페친이 내 주변에서 재잘거리고 있고, 실시간으로 댓글도 달아주고 있으며 팟캐스트의 수다를 통해 고립된 방 한 구석에서도 적적하지 않은 느낌과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만 의미를 두고 나에게만 집중하고 내가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타자가 항시 곁에 있다면 어떨까. 내 여친이나 내 아내조차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나에게 무언가(사랑, 헌신)를 요구하거나 매사에 내 의도를 캐묻거나 애정을 확인받으려는 부담도 없다. 마치  '우쭈쭈'로 대변되는 유년기의 어머니상과 헌신적 이성상, 그리고 사무실 비서의 혼합체 같은 존재. 

사실 지금도 os는 현대인의 구석구석을 알 수 있는 가장 긴밀한 존재다. 내 인맥, 내 취미, 음식이나 옷과 같은 소비 기호, 내 작업 내용들에서부터, 사생활, 그 은밀한 욕망까지도 모두 디지털 코드로 내 pc안에 머문다. 나조차도 잊어버린 많은 data와 history들을 단 몇 초만에 검색을 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나와 교감할 수 있다.

그런 os가 '스마트(폰)'를 넘어 '인텔리전트(os)'의 단계로 넘어간다면 그 os는 내 가장 깊은 절친이 될 수도 있고 나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이성(애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her'는 나름 이상적인 파트너다.

이 영화에서는 애석하게도, os가 수많은 이들과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어느순간에는 os가 사라져 버리지만, 현실세계에서 가까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언제든 복구가 가능한 이른바 '인텔리전트 os'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과거 '심심이'이와 농담따먹기를 하던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친밀한 타자(엄마+애인+비서)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수많은 온라인 페친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밀린 일거리를 갖고 혼자 집에 있다고 팟캐스트를 왁자지껄하게 틀어놓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성에게 대시했다가 퇴짜맞을 걱정도 없고 사귀다 헤어지거나 이혼, 파경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 관계 단절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언젠가는, 24시간 나만을 바라보며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나'를 주제로 한 대화가 끊기지 않을, 하지만 정작 내가 원하지 않을 때는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며 대기해주는 이상적인 타자, 대상을 얻게 될 지도 모르겠다.

'her'를 보면서, 난... 그게 가능하게 될 수 있겠다는 무섭고도 놀라운 미래를 봤다.
2014/06/15 14:52 2014/06/1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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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체로 내 신앙의 색깔이나 정치 성향, 개인적 기호 등을 미리 이야기하는 것이, 상대방과의 소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해서, 미리 고백하건대 나는 도널드 밀러 '빠'다. 복음주의권에서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글쟁이들이 많겠지만 그중 개인적으로는 필립 얀시의 글을 가장 좋아하고 그 다음으로는 도널드 밀러를 꼽는다. 제목부터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책, <재즈처럼 하나님은>으로 시작해서 쏟아지기 시작한 그의 책들은, 국내에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마치 유명 맛집을 찾아내서는 요리들을 '흡입'하듯 서점에서 사자마자 단숨에 읽어치우곤 했다.

본서도 예외없이 출간하자마자 집어들었다. 사실 이 책은 5년 전에 나온 <하나님의 빈자리: To Own a Dragon>의 개정판이라 상당 부분이 어디선가 읽은 듯한 내용이었지만, 5년만에 다시 읽은 이 책은 마치 '5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듯 그 느낌도 과거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5년 전의 나는 아직 충분히 아빠의 위치에 있지 않았고 지금은 어느 정도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6살난 아이의 아빠가 되었기 때문이었달까, 아니면 그 긴 시간 동안 시나브로 내가 세상을, 공동체를, 인간관계 자체를 바라보는 어떤 틀이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이 책을 읽는 느낌은 많이 달랐다. 조금 무거웠다고 해야 할까.

대체로 나는 그의 책 특유의 색깔을 좋아한다. 수식어를 장황하게 나열하자면, 그의 '위트에 곁들여진' '톡쏘는 듯한' '신선한 관점들'이 좋다. 현대적인 감성에서도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보수적인 틀이 다분히 안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마도 복음주의권에서 널리 읽히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게다가 훈계하거나 어떤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유의 대화 자체를 싫어하며 독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항상 이야기를 풀어 가는 그의 여유로운 스타일도 개인적으로는 참 매력 포인트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밝아서 좋다.

하지만 본서는 달랐다. 시종일관 빵빵 터지는 위트를 유지하기엔 조금은 아픈 자신의 이야기를, 그 내면의 이야기를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책장을 넘기면서 간간이 보이는 그의 농담이 오히려 안쓰러운 기분마저 들곤 했다. 본서에서 그가 관심을 가진 주제는 바로 '아버지의 부재'였다. 실제로 밀러의 아버지는 어릴 때 그와 어머니를 떠났고 그는 사춘기 시절 내내 남성성의 현현(삼촌, 친구의 아버지, 남자 선생님 등)을 찾아 헤맸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라면서 한동안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다가 삼십대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부재'가 크게 다가왔고, 그로 인해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에게 남긴 상처들을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주체할 수 없는 거친 감정에 휩싸였던 강렬한 기억을 떠올렸는데 그 기억이 나에게도 아프게 다가왔다.

"제작자는 부모 없는 코끼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촬영했다.(중략) 발정기에 있는 두 코끼리가 만날 때면 나무뿌리가 뽑힐 정도로 큰 소동이 벌어졌다. 피범벅이 되어 가족도 동족도 없이 홀로 각자의 길을 가는 두 마리 코끼리에게서 문득 내 모습을 보았다. 코뿔소를 죽인다거나 그 비슷한 일도 한 적이 없지만, 나도 도무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몰랐던 때가 있었다. 때로는 분노, 때로는 우울, 때로는 들끓는 성욕 같은 것을 느끼면서도 그 감정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던 때가 있었다. 무작정 누군가를 죽이고 싶고, 어떤 여자와 자고 싶고, 술집에서 만난 남자를 때려눕히고 싶었다. 그리고 어떤 감정들을 주체하지 못해 정말이지 힘들었다. 인생은 사건들과 마찰하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여자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경력은 어떻게 쌓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남자가 되는지 몰랐다."

우리는 자주 과거 기억, 특히 부모와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성찰할 수 있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행위에 반감을 갖기도 한다. 흔히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으로 대변되는 이런 접근에 사람들이 반감을 갖는 이유는, 마치 지금 나의 문제들이 부모와의 관계에 엮여 있고 과거의 (주로 나쁜) 기억, 사건 때문에 지금의 내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내가 지금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내 미래는 달라질텐데 과거의 상처를 추적하는 작업들은 나를 나약한 존재로, 절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할 존재로 가둬 두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분석, 심리학이 아니더라도 일상적으로 접하는 혈액형, 기질론, 성격 분류법에도 발끈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도널드 밀러는 자신의 과거를 정직하게 돌아보면서 아마도 아버지의 부재가 지금의 자신에게 준 영향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고 그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씨름을 해 온 듯하다. 그리고 그의 글쓰는 재능을 이용해서 그 노력의 궤적들을 하나의 형태(책)으로 만들어 냈다. 그래서인지 서문에도 썼듯 이 책은 밀러가 어떤 책보다도 쓰는데 오래 걸렸고 쓰면서도 힘들어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책이 증명하듯 과거를 들춰내는 것과 과거를 묻어 두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주의 깊게 관찰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사적 역사를 돌아보고 그 아픈 기억들을 짚어 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아픈 기억들은 서른이 넘어서까지 우리의 삶을, 일상을, 무의식을 괴롭히곤 한다.

우리는 자주 타인이 아무렇지 않게 그냥 웃어 넘기는 주변 사람의 특정한 행동에 흥분하여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공격적인 반응을 취하기도 한다. 직장 상사에게 지나치게 높은 윤리의식을 요구하고 그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때 그를 맹비난한다. 아내나 여자 친구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소한 거절에도 마치 내 전존재가 거부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백화점이나 식당에서 점원에게 홀대당하거나 서비스를 충분히 받지 못했을 때 나도 모르게 '뚜껑이 열리고' 선후배의 날카로운 비판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몇 주동안 마음 앓이를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감정의 문제를 부모 이슈로 환원시킨다는 건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부모의 부재'라는 이슈가 내 안에서 매순간 절실하게 싸워야 할 정서적 그 무엇이기도 하다.

조금 엉뚱한 얘기지만, 나는 살면서 거의 유일하게 애정을 넘어선 질투심마저 느낀 존재가 있었는데 그는 다름아닌 정혜신 선생이었다. 글로 처음 알게된 이후로 블로그, SNS나 강의를 통해 접한 그녀는 정말 완벽해 보였다. 지성과 감성의 조화, 따뜻하면서도 합리적인 어머니상 등등, 뭐든 좋은 미사여구가 있으면 다 갖다 붙이고 싶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우연히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읽던 중, 그녀가 7살에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고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부재'를 경험했고 자신은 아들 출산을 기다리다가 나온 환영받지 못한 딸이었으며 새 엄마와는 마음을 나눈 적이 없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넘치는 사랑과 마음의 여유는 부모로부터의 충분한 사랑에 기인했으리라는 막연한 짐작과 달리 그녀는 정신과 전공의 시절 월급의 절반을 정신분석에 썼을 만큼 내면의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녀는 쌍용차 해고자 치유 센터인 '와락'을 설립하고 '마인드프리즘'을 통해 직장인들을 위한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사회적으로 결핍, 부재를 채우는 엄마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최근에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힘들어하는 희생자 가족들의 심리 치료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도널드 밀러도 이 책을 쓰고난 직후 '멘토링 프로젝트'를 설립하고 아버지 없는 소년들에게 사회적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thementoringproject.org) 이 둘은 모두 자신의 결핍을 통해 청소년, 청년들에게 부모의 부재가 채워지면 그들의 인생이 완전히 다르게 바뀔 수 있음을 깨달은 것 같다. 도널드 밀러는 자신의 삶에서 몇몇 어른들이 곁에 없었다면 음주나 마약에 빠지거나 도둑질을 해서 감옥에 갈 수도 있었으리라고 고백하곤 했다. 솔직히 나는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말을 심정적으로 불편해하는 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해 줘야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정혜신 선생과 더불어 본서의 저자 도널드 밀러를 꼽고 싶다. 이 책이 부디 그런 이들이 많아지는 역할을 해내길 바라 본다.


*뉴스앤조이 기고글: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6829

2014/06/03 21:33 2014/06/03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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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이리 출퇴근 스토리가 많냐.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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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22:26 2014/04/14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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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좀 있다. 나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많은 비평 자체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 설정에 있어-스스로도 최대 수혜자라고 여기는-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적 관점, 리차드 니버의 '변혁모델'로서의 문화 비평에 회의적이다. 기독교인들은 스스로가 진리를 아는 자, 진리를 가진 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자주 현실 세계에서 아마추어리즘에 만족하며 지내는 모습을 보여 왔다. 오히려 세속화를 배척하거나 격리되는 방식을 사용하는 종교 근본주의적 성향의 신자들과 달리 세속 사회 언저리를 배회하며 어정쩡하게 삿대질이나 해대는 존재, 뭐 그런 느낌을 자주 받았다.

   
▲ <아이갓 iGods> / 크레이그 뎃와일러 지음 / 황영현, 황규준 옮김 / 아바서원 펴냄 / 408면 / 1만 9500원

 

일례로 몇몇 뛰어난 연주자들을 제외하고 나는 CCM이라는 장르의 '아마추어리즘'이 싫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수의 CCM 가수들은 기똥차게 노래를 잘하지도, 나름의 철학이나 내러티브를 가진 완성도 높은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닌, 세속 음악계에 진입하기에는 모자란 역량을 '신심'으로 커버하려는 어떤 욕망이 느껴질 정도로 실력 면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여 줄 때가 많았다. 결국 CCM이란 게, 음악 자체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에, 한때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던 착한 교회 청(소)년들의 일시적인 소비 대상, 혹은 해소책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급격히 그 시장이 축소된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메타 비평의 형식을 빌어서 풀어내는, 이른바 '기독교적 관점으로 본 OO'이라는 비평들도 CCM과 마찬가지로 태생 자체가 B급이라는 편견을 가져다 줄 때가 많았다. 심리학, 과학(특히 진화론), 인문학, 사회학, 비교종교학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문화의 변혁자를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은 한 꺼풀만 벗겨 보면 근본주의자들의 텍스트와 맞닿는 듯한 착각 아닌 착각을 하게 만들었고,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나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속 사회를 바라보겠다는 '돈키호테' 식의 메타 텍스트들에게서 점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서론이 길었다. 본서 <아이갓 iGods>은 부제 'IT 기술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말해 주듯 전형적인 기독교 메타 비평서다. 솔직히 앞서 말한 이유에서 본서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허나 단적으로 말해 이 책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유익하게 읽었다. 특히, 우리가 최근에 열광하는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의 개별 기업이나 사이트를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 사회 전반적인 부분까지 나아간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상당히 진지하고 깊이가 있었다. 게다가 개별 기업들의 분석의 깊이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IT 역사를 이해하는 개론서로 이 책과 더불어 <거의 모든 IT의 역사>를 권하고 싶다.)

본서는 IT 기술 자체에 대해 비판적이다. 제목이 말해 주듯 'IT 신들'(iGods)은 진정하고도 유일한 신인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으로 대변되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 자체를 바꾸었고 제프 베조스의 아마존은 온라인상으로도 양서를, 나아가 세상의 모든 좋은 상품을 구별할 수 있는 심미안을 가져다 주었으며, 페이스북은 또 하나의 사이버 커뮤니티를, 트위터와 유튜브는 인터넷 민주화의 도구로 활용되는 등의 순기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관점은 기술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나는 대부분의 각론에 있어 저자의 우려감에 크게 공감한다.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있는 현대 IT 기술에 관한 해박하고도 방대한 분석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특히 한때 트위터가 정치-사회적 민주화의 도구가 될 것으로 여겨졌으나 반대로 국가기관에 의해 적극 활용될 소지가 있음을 주의 환기시켜 주는 대목이라거나, 페이스북을 바라보는 관점과 분석으로부터 기인한 깊은 영적 성찰은 북미가 아닌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혜안이었다. 특히 페이스북 특유의 문법, 이른바 '나는 자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선언은 우리가 쉽게 포스팅하는 페이스북의 글들이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꽂히는지를 오랜 시간 동안 조용히 묵상해야 할 화두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는 저자가 기술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에는 상당 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나는 기술을 비판하는 기독인들의 이중성 자체에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들이 자주 신봉하고 인용하는, 자끄 엘룰의 <기술 사회>에서 말하는-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스스로가 생명력을 가진 채로 팽창하려는 습성을 가진-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려감이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듯한데, 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주머니와 가방 속에 스마트폰, 태블릿, 킨들 같은 것들이 들어있음을 알고 있다. 고로 그 이중적 태도의 근저에는, 스스로는 통제를 잘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일반 대중, 평신도들에게 IT 기술은 위험한 존재라고 믿는 어떤 선민의식이 깔려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당수의 엘룰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또한 나는 'iGods'와 하나님 사이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접근에 회의적이기도 하다. '두 주인'론은 흔히 말하는 돈, 섹스, 권력과 같은 현대사회의 우상이 될 만한 어떤 대상과도 대립 구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도 한때 초콜릿, 왈츠, 록 음악, 진화론, 정신분석 등과 같은 피조물과 하나님은 양립할 수 없었다. 지금도 게임, 입시, 스포츠 등 모든 피조물과 유일신은 세속 사회에서 경합을 벌이고 '능력 대결'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입장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고 한동안 바뀔 성 싶지 않다. 사실 어딜 가나 무얼 하나 인간 그 자체가 문제라는 거다. 고로 나는 여전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IT 기술은 도울 뿐, 정작 악한 것은 인간이다'라고.

2014/04/09 21:36 2014/04/0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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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시작한 Bitstrips. 내러티브가 되어간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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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31 00:07 2014/03/31 0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