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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 <매트릭스>는 소비사회의 디지털화

<매트릭스 리로디드>를 찍으면서 워쇼스키(Wachowski) 형제는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에게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저작인 <시뮬라시옹>을 다 읽고 촬영에 들어가기를 바랬다는 기사가 영화 개봉 전부터 화재를 불러 일으켰다. 이미 매트릭스의 스토리라인은 일본 에니메이션과 기독교적 메타포, 그리고 여러가지 정보기술들의 혼합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그런 각각의 철학들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시뮬라시옹>이라는 책에서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에 대한 개념을 간단하게 살피면서 영화에 대입해 보는 것도 이제까지 개봉된 <매트릭스> 씨리즈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시뮬라시옹>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회를 해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처음에 현대 소비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시뮬라시옹(simulation)과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시뮬라크르는 신의 소상(塑像)이나 화상(畵像), 혹은 표상, 이미지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자신의 책에서 시뮬라크르를 기호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사물에 대한 기호론적인 사고는 마르크스(Marx)의 가치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르크스(Marx)는 사물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보드리야르는 사물에게는 마르크스(Marx)가 가정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이 두 가지 개념만으로는 환원이 불가능한 어떤 ‘상징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특정한 상품에는 단순히 그 상품 자체의 효용성과 교환 시의 가치뿐 아니라 결혼 반지처럼 반지라는 상품에 특정한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고, 나아가서 그 사물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신분의 상징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인간들은 이렇게 기호화된 사물을 소비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호들은 현실로 대체되고 현실은 시뮬라크르가 되는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매개로 거래와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가진 서로 다른 기호가치들의 존재, 즉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기호를 소비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뮬라크르 소비 사회를 가리켜 시뮬라시옹 사회라고 정의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뮬라시옹 사회는 사물에 대응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고 시뮬라크르가 현실이 된 세계이며 따라서 사물은 원초적으로 그것이 존재했던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코드화된 기호와 숫자에 그 기원을 두게 된다.

이 시뮬라시옹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적 토대이기도 하다. 일례로 현대의 자동차 기업들은 자동차의 충돌시험 시, 존재하는 물체를 몰아서 벽에 부딪쳐서 그 찌그러진 정도를 측정하는 작업을 실제로 하지 않고도 컴퓨터로 디지털 기호의 조합만으로 자동차의 형상을 모델링 함으로써 실제 자동차를 기호로 대체하여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반복작업을 컴퓨터로 계산하여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 자동차가 일그러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일단 시뮬레이션된 자동차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시뮬레이션 세계 안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뮬레이션에서 자동차는 기호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의 첫 편에서 매트릭스 안의 세계는 시뮬라시옹 사회를 대변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쉽게 매트릭스 안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물질들이 일대일로 대응되는 완벽한 사회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매트릭스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 입장을 생각해보라. 과연 어디까지가 실재로 존재하던 물체를 기호화한 것인가. 내가 먹는 스테이크는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는가. 실제로 대응되는 스테이크라는 음식은 존재하지 않는데 단순히 상징적인 기호를 통해 만들어낸 허구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보드리야르가 인식한 현대 소비사회의 코드는 그런 의미에서 고스란히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녹아있다. 먼저 <매트릭스>의 전편에서 네뷰커네자르(Nebuchadnezzar) 호 안에서 해커들이 하는 잡담은 그냥 넘기기에는 중요한 개념들이 들어있다. 도저가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마우스라는 해커에게 주는 스프처럼 생긴 음식을 먹으면서 “테이스티 휘트”의 맛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자신은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과연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한다면 그 맛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 사물의 맛일지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이 사실은 기계들이 대충 짐작으로 만들어낸 기호체계일 뿐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다소 황당한 잡담을 늘어 놓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워쇼스키(Wachowski) 형제가 액션신없이 잠시 쉬어간다는 의미로 이 부분을 삽입했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이 장면의 의미는 그들이 매트릭스의 토대가 되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대해 그런 가벼운 스케치를 통해서 본질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접근일 수 있다.

이러한 실재하는 사물과 기호와의 일대일 대응의 파기는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매트릭스 세계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니오(Neo)가 스미스 요원(Agent Smith)의 요구에 반항하자 입이 막힌다든지, 벌레처럼 생긴 추적장치가 배꼽으로 들어간다든지 하는 것은 현실에 일대일로 대응될 수 없는 가상적인 세계의 특성이다.
매트릭스 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디지털 기호의 조합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여기에서 매트릭스 시스템의 일방성 또한 드러난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스템은 피시스템인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시뮬라크르를 생산해낼 수 있지만, 반대로 인간 쪽에서 시스템에 응답하는 것은 금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보드리야르가 <대중매체의 진혼곡>에서 밝힌 대중매체의 “응답가능성”이란 개념이며 사회체계나 권력체계를 상징하는 시스템은 이런 응답 불가능성을 이용해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매트릭스> 1편의 마지막 장면.
그는 트리니티와의 키스 이후에 다시 소생하며, 머리로만 이해하던 매트릭스를 몸으로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그가 보던 것은 현실과 동일한 이미지였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세계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상징 즉, 시뮬라크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도 이와 같은 기본 하부구조 위에서 영화는 진행되며 키메이커를만나기 위해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라는 프로그램을 찾는 장면에도 이 개념들은 시각적으로 재현된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 니오(Neo)에게 자신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라고 할 때 니오(Neo) 앞에 펼쳐진 것은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는 디지털 기호들의 조합이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은 웃으면서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매트릭스는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다는 식의 말을 내뱉는다.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시뮬라시옹 사회의 모습. 그것이 매트릭스의 사회학이자 영화 전편에 흐르는 하부구조인 셈이다.**

2003년 6월 9일.

2003/06/09 18:05 2003/06/0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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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계를 통제할 수 있는가?: <매트릭스>는 후기현대주의의 키워드

먼저 매트릭스와 자이온(Zion)의 관계를 짚어보기 위해 에니매트릭스의 2, 3번째 에니메이션인 <the 2nd Renaissance>를 잠깐 언급해보자.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이제까지 SF영화의 근간이 되었던 스토리와 차별화를 갖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이 에니메이션에서 나타난다. <터미네이터>와 <토탈리콜>, 그리고 SF영화의 효시로 불리는 <블레이드 러너>는 기계문명과 인간문명의 갈등을 기본적인 하부구조로 가지고 있다. 물론 매트릭스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나머지 이전 영화들은 폭력에 의한 전복, 즉 그 대결구도 해결의 중심에는 항상 폭력이나 전쟁을 통한 대결이 항상 ‘선행’했으며 그 대결구도에서 인간은 항상 정이 많고 인격적이며 냉정한 기계문명의 희생자로 그려져왔다. 이러한 가정에는 모더니즘적인 사고가 스며들어 있으며 대부분의 인간 문명은 항상 이성적이고 건설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근저에 깔려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맞으며 인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이전까지의 인간의 머리 속에는 인간의 이성이 개발되고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사회는 아름다워지고 전쟁과 기근, 그리고 전근대적인 악행들은 사라지리라는 낙관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성적으로 최고의 부류에 속한다고 믿었던 정치가들과 과학자들이 전쟁을 주도했으며, 핵무기의 개발과 시험을 통해 전쟁에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계몽된 인류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가치관들을 왜곡시켰고 권력을 이용하여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을 대중에게 주입시켰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그러한 문명의 병폐였다.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에는 그러한 폭력성과 이기적인 심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렇듯 파괴적인 본성과 불완전한 이성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고, 그들은 철학과 사회학 같은 학문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다수의 대중들 가운데에는 무정부주의자나 히피족으로 전락하는 일도 빈번했다.

매트릭스의 하부구조가 되는 <the 2nd renaissance>는 이전의 SF영화와 달리 그런 인간의 폭력성과 집단이기주의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기계 문명은 인간 문명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인간문명에게서 자신들의 존재자체를 인정 받기를 원했고 인간 문명과의 공존을 바라고 있을 따름이었다. 일부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러한 기계 문명의 AI와 함께 대정부 시위를 하는 장면은 그런 기계문명의 도덕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몰도덕적이지 않은’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기계문명은 인간들이 수립한 국제기구의 폭력적 강경대응에 쫓겨 인류 문명의 발상지에 자신들의 사회를 일구고 그곳에서 살아간다.
여기에서 또 한번 매트릭스 하부구주의 기발함이 빛이 난다. 두 문명의 갈등관계를 이전 SF영화들은 전쟁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통해서만 해결해야 한다는 가정을 가지고 접근했으나, <매트릭스>에서는 기계문명이 정교한 제품의 생산과 수출이라는 무역 활동을 통해 인간 문명의 소비상품들을 잠식해간다는 방식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풀어낸다. 사실 이것은 이미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계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들과의 공생관계는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암시인 셈이다. <매트릭스>는 그 문명의 수혜자인 인류에게 있어서 기계를 차치하고서는 더 이상의 진보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말이다.

자유무역 환경에서 기계문명의 주가(stock price)가 끊임없이 치솟게 되자 기계문명의 AI 대표는 자신의 나라를 인류의 동반자로 인정해 달라는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국제 회의에 참석하려 하지만 입구에서 저지당하게 되며 보수강경 정치 지도자들은 연합군을 형성하여 기계문명과의 성전(聖戰)을 치르게 된다. 이렇듯 인간은 기계와는 달리 자신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항시 드러내며 자기들과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역사의 흐름처럼 공생을 인정치 않고 파멸하고 군림하려 든다. (이 장면에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을 떠올리게 되는 건 나의 자연스런 의식의 흐름이었다!) 결국 기계문명의 에너지원인 태양 에너지를 차단시킨 상태에서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축복 속에 성전을 치르지만 전력이 우월한 기계문명에 패하게 되고 기계문명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사용하려는 연구를 거듭하게 된다.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쓰기 위해 고안한 것이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여 통제하려는 수단인 매트릭스인 것이다.

기계 문명의 목적은 인간의 파멸이 아닌 통제다. 이미 인간문명이 테크놀로지 사회로 발전을 거듭했던 그 시작점부터 이들의 공생관계는 시작되었디. 하지만 그들은 공생을 부정하던 인간들처럼 폭력성이나 이기적인 본성으로 파괴를 일삼지 않고, 그저 존재를 인정 받고 그들이 나름의 문명을 번성시킬 에너지가 필요할 따름이다. 그 목적성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을 통제하는 거대한 시스템이 운영되며 그 시스템은 시뮬라시옹 사회인 매트릭스를 만들고 그 안에서 인간 문명은 감시와 통제를 통해 나름의 가상 세계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매트릭스>에서 기계의 감금과 통제 속에 왜곡된 진실 속에서 살던 니오(Neo)는 매트릭스를 벗어났고 이제 그는 예언 속의 그(the One)로서, 자이온(Zion)에 사는 인간들에게 희망적인 존재가 되었다. 니오(Neo)는 그들이 염원하는 the One, 즉 해방자이자 메시아인 것이다. 니오(Neo)는 자신이 매트릭스 속에서 벗어났으며, 이젠 더 이상 시스템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인간을 감금하여 통제하는 시스템을 파괴하고 인간들을 구원할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니오(Neo)가 하먼 의원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의원의 질문은 이런 니오(Neo)의 신념에 찬 운동 방향성에 역행한다. 사실 처음부터 자이온(Zion)은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계문명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자이온(Zion)은 자연이 푸르르고 땅의 소산을 통하여 생활을 영위하는 인류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지열 에너지원을 이용하여 또 다른 기계를 통해 생활을 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인간을 기계에 의한 통제에서 해방시킨다는 니오(Neo)에게, 의원은 통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니오(Neo)는 인간이 원할 때 자유롭게 기계를 멈출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의원은 그런 니오(Neo)의 대답에 회의감을 표한다. 과연 인간이 원할 때 기계를 멈출 수 있는가. 인간은 이미 발전사의 대부분에서 기계 의존적인, 시스템 의존적인 삶을 살아왔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한 여름에 40도를 넘나드는 사무실에 에어컨을 끌 수 있는가. 극 지방에서 난방기구를 끌 수 있는가.
에너지원을 공급하는 발전소의 기계들을 우리가 임의로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워쇼스키(Wachowski) 형제는 의원의 입을 통해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쉽게 현실 세계에서도 수없이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시스템을 통제하고 필요하면 기계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인간이 월드 와이드 웹을 파기할 수 있는가. 인간이 금융기관 건물의 보안 시스템을 멈출 수 있는가, 혹은 폐기할 수 있는가. 보일러 없이 한 여름과 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가. 우리가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스템이 이미 우리 삶을 구조화하고 규정하고 통제하고 있지 않은가. 네트워크가 연결된 컴퓨터 없이 대기업에 종사하는 회사원들이 업무를 보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나는 끄고 싶을 때 시스템을 셧다운 할 수 있는 위치의 결정자인가. 어쩌면 사실상 한 개인은 구조화된 시스템의 통제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니오(Neo)는 “그럼, 의원님의 요점은 인간과 기계가 공생관계라는 건가요?”라고 되묻는다. 이 대목에서 의원은 논점이 없는 말이라고 얼버무린다. 자신은 논점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그래서 세상의 변화를 다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구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역사의 수직적인 흐름을 보고 있는 늙은 의원에 눈에는 젊은 세대들의 확신에 찬 모습에 회의감을 표현한다. 늙은 이들은 그들의 시야보다 더 많은 것이 보인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구세대들은 그러한 기계 문명의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에 대해 논점을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기엔 너무 구식(old-fashioned)이 되어버린 탓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권력이 있다. 그는 노친네의 넋두리를 늘어 놓으면서 테크놀로지 세대의 지도자격인 니오(Neo)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인류 문명을 대표하는 자이온(Zion)의 사활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니오의 모습은 현대를 사는 이전 세대가 바라보는 우리 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2003년 6월 9일.

2003/06/09 18:04 2003/06/0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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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불명 상태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자신을 모르는 남자를 짝사랑하는 여자.

 
이 두 영화는 모두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난 이런 류의 영화가 싫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영화를 즐겨 보고싶지 않다고 하는 게 옳겠다. 나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탁월함을 인정한다. <talk to her>를 보는 내내 나는 그의 영화에 큰 매력을 느꼈다. 구성방식과 인물의 성격과 스토리의 전개는 정말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잠시 더 있고 싶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고기 자리>를 연상케 했던 <He loves me>는 깔끔한 색감으로 영화의 비극적 요소가 가중되는 가운데에서도 잘 짜여진 세트와 색감의 화려하고 깔끔한 요소는 그런 슬픔의 감정에서 약간 동떨어져 영화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효과를 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른바 <짝사랑>이라는 소재가 불편하다. 둘 사이의 관계에서 한쪽이 임의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패턴에서 다른 한쪽은 개입할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은 그럴 형편이 아니며,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관계 속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가운데에서 감정은 스스로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점점 성장해간다.

<talk to her>에서 베니그노는 의식불명에 있는 알리샤의 간호를 자원하여 단 한 번 말을 걸어본 적이 있는 알리샤를 4년간 간호한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말도 걸고 다시 깨어날 거라는 믿음으로 그녀의 몸이 잘못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고 그 시간동안 그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몰입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서 베니그노는 알리샤와의 감정에서 비약하여 판단하게 된다. 결국 그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행동은 사랑과 결혼이라는 이상을 바라보지만 현실에서 그의 행동은 간호사가 환자를 강간한 것이 된다.

<He loves me>에서 안젤리끄는 루이라는 심장전문 의사를 사랑한다. 그것도 단 한 번의 대면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그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을 각인시키고 그 모습의 옆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왜 안젤리끄는 그에게 본심을 이야기하지 못한 것일까. 베니그노와는 달리 안젤리끄가 사랑하는 루이는 살아있고 의식이 있다.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안젤리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루이가 의식불명상태에 있다면 안젤리끄도 그런 간호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는 안젤리끄의 기대처럼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남편이다. 안젤리끄는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이미 모든 스토리를 내면화한다. 그리고, 그것을 당사자인 루이만 빼고 주변 사람들과 공유한다. 주변 사람들이 믿는 것을 보면 안젤리끄 자신에게만은 그 관계가 진실보다 더 현실감있는 거짓인 셈이다.
 
이 두 영화가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것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 마지막을 보고싶지 않기 때문에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이련 류의 영화를 꺼리게 되는 게 내 본심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아프다. 그렇기 때문에 그 흔한 유행가의 가사처럼 눈물의 씨앗이나 유리같이 깨지기 쉬운 것에 비유하는 일이 많다. 또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두려움과 자기 방어적인 심리를 수반한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 영화들이 내게 던진 화두는 무엇을 사랑의 시작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베니그로나 안젤리끄에게 사랑은 한 번의 대면을 통해 자기 안에 각인된 이미지와 그것을 자기의 깊은 내면에서 고립화시키고 강화시키는 행동이다. 결국 비극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주인공들의 순수함으로 미화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주변부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이성 간의 사랑은 두 사람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 교과서 같은 영화 <good will hunting>에서 나오는 숀 교수와 윌의 대화 속에 그러한 사랑의 정의는 서정적으로 녹아있다. 시간이라는 축을 따라 성장해가는 함수의 자연스러운 곡선. 그 가운데에서 경험하는 서로의 부족함, 서로의 작은 습관과 기호들. 그것들을 알아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 닮아가는 모습 속에 두 사람이 정말로 이성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하나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흐름들에 나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것이 이 두 영화들이, 단순히 서로가 한 번에 감정이 통해 하룻밤을 함께하고 일어나는 깔끔한 화면에서 "이것이 사랑"이라 말하는 헐리우드 영화의 가벼움을 조소하고 극단적 감정의 흐름들을 짚어갔다 할 지라도 내가 불편한 마음을 일소할 수 없는 이유다.
 
과정이 험난하고 고통스럽다 해도 여전히 사랑은 가치가 있고,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둘 사이의 communication을 전제로 한다.


2003년 5월.
2003/05/15 18:07 2003/05/1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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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짜는 스토리라인>

대진(이병헌)은 사진찍는 것이 취미이다. 어느날 카메라를 들고 가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여자의 사진을 찍고는 그 여자에게 반하게 된다. 그리고, 사진에 담긴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랑은 대진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 시간이 얼마 흘러 형 호진이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준다는 자리에서 대진은 자신의 마음에 심어 두었던 사랑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은수(이미연)는 이미 호진을 사랑하고 있었고, 이미 시작된 대진의 사랑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곧 더 무서운 사랑이 시작된다.

대진은 호진이 여자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알고는 둘 사이의 아주 작은 이야기까지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며 또 조언을 해 준다. 결국 호진은 대진이 생각하던 연애의 조언을 들으면서 은수와의 사랑을 키워가며, 그 세 사람은 결혼 후에도 함께 살아간다. 대진의 사랑이 호진을 통해 육화된 것이다.

얼마 후 대진과 호진은 같은 날 사고를 당하지만 대진이 먼저 깨어나며, 깨어나기 직전에 의사들을 통해서 호진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깨어나서 자신이 호진인 것처럼 행동한다. 육화된 자신의 사랑이 좌절되었으므로 그 자신이, 호진을 통해 보여준 사랑의 행동들을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 호진은 깨어나지 못한 채 죽게되고 대진은 그런 호진에게 죄책감을 갖지만, 자신이 먼저 은수를 사랑했고 결국에 죽는 것은 형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독백을 한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던 은수도 호진과 똑같은 대진을 보면서 대진에게 호진의 영혼이 들어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어 대진과의 사이가 회복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이 "다시" 이어진다. 그리고, 대진의 아이를 임신한다. 대진을 좋아하던 예주가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나기 전에 가짜 목걸이를 발견하여 대진이 꾸민 일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예주는 대진에게 진짜 목걸이를 보내지만 그 목걸이를 은수가 받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을 알게 된 은수는 고통스러워한다. 반 나절이 지나고 은수는 다시 대진이 있는 전시장으로 가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조금은 힘든 얼굴로 대진과 함께 있는다.
 

<중독과 사랑에 관한>

영화가 끝나고 여전히 나는 "중독"이란 영화를 생각한다. 뭔가 정리하고 뭔가를 이야기하려 하면 할수록 현기증이 나며 머리 속을 흩어놓는 무엇인가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여전히 나에게 던져지는 질문. "대체 무엇이 사랑인가"

나의 초자아는 영화의 중반까지 형의 여자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얻기위해 치밀하게 연출된 행동의 패턴들을 묵묵히 실행해 옮기는 대진을 정죄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를 대하는 나의 잣대의 일면에는 분명 나의 엄격한 윤리와 도덕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 반전을 위해 준비했던 짧은 대목은 나를 늪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은수를 사랑한 것은 호진인가. 아니면 호진에게 패턴을 각인시킨 대진인가.

화장한 유골을 바다에 뿌리면서 내뱉는 대진의 독백만큼이나, 모든 것을 알고 난 은수의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이 날 불편하게 만들었다. 은수에게 썼던 편지의 말들, 사랑의 표현들, 일상 속에서 보여진 존재는 호진인가, 아니면 대진인가. 대진이라면 호진은 단지 그의 육화된 사랑에 불과한가. 대진의 꼭두각시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럼 은수를 사랑한 건 둘 다인가. 대진은 사랑이 지나쳐 집착에 사로잡힌 미치광이에 불과한가. 형의 여자를 사랑하여 발버둥친 광기인가. 삶에 있어 사랑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그 무엇을 도마 위의 음식처럼 탁탁 내리쳐서 꺼내들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들이 얽혀있는 매듭인가.

영화는 대진의 손을 들어 주는 것 같다. 은수를 보여 줄 때마다 그런 것들을 암시한다. 은수가 정작 행복을 느끼는 것은 호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다.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은수가 행복하게 느끼는 것은 호진의 자상한 배려와 그의 다정다감한 행동들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이 대진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진은 호진이 없어진 자리에서 호진의 모든 것을 그대로 옮길 수 있었다. 은수가 괴로워하다가 다시 대진을 찾아가서 아무렇지 않은 듯 대진을 대하는 대목에서 어렴풋이 은수는 자신을 정말로 가까이에서 사랑한 사람이 대진이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중독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며 사랑에 중독된 사람들이 만들어 낸 현기증나는 삶에 관한 영화다.**


2003년 1월 22일.
2003/01/22 18:10 2003/01/2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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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사람들은 내게 그런 말을 한다.

"무슨 생각해?
딴 생각하는 거 같아서.."

..사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게 문제인 것 같지만 예전과는 달리
길을 걷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거나 업무 중에도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머리 속이 텅 빈 것처럼
약간은 피곤하면서도 나른한 그런 느낌의
일상이 계속될 뿐...

마치 몹시 큰 병을 앓았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상처난 부위가 너무 커서
수술 후에도 매사에 조심하는 사람처럼
하루 하루를 조심조심 살아가다보니
그게 가장 중요한 삶의 부분이 되고보니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다른 표정의 내가 되었을 뿐인걸..

2001/03/15 18:43 2001/03/1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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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물론, 조금 지나긴 했지만-영화 <쉬리>는 대단한 흥행 성공을 가져오고 있다. 물론, 많은 비판적 잡지에서는 이 흥행 성공의 요인을 언론계의 대대적인 광고, 홍보의 결과로 보기도 하고, 헐리우드 영화의 줏대 없는 모방이었다고 나름대로의 평가절하를 하고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화의 깊이 있는 비평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 분야는 내 전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쉬리>를 보면서 느낀 점이 있어서 그것을 조금 얘기하고 싶다.


감동할(?) 부분에서는 감동하자!

주변이나 많은 영화 평론 잡지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영화를 꽤나 본 사람들 중 대부분은 영화를 그저 흘러가듯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항상 그 영화의 화면 구성, 시나리오의 전개 양상, 혹은 이 영화가 아류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영화를 분석하려 하기 때문에 실상 영화 한 편에 그리 큰 감동을 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를 보고는 정작 한다는 말이, "이 영화는 어떤 계열의 연장선에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이 영화는 무슨 무슨 기법을 그대로 따르는 구태 의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의 시나리오 전개는 상식 이하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말들이다.

물론, 평가는 중요하다. 이런 많은 비평이 있기 때문에 영화들의 질도 향상되는 것이며, 그럼으로 인해 영화를 보다 자세히, 그리고 바로 볼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본인도 영화보다는 영화 비평에 더 많이 시간을 할애해서 관심을 가지는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지나친 비평적 사고는 나의 감성에 많은 마이너스 요인이 되더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슬퍼해야 할 대목에서 눈물 흘리지 못하고, 웃어야 할 부분에서 조소를 보내게 되더라는 것이다. 일상적인 것도 진부하게 취급하며, 너무 상식 밖의 장면에선 상상력을 동원하기보다는 개연성 없는 시나리오를 탓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에 몰입해서 그 스토리를 편한 마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 영화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네 삶에 있어서의 작은 감동들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팀버튼의 <가위 손>같은 희한한 영화 속에도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동의 정서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영화도 하나의 흥미거리이고 오락이다. 보면서 마음껏 즐기고 감상적 정서에 젖어 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평은 다음의 문제이다. 처음부터 꼿꼿한 마음으로 영화를 대하여, 자칫 영화의 즐거움을 빼앗기지 말자.

<쉬리>라는 영화를 보면서 종결부에서 나는 울고 말았다.
유중원(한석규 분)이 이방희(김윤진 분)을 죽이고 자신에게 남긴 음성을 듣는 부분에서, 유중원이 정보요원에게 심문 받는 부분에서, 집에서 발견한 이방희가 짠 스웨터를 펼쳐 드는 장면에서...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같이 영화를 본 이들은 액션 영화를 보고 우는 나를 비웃었지만.
사랑을 아는 사람은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후에 갖게 되는 마음의 상처를...더군다나 유중원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이기까지 했잖은가...그것으로 그의 삶도 종말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은 죽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키싱구라미가 죽은 한 마리를 보고 자기도 같이 죽는 것처럼.


쉬리: "키싱구라미"로 대체된 "쉬리"의 비극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내게 돌아오는 질문이 한가지 있었다.

"왜 쉬리인가?"

영화에서 "쉬리"라는 물고기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번밖에 나오질 않는다. 박무영(최민식 분)이 전화로 쉬리에 대한 얘기를 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쉬리는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는 물고기의 종류라고 한다. 사전을 찾아 봤는데 강원도와 평안도 일대에 서식한다는 말을 보면, 휴전선 사이의 강에 서식한다는 영화 속 대사가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쉬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쉬리"는 분단된 조국의 상징이다. 휴전선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상징적 의미인 셈이다. 또한, 쉬리는 우리 민족에게 당면한 문제인 통일이라는 주제로의 회귀이다. 그것을 해결해야 함을 보여주는, 그것이 우리 사회에 담론으로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쉬리를 주제로 삼지 않는다. 영화는 쉬리에서 키싱구라미로 주제를 대체했다.
키싱구라미는 사랑의 상징이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따라 죽는다는 키싱구라미는 전적으로 인간적이고, 낭만적이며, 개별적인 주제의 상징이다. 키싱구라미는 현대인에게 적합한 인간 관계, 그것도 남여 사이의 지극히 개별적인 감정적 문제의 상징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쉬리는 이데올로기로 분할된 사회적 이슈의 상징이며 개별적이거나 낭만적인 정서가 아닌 전체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이다. (이해가 안 된다면 그것은 필자의 단어 선정의 문제일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 느꼈던 씁쓸한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통일"은, 혹은 "남북 문제"는 영화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진정한 통일에 대해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통일에 대한 많은 실망스러운 말들을 들었다. "꽃제비"라는 불쌍한 북의 어린 아이들을 보며 눈물없이 무덤덤하게 TV를 보다가 채널을 돌려버리는 사람들.
"북한이 무슨 우리 동포냐? 그런 놈들은 모두 죽어버려야 한다"는 극단적 표현까지 서슴치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남북문제, 통일의 문제는 현대 한국인 사이의 주요 담론이 되지 못하는 셈이다.

<쉬리>는 비극의 영화다. "남북문제"라는 우리의 심각한 문제를 주제로 다루지 못한 채, "남북문제"를 단지 "배경"삼아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낸,-어떤 의미에선-이 시대의 비극적인 영화이다. 지금도 북한은 박무영의 말처럼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꽃제비"들은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주워먹으며 감금된 생활에 고통 받고 있다. 인간의 기본적 인권마저 보장되지 못한 사회에서 사는 같은 민족을 화두로 삼을 수 없는 비극이 우리의 모습이며, "키싱구라미"로 대체된 "쉬리"의 비극인 셈이다.

1999년 4월 1일.
1999/04/01 01:54 1999/04/01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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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며칠 전 "트루먼 쇼"라는 영화를 보았다. 오랜만에 참 재미있는 영화를 봤다는 뿌듯함이 있었는데, 영화의 시나리오 발상이 기막히기도 했고, 짐 캐리의 연기변신(?)도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아직 못 본 이들에게는 권하고 싶은 영화다.
그러면, 트루먼 쇼에 대한 나의 어설픈(?) 이야기를 조금 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주인공 트루먼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트루먼 쇼"에서 보여지는 세트장은 철저하게 고립되어져 있고, 수많은 카메라가 트루먼의 위치와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그는 세트장 시설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교육"받았고, 여전히 암묵적 통제를 받고 있다.
이쯤 되면 미쉘 푸코(Michel Foucault)가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말한 "감금 사회"가 떠오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나의 관점: 푸코의 "감금 사회"

푸코는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사회 질서유지의 그 근본뿌리를 "교도소"에서 발견하게 된다. 현대 사회 기구들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는 교도소의 운영방식을 알아보면 당장에 드러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들-현대 사회의 많은 조직들, 이를테면 병원, 학교, 공장-의 억압적인 형태는 감옥에서 행해지고 있는 기율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법자들을 외부 세계와 차단해, 감금시켜 놓고 , 엄격한 감시와 규율로 교정하는 방법을 학교, 병원, 공장과 같은 다른 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푸코의 이론에 따라 영화를 살펴보면 현대인을 외부세계와 차단해, "감금"시키는 것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는 세트장을 통해서, "엄격한 감시"는 24시간 동안 끈질기게 트루먼을 찍고 있는 수백 개의 몰래 카메라를 통해서, 그리고 현대인들의 몸을 통해 통제를 강화하려는 "규율들"은 어릴 때 아버지를 물에서 죽게 만든다든지, 학교에서 세계 여행에 대한 트루먼의 꿈을 좌절시키려는 일련의 교육들과 무의식 중에 습득되는 수많은 광고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트루먼 쇼"를 푸코의 이론에 비추어 본다면, 세트장은 "교도소"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억압된 현대사회"를 의미하고, 트루먼은 그 곳에서 온갖 감시와 규율로 통제되는 현대인을 의미한다고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의 뒷 부분에서 트루먼은 세트장을 벗어나는데 성공하는데, 아마 그것의 상징적 의미는 "광기의 재생"정도가 아닐까 한다.


또다른 관점: 세상이 보는 유신론

다음으로 넘어가서, 이제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영화를 보도록 하자.
이번에는 종교에 대한 상징으로 영화를 보면, 트루먼은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이고 쇼의 세트장은 신이 직접 다스리는 유토피아다. 물론, 그렇다면 트루먼 쇼의 프로듀서는 창조자, 즉 신이다.

신은 진실만 보이도록 통제된 이상적인 세상을 창조했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여 자신이 계획한 세상 가운데 살게 한다. 신은 자신의 치밀하고, 이기적인 계획하에 인간을 통제하고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그것이 종국에 가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된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신의 구체적인 의도대로 직장을 가지고, 배우자를 얻고, 인간관계와 주거지의 선택까지 일방적으로 강요 당한다. 모든 것이 그의 섭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신의 계획 하에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유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 트루먼 쇼는 신의 통제로부터 자유하고 싶어하는 인간 의지의 발현이라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긴장점은 신이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하는 "통제"와, 안전과 평안을 버리고서라도 얻고 싶은 "통제로부터의 자유"에 있다.


짧은 기독지성 비판

최근에 몇 편의 영화를 통해서 느낀 것이지만 세속이라 부를 수 있는 세상의 지성은 기독교 세계관을 심하게 압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 지성인들이 80~90년대에 배웠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하여 그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적절하게 혼합한-사실 이 혼합 자체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이기도 하다-형태를 가지고 기독 지성인들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매체가 딱딱한 논문이나 연구서가 아닌, 시각효과가 뛰어난 영화와 같은 미디어라는 것이 더 현대 사상 흡수에 있어서의 용이한 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상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조차 부족한 실정이 아닌가!

현대 사상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 변증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푸코의 이론에 대한 내용의 일부는 조흡 씨의 "푸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인용했다. 그리고 위의 내용은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지, 영화 자체가 원했던 메시지와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이 글은 푸코의 이론과 기독교 지성의 자성(?)을 위해 어설프게 쓰여진 글임 또한 밝혀둔다.)


1998년 11월 11일.
1998/11/11 18:03 1998/11/1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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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트루먼 쇼"라는 영화를 보았다. 오랜만에 참 재미있는 영화를 봤다는 뿌듯함이 있었는데, 영화의 시나리오 발상이 기막히기도 했고, 짐 캐리의 연기변신(?)도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아직 못 본 이들에게는 권하고 싶은 영화다.
그러면, 트루먼 쇼에 대한 나의 어설픈(?) 이야기를 조금 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주인공 트루먼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트루먼 쇼"에서 보여지는 세트장은 철저하게 고립되어져 있고, 수많은 카메라가 트루먼의 위치와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그는 세트장 시설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교육"받았고, 여전히 암묵적 통제를 받고 있다.
이쯤 되면 미쉘 푸코(Michel Foucault)가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말한 "감금 사회"가 떠오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나의 관점: 푸코의 "감금 사회"

푸코는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사회 질서유지의 그 근본뿌리를 "교도소"에서 발견하게 된다. 현대 사회 기구들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는 교도소의 운영방식을 알아보면 당장에 드러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들-현대 사회의 많은 조직들, 이를테면 병원, 학교, 공장-의 억압적인 형태는 감옥에서 행해지고 있는 기율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법자들을 외부 세계와 차단해, 감금시켜 놓고 , 엄격한 감시와 규율로 교정하는 방법을 학교, 병원, 공장과 같은 다른 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푸코의 이론에 따라 영화를 살펴보면 현대인을 외부세계와 차단해, "감금"시키는 것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는 세트장을 통해서, "엄격한 감시"는 24시간 동안 끈질기게 트루먼을 찍고 있는 수백 개의 몰래 카메라를 통해서, 그리고 현대인들의 몸을 통해 통제를 강화하려는 "규율들"은 어릴 때 아버지를 물에서 죽게 만든다든지, 학교에서 세계 여행에 대한 트루먼의 꿈을 좌절시키려는 일련의 교육들과 무의식 중에 습득되는 수많은 광고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트루먼 쇼"를 푸코의 이론에 비추어 본다면, 세트장은 "교도소"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억압된 현대사회"를 의미하고, 트루먼은 그 곳에서 온갖 감시와 규율로 통제되는 현대인을 의미한다고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의 뒷 부분에서 트루먼은 세트장을 벗어나는데 성공하는데, 아마 그것의 상징적 의미는 "광기의 재생"정도가 아닐까 한다.


또다른 관점: 세상이 보는 유신론

다음으로 넘어가서, 이제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영화를 보도록 하자.
이번에는 종교에 대한 상징으로 영화를 보면, 트루먼은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이고 쇼의 세트장은 신이 직접 다스리는 유토피아다. 물론, 그렇다면 트루먼 쇼의 프로듀서는 창조자, 즉 신이다.

신은 진실만 보이도록 통제된 이상적인 세상을 창조했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여 자신이 계획한 세상 가운데 살게 한다. 신은 자신의 치밀하고, 이기적인 계획하에 인간을 통제하고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그것이 종국에 가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된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신의 구체적인 의도대로 직장을 가지고, 배우자를 얻고, 인간관계와 주거지의 선택까지 일방적으로 강요 당한다. 모든 것이 그의 섭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신의 계획 하에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유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 트루먼 쇼는 신의 통제로부터 자유하고 싶어하는 인간 의지의 발현이라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긴장점은 신이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하는 "통제"와, 안전과 평안을 버리고서라도 얻고 싶은 "통제로부터의 자유"에 있다.


짧은 기독지성 비판

최근에 몇 편의 영화를 통해서 느낀 것이지만 세속이라 부를 수 있는 세상의 지성은 기독교 세계관을 심하게 압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 지성인들이 80~90년대에 배웠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하여 그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적절하게 혼합한-사실 이 혼합 자체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이기도 하다-형태를 가지고 기독 지성인들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매체가 딱딱한 논문이나 연구서가 아닌, 시각효과가 뛰어난 영화와 같은 미디어라는 것이 더 현대 사상 흡수에 있어서의 용이한 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상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조차 부족한 실정이 아닌가!

현대 사상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 변증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푸코의 이론에 대한 내용의 일부는 조흡 씨의 "푸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인용했다. 그리고 위의 내용은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지, 영화 자체가 원했던 메시지와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이 글은 푸코의 이론과 기독교 지성의 자성(?)을 위해 어설프게 쓰여진 글임 또한 밝혀둔다.)


1998년 11월 11일.
1998/11/11 01:57 1998/11/11 0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