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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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민자>를 봤다.
상당히 훌륭한 영화였다.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 제레미 레너라니.
그 연기만으로도 이미 영화는 하늘로 올라선다.
이미 <투 러버스>에서 보여준 감독의 독특한 느와르적
분위기도 좋았고.
그런데, 뭔가 불쾌하다. 뭔가가...
그 뭔가를 찾기 위해 며칠을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듯
영화의 장면들을 이리저리 복기해보았다.
.
#2.
일단 이 영화는 1920년대 미국으로 입국하려던 한 여성의
한없는 추락을 소재로 삼고 있다. 
보는 내내 그 여성, 마리옹 꼬띠아르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 여성, 끝내주게 예쁘다. 예뻐서 더 안타깝다. (원래 그렇다..)
내가 그녀를 구해주고 싶을 정도로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영화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부르노역의 남성은
이 이민 여성을 소유하려들고 클럽에서 춤을 추게하고 
결국 매춘에까지 끌어들인다.
하지만 '나쁜 남자' 부르노마저도 영화의 말미에 가서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녀가 떠나도록 돕는다.
.
#3.
20년대 미국의 암울한 밤거리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한없이 추락하는 내러티브.
흥미롭게도 그 많은 댄서들과 매춘부들 중 영화 속에서
그녀만이 누드장면이 없다. 
그리고 다른 여성의 벗은 몸은 야하다기 보다는 
불편함 나아가 불쾌함마저 유발하지만, 
유독 '예쁜' 그녀는 왜인지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다는 듯
벗은 몸으로 목욕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침실에 눕지도 않는다.
그저 2달러에 그녀가 팔리고 있다는 대사가 그녀의 몸을 대신한다. 
물론, 
마리옹 꼬띠아르의 뛰어난 연기가 그 영화적 어색함을 무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녀만이 안타깝고 그녀만이 빛이 난다. 
.
#4.
나는 자주 영화를 평가하는 나만의 잣대로 
영화 속 등장인물 중 특히 주변 인물들을 
감독이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하는가에 집중하는 편이다.
특정 인물을 절대선 혹은 절대악으로 배치한다거나
주인공에게 전적인 내러티브를 내어주는 경우
대체로 나는 그 영화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결국 내가 불편한 지점은 그런 거였다. 
'이민자'가 이민자'들'이 아닌게 불편했다. 
밑바닥 매춘부들로 전락한 
이민 여성들의 면면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지나갈 때 모든 남성들이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빼어난 외모의 
여성 한명의 몰락에만 몰입하고 애틋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그 구도가, 또다른 소극적 '마초성'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하는 불편함.
...
며칠 지난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15/10/02 22:28 2015/10/02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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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도 한 마디를 해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제목과 목차, 그리고 간단한 소개글로 접한 이 책에 대해서 나는 충분히 공감했다. 그저, 책을 읽자 그 감흥이 사라졌을 뿐이다. 이 책은 좋은 책이었나, 아니다. 그럼 이 책은 나쁜 책이었다, 그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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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에 공감한 주된 논조는 다수의 직장인들이 자기 직장을 '필요악'으로 대한다는 사실이다. 직장에 대한 애정, 직종, 자기 업무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이 보다 더 윤리적이고, 더 의식있고 더 나은 인간인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찌든 존재가 아니야', '지금은 잠시 이 하찮은 일에 매몰되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이 일과는 매칭되지 않는 순결한 인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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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가 몇 가지의 지적을 한다. 입사 첫날부터 진급(사장)을 목표로 질주했어야 했다, 회사의 색깔에 물들었어야 했다, 사내 인간관게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싫어하는 상사에게도 다정했어야 했다, 창의적이기보다는 성실했어야 했다...고. 나또한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특히 예전처럼 졸업 후에 2개의 기업 중 하나를 골라가던 시절을 지나 1개의 기업에 2명의 구직자가 몰리는 구도에서 그 안일하고도 편안한 자세는 '조만간 나를 잘라라'라는 메시지와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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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류의 글이나 논조를 읽고는 "그럼 나를 없애고, 회사의 개가 되란 말이냐"라는 심경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나도 그런 류에 가까울 것 같다. 하지만 저자의 몇몇 지적이 곧바로 '회사의 개'라는 인식으로 급전환되는 불편한 우리의 속내를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왜 직장생활에 대한 적절한 지적을 여지도 없이 묵살하려 드는건지, 내가 직장에서 정말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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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후회에 동의되지 않는 지점도 있다. 저자는 자신의 직장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를 가진 채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다. 직장이라는 게 지금은 어정쩡하게 주저앉은 것처럼 보여도 내 시간의 대부분을, 내 청춘의 대부분을 내어주는 공간이다. 일상 시간과 노력의 대부분을 투자하는 직장에서 진급도, 애정도, 미래도 발견할 마음이 없다면,
어서 저자의 조언대로 '생각'을 바꾸거나, 어서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더) 일치하는 직장으로 옮겨야 한다. 
.
내가 와닿았던 지점은 '18년'이란 단어 자체였다. 여차 하면 그대로 갈 것 같은 시간. 7년이 지나면 곧올 직장생활 18년차...
.
p.s)
저자의 필력도 아쉬운 부분. 읽다보면 왠지 아버지나 회사 선배의 꾸중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하지만 그건 좋은 신호다. 가식이나 포장없이 순수한 사람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2015/10/02 22:26 2015/10/02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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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를 봤다.
솔직히 영화는 30분전에 끝났어야 했는데
필름이 남았던 걸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영화가 아주 나쁘진 않았지만,
영화의 소재와 주제의식? 뭐 그런게 싫었다.
.
영화를 보고 꽤 많은 여성들이 울며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꽤나 의외라고 생각했다. 만약 반대로 고부간의 갈등을 
아름답게 다룬 영화를 봤다면 도리어 남성들은 감동하며 
영화를 즐길 수 있었겠지 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
아버지가 기대하는 왕의 지위와 역할을 
철저히 수행하도록 질책받으며 자라난 아들의 비극. 
살아남기 위해 타협한 영조와 그 아들이 해야하는 처세.
영화 시작부터 머리가 아팠다. 
.
후반에 가서는 간간이 나타나는 아버지의 값싼 눈물,
그리고 그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 감동적인 자식사랑의 독백이.
꽤나 현실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너를 죽여서라도 세워야 할 대의와 명분이란 게 있다.' 
내 아버지가, 내 선생님들이, 내 나라의 지도자들이
내 집안의 어른들이 하던 수많은 말과 행동과 맞닿아 있었다.
.
그런 이유로 
그런 값싼 동정에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에 난 공감할 수 없었다. 
지긋지긋한 가족주의의 그물에 걸린 우리의 자화상이랄까.
왜 굳이 추석에 이런 영화를 개봉하여 마음만 심란하게 만드는가.
왜 굳이 그것을 마치 아름다운 것처럼 현혹시켰는가. 왜.


2015. 9. 28.
2015/10/02 22:22 2015/10/02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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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하는 말인데.
진보매체에서 난민 아이 사진을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합성하고
삽화로 재현하는 부분들이 싫었다.
.
물론 그 사진 자체의 임팩트를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
써먹어야 할 컨텐츠에 대한 도리
혹은 윤리,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
.
우리나라가 난민국가가 되었고
내 아이가 죽었다면,
일본이나 미국의 진보적인 매체
에서 내 아이의 사진을 삽화로
합성으로 혹은 그대로 반복해서
보여준다면 난 그들과의 연대보단
고립을 택할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인터넷 기사도 
보고싶지 않을 것 같다.
.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어떤 이슈를 위해서 소비해야할
혹은 소비해서는 안될
컨텐츠의 선택도 우리의 맨얼굴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2015/09/13 23:34 2015/09/13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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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쇼미더머니의 승리다. 내 관전평은 그랬다.
그 중심에는 물론 '블랙넛'이 있었다.
내 촉으로는 만약 1번의 경선이 더 있었다면 '어차피 우승은 송민호'라는 룰을
깰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정도.
내 식으로 말한다면 '착한편'(우리 진영) 논객들은
초반부터 블랙넛의 인성을 문제삼았다.
'일베'스러운 블랙넛을 쇼미더머니가 잘 활용하고 있다고
그의 과거 쓰레기같은 랩을 거론하고 공연에서 보여주는 저질 퍼포먼스에
냄비처럼 타올랐다.
.
2.
다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쇼미더머니의 승리다.
아마도 시스템은 블랙넛이 악동으로 부각될 때부터 그의 스토리를 털었으리라.
(난 마이크로닷이 실제로 만난 블랙넛에 대한 호감을 표할 때 복선을 읽었다.)
처음부터 기획되진 않았겠지만 쇼미더머니는 블랙넛을 악동 캐릭터로 
몰고가는 것을 방기, 혹은 유도하다가 그의 고단했던 과거를 통해 
인간 김대웅을 이해하도록 내러티브를 구성했고, 그것은 진정 판을 뒤집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YG등딱지 뗀다던 송민호는 태양의 후광아래 이겼지만 작아보였고 
블랙넛은 인간 드라마를 완성하고, 그간의 비호감 캐릭터를 털고 하차했다.
.
3. 
블랙넛의 후회와 찌질한 랩에는 진정성이 있다.
과거의 고단한 삶과 방황했던 시간들에 대해, 쓰레기 가사들에 대한
비난에 대해 아이돌 스타처럼 즉각 사과하는 치밀함과 신속함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렇다고 이해해 달라고 징징대지 않고
찌질했던 자신을, 그저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음악으로 전달한다.
.
난 여전히 그가 탐탁치 않다. 
가사를 절어서 탈락한 피타입, MC 메타, 하다못해 힙합의 가오를 말하다
아쉽게 하차한 릴보이에 비해 그의 철학?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못마땅하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랩은 참 훌륭하다. 플로우를 타는 감각, 딜리버리,
무엇보다 에너지넘치는 다른 래퍼들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능력, 집중력이 남다르다. 
욕하면서도 음악에 고개를 흔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
4.
하지만 나처럼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많은 비판자들은
앞으로도 생각해볼 지점들이 있다.
블랙넛을 비판하던 담론, 이른바 여성혐오, 막장을 즐기는 시스템,
가족주의를 통해 쥐어짜는 감동으로 얼버무리려하는 
저 자본주의에 찌든, 힙합정신을 무색하게 만드는 쇼미더머니 어쩌고.
.
그 돈에 찌든 시스템이 나같은 정의로운 논객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호소력 있는 내러티브를 주고 있다.
왜냐면 시스템이 김대웅이라는 개인을 우리보다 더 깊이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
'쓰레기 랩이나 내뱉는 인성에 문제 있는 놈'이라고, 그렇게
우린 한 개인을 우리의 담론, 진영, 바른 삶과 행동이라고 규정짓는 사고로
어떤 한 인간의 결과물을 판단하고 비평하고 결론짓는다. 
SNS가 생겨난 이후로는 섬광과 같은 속도로 한 사람의 인생을 저주한다.
.
5.
텍스트 비평이 유효하던 시기가 있었다.
텍스트만 가지고 떠들던, 그래야 했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담론에 의해, 그리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텍스트 너머의 발화자, 담론의 주체,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을 보게 만들었다,.
사이버수사대와 SNS, CCTV가 발화자, 컨텐츠 생산자의 
신상, 과거와 현재, 일상의 모습 그 모두를 털 수 있게 됐다.
.
정의와 사회참여를 외치는 진보교수의 자녀는 해외유학을 나가 있고
사교육을 비판하는 집단은 모두 사교육으로 인서울 대학을 나온 인재들이고
자비와 사랑을 노래하는 종교인들은 비싼차를 몰고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그 부를 세습하고 성추행을 일삼는데도 건제하고,
김대웅은 지옥같은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끄적인 쓰레기 같은 가사를
20대에 읊었다는 이유로 그의 '인성'이 회복불가 수준의 사이코 취급을 받는다.
.
6.
물론 블랙넛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적어도 이것은 구분하고 싶다.
무릎팍도사나 힐링캠프에 나와서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려던 연예인들은
이미 정점에 놓였던 '가진자'였다. 인생이 고단했던 20대의 젊은 래퍼를 까려면 
최소한의 형평성은 맞춰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
최소한 나는 블랙넛이라는 인간 자체의 판단은 조금 더 유보하고 싶다.
인성을 거론하려면 40까지는 기다리고 싶다.
솔직히 블랙넛 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뱉어낸 말과 행동에
대해 너무 명확한 구획과 판단이 가혹하리만큼 빠르게 이뤄지지 않았으면 한다.
....그게 내가 자본주의의 쓰레기 방송 쇼미더머니의 승리라고 단언하는 지점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2015/08/24 22:53 2015/08/24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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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IT이야기
대학원 때의 일이다. IT 버블의 마지막 시기였던 당시의 트렌드에 맞게 연구실에서도 프로그래밍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나또한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몇 개의 컴퓨터 언어를 배웠고 연구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간단한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는 그야말로 IT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체감하던 때였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서부터 오픈소스 운동으로 대변되는 '리눅스 혁명' 같은 이른바 기술에 뒤따르는 많은 철학적 담론들이 우리를 뇌를 자극했다. 

인쇄술이 그랬고, 사진기가 그랬듯이 우리는 컴퓨터 안에서 'Copy & Paste'를 통한 무한 복제가 손가락 두 개만으로 무수히 생성되는 경험을 했다. 정품 소프트웨어와 100% 일치하는 카피본을 소유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에 열광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나는 '기술을 곱씹는 마지막 세대'였다고 생각한다. 더 쉽게 말해 무언가를 접할 때 책으로 배우는 세대, 기기를 사면 '사용설명서'의 첫 페이지부터 읽어가는 '마지막 종족'인 셈이었다. 프로그래밍도 그랬다. 유명하기로 소문난 몇 백 페이지가 넘는 코딩책 몇 권을 사서 1장부터 읽었고 그래서 우리의 시작은 모두 화면에 'Hello World'를 띄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코딩으로 먹고 살겠다는 뜻을 접었다. 대학원 같은 연구실에 군대를 가지 않은 신입학생이 들어왔다. 내가 보기에 그는 어렸다. 나이도 아래였지만 매사에 진지하지 않은 말투, 선배들이나 교수님을 지나칠 때도 정중히 인사를 하거나 대화 중에도 어려워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반바지를 입고 다니고 틈만 나면 게임을 즐기는 이 어린 신입 때문에, 나는 코딩을 접었다.

그의 책상에는 두꺼운 코딩 책은커녕 아무것도 꽂혀있지 않았다. 그저 필요하면 인터넷 검색을 해서 알고리즘 몇 개를 얻어냈다. 알고리즘. 하나의 알고리즘은 내겐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혹은 철학자의 선언처럼 '의도'와 '내용'이 함께 읽혔다. 잘 짜여진 알고리즘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유명한 저자의 책을 읽는 행위와 같았다. 모든 코드의 내용을 이해하고 나서야 내가 만들려는 프로그램의 입력과 출력을 선언했다. 버그가 생기면 언제나 덧붙여진 내 코드를 의심했다. 

반면 그 신입은 -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 내 종교의식같은 코딩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카피한 알고리즘을 자신의 프로그램에다 순식간에 이리저리 붙여댔다. 그리고 독해가 되기 전에 디버그 프로그램을 돌렸다. 수십개의 버그가 뜨면 마치 게임을 하듯 버그를 잡아나갔다. 보통은 수십 분, 짧게는 단 2, 3분 안에 덧붙여진 알고리즘이 제대로 작동하는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나는, 그 예술작품을 음미하고 조심스럽게 내 숟가락을 얹는데 하루 이상이 걸렸다. 물론 완벽하게 이해가 된 코딩에도 언제나 버그는 떴다. 그것을 수정하는 데에 시간을 쏟는 동안 신입은 이미 끝낸 프로그램을 덮고 게임에 시간을 쏟았다. 그때의 기분은 마치 모차르트를 만난 살리에르의 그것과 같았다.

기술을 곱씹는 '마지막 종족'의 단상 
기사 관련 사진
▲  영화 <엑스 마키나>에 등장하는 로봇도 빅데이터 기반의 AI로 설정되었다.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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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공지능에 관한 연구가 뜻하지 않은 영역에서 활발해졌다. 고전적인 AI 로봇들은 SF영화 속에서 '튜링 테스트'로 시험대에 오르곤 했다. 스스로 자각하고 행동(run)을 결정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 그에 대한 대중의 기대 혹은 불안감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동안 기술은 무심한 표정으로 꾸준히 발전했다. 

존재의 '인식'이라는 위로부터가 아닌 엄청난 기억을 빠른 시간에 처리하여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방식, 즉 '빅데이터' 기반 기술을 통해 인공지능은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고 있다. 지금도 페이스북과 구글은 내가 관심있어 하는 사이트를 간간이 모니터에 띄워주고 내가 알 만한 친구들을 찾아준다. 아마존은 내게 말을 걸듯 '혹시 이걸 찾으셨나요'라며 사려고 찾아보던 제품 몇몇을 추천해 준다. 

아이폰 시리는 내 시덥지 않은 질문에도 마치 진짜 친구처럼 유머도 섞어가며 적절히 대답해준다. 사실 이 기술은 단말기 너머에 있는 거대한 컴퓨터가 데이터를 순식간에 처리하여 나에게 특화된 방식으로 피드백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그(것)와 교감하고 때론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다. 영혼없는 기기에게서 인간냄새마저 맡았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며칠 전, 문득 찍어내는 듯한 요즘 음악이 지겨워서 어릴 때 즐겨듣던 명반 음원을 구입했다. 여전히 '쏘울'이 살아있는 명반의 음악을 왜인지 내 귀가 뱉어냈다. 마지막 트랙까지 가지도 못했다. 일이십년 동안 비약적인 녹음 기술의 발전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여러 채널로 녹음을 하고 튜닝을 하고, 다시 소프트웨어로 후처리를 통해 최적의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최근 음악에 익숙해져버린 탓인지 '쏘울'만 살아있는 명반은 추억 속으로 돌아가야 했다. 반면 쏘울이 없다고 느껴지는 샘플링 음원들의 완성도가 높은 탓에 그런 곡 몇 개만 들어도 음악적 갈증은 쉽게 해소된다. 

기술의 발전이 소수의 몇몇 사람들이 점유하고 생산해내던 콘텐츠의 대중화, 민주화를 이룬 것은 분명하다. 예전에는 수동카메라로 초점과 셔터 스피드, 조리개 노출을 조정하고 적정 필름의 감도를 제대로 선택해야 제대로 된 사진이 나왔지만 지금은 스마트폰과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도 왠만한 수준의 작품사진을 얻을 수 있다. 

어떤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지루하고 반복적인 훈련, 그것을 통해 수십 번씩 머리 속에서 생겨나는 고민, 대상에 대한 집중 같은 흔히 '쏘울이 있다'라고 말하는 장인들의 고급 기술들이 한두 번의 조작을 통해서도 얻어진다. 스트라디바리우스보다 더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음원에 눈물을 흘린다. '국물이 끝내주는' 인스턴트 음식들의 퀄리티가 만만치 않다.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기술은 우리가 고매하게 여기는 어떤 것, '쏘울'있는 존재로서의 많은 행위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오히려 '원본'이 어색할 정도로, 대중화된 기술들은 내 감성을 적절하게 자극하고 나를 친구나 애인보다 더 잘 이해해준다. 내가 지향하고 있는 삶의 '과녁'에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화살을 꽂아놓는다. 

이래도 이것을 차가운 디지털 세상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단순한 데이터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쏘울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기술들이 우리의 뇌가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인지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점점 더 우리는 인간의 미세한 감정 변화에도 적절하게 반응하는 살아있는 기기들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그런 기술에 '쏘울이 없다'고 말하려는 '마지막 종족'이 되리라는 확신이 든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4372
2015/08/16 09:31 2015/08/1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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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모임 활동/IVF팟캐스트
IVF학사회 새 팟캐스트, <요람에서 취업까지>

#1.
저는 일곱 살 아이의 아빠입니다. 하루는 저녁에 아내가 말하길, 아이가 친구네 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오후시간이 되자 학습지 선생님이 친구와 그 동생을 가르치러 왔답니다. 친구는 아이와 같은 일곱 살이고 그 동생은 다섯 살입니다. 친구는 학습지를 두 개나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그날 풍경을 제게 전해주는데 뭐랄까요, 제 마음이 참 애매하더군요. 우리 아이는 친구가 학습지 선생님의 공부 지도가 끝나기를 멍하게 기다렸답니다. 그 주변을 기웃거리며 무슨 공부를 하는지 어깨너머로 한동안을 지켜보던 모습을 아내가 이야기하는데 순간적으로 제가 아이를 지진아로 만들고 있는 부모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유아기 혹은 미취학 자녀의 선행학습에 부정적이었던 저였기에, 그날 제가 느꼈던 독특한 감정은 꽤나 묘한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동네의 많은 아이들이 이미 다섯 살 때부터 학습지를 하고 있었고, 우리 아이가 유치원 외에 어떤 공부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네 엄마들은 아내에게 왜 아이에게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느냐, 지금 이러이러한 것들은 하나씩 시켜야 한다고, 부드럽고도 걱정스러운 어조로 '협박'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그 애정 어린 충고에서 화제를 바꾸기 위해 매일 한두 시간 이상 자신의 자녀 교육'관'을 변호해야 했답니다.

#2.
이 일을 통해 제가 스스로 흥미롭게 지켜본 지점은 잘 놀고 있는 제 아이를 향한 근거 없는 '불안'이었습니다. 자녀교육에 관한 한 저도 아내와 함께 많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름의 생각을 정리했지만, 아이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자녀교육에 관한 소소한 '신호'들로 인해 나의 신념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어떤 면에서는, 학습지를 통한 가벼운 선행학습이나 영어책 읽는 습관 같은 건 아이가 적절한 시기에 흥미를 잃지 않게 도와줄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아이의 발달단계에 걸맞은 적절한 지적 자극에 관한 객관적인 이야기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 대부분의 부모들이 육아와 자녀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마치 아이돌 그룹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데, 너무 막연한 '디스전' 밖에는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고나 할까요.

다행히도 제가 이런 고민을 시작하게 된 작년과 올해는 상당히 좋은 여건이 받쳐주었습니다. 국내에서는 2008년부터 시작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각종 모임과 강연, 양질의 콘텐츠로 이제는 그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국외로 본다면 프랑스 부모, 유대인 부모, 스웨덴을 넘어 덴마크 교육에 이르기까지, 선진국의 교육열 중에서 배울 점들이 잘 정리된 책으로 번역되어 이제는 출판 포화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2009년부터 줄곧 한국교육을 예찬한 오바마 대통령 덕에 북미에서도 의미 있는 교육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한 뇌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우리가 뇌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습득하는 과정을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3.
이 두 가지가 잘 어우러져 올해 하반기부터 IVF학사회의 새 팟캐스트 <요람에서 취업까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두둥! 낚이셨나요) 이 방송은 부모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감정육아‘, '회복탄성력', '자기주도학습', '기적의 대화법' 등등 육아, 자녀교육서에 등장하는 단어들, 교육법들에 압도되지 말고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수다 떨듯이 가볍게 때론 치열하게 이야기를 나누자는 의도로 기획했습니다. 덮어놓고 삿대질을 하거나 담론에 끌려다니지 말고 이슈와 개념 하나하나를 제대로 바라보고 메타비평도 해보자는 취지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결혼을 하고 어느덧 내 앞에 나타난 아이의 '요람'에서 '취업'까지를 걱정하게 되는 대한민국 부모로서 털어낼 수 없는 '불안'을 함께 나눠볼 생각입니다.

팟캐스트의 출연자들은 의도적으로 비전문적인 평범한 엄마, 아빠를 모셨고요. 그분들 모두가 다양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내시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습니다. 학사님들도 출퇴근길이나 육아, 가사 일을 하는 동안 저희들의 수다 대열에 참여하셔서, 스스로 자신만의 육아, 자녀교육법을 고민하고 찾아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자, 각설하고 많이 기대해 주세요! 제발~ ^^


*IVF <소리>지 2015. 08/09월호 기고글.
2015/08/08 23:11 2015/08/08 23:11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요즘 대세인 혁오의 와리가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던 중.
...
성하: 아빠 이거 기타소리야?
나: 응.
성하: 기타 치면서 노래부르는거야?
나: 그렇지... 왜?
성하: 멋있다... (허공을 쳐다보다가 눈감는다)
...
그렇게 우리 둘은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음악이야기를 나누었다.
2015/08/03 00:05 2015/08/03 00:05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이건 좀 불편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나는 연인과 부부, 가족의 문제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어느 정도는 확신하고 있다. 살면서 그런 경우를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순수한 피해자가 아닌 경우도 있고 반대로 가해자도 마찬가지였다.

일례로(물론 이건 가정이다) 아내와 내가 갈라설 경우 대략 10년간의 관계에서 아내가 서운했던 큰 몇 장면들을 추려서 공론화시킨다면 나는 금새 개쓰레기로 전락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될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대략 명확한 선악구도가 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 명확한 선이 어떤 각도에서는 반전 지점으로 돌변하는 영역 또한 존재한다. 일례로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안 좋은 기억들이 대체로 지배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내게 특별히 악행을 저지른 구석은 없다. 오히려 긴 세월동안 아버지는 나에게 안락한 환경을 조성해 준 좋은 부모다. (좋은 남편이 아니었을 뿐.)

사실 우리가 자신의 사적 영역을 허물면서 받아들이는 일련의 관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잦다. 사적 영역이 허물어지면 서로 간에 자신의 깊은 내면까지 무례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한다. 그게 '스킨십'이 됐건 '과한 농담'이 됐건 '무리한 책임을 지우는 상황'이 됐건 간에 말이다. (물론 폭행, 사기, 강간 등 극단적 범죄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관계에서 자주 권력구도가 발생하고 그럴 경우 '을'이 피해를 입는 일이 생긴다. 게다가 이런 관계가 지속될 경우 피해자가 자신이 피해를 입었음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요구되고 공론화가 필요하고 사회 구성원의 윤리적 판단이 개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쉽게 타자들의 연인, 부부, 가족처럼 깊은 관계에 자신의 경험을 투사하여 단정짓고 누군가에게 객관적인 사실 이상의 혐의를 씌우고 가해자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자신처럼 비판하지 않는다고 주변 사람들마저 한통속으로 몰아가는 반응들은, 적어도 내게는 꽤나 무례하고도 위험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대체로 약자의 편에 서는 용기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공론의 장에 가해자로 추정되는 이가 서 있더라도 갑을 관계 외에 우리가 고려해야 할 당사자 간의 깊은 영역에 존재하는 진위 문제를 따져볼 생각의 여유가 필요하다. 언제나, 역사 속에서 매번 단정적인 사람들이 많은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영이나 권력구도를 초월한 영역이기도 했다.
...최근의 몇몇 사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2015/07/21 21:02 2015/07/21 2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