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대한민국 부모, '욕망해야 괜찮아'
[서평] <대한민국 부모>, 눈에 힘주고 읽었다
/김용주
#1.
책 <대한민국 부모>를 의미심장하게 읽었다. 읽는 내내 눈에 있는 대로 힘을 주고 읽어서 한동안 눈이 시릴 정도였다. 이 책은 서두에 자녀 교육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한국 사회의 왜곡된 가정문제가 모두 얽혀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공저자들이 말한 대로 '문제의 자녀에게는 문제의 부모가 아닌 문제의 부부가 있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중년의 부부들은 위기에 처한다. 소통의 문제가 생기고 자녀교육이라는 프로젝트 안에서 왜곡된 욕망을 투영한다. 아내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경험하다가 출산 후 사회생활을 접고 현실적인 선택, 즉 자녀의 매니저이자 자녀를 애정과 투자의 대상으로 규정짓는다.
남편은 40대에 혼신의 힘을 다해 직장생활을 하지만 언제 낙오될지 몰라 집안일·가사노동은 고사하고 특히 자녀교육에서 배제되다가 아이가 반항을 하게 되는 중·고교 시절 군기반장으로 투입된다. 이때는 자녀와 교감이 없는 채로 엄마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적 폭력을 행사하므로 자녀는 급속도로 아빠와 멀어진다.
이 부부는 각자 자신의 욕망이 배제된 삶을 강요받으며 혹은 자신의 욕망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며 40대를 자녀교육이라는 대국민 사업에 전념하다가 자주 좌초한다. 대부분 아이의 일탈이 원인이 되며 때때로 배우자의 외도로 가정은 허물어진다.
#2.
개인적인 얘기를 잠깐 한다면, 내 아내의 최대 장점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아내는 매순간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항상 돌아보고 그 원하는 바에 우선 순위를 두고 그 다음에야 주변과 조율과정을 거치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함께 살면서 처음에는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함께 7~8년을 함께 살아보니 자기 욕망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이 배우자 입장에서는 더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내도 처음부터 자기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사실 오랜 자기 검열과 성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자주 아내는 오히려 나의 억눌린 분노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이해하는 나의 분노는 결국 욕망의 좌절에 다름 아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부모의 기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애썼다. 뭐랄까, 내가 바르게 성장해야 우리 가정의 행복이 보장된다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나는 내가 어느 정도는 왜곡된 교육의 피해자라고 평가한다.
책 <대한민국 부모>를 읽으면서 나는 나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나의 꽤 많은 활동들이 사실상 외부를 향해 있다. 초자아의 준엄한 명령이 나의 일상을 지배한다. 회사에서는 '팀장님과 후배 사원들과 소통과 협력에 애써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집에서는 '아내가 힘드니 내가 육아를 분담해야 한다' '부모님이 내가 크는 동안 애를 많이 쓰셨으니 내가 항상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걱정과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그런 류의 것들이다.
때로는 내가 쓰는 글이나 대화 시에 드러나는 나의 일정한 논리들에서도 그런 초자아적 억압은 투영된다. 약자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니 그것을 위한 글쓰기에 노력해야 한다거나 여성이 피해자이니 내가 남성이지만 여성을 대변하도록 애쓰자거나 제3세계 사람들을 위해 공정무역 제품을 쓰려는 노력까지.
#3.
투박하게 정리하자면 나의 존재감은 초자아적인 어떤 규범을 충실히 지키고 그것을 칭찬받는 일에 전적으로 기대어 있다. '네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우리가 좋아졌어' '네 덕에 내가 행복해' 등 이런 말들을 은연 중에 바라는 마음이 있는 셈이다. 그것 또한 욕망이라면 욕망이라고 하겠다.
<대한민국 부모>에 나오는 남편들 중에는 죽도록 일하고 가정에서 외면당하는 이들이 있다. 약육강식의 직장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면 아내는 니가 집에서 도대체 하는 게 뭐냐, 모르면 가만히나 있어라 요즘 애들 교육이 쉬운 줄 아냐 라고 망발을 듣는다. 예전에는 공부만 잘하면 칭찬받던 '아들'에서 지금은 살벌하게 애쓰지만 원망에 비난받는 '남편, 아빠'가 된 자신을 본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외부를 향해 분투하는 에너지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인정과 칭찬, 존경과 관련돼 있고 이것들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외부로 향하지 않는 내 욕망은 무엇인가. 틈틈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고 IT제품들을 지르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 본질적인 내 안의 욕망은 무엇일까.
대체로 부모는 '자신의 욕망'이 없기 때문에 가정이 왜곡된다. 40대에도 설레는 어떤 존재적인 욕망없이 칭찬 없는 의무들에 눌려서, 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너무 허접한 대안들을 선택하는 건 아닐까. 자신들의 욕망이 없는 부모들이 자신 수준의 복제품을 만드는 일에 골몰하다가 자신과는 다른 존재인 자녀들을 망치고 스스로도 자멸하는 건 아닐까.
결국 나의 건강한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소하는 게 진정한 의미의 가정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닐까. 저 유명한 김두식 교수의 책 제목을 빌려 말한다면 "욕망해'야' 괜찮아"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3371
불과 몇 년 사이에 전자책 시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책장을 넘길 때의 질감, 펜으로 그은 밑줄이나 끄적인 메모 등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깊게 배인 종이책은, 스마트폰이나 이북(e-book) 단말기로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점점 들고 다니기도 무겁고 좁은 방 양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가는 이사할 때마다 옮기기 힘든, 그렇다고 쉽게 버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는 느낌이다. 10년이 넘은 책들은 어느덧 제본이 벌어지고 색도 바래고 책벌레도 꼬이는 데다가 잦은 이사로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 결국 나조차도 자연스럽게 전자책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실제 구입도 많이 늘었다.
우리나라는 아직 전자책 시장의 규모가 외국 같지는 않아도, 최근 몇 년간 나름 양적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이제는 상당량의 신간들을 전자책 형태로도 읽을 수 있다. 만 2년 정도를 써본 내 입장에서도 전자책은 매력적인 면이 많다. 나는 그날그날 읽고 싶은 이슈가 달라서 보통 가방 속 책이 두세 권은 족히 넘는다. 따라서 조금만 두꺼워도 그 책은 가방에 못들어가고 그 결과 영영 안 읽게 될 확률이 높다. 이에 반해 전자책은 분량에 상관없이 상시 50권이 넘는 책이 단말기에 들어 있으면서도 서류 가방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또한 신간이 나온 사실을 출근 후에 알더라도 온라인으로 주문하거나 서점을 찾을 일없이 바로 다운로드를 받아 그 즉시 읽는 게 가능하다. 읽다가 필요한 부분들은 줄을 긋거나 표시해둔 후 집에 와서 일일이 타이핑하는 일이 잦았는데, 지금은 읽다가 필요한 부분은 SNS나 스마트폰으로 보내고 필요할 때 카피해서 쓰면 그걸로 끝이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소유한 기독교 관련 전자책은 전무하다. 규장, 나침반 등 몇몇 기독 출판사들이 전자책을 출시하고 있긴 하나 대다수는 전자책 시장 자체에 발을 들여놓을 계획이 없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기독출판계로 하여금 전자책 시장에 소극적인 자세를 갖게 만드는 건가. 사실 디지털 콘텐츠들은 순식간에 시장의 판세를 뒤집어 놓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레코드점에서 CD를 구입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음원 파일을 다운받는 일이 잦다. DVD를 컬렉션처럼 모으던 사람들도 이제 대부분 영화는 블루레이급 파일로 다운받는다. 이미 출판 시장도 디지털 시대를 열었다.
출판계의 고민, 핵심은 DRM
전자책 시장이 급성장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전 세계 언어로 된 모든 책을 60초 안에 제공한다”라는 모토 아래 아마존은 2007년 11월에 킨들(Kindle)이라는 전자책 단말기를 내놓으며 전자책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이 단말기가 2008년 50만 대 이상 팔리면서 아마존은 전자책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혔다. 킨들이 성공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전자 잉크(e-ink) 기술을 이용한 뛰어난 가독성, 3G 통신망을 이용한 잡지․도서의 즉각적인 다운로드, 그리고 ‘7인치 200그램’의 뛰어난 휴대성이 그것이다.
킨들의 성공에 이어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넷북과 전자책 단말기를 커버할 만한 태블릿PC ‘아이패드’를 2010년 세상에 내놓았다. 출시 초기에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으나, 잡스의 예견대로 이 ‘10인치의 아이폰’은 전자책 단말기를 넘어서는 혁신적인 기기로 급성장했다. 아마존도 태블릿의 가치를 알아보고 곧 킨들 어플리케이션과 ‘킨들 파이어’라는 태블릿 형태의 단말기를 개발했다. 검색 사이트의 표준으로 불리는 구글도 몇몇 대학과 협력하여 ‘구글 북스’라는 프로젝트를 시작, 구간 도서를 중심으로 700만 종의 종이책을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하는 등 본격적인 전자책 사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아수스(ASUS)사와 함께 ‘넥서스’라는 자체 태블릿PC을 제작하고 작년부터 판매에 들어갔다. 이로써 태블릿 시장은 아마존의 킨들파이어, 애플의 아이패드, 그리고 구글의 넥서스, 이렇게 3사의 경쟁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사실 메이저 출판사들이 아닌 애플, 구글, 아마존이 전자책 시장에 적극적인 것은 기이한 일이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출판시장은 빠르게 디지털로 진화하고 있는데 정작 출판업계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근본적인 원인은 DRM, 즉 디지털 저작권 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에 있다. 아마존은 전자책 사업 시작부터 자체 포맷의 DRM을 사용하고 있지만 아마존을 제외한 대다수의 업계에서는 전자책의 표준인 ePub 포맷을 사용한다. 사실 출판계는 DRM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기술적인 전문지식이 없으므로 자신이 보유한 콘텐츠의 불법 복제 및 무단 배포의 가능성 자체를 두려워한다. 자칫 DRM이 풀린 상태로 수많은 고가의 전자책이 시장에 퍼질 경우 출판업계 자체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날로그 콘텐츠들이 디지털화되는 과정에서 음반회사들은 이미 엄청난 재앙을 경험한 바 있다. 디지털 음원은 곧 MP3 파일로 음성적으로 대규모로 유통되었고 곧 음반사들의 수익 악화로 이어졌다. 음반은 돈을 내지 않고도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콘텐츠로 변질되어 갔다. 이런 불안 속에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음반업계에 불법 복제를 차단하는 음원 유통망으로서의 아이튠즈 사업을 제안했고, 결국 메이저 음반사들은 모두 아이튠즈에 음원을 한곡당 1달러에 ‘헌납’했다. 음반사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아성을 되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과 메이저급 출판업체 사이에서 이미 비슷한 갈등이 불거진 바 있으며 구글은 자사가 스캔한 수천만 권의 책에 대한 저작권 문제로 미국출판사협회와 7년간 긴 소송을 치렀고 다시 작가협회와의 소송이 예상된다.
전자책 시장의 변화, 기독출판의 대응은?
영화와 음악 같은 디지털 콘텐츠들은 점점 배급, 유통과 같은 업체로 그 권력이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책은 어떤가. 아마존은 자기 고유의 포맷과 킨들이라는 기기를 이용하여 이미 전자책 시장의 중심에 섰고 이제는 출판사를 배제한 채, 저자와 직접 전자출판 계약을 체결하려 한다. 여기에 아이패드로 전자책 시장을 넘보는 애플과 넥서스를 개발한 구글까지 출판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형국이다. 전자책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출판시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개별 출판사들이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 콘텐츠들처럼 종이책도 유통업체가 권력을 갖기 시작했고 전자책 시장의 확대에 따라 더욱더 이 흐름은 가속화될 것이다.
<복음과상황> 1월호 “그르니에의 ‘섬’이 되는 기독 출판을 희망함”에서 김진형 전 IVP 간사는 최근 9년간 결산회의 때마다 영업 담당자들이 “올해처럼 경기가 안 좋았던 적이 없었다”며 푸념을 했다던데, 나는 기독출판계가 한국 출판 시장에서 그간 꽤 선전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양적인 측면에 국한된 평가가 아니다. 물론 말랑말랑한 간증서나 자기계발서, 성공지향적인 가치관들을 기독교 신앙인양 포장한 책들이 호황인 트렌드는 여전하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많은 양서를 출간함으로써 평신도에서 목회자까지 책을 통해 스스로 고민하며 신앙을 성장시키는 동력 내지는 자정 능력을 제공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다. 출판시장은 최근 몇 년간 과거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고 향후 몇 년 안에 극도의 위협과 난관에 처할 수도 있다. 기독출판계 또한 동일하리라고 본다. 혹시, 관성적으로 ‘묻어가기’ 내지는 세속 출판사들을 따라 하겠다는 전략이라면, 최소한 공이 날아가는 방향을 알고 떨어지는 곳에 서 있어야 제대로 슛을 날릴 수 있다. 내 생각에 ‘포도주’는 여전히 새 술인데 ‘부대’는 낡아 가고 있다.(끝)
#1.
애플 블루투스 키보드. 산지 14개월만에 고장이 났다. 방바닥에 두었는데 아마도 보일러를 높였더니 과열되어 배터리액이 샌 모양이다. 애플 제품은 디자인이 죽여주는 대신 조립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블루투스 키보드도 알루미늄 바디일체형으로 되어 있어서 배터리교환구가 들러붙으니 꺼낼 방법이 없었다.
A/S점에 전화를 했더니 1년 이내 제품은 구매영수증과 함께 가져오면 새제품 1:1맞교환해주고 1년이 넘었으면 A/S가 불가하단다. A/S가 불가하면 그냥 버려야 하냐고 했더니 새 제품으로 구입해야 한다고.(말 장난하냐!!!) 통화 끝에 담당자가 무슨 문제냐고 물어봐서 배터리 액 누유로 입구가 붙어버렸다고 했더니 배터리 누유 문제는 A/S를 해주지 않는단다. 왜 안 해주냐고 했더니 사용방법이 안 쓸 때는 배터리...를 빼놔야 한단다. 도대체 누가 블루투스 키보드를 평소엔 배터리만 들고 다니다가 사용할 때마다 배터리를 넣고 쓰냐고요...ㅠㅠ
암튼. 겸사겸사 해서 '네이놈' 지식인을 훑어보니 애플 wireless keyboard는 고장이 잦기로 유명한 듯. 결론적으로 무선키보드 A/S는 완전히 포기하고(손들었다 애플님하, 디자인 겁나 깔쌈하게 만들어줘서 눈물나게 고마워요.ㅡ.ㅡ+) 새로 구입하기로 결정. (애플꺼 제외)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가 나는 또 블루투스 키보드 검색사 자격증 취득할 수준의 능력자가 되었다.ㅋㅋㅋ 내가 검색한 제품 중 가장 맘에 드는 건 Rapoo사의 E6100을 추천함. 무려 삼만원 이상 싸다. 그리고 배터리 부분은 별도로 조립되어 있고 바디가 스테인레스라서 좀더 튼튼함. 무엇보다 키감이 장난아님. 허나 얘도 겁나게 얇게 만들어서 잔고장이 있을 수 있다. 좀더 지켜봐야 할 일.
#2.
블루투스 키보드 검색사(자칭) 입장에서 키보드를 살 때 고려할 점은 크기와 중량이다. 그 중에서도 중량이다! 내 아이패드 미니는 310g. 만일 아이패드를 들고다닌다면 600g정도가 된다. 여기에 키보드 중량을 더해서 1kg이 되면... 1kg짜리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것과 같다. (스마트패드 왜 샀니.-_-;;;)
근데 겁나 많은 사람들이 블루투스 키보드는 중량을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로지텍과 MS사의 것들 중 좋은 것들이 있었는데 둘다 중량이 거의 900g에 육박하여 마음을 접었다. (E6100은 155g임. 사이즈는 spec상에는 206mm라고 되어 있었으나 사고보니 288mm었음.ㅠㅠ)
혹시 외출시에 용도에 따라 키보드를 들고다니거나 두고 다닐 생각을 하는 분들. 문서작업을 할 때만 들고 다닐 거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분들. 그냥 노트북 쓰시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은 대체로 주변기기를 매일 들고 다니거나 매일 안 들고 다닌다. 스마트한 건 기기일 뿐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 스마트하기보단 귀찮은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블루투스 키보드는 전문적으로 글쓰는 사람 아니면 별로 필요 없다. 내 경험상 그렇다.
E6100을 구입하고 보니 아이패드에서 자주 쓰는 한영키 전환을 해봤는데... 안 된다.-_-;;; 설명서도 안 들어 있어서 이것저것 막 눌러봤는데 갑자기 어떻게 치다보니 한영 전환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재연이 되지는 않는 상황. 인터넷 사이트를 접속해서 메뉴얼 페이지를 발견했으나 다운을 눌렀더니 오류창이 뜬다.-_-;;;; A/S센터에 전화를 했다.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아이패드에서 한영 전환이 안 되나요?"
"아니요 됩니다. 윈도우키+스페이스바를 치시면 됩니다."
"아.. 그래요? 잠시만요..."
(실행해봤다. 근데 왠걸... 되다가 안 되다가 한다.)
"근데요. 이게 되다가 안되다가 하네요. 3,4번 눌러야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텐데요. 이렇게 따닥.. 따닥.. 누르면 한글, 영어 전환이 되는데요."
"흠... 일단 알겠습니다. 고장은 아닌데 전환이 깔끔하진 않네요."
전화를 끊고 멍하니 사무실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A/S님하의 말이 떠올랐다.
"따닥... 따닥..."
"따닥... 따닥....? !!!!!"
다시 키보드를 켜고 윈도우키를 누른 상태로 스페이스바를 더블탭했다. 따닥...
오... 유레카. 된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따닥... 따닥... 님하의 의성어가 나를 구원하였도다...
지금도 한영 전환키를 누르면서 외쳐본다. 따닥... 따닥...^^
E6100을 구입한 동지들을 위해 이 tip을 반드시 퍼트려주리라....!!!
잊지말라. "원도우키+스페이스바 더블탭" ^^
이 주제에 대한 대체적인 접근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언행불일치, 알고보니 나쁜 놈이었더라,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 류의 절망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살아가고,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종교심에 기대어 그저 사람을 (신뢰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불신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누군가에게 실망감, 배신의 불안감을 품고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원론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이 '입장'도, 나는 현실적으로는 인간 자체에 대한 환멸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본다. 계속 뒷통수를 맞으면서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을 유지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자학적인 행위다.
사물의 '선악미추'의 잣대가 극명하면 입장 정리가 쉽겠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 참 좋아'라고 말하는 평가에는 다양한 함의가 숨어 있고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입장의 차이가 존재한다. 전 인격적인 부분에서가 아니라 시간 궤적의 판단에서도 그렇다. '저 사람 쓰레기야'라고 말할 때는 어떤 시점의 어떤 행위에 의해 판단된 단일 행위, 혹은 특정 상황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갖게된 평가이기도 하다.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나는 한번 잘못한 사람, 혹은 여러번이라도 특정한 영역에서 잘못된 행위를 하는 이들에 대해 신뢰냐 불신뢰냐의 on/off(모 아니면 도)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잣대에 반대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대단히 복잡하고 또 섬세한 존재라서, 어떤 명확한 이성적인 판단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도 절망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그 선택을 후회하고 다시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악행을 할 수 있다. 그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행한 지독한 잘못들을 돌아본다면, 혹은 내가 성공하여 더 많은 권력과 힘이 있었다면 '할 수도 있었을' 잘못을 추측컨데 나는 누군가에겐 흔적도 없이 제거되었으면 좋았을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반대로 나또한 누군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길 소원했던 적이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비출 때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과 연마에 의해 신을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선물처럼 주어지는 신과의 사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이 성취가 아닌 '구원'이고 '은혜'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조차 어떤 악인에 대해 악행을 넘어 그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지구 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느낄 정도로 가혹하게 비난하는 것에 반대한다.
'사람을 신뢰하면 안 된다'는 말에는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부정적인 정서, 느낌이 덧입혀져 있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매사를 '인지'하며 살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는 은근히 누군가가 날 이해해주고 기대하지 않게 날 배려해주고 도와주고 지지해주길 기대한다. 때로 드물게 그런 경험을 하면 배신의 고통 속에 몸부림 치던 기억들이 눈녹듯 상쇄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에 대한 절망감으로 가득찬 삶을 산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할 지도 모른다.
레 미제라블의 감동은 '용서'의 힘이다. 잘못된 선택을 한 그 사람에게 한번 더 '신뢰'하기로 결정해주는 마음이 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경험이다. '넌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야'... 모든 악행에는 이유가 있고 악인은 그 악행이 습관으로, 나아가 전 인격으로 바뀐 히스토리가 있다. 그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개별 인간들은 타인을 신뢰/불신의 on/off 평가 대상으로 치환하고 상대와 연결된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내가 다치지 않도록, 내 마인드콘트롤을 할 방법을 찾는다. 덮어놓고 사랑해주거나, 언젠가 너도 날 배신하겠지 라고. 어쨌건 그 판단 주체는 '너와 나'가 아닌 '오직 나'에 국한된다.
외롭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옆에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적어도 내게 필요한 종교심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서도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의 마음을 잃지 않고 표현해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