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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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페미니즘
장에서도 자주 여성의 적은 여성이 되곤 했다.
왜 그럴까.
마치 비정규직 노동자의 적은 사측이 아닌
정규직 노동자인 것과 같은 논리? 그걸론 부족하다.
그 와중에 눈에 띈 책이 <나쁜 그녀들의 심리학>이었다.

냉큼 사서 오늘 2시간을 투자해서 2/3를 읽었다.
간단히 평을 하자면 이 책에 실린 사례들, 즉 개별 여성들의
고충을 읽는 것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저자의 범주화라던가
어떤 직장 내 여성 동료들을 대하는 지침은 별로였다.
...
이 책을 읽다보니 이건 마치 이이제이 같은 느낌.
정작 빅브라더는 다른 곳에 있는데 을들의 싸움 속에서의
어떤 윤리, 논리, 지침 같은 걸 풀어내는 느낌이랄까.

가장 큰 문제는 일터에 여성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고
가뜩이나 일자리가 빠듯한데
파이 열 조각 중 한조각이 배당된 그룹 내에서 게임을 뛰니
당연히 '나쁜 그년(그녀)'들이 생기는 셈이다.
물론 하루하루가 여성 동료들과의 불화로 지옥같은
직장인들에게는 현실적인 도움이 되겠지만
좀더 넓고 깊게 파고들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2013/07/13 01:21 2013/07/13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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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야심차게 시작한 프로젝트 변.

며칠전 어린이집에서 앨범 신청하라고 공지글을 보냈다. 앨범가격 무려 육마넌. 나는 그래도 하려고 했으나 아내는 상술이 엿보인다 하여 신청하지 않았다. 가끔 어린이집에서 하는 활동이 고맙기도 하지만 아이의 아이다움을 저해한다는 생각도 든다. 일례로 어버이날 아이가 만든 카네이션에는 엄마 아빠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어쩌고 무슨 북한 방송 같은 이야기를.

우리 성하라면 아마도 아빠 똥꼬나 먹어... 내지는 아빠 스티커 다모으면 큰 장난감도 사줘야돼...같은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ㅋㅋㅋ 문제는 아이의 아이다움에 어른들이 윤리적인 덧칠을 해대는 것이다. 당연히 성장기에 대한 추억들도 천편일률적이다. 그저 수많은 아이들 속의 내 아이. 남들에게 처지지 않게 성장하는 내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장보고서를 나는 경제논리에 따라 비용을 주고 구입해야만 한다.

내 어릴 적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어디에 살았고, 그 때 내 친구는 누구였고 나는 어릴 때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 때부터 나라는 존재는 어떤 본유의 모습을 드러냈는지가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자료는 없다. 그저 풍문 속에 전달되는 내 영유아기의 사건들. 그것조차 어른들의 가치관으로 채색된, '넌 어릴 때부터 착했지, 점잖았지, 공부를 잘했어...' 그들의 욕망에 기댄 평가들.

어차피 자료들은 자료를 선별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겠지만 나는 성하가 나중에 자신의 영유아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특징들, 그리고 자라면서 경험한 환경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 그것이 10-20대에는 별 의미없는 자료일 수 있겠지만 30대에는 스스로에게도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고유한 성격과 기질은 30대에 꽃을 피운다고 한다. 10-20대에는 여전히 주변의 눈치(환경에 적응)를 보느라 본유적 성격이 죽는 것이다.

아이에게 나는 무엇을 줄 수 있다. 얼마나 이 아이를 보호해줄 수 있나. 얼마나 이 아이가 편하게 고지를 선점하게 만들 수 있나. 그런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정작 아이에게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만들고 자기 스스로 삶을 개척할 내적인 힘을 길러주는 게 아닐까. 부모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게 해주려면 부모와 사회의 가치관이 덧칠된 기성 성장앨범들이 아닌 부모의 눈으로 자세히 관찰한 내 아이의 특징들을 잘 기록해 주는 게 정작 더 중요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아이의 성장책 첫발을 내딛는다. 한 사람을 위해 이렇게 고심하며 뭔가 구조를 짜본 건 연애 이후 처음이다. 가격대 성능비가 가장 나쁜 케이스일 듯.^^ 뭐 이정도 생색을 내본다.
2013/07/13 00:20 2013/07/13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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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주목받지 않는 삶의 행복"이라.
페친중 한분이 쓴 표현이 유독 맘에 들었다.
솔직히 나는 살짝살짝 주목받는 삶이 좋다.
비중은 적지만 존재감이 있는 삶이 좋다.
하지만 모 아니면 도를 고르라면 나는
"주목받지 않는 삶의 행복"을 선택할 것이다.

얼마전 온라인 매체에서 내 홈페이지를
링크를 걸어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보통은 어떤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 편인데
... 이번에는 정중히 거절했다.
불과 5-6년전만 해도 내 블로그의 URL을
내가 출몰하는 많은 사이트에 걸어댔을 것이다.

불과 몇년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SNS의 비약적인 확장과 더불어
인터넷을 대하는, 혹은 정보의 유통 자체를
바라보는 내 관점이 바뀌었다.
쉽게 말해 너무 많이 대중에게 노출될수록
구설수에 오르내릴 확률, 어떤 사건에 휘말릴 때
내가 진정성을 가지고 해명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내가 가장 주목했던 건 타블로 사건이었다.
가장 최근에는 작년 대선 때 보수진영의
조직적인 SNS 활동을 보며 그 생각을 굳혔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사적 영역의 노출이 빈번한 SNS에 뛰어든
많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도 감당할 수 없는 주목을 받다가
어떤 계기로 문제가 될 때 그 문제를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 수 없게 될 것이다.

아홉번을 행가레를 당하다가 한번의 패대기로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면 디지털 세대에 한번 "쓰여진 글"은,
아울러 한번 "이슈가 된 사건"은
마치 주홍글씨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주목받지 않는 삶의 행복", 나아가
"주목받지 않을 인간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머지않아...
2013/07/04 23:11 2013/07/04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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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결혼, 출산, 육아. 이전에는 몰랐던 여성문제에 눈을 뜨게 된 남편의 반성과 성찰을 담았습니다. 육아를 통해 얻는 소소한 즐거움과 더불어 조금씩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언니', 내지는 '엄마'의 정체성을 발견해 가는 과정 중에 쓰는 사적이지만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글들을 모았습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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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퇴근 없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처음 겪는 막중한 의무감과 쉼없는 일상으로 인해 여성은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경험한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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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난 직후 부부의 일상은 바뀐다. 아이 중심으로 일상이 재편되는 셈이다. 일단, 여성은 아이를 낳으면 회사를 휴직하고 집에서 육아에 집중한다. 짧게는 2시간, 길어봤자 3~4시간 간격으로 모유 수유를 해야하므로 밤이 돼도 편히 자기는커녕 집앞 가까운 곳으로 외출을 하는 것도 용이하지 않다. 아이가 돌이 될 즈음엔 상황이 어느 정도 나아지지만 이유식, 기저귀 등 하루 종일 아이의 입고 먹고 자는 행위에 계속 개입해야 한다.

그야말로 퇴근 없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처음 겪는 막중한 의무감과 쉼없는 일상으로 인해 여성은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경험한다. 출산 후에 호르몬 때문에 생기는 여성의 감정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육아 과정 내내 우울함이 이어지는 경우에는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원래 하던 집안일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장기간 휴직이 보장되지 않아 직장으로 복귀를 해야 하면, 싱글 혹은 신혼부부일 때보다 1.5배 이상의 물리적인 힘이 더 필요하다. 남편이 중간중간 도와주지만 꼭 본인(애엄마)이 챙겨야 하는 특정한 것들이 있으므로 남편은 육아에 관한 한 영원한 '조수'일 뿐이다. 게다가 둘째나 셋째가 생기면 이 무한 프로젝트는 이후로도 몇 년 간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해서 돌아가게 되고 일상의 피로도는 가중된다.

엄마가 된 여성을 옥죄는 일상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여성은 아이가 생긴 후부터 매순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 가운데 놓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친구나 동호회 모임, 혹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도 내 마음이 침체되는 날이면 그냥 잠수를 타면 그만이었다. 하다못해 회사도 하루이틀은 아프다고 '뻥을 치고' 월차를 낼 수도 있었다. 내 지옥같은 내면을 숨기기 위해 세상과 잠시 격리된 시간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사실 그땐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 후에도 남편과 심하게 다투면 다른 방에 들어가서 각자 생활을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마음이 지옥같고 내 속이 타들어가도 모유나 이유식은 반드시 먹여야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 답답한 마음에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보지만, 조금만 머리를 굴려봐도 할 일이 산더미다. 내일 입을 아이 내복도 빨아야하고 어린이집 아이 친구가 생일이라 선물도 준비해야한다.

일상이 엄마된 여성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싱글 때의 철없던 내가 이제 책임감도 커지고 세상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하루하루가 매번 정서적으로 기쁠 수만은 없다. 반복되는 허드렛일이 더 마음 속 어둠을 불러온다.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도 일순간 허물어질 것 같은 날들이 있고 그런 날들을 한 번 두 번, 여러 번 참다보면, 어느덧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우울이 마음 속에 똬리를 튼다.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

이게 내가 주변에서 경험하는 여성 육아 우울증의 전형적인 형태다.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 여성들은 누구나 육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털어내야 한다는 인식마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가 아는 몇몇 착한 아내들은 부부싸움을 해도 아침은 꼬박 꼬박 차려주고 출근을 시키는 반면 남편은 기분이 상해서 더욱 육아에 신경을 쓰지 않는 '기현상'을 보였다. 육아 조수인 남편은 기분 나빠서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다.

육아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이된다. 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 빨리 따라오지 않고 장난감 코너를 두리번 거리는 아이의 등짝을 때리며 끌고 가는 엄마를 보고 사람들은 쉽게 손가락질 해댄다. 하지만 그 엄마의 내면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고립된 섬'이 된 지 오래라면 어떨까.

어떤 육아책의 제목은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던데 제목 자체가 불만족스럽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사회가, 이 세상이, 그 가정이 엄마를 아프게 했고, '그래서'(그 결과로)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엄마도 안다. 자신이 별 시답잖은 이유를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분노를 쏟아낸다는 사실을. 죄책감이 얹혀진 채로 엄마의 아름답던 영혼은 침잠하고 썩어간다.

따라서 엄마가 살려면, 가장 먼저 '엄마만 할 수 있는 집안 일'이 없어져야 한다. 엄마가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가정 내 일상이 사라져야 한다. 엄마의 마음이 지옥 같을 때 훌쩍 어딘가로 사라질 수 있어야, 그 시간이 보장되어야 다시 천사의 미소로 아이에게 돌아올 수 있다. 육아 프로젝트에 있어, 엄마의 '무한책임'에서 풀려나야 한다. 그럴려면 남편이 '조수'로만 기능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단 하루 이틀이라도 아빠가 육아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장사한 지 사흘된 예수' 같았던 아내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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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 여성들은 누구나 육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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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내가 개인적인 일로 세미나를 준비할 일이 있었는데, 세미나가 끝난 후에 그간의 피로가 몰려왔던지 주말 내내 '장사한 지 사흘된 예수'처럼 누워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준비 과정 중에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결국 아이와 나는 일요일 저녁까지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아이가 가끔 누워 있는 아내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내는 정말 죽은 사람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2~3일간 아이는 가끔 내복 상의와 하의를 짝이 맞지 않게 입었고 끼니 중 한두 끼를 피자와 치킨으로 때웠으며 피곤한 아빠의 무관심에 한두 번 울음을 터뜨려야 했다. 그래도 우리 집은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일요일 저녁. 아내가 부활했다. 아내가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하자 집안이 금세 빛이 나고 아이는 웃으며 엄마를 안아 준다. 엄마는 아빠를 보며 말한다.

"수고 많았음묘. 담주에 이틀 놀다오삼."
(휴가 이틀 받았다!)

평소에는 아이를 씻기고 재우는 건 내 일이지만 피곤함을 털어낸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서 씻기고 눕혀 놓고 쓰다듬으며 재운다. 난 멍하게 풀린 눈으로 둘이 잠들기까지 지켜봤다. 그리곤 컴퓨터를 켠 뒤 미드(미국 드라마)를 한 편 때렸다(봤다). 주말 동안의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것을 깨닫는 데에는 나도 사실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나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하면서도 스스로 착한 남편이라고 굳게 믿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아내와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육아를 분담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아내'가 '엄마'가 어떤 포지션인가에 대해 실감했다.

아내와의 결혼, 출산과 육아의 경험은 나를 '유사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 간혹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나는 '제이언니'로 불린다. 아내 문제, 엄마 문제, 쉽게 말해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얻게 된 별명이다. 아빠의 위치에 있지만 '언니'의 시선으로 풀고 싶은 이슈들, 일상들이 종종 뇌리를 파고든다. 앞으로도 종종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3/07/04 22:52 2013/07/0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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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어제 성하가 새엄마 아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엥?....
이유인 즉슨,
할머니, 할아버지도 나이를 먹으면 딴 곳으로 가고
엄마, 아빠도 나이를 먹으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갈테니
자기 혼자 남으면 무섭다는 것.
엄마, 아빠가 딴 곳으로 가기 전에
다른 엄마, 아빠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그런 얘기.
...
... ...
나는, 아빠는 오래 있어야 할아버지가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성하가 잠시 생각하다가,
"내가 여섯살 되면 아빠 할아버지 되잖아..."
....
야!!!!!!!!!!!!!
내년에 나 할아버지 안 된다고!!!!! 이 녀석이!!!!
ㅠㅠㅠㅠㅠㅠ
2013/07/04 00:19 2013/07/04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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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서평
"네가 내성적인 줄 몰랐어... 그저 고약한 인간인 줄"
[서평]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를 읽고

 


돌이켜보면 주변엔 항상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흥을 깨는 사람들,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고는 전화조차 받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맥주나 한잔 더 하자고 할 때 꼭 자기는 집에 가겠다고 해서 맹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약속시간이 지났든데 연락이 두절되어 당황했는데 간신히 연락이 되자 그 시간에 특별한 일 없이 집에 있었다는, 그런 속을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 주변에 종종 있지 않던가.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문제아 내지는 사회부적응자라고 칭한다.

"우리는 네가 내성적인 줄 몰랐어. 그저 고약한 인간인 줄 알았지"

어디서 자주 듣던 얘기가 책에 나온다. 어느 내성적인 성향의 사람이 저녁식사 자리에서 식구들에게 내향성을 설명하려 하자 그녀의 친오빠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향성이라. 무심코 집어든 책을 읽다가 갑자기 과거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혹시 내가 답답해하고 자주 비난했던, 무책임하고 게으르고 악의적으로 약속을 깨던 그 사람들이? 혹시나 하던 마음이 역시나 그러했다. 이렇게 나는 이 책,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에 몰입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소피아 뎀블링은 <사이콜로지투데이>에서 쓴 내향성의 사람들에 관한 에세이로 최고 조회수를 기록한 심리학자다. 그는 결국 내향성에 관한 책까지 쓰게 되었고 국내에도 번역서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칼 융의 가장 큰 업적은 외향성과 내향성을 구분함과 동시에 내향성을 가치중립적인 성격으로 정의했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어떤 사회든 매사에 밝고 적극적이고 조직에 적응력이 뛰어난 기질을 긍정하고 그 반대의 기질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개개인을 윤리적으로 옥죄지 않았던가.

최고의 에세이스트답게 저자는 내향성의 문제를 일상적인 묘사와 평이한 문장을 통해 과한 끄덕임을 유발한다. 나는 스스로가 내향성이 아니면서도 책을 읽으면서 과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가장 가까운 예는 전화 혐오증이다. 내향성의 사람들은 전화가 울리는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문제는 전화에 대한 회피는 쉽게 도덕적 결함으로 취급되더라는 사실이다. 친구와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들과 통화하는 것도 좋아하리라고 믿고 나아가 직장에서는 언제든 휴대폰이 울려도 받아야 할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향성의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 없이 불쑥 불쑥 사람들이 자신과 대면하길 원하는 이 몹쓸 기계에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전화기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성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에너지 관리'인데 그것이 잘 관리되지 않으면 사람들과의 만남이 전혀 즐겁지도 않고 잘못하면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말실수나 극단적인 표현으로 상대를 위협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성적인 사람들을 외향적인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비극의 시작이다. 설상가상으로 내향성의 사람들은 마치 듣는 것을 좋아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수다쟁이들의 만만한 대상'이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들은 불필요한 대화 자체를 꺼려하는데 이런 수다쟁이들에게 걸리면 십중팔구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언제나 비난의 대상은 싹싹하지 않고 대화의 의지조차 없어보이는 까칠한 내향성의 사람들이 된다.

저자는 내향성의 사람들이 잘못되었거나 무례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창의적이고 침착하고 계획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문제는 외향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줄 수 없기 때문에 내성적인 사람들이 평가절하, 나아가 비난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내성적인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들에 대해 설명하고 그에 대한 간단하지만 강력한 팁들을 제시한다. 그 실수라는 것은 크게는 이런 것들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다, 곧바로 진지한 대화로 뛰어든다, 정신없이 이야기한다, 내향성과 두려움을 혼동한다, 지나치게 적은 사람에게 의지한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소제목에 딱 맞는 내향성의 사람들이 꽤 많이 떠올랐다는 사실에 또한번 놀랐다.)

슬프게도 내향성의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비난을 받는 경우가 너무 많다. 가족들이 내향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탓에 당사자보다 더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게다가 가족이 퍼붓는 비난은 여간해선 무시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런 비난은 곧장 자기비하의 늪으로 향하게 만든다. 남편, 아내 또한 그렇다. 내향성의 사람들은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만 상대가 원할 때조차 절실하게 부부동반 모임에 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으며 배우자와 떨어져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물론 외향성의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을 밀어내는 일이라고, 사랑없는 행동으로 치부하여 배우자에게 실망하고 그를 비난하고 급기야 이혼에 이르기도 한다.

책을 덮으면서 정말 많은 수의 사람들의 얼굴들과 행동들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행동을 성격으로 이해했다면 아마 나는 더 풍성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때로 그들을 무례하게 생각하기도 했고 심지어 병리적으로 치부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사실 나에게도 내향성의 성격이 약간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나는 즉흥적이지 않고 판단을 잠시 유보한다. 가벼운 질문의 문자를 받고 다음날 회신을 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주변에서는 나에게 한소리씩 해댔다.

그래, 이런 게 한 사람의 전반적인 성격이자 기질이라면? 상상만으로도 정말 많은 반성을 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학을 하는 나에게 내향성의 사람들은 포스트프로세싱에 강한 존재처럼 다가왔다. 즉각적인 반응이나 솔루션을 줄 수는 없지만 자신이 준비가 되기만 하면 어떤 외향적인 사람들보다 더 치밀하고 적극적일 수 있는 사람들이란 사실. 당신이 외향적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으라, 그리고 주변을 보라, 그러면 단지 성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78734

2013/06/25 00:52 2013/06/25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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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기타 이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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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게다가 정작 크고 중요한 일은 회사에서 더 많았습니다만. 오늘 제 고민은 이 글을 쓸까 말까에 관한 것으로 압축됩니다. 처음엔 이슈를 잘 모른 상태에서 소소한 반응을 보였을 뿐인데 정작 제 페친이 두 갈래로 나뉘어 '좋아요' 진영을 구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뭐랄까요 중재 욕구랄까요. 혹은 고질병이 도졌다고나 할까요. 어느덧 아이 목욕을 씻기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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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이렇습니다. 지강유철님이 본인의 담벼락에 <1993>이란 제목의 짧은 단문을 올렸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최근 강사 섭외를 위해 알아보던 중 연애 문제에 관한 강의로 주가가 폭등하는 유명 강사인 김지윤님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되...었는데 그 분의 달변과 과도한 스케줄 관리를 위해 비서를 둔 것이 맘에 걸리셨던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강의를 보시면서도 위기감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으나, "기독교 지성과 기독교 인권, 한국교회 성차별 현실"에 있어서 책임을 느껴야 할 주변 지식인이 침묵하는 형태에 대해서도 의아함을 느끼셨다는 표현에서 상기 부분에서 비판점을 발견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강유철님은 자신이 1993년에 지켜본 '한 분'과 김지윤님이 오버랩되는 경험을 하였다고 토로합니다. 그 분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셨으니 누구인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재 상한가의 김지윤 간사님의 수직 상승에 대한 팬덤현상, 무비판적 지지와 관련하여 그 분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우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말은 1993년의 그 분의 결말이 좋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김지윤님도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소리를 했다는 의도이겠지요.

이에 대해 김지윤 간사님도 본인의 담벼락에 그 글에 대한 심경을 밝혔습니다. 컨텐츠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시겠다는 말을 하셨지만 "차 한잔 마시고 진심어린 대화 한번 나누지 않았으면서 나에 대한 인격적인 공격을 하는것은 비판이 가진 한계 비난과의 경계를 생각하게한다"고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고 그 글을 읽고 먹던 식사조차 마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2.
참고로 이 건을 풀어내기 전에, 저의 스탠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만 합니다. 저는 IVF 출신이고 한때 복음과상황(이하 복상) 필진이자 편집위원이었습니다. IVF출신인 김지윤님과도 인맥이 겹치고 복상의 간판 필진이었던 지강유철님과도 그러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지강유철님과 관련된 몇 차례의 논쟁에 뛰어든 바 있고 상당히 많은 부분 지강유철님의 입장을 옹호한 바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IVP에서 출간한 존 스토트의 책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입장에 선 바 있습니다. 저는 지강유철님에 비해 나이로는 한참 아래이고 필진으로 복상에서 글을 쓸 때도 그의 글쓰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배운 것이 많습니다.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은 저의 인맥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강유철님과 저의 친밀함에 대한 사전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논란의 핵심 외적으로도 분명 호불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없이 텍스트 비평이 이루어진다는 게 어불성설이라는 의미입니다.)

3.
각설하고, 저는 김지윤님의 강의와 동영상을 어느 정도 보았습니다. 찾아다니면서 보지는 않았고 페친들이 공유하는 것들을 함께 보며 공감도 하고 웃기도 많이 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걱정스러운 지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스스로를 (유사)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곤 하는데 김지윤님의 강의는 남녀 성역할을 어떤 고정된 구조로 상정하고 현실적인 접근들에 집중을 하는 느낌이 자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에 크게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로 페미니스트들의 담론은 정작 일반 여성조차 어렵다고 배척을 당하기 일쑤인데 김지윤님의 강의는 여성들, 그리고 여성들과 연애를 잘 해내고픈 남성들에게까지도 긍정적인 '행동교정' 효과를 갖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비슷한 얘기인데 한번은 제가 성역할에 걸맞는 연애학 강의를 배척하는 입장의 책에 완전 꽂힌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이 제 입장과 잘 맞는다 여겨서 주변에도 많이 추천했었지요. 헌데 페친 한분이 그 책을 읽고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 비판의 요지는 간단히 말해, 정작 본인은 연애를 시작하지조차 못하고 있는데 성역할 자체를 비판하면 남성이 호감갖는 여성이 되기 어렵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김지윤님의 연애상담을 더이상 나쁘지 않게 보았습니다. 이는 마치 작년 한해동안 '나꼼수'를 긍정했던 제 입장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비판의 지점은 명확하지만 정작 '식자'라고 떠드는 연애학 교수들이 해결하지 못한 현실적 문제들을 건드리고, 유쾌하게 풀어내는 스타일이 좋았던 겁니다. 이는 제가 나꼼수와 더불어 김지윤님에게도 흔쾌히 팬덤현상을 즐기는 일원이 되어줄 수 있겠다는 의미이지요.

4.
저는 이번 사건에서 김지윤님을 옹호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김지윤님이 언급한 분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알고보니 지강유철님이 그 당사자라는 사실에 좀 당황했습니다. 네, 잘못된 만남인거죠.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뭐, 이런 얘길 할 사람이 저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오지랖 작렬이지요. (아내도 지랄말고 가만히 있으라더군요. 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네요.)

먼저는 페북에서 제3자에 대한 비판의 부적절성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로 논란의 '실체'가 있는 경우 페북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주로 매체를 이용합니다. 특히 페북에서 활동하는 사람에게 쓰리쿠션으로 비판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몇 분 정도가 마음에 걸리네요.) 쓰리쿠션으로 맞을 때가 더 억울하고 분하더라는 기억 때문입니다. 아마도 지강유철님은 김지윤님이 더이상 페이스북의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공인'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한 공인에 대해, 혹은 그 문화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단문을 썼다고 생각하시리라고 봅니다. 허나 저는 최소한 페북에선 직설화법이었어야 했다고 믿습니다.

다음으로 저는 누군가를 비판할 때 치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특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목에서는 친절한 설명과 논리전개가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상대가 다수가 공감하는 악인이 아닌 경우 생략과 비유, 단순화된 비판은 자칫 잘못하면 인신공격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강유철님의 비판에 정작 비판 내용이 없다, 혹은 과감하게 생략했다고 보며 그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문제제기한 내용은 '비서를 뒀다' 정도 입니다. 저도 주변에서 김지윤님이 비서를 뒀다는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전해들은 바 있습니다. 또한 더 나이가 많고 더 큰 교회를 운영하시는 이재철 목사님은 비서가 없기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김동호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CEO형 목회자들이 비서를 뒀다는 사실도 압니다. 개인적으로 김동호 목사님이 비서를 뒀다는 사실에 대해 저는 한번도 문제를 삼은 적이 없으므로, 이 건에 대해서도 문제삼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더 나아가서 저는 "기독교 배경의 그것도 간사 출신의 여성이 성공하니 비서를 두더라"라고 말하는 주변 분들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 있습니다. 그리고 '비서'가 매니저인지 파트너인지 그 업무영역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CEO들의 그것과 굳이 매치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그 외에 유추할 수 있는 비판의 지점은 "기독교 지성과 기독교 인권, 한국교회 성차별 현실"이라는 표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대로 기독교 지성과 김지윤님, 기독교 인권과 김지윤님, 성차별 현실과 김지윤님에 대한 텍스트비판이 이루어져야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게 이런 비판의 글이 툭 던져진다면 저또한 이 비판에 대해서 어떤 반성을 하기가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런 이유에서 지강유철님의 비판은 의도와는 다르게 "잘 나가더라도 좀 겸손하게 행동하시지"라는 뉘앙스만을 풍길 우려가 있습니다. 연배로 봐도 그렇고 교계의 위치에서도 그러합니다.

5.
물론, 제가 알기로 적어도 지강유철님은 본인의 연배나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할 소리는 하고 안 할 소리는 안 하는 분입니다. 고로 위와같은 제 표현에서 불쾌함을 느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오히려 지강유철님은 본인의 한참 후배인 젊은 청년들에 대한 비판도 열심(?)이시라 득이 될리 없는 논쟁을 하고는 괜히 인심을 잃곤 합니다. 고질병이지요. 본인은 스스로가 별존재감이 없다고 믿는 편인데 주변에서 보면 인지도 있는 교계의 인사인 만큼, 본인의 의도와 정반대로 꼰대의 인상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걸 보고 있는 저는 참 당혹스럽습니다.

그런 이유로, 솔직히 저는 김지윤님이 지강유철님의 글을 컨텐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을 때 좀 의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격적인 공격이라고 느꼈고 심정적으로 힘들었음을 토로했을 때 그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왜냐하면 제 입장에서 지강유철님의 글은 컨텐츠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컨텐츠가 없는 비판은 사양하니 강의를 듣고 문제 지점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라고 따졌거나, 아예 '비서'를 둔 게 문제로 보였냐고 되물어야 했지 않나 싶습니다.

반면 1993년의 그 분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김지윤님의 지적처럼 '인격적인 공격'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애매합니다. 비교할 인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분의 수직상승과 추락'을 인격적인 모독으로 보기에는 또다른 생략이 넘쳐납니다. 물론 그렇기에 지강유철님이 퉁친 '1993의 그분'이라는 표현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비판의 날이 들어와도 반격하기가 쉽지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내가 수직상승인 게 문제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제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상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제 페친들의 편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페북 안에서 복상 내부문제, 나꼼수, 알라딘, 안철수 등등의 이슈로 편가르기의 느낌을 종종 받아왔습니다. 예전엔 잘 견뎠는데 나이가 들수록 친한 분들과 이슈로 갈리는 분위기 자체를 감내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버티지 못하면 이것 또한 접는 게 옳겠지요.

오늘 김지윤님의 담벼락에는 지강유철님에 대해 "시샘한다", "자기 처신이나 잘하라", "간사님을 대상으로 정치를 하려 한다", "인생이 꼬여서 그렇다" 등의 댓글들이 올라왔습니다. 모두가 김지윤님을 아끼는 분들의 격려겠지요. 허나, 누군가를 격려할 때 반대편 누군가의 인격을 따져보지 않고 해대는 표현들에 대한 불편함 또한 저를 괴롭힙니다. 지강유철님의 이번 글이 제겐 비판의 대상이지만 그분 자체가 제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이런 어정쩡한 글을 쓰고 한동안 모니터를 멍하게 보다가 잠을 청하겠지요. 매일 굿모닝이 가능한 어떤 분이 오늘은 많이 부럽네요. 두분께 또다른 결례가 되었다면 미리 사과드립니다. 샬롬.
2013/06/20 23:10 2013/06/20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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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형마트를 안 다닌지가 수개월이 지났다. 필요한 음식만 농협에서 구입하고 필요한 것들은 소소하게 주문하는 식으로 지내는데... 별 불편함을 모르겠다. 무엇보다 자주 지적되는 불필요한 큰 사이즈의 물건들을 구입하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이번주에 읽어야 하는 책과 읽을 책이 이미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부터 온라인 서점에다가 할인율이 높은 조합으로 책들을 세팅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책읽기가 중요하긴 하나 과잉독서가 내 삶을 바꾸고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과도한 독서는 내 삶 자체를 구속한다.

더군다나 독서량과 도서구입량의 비례가 깨진지는 벌써 몇년째이니만큼 사놓고 언젠가 읽겠거니 하며 산 책들을 이제는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해서 오늘부로 스스로에게 다짐해보았다. "읽을 만큼만 책사기" 대형마트를 끊은 건 왠지 그래야할 것 같은 영역이어서였지만 도서구입은 왠지 어색하기만 하다.

솔직히 좋은 책을 사지 않는 것보다는 의무감으로라도 사서 어서 읽어버리는 것이 미덕 같기도 했다. 결국 그런 압박은 내 삶을 조금씩 조금씩 상아탑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미시적 반성. 오늘 드디어 결단한 "읽을 만큼만 책사기"는 오전내내 곱씹어보건대 내 일상에 긍정적인 신호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남는 돈으로 치맥을 더 먹지만 않는다면...-_-;;;
2013/06/20 23:03 2013/06/20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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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푸코의 '감금사회'의 표현처럼 시민들은 알아서 자체검열을 하고 공권력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었다.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부정해도 그것을 인지하고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더라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양과 같이 흩어졌고 양과 같이 유순해졌다. 스포츠를 즐기고 주말 쇼프로와 일일 드라마, 놀이동산에서 잠시 현실의 시름을 잊고 다시 거대 기계의 한 부속품으로 사회의 미시적 공간에 기어들어가 적절히 '기능'하다가 조금 맛나다고 소문난 집에서 연료를 보충하고 조금 일찍 기능을 멈추고 쉬는 행위에 일희일비하며 돌아와서 또다른 부속품이 될 자녀들에게 나같은 부속품이라도 되려면 경쟁에서 뒤지면 안된다고 전심으로 훈육한다.

거대기계는 그렇게 쉼없이 굴러가고 우리 삶의 목표는 이 거대기계가 멈추지 않게 만드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다. 스스로가 인지하건 인지하지 않건 간에... 놀랄만한 이슈들 앞에서 무력감을 넘어 피로감마저 느껴지는 현실이 새삼 섬뜩하게 다가온다.

#2.
흥미로운 지점은 이런 것이라고 본다. 한국사회에서 많은 정치사회적 이슈들을 대할 때 역사적으로 전쟁 중이 아닌 시기에는, 조용히 튀지 않고 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나름 살만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소수를 대변하려고 들 때, '조용히 살면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다수를 계몽(enlightenment)하거나 참여(engagement)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벌어지면 관성에 길들여진 다수의 대중은 도리어 이러한 과격한 변화의 방향에 반대세력이 된다.

결국 대중은 침묵한다기보다는 체제유지세력이자 개혁에 반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공권력의 통제가 점점 개인의 시민윤리로 둔갑하고 무의식 중에 체화되는 현대의 규율체제 속에서는 더욱더 그렇게 될 것이다.

진리논쟁이 한창이던 모던사회에서는 진보는 옳고그름의 틀에서 항시 지적 승리를 거둬왔겠지만 포스트모던 담론에서 명약관화한 상황에서조차 옳고그름을 논할 때 논점을 이탈하는 수많은 노이즈들을 해결해야하는 부담이 더해졌다. 그 노이즈들을 털어내면 이미 이슈는 이슈가 아니게 된다.

진보담론에서 과거의 자잘한 승리경험에 기반한 프레임으로 사회문제를 접근하고 전략을 짤 때 나는 더욱더 대중과 멀어지고 고립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MB산성처럼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대중을 대하는 극단의 사건들이 생기지 않는 한 대중은 진보의 편이 될 확률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페북에서 북적이는 논란과 달리 거리, 사무실 풍경의 극단적 대비를 체감하며... '우리'로 상정되는 어떤 규모의 사람들이 늪에 빠졌음을 직감한다.
2013/06/18 23:10 2013/06/18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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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몇몇 페친들의 글들은 주요 업데이트만 받아보도록 설정해두었다. 내 성격상 친구를 끊는다는 게 참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이라 친구아닌 상태가 되기 보다는 페친분들의 잦은 포스팅에 잠시 눈을 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2.
이런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이런거다. 어릴 때 사촌형이 웅변학원엘 다녔다. 정신없이 히히덕거리면서 웃다가도 친척 어른들이 "OO야 웅변 한번 해봐"라고 말하면 그 형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여 이미 외워둔 2분 정도 분량의 글을 힘주어 말했다. 그의 힘있는 목소리는 항상 똑같이 끝났다.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어른들은 다들 대견한 듯 박수를 보냈다.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라고 들릴 만큼 확신에 찬 강한 어조의 글인데 나 스스로가 도저히 공감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 나는 그 글들을 보면서 한동안 괴로웠다. 처음엔 댓글을 달아보기도 했지만 워낙 그 주제에 대해 힘차게 외치는 분위기라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페북이라는 플랫폼은 like-centric이지 토론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갠적으로도 스트레스를 풀려고 들어와서 도리어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더.라...

 

3.
사실 오늘 내가 하고픈 이야기의 핵심은 두번째 이유인데, 무엇보다 타인의 사사로운 행위들을 너무 상습적으로 '까는' 글들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자 불편해졌다. 물론. 매체에서도 개똥녀니 OO녀, OO남 등 기괴한 행동을 하는 이들의 사진을 찍어서 공유하고 종국에는 신상을 털기까지 하는 분위기를 내 주변에서도 느끼는 스릴감이 있긴 한데...

 

솔직히 나도 뒷담화 많이 깐다. 하지만 페북에서 소소하게 마주하는 불특정 다수의 기이한 행위에 대해서는, 글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입장 바꿔 보자면 이는 내 헛짓거리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 혹은 배려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매순간을 긴장하며 실수 없이 살 수는 없으므로. 누군가에게는 상처주는 말도 하고 길거리에서 타인과 큰 소리로 떠들기도 했을 것이고 타팀의 누군가는 내 전화 한통, 회의 때 말투 하나에도 불편함을 느꼈을 수 있다.

 

누군가는 그 날(진상짓을 한 날)이 우울증에 허덕여서 걷기조차 힘들었던 날이었을 수 있다. 나를 세게 밀치고 지나간 아저씨는 부모가 급하게 수술실로 들어갔다고 전화를 받고 달려가던 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극단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때로 우리는 나 답지 않게 짜증에 뚜껑이 열리거나 심하게 피곤하여 어떤 부탁도 거절하는 날이 있다.

 

4.
한국은 서비스업종의 천국이다. 아니 인구밀도에 있어서 천국이지만 그 때문에 그 업종 종사자에겐 사실상 지옥이다. 요즘 진보언론에서 자주 회자되는 정신노동자, 백화점이나 식당, 텔레마케팅 업무를 보는 많은 이들. 그들이 한달에 대면해야 할 사람들의 수는 몇 명일까.

 

 '나'는 내 딴에는 참 소중하게 다뤄주면 좋을 존재이지만 그런 수많은 '고갱님'을 상대하는 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명인 이들의 진상 행동을 우리는 굳이 지적질하고 SNS에서 사례집처럼 전파해야만 할까. 고객을 호구로 보는 많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개별 사례들을 모아보면 그들의 노동강도와 급여, 사회적 지위를 돌아볼 수 있다.

 

택배, 음식 배달, 전화응대, 인터넷 장애 수리 등등 하루에 할당량과 건수로 쪼임을 당하는 이들의 일상에서 그 숫자를 '개별 인격'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지 못한다. '그래,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착하게 살아야지, 기본은 지켜야지,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내 상식에 맞춰서 그를 판단한다.

 

5.
서로가 서로에게 기본은 하라고 요구하지만 그 기본이 서로가 정해놓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건드릴 경우 우리는 SNS에서 상대를 까고, 인터넷을 신고를 하고 신상을 털고, 당사자를 '괴물'로 만든다. 때로 나도 누군가에 의해 괴물이 되고 당신도 누군가에 의해 '개새끼'가 된다.

 

살면서 내가 깨달은 건, 내가 정한 정말 관대한 최소한의 룰을 깨는 다수의 사람들에 대해 매사에 지적질을 하고 그것을 이슈로 삼는 것이 참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한 대로 나도 일년에 수십번 넘게 내가 정한 기준대로 못 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의 - 최소 한 몇 년 간의 발자취가 - 어떤 '악한 방향'으로 계속 달려가는 이들에 대해 우리가 더 자주 이야기하고 문제삼아야 하는 게 아닐지. 쉽게 말해 '검증된 놈'을 까야지 길거리나 가게에서 만난 잘 모르는 사회적 약자들의 사소한 진상짓에다가 감정 해소를 해대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

 

 #
오늘도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언니들은 마음에 준비도 되지 않은 나에게 엄청난 속도와 논리로 보험상품을 설명한다. 어쨌든 그게 그들의 생업이다. 그 사람들의 무례함을 이끄는 힘, 그 냉혹한 사회 구조가 있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오늘도 나는 웃으며 전화를 끊고자 용쓴다... 페친들은 이런 나를 도와주시라.^^

2013/06/10 23:08 2013/06/10 2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