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자주 나는 예전엔 말을 잘 했는데 요즘은 말을 잘 못한다는 얘길했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말을 잘 한 적이 별로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말은 많고 잘 하는데ㅋㅋㅋ 강의에 대한 부담감이 큰 편이다. 차라리 글을 쓰는 건 괜찮은데 강의는 극도로 긴장하고 일주일 전부터 아내를 괴롭히고 주변에 설레발을 치고... 답잖게 과하게 징징댄다. (요즘은 이 상황 자체를 좀 즐기는 것 같기도..)
사실 나는 이런 류의 강의 공포증의 원인을 내 성격 때문으로 생각했다. 소심하기도 하고 다수가 모여있는 자리에서 무언가를 말해야 할 때 다소 긴장이 심한. 그런데 이 불안함, 어색함을 개선해야겠다고 내 심리상태를 곰곰이 따져본 결과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글을 쓸 때는 상당히 감정적으로 편한 상태다. 오히려 쉼을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글을 쓴다는 건 내 생각들의 구석구석을 다 끄집어내어 그것을 논리정연하게, 혹은 시간 순으로 혹은 내가 강조할 이슈를 위해 재구성이 가능하다. 내가 모든 걸 보고 있고 내가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으니 그 상황 자체가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셈이다.
글과 달리 말은 즉흥적이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때로 말을 많이 하다보면 말실수나 무의식 중에 생각한 바가 툭 튀어나올 수 있다. 나를 이해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상황에 대해 여러 기제를 동원하여 설명? 해명? 할 수 있지만 내가 넣고 빼고 할 수 없이 던져지는 말들에 대해서는...
프란시스 쉐퍼 사상의 가장 큰 성찰점은 '자신의 가치관대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고 가정할 때 생기는 결과들을 고려해보자'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강의를 하다가 말실수를 하거나 논점을 이탈하거나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글은 내 논리정연한 완성품을 드러낼 수 있지만 말은 완벽하지 않을 수 있는 여지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 또는 긴장.
그 불안함의 이면. 그 끝까지 내려가보면 나는 청중의 기대, 청중의 평가에 신경이 곤두서 있음을 느낀다. 물론 나는 포퓰리즘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내 BEST PRACTICE를 보여주지 못해서 생기는 타인의 평가에 대해 무의식 중에도 상당한 불안해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의 불안함은 내가 후천적으로 습득한 반골 기질과 선천적 혹은 자라온 배경에서 익숙해진 모범생 기질 사이의 갈등과도 연관이 있다. 나는 다분히 어떤 기성 세대나 조직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그들이 내 생각들을 공감해주기를 기대한다. 그 공감 도구로 상당히 다듬어진 날을 쓰기를 원하는데 내게 그 도구는 글인 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말은 생각보다 사용하기가 참 까다로운 도구인 셈이다.
사실 강의를 불편해하는 배경에는 강의가 반복될수록 깨닫게 되는 명확한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단순하게 접근하면 소심한 성격 탓이라면 강의를 많이 할수록 더 나아져야 하는데 나는 매번 강의 직전까지 왜 이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할까 하는 의구심 말이다. 이 의구심을 계속 파다보니 흘러흘러 여기까지 왔다.-_-;;;;
흥미롭게도 이런 생각을 끝까지 주구장창 하다보면 쉐퍼의 유명한 논점과 만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오해받으면 어쩔건데. 사람들이 내 생각을 아주 정교하게 전달받지 못해서 나를 오해하고 내 강의를 폄하하면 어쩔건데... 그러면 나는 살 수 없나. 타인에게 공감을 받지 못하면, 그것도 내 반골기질의 생각들을 타인에게 제대로 어필하지 못하면 내 인생은 멈추나...' 뭐 이런 막장 묵상...^^
흥미롭게도 내가 육아를 분담한다거나 가사 기여도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 주로 받는 질문이 있다. 맞벌이 하죠? 아내가 파트타임으로 일한다고 대답하면... 다시 묻는다. 그럼 아내는 집에서 뭘해요? -_-;;;
내가 '전담'이라고 했거나 '육아가사 기여도가 높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상황은 곡해되고 상대의 관심은 여지없이 아내의 잉여시간에 꽂힌다. 더 흥미로운 건 남자들이 아니라 여자들도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는 거다.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고,,, 아내는 짬이 나도 안 되고 한시도 멍때리고 있으면 안 될 기세다.
사실, 주중 대부분의 가사육아는 아내가 챙긴다. 나는 퇴근 후에 아이를 씻기고 재운다. 주말에는 원칙적으로 내가 아이를 전담하고 짬이 나면 가사를 돕는다. 따라서 내 육아 분담 비율은 높으면 3:7, 낮으면 2:8 수준. 그런데 2~3의 기여도에 의해 자주 아내는 집에서 뭐하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move! move! 잠시도 가만있으면 안돼..) 그것도 여자들에게.
얼마전 길고양이가 상태가 안 좋아서 아내가 성하를 잠시 편의점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동물병원에 다녀왔다. (아내는 편의점 아주머니와 친하다) 황당했던 건 돌아오다가 동네 엄마와 마주쳤는데 그 반응이 <성하를 길거리에 내팽겨치고는 지 볼일 보고 온 엄마>취급 하더라는 거였다.
나는 자주 '여자의 적은 여자'라거나 '이이제이'(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제압함)같은 생각을 종종 해왔다. 그리고 그것을 자주 현실세계에서 확인한다. 나의 상식으로 남편이 육아의 일부분을 분담하여 아내에게 잉여시간을 만들어주면 주변 엄마들은 자신의 잉여시간을 만들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잉여시간을 확보한 엄마를 한량 취급한다.
'엄마라면 한시도 자기 아이와 떨어져서는 안 된다', '아내라면 남편 밥은 차려줘야 한다', '딸이라면'... 안타깝게도 이런 윤리가 약자(여성)측에서부터 아주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대체로 강한 분노는 주변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톱니바퀴에서 이탈한 사람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비난이 쏟아진다. '엄마가 되서는 쯧쯔..', '아내가 그것도 안 하다니..'
1억 로또 당첨된 사람보다는 주식으로 천만원 번 사람에 대한 질투가 크다. 그 결과 주식으로 돈을 번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일도 열심히 안 하고 주식질이나 해댔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정치도 여야 정쟁보다는 진보당 내에서의 다툼이 더 잔인하고 치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에서의 젠더 문제는... 갈 길이 멀다.(라고 쓰고 쫌 막막하다..라고 읽음)
"옷을 팔아서라도 이 책을 사라, 지금 당장!"
[서평] 백소영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옷을 팔아서라도 이 책을 사라. 지금 당장."
이 문구는 제임스 패커가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읽고 했다는 유명한 말이다. 백소영 교수의 이 책을 읽은 직후, 나는 페이스북에 같은 문구를 남겼다. 아마 지인들 몇몇은 농담처럼 여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당신이 신앙을 가진 한국교회의 교인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기를 권한다. 물론 이 책은 신학 책은 아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에 대한 사적인 경험, 182명의 여성의 인터뷰를 다룬 책이다. 하지만 본서는 엄마라는 존재의 미시사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사회와 개신교 내 여성 문제의 큰 화두들을 아우르고 있다. (고로, 만일 누가 나에게 개신교, 여성주의, 육아, 자녀 교육에 관한 한 권의 책을 권하라면 나는 주저함 없이 이 책을 꼽을 것이다.)
저자는 먼저 이 사회에서 '엄마'라는 존재가 대체 불가능한 사회 계급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엄밀히 말해 전업주부는 현대 이후에 고안된 일이라는 말이다. 아침 8시에 차를 몰고 도시로 나가서 저녁이 늦도록 가정과 격리된 공간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현대 사회는, 점점 더 일을 남성만의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봉건사회에서 노예나, 종들이 하던 일을 무보수로 대신해 줄 존재가 현대 사회에는 절실하게 필요해졌고, 따라서 남편이 경제력을 유지하도록 내조하고 무한 경쟁 속에서 자녀의 발전을 위해 최상의 교육 환경을 만들어 줄 존재로서의 '엄마'라는 계급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여성이 직장 내 경쟁 체제에 끼어들어 경쟁률을 높이는 것도 괴로운 일이며 저녁에 칼퇴근이 불가한 아빠의 부재를 메울 '전문 엄마'(전업주부)가 절실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를 낳은 여성은 점점 회사에 있어도 미안하고 집에 있어도 미안한, 양쪽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죄인 취급받고 있으며 점점 자녀 교육은 고학력의 전업주부만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그 결과로 점차 자신의 꿈을 접는 여성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때 여성들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잘 해 온 일', '하면 즐겁고 신나는 일'을 접고 이제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삶을 살게 되며 그 옥죄는 일상 속에 엄마들은 몸도 마음도 병들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전업주부가 되면) 아프거나 ('직장 맘'이 되면 바빠서) 미치게 된다고 표현했다. (이 책의 초판 제목이 <엄마 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개신교는 어떨까. 1990년대 이후 개신교에서 가정 회복 세미나를 통해 가정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런 한국교회의 많은 세미나들이 여성을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가부장적 여성성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강조되고 있다고 말한다.
서울 근교의 한 복음주의적 대형 교회에서 나누어 준 <가족 사랑 실천 노트>라는 소책자의 내용을 보자. (…) 남편의 아내 사랑 실천에는, 출근길에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출근길에 사랑하는 아내를 따뜻하게 안아 주기, 퇴근길에 꽃 한 송이 사 들고 아내에게 전해 주기, 아내의 음식 솜씨 칭찬하기. 아내에게 "오늘 내가 집안일 도울 것 없어?"라고 물어본 뒤 아내의 요청 들어주기, 함께 장보러 가기, 아내가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을 함께 보면서 아내의 정서 공감해 주기 등등이 묘사되어 있다.
한편 아내가 남편에게 실천해야 하는 덕목으로는 남편이 오케이 할 때까지 안마해 주기, 출근길 칭찬과 격려의 말 전하기,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사랑이 담긴 격려와 칭찬 문자 보내기, 출근길 칭찬을 적어 놓은 쪽지를 남편 주머니에 살짝 넣어 주기, "여보,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밝은 미소와 함께 남편 퇴근 맞이하기, "여보, 당신 건강해야 해요. 당신 건강이 우리 집 행복이에요. 일찍 들어오세요" 격려의 말 전하기, 퇴근한 남편의 가방(겉옷)을 들어 주고 시원한 물 한 컵, 주스 한 잔 대접하기, 특별 요리 준비하기, 남편이 하는 모든 말에 "예" 혹은 "당신 생각이 참 멋있네요"하고 반응하며 모든 요구 들어주기 등이 제시되었다. (본문 중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의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게다가 여기서의 모든 요구는 성관계를 암시하기도 하는데, 주변에서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내는 남편이 원하면 언제나 성행위에 응하는 것이 기독교 가정의 행복이라고 얘기하는 세미나가 여전히 성행한다고 전해 듣기도 했다. 저자는 마틴 루터도 아내의 또 다른 기능은 '유혹으로부터의 예방책 기능' 즉, 남편이 정욕을 그릇되게 다스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 아내는 성적 헌신으로 그에게 예방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러한 주장은 아내에게 남편이 요구할 때 언제나 응해야 한다는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르침이었다고 지적한다. 이쯤 되면 아내는 육아, 가사 전담뿐 아니라 '감정 노동자' 수준으로 봐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그러니 농담처럼 직장 여성들 사이에서는 우리도 퇴근하면 차도 타주고 목욕물도 받아주고, 저녁상도 차려 주는 아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사실, 책을 읽는 도중 너무 참조하고 싶은 내용이 많아 책의 사방에 검은 줄이 그어졌다. 책 속에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언급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생각할 거리들이 넘쳐난다. 유대 한 랍비가 "만일 한 남자가 그의 딸에게 토라를 가르친다면 그건 그녀에게 음탕함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 성종은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큰 일"이라고 했다는 과거 이야기에서부터, 의대에서 전공의가 되기 전까지는 임신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 산부인과에서 딸을 낳으면 한국의 간호사들이 "예쁜 공주님이에요. 한 번 더 고생하셔야겠어요"라고 말한다는 최근 이야기까지 정말 여성들의 깊은 좌절과 아픔을 공감할 만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그중 유독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소개할까 한다.
할머니 세대야 손가락에 꼽을 만한 신여성들이 있기는 했으나 다수의 여성들은 신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20세기 대표적 지성이라는 함석헌 선생님의 아내 황득순 여사도 겨우 글을 읽을 정도인 초등교육만을 받은 채 부모들에 의해 정해진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례는 당시의 '보편'이었다. 평생 "나야 뭐"하며 사셨다는 황득순 여사. 남편이 "생각하는 백성만이 산다"고 "모든 씨알(민초)이 다 깨어나고 비판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느라 외부 강연을 숱하게 다니는 동안, 그러느라 고정적인 생활비도 준 적 드문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저 묵묵히 아이들과 가정을 책임지고 산 그런 '황득순스러운' 여자들의 삶은 우리 할머니 시대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수적인 면에서 볼 때 '보편'이었다. (본문 중에서)
최근 100년 사이 여성의 지위는 비약적으로 신장되었다. 반대로 말한다면 여성이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은 지가 불과 1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역사 속에서 노예제가 해방되고 여성의 지위도 나아지는 걸 보면 문명이 진보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겠지만, 사회의 거대 담론 안에서 천명한 여권이 미시적인 개별 여성들에게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도리어 현대 사회, 신자유주의 경쟁 구도 속에서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여성은 자주 전업주부의 삶을 종용당하는 추세다. 함석헌 선생의 민초에도 포함되지 않은 '아내'라면 더할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
저자는 말미에 엄마들에게 이른바 공동육아로 대변되는 몇 가지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그 이상을 보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여성 문제에 있어서 한국 사회,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정 내의 미시 담론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현대 거대 담론의 한 축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 책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오래된 교회, 세가지를 버리면 산다?!
진 에드워드 <오래된 교회, 가정집 모임>
초등학교 시절, 하루는 늦잠을 자서 부모님과 함께 '대'예배를 참석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어머니는 화장과 몸단장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고 아버지는 회사를 가지도 않는데 정장을 입었다. 교회에 도착하니 안내에 따라 긴 의자에 차례차례 앉고 나면 찬양인도자가 찬양을 했다. 모두가 앞사람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는데 앞사람은 결코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잠시 후 내 키의 세 배는 높아 보이는 강대상에 목사님이 나타났다. 이어지는 설교. 내 기억에 그 시간은 '세상 그 무엇보다' 지루했다. 아마도 나는 어머니에게 "이제 끝이야?"라고 열 번은 물어 본 것 같다. 예배를 마치고 다들 서로 친하지 않은 듯 어색한 눈인사를 한 채 교회당 밖으로 물밀듯 빠져나갔다. 어렴풋이 나도 어른이 되면 대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개신교 예배의 오랜 전통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아마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회중 예배의 형식에 대한 거부감이 덜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여전히 익숙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이런 형태의 예배에 회의감을 갖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의 저자인 진 에드워드도 이러한 고착화된 미국 복음주의 예배의 전형을 비판하고, 오랜 시간 가정 교회 운동(house church movement)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세 왕 이야기>와 <크리스천에게 못 박히다>의 저자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그가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 형태를 강하게 비판한 사람임을 아는 이들은 의외로 적은 것 같기도 하다.
책의 시작부터 저자는 강한 논조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가 처음 예로 든 사례는 알바니아의 개방과 함께 찾아든 복음주의 전도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다.
"알바니아가 개방되고 얼마 되지 않아 서방 세계 곳곳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인 수백 명이 물밀듯이 알바니아로 몰려들었다. 곧 여기저기서 복음 전도가 활발하게 벌어졌다. 알바니아의 관계 당국에서 집계한 바에 의하면, 알바니아 전역에 있던 기독교 단체들이 첫해에 3만 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고 한다. 첫해에 회심한 3만 명 중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몇 명이나 교회 모임에 참석했는지 아는가? 200명이었다. 3만 명의 회심자 중에 겨우 200명이 교회 모임에 참석했다.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의해 소개된 교회는 우리에게나 알바니아인들에게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수출해서 알바니아의 기독교인들을 미국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나 새로운 회심자들이나 다 '교회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정장을 입고 성직자, 목회자로 대변되는 인도자가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는 예배, 모두가 긴 의자에 앉아 앞에서 설교하는 목회자의 말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 지루하고 따분한 예배의 형태가, 많은 회심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장본인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진부한 관습이 칼벵과 루터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 혹은 강요된 것이며 이와 달리 초대 교회는 인도자의 주도가 아닌, 그들 스스로 예배의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다. 고로 각 나라마다 교회 스스로가 북미 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모임을 가져야 하며 그 방식은 특정한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본능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무엇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서에서 그가 말하려는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바울의 전도 여행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단기간 안에 교회가 아무런 지도자 없이 남겨져야 하고 어떤 건물을 사용하지 않고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방식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귀가 시간이 정해지지도 않으며 더 탄탄한 설교를 찾아 돌아다니는 일에 관심이 없다. 저자는 작금의 예배를 초대 교회의 그것과 달리 진부하고 지루하고 정작 공동체의 풍성함에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핵심 요소가 교회 건물 중심, 설교 중심, 회중석의 구분이라고 보고 있다. 진 에드워드는 이것들이 완전히 파괴될 때에만이 새로운 예배가 시작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의 감정적이면서도 때론 극단을 치닫는 논조를 읽으며 다소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나에게 있어 개혁주의(칼빈주의), 복음주의는 폐기처분될 그 무엇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예배 형식의 원흉이 오로지 루터와 칼뱅이라는 주장 또한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나는 현대 교회의 침체, 기독교인들마저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이 예배 자체가 재미없어서, 혹은 수동적인 자세를 강요하기 때문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재미, 신선함의 부재가 문제라기보다는 교회의 세속화에 더 큰 원인이 있지 않은지, 가난을 말하지만 중상류층이 득세하고, 진부하기보다는 쇼와 더 달콤한 메시지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하는 반감도 다소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믿는다. 논리 전개나 학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반론의 여지가 많겠지만,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저자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런 생각도 든다. 눈 딱 감고 교회 건물, 회중석, 설교자(담임목사) 이 세 가지를 교회에서 없애면 정말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 않겠냐는 아주 현실적인 기대감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어느새 균형을 말하면서 개혁을 저지하는 보수 기독인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자성과 함께. 저자는 현대 교회를 한참 비판하고는 그 대안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논의를 끝내 버린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그룹은 아래의 주소로 편지하면 다음 단계에 대해 알려 주겠다." 그리고는 주소가 적혀 있고 책은 끝난다. 이런, 유머러스한 분이라니. 내 추측이긴 하지만 실제 그의 생각대로 실천한다면, 굳이 연락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이후에는 어떤 지침이 없이도 자연스레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김용주 /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전 <복음과상황>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