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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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며칠 아내가 내 눈치를 본다. 다친 길고양이들을 병원치료하고 보살피느라 비용도 많이 들었고 시간도 많이 쓰고 있다. 어제는 자려고 들어가는데 한마디 했다.

"미안. 내가 무슨 이효리도 아닌데..."

어제는 흘려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빵터졌다.ㅋㅋㅋ
사실 지난주에 나도 일도 많고 약속도 많아서 주말 내내 아이보랴 집안일하랴 피곤했다. 고양이들 이야기를 해도 솔직히 귀에 안 들어왔다. 날은 덥기만 하고 일 하나 끝나면 마냥 눕고 싶고.

#2.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를 읽으면서 새삼 진보운동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다. 진보정신의 핵심은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과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 처리는 그 집단이 그저 진보 이데올로기...를 수행하는 '보수집단'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이 문제가 불거지면 극우세력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선거에 패하게 된다. 이건 마치 좌파들이 득세하면 북한이 쳐들어온다, 신자유주의 경쟁에서 뒤쳐지게 된다는 우파의 논리와 묘하게 닮았다.

#3.
아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마트에서 죽어가는 앵무새들, 길을 걷다가 발견한 다리 부러진 고양이들, 그것을 지나치지 못하고 달려들어 돌보고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 회복시켜서 입양시키려는 노력들.

그 와중에도 세상의 많은 길고양이들은 여전히 다리를 절고 돌아다니고 로드킬을 당하며 굶어죽기도 한다. 앵무새들과 다른 애완동물들은 마트의 한 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박스 속에서 숨을 거둔다.

사실 이 미물들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이 나라, 혹은 제3세계의 아이들을 후원하는 일, 홀트나 기타 여러 NGO, 국민TV나 뉴스타파 같은 진보매체의 운동들에 물질과 시간을 들여 참여하는 일.

#4.
자기계발서를 읽어보면 시간사용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은 '중요한 일'을 먼저 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사소한 일은 미룬다. 더 큰 일을 위해 사소한 일들은 버린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정서가 일상적으로 진보주의 안에서조차 발견된다.

어느 순간 잃어버린 진보 패거리 속의 진보 정신이랄까. 나또한 이 사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략으로서의 이율배반, 적과 싸우기 위해 적의 전략에 동화되는,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조금만 참으면 이루어진다고 '장미빛 미래'의 약속.

#5.
이 모든 일들을 하면서 정작 자신은 전혀 즐겁지 않은 아내. 게다가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나에게 미안해하는 아내를 보며 나는 우울하지만 버티며 살아가는 진보정신의 현현을 본다. 더 큰 것을 위해 미물의 희생을 당연시하지 않는 그 마음을 지지한다는 말이다.

물론 미안함과 더불어 무관심에 때론 서운해하는 아내를 보며 더 자상하게 관심을 가져주지 못하는 내 모습이 또한 미안할 때가 있다. 집에서 아내의 빈자리를 매우기 위해 물리적으로 소진되는 내 일상 때문에 나또한 정작 아내의 삶에 관심과 공감을 표할 여력이 없다.

아내가 열심히 그 일을 할 수 있게 내가 돕는 것. 아내의 부재를 우리 가정이 느끼지 않도록 돕는 것. 아내가 미안함 없이 작은 생명들을 향한 도움을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현재로선, 그게 내가 아내를 지지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게 진정 진보적인 삶이라고 믿는다.
2013/09/13 23:25 2013/09/13 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