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교회, 세가지를 버리면 산다?!
진 에드워드 <오래된 교회, 가정집 모임>
초등학교 시절, 하루는 늦잠을 자서 부모님과 함께 '대'예배를 참석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어머니는 화장과 몸단장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고 아버지는 회사를 가지도 않는데 정장을 입었다. 교회에 도착하니 안내에 따라 긴 의자에 차례차례 앉고 나면 찬양인도자가 찬양을 했다. 모두가 앞사람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는데 앞사람은 결코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잠시 후 내 키의 세 배는 높아 보이는 강대상에 목사님이 나타났다. 이어지는 설교. 내 기억에 그 시간은 '세상 그 무엇보다' 지루했다. 아마도 나는 어머니에게 "이제 끝이야?"라고 열 번은 물어 본 것 같다. 예배를 마치고 다들 서로 친하지 않은 듯 어색한 눈인사를 한 채 교회당 밖으로 물밀듯 빠져나갔다. 어렴풋이 나도 어른이 되면 대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개신교 예배의 오랜 전통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아마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회중 예배의 형식에 대한 거부감이 덜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여전히 익숙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이런 형태의 예배에 회의감을 갖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의 저자인 진 에드워드도 이러한 고착화된 미국 복음주의 예배의 전형을 비판하고, 오랜 시간 가정 교회 운동(house church movement)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세 왕 이야기>와 <크리스천에게 못 박히다>의 저자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그가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 형태를 강하게 비판한 사람임을 아는 이들은 의외로 적은 것 같기도 하다.
책의 시작부터 저자는 강한 논조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가 처음 예로 든 사례는 알바니아의 개방과 함께 찾아든 복음주의 전도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다.
"알바니아가 개방되고 얼마 되지 않아 서방 세계 곳곳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인 수백 명이 물밀듯이 알바니아로 몰려들었다. 곧 여기저기서 복음 전도가 활발하게 벌어졌다. 알바니아의 관계 당국에서 집계한 바에 의하면, 알바니아 전역에 있던 기독교 단체들이 첫해에 3만 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고 한다. 첫해에 회심한 3만 명 중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몇 명이나 교회 모임에 참석했는지 아는가? 200명이었다. 3만 명의 회심자 중에 겨우 200명이 교회 모임에 참석했다.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의해 소개된 교회는 우리에게나 알바니아인들에게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수출해서 알바니아의 기독교인들을 미국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나 새로운 회심자들이나 다 '교회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정장을 입고 성직자, 목회자로 대변되는 인도자가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는 예배, 모두가 긴 의자에 앉아 앞에서 설교하는 목회자의 말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 지루하고 따분한 예배의 형태가, 많은 회심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장본인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진부한 관습이 칼벵과 루터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 혹은 강요된 것이며 이와 달리 초대 교회는 인도자의 주도가 아닌, 그들 스스로 예배의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다. 고로 각 나라마다 교회 스스로가 북미 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모임을 가져야 하며 그 방식은 특정한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본능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무엇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서에서 그가 말하려는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바울의 전도 여행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단기간 안에 교회가 아무런 지도자 없이 남겨져야 하고 어떤 건물을 사용하지 않고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방식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귀가 시간이 정해지지도 않으며 더 탄탄한 설교를 찾아 돌아다니는 일에 관심이 없다. 저자는 작금의 예배를 초대 교회의 그것과 달리 진부하고 지루하고 정작 공동체의 풍성함에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핵심 요소가 교회 건물 중심, 설교 중심, 회중석의 구분이라고 보고 있다. 진 에드워드는 이것들이 완전히 파괴될 때에만이 새로운 예배가 시작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의 감정적이면서도 때론 극단을 치닫는 논조를 읽으며 다소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나에게 있어 개혁주의(칼빈주의), 복음주의는 폐기처분될 그 무엇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예배 형식의 원흉이 오로지 루터와 칼뱅이라는 주장 또한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나는 현대 교회의 침체, 기독교인들마저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이 예배 자체가 재미없어서, 혹은 수동적인 자세를 강요하기 때문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재미, 신선함의 부재가 문제라기보다는 교회의 세속화에 더 큰 원인이 있지 않은지, 가난을 말하지만 중상류층이 득세하고, 진부하기보다는 쇼와 더 달콤한 메시지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하는 반감도 다소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믿는다. 논리 전개나 학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반론의 여지가 많겠지만,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저자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런 생각도 든다. 눈 딱 감고 교회 건물, 회중석, 설교자(담임목사) 이 세 가지를 교회에서 없애면 정말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 않겠냐는 아주 현실적인 기대감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어느새 균형을 말하면서 개혁을 저지하는 보수 기독인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자성과 함께. 저자는 현대 교회를 한참 비판하고는 그 대안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논의를 끝내 버린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그룹은 아래의 주소로 편지하면 다음 단계에 대해 알려 주겠다." 그리고는 주소가 적혀 있고 책은 끝난다. 이런, 유머러스한 분이라니. 내 추측이긴 하지만 실제 그의 생각대로 실천한다면, 굳이 연락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이후에는 어떤 지침이 없이도 자연스레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김용주 /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전 <복음과상황>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