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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회색지대 보고서 (6): 연애문화 보고서 (2003. 10.)

/ 김용주


소개팅 이야기

첫 주가 지나고 어느 날, 소개팅을 다녀온 동기의 얘기를 들었다. 처음에 이 친구녀석은 소개팅에 나온 여학생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이어진 그녀의 네 가지 질문에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고 했다. 난 혼자 생각에 ‘고만고만한’ 호구조사 정도거니 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는 무슨 일하세요?
2. 졸업하고 뭐 할 거에요?
3. 무슨 차 몰고 다니세요?

처 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소개팅 자리에서는 주로 좋아하는 음악이 뭐냐, 영화 많이 보냐, 전공이 뭐냐, 재미는 있냐 같은 것들을 물어보던 과거를 떠올리며 약간 놀라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들기 전에 미리 안정된 남자임을 확인하려는 그 여학생의 노련함이 돋보이는 부분이긴 했다. 헌데, 정작 뒤끝이 씁쓸했던 건 마지막 질문이었다.

“교회 다니세요?”

물 론 기독 학생들 간에도 남학생은 여학생의 외모를, 여학생은 남학생의 능력을 암암리에 따진다는 것이 보편적이긴 하지만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화끈하게(?) 물어보는 변화에 꽤 당혹스러웠다. 차라리 그 여학생이 마지막 질문을 처음에 물어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남자의 눈: 여자의 눈

이성교제에도 약간의 변화가 느껴진다. 사실 내가 처음 학교를 들어온 시기는 캠퍼스에서 ‘페미니즘 번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항상 여성은 남성과의 평등에 대한 시각으로 다가왔고, 이상적인 여성상은 프리랜서 내지는 직장에서 남성과 나란히 경쟁하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하지만 IMF 이후에 변화된 것인지, 아니면 페미니즘을 화두로 했던 캠퍼스 문화가 시들해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집안 좋고 능력 있는 남성에게 어느 정도 의존적인 여학생들이 늘고 있다.

아니, 과거를 돌아보면 그건 90년대 중반의 일시적인 흐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여학생은 연애를 3번 하는데, 저학년 때는 동기와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가 고학년이 되면 학업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같은 과의 실력있는 복학생 선배가 되고, 졸업을 하면 취업한 회사에서 능력 있는 직장 선배가 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저학년 동기는 곧 군대를 가게되고, 졸업을 하면 주변 환경이 바뀌는 부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들은 농 섞인 이야기다. 예전에는 자수성가한 사업가형 남성들이 상당히 호감을 샀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자수성가한 사람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서 노년에 단명하거나 지병을 앓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최근의 캠퍼스에서 선호하는 남성상은 아버지가 사업가라 집안도 여유가 있고 똑똑하며, 성격이 어둡지 않고 생각이 비뚤거나 모나지 않은 재미있는 사람이다.

남학생의 경우에는 여전히 외모에 의존적인 이들이 많다. 처음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는 술자리에서나 그런 이야기들을 하던 학생들을 보곤 했는데, 복학한 후에는 연애 이야기가 나오면 대놓고 여학생들의 몸매와 얼굴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이들도 심심찮게 만난다. 그런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가 아니라도 보통 남성들의 경우, 이상적인 여성상이 실리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실제로 자기 혼자서만 벌어서는 가정 생활 유지가 안 된다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의식이다. 그래서 집에서 살림을 하는 여성보다는 같이 가사를 돌보더라도 직장을 가지는 여성을 선호하고 있다. 직업은 보수가 적더라도 안정적이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공무원이나 교사가 좋다는 말들을 많이 듣는다.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

얼마 전 2%라는 음료 선전용으로 5분짜리 광고가 인터넷 상에 뜬 적이 있었다. 사랑에 대한 짧은 드라마형식이었는데 처음 보았을 때 그 영상이 너무 충격적이라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던 기억이 난다. '충격적'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내 또래의 직장 초년생 내지는 취업을 앞둔 대학생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내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이유 때문이라 하겠다. 내용을 대충 이야기하자면, 동갑내기 커플 중 남자는 군대를 갔다와서 복학을 한 학생신분이고, 여자는 갓 취업하여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이다. 이 여자는 직장에 가서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고 직장에서 능력있고 매너도 좋은 직장 선배 남자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다. 그 사실을 남자친구가 알게 되고 다투는 대목에서 여자는 울면서 자신에게 언제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 본 적 있느냐며, 사랑만 있다고 사랑이 되냐는 말로 남자에게 상처를 준다. 나에게 이 영상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나온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자 주인공의 나레이션에서 보이는 합리성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감정은 2년이 넘지 못한다"는.

주위 사람들을 만나보면 사랑에 대한 나름의 여러 생각들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또한, 그러한 사랑에 대한 고유한 정의는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준의 것이고 그런 연유로 사랑에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과 정의, 그리고 경험에 맞추어 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함부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곤 한다. 위에서 예로 든 광고회사에서 자신의 광고에서도 누구의 '사랑관'을 선호하는지 투표를 했고, 두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다는 점을 보면 그러한 서로의 입장에 대해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실제 투표에서는 여자 주인공의 입장이 좀더 높은 동의를 얻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광고에 나온 여자 주인공의 나레이션과 반응에 큰 공감을 표하게 된다. 물론 대부분의 순수파 혹은 순정파 연인들에게 여주인공의 행동은 비난을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고 있는 또래 학생들과 직장 초년생의 연애관은 그들이 여전히 자신을 규정짓지 못하고 있는 만큼 불안정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결단대로 행동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도 허다하다. '영원한 사랑', '변치 않는 마음'과 같은 류의 고백들이 진정 서로가 지켜나갈 수 있는 류의 고백인지 아직 스스로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연인들 상호간에 '사랑'이라는 정의도 개인의 경험에 따라서 그 의미와 규모는 사뭇 차이가 난다. 그간 무수한 사랑에 관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이 처음 만나서도 부드러운 대화가 이어지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어 만난 당일에 깔끔한 세트로 꾸며진 집 안에서 잠자리를 같이 하는 식의 작위적 설정으로 인해 젊은 남녀도 그런 상상 속에 많이 휘둘리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이들은 운명적 만남에 대한 환상이 너무 큰 경우도 많다. 이들은 자신의 결정에 항상 회의감을 가진 관계로 의지적인 측면에서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광고 속 여주인공의 대사처럼 그러한 감정적인 설레임은 2년 이상을 넘지 못하고 그 이후에는 자신이 선택한 이성이 운명이 아니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정이라 믿게 된다. 갈수록 많은 연인들 간에는 감정이 식으면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불편한 무엇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듯 하다.

이런 순수파, 감정파에 비해 광고 속 여주인공이 더 많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연인들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적인 무엇, 첫 눈에 반하는 무엇, 혹은 운명적인 만남과 같은 이상적인 형태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첫눈에 반하는 요소들은 대부분인 외모, 말하거나 행동할 때의 깔끔한 매너, 목소리 정도이며 간단한 대화를 통한 상대방의 기호 정도가 된다. 그것을 운명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결국 일상에서의 지루한 관계가 지속될수록 무료함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그런 연유로 부모들 입장에서, 혹은 광고 속 여주인공 입장에서 상대방의 배경이나 재산,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것도 동의까지는 아니라도 때로는 납득이 된다. 사람이 만나서 부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 순정파의 입장에서는 너무 성글게 생각하는 듯 하고, 속물파의 입장에서는 너무 치밀하게 계산하는 듯 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연애를 막는 선교단체의 폭력성

결 국 서로를 알아가는 데에는,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연애관을 수정하고 또한 돌아보게 되는 데에는 이성간의 만남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너무 진지한 시작은 좋지 않겠지만 주위의 관심아래에서 연애는 권장되어 마땅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교단체는 이에 역행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지난 번에 연재되었던 “약간은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선교단체의 학생들은 전적으로 시간에 쫓기게 되어 있고, 결국 공동체의 운영에 있어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영역들은 공동체 자체적으로 금지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성교제와 아르바이트이다. 내가 아는 한 선교 단체에서는 이성교제와 아르바이트를 하면 공동체에서 제명되는 일도 있었다. 이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잘못 구분한 탓이다. 이성교제를 금지하는 공동체는 많다. 많은 동아리들도 동아리 내에서 이성교제를 금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동아리 활동을 등한시하고 때때로 두 사람이 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기독 공동체에서도 이성교제를 음성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금하는데 이는 많은 시간을 교제에 쏟게 되고, 지체를 섬겨야 할 리더들의 감정기복이 심해지며 두 사람이 함께 공동체를 떠나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성훈련이 제대로 선행되지 않은 학생들의 이성교제가 문제가 될 위험성이 있으며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경우에 공동체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등의 이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에 위험성을 뿌리뽑자는 심산인 듯하다. 많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황당한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 학생시절에 이성교제를 놓고 힘들어하며 이런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했더니, 어머니는 내가 통일교 내지는 이단 단체에 들어간 줄 알고 동아리 활동을 중단하도록 권면을 받은 적도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 세대 공동체보다도 개화된 여성인 모양이다.

이러한 제재 속에서 대부분의 기독학생들은 이성교제에 있어서는 '순수파'로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선교단체에서 남녀간에 거리낌 없는 관계가 오랜 시간 이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이들에 비해 이성을 대하는 것이 더 낫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동체에서의 남녀 관계와 이성교제에서의 남녀 관계는 사뭇 다르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도 군중 속에 있을 때, 아니 심지어 친한 친구와 있을 때에 비해 애인과 있을 때는 큰 차이를 보였다. 그리고 그게 정상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4년간 제재를 당해온 많은 기독학생들은 자신에게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성교제를 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교제를 시작하게 되고, 이후에 생겨나는 여러 복잡하고 힘든 감정의 기복들로 어려움을 겪다가 이내 기도원에 들어가거나 새벽기도를 꾸준히 가면서 '이 사람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를 되뇌게 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에게 묻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이성교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이루어져야 할 고백이다. 문제는 이런 학생들은 단순히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불편함과 두려움을 신이라는 절대자에게 대신 뒤집어 씌우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캠퍼스 보고서' 때와 마찬가지의 역회심 문제로 돌변하기도 한다. 일례로 이런 학생들은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유치하고 미성숙한 잣대였다고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능력, 연봉, 집안 배경 같은 것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기도 한다.


건강한 연애 보고서를 쓰기바라며
 
첫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꼭 그렇게 된다기 보다는 '처음' 하게 되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생기는 시행착오에 기인하는 듯하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한 일은 낯설기 마련이고, 또한 자기 몸에 꼭 들어맞기까지는 적응을 위한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사물이나 기구, 자동차를 다루는 일도 그러한데 사람을 다루는 일, 사람과 사귀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창조주가 허락한 두 사람이 일체가 되는 과정으로서의 사랑의 시작인 만큼 이성교제에 많은 주의와 노력이 필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리 없다. 그리고 그러한 처음에서 오는 시행착오로 서로간의 감정과 관계성을 잘 조율하지 못해 헤어지게 되는 경우에는 미련과 아픔이 남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그 기간이 길기도 하고 쉽게 회복하지 못하는 일도 다반사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많은 후배들과 동기들에게 이성교제를 권장한다. 한 사람과 완전하게 투명한 교제를 해 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혹은 자신이 말하는 섬김과 헌신이 얼마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던 신기루에 불과한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가 투명하게 자신의 내면을 터놓는 과정을 통해 얼마나 스스로가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사랑을 베풀기를 싫어하는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고, 자기가 말했던 그런 사랑 어린 행동에도 노력과 연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대부분의 동아리나 기독 선교단체, 심지어 대학원 내에서도 이성교제는 암암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금기시 하는 분위기가 많다. 그것은 공동체의 견고함을 위한 제재이기도 하고, 또한 개인이 서투르게 교제를 하다가 헤어진 이후에 오는 상처와 심적 어려움에 대해 과잉보호를 하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제재는 오히려 이성교제를 음성화시키고 음성적으로 만남을 갖는 커플의 경우는 관계에서 더 잘못되기 쉽다.

물론 이성교제 시의 발생할 법한 문제는 항시 존재한다. 헤어질 때 생기는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육체적인 친밀함이 더해지는 것도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애가 시작되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게 되는 문제로 인해 때로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말들이나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 알게 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 일상적인 일들에 대한 편안함을 느끼기도 전에 관계가 급진전되는 것도 경계할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기독인의 경우에는 '신실한 형제', 혹은 '신실한 자매'에 대한 왜곡된 태도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일부로 글 전체에서 신실한 사람에 대한 강조를 제외했다. 나는 그 신앙적 신실성 여부로 그 사람이 이성교제에서도 동일하게 그러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신뢰하지 않는다. 신앙적 신실함은 정작 이성교제를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 분명하지만 나는 그 신실함 때문에 시작된 교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신실함 자체가 체화된 것이 아닌 경건의 외형인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 신앙이 깊어도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를 포함한 젊은 세대들의 신앙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아직 우리의 신앙 자체가 삶의 여러 문제들을 접하고 그 안에서 난관을 통해 얻어진 신앙이 아니라 비닐 하우스에서 재배되고 있는 식물들처럼 머리로만 혹은,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는 신앙적 행동양식들이 실제 삶에서는 그 텍스트대로 드러나질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가 신실해 봐야 얼마나 신실하겠는가. '신실한 사람'이라 칭하는 것은 중년기는 넘긴, 그리고 신앙의 열매를 이제는 조금씩 내고 있는 이들에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가 중시하는 것은 허울뿐인 신실함보다는, 오랜 시간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그 일상적 친밀함, 그 가운데에서 쌓여가는 신뢰를 통해 감정적으로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긴 여정이라고 믿는다. 부디 많은 기독 청년들의 멋진 연애 보고서를 기대한다! **
2003/10/01 23:26 2003/10/01 2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