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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회색지대 보고서 (4): 직장생활 보고서 (2) (2003. 6.)

/ 김용주


<성(性)적인 문제>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을 한 선배를 오랜 만에 만났다. 반갑다는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쯤 회사생활에 대해 물었다.

“며칠 동안 프로젝트에 시달리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만 너무 피곤하더라고. 그래서 마사지를 받으러 갔지. 근데 글쎄 거기서 하는 말이 2차를 가든 안 가든 2차 가는 돈까지 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그냥 왔어?”
“아니. 2차 갔어.”
“…”

나 이가 들수록 뉴스에서만 보던 이상한 일들이 가까운 주변에서 일어난다. 폭탄주도 그렇고 이런 ‘출장 마사지’도 그렇다. 휴학 후 잠시 있었던 회사에서는 직장 선배들이 내게 ‘총각딱지’를 떼 주겠다고 안달이었다. 회식자리가 끝나고 2차를 간다고 할 때마다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직장인 남성들에게 이러한 성(性)적인 문제는, 회사를 갓 들어가서 겪는 꽤 피하기 힘든 유혹처럼 보인다. 난 기독인이지만 불신자인 친구들도 많았고, 캠퍼스를 떠나 있는 동안 여러 부류의 사람들도 만났다. 기독인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30대를 전후하여 이러한 환경에서 성적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회사에서 남자 직원들 사이에 포르노물이 담긴 CD가 도는 것은 정말 흔한 일이고. 스포츠신문에서 연일 비밀처럼 보도되는 그런 내용의 비디오나 사진 파일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신기할 정도로 많이 퍼져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그런 류의 음란물을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문제는 지위고하나 교육수준을 막론하고 모든 남성들이 피하지 못하는 유혹이 되고 있다. 병원에 의료기를 납품하고 있는 친구 중 하나의 말이, 자기가 거래하고 있는 병원의 의사가 물건 납품 시에 그런 음란물을 요구했다고 한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음란물에 나오는 사람이 한국사람이어야 한다는 둥, 꽤나 구체적으로 자신의 기호를 밝히더라는 것이다!

갓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직장 남성들은 과도한 일에 쫓겨 자신의 시간을 제대로 쓸 수 없을 때가 많다. 능력 있고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일수록 업무량과 출장이 많으니 그만큼 대인관계를 맺을 시간을 부족해지고, 그러한 연유로 많은 남성들이 이성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갈급함을 다른 방향으로 충족시키려는 듯 하다. 스포츠와 같은 활동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고 열린 공간에서 주변 사람들을 사귀는 이들도 있지만, 만성적 피로와 스트레스에 지친 상당수의 직장 남성들은 마사지나 술자리에서 성적 유혹을 받기 쉽고, 혼자 있는 시간에 음란물들을 탐닉하기 쉽다. 더욱 문제인 것은 직장 생활에서 남성들의 생활 구조가 그러한 유혹을 현실화시키는 데에 구조적으로 아주 적합하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구조 속에서 직장 남성들이 쉽게 자신의 욕구해소의 방편으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인격적 관계없이 물질로 성적인 욕망을 해결하는 습관이 들게 되면 결혼 후에도 그것을 멈추기가 힘들게 되는 것 같다. 회사에서 나와 친했던 선배는 결혼 후에도 술자리에만 가면 2차에서 그런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다음날 출근해서는 아내와 자녀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 자신을 정죄했지만 내가 근무하는 동안 그의 습관이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문제의 소지가 있겠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비인격적인 행동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고 그런 남성들의 문제에 면죄부를 줄 생각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일부의 정이 많은 불신자나 기독인에게 주로 나타나는 또 다른 유혹이다. 이는 서로 잘 아는 이들 사이에서 많이 생기는데 그것은 기혼자 ‘사내 커플’의 문제다! 이른 바 결혼한 직장인의 ‘이성친구’에 대한 문제인데 이것은 두 사람 사이의 인격적인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 지속적이고 그 영향도 앞서 이야기했던 것들보다 크다. 내가 아는 회사의 이성 커플 중 자신의 가정에 두 사람 사이가 알려진 경우에는 모두 이혼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기독인의 경우, 회사에서도 일 중심적이기보다는 관계 중심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는데 직장의 이성동료에 대한 그러한 애정 어린 관심과 도움이 지속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기도 한다. 간혹 교회의 목사님들이 여성도와 문제가 생기는 시발점은 오히려 좋은 동기에서 발생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기혼자의 경우에 발생하는 이런 문제는 가정에 치명적이며 그리스도의 섬김이라는 긍정적인 시도가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감시와 처벌>

이번에는 개인의 윤리적인 문제를 넘어서 직장의 구조적인 문제를 짚어 보자. 신입 사원이 대기업에 처음 입사를 하면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감시가 시작된다. 사원의 행동이나 버릇과 같은 반복적 패턴, 그리고 일을 대하는 방식, 말투와 같은 세세한 부분이 정리가 되어 인사를 관리하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다. 사원들에게는 출입증이 발부되며 그 출입증은 회사 내에서는 직위를 상징하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장된 칩을 통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가볍게는 화장실에서 잠을 잔다거나 혹은, 외근을 나갔다가 사우나를 간 경우 그 내역이 상부에 보고된다. 회사에서 나가는 일련의 메일들은 모두 그대로 복제되어 사내에 보관된다. 이러한 메일은 회사내의 기밀이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통제수단이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면 개인의 사생활까지 감시할 수 있는 도구적인 기능도 할 수 있다. 사무 자동화가 이루어진 이후로 회사는 직원들로 하여금 높아진 담을 두고 각기 자신의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한편, MSN 메신저나 출입증으로 각 개인을 매 시간 체크한다. 또한 근무시간에 자리를 이탈한다거나 업무 외의 일로 시간을 보내는지 감시하기 위해 자신이 속한 부서가 아닌 다른 부서의 직원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면서 각 사원들을 체크하고 그 내역을 작성, 보고한다. 이러한 보고는 다시 인사팀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며 이후의 인사고과에 참고자료로 쓰이기도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는 무슨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메트릭스”와 같은 영화 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아니면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접한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조합하면 위와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 이야기가 충분히 사실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지 금도 후불제 교통카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경우 특정한 날짜와 정확한 시간에 다녀간 장소를 알아낼 수 있다. 휴대폰을 켜 놓은 상태에서는 실시간으로 그 사람의 위치 추적도 가능하다. 예전에 특정 번호의 휴대폰 서비스업체에 가입한 사람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웹사이트가 잠시 개설되었다가 개인의 정보문제로 사라진 사례가 있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때에도 행방불명 된 사람들 중 일부는 켜져 있는 휴대폰의 신호로 알아냈다는 기사 또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간단한 프로그램으로 다른 컴퓨터의 정보를 가져올 수 있으며, 회사 내에서 외부로 나가는 메일은 검색어를 통해서도 걸러내거나 내용을 복사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 얘기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서 손쉽게 사원들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당장에 쓰지 않겠는가.


<섬길 것인가 섬김을 당할 것인가?>

여전히 복음주의권에서 직장 윤리를 이야기할 때는 직장을 다니는 기독인 개개인의 섬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복음을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어 회사에서도 동일한 섬김의 삶을 살 때 그 직장도 변화될 것이라는 청교도적인 믿음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듯 하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항상 그러한가? 개개인의 도덕성이 회복되고 조직에 충성되게 일하면 그 조직의 도덕성이 높아지는가? 이 즈음에서는 라인홀트 니버의 유명한 책이 떠오른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 경험을 곁들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당시는 의욕적으로 회사 생활을 잠시 하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복음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나는 그 동안 내가 헛된 믿음 속에서 공허한 섬김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깊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내가 성화되고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성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욕구가 더 컸고, 은연중에 스스로가 더 선해지기 보다는 더 선하게 보이면서도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을 익히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해 가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그 동안 그렇게 자신했던 기독인의 삶이었음을 발견하면서 나는 깊이 뉘우쳤고 새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럴 때 즈음에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나는 뭐든 일이 있으면 “제가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나는 성실함과 능력, 그리고 섬김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일 때 진정 주변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커피를 뽑는다거나 문서의 복사, 팩스 보내는 일이나 전화응대 같은 다소 귀찮고 무료하게 시간이 소모되는 일들이 하나씩 내 일이 되어 갔다. 다른 직원들은 처음에 나의 선행에 좋은 말들을 해 주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모두가 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점점 하루 종일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만 갔고, 결국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을 마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되어 자주 초과근무를 하는 일도 생겼다. 나중에는 복사지나 커피가 떨어졌거나 복사기가 고장이 난 경우에 사람들은 나에게 불평을 하기 일쑤였고 그런 상황에서 나는 작은 일 하나 제대로 못한다는 타박마저 들어야 했다. ‘그래, 이런 게 섬김의 길이야. 처음부터 칭찬을 기대해서 한 일이 아니었잖아.’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조금씩 발생했다. 내가 일과의 대부분을 허드렛일과 씨름하며 보내는 동안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다른 이들은 나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동일한 시간의 대부분을 나는 발전적이지 않은,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들을 했던 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인 가치를 높이는 일에 전념했다. 그들은 나와 달리 때로는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기대하지 않은 성과를 내며 상사의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결과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그 사람은 그 조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커 갔고, 나는 언제든 다른 어떤 사람과도 맞교환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이는 그 조직의 사람들이 특별히 악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돌아보면 어떤 조직에 들어가던지 내가 그 때와 똑같이 행동한다면 그 조직도 똑같이 나를 대접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기업이라는 조직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비영리 단체가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기업은 이윤추구가 그들의 궁극적 목표다. 그것이 기업의 진리인 셈이다. 기업에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일이 있다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선택하며 그 일에 투자한다. 물론 투자의 과정까지 여러 부분을 재어보고 결정하겠지만 그 결정의 궁극적 잣대는 기업의 이익이다. 대부분의 사원들은 자신의 충정을 기업의 조직원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조직원들의 총합(summation)으로 이루어진 조직은 그러한 자신의 충정을 헤아리고 적절한 대접을 해 주리라고 믿는다. 적어도 과거 우리 아버지 세대의 분들은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회사는 각각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계와 같다. 각 부품의 수명이 다했거나 그 부품보다 더 좋은 모델이 나왔을 경우에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새 부품으로 교체한다. IMF 체제 속에서 많은 이들이 이러한 부품 대접을 받고 망연자실했다. 이럴 경우 때로는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릴 정도로 그 충격은 클 수 밖에 없다. 매일을 내 집처럼, 아니 내 집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던 회사에서 자신의 자리가 사라져 벼렸을 때의 심정이란, 당해보지 않으면 그 느낌을 헤아리기가 힘든 것 같다. 기업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섬김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이런 면에서 어찌 보면 어폐(語弊)가 있는 듯하다.


<기업의 모듈화, 책임감 없는 기독 직장인>

기업의 풍토도 변화하고 있다. 한 기업의 사활이 이제는 가치사슬을 중심으로 서로 얽혀 있는 것이 최근 기업의 모습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기업은 가치 사슬(value chain)을 중심으로 고객업체와 공급업체, 소비자, 그리고 하청업체가 서로 ‘다대다’ 관계로 얽혀있는 extended-enterprise(확장 기업군)으로 존재한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업 이윤추구에 도움이 되는 일에 투자하며 그 투자는 다시 전략적인 제휴로 이어진다. 장기적 안목에서 모든 거래가 행해진다.

이러한 거대 기업군 사이에서 개인의 생존전략도 치열해진다. 내 주변만 보더라도 선배들의 직장이 3년~5년을 주기로 변화한다. 고객업체의 기업에서 근무하던 직원이 공급업체로 회사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급여를 기준으로 전직을 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교육을 시킨 직원들이 다른 회사로 옮기는 일이 잦아지면서 채용 시부터 업무를 바로 수행할 수 있는 직원을 선호한다. 기업 환경은 갈수록 전문 분야에서 능력 있고 탁월한 사람이 살아남는 자유경쟁 구도로 변화하고 있다. 기업에서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각 개인은 자신이 다른 직원으로 대체될 수 없는 중요한 업무 수행에서 탁월함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다른 기업에서도 선호하는 직원으로 꼽힌다. 순수 기업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개인의 능력에 따라 기업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조직의 구조 자체에 그러한 자동화된 프로세스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는 동적 하부구조를 가진 거대 기업군에서 실력자로 생존하기 위해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몸부림치고 있다. 이미 어느 정도의 판을 꿰뚫고 있는 이들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가며 생존 전략을 몸에 익히며 빠르게 ‘직장’ 사이를, 혹은 ‘직종’ 사이를 가로지르며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살아간다. 역시 문제는,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는 기독학생들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선교단체 출신의 기독학생들은 회사에 들어가서 하는 말이 있다.

“저, 잘 모르는데요.”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다음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가 아는 거의 모든 기독학생들은 겸손하다.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결과물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는 대부분이 기독 공동체에 있을 때부터 항상 고백하기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므로 나는 한 일이 없다’는 소스 코드를 기업에 가서도 동일한 연장선 상에서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 듯 하다. (물론 나는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의 선의를 믿으며 또한 분명 그 고백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회개와 용서의 신학을 그릇되게 적용하려는 행동의 위험성이다. 기업은 인격적이지 않다. 또한 기업은 실수와 잘못에 대해 냉정하다. 기업에서 용서란 없다. 단지 투자의 가치를 판별할 따름이다. 기독 공동체에서 훈련 받은 많은 학생들은 잘못에 대해 너그럽다. 일 처리에 있어서 잘 마무리하지 못하고 그 순간을 도망쳐 나온다 하더라도 다시 공동체로 돌아와서 잘못을 인정하는 회개의 고백을 하면 공동체는 너그럽게 용서하고 다시 그 지체를 일원으로 반겨왔다. 따라서 상당수의 기독학생들은 일의 마무리를 잘못하며 때로는 지나치게 무책임하다.

기업은 다르다. 한 개인의 오판이나 일 처리의 불완전함은 그 기업의 생존을 좌지우지한다. 단돈 몇 푼이라도 투자를 적게 해야만 다른 경쟁업체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이는 단순히 이윤을 더 남기냐 덜 남기냐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 직종의 여러 기업간 경쟁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한 개인의 실수가 그 기업에 치명적일 수 있으며 그러한 풍토에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곧, 자신을 그 기업에서 다른 직원으로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고백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 언급했던 기독 학생들이 흔히 쓰는 ‘회개’의 표현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겸손함의 표현이라거나 혹은 잘못한 일에 대한 용납을 기대하는 의미로 사용했을지는 모르지만 기업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은 타인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자원이며 이러한 일이 반복될 수 있음을 암암리에 반증하는 것이 된다. 자신의 복음주의적 고백이 결과적으로 기업의 입장에서는 ‘도태’를 의미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이런 일련의 변화 속에 기독학생들은 무방비로 사회 속에 내몰리는 경향이 있다. 선교단체에서 교육받은 대로 직장을 섬기기에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동료집단 속에서 성적 문제와 도덕적 문제에 봉착하면서 그것을 고민하고 날마다 자신을 악한 세속 사회에서 지켜가는 것만으로도 다분히 지치고 좌절하기 쉽다. 섬김의 삶과 실력을 쌓는 삶 가운데에서 오는 불협화음과 혼란들은 시시때때로 기독인의 정체성을 뒤흔든다. 기업은 그러한 개인을 쉴새 없이 감시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한 개인은 때론 흔하게 쓰던 복음적인 고백들이 ‘무능’이라는 딱지를 달고 나아가 그러한 오점들이 인사고과에 반영되기까지 한다. 갈수록 삶은 복잡다단해 지고 있으며 복음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야심찬 기대들은 최소한 그 판을 읽을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 될 것 같다. 우리의 직장이 그렇다. (계속)**
2003/06/01 23:24 2003/06/01 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