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은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 5 : 강보선 님의 글에 답함
/김용주
<강보선 님의 글에 답함>
안 녕하세요? 강보선 님. 님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 사실 복음과상황 홈페이지(www.goscon.co.kr)의 게시판에서 님의 글을 먼저 읽었습니다만, 당시에는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글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님의 글에는 꼭 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오프라인에 실린 글을 대하게 되어 참 반가운 마음이었습니다. 게다가 저와 같은 선교단체에서 지내는 것이 저로 하여금 좀더 편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래도 지적할 부분은 지적하겠지만.글을 쓸 때는 좀더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만, 실제로는 제가 속한 선교단체와 캠퍼스의 상황이 많이 드러나는 것 또한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님과의 논의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며, 글을 쓰면서 좀더 일반화 시켜서 좀더 많은 사역자들, 학생들과 나눌 수 있는 내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앞으로 쓰는 글은 편의상 반론의 형식을 취하겠습니다
<왜 문제의 핵심은 지나치는가?>
지 난 번 내가 썼던 ‘비유’라는 글의 간략한 요점은, 기독 공동체가 복음의 진리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실패하여 많은 학생들이 보화를 보화로 인식하지 못한 채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다른 도구에 노출된다는 것이었다. 그 도구는 다름아닌 세상적 공동체에서 행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기율방식’이며 이러한 감시와 처벌에 따라 기독 공동체가 구성원들을 통제하게 될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운’ 진단이었다. 지난 번 글이 비유적인 내용으로 채워져서 반론을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어쩌면 내겐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이를 통해 잘못된 생각들은 바로잡고 오해들은 일소할 수 있었으면 한다.강보선 님은 내가 쓴 글이 “리더들이 후배들에게 복음의 귀한 가치를 가르쳐주지 못하고 당위와 군기로 후배들을 붙잡고 있다는 비판”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런데 모든 문제의 근원을 리더들과 공동체에 돌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고려하지 않은 내용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1. 회의하는 개인에 대한 책임
2. 선교단체의 존재 목적
사실 이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강보선 님은 ‘리더들이 복음의 귀한 가치를 가르쳐주지 못’하여 생기는 문제에는 쉽게 그냥 비켜갔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강보선 님의 글에서는 너무 부족하다. 강보선 님이 나의 이전 글을 언급한 것으로 볼 때, 내가 이제까지 <약간은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에서 진단한 문제의 핵심은 ‘선교단체의 신앙 교육’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강보선 님의 의견을 어느 정도는 언급하는 것이 좋았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고등학교 때인가, 보충수업 시간이었다. 보충 수업 때 들어오는 수학 선생님은 두 분이셨는데, 한 분은 정말 성실하게 수업을 준비하는 분이셨고 다른 분은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준비가 부족하셨던 분은 학생들에게 체벌을 심하게 주시는 분이었다. 한 번은 학생들이 일제히 책상을 든 채로 준비가 철저하신 수학 선생님의 수업에 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일이 일어나게 된 문제의 핵심은 수업의 내용이었다. 물론 학생들이 버릇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변적인 문제였다. 결국 이 사건은 학생들의 버릇없음에 대한 체벌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담당 선생님이 수업 준비에 열심을 보임으로 긍정적인 해결을 보았다. 내 지적은 이런 종류의 것이다.
<회의하는 개인, 기다리는 공동체>
강 보선 님은 기독 학생들이 공동체에 들어오는 이유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중에 아주 소수만이 주님의 나라를 위해 공동체에 들어온다고 보면 아마 정확’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기에 이들이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상당히 다르며, 대부분은 공동체가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 것인지에 많은 관심’이 있음을 경계했다. 그러다가 ‘공동체가 자신이 원하는 공동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불만이 많이 생기’며 그렇게 떠나가는 후배들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들이 혹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기도하며 인내함으로 섬기겠다는 결단이 무엇보다 필요하며, 강보선 님의 선교단체의 경우 2년간을 손실을 감수하면서 기다려 준다고 말하였다.나아가 강보선 님은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그들의 회의감이 ‘그들 자신이 보다 적극적으로 회의를 풀려고 노력해야 하며, 답을 제시해 주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스스로 그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을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밭에 감추인 보화는 결국 자기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물론 나는 강보선 님과 같은 선교단체에 있기 때문에 2년간 막연히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의 글 자체를 인용하자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지금 글을 쓰는 본인 조차도 공동체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내가 기독 공동체의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강보선 님이 회의적으로 이야기했던, 그저 그런 이유에서였다.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 배워서 교회에서 활용하려고, 외로워서…) 나는 그들의 필요 또한 절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성경에서 조차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제자들을 본다. 나는 성경에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오랜 시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면서도 오히려 영광 중에 그 분의 좌우에 앉기를 원했던 야고보와 요한을 본다. 3년을 공동체 생활을 했음에도 누가 더 높은 지에 대해 논쟁하는 제자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같은 본문에서, 그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섬김을 본다. 나는 진리를 확증한 순간, 공동체의 후배들의 개인주의적이고 가시적인 필요로부터 마음 중심에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제자들에게는 어떤 권위의 행사가 아니라 발을 닦아주는 낮아짐과 섬김의 본이 그들을 변화시켰음을 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낮아짐의 본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내 모습에 심하게 좌절하며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기도 한다. 그들의 회의감은 그들의 등에 올려 놓을 성격의 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도, 제자도, 선교의 균형이 필요>
“공 동체는 서로 서로에게 편안하고 아늑한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선교를 하기 위해 모인 것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하기에 선교를 위해서는 모두의 입장을 고려해줄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명의 지체가 공동체에 들어왔다고 가정해봅시다. 10명은 주님의 나라에 관심이 있고, 나머지 10명은 관심이 없다면 제 생각에는 관심 있는 10명에게 더 많은 섬김과 사랑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심 없는 10명에게 무관심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도록 사랑과 인내로 도와주어야 하지만, 섬김의 우선 순위는 관심 있는 10명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청년부와 선교단체의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단체는 선교를 위해 모인 특수한 단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과상황 11월호, 강보선 ‘선교단체는 교회와 다르다’)
만일 강보선님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선교단체는 제자도가 결여된 곳일 가능성이 크다. 강보선 님과 내가 속한 선교단체는 중점 전략으로 EDM, 즉 전도(Evangelism)와 제자도(Discipleship), 선교(Mission)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 목표들은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종속되기보다는 이 세 가지가 균형 있게 공동체 안에서 담아져야만 한다. 강보선 님은 선교단체의 존재 목적을 선교적 측면에서만 파악하고 있고, 그럼으로 인해 본인이 언급한 제자도의 문제를 부차적이고 도외시 될 수 있는 부분으로 전락시켰다. 또한 나는 ‘교회 청년부’가 선교의 사명에서 제외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게다가 무엇보다 ‘섬김의 우선순위가 관심있는 10명’에게 더 많은 섬김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심한 거부감이 생긴다. 이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볼 때, 기독 공동체를 세워가는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효율적인 수단과 방법을 논의하는 것은 오히려 기독 공동체에도 경제 논리가 동원된 형태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면서: 사족>
강보선 님은 글을 마치면서 ‘님의 말처럼 조직의 효율화를 위해 등급을 매기고,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지만 공동체의 목적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후배들에게 합당한 성경적인 권위’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공동체의 목적으로 이루기 위한 ‘성경적 권위’는 무엇인가? 이것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일 수 있다. 아마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보선 님이 지적한 성경적 권위가 ‘세상적 기율방식’과 구별되는 것임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공동체의 방향성에 끝까지 동의를 하지 못하는 이들은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서로에게 덕이 된다고 봅니다. 캠퍼스의 공동체는 4년을 주기로 변화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회의로, 불만으로 가득 찬 지체를 받아줄 수가 없습니다.” (복음과상황 11월호, 강보선 ‘선교단체는 교회와 다르다’)
강 보선 님은 ‘김용주님의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저의 공동체인 것 같기 때문’에 ‘이번에는 우리의 어떤 약점을 꼬집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글을 읽게’ 된다고 했다. 분명 강보선 님의 공동체가 내가 속한 공동체고, 나아가서 한국의 기독 공동체의 문제임에 분명하다. 강보선 님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공동체의 문제는 쓰리고 아프다. 좀더 나은 구조를 세우고, 보다 많은 학생들이 진리로 자유케 되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확증하되 그 안에서 다양성을 누리며 은사들을 발휘하는 공동체로 발전하며, 그 안의 개인들이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를 정말 간절히 원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의 수고로 하나님의 나라가 한 걸음 더 가까워 오기를 소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발 ‘떠나는 것이 서로에게 덕이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200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