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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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떠야했던 책](1) 분교음악회, 숲이 된 122개의 추억
예민 (지은이) | 샘터사 | 2003-09-22
예민의 분교음악회, 숲이된 122개의 추억. 예민이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열었던 음악회들의 기억들을 모았다.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 근데 왜 이 책이 안 뜬겨?

 

 


[아깝다! 떠야했던 책](2) 좋은 일은 언제 시작될까?
에이브러햄 J. 트워스키 | 미래사 | 2010-03-05
만화 피너츠를 좋아한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는 게 좋겠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통해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을 돌아보고 유쾌한 방법으로 변화를 권한다. 읽는 내내 찰리브라운 덕에 즐겁다.^^ (근데 개정판이 계속 나오고 가격도 올리는 걸 보면 나름 뜬 책 같음.)

 

 

[아깝다! 떠야했던 책](3)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지은이) | 돌베개 | 1996-09-12
신영복 교수의 대표작으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꼽으나 나는 개인적으로 그 책보다는 인지도가 적은 "나무야 나무야"를 더 좋아한다. 신영복 교수가 출소 후 국내를 돌아다니면서 적은 서간체 여행기이자 묵상집이다. 내게 지성이라 할 만한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적 목소리를 내시지 않는 게 여전히 불만이지만 이 책만으로도 신영복은 나의 영원한 선생이다.

 


[아깝다! 떠야했던 책](4) 존 콜트레인
마틴 스미스 | 책갈피 | 2004-07-05
국내에 존 콜트레인(재즈연주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이 책을 아는 사람은 거의 못 봤다. 어떤 인물을 다룰 때 그 사람의 내면의 고뇌, 즉 개인사를 넘어 시대를 조명하고 그 흐름속에서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가진 책이 좋다. 이 책은 존 콜트레인 개인을 통해 재즈의 역사와 인종차별에 저항한 민권 운동의 역사를 통찰하는 안목이 있다. 게다가 페이지수가 적기까지 하다!!

 


[아깝다! 떠야했던 책](5)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 
실벵 다르니 | 마튜 르 루 | 마고북스 | 2006-03-20
대학 졸업후 이른바 백면서생의 지식, 실천을 담보하지 않은 지식에 깊은 회의감이 들던 시절에 무릎을 치며 읽은 책. 당시에는 사회적 기업에 대한 개념도 낯설던 때에 두 청년의 여정(이라쓰고 개고생이라 읽는다)에 깊이 매료됨. '지속가능한 발전', 수익을 내면서 사회적 소명을 실천하는 대안기업가 80명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닥치고 일독!

 

 

*facebook 담벼락글 정리.

2012/02/08 22:36 2012/02/08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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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슬람. 이 석자를 읽으면 은연 중에 나는 '터번을 뒤집어쓰고 총구를 겨눈 테러리스트'가 떠오른다. 미디어 비평서들을 읽기 전까지는 사실 이런 부분에 대해 특별히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람보나 다이하드, 007 시리즈 등 대부분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무기밀매를 하고 미국의 주요도시에서 테러를 자행하는 모든 세력들은 하나같이 다 이슬람 출신이었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이슬람 사람들은 파티에서 점잖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나타나 총질을 해대는 이중인격자로 스크린에 나타나기 일쑤였고 이런 영화들에 길들여진 나는 자연스레 그런 인상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와는 반대로 한때 우리나라에는 거리를 지나가는 미국인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노자 교수의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한국인들은 지나가는 미국인들을 보면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면 미국인에게는 자기가 한국 문화나 생활을 위한 가이드를 해주겠다는 이른 바 '친구 거래'를 제안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도 유색인이 아니라 주인공인 백인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한다고 한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백인들 옆에서 함께 웃으며 대화하는 자신을 매순간 상상하다가도 스크린에서 남미, 혹은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의 사람들이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왠지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쉽게 타자화시킨다는 말이다. 이런걸 두고 '옥시덴탈리즘'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이 그렇다. 지구의 정반대편에 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역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술술 꿰고 있어도 동남아시아나 중동 지역의 역사나 문화, 국가들의 수도나 대통령 이름은 모르기 일쑤다. 어찌보면 유색인종으로서 그들이 우리와 더 가까울 텐데 정작 아프리카나 중동, 특히 이슬람 세력에 대한 무지, 나아가 반감이 국민 정서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느낀다. 물론 그 이면에는 무슬림에 대한 종교적인 적대감 또한 자리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허나 이러한 적대감도 따지고 보면 어느 정도의 '편견'을 내포하고 있음이 자명하다. 이쯤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감이 올 것이다. 그래,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무지하고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영화나 문화 컨텐츠로 인해 어느 정도의 편견마저 가지고 있으니 이슬람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헌데 그 편견 정화작업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러던 차에 이슬람에 대한 교과서격인 책이 나왔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기독교와 이슬람을 친절하게 비교하며 설명하는 책이.


2.
본서 <기독교와 이슬람 그 만남이 빚어낸 공존과 갈등>(세창출판사)의 저자 김동문은 중동 전문 기자로 불린다. 그는 요르단에 머물면서 <한겨레21>의 전문위원이면서 <미디어 오늘>과 <오마이뉴스>, < 뉴스앤조이> 등 온오프라인에서 중동전문기자로서 중동과 이슬람 바로 알리기 작업에 매달려왔고 최근에 귀국하여 본서를 출판했다. 그의 기사들을 간간이 접했던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2004년 김선일씨의 피랍사건 시기에 있었던 일이었다. 미디어오늘의 이수강 기자는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동문제 전문 자유기고가이자 기독교 선교사인 김동문씨는 당시 요르단에 있었다. 21일 미디어오늘과 칼럼 기고 건으로 통화를 했을 때, 김씨는 당시 한국 언론이 무차별로 쏟아내던 보도와 달리, 김선일씨는 5월31일에 피랍됐다는 등 자신의 취재 결과를 '오프 더 레코드'로 일러주었다...(중략)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취재한 '5월 31일 피랍'을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거듭 간곡하게 요청했다...(중략) "지금은 사람을 살리는 게 최우선이다. 피랍 시점 논란이 자칫 송환 협상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루가 지난 6월 22일 KBS <뉴스9>에 "5월 31일 피랍 주장"이 보도됐다. 국내에 있는 기자가 현지 교민 두 사람의 증언을 딴 리포트였다. 이 기사는 지난해 6월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이 보도에 대해 "김선일씨 피랍 의혹에 대한 최초의 문제제기"라면서 "이 사건에 관한 '유일한 특종'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고 말했다(기자협회보).

판단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말대로 본다면 김동문씨는 '유일한 특종'을 스스로 걷어찬 기자다. 기사를 발표할 지면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또한 김씨는 개인적으로 김선일씨와 대학 선후배 관계(한국외대 아랍어과)이자 지난해 2월 바그다드에서 만난 적도 있다고 했다. 보통 언론계에서 말하는 "얘기가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굳이 나서지 않았다. 이 에피소드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중동전문 자유기고가로 살아가는, 중동에서 기독교 선교사로 생활해온 그의 어떤 '자세'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2005년 6월 미디어 오늘, '있는 그대로 아랍과 이슬람을 보자')

그는 중동에서 기자로 활약했지만 한편으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나왔고 이른바 기독교계에서는 선교사로도 불린다. 하지만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아서인지 그간에는 도리어 기독교계에서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본서에서도 그는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중립'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일례로 그는 기독교와 달리 이슬람이 성직자가 없이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성직이 엄연히 존재하며 사례비(월급)도 받는다는 점을 언급하는가 하면 지하드(성전)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이슬람과 견주어 볼때 기독교도 십자군 전쟁과 같이 불의한 전쟁을 여러 차례 수행했으며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수만 명의 여성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인 기독교의 역사또한 공정하게 다룬다.


3.
물론 저자는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균형' 혹은 공정성을 유지함에 있어 나름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원칙에 준하여 두 종교를 평가하는 방법을 취했다. 이를테면 "자신의 언어로 된 경전을 갖고 그것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기회는 개인이나 집단의 종교생활에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특정 권력 집단의 전유물이 되곤했다. 기독교나 이슬람 세계 모두에 경전을 장악하려는 이들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종교 권력자들이 독백처럼 교리를 설파하는 것은 어떤 종교든 옳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켰고, 정교 분리 논쟁을 다루면서는 "정치와 종교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권력욕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권력욕을 감추기 위하여 수많은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고 지적하며 두 종교를 비교한다(물론 역사적으로 이슬람과 기독교 모두 이러한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이러한 원칙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기독교 정당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혜안을 주는 듯 하다).

또한 저자는 이슬람에 대한 오랜 편견들을 걷어내는 데에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이슬람 국가들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며 그들의 종교전통을 강요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허나 저자는 이슬람 세계가 우리의 생각처럼 단일 창구의 구심점이 없고 오히려 국가마다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이슬람법과 정신에 의해 국가를 통치한다고 선포한 나라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모리타니, 이란, 아프가니스탄, 예멘, 파키스탄 6개국에 불과하고 그 외에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타종교로 개종할 수 있는 나라도 있으며 대다수의 중동 국가들은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세속적 국가로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이슬람 하면 일부다처제의 나라라고 치부하나 실제 일부다처제는 10% 내외로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이라는 사실과, 흔히 여성의 가리개로 일컬어지는 '히잡'을 통해 여성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편견에 대해서는 최근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 - 더 많이 가리려는 추세와 현대적으로 개방하려는 형태 - 이 공존함도 설명해 준다(저자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는 '히잡'(가리개) 사용을 강제 규정하며 튀니지 정부는 비슷한 전통 복장인 '니깝' 착용을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본서의 가장 큰 묘미는 저자가 추구하는 현장 중심의 관점들이다. 허나 그는 거시적인 역사로서의 이슬람의 모습도 깊게 연구하면서 이와 더불어 실제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가서 함께 호흡하며 경험한 디테일을 적절하게 조화시킨다(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가히 '올 어바웃 이슬람' 혹은 현대 이슬람에 대한 교과서격의 책이라고 칭할 만 하다). 사실 이슬람에 대해 어느 정도 깊게 공부한 이들은 자신들이 공부한 거시적 역사 내용을 인용하고 재구성하여 얼마든지 대중의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글이나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 이슬람 국가들의 캠퍼스 풍경이 어떤지, 어떤 음식을 즐겨 먹는지, 연애는 어떻게 하는지, 물담배를 피는 이유는 무엇인지, 현재 이슬람은 현대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등을 서술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실제로 발품을 팔아 찾아다니고 이슬람 사람들과 대화하며 얻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들이 책의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일상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저자의 기지가 돋보이는 대목 또한 많다. 때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만드는 몇 가지의 사례만을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다.

"새로 생겨난 신종 서비스가 이른바 (사원의) 자리 잡아주기 서비스. "명당자리 팔아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사원은 늘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고 자리를 맡아주고 자릿세를 챙기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전화벨소리에 꾸란이 낭송되고 있다. 최근 제공되고 있는 이슬람 지역의 벨소리 서비스 때문이다."

"4-5년 전부터 몸의 선이 노출되는 꽉 조이는 옷을 입거나 아니면 아예 옆구리 터진 옷들을 입는 여학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질밥(겉옷)과 히잡 등으로 온 몸을 잘 감싼 여학생들의 수도 동일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캠퍼스) 커플족은 당연이 부러움의 대상이다. 짝없는 남학생들은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다. 하릴없이 애꿎은 담배만 불에 태우고 있다. 짝 없는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오가는 여학생들 감상에 정신을 잃고 있는 경우도 많다."

"(라마단 기간에) 해질녘을 30~40분 남겨둔 오후 5시경부터는 KFC나 맥도날드, 버거킹 등 패스트푸드 전문점은 음식을 주문하는 이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먹는 장사는 평소보다 30~40% 이상의 매상을 올리는 분위기다. 해가 지면 금식을 풀고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이다."


4.
최근 국내방송 <스타킹>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18세 소녀 "루비의 꿈"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기관총을 든 아랍 복장의 남성이 MC 강호동을 위협하는 장면 등을 내보내 이슬람 문화 비하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졌는데, 한류 열풍에 힘입어 이 방송이 중동 지역에서도 소비가 되었다는 점도 흥미롭고 이를 의식한 SBS에서 즉각적으로 이슬람어로 사과문을 발표했다는 점 또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물론 여전히 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처럼 이슬람을 떠올릴 때 터번을 쓰고 기관총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린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선 부분이 없지 않지만 사실 이슬람은 커피와 설탕, 맥주와 포도주를 유럽으로 소개한 원조이기도 하다. 또한 유대교, 기독교와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갈등과 공존을 모색해 온,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참 얼굴색 만큼이나 친숙한 종교이자 삶의 체계이다. 이러한 이슬람을 특정한 프레임에 국한하여 해석하거나 여전히 '테러리스트의 소굴', '악의 축'으로만 바라본다면 그건 총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정당한 처사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들이 상당하리라 여겨진다. 또한 그게 오랜 시간 이슬람에 거주하며 이슬람을 경험한 저자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가 책을 맺으면서 한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한국인들이 우리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슬람 세계 출신 이주자들을 선입견을 넘어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는다. '무슬림이니까...'라거나 '이슬람은...' 이런 식의 기계적이고 선험적인 잣대를 조심하기 바란다. 다수의 무슬림들이 무슬림을 대표하여 이곳에 있지 않다. 이슬람 전사로 우리 곁에 자리한 것도 아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또다른 인격체로 함께 하고 있다."
 
2011/11/28 01:46 2011/11/28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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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호 집사님. 안녕하셨는지요. 김용주입니다. 일전에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쓰셨을 때 뵌 이후로 처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번에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출판하셨더군요. 저도 본서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으로 본서를 읽고 크게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고 또한 동일하게 지적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공감하는 부분은 북미 복음주의의 신학적 가벼움입니다. 본서에서는 "마케팅에 물든"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된 기독교계의 소비자중심주의적인 신앙의 성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미국에 세차례 정도 짧게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미국의 한인교회와 로버트 슐러 목사의 수정교회를 보았고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실용주의적 사고와 노만 빈센트 필로 대변되는 "적극적 사고방식", 내적 치유와 자아 회복이 죄성과 복음을 대체하는 성향들을 보았습니다.
미국은 정말 상담과 심리치료의 천국이더군요. 저는 이러한 심리적 기재에 기댄 교회의 문제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물론 심리학 자체에 대한 평가에서는 옥 집사님과 차이가 있음을 이전에 출판된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느낄 수도 있었지요.

또한 저는 본서에서 지적하고 싶은 몇 가지의 주제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너무 부족한 관계로 글을 몇 번에 걸쳐 나눠 쓰려고 합니다. 제가 본서에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 중 첫번째 것은 교리와 교파에 관련된 것입니다. 앞서 강진용 님이 지적해 주셨기 때문에 그 글을 먼저 인용합니다.

"아마도 저자께서는 개혁주의(칼빈주의)의 입장에 있는 듯 보입니다.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웨슬리안 전통에서도 인간은 역시 전적 타락한 존재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선행은총에 의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이나 행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가졌다면 "웨슬리"가 영국사회에 회개를 선포할리 있겠습니까? 아마도 마케팅교회들이 가진 인간론은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수용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유주의자 역시 웨슬리나 알미니안을 따르는 것이 아니구요. 개혁주의 입장에서 간혹 펠라기우스와 웨슬리안-알미니안의 차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 듯 보입니다만, 이 사이에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냐 아니야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제 생각엔 웨슬리안-알미니안에서의 복음적 신인합동설과 개혁주의(칼빈주의)의 예정론의 차이는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특히 저는 칼빈주의와 구별되는 가톨릭, 성공회나 루터교, 웨슬레-알미니안 등의 교리적 차이에 의해 교회를 분리시키려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옥 집사님의 경우에는 교리의 수호를 위해 분리적인 태도를 취했던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입장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되나 저는 오히려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던 존 스토트 목사의 입장을 따르는 편입니다.존 스토트의 말년 저작인 <복음주의의 기본진리>에서 지적한 내용에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나는 이제 쓰려고 하는 글에서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구별되는 기독교 사상계(가톨릭, 자유주의, 복음주의)가 항상 상호 배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님을 잊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차이점과 더불어 합일점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지지하는 것과 절대 다수의 개신교인들이 종교개혁의 많은 진리들을 여전히 확증하고 있는 것에 대해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주의의 모든 핵심 진리가 복음주의만의 독특한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나는 분열을 거듭하는 복음주의의 경향에 대해 계속해서 깊이 염려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수많은 복음주의 '분파'에 대해 언급하며 '복음주의' 앞에 어떤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보수적, 자유적, 급진적 점진적, 개방적, 개혁파, 은사주의적, 포스트모던 등 그러한 예들은 많다.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이해를 선한 양심으로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를 복음주의자들로서 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헐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중략)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비록 세계교회협의회의 자유주의적인 방침과 종종 원칙없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교회 연합 운동에서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확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하는 자유를 주장하면서 분별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해 왔다."


결국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교리, 이를 테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 구원의 유일성, 성경의 권위, 성령의 주되심과 같은 핵심적인 교리에 있어 합의점에 도달하는 교회와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하나됨 안에서 충고와 책망 그리고 격려가 필요하겠지요. 제가 느끼기에 옥 집사님의 글에서는 그러한 하나됨 안에서의 책망과 건설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다소 분리주의적인 자세로 교회답지 않은 pseudo(사이비) 교회들을 칼빈주의 교리의 입장에서 분리시켜내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따라서 그러한 칼날로 작용하는 교리에 대한 불편함이 제 심정적 반감을 불러오는 듯 합니다. 물론 혹여, 제가 옥 집사님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제 독해의 문제일 수도 있으니 더 이야기해 볼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복음주의권 내부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본서에서 비판하고 있는 빌리 그레엄 목사로 대변되는 신복음주의 진영의 이들이 그렇습니다. 빌리 그레엄 목사도 그 분명한 한계와 많은 대형 집회 전도의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저는 분명 그 분이 20세기가 낳은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지의 편집장으로 있었던 필립 얀시와 씨 에스 루이스, 그리고 본서에 언급된 릭 워렌 목사와, 빌 하이벨즈 목사도 그렇습니다. 저도 이들에 대해 동일하게 비판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모습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종종 본서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신복음주의, 성공회, 가톨릭, 웨슬레주의자들과 분리되어야 함을 옥 집사님은 주장하시려는 듯이 읽혀집니다.

물론 분명하게 분리되어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명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서문에 보면 영국 복음주의 학생운동 역사 가운데 CICCU가 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었던 SCM으로부터 구분지어 나온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그 때에 구별되어 나온 이들의 수는 극히 소수였으나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유지했던 그들이 더 크게 부흥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분수령에 있어 옥 집사님은 칼빈주의로 대변되는 보수적 입장에 교리를 국한 시키는 듯 하며 저는 좀더 넓은 범주에서 은사주의자들이나, 개혁주의, 에큐메니칼, 가톨릭, 성공회, 감리교도와 급진적 복음주의자를 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연합 집단에서도 옥석을 가려야 함은 자명합니다. 신앙의 스펙트럼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옥 집사님의 입장에 제게는 구획의 측면에서 너무 좁게 잡으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혹은 칼빈주의를 정답, 정교리, 정교파로 확정짓고 나머지 교회들을 그 틀로 쳐내려는 듯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마케팅에 물든"의 잣대로 시작된 본서는 교파를 구분하면서 "오래된 복음주의" 대 "신복음주의" 혹은 그 외의 교회들(가톨릭, 웨슬레주의, 에큐메니칼 등)으로 확장시키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케팅에 물든"이라기 보다는 "교리에 차이를 보이는"으로 대체되는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나 신칼빈주의 교회 내에서도 "마케팅에 물든"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강하게 보이는 교회들이 많은데 이는 그 구획에서 논리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첫번째 제 생각은 이 정도까지 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다음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부흥과개혁사 홈페이지에 있는 부족한 기독교 토론방에 올린 글을 발췌한 것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http://rnrbook.com/
2011/11/27 18:32 2011/11/2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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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푸른숲

 

 

"정치를 이해하려면 결국 인간을 이해해야 하고 인간을 이해하려면 단일 학문으로는 안 된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팩트와 가치와 논리와 감성과 무의식과 맥락과 그가 속한 상황과 그 상황을 지배하는 프레임과 그로 인한 이해득실과 그 이해득실에 따른 공포와 욕망, 그 모두를 동시에 같은 크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섭해야 한다."
(김어준, '닥치고 정치')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김어준 저, 푸른숲 펴냄, 이하 닥정)를 읽었다. 최근 많은 이들이 '나는 꼼수다'와 '닥정'으로 난리다. 두 개 모두 해당 분야의 1위를 달리고 있는 요즘, 그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도 슬슬 많아지는 추세. '닥정'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책이었으나 여러 가지 이야기 해봐야 다른 서평들과 중복될 것 같아 나는 두 가지만 언급하려고 한다.

'레이어(layer)'라는 개념이 있다. 건축이나 CAD 분야, 지도 등등 여러 분야에 쓰이는 이 개념은 간단하게는 하나의 대상이 여러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예를 들면 하나의 지도나 도면에는 건물을 표시한 레이어, 배선배관, 등고선, 도로 등 하나의 물리적 공간에 대한 특정한 정보를 각각의 레이어로 표시하고 그 레이어들을 중첩하여 보관하는 일이 많다.

정치적 사안에도 다양한 레이어가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이성적 논의가 됐든, 사건에 있어서의 팩트가 됐든, 이권 다툼이 됐든 간에 하나의 정치적 사안에는 다양한 측면의 레이어가 중첩되어 있으며 그 레이어들은 하나의 사안을 통찰할 수 있는 큰 그림을 제시하지만, 그 큰 그림을 일반 대중이 접근하기 쉽지 않고 설령 그 전체의 레이어를 봤다 하더라도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레이어 가운데에는 '노이즈'라고 할 만한 사이비 레이어가 섞여 있기도 했다.

어떤 사안에 대해 그 문제의 핵심 레이어를 찾기까지 대중이 이해해야 하는 선지식이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다는 점. 그 사안에 대한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레이어를 걷어 내고 핵심 레이어를 찾아서 이해하는 과정을, 진보진영은 대중의 기호에 맞게 성실하게 나서서 해결해주지 못했다. 기존의 정보 전달 프레임을 유지하되 더더욱 어려운 방식으로 정보의 해독을 대중에게 요구한 것이다.

하루에 책 읽는 시간 30분을 내기도 빠듯한 나 같은 직장인에게 이런 문제는 본질이 된다. 물론 정치 기사나 책 읽을 시간은 없어도 커피 마시며 수다도 떨고 지름신이 강림하면 인터넷에서 두 시간 동안 물건을 고를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독에 중독된 탓에 영화도 보고 미드도 보고 축구, 야구 경기에 몰두하고 애들과 놀이동산 갈 시간도 있지만 정치에, 그 개별 사안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엄청난 기사 수집과 분석, 독서에 할애할 시간은 별로 없다. '그래, 나 그런 거에 몰두하기 피곤한 인생이고 정치에 무관심한 한심한 인생이다. 그냥 쉴 때는 좀 내버려 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를 시도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닥정'이란 불순한 책을 출간했다. 이 새로운 플랫폼의 창시자 김어준은 정보 전달 측면에서 기존의 고고한 스타일을 버렸고 이를 통해 그 핵심 레이어의 진입 장벽을 허물었다.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던 정치 현안들, 그 부정부패의 내용을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물론 '닥정'도 그렇고 '나꼼수'도 그렇고 모두 다 추정이다, 추정. 소설 같은 이야기다).

물리적으로 한 개인이 정치적 사안의 핵심 레이어를 찾아서 그것을 해독하는 데 투자해야 하는 시간은 건당 24시간 이상이리라는 게 내 판단이다. 미드 회당 1시간짜리를 24편을 보는 데 내가 투자해야 하는 시간은 족히 한 달이 걸린다. 그것도 미드가 매우 재밌어야 그렇게 시간을 내줄 수 있다. 상황이 이러니 직장인들이 정치 사안 하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한 달을 써야 한다면 누가 하겠나.

여기서 파생되는 유익이 바로 이 책의 두 번째 장점이 되겠다. 바로 '재미'다. 이 책의 부제는 '명랑 시민 정치 교본'이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비장함을 갖는 대신 '가능한 변화들'을 실행하기 위해 재미있는 플랫폼을 선택했다. 그것도 가장 유행하는 팟캐스트를 이용하는 세련됨을 보이면서 말이다(정작 자신은 스마트폰도 안 하고 SNS도 귀찮아하면서. 실로 대단한 통찰이다).

나꼼수 최장 녹음 시간은 3시간이 넘는다. 그런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이 책도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막힘이 없고, 인터뷰 형식의 글임에도 내용이 충실하다. 재미있고 풍성한 콘텐츠. 그것으로 승부하겠다는 김어준의 전략이 먹힌 거다.

이 책은 그간 진보 진영의 그 누구도 제대로 못해 온, 재미있고 풍성한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이미 상당한 점수를 따고 있다. 또한 서평의 처음에서 인용하였듯 정치적 사안의 다층적인 구조(팩트와 가치와 논리와 감성과 무의식과 맥락과 그가 속한 상황과 그 상황을 지배하는 프레임과 그로 인한 이해득실과 그 이해득실에 따른 공포와 욕망)를 통섭하려는 태도 또한 유의미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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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정치적인 견해에서 그의 입장과 다소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김어준 자신이 밝혔듯 본인이 '노빠'라는 점과 문재인을 대선 후보로 민다는 점, 한나라당과 여러 후보군에 대한 평가에 동의가 안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을 그보다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지 않는 한 대중들이 그런 입장을 제대로 따져 보게 될지 의문스럽다. 물론 모두가 나꼼수나 닥정처럼 글을 쓰고 말을 해야만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진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김어준을 까려면 기존의 난해하고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도덕적으로 훈계하는 듯한 어떤 정형화된 진보 진영의 스타일로는 쉽지 않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해보자, 쫄지 말자, 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기쁘게 한 표를 던지는 바이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입장에 있어 김어준과 다른 맥락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닥치'련다. 대신 그의 새로운 플랫폼 안에서 재밌게 즐기고 놀련다. 그 풍성한 향연에 한동안 그냥 취해 있으련다. 연말쯤 취기에서 깨어나도 충분하다. 씨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와 <뉴스앤조이>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2011/11/01 01:44 2011/11/01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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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이긴다>를 다 읽었다. 논쟁 지향적인 성향이 내재해 있어서 그런지 책 읽는 속도가 평소대비 두세배는 되었던 듯 하다. 다 읽고 보니 사실 얘기할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 개인적으로 기대보다는 (논쟁할만한) 내용 자체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랄까. 이 책은 천국, 지옥, 진노하는 하나님 이런 개념 때문에 교회의 문지방을 넘지 못했던 semi-christian에게 큰 울림을 줄 책이라 확신하지만 성경을 비교적 깊이있게 공부한 학자풍의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보수적 신학도들에게는 약간의 실망감을 줄 수도 있으리라 사료된다. (그런 의미로 나는 이 책에 대한 논쟁은 '깊이'보다는 '입장'에 기인하리라고 예상한다. 나또한 그런 부분에서 글을 쓰려고 한다.)

총평. 기존에 많은 이들이 이 책에서 생길 법한 논란거리들에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관계로 내가 굳이 동어반복의 글을 쓸 필요는 없겠다. 더 잘 쓸 자신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김영봉 목사님의 추천 서문과 의견이 일치한다. 교계의 배경 때문인지 내가 약간 더 보수적인(비판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특히 그가 신학자가 아니라 설교자라는 점, 이 책이 현대 기독교의 내세주의적 사고에 균형을 준다는 점, 그리고 지나치게 정죄하는 교회 분위기를 쇄신한다는 점에서 크게 김영봉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한다.

조금 불편한 부분은 그의 성경해석이 다소 가볍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과장된 해석이 보이면 그의 논리적 큰 흐름에 상관없이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아마도 이런 부분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은 '사랑이 절대 이기지 못한다'로 목소리 높일 것이다. 두번째로 불편한 부분은 신앙의 균형점인데 제자도로서의 예수의 희생, 헌신이 배제된 채 '나를 위한 하나님'이란 측면에서 사탕발림의 메시지만 풀어낸 게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도 든다. (곧 포이에마에서 복음주의진영의 비판서 '하나님이 이긴다'도 번역 출간한단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 내가 랍벨이 말하는 큰 형의 모습은 아닌가 되돌아보게 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내 신앙적 입장에서는 회심 이후의 고난에 대한 균형이 다소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최근 고인이 된 존 스토트 신부님이 '더' 좋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되는 각각의 이슈마다, 필요 이상으로 균형 잡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그의 성실함이 '더' 좋다.

마지막으로 그의 확신에 차서 말하는 '스타일'이다. 난 겸손한 사람이 좋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마음이 커지는 게 개인적으로도 참 우려스럽지만,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설교자들, 웅변가들에 일단 점수를 후하게 주지 못하는 게 요즘 내 솔직한 심정이다. 사족이긴 하나, 기독교 내부에서 자기 PR에 유능하고 자신과 반대성향의 집단에 지나치게 과격한 이들은 이제 부담스럽다. (사족으로, 예수님도 욕을 하셨다지만 예수에게 배울 게 욕밖에 없는 건 아니잖나. 욕의 제자도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조폭에게서도 그 제자도를 실현할 수 있잖나.) 좋은 방향성을 가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랍벨의 이런 확신에 차고 단호한 태도가 조금은 아쉽다. 특히 논란의 중심에서, 지옥의 존재 부정이나 보편적 구원론으로 치달을 수 있는 그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너무 '하이웨이 스타'처럼 내달리는 것 같아 간간이 혼자서 '워-워-'를 되내인다. 때때로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도올 김용옥을 떠올렸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 분노하며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것 같은 칼빈주의자들을 더 자주 그려보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이란 설교에 감동하며 회개하고 '이 벌레같은 날위해'라는 가사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대다수의 개혁주의 성도들에게 이 책은 치명적으로 불온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니! 성경에 명시한 지옥을 상상할 수 없다니. 불신자들의 구원에 대해 열린 태도라니. 김영봉 목사님에 따르면 실제로 이 책의 여파로 인해, 2011년 6월 15일, 남침례교 연차 회의에서는 '지옥에서의 영원하고도 의식적인 징벌을 믿는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고 한다!

내 주변에도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복음을 인간(편의를 위한) 복음으로 추락시켰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핵심교리를 버렸다는 비판을 할 '구름같이 허다한' '칼빈의 후예들'이 몇몇 떠오른다. 그들은 교리를 잣대로 랍벨의 책을 대충읽고 쓰레기통에 쳐넣을 것이다. 혹은 조목조목 오류를 짚어내면서 정통 교리를 사수하려는 정의감에 불타오를 것이다. 솔직히 나는 교회의 성도들, 그 개별적인 삶을 돌아보고 고민하지 않는 목사, 신학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가 더 걱정스럽다. 교리를 떠받들고 자기 성도는 '벌레'같이 보는 목회자가 두럽다. 의심에 찬 성도들을 이교도 취급하고 그들의 회의감을 제대로 해결해주지도 못하면서 교회에서 떨어져나가도 예정설이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설교하는 기성 교회 목사님들이 두렵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지, 생각보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짧게 마무리하자면, 그들보다 랍벨이 낫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끝)
2011/09/07 21:30 2011/09/0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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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집단의 종단연구를 통해 나의 노년을 상상하다!

이 책은 사실 좀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후반에도 언급하겠지만 이 책이 나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책 소개에 나오듯 '하버드대 공부벌레들의 인생보고서'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 책에 언급되는 종단연구의 대상은 하버드대생 뿐만 아니라 이너시티 집단(서민 남성) 및 터너 여성집단(여성 엘리트)를 포함한다. 하버드만을 강조하는 책 홍보 문구와 달리, 사실 저자는 이 세 부류 집단의 종단연구를 통해 행복한 노년에 대한 일반론 혹은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고 싶었던 셈이다.

 

둘째로 이 책의 소개글에 언급된 행복한 노년을 보장하는 조건들 가운데 으뜸은 ‘고난에 대처하는 자세(성숙한 방어기제)’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47세 무렵까지 형성돼 있는 인간관계라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인간관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인맥'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저자는 '하버드 졸업생들이 대학생활을 통해 일찍부터 정신사회적 경험을 쌓았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건강한 노년을 맞은 것은 아니었다'라고 일축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간관계라기보다는 '사회활동의 폭'(290쪽)이라고 구체화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나는 한달 가까이 이 책을 읽으며 내 삶과 노년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기회를 가졌다. 단지 이 책이 2004년에도 <10년 일찍 늙는 법 10년 늦게 늙는 법>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당시에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 의아할 따름이다. 이 책은 '국민 정신과의사' 이시형 박사의 감수와 홍보에 의해 재탄생한 듯 하다. 그러면서 소개문구들도 하버드나 어떤 구체적인 숫자와 지침들('47세 이전 인간관계'와 같이)을 골라 넣음으로써 독자의 호감도를 높인 것 같다.

 

책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은 이 정도였고... 대체로 나는 이 책을 의미있게 읽었다. 특히 72년에 걸쳐 성인의 발달과 성장에 관한 최장기 전향적 종단연구라는 부분에서 이 책은 이미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나이가 40세에 가까워 가면서 이런 책들이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사실 나는 내 나이 40세를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다. 대학입학, 서른, 아들을 낳는 일... 이런 것들은 자주 상상했지만, 혹은 차라리 죽음에 대해서는 묵상해 보았지만 50세, 60세, 70세... 노년에 대해서는 고민해본 적도 없고 그리 달갑지도 않았다. 어쩌면 재미없는 말년의 삶을 상상하는 게 끔찍하여 생각을 회피해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노년의 행복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약간은 '긍정의 힘'의 노인버전 같기도 했지만(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다루었다), 실제로 연구 결과 '성숙한 방어기제'가 노년의 행복 조건 중 비중이 높다. 오히려 상당히 비중이 높을 것 같던 부모의 학대, 기질, 사회적 유대관계와 같은 부분은 50대 이후가 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술담배, 안정적 결혼생활, 운동, 교육의 정도가 성공적인 노화를 예측하는 지표가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한편으로 치워둔 나의 노년에 대한 닫아두었던 마음을 조금은 열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보다 적극적으로 나의 노년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준비라는 게... 노후 준비 적금, 연금, 그런 류가 아니다. 그런 금전적인 부분의 준비가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지금 내가 생각하는 소신과 성품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한걸음 한걸음씩 노년을 위해 내딛어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이 책을 통해 얻어졌다. 사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나도 늙는 것이 두렵다. 주변에 본이 될만한 노년을 맞이한 분들이 적다는 것도 그 이유일 수 있겠다. 좋은 노인이 되기 위해 두려움을 걷어내고 좀더 솔직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봐야겠다. 그리고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

2011/06/27 21:26 2011/06/27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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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계에서 아끼는 글쟁이로는 단연 필립 얀시를 꼽는다. 그의 위트와 깊이 있는 묵상 그리고 항상 그를 에워싸고 있는 듯한, 대상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은 다른 저자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마력임에 분명하다. 필립 얀시와는 조금 다르지만 나는 교계의 또다른 글쟁이로 도널드 밀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마존 베스트셀러인 <재즈처럼 하나님은>을 출판한 이래 '이 바닥'에서 꽤 유명해진 사람이다.

이번에 국내에 번역된 <천년동안 백만마일>은 IVP에서 번역했을 정도니 그 인지도를 무시할 수 없으리라. 본서는 저자가 자신의 베스트셀러작인 <재즈처럼 하나님을>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을 받으면서부터 비롯된다. 처음에 나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런 그의 시도가 식상한 내용으로 끝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널드 밀러는 이미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3권의 책을 냈고, 이번엔 다시 그의 책 중 하나를 영화화하는 것으로 책을 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식상할거란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나는 또 그의 입담과 재치 속에 숨겨진 삶과 묵상의 깊이에 푹 빠졌다. 책을 읽다가 때론 사람들을 의식하지도 않고 크게 웃기도 했고 때론 그의 삶에 내 삶을 포개놓고 정직하게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도널드 밀러. 그는 책을 한 권 쓸 때마다 영혼도 성장하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 이번에도 그는 책을 썼다기 보다는 그의 삶 자체가 진일보하였음을 증명했다. 그는 그의 책을 통해 시종일관 자신의 깨달음이나 생각을 구체적인 일상과 삶으로 살아내는 일에 관심을 둔다. 나는 그런 그의 삶의 태도와 글쓰기의 방식이 좋다. 계속 그의 멋진 글들을 보게 되길 꿈꿔본다. (끝)
2011/02/21 21:24 2011/02/21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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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해야할 시장경제체제의 비판적 테제들

이미 2009년에 국내에서도 가장 영향력있는 저자이자 경제학자가 된 장하준 교수의 신작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이미 베스트셀러이 반열에 올랐다.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은 장 교수가 보다 일반인들을 겨냥하여 평이하고 단순하게 자신의 논점을 정리하고자 한 흔적이 역력하다. 따라서 장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 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장 교수의 다른 책, 이를테면 <사다리 걷어차기>나 <나쁜 사마리아인들>, <국가의 역할>같은 책들이 더 깊이가 있고 내용이 충실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대체로 그가 이전에 주장했던 내용들의 반복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데 장 교수는 이 책에서 좀더 명확하게 대안에 대해 8가지로 정리했다. 물론 이전 저작들 속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긴 하겠지만 이 책에서 지적한 23가지의 문제의식과 8가지의 대안들은 우리가 시장경제 체제 하의 세계 경제를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제 흐름을 지켜볼 때 기억할 중요한 테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일독을 권하며 아래는 그 8가지 대안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1. 이윤동기에 아무런 규제도 가하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를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시장은 세심한 규제와 조정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를 하되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 자유시장주의라는 고삐풀린 자본주의에 대한 냉전적인 사랑에서 눈을 떠 더 잘 규제된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

2. 인간의 합리성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는 인식위에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면 우리의 객관적 능력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한다.

3. 인간의 나쁜 면보다 좋은 면을 발휘하게 하는 경제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 공익을 위한 행동들에 정부 보조금 뿐만 아니라 보다 높은 사회적 중요도를 부여하여 더 많이 보상해야 한다.

4. 사람들이 '받아 마땅한' 만큼 보수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CEO들이 받는 천문학적 보수를 제한하기 위해 주식시장과 기업 지배 구조를 개혁해야 하고 능력 위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회의 평등 보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5. '물건만들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탈산업화 지식 사회는 신화에 불과하며 제조업은 지금도 경제에 필수적이며 제조업을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없다.

6.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이 더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금융부문은 속도를 낮춰야 한다.

7. 더 크고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정부의 역할은 철저히 재평가될 필요가 있으며 사실상 오늘날 부유해진 나라들은 모두 정부가 경제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개입 정책을 구사했다.

8. 세계 경제 시스템은 개발도상국들을 '불공평하게' 우대해야 한다. 세계 경제 시스템은 개발도상국가들이 자국에 적합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책공간'을 넓혀주는 방향으로 완전히 개편해야 한다. 특히 자국시장보호, 외국인 투자 규제, 지적 재산권 등에서 더 관대한 체제가 필요하다. (끝)
2011/01/11 21:21 2011/01/11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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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빵
백희나 (지은이) | 김향수 (사진) | 한솔수북(한솔교육) | 2004-10-01

비 오는 날 아침 작은 구름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아이들은 신기해서 엄마에게 구름을 가져다 주고 엄마는 작은 구름을 반죽해 빵을 굽는다. 잘 구워진 구름빵을 먹은 엄마와 아이들은 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른다. 2005년 볼로냐 국제도서전 픽션 부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뽑히게 한 작품.


아빠, 달님을 따 주세요 
원제 Papa, please get the moon for me
에릭 칼 (글) | 오정환 (옮긴이) | 더큰컴퍼니 | 2007-01-01

에릭 칼: 1929년 미국 뉴욕주의 시러큐스에서 태어났다. 6살때 독일로 이주해 슈투트가르트 조형미술대학을 졸업했다. 그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타임즈'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배고픈 애벌레>등의 어린이 책을 만들었다. '로라 잉걸스 와일더 상','볼로냐 아동 도서전 그래픽 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는 <1, 2, 3 동물원으로>, <빨간 여우야 안녕>, <아빠 해마 이야기> 등이 있다. 현재 서부 매사추세츠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이와사키 치히로 아트북 시리즈 세트 - 전6권 
이와사키 치히로 (지은이) | 프로메테우스 | 2003-07-30

이와사키 치히로의 대표작 6권을 세트로 묶었다.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치히로가 그림에 직접 글을 덧붙여 일본의 至光社를 통해 1년에 1권씩 발표했던 창작그림책들이며, 다양한 상상과 해석이 가능한, 요컨대 여백과 사색이 담긴 치히로의 작품 성격이 집약된 작품들이다.


까만 크레파스와 요술기차
원제 くろくんとふしぎなともだち (2004)
나카야 미와 (지은이) | 김난주 (옮긴이) | 웅진주니어 | 2005-02-25

위험해도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해야하는 유아의 심리를 고스란히 담았다.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아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꼭 해야한다. 그럴 때, 자칫하면 큰 사고가 일어나 큰 일이 날 수 있다는 것을 까망이와 고속열차를 통해 보여준다. 엄마의 잔소리보다 자칫하면 부러질뻔했던 까망이의 위기일발 순간이 훨씬 더 설득력을 가진다.


빨간 나무
원제 The Red Tree
숀 탠 (지은이) | 김경연 (옮긴이) | 풀빛 | 2002-10-21

<빨간 나무>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다. 매일 밤 잠이 들 때, 내일이 오지 않기를 빌어 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첫구절이 절절하게 이해된다. "때로는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점점 나빠지기만 합니다." 온통 어둠이 우리의 삶을 덮는 것 같지만, 그림 곳곳에 숨어있는 빨간 나뭇잎처럼 희망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에도, 아무도 날 이해하지 않아도, 조용히 찾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빨간 나뭇잎들이 지친 삶을 조용히 위로해 준다.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
원제 Ophelias Schattentheater
미하엘 엔데 (지은이) | 프리드리히 헤헬만(그림) | 문성원 (옮긴이) | 베틀북 | 2001-07-01

보통의 그림책에 비해 다소 많은 분량의 글이 들어가 있지만 미하엘 엔데의 이야기 솜씨 때문에 그리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에 빛과 어둠의 향연과도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페이지를 가득 뒤덮은 그림은 어슴푸레하게나마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빛과 어둠이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암시해 줄 것이다. - 이예린(2001-07-11)


로버트 사부다 팝업북 | 원제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로버트 사부다 (지은이) | 존 테니엘(그림) | 홍승수 (옮긴이) | 루이스 캐럴 | 넥서스 | 2004-10-25

팝업 북의 장인으로 이름이 높은 사부다는 1994년 자신의 최초의 팝업 북인 <크리스마스 알파벳>을 시작으로, <12일간의 크리스마스>, <오즈의 마법사>, <바다의 몬스터> 등을 작업했으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톰팃톳
원제 Tom Tit Tot (2006) | 네버랜드 세계 옛이야기 2
이상교 (글) | 스베틀라나 우슈코바(그림) | 시공주니어 | 2006-06-01

'네버래드 세계 옛이야기' 시리즈는 러시아, 영국, 독일 등 세계의 대표적인 옛이야기를 비롯하여 중국이나 노르웨이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재미있고 완성도 있고, 채록한 사람이 명확한 이야기를 선정하여 구성했다. 딱딱한 문어체 대신 부드러운 입말체를 사용하였고, 들려주는 사람이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단순한 반복 구조로 되어 있다.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 수상 작가, 대한민국 미술 대전 수상 작가, 각종 국제 미술대회 수상 작가 등 러시아를 비롯한 국내외 유명 화가들이 참여하여 이국적인 색채를 느낄 수 있다


100만 번 산 고양이
원제 100万回生きたねこ | 비룡소의 그림동화 83
사노 요코 (지은이) | 김난주 (옮긴이) | 비룡소 | 2002-10-14

죽음을 영원한 이별이나 슬픔으로 보지 않고, 해야할 일을 다 마치고 떠나는 평화로운 여행 내지는 안식으로 표현한 점이 독특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독자들은 평안한 미소를 짓게 된다. 일본 전국 학교 도서관 선정 도서. 「Horn Book」은 "불교의 환생과 서구풍의 낭만적인 사랑의 혼성곡. 수채화 기법으로 유머러스하게 고양이를 그려내고 있다"고 평했다. 지은이 사노 요코는 <아저씨 우산>, <하지만하지만 할머니>로 알려진 그림책 작가.

2010/12/09 21:15 2010/12/09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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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미국사 산책
: 한국 기독교가 미국사 산책에 동참하길 바라며


강준만 교수가 만만치 않은 분량의 미국사 책을 냈다. 물론 강 교수는 이미 4년 전에 <한국 현대사 산책>이라는 18권짜리 대작을 낸 바 있으며, 2년 뒤에 다시 10권의 <한국 근대사 산책>을 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실 한때 단행본과 월간 <인물과사상>으로 대한민국의 대표 논객이었던 그는 언제부턴가 쟁점이 되는 정치 이슈와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집필 활동에 자신의 내공을 쏟는 느낌이다. 어쨌거나 그의 신간은 항상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쓴 미국사는 어떤 책일까. 일단 분량부터가 만만치가 않다. 모두 15권으로 기획된 이 책은 이제까지 7권이 출판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간 역사학계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통합, '통섭'이라는 시각에서 미국사를 읽어 내려 한다. 그간 역사학자들이 전문성이라는 미명 아래 특정 주제나 특정 시대에 국한된 파편적인 내용을 좁고 깊게 파는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녹아 있다.

또한 그는 "친미·반미 이분법이 우리의 미국에 대한 이해를 망치고 있는 것 같다"며 미국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른바 '미국인도 몰랐던 미국 역사의 진실'이라는 소개글이 단순한 광고 카피 같지만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하워드 진이나 노엄 촘스키처럼 미국에 비판적인 진보 학자들의 저서들도 활용했지만,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저자들의 목소리도 가감 없이 전달하려 했으며 "어느 한쪽만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기존의 반(反)통합적 미국사와는 결별하고 미국의 명암을 동시에 살펴보려 했다"고 밝혔다.

나는 이 시리즈물을 읽기 시작하면서 기독인, 특별히 개신교, 장로교 배경의 기독인들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렇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크게 보면 기독인이 두 동강이 나 있다. 한편에서는 진보 진영을 지지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친미 집회를 하고 정치적 좌파들을 사단 취급한다. 또한 교파에 있어서도 폐쇄적이다. 루터나 칼뱅으로부터 비롯된 개신교의 역사, 교리에 대해서는 은혜로운 예화들 위주로 알려져 있으며, 개신교의 악행에 대해선 함구하기 일쑤다. 반대로(최근에 많이 소개되긴 했지만) 아나뱁티스트나 퀘이커 교도와 같은 평화주의적인 기독교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적고 때때로 그들을 이단시하고 정죄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몇 부분만 나누어 보자. 본서에서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불려지는 루터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들이 자주 언급되는데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루터는 농민 반란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외형과 의식에서 가톨릭 예배의 색체와 허식의 많은 부분을 유지하는 등 보수적 개혁주의 노선을 걸었다. 1525년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이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셨다'고 부르짖자 루터는 귀족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폭도를 죽이는 사람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 따라서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비밀리에 또는 공공연히 때려 죽이고, 목 졸라 죽이고, 찔러 죽여야 한다. …… 만일 여러분이 이런 투쟁에서 죽는다면 여러분은 진정 축복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보다 숭고하게 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46쪽)

대체로 장로교에서는 루터가 가톨릭을 극복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는 편이지만 <기독교 강요>를 집필한 장 칼뱅에 대해서는 그 입장이 다르다. 한국 교계의 칼뱅 숭배는 바이블 수준이다. 물론 강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 준다.

"미겔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와 유아 세례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불타는 장작 더미 위에서 그가 쓴 책들과 함께 불타 사라졌던 장면을 보자. …… 세르베투스는 말짱한 정신으로 서서히 불에 그을리면서 생살이 타는 고통을 오랜 시간 느끼며 죽어 가야 했다. 이 극악한 형벌의 이유는 오직 하나, 칼뱅과 다른 성서해석을 책으로 낸 행위뿐이었다. …… 칼뱅은 다음 일요일 검은 수도복을 입고 강단에 서서 그 화형은 위대하고도 꼭 필요한 일이며 정당한 일이었다고 찬양했다.(56쪽) …… 칼뱅의 예정설에 반대 발언을 하면 화형에 처해졌다. 술에 취해 칼뱅을 욕한 어떤 출판업자는 불타는 쇠꼬챙이로 혀를 찔린 다음 도시에서 추방되었으며 칼뱅을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처벌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58쪽) …… 일찍이 칼뱅은 '여성으로 하여금 복종하는 것에 만족하게 하라. 그리고 여성이 한층 우월한 성보다 열등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라'고 주장했으며, 퓨리턴은 이 원리를 따랐다. (170쪽)"

특히 청교도들은 근면하고 금욕적인 모습으로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종교라는 미명 아래 많은 악행도 일삼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녀사냥'이라 할 수 있겠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유럽 전역에서 마녀 사냥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는 1585년부터 1635년 사이의 약 50년 동안이었으며 마녀사냥으로 처형된 희생자의 수에 대해선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900만 명으로 역사가들마다 견해가 다양하다. (188쪽) …… 마녀사냥꾼의 주요 마녀 감별법은 용의자를 물에 던지는 것이었다. 마녀 용의자의 팔다리를 묶고 담요에 말아 연못이나 강에 던져 가라앉으면 가족에게 무죄라고 위로하면 그만이었고 물에 뜨면 마녀라는 증거이므로 화형에 처해졌다. (192쪽) …… 고발된 마녀들은 대부분 중년 여자들로 자식이 없는 과부였다. 사회적 신분이 낮고 가정에 문제가 있고 다른 죄가 있다고 자주 고발당하고 이웃들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퓨리턴 규범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 게 문제였다. (196쪽)"

이뿐이랴. 미국 역사에 있어 청교도의 아메리카 이주와 독립 혁명은 역사책과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자주 미화되었고 불행히도 우리는 그것을 비판 없이 흡수하곤 했다. 저자는 청교도들이 신대륙에서 인디언에게 행한 야만적 행동들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백인이 인디언을 매우 잔혹하게 공격한 것은 원주민에 대한 퓨리턴의 태도에 기인하였다. …… '피쿼드 전쟁'이라 알려진 이 전쟁에서 백인들은 인디언 주민 600명을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성인 남자들은 모두 살해했는데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훗날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는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그러나 승리하는 데 있어 이것은 달콤한 희생처럼 보였는지,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이런 놀라운 일을 하신 신을 찬양하였다'고 썼다." (118~120쪽)

강 교수는 루터교나 장로교 등 종교 개혁 이후 우파에 해당하는 주류 개신교의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주류로부터 핍박을 받은 퀘이커 교도들과 같은 신자들이 역사적으로 볼 때 인종 차별의 극복이나 평화주의 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는 퓨리턴과는 달리 완전한 남녀평등을 지향했으며, 성과 계급도 구분하지 않았다. 교회 건물이나 행정 기구도 없고 집회소만 있을 뿐이었다. 월급을 받는 목사도 없었으며 예배를 볼 때엔 성령에 의해 감동받은 사람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했다. 폭스는 성서의 계명 '살인하지 말라'를 원뜻 그대로 취해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퀘이커 교도들은 철저한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찰스 2세 치하에서 퀘이커 교도 3000명이 투옥되는 등 영국에선 박해를 받았기에 이들은 아메리카로 이주해 자신들만의 식민지를 원했으나 특허장을 얻을 만한 영향력이 없었다. (170쪽) …… 실제로 퀘이커 교도의 인도주의는 인디언에 대한 양심적인 대우와 흑인 노예에 대한 선구적인 반대로 나타났다. 이미 1657년에 일부 퀘이커 교도들은 기독교의 정신과 노예 제도의 상응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 (174쪽)

이 책을 읽다 보면 믿음의 선조들이 남긴 발자취에 때론 당혹스러워서 마음 한편이 쓰리기까지 하다. 이미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의 위상이 바닥임에 분명한데 이 책을 통해 한국 기독교만 문제가 아니라 청교도와 개신교의 역사에서부터 기독인이 저지른 악행들이 문제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도 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의 역사도 되짚어 볼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전히 한국교회에서는 이단 시비를 통해 멀쩡한 목사를 매장시키려 들기도 하며 영적인 세계를 빌미로 마녀사냥에 버금가는 폭력을 일삼기도 하지 않은가. 특히, 미국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들로 인해 한국교회 자체도 하나의 몸 된 지체가 되지 못하지 않은가. 강 교수의 모든 논지를 긍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적어 나가는 미국사 산책의 여정에서 한국교회도 미국에 대한, 그리고 그 영향력 아래 있는 개신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지평을 넓혀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
2010/07/14 21:06 2010/07/14 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