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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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복음주의자라면 이 책은 바이블이다!

소저너스라는 공동체와 잡지로 유명한 짐 월리스의 본서는 IVP 클래식 시리즈에 포함될만큼 깊이와 넓이를 두루 갖춘 책이다. 초판인 1981년을 개정하여 9/11테러와 관련된 내용이 추가되었고 냉전 체계가 해체됨에 따라 컨텍스트를 수정했다. 이 책은 서문에서 밝히듯이 신앙인의 두 부류를 자극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나 자유주의자 그 누구도 시대를 향한 회심의 의미를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두 운동 모두 역사적으로 적실한 제자도에 대한 이해 없이 허둥댄다. 복음주의자들은 전도에는 강하지만 사회참여에는 약하고 또 자유주의자들은 그 반대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을 수 있다. 만일 두 그룹이 각각 빵을 반쪽씩 가지고 있다면 해결책은 반쪽짜리 두 빵을 한데 합하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둘 다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풀로 붙여 하나를 만드는 식의 해결은 복음의 본질적 통일성을 타협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원래 메시지에 든든히 서 있는 그런 신앙이 더욱더 필요하다."

본서에서 짐 월리스는 그러한 신앙의 본질을 회심 사건에서 찾는다. 운동가로서는 구별되게 그의 행동의 근원에는 말씀에 탄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본서는 복음주의자들이 그렇게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양날개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함을 환기시킨다.

그는 회심을 역사적으로 구체적이며 성경 내러티브 가운데에서 찾을 것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개인의 영적인 전환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 회심을 정의할 것을 지적하며 개인의 소유욕과 행복에 영합한 현대 미국적인 기독교에 일침을 가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지 못한 현대 복음주의자들을 비판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정 수단이었던 희년 제도를 상기시키고,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가난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고 회심의 외적 척도로 그들을 향한 행동의 표출이 일어남을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회심'을 통해 이뤄진 세상과는 구별된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의 유일성에 대해 그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분량면에서는 많지 않은 그의 글은 충격적이리만큼 직설적이고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이미 많은 이들이 사회참여, 구제, 신앙의 열매, 행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해왔다. 하지만 그는 평생 그 길을 걸어왔고 또한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그 걸음의 이면에는 '회심'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본적인 신앙적 기초가 탄탄함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이 책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자주 말하는 '회심'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복구시킨 귀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이 복음주의자라면 이 책은 당신에게 바이블이 될 것이다. (끝)
2008/12/15 19:17 2008/12/15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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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시를 쓰라고 하면 나는 대체로 반공적인 내용의 소재로 글을 쓰거나 흔히 말하는 '바른 소리'나 '착한 척'하는 시를 쓰거나 그것도 아니면 의성어, 의태어로 뒤범벅이 된 시를 쓰곤 했다. 사실 선생님들도 그런 시들을 좋아해서 주로 모범생 스타일의 동시들에 상을 주곤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시들은 대부분 아이들이 어른스럽게 흉내를 낸 모조적 시일 뿐,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정서를 전혀 대변하고 있지 못했다. 어린시절 일기장이나 시집들을 펼쳐보면 동심으로 대변되는 그 시절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지 못한 글들이 많아 못내 아쉽다.

서론이 길었다. 이 책은 아이들이 쓴 동시들을, 마주이야기 교육연구소의 소장인 박문희 선생이 엮었고 어린이 문학, 글쓰기로 평생을 헌신한 이오덕 선생이 정리를 한 책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지은 시들에 그림도 더했다.

단적으로 말해 이 책은 훌륭하다. 내 어린 시절에 펼쳐보이지 못한 동심의 세계가 어른들의 잣대나 필터같은 것들에 걸러지지 않은 채로 잘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마음 속에 정리가 된다. 그렇지, 아이들은 아이들 답게 생각하고 표현하고 글쓰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동심을 회상하고 웃으며 자유롭게 과거를 돌아볼 수 있다.

아이들의 성글은 생각과 그림들을 어른의 잣대로 '순화'시키고 틀에 규정짓는 것은 동심에 대한 폭력이고 상상력에 대한 거세일 수 있다. 자신의 눈으로 아이들을 규정하고 과도하게 공부를 시키고 논술을 가르쳐서 훌륭한 어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오히려 꼭 읽어야 할 책이다.
2008/09/02 19:15 2008/09/02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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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진보지식인 하워드 진이 25년 전에 쓴 <미국 민중사,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의 개정판이자 젊은 세대를 위해 새롭게 수정한 것이다. 하워드 진은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살아있는 진보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본서에서는 미국 역사의 어두운 면, 즉 원주민 학살, 노예제도와 노사문제, 여성 인권 등에서부터 최근 이라크 전쟁까지의 '불편한 진실'들을 가감없이 서술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콜럼버스와 링컨 등과 같은 영웅들의 실제 상황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계기를 허락한다.

나는 미국인 대다수가 하워드 진을 불편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국민들은 대체로 성실하고 선하며 정치에 둔감하다. 근면하고 보수적인 시민일수록 공화당을 옹호하며 악행을 저질렀다 해도 대통령을 비꼬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을 싫어한다. 이 책을 내면서도 하워드 진은 많은 부정적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도 책의 서문에 언급했다. 그 내용을 소개함으로 책 소개를 대신할까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나는 이런 질문을 받아왔다. "당신은 다른 보편적인 미국 역사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당신의 역사 서술이 젊은 세대에게 적합하다고 보십니까? 그들이 현 사회에 대해서 환멸감을 품게 되진 않을까요? (중략)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인디언 학살, 노동자에 대한 착취, 인디언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미국의 무자비한 팽창정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비애국적이지 않습니까?" 나는 어째서 사람들이 어른들은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들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반면 젊은이와 아이들은 그런 걸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젊은 독자들이 조국의 정책에 대해 정직하게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다고 여기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그렇다 문제는 정직함이다.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정직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 조국의 정책에 대해 평가하는 것도 그와 같아야 한다." (본서, 11-12쪽)
2008/05/08 19:03 2008/05/0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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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교회 생활이 오래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교회 문화에 익숙하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밀양’은 솔직히 불편한 영화였다. 개봉 첫 주에 아내와 함께 달려가서 본 이창동 감독의 신작은 앉아 있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단지 ‘교회’를 말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은 냉소적인 시각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으로 교회를 보여줬고 그 객관적인 잣대가 오히려 ‘교회 안’의 나를 뒤흔들었다. 극중 신애와 약국 김집사가 특히 내겐 불편한 인물이었다. 아마 내 신앙의 여정에 많지는 않아도 몇몇 ‘신애’가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김집사’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밀양’이 개봉된 이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썼다. 교계에서도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와싱톤한인교회의 김영봉 목사도 그간의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잠시 미룬 채, 이 영화를 놓고 4주간 동안 “영화관에 가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그 내용을 보충하여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한국 교회 이야기, 그리고 숨어계신 하나님, ‘비밀 햇볕’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神觀)를 풀어나간다.

먼저 저자는 ‘밀양’이라는 영화가 ‘한국 교회에 대한 뼈아픈 고발’이라고 고백한다. 특히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 <벌레 이야기>에서 이청준씨가 ‘값싼 용서’를 비판하고 싶었던 점에 집중하며, 진정한 용서는 당사자의 회개와 보상, 그리고 개혁으로 이어져야 함을 지적한다. 또한 신애의 주변에 있던 교인들을 통해 한국 교회 문화에 편만한 ‘조급성’과 ‘피상성’을 직시하며 기독교인들의 친절하게 포장한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당신은 멸망할 사람이라는 전제’가 오만한 모습으로 깊게 배어 있음을 비판한다. 저자는 하나님을–한국교회의 선전과는 달리-비밀 햇볕처럼 ‘온화하게, 따뜻하게, 드러나지 않게 차분하게,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하게,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활동하시기를 더 좋아하는 분’으로, 고난에 처한 자녀들이 그것을 회피하게 만드는 위약(僞藥)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 고난의 현실을 끌어안고 당신과 함께 그 고난을 변모시키기를 원하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과잉친절과 피상적인 모습으로 신애에게 다가간 약국 김집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상처 입고 방황하는 신애가 현실을 인정하기까지 그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고 함께해 준 종찬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인다.

책을 놓은 지금도 한 대목이 머리 속을 맴돈다.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김 집사의 말은 진실에 가깝습니다. 다만 고난을 끌어안고 하나님과 함께 그 고난을 변모시키고 난 후에만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의 마음에 못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제발, 제발, 제발, 아픔을 만난 사람에게 “다 주님의 뜻이야”라고 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실 책을 읽는 도중, 나를 신애에, 종찬에, 그리고 저자에 대입시키기는 쉬웠다. 하지만 ‘밀양’을 볼 때의 불편한 심기처럼 적어도 물리적 교회 안에서, 직장에서, 삶의 터전에서의 나는 ‘김집사’에 가까울 때가 많다. ‘형제’, ‘자매’, ‘하나님의 사랑’, ‘낮아짐’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의 피상성과 조급성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 문화에 젖은 내 안의 ‘김집사’가 이 책을 읽고 변화되기를 기도해 본다.(끝)

*IVP BOOK NEWS 2008년 5/6월호 기고글.

2008/05/01 01:40 2008/05/01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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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만 더"
처음 이 제목을 보았을 때 나는 스크루지가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떠올렸다.
혹은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어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까.
어쨌거나 미치 엘봄의 책은 항상 기대 이상일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이 책은 죽음 문턱까지 갔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 특히 어머니, 그리고 깨어진 가정의 이야기이다.
누구나 이 책의 주인공과 똑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 있었던 배경들을 직접적으로 겪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가 성장기에 겪었던 아픔과 잘못된 선택,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부모의 모습들.. 그로 인한 오래된
좌절의 여정 등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왜 그랬지? 난 왜 그랬을까?'라며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 나도 알고는 있었다.
살면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 일들이 있었고 항상 그럴 때마다
알면서도 실수처럼 바보같은 선택을 했던  내모습이 있었다.
그로 인해 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줬던 기억들이 많이 났다.

아니, 난 '돌이킬 수 없는'이라고 생각해 왔던 듯 하다.
하지만 미치 엘봄의 책들은 '돌이킬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의 책에서 너무 늦은 일은 없다.
이제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면
이제 그들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사랑을 주고 사랑받는 관계가 될 것을 이야기한다.
그의 영원한 선생 '모리'의 말처럼 "사랑은 언제나 모든 것을 이긴다."
2007/12/24 18:41 2007/12/24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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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처음 미술관을 갔을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낯설음과 고요함. 그리고 큰 액자 속에 있는 그림들은
무언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대답이라도 하려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계속 찾아갔다.
현란한 색깔과 선, 그리고 질감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그림은
그 첫 만남에서 그런 방식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림들은  관찰의 대상이었고, 소통을 원하는 관계의 대상이었다.

그간 <남자 vs 남자>, <사람 vs 사람> 등을 저술했고
한겨레와 같은 매체에도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는 그녀.
<젊은 날의 깨달음>을 통해 그녀의 인생의 단면을 훔쳐본 적이 있는
정혜신 선생님의 신간 <마음 미술관>이 나왔다.

전용성 화백의 그림에 자신의 글로 한 장 한 장 곱게 채워진
이 책은 깔끔하고 밝은 느낌과는 다르게 그 글과 그림으로 활자화된
한 장을 넘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마음 미술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는 또한번 초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미술관으 느낌 그대로를 이 책에서 받았다.
그림을 한참을 '주시하다가' 정혜신 선생의 글을 읽고는
다시 그림을 한참을 '읽는다'. 그리고 멍한 채로 시야를 어둡게 하여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본다.

이 책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하나의 묵상집이다.
하지만 무겁지 않다.
책을 읽는 동안에 사뭇 진지해질 수 있는 순간에
정혜신 선생의 위트나 익숙한 상황, 영화, 시, 드라마들을 언급할 때면
나도 모르게 접혔던 미간이 웃고 있을 때도 있었다.
너무 급하게 읽지 않고 한 자 한 자, 한 그림 한 그림 넉넉한 마음으로
읽는다면 이 책은 읽는 이들의 내면에 하나의 보양식이 될 것이다.

2007/12/22 18:39 2007/12/2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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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좀더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옥집사님의 3부작은 심리학과 마케팅,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로 대변되는 것들에 기독교의 본질이 많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케팅은 가치중립적인 방법이라는 느낌을 어느 정도는 받을 수 있으나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마케팅적 요소는 분명 그 자체만으로도 악하게 치부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전 저작에서 심리학은 기독교에 강한 영향력을 보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심리학 자체가 학문의 범주에 속할 수 없을 정도로 사이비 과학에 가깝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특히 소비자중심주의로 대변되는 현대 교회의 흐름에 대한 강한 비판과 문제 의식을 가지고 시작된 본 연작들은 과거 청교도 신앙과 칼빈주의로 대변되는 신앙의 성향으로 교회를 회복해야 할 것이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이에대해 저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지적했고, 또한 반면 제 개인적으로는 이 두 책에 대한 긍정적 요소들에 대해 많이 동의하고 있다는 것도 이야기드린 바 있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소비자중심주의, 인간적인 방법, 현대 사상과 같은 류의 문제들에 있어서 옥집사님이 기독교와 극단적 대립구도로 이 '묶음들'을 설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한 것들을 통칭하여 '문화', 혹은 '세상'이라고 정의한다면 결국 이 문제는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기본 전제의 문제로 환원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러한 '기독교와 세상의 문제'는 리차드 니버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에서 한 다섯 가지의 범주로 그 입장을 구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니버는 기독교와 문화,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를 1. 대립 2. 역설 3. 조화 4. 종합 5. 변혁 모델로 그 범주를 나눈 후 변혁 모델로서의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를 나머지 4개의 모델에 비해 가장 설득력 있는 모델로 소개하였습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신칼빈주의자들과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를테면 헤르만 도예빌트와 알버트 월터스가 여기에 속합니다)에게 이 모델은 기독교 안에서 아주 유효한 모델임을 입증하였고 또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이 모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기독교는 문화를 적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변혁시킬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적할 것은 다른 대립 모델이나 종합 모델과 같은 것들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문화와 기독교의 관계 설정에 있어 개혁 모델이 가장 효과적이며 타당해 보인다는 것이지요.

옥집사님의 글을 차근차근 읽어보면 지속적으로 언급했듯이 각론적인 내용들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100% 지지를 나타낼 만큼 속이 후련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특히 지난 번 저작에서 조엘 오스틴의 사례라거나 이번 책에서 새들백교회, 윌로우크릭 교회의 사례들을 분석한 것은 참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사례들을 비판하는 틀로 작용하는 보다 근본적인 잣대, 즉 세계관에 있어서 옥집사님은 심리학,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현대 사상, 그리고 인간 중심적인 마케팅적 요소, 이후에 쓰게 될 엔터테인먼트와 같은 문화적 요소들을 기독교와 대립구도로 끌고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에 어떤 순수하지 못한 요소들이 섞이는 것 자체를 불편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복음은 그 당대의 문화와 소통했고 그 안에서 마치 밀가루에 섞인 누룩처럼 어떤 변혁적 요소로 작용해 왔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도 복음의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전달하는데에만 그 사역을 제한한 것이 아니라 아픈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시며 그들의 필요에 민감히 반응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한 단순한 '떡밥' 같은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보이기 위함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도래하는 그 분의 나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의 나라인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피조물들이 온전히 회복되어 그 피조물들을 온전한 방법으로 누리는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옥집사님이 '물든'이란 표현을 쓴 것에 크게 동의했습니다. 복음과 세상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 그 복음과 세상의 위치가 뒤바뀐 것이 현대 기독교의 비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적 요소가 교회에 들어오면서 복음의 본질을 마치 세상적인 것으로 채우는 것 자체에 대한 것이 '...에 물든"이란 표현으로 대변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케팅이나 현대 사상, 심리학 자체는 기독교에 반하는 요소들이 있지만 또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정도 효과적인, 그리고 변혁의 필요성이 있는 요소임을 전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마케팅적 요소자체를 뿌리 뽑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암송대회를 해서 상품을 주는 행위, 새벽기도회에서 성도들의 필요들이 적힌 기도제목을 받아서 그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행위, 예배에 현대적인 기술이나 성도들이 보다 예배에 활력을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을 적용하는 행위, 상담이나 심리학적 방법들을 가지고 성도들을 돕는 행위는 제 생각으로 그 자체가 악하다거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에 복음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가려지며 그것들로 인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경의 권위, 구원의 유일성, 성령의 사역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복음이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복음을 물들이는 것이 현대 교회의 비극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이유로 옥집사님의 책에 큰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완전히 동의하기에 옥집사님의 책은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몇몇 요소들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각론들을 감싸고 있는 전제들에 있어 때로는 치밀해보이지 않으며 때로는 제 신앙과 배치되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합니다. 혹은 제가 독해력 부족으로 혹은 책을 세심하게 읽지 않아 생기는 편견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옥집사님 같은 분들이 한국교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또한 제 생각에 대해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봐주시고 문제가 되는 부분들은 때로는 혹독하게 비평해주셔도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저나 옥집사님의 견해들은 보완 되며, 복음은 더 순수해지고 빛을 발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샬롬.
2007/11/27 18:36 2007/11/2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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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옥 집사님이 본서에서 언급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입니다. 본서에서 옥 집사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를 반기독교적인 사상으로 다원주의적인 사고로 나아가게 만드는 주범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이제 절대 진리는 없고 모두가 상대적인 관점으로만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게 되어 어떤 문제의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잣대를 잃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절대 진리, 즉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믿는 것이므로 기독교와 포스트모더니즘은 궁극적으로 양립할 수 없고 그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반기독교적이자 사탄적인 사상으로 둔갑합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면 그 입장이 근본주의적인 성향으로 치닫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기독교출판을 전제로 하였다 하더라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의 폭이 상당히 좁게 느껴지며 이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연구와 설명이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면서 관련된 사상가나 문헌이 거의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러한 생각을 굳히게 만드는 요소가 됩니다.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할 때 언급되는 대표적인 학자들 이를테면, 니체와 하이데거로 비롯되어 리오타르와 데리다, 푸코와 같은 이들의 관점에 대한 문제 의식이 없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 사상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된 구조주의 이후의 후기구조주의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리쾨르 같은 학자들의 간략한 이해가 동반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성중심주의, 형이상학의 극복과 같은 주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전/후기 사상들도 어느 정도는 섭렵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런 많은 사상가들과 학문적 배경들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설명드리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를 쓸 때 이미 그 사상적 복잡함 속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히 영화 몇 편과 근본주의적인 신앙 서적에서처럼 단순하게 접근하기에는 그 깊이와 넓이면에서 상당한 격차가 존재합니다. 또한 제 생각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신앙인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긍정적 요소들이 존재하며 그러한 이해없이 무작정 상대주의적이며 다원주의적이고 사탄적인 사상으로 치부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모더니즘의 세 축은 과학주의, 경험주의, 그리고 합리주의로 대변됩니다. 이러한 소위 계몽주의적인 접근이 모든 학문을 객관적인 잣대, 절대 진리의 추구, 역사 진보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며 이 사상의 중심인 서구인들의 자신감에 그 사상적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진보, 계몽, 이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의 상실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학문적 영역에서 사이비학문처럼 보이는 형이상학, 신학과 같은 것들을 학문의 구획에서 제거하려는 노력들이 오히려 수포로 돌아가고 학문, 특히 과학과 같은 객관적 진리 영역으로 치부되던 학문, 사상들에 있어서도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됩니다. 또한 서구중심적이었던 서양인들은 자문화 우월주의적인 생각으로 제3세계에 제국주의적인 침략과 교화(?)를 일삼던 것에 대해 반성하고 상대주의적인 관점에서 동양 문화와 사상을 흡수하게 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과 성찰, 완성 혹은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반기독교적인 요소는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서구중심적인 종교라는 이유에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절대 진리의 부정 역시 단순히 절대 신의 존재를 반대한다는 단순한 도식 보다는 그간에 이루어진 '구조'에 대한 성찰, 이성중심주의의 타파, 거대담론의 해체, 절대적 판단자로서의 이성의 한계 인식, '주체'의 죽음과 같은 배경 속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접근은 모더니즘과 계몽주의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타당하며 또한 기독교인들도 충분히 섭렵하고 이해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면에는 기독교가 지나치게 '모더니즘의 옷'을 걸치고 있다는 비판적 성찰에도 기인합니다.

물론 상대주의적인 관점, 서양 종교이자 절대 종교로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 진리에 대한 다원주의적인 시각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 속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할 요소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항상 어떠한 문제나 사상, 사물의 존재나 발생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현상만으로 단정짓고 그것을 자신의, 이를테면 우리에게는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로 난도질하는 접근에 대해 경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구별 자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며 결국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와 기독교에 대해 설명한 후 근대 후기 사회에서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접근을 보여 줍니다. 제 생각에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접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근본에는 세상과 세상의 사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지적하고 싶은 글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옥 집사님의 글에서는 복음과 비교하자면 현대 사상과 문화, 그리고 현대적인 방식들이 얼마나 가치가 없는가에 대한 방향으로 글이 전개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가 당대 사상이나 문화, 세속적 방식과 대립적인 요소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전개 방향이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이고 개혁주의에 반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감이 듭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글에서 설명을 좀더 하겠습니다.
2007/11/27 18:34 2007/11/27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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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부 중 헨리 나우웬이란 사람의 <상처입은 치유자>란 책이 있다.
그 책의 요지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상처를 입은 사람만이 타인의 상처를 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상처를 싸매면서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고 다가가서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서에서 저자는 자신에게 있었던 고통스러웠던 과거들에 대해 적나라한 서술을 아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손자이자 자폐증세를 보이는 샘에게 그의 인생에 도움을 주고자
꺼낸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학습장애를 딛고 상담가로의 인생을 시작할 때 즈음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에 이르게 된다.
그 가운데 이혼, 그리고 우울증에 시달렸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그의 소중한 딸이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가 자폐아 판정을 받게된다.
이에 저자는 손자의 상황에 마음 아파하다가 이 아이에게 편지를 쓸 결심을 한다.
이 아이에게 정상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의 의미와 충고 그리고 격려들이 담긴 편지를
4년에 걸쳐 쓰게 된다. 본서는 그런 책이다.
상담 사례들이 등장하고 자전적인 이야기가 쓰여졌지만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 사람에게 애정어린 격려와 충고의 글로 가득하다.

때론 눈시울이 붉어지고 때론 나에게 상황을 대입시켰을 때
예리한 칼처럼 마음을 도려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미치 엘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이후 참 훈훈한 책을 만났다. 감사하다.
2007/11/15 18:36 2007/11/1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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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해 샬롬을 선포하는 것
: 김두식, '평화의 얼굴' 서평



군대 이야기

 돌이켜 보면 20대 초반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군대 문제였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남자 어른들은 6.25 전쟁 당시 피난 생활의 기억들을 간간이 떠올리곤 하셨고 그에 이어 이어지는 것은 언제나 군대 이야기였다. 구타도 심했고 근무 여건도 좋지 않은데다가 기간도 길었던 당시의 군대 생활이 그분들에게는 힘든 시기이기도 했겠지만 추억거리, 혹은 자랑거리들이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대체로 누가 더 힘든 군생활을 했느냐가 대화의 중심이었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담을 듣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또한 그분들 이야기 속에서의 군대는 소년이 남자로 거듭나는 통과의례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따라서 누구든지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입대를 꺼려하는 조짐이 보이면 ‘겁쟁이’, ‘계집애’, ‘엄마 치맛자락이나 잡고 다니는 애송이’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나이야 스물이 되었지만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그 시절의 나는 군대라는 ‘진정한 남자들의 세계’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다가오곤 했다.

 

 시간이 흘러 군대라는 ‘숙제’를 마치고 돌아온 캠퍼스에서 친척들 모임에서 큰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에게 들었던 영웅담을 다시금 들을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복학생들의 대화는 30분이 지나면 대부분 군대 이야기로 모아졌고 거기에서는 또 여러 명의 영웅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물론 반대로 피해자들의 하소연이 이어지기도 했다. 군대 생활을 통해 다친 몸으로 돌아온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 체육이나 기타 훈련, 혹은 근무 중에 다친 친구들 중에는 인대가 끊어졌던 경우가 가장 흔했고 팔이나 다리를 잘 못쓰거나 시신경을 다쳐서 무리한 운동을 못하게 된 경우도 더러 있었다. 공개되진 않았지만 통계에 의하면 한 해에 군대에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수는 1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나는 때때로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얻은 힘든 경험들은 무의식 중에 각인되어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박노자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의 남성들은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사회 생활, 직장 생활, 대인 관계에서의 권력적 요소를 습득하게 되고 그러한 조직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을 불편해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회사에서는 “그 친구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래!”, “군대 생활 편하게 해서 회사가 놀이터로 보여?”, “좀 굴러야 정신을 차리겠구먼!”과 같은 이야기들이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다루다
 최근에 김두식 교수는 한국백상출판문화상을 받은 <헌법의 풍경>이후로 3년 만에 신간 <평화의 얼굴>을 출간했다. 이 책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중심으로 다룬 것으로, 2002년에 기독매체 뉴스앤조이에서 출판한 <칼을 쳐서 보습을>을 전면 수정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책을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김두식 교수의 접근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에 나 또한 처음 ‘양심적 병역거부’, ‘집총거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평화를 사랑하거든. 그래도 군대는 가야지. 사실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냐?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 못하니까 자꾸 구실을 찾는 거겠지. 차라리 당당히 갔다 와서나 그런 이야기를 하시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너무 철이 없었는가. 사실 그랬다. 하지만 지금도 병역 문제와 관련된 모든 담론들은 이러한 무의식적 반감의 두꺼운 층에 막혀 전쟁이나 평화주의적 사고에 대한 논리적 논의 자체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병역거부의 대명사로 통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길거리에서 갑자기 접근해서 <파수대>라는 이상한 전단지를 나눠주고, 가정 집까지 찾아와서는 자꾸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기괴한 이들이며 그들이 취하는 집총거부는 동일하게 ‘기괴한 행동’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솜털이 보송보송했던 금쪽 같은 아들을 눈물 쏟으며 군대로 떠나 보냈던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들을 그 길에서 피신시킨 이회창 대선후보에게 등을 돌렸다. 아버지들은 사회조직의 권위적, 상명하복적 규율을 처음으로 전수받은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겁쟁이의 하소연 정도로 치부한다. 국민가수 유승준에게 환호했던 그의 팬들은 그가 입대하겠다던 말을 번복했다는 이유로 이제는 “스티브 유, 양키 고 홈!”이라며 비아냥거린다. 한국의 남학생들은 군가산점 때문에 공무원 시험에 불리하다고 하소연을 쓴 여대생의 인터넷 게시판 글에 ‘미친년’ 운운하며 흥분하여 몇 백 개의 댓글을 달고 있다. 이렇듯 군대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너, 군대 갔다 왔어, 안 갔다 왔어?’의 문제로 환원되며, 군대를 피하려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만큼은 다수의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의 심정적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김두식 교수는 1장에서 ‘나의 양심 재판 체험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경험을 서술한다. 자신이 만난 여호와 증인들이 집총거부로 군사재판을 받았던 이야기로 입을 뗀다. 책의 문체도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 형식으로 마치 친절한 상담자가 내 앞에서 차분하게 설명해주는 느낌이 든다. 김 교수가 만난 병역 거부자들은 운동가 정신으로 무장된 남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직 세계관조차 정립되지 않은 듯한 여린 소년에 가까웠고 그가 여호와 증인이라는 종교적 배경에 의해 선택한 집총거부로 인해, 이후 자신의 남은 삶에 받게 된 사회적 처벌의 무거움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 교수가 만난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생길 법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다시금 그들을 향한 연민을 억누른다. ‘그럼 군복무를 수행한 나는 뭐 전쟁광인가. 나는 안 불쌍한가. 내가 허비한 2년의 힘들었던 시간들도 쉽지 않았어. 결국 군대 안 가려고 자신이 불행을 자초한거야.’ 자연히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연이어 양심적 병역겨부를 반대하는 이들은 ‘비양심적 병역이행자’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들의 양심적 병역거부 사례들을 이야기한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란 용어의 일괄적 사용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며 이에 대해서는 병역자체의 거부와 집총 거부를 나눌 것을 지적하며, 전자에 대해서는 대체 복무를 시키는 방법이 있고 후자에 대해서는 비전투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음도 설명한다. 여기에 또 다른 질문이 가세한다. 군사재판 때에도 자주 물어보았다고 하는 이 질문은 ‘그럼 만약 네 여동생을 누가 강간하고 죽이려 하면 어떡할래?’이다. 이쯤 되면 다시 독자의 내면은 원상 복귀되며 오히려 그들에 대한 반발심만 커진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이상(理想)이고 현실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다급하고 필요한 폭력이 있다는 생각이 다시금 우리를 괴롭힌다.

 

이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3장에서 존 하워드 요더의 글을 인용하여 그 질문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는 여호와 증인과 같은 이단들만의 문제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과거 정통으로 분류되는 기독교 역사에서 드러난 사례들을 통해 주의를 환기시키며(4장), 무엇보다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평화주의자였고 전쟁을 반대했음을 지적한다(5장). 그렇다면 전쟁은 모두 나쁘기만 하며 정당한 전쟁은 없는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정당한 전쟁론’이라는 용어가 평화주의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정당한 전쟁’은 평화주의의 친구에 가까우며 오히려 문제는 정당한 전쟁을 가장한 ‘짝퉁’ 정당한 전쟁론에 있음을 보여준다(6장). 책의 후반은 우리 나라의 특수성에 기인한 문제들을 주로 다루는데 그 중 하나가 전쟁 중인 나라에서는 징집제도를 불가피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본서는 전쟁 중에 있었던 혹은 지금도 대치중인 다른 나라들의 사례들을 들어 반박하며(8장), 그런 상황에서도 전쟁을 거부했던 이들의 역사를 돌아본다(9장).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내에서 이뤄진 지독한 병역거부 탄압의 사례들을 소개하고(10장), 그에 대한 대안으로 대체복무제도를 언급한다(11장). 특히 11장에서는 대체복무제도의 현주소와 그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 각 안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형평성에 맞게 제도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설명한다.

 


진정한 변화를 위한 온정적 글쓰기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해돌이의 모험’ 같은 반공 만화나 로보트 만화를 보고 자란 내게, 그리고 장난감 총을 들고 밖에 나가 아이들과 총 싸움을 했던 내게, 평화라는 단어는 피를 보고 나서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상급과 같은 것이었다. 남자다워지려고 배웠던 태권도는 자신과 이웃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대련이라는 방법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즐거움을 선사했고, 회심한 이후에도 교회 안에서 설교를 통해 구약의 전쟁들을 예화로 들으며 이스라엘 민족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면 속으로 크게 환호하곤 했다. 샬롬과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기독교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 20대 중반의 일이었고 기독매체를 통해 접했던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이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와 같은 책들의 내용을 통해 생각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한국의 싸나이’로서 내면의 중심에는 병역거부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주변에서 ‘너 자상하고 친절한 척 하지만 사실은 겁쟁이지? 전쟁 나면 도망이나 갈 녀석!’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이런 내면의 문제를 안고 있던 내게 김 교수의 책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군대라는 문제로 여전히 뒤틀려 있던 내 내면의 친절한 상담가가 되어 주었다. 책을 읽는 동안 속으로 가끔은 난감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는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공감한다는 태도와 말투로, 그리고 지루하리만치 방대한 자료와 사례들을 차분히 풀어내는 그의 설명에 이제는 나도 충분히 ‘설득’되었고 그 찜찜한 심기를 털어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던 많은 전쟁 사례들이 지금도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맴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책에서 김두식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시작된 당위적 전쟁들조차도 또 다시 많은 수의 피해자들을 만들어 냈고 그들의 피 흘린 복수가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을 이루어왔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칼을 뽑아 다른 사람에게 휘두르는 순간 평화는 깨어지고, 폭력은 도리어 폭력을 낳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26:52)’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말한다. 내 가정, 내 나라, 내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전쟁과 피흘림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에 항거하여 반전 행동을 실천했던 많은 이들의 모습을 본다. 이 책은 그러한 이들이 묵묵히 수행했던 길, 즉 세상에 대해 샬롬을 선포하는 것, 전쟁에 나서는 것을 반대하는 부단한 실천만이 복수로 점철되어 온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다 준다.

 

 지식인들 혹은 글 쓰는 이들 가운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스타일은 급진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찬찬히 읽고 나면 알맹이가 없거나 진부한 경우가 있고, 반대로 차분하고 따뜻하여 다소 온건한 느낌을 문체로 썼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신선하고 개혁적이며 진보적인 경우가 있다. 사실 나는 전자의 글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후자의 글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왔다. 때론 몸을 사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대개 끝을 보지 않아서였다. 김두식 교수의 글은 물론 후자에 속한다. 그의 모든 글에 대해서는 아니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군대’ 문제에 대해 이 책에서 보여준 그의 스타일을 나는 기꺼이 옹호하고 싶다. 그렇다. 그의 스타일이 옳다. (끝)
2007/08/11 23:55 2007/08/11 2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