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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희, <침 튀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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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워드진의 살아 있는 미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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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P 북뉴스] 숨어 계신 하나님 - ‘김 집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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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미술관, 내면을 위한 보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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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읽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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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읽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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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틀립 박사, 진정한 상처입은 치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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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교회 생활이 오래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교회 문화에 익숙하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밀양’은 솔직히 불편한 영화였다. 개봉 첫 주에 아내와 함께 달려가서 본 이창동 감독의 신작은 앉아 있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단지 ‘교회’를 말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은 냉소적인 시각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으로 교회를 보여줬고 그 객관적인 잣대가 오히려 ‘교회 안’의 나를 뒤흔들었다. 극중 신애와 약국 김집사가 특히 내겐 불편한 인물이었다. 아마 내 신앙의 여정에 많지는 않아도 몇몇 ‘신애’가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김집사’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밀양’이 개봉된 이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썼다. 교계에서도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와싱톤한인교회의 김영봉 목사도 그간의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잠시 미룬 채, 이 영화를 놓고 4주간 동안 “영화관에 가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그 내용을 보충하여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한국 교회 이야기, 그리고 숨어계신 하나님, ‘비밀 햇볕’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神觀)를 풀어나간다.
먼저 저자는 ‘밀양’이라는 영화가 ‘한국 교회에 대한 뼈아픈 고발’이라고 고백한다. 특히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 <벌레 이야기>에서 이청준씨가 ‘값싼 용서’를 비판하고 싶었던 점에 집중하며, 진정한 용서는 당사자의 회개와 보상, 그리고 개혁으로 이어져야 함을 지적한다. 또한 신애의 주변에 있던 교인들을 통해 한국 교회 문화에 편만한 ‘조급성’과 ‘피상성’을 직시하며 기독교인들의 친절하게 포장한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당신은 멸망할 사람이라는 전제’가 오만한 모습으로 깊게 배어 있음을 비판한다. 저자는 하나님을–한국교회의 선전과는 달리-비밀 햇볕처럼 ‘온화하게, 따뜻하게, 드러나지 않게 차분하게,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하게,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활동하시기를 더 좋아하는 분’으로, 고난에 처한 자녀들이 그것을 회피하게 만드는 위약(僞藥)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 고난의 현실을 끌어안고 당신과 함께 그 고난을 변모시키기를 원하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과잉친절과 피상적인 모습으로 신애에게 다가간 약국 김집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상처 입고 방황하는 신애가 현실을 인정하기까지 그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고 함께해 준 종찬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인다.
책을 놓은 지금도 한 대목이 머리 속을 맴돈다.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김 집사의 말은 진실에 가깝습니다. 다만 고난을 끌어안고 하나님과 함께 그 고난을 변모시키고 난 후에만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의 마음에 못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제발, 제발, 제발, 아픔을 만난 사람에게 “다 주님의 뜻이야”라고 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실 책을 읽는 도중, 나를 신애에, 종찬에, 그리고 저자에 대입시키기는 쉬웠다. 하지만 ‘밀양’을 볼 때의 불편한 심기처럼 적어도 물리적 교회 안에서, 직장에서, 삶의 터전에서의 나는 ‘김집사’에 가까울 때가 많다. ‘형제’, ‘자매’, ‘하나님의 사랑’, ‘낮아짐’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의 피상성과 조급성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 문화에 젖은 내 안의 ‘김집사’가 이 책을 읽고 변화되기를 기도해 본다.(끝)
*IVP BOOK NEWS 2008년 5/6월호 기고글.
그간 <남자 vs 남자>, <사람 vs 사람> 등을 저술했고
한겨레와 같은 매체에도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는 그녀.
<젊은 날의 깨달음>을 통해 그녀의 인생의 단면을 훔쳐본 적이 있는
정혜신 선생님의 신간 <마음 미술관>이 나왔다.
전용성 화백의 그림에 자신의 글로 한 장 한 장 곱게 채워진
이 책은 깔끔하고 밝은 느낌과는 다르게 그 글과 그림으로 활자화된
한 장을 넘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마음 미술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는 또한번 초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미술관으 느낌 그대로를 이 책에서 받았다.
그림을 한참을 '주시하다가' 정혜신 선생의 글을 읽고는
다시 그림을 한참을 '읽는다'. 그리고 멍한 채로 시야를 어둡게 하여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본다.
이 책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하나의 묵상집이다.
하지만 무겁지 않다.
책을 읽는 동안에 사뭇 진지해질 수 있는 순간에
정혜신 선생의 위트나 익숙한 상황, 영화, 시, 드라마들을 언급할 때면
나도 모르게 접혔던 미간이 웃고 있을 때도 있었다.
너무 급하게 읽지 않고 한 자 한 자, 한 그림 한 그림 넉넉한 마음으로
읽는다면 이 책은 읽는 이들의 내면에 하나의 보양식이 될 것이다.
세상에 대해 샬롬을 선포하는 것
: 김두식, '평화의 얼굴' 서평
군대 이야기
돌이켜 보면 20대 초반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군대 문제였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남자 어른들은 6.25 전쟁 당시 피난 생활의 기억들을 간간이 떠올리곤 하셨고 그에 이어 이어지는 것은 언제나 군대 이야기였다. 구타도 심했고 근무 여건도 좋지 않은데다가 기간도 길었던 당시의 군대 생활이 그분들에게는 힘든 시기이기도 했겠지만 추억거리, 혹은 자랑거리들이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대체로 누가 더 힘든 군생활을 했느냐가 대화의 중심이었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담을 듣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또한 그분들 이야기 속에서의 군대는 소년이 남자로 거듭나는 통과의례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따라서 누구든지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입대를 꺼려하는 조짐이 보이면 ‘겁쟁이’, ‘계집애’, ‘엄마 치맛자락이나 잡고 다니는 애송이’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나이야 스물이 되었지만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그 시절의 나는 군대라는 ‘진정한 남자들의 세계’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다가오곤 했다.
시간이 흘러 군대라는 ‘숙제’를 마치고 돌아온 캠퍼스에서 친척들 모임에서 큰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에게 들었던 영웅담을 다시금 들을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복학생들의 대화는 30분이 지나면 대부분 군대 이야기로 모아졌고 거기에서는 또 여러 명의 영웅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물론 반대로 피해자들의 하소연이 이어지기도 했다. 군대 생활을 통해 다친 몸으로 돌아온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 체육이나 기타 훈련, 혹은 근무 중에 다친 친구들 중에는 인대가 끊어졌던 경우가 가장 흔했고 팔이나 다리를 잘 못쓰거나 시신경을 다쳐서 무리한 운동을 못하게 된 경우도 더러 있었다. 공개되진 않았지만 통계에 의하면 한 해에 군대에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수는 1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나는 때때로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얻은 힘든 경험들은 무의식 중에 각인되어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박노자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의 남성들은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사회 생활, 직장 생활, 대인 관계에서의 권력적 요소를 습득하게 되고 그러한 조직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을 불편해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회사에서는 “그 친구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래!”, “군대 생활 편하게 해서 회사가 놀이터로 보여?”, “좀 굴러야 정신을 차리겠구먼!”과 같은 이야기들이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다루다
최근에 김두식 교수는 한국백상출판문화상을 받은 <헌법의 풍경>이후로 3년 만에 신간 <평화의 얼굴>을 출간했다. 이 책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중심으로 다룬 것으로, 2002년에 기독매체 뉴스앤조이에서 출판한 <칼을 쳐서 보습을>을 전면 수정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책을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김두식 교수의 접근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에 나 또한 처음 ‘양심적 병역거부’, ‘집총거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평화를 사랑하거든. 그래도 군대는 가야지. 사실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냐?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 못하니까 자꾸 구실을 찾는 거겠지. 차라리 당당히 갔다 와서나 그런 이야기를 하시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너무 철이 없었는가. 사실 그랬다. 하지만 지금도 병역 문제와 관련된 모든 담론들은 이러한 무의식적 반감의 두꺼운 층에 막혀 전쟁이나 평화주의적 사고에 대한 논리적 논의 자체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병역거부의 대명사로 통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길거리에서 갑자기 접근해서 <파수대>라는 이상한 전단지를 나눠주고, 가정 집까지 찾아와서는 자꾸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기괴한 이들이며 그들이 취하는 집총거부는 동일하게 ‘기괴한 행동’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솜털이 보송보송했던 금쪽 같은 아들을 눈물 쏟으며 군대로 떠나 보냈던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들을 그 길에서 피신시킨 이회창 대선후보에게 등을 돌렸다. 아버지들은 사회조직의 권위적, 상명하복적 규율을 처음으로 전수받은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겁쟁이의 하소연 정도로 치부한다. 국민가수 유승준에게 환호했던 그의 팬들은 그가 입대하겠다던 말을 번복했다는 이유로 이제는 “스티브 유, 양키 고 홈!”이라며 비아냥거린다. 한국의 남학생들은 군가산점 때문에 공무원 시험에 불리하다고 하소연을 쓴 여대생의 인터넷 게시판 글에 ‘미친년’ 운운하며 흥분하여 몇 백 개의 댓글을 달고 있다. 이렇듯 군대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너, 군대 갔다 왔어, 안 갔다 왔어?’의 문제로 환원되며, 군대를 피하려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만큼은 다수의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의 심정적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김두식 교수는 1장에서 ‘나의 양심 재판 체험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경험을 서술한다. 자신이 만난 여호와 증인들이 집총거부로 군사재판을 받았던 이야기로 입을 뗀다. 책의 문체도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 형식으로 마치 친절한 상담자가 내 앞에서 차분하게 설명해주는 느낌이 든다. 김 교수가 만난 병역 거부자들은 운동가 정신으로 무장된 남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직 세계관조차 정립되지 않은 듯한 여린 소년에 가까웠고 그가 여호와 증인이라는 종교적 배경에 의해 선택한 집총거부로 인해, 이후 자신의 남은 삶에 받게 된 사회적 처벌의 무거움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 교수가 만난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생길 법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다시금 그들을 향한 연민을 억누른다. ‘그럼 군복무를 수행한 나는 뭐 전쟁광인가. 나는 안 불쌍한가. 내가 허비한 2년의 힘들었던 시간들도 쉽지 않았어. 결국 군대 안 가려고 자신이 불행을 자초한거야.’ 자연히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연이어 양심적 병역겨부를 반대하는 이들은 ‘비양심적 병역이행자’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들의 양심적 병역거부 사례들을 이야기한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란 용어의 일괄적 사용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며 이에 대해서는 병역자체의 거부와 집총 거부를 나눌 것을 지적하며, 전자에 대해서는 대체 복무를 시키는 방법이 있고 후자에 대해서는 비전투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음도 설명한다. 여기에 또 다른 질문이 가세한다. 군사재판 때에도 자주 물어보았다고 하는 이 질문은 ‘그럼 만약 네 여동생을 누가 강간하고 죽이려 하면 어떡할래?’이다. 이쯤 되면 다시 독자의 내면은 원상 복귀되며 오히려 그들에 대한 반발심만 커진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이상(理想)이고 현실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다급하고 필요한 폭력이 있다는 생각이 다시금 우리를 괴롭힌다.
이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3장에서 존 하워드 요더의 글을 인용하여 그 질문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는 여호와 증인과 같은 이단들만의 문제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과거 정통으로 분류되는 기독교 역사에서 드러난 사례들을 통해 주의를 환기시키며(4장), 무엇보다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평화주의자였고 전쟁을 반대했음을 지적한다(5장). 그렇다면 전쟁은 모두 나쁘기만 하며 정당한 전쟁은 없는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정당한 전쟁론’이라는 용어가 평화주의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정당한 전쟁’은 평화주의의 친구에 가까우며 오히려 문제는 정당한 전쟁을 가장한 ‘짝퉁’ 정당한 전쟁론에 있음을 보여준다(6장). 책의 후반은 우리 나라의 특수성에 기인한 문제들을 주로 다루는데 그 중 하나가 전쟁 중인 나라에서는 징집제도를 불가피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본서는 전쟁 중에 있었던 혹은 지금도 대치중인 다른 나라들의 사례들을 들어 반박하며(8장), 그런 상황에서도 전쟁을 거부했던 이들의 역사를 돌아본다(9장).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내에서 이뤄진 지독한 병역거부 탄압의 사례들을 소개하고(10장), 그에 대한 대안으로 대체복무제도를 언급한다(11장). 특히 11장에서는 대체복무제도의 현주소와 그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 각 안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형평성에 맞게 제도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설명한다.
진정한 변화를 위한 온정적 글쓰기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해돌이의 모험’ 같은 반공 만화나 로보트 만화를 보고 자란 내게, 그리고 장난감 총을 들고 밖에 나가 아이들과 총 싸움을 했던 내게, 평화라는 단어는 피를 보고 나서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상급과 같은 것이었다. 남자다워지려고 배웠던 태권도는 자신과 이웃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대련이라는 방법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즐거움을 선사했고, 회심한 이후에도 교회 안에서 설교를 통해 구약의 전쟁들을 예화로 들으며 이스라엘 민족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면 속으로 크게 환호하곤 했다. 샬롬과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기독교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 20대 중반의 일이었고 기독매체를 통해 접했던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이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와 같은 책들의 내용을 통해 생각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한국의 싸나이’로서 내면의 중심에는 병역거부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주변에서 ‘너 자상하고 친절한 척 하지만 사실은 겁쟁이지? 전쟁 나면 도망이나 갈 녀석!’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이런 내면의 문제를 안고 있던 내게 김 교수의 책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군대라는 문제로 여전히 뒤틀려 있던 내 내면의 친절한 상담가가 되어 주었다. 책을 읽는 동안 속으로 가끔은 난감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는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공감한다는 태도와 말투로, 그리고 지루하리만치 방대한 자료와 사례들을 차분히 풀어내는 그의 설명에 이제는 나도 충분히 ‘설득’되었고 그 찜찜한 심기를 털어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던 많은 전쟁 사례들이 지금도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맴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책에서 김두식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시작된 당위적 전쟁들조차도 또 다시 많은 수의 피해자들을 만들어 냈고 그들의 피 흘린 복수가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을 이루어왔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칼을 뽑아 다른 사람에게 휘두르는 순간 평화는 깨어지고, 폭력은 도리어 폭력을 낳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26:52)’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말한다. 내 가정, 내 나라, 내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전쟁과 피흘림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에 항거하여 반전 행동을 실천했던 많은 이들의 모습을 본다. 이 책은 그러한 이들이 묵묵히 수행했던 길, 즉 세상에 대해 샬롬을 선포하는 것, 전쟁에 나서는 것을 반대하는 부단한 실천만이 복수로 점철되어 온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다 준다.
지식인들 혹은 글 쓰는 이들 가운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스타일은 급진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찬찬히 읽고 나면 알맹이가 없거나 진부한 경우가 있고, 반대로 차분하고 따뜻하여 다소 온건한 느낌을 문체로 썼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신선하고 개혁적이며 진보적인 경우가 있다. 사실 나는 전자의 글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후자의 글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왔다. 때론 몸을 사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대개 끝을 보지 않아서였다. 김두식 교수의 글은 물론 후자에 속한다. 그의 모든 글에 대해서는 아니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군대’ 문제에 대해 이 책에서 보여준 그의 스타일을 나는 기꺼이 옹호하고 싶다. 그렇다. 그의 스타일이 옳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