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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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위기' 그 은밀한 욕망을 털어내려면
크리스토프 포레의 <마흔앓이>를 읽고

 

/김용주

 

'크리스토프 포레? 누구지?' 책 검색을 하다가 찾아낸 책의 저자 이름이 낯설다. 아마존에서 검색을 해도 이 프랑스 저자의 책에 대한 평을 접할 수 없었다. 원제가 <Maintenant Ou Jamais! La Transition Du Milieu De Vie>인 이 책의 번역서 제목은 <마흔앓이>였다. 마흔이란 숫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내 눈을 사로잡았으니 이 책의 편집자는 내용에 상관없이 일단은 제목 선정에서 성공한 셈이다. 원제는 중년의 전환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40대 전후의 전환기를 경험하는 중년을 대상으로 쓴 심리학 책이니 번역서 제목과 그리 동떨어진 건 아니다.

 

순전히 제목에 대한 호감으로 구입하여 읽기 시작한 책은 첫 페이지부터 빠져들어서는 2-3일 만에 다 읽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대단히 좋았다. 누가 내게 요즘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물론 30대 중반을 넘긴 이들에 한하여.

 

누구나 그렇듯 멀리 있는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문제의식을 체감하기 어렵다. 따라서 결혼을 하지 않은 자녀가 없는 이삼십대 초반의 싱글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어설프게 늙은 척하려는 젊은 작가지망생들에게도 추천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책으로 중년의 경험을 취하지 말고 몸으로 겪어나가는 것이 더 유익이다) 허나 당신이 40대 전후의 중년이라면 이 책은 매.력.적.이다.

 

이 책을 읽던 중 영화 <언페이스풀>이 떠올랐다. 그다지 좋은 영화는 아니었지만 이 영화 초반에 코니(다이안 레인)가 남편이 출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멍하게 밖을 내다보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슬픔, 무료함, 의미없음, 늙어감.…. 이 모든 것을 담은 듯한 표정. 이 한 장면은 장차 있을 그녀의 외도를 의도하며 정당화시켜준다. 그녀의 가정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남편도 성실하고 착하며 자녀도 잘 자란다. 그저, 그녀가 중년에 들어섰을 뿐이다.

 

어느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가 컸다. 뭐 하나라도 하려고 치면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던 아이가 어느새 청소년이 되어 부모의 참견을 싫어한다. 아이를 위해 나의 존재 자체를 희생했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아이는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좀 있으면 집에서 독립을 할 판이다.

 

남자는 회사생활도 이제 익숙해졌다. 익숙하다 못해 이젠 무료하다. 매일 하는 일이 똑같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가끔 숨이 막힌다. 창밖을 물끄러미 볼 때가 잦아졌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를 슬픔, 대상이 없는 원망의 감정들이 밀려온다. 부모는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주던 존재에서 도리어 내가 보호해야할 연약한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중년의 위기'인가.

 

저자는 흔히 사용하는 '중년의 위기'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는 과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40대를 전후해서 삶의 전환점이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청년까지는 부모가 원하는 삶, 국가와 사회, 배우자와 아이들,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애썼다면 이제는 다시 나에게 자신의 가치, 욕망에 대해 다시금 집중하게 되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시기가 찾아올 때 그 욕망들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말한다.

 

중년에 많은 이들이 명품 옷이나 고급 취미에 몰두하거나 젊어지려고 성형수술을 반복한다. 혹은 연하의 애인을 사귀어서 데이트를 하거나 불륜관계에 빠진다. 심지어는 술과 도박에 빠지기도 한다. 갑자기 배우자와 이혼을 하거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새로운 분야의 회사로 이직을 하기도 한다. 친절했던 사람이 한순간 괴팍해지기도 하고 헌신적이었던 엄마가 딸처럼 옷을 입고 밖에 나가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부부가 서로의 이야기에 무심해지고 각자의 취미생활과 모임활동에 열을 낸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포레는 본서에서 여러 사례들을 보여주면서 중년의 심리상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융의 심리학에 기대어 그 마음 속의 문제들, 욕망들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많은 중년의 일탈행동들이 본질적이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그런 개별 행동(외도, 술, 성형)으로도 중년의 흔들림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감기의 본질이 콧물이 아니듯 중년의 흔들림의 본질은 '나자신'의 욕망을 바르게 알고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다. 중년의 '내'가 행복해야, 배우자가 행복하고 자녀가 행복하고 나아가 가정과 사회가 행복하다. 하지만 중년의 '나'는 내 맘대로 해서는 안 되는 가정, 사회적 제약들이 너무도 많다.

 

한 1년, 5년, 나아가 10년은 참고 살 수 있다. 하지만 10년을 넘어서면서 이 삶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 때, 사람들은 무너지게 된다. 더이상 참아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타자들이 규정한 페르조나를 뒤집어쓰고 꼭두각시처럼, 노예처럼, 그렇게 늙어갈 수는 없다.

 

그것이 중년을 맞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절규다. 특히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프랑스 중년보다 한국 중년들이 더 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청년들은 점점더 취업도 혼기도 늦어지고 있다. 회사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도 전에 늙는다. 퇴직은 점점더 빨라지고 있다. 청년의 혼란, 어려움을 갓 벗어나면 중년의 흔들림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로 이 책은 우리나라 중년들에게는 더더욱 의미있는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포레의 제안은 의외로 간단하다. 풍선의 압력이 높아지면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진다. 풍선이 터져버리기 전에 미리미리 바람을 빼서 압력을 낮춰야 한다. 나에 대해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들을 천천히 그리고 많이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해나가야, 말년에 일탈행동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현재는 건강한가. 그렇지 않다면 포레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원문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3353

2013/04/05 00:38 2013/04/05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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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모, '욕망해야 괜찮아'
[서평] <대한민국 부모>, 눈에 힘주고 읽었다

 

/김용주
 
#1.

책 <대한민국 부모>를 의미심장하게 읽었다. 읽는 내내 눈에 있는 대로 힘을 주고 읽어서 한동안 눈이 시릴 정도였다. 이 책은 서두에 자녀 교육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한국 사회의 왜곡된 가정문제가 모두 얽혀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공저자들이 말한 대로 '문제의 자녀에게는 문제의 부모가 아닌 문제의 부부가 있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중년의 부부들은 위기에 처한다. 소통의 문제가 생기고 자녀교육이라는 프로젝트 안에서 왜곡된 욕망을 투영한다. 아내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경험하다가 출산 후 사회생활을 접고 현실적인 선택, 즉 자녀의 매니저이자 자녀를 애정과 투자의 대상으로 규정짓는다.

남편은 40대에 혼신의 힘을 다해 직장생활을 하지만 언제 낙오될지 몰라 집안일·가사노동은 고사하고 특히 자녀교육에서 배제되다가 아이가 반항을 하게 되는 중·고교 시절 군기반장으로 투입된다. 이때는 자녀와 교감이 없는 채로 엄마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적 폭력을 행사하므로 자녀는 급속도로 아빠와 멀어진다.

 

이 부부는 각자 자신의 욕망이 배제된 삶을 강요받으며 혹은 자신의 욕망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며 40대를 자녀교육이라는 대국민 사업에 전념하다가 자주 좌초한다. 대부분 아이의 일탈이 원인이 되며 때때로 배우자의 외도로 가정은 허물어진다.

 

 

#2.

개인적인 얘기를 잠깐 한다면, 내 아내의 최대 장점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아내는 매순간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항상 돌아보고 그 원하는 바에 우선 순위를 두고 그 다음에야 주변과 조율과정을 거치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함께 살면서 처음에는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함께 7~8년을 함께 살아보니 자기 욕망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이 배우자 입장에서는 더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내도 처음부터 자기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사실 오랜 자기 검열과 성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자주 아내는 오히려 나의 억눌린 분노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이해하는 나의 분노는 결국 욕망의 좌절에 다름 아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부모의 기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애썼다. 뭐랄까, 내가 바르게 성장해야 우리 가정의 행복이 보장된다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나는 내가 어느 정도는 왜곡된 교육의 피해자라고 평가한다.

 

책 <대한민국 부모>를 읽으면서 나는 나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나의 꽤 많은 활동들이 사실상 외부를 향해 있다. 초자아의 준엄한 명령이 나의 일상을 지배한다. 회사에서는 '팀장님과 후배 사원들과 소통과 협력에 애써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집에서는 '아내가 힘드니 내가 육아를 분담해야 한다' '부모님이 내가 크는 동안 애를 많이 쓰셨으니 내가 항상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걱정과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그런 류의 것들이다.

 

때로는 내가 쓰는 글이나 대화 시에 드러나는 나의 일정한 논리들에서도 그런 초자아적 억압은 투영된다. 약자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니 그것을 위한 글쓰기에 노력해야 한다거나 여성이 피해자이니 내가 남성이지만 여성을 대변하도록 애쓰자거나 제3세계 사람들을 위해 공정무역 제품을 쓰려는 노력까지.

 

 

#3.

투박하게 정리하자면 나의 존재감은 초자아적인 어떤 규범을 충실히 지키고 그것을 칭찬받는 일에 전적으로 기대어 있다. '네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우리가 좋아졌어' '네 덕에 내가 행복해' 등 이런 말들을 은연 중에 바라는 마음이 있는 셈이다. 그것 또한 욕망이라면 욕망이라고 하겠다.

 

<대한민국 부모>에 나오는 남편들 중에는 죽도록 일하고 가정에서 외면당하는 이들이 있다. 약육강식의 직장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면 아내는 니가 집에서 도대체 하는 게 뭐냐, 모르면 가만히나 있어라 요즘 애들 교육이 쉬운 줄 아냐 라고 망발을 듣는다. 예전에는 공부만 잘하면 칭찬받던 '아들'에서 지금은 살벌하게 애쓰지만 원망에 비난받는 '남편, 아빠'가 된 자신을 본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외부를 향해 분투하는 에너지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인정과 칭찬, 존경과 관련돼 있고 이것들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외부로 향하지 않는 내 욕망은 무엇인가. 틈틈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고 IT제품들을 지르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 본질적인 내 안의 욕망은 무엇일까.

 

대체로 부모는 '자신의 욕망'이 없기 때문에 가정이 왜곡된다. 40대에도 설레는 어떤 존재적인 욕망없이 칭찬 없는 의무들에 눌려서, 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너무 허접한 대안들을 선택하는 건 아닐까. 자신들의 욕망이 없는 부모들이 자신 수준의 복제품을 만드는 일에 골몰하다가 자신과는 다른 존재인 자녀들을 망치고 스스로도 자멸하는 건 아닐까.

 

결국 나의 건강한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소하는 게 진정한 의미의 가정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닐까. 저 유명한 김두식 교수의 책 제목을 빌려 말한다면 "욕망해'야' 괜찮아"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3371

2013/03/13 00:39 2013/03/1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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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박영선 목사가 설교했던 내용을 주제별로 묶어서 그의 30년간의 사역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된 책이다. '믿음', '성화', '교회'라는 주제에 따라 총 3부작으로 기획된 본 시리즈 중 첫번째 책으로 구약과 신약을 넘나드는 총 29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믿음의 두 축을 구조화하고 있는데 전반 12개의 설교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것이고 후반 17개의 설교는 믿음의 책임에 대한 것으로, 믿음의 '본질'과 '책임'의 두 축에 균형감을 유지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대체로 성도들은 기독교 교리 자체를 어렵다고 느낀다. 실제로도 교리는 어렵다.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는 아볼로 교회 성도들처럼 심도있는 공부가 어느 정도 필요한 종교임을 인정한다. 그런 이유로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다소 어려운 교리를 효과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많이 해왔다. 그럴듯한 예화를 들거나 설교 중에 멜로디를 덧붙인 찬양곡을 사용하기도 하며, 때로 만화처럼 쉽게 대중이 호감을 가질 법한 도구들을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잠시동안 성도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기는 하지만 정작 교리의 '깊이' 자체는 반감시키는 역효과를 감수해야 한다.

 

박영선 목사의 설교는 요즘 흔히들 쓰는 말로 교리에 대한 '돌직구'다. 그는 굳이 어렵게 설명해야 하는 길을 우회하지 않는다. 쉽게 설명할 다른 도구들을 찾는 대신 설교 본문 자체의 논리, 구조화에 많은 공을 들인다. 그의 설교는 놀라우리만치 구조적이다. 설교를 듣는 중에 머리 속에 형이상학적 그림들이 그려진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전달되는 설교를 경청하다보면 어느덧 견고한 집이 하나 머리 속에 지어져있다. 그것이 다른 설교자들과 구별되는 박영선 목사의 탁월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설교 중에 직설화법이나 욕을 하기로 유명하다. 유머나 재치로 받아들여지는 대목도 분명 있지만, 대체로 그의 직설화법은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 묘한 경각심을 준다. 교리라는 모호한 삶의 체계가, 그것이 일상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예화는 그에 관한 이야기거나 주변에서 겪을 법한 이야기가 많다. 아마도 설교시간에 스스로에게 그리고 성도들에게 거리낌없이 대놓고 욕을 하는 설교자로도 박영선 목사는 독보적일 것이다. 나는 이런 그의 설교 '스타일'이 많은 성도들에게 교리의 깊이를 제공할 뿐 아니라 박영선 목사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 역할을 톡톡히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기대한다.

 

3권의 단행본과 7권의 강해시리즈에서 선별한 내용이니 박영선 목사의 강해서들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새롭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교리나 주제를 놓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설교를 비춰본다면 이런 인위적인 구분 자체가 더 기독교 교리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장점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남포교회 홈페이지에 가면 매주 그의 설교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혹은 그의 설교 중 상당 부분이 출판되어 있다. 그 중 핵심만을 취하고 싶다면 본서를 권한다. 아울러 진정한 지도자, 설교자가 갈급한 한국교회에 박영선 목사가 좋은 본으로 남기를 소망한다. (끝)

2013/02/09 23:32 2013/02/09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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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착한 아들, 착한 동생, 모범 학생이었다. 학교 친구들과도 항상 원만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은 관계는 없었다. 몇몇 절친과 간혹 절교를 선언하기도 했지만 며칠만 지나면 이내 다시 밥도 같이 먹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함께 놀기를 반복했다.

짝사랑. 풋사랑, 첫사랑..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그저 착실하고 매사에 타인을 불편하게 만든 적이 없는 나였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시작된 내 초반의 연애 경력은 사실 그다지 좋지 못했다. 감정의 숨김, 혹은 과잉, 상대를 조종하고자 하는 욕망, 익숙치 못한 `밀당` 등, 잠시동안의 로맨틱한 몇몇 기억을 빼면 힘들고 고통스럽고 창피해서 숨고 싶을 정도로 심경이 복잡하다. 지금도 가끔 과거를 돌이켜보면 몇몇 사건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일년 넘게 상대를 괴롭히며 서로를 힘들게 만들었던 기억. 때로는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불과 며칠 후엔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겠다고 맹세한 메시지를 보내고, 하루는 네가 어떻든 상관없다고 말했다가 또다른 하루는 나만 소중히 여겨달라고 고집을 피우던, 까만 밤을 하얗게 새워가며 상대를, 나자신을 괴롭히던 내 초창기 연애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워버리고 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는 그렇게, 거친 감정의 주고받음을 통해 어느정도 내 안에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야수성`을 길들여갔고 어느 시기부터는 정상인이 되었다. 정상적인 연애를 하게 된 것이다. 정상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고 그리고 말과 행동의 어긋남이 줄어들게 되는 과정 속에서, 솔직히 나는 내가 남들보다 조금더 늦게 사랑에 대해 이해하고 곱씹게 되지 않았나 돌아본다. 한편으로는 그 규정짓기도 민망한 `사랑의 시작들`은 상대방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내게 참 쓰고도 깊은 약이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결혼을 하고도 어언 8년이 지난 지금. 마리 루티의 <사랑학 수업>을 읽으니 새삼 내가 점잖게 - 마치 과거의 `행패`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폼잡고 - 있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마리 루티가 언급한 안 좋은 남성의 케이스 중 어느 대목에서는 내 과거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또는 내가 이 수업을 들었다면 불필요한 감정의 속임, 혹은 과잉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좀더 빨리 정상적인 연애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아쉬움도 든다.

하지만 그녀의 가르침을 `몸소 체험을 해야` 그것(연애)이 제대로 내 안에서 소화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어쨌거나 젊은 시절의 힘들었던 연애의 기억들이 결국 나를 이전보다 조금은 더 멀쩡한 인간이 되게 해준 게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든다. 무엇보다 그녀의 `사랑학 수업`은 문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행하는 남성과 여성의 정형화된 연애의 룰 자체를 허문다는 점에서 배울 부분이 많다. 특히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로 열심히 연애 공부를 하는 싱글들에게 과감히 그 책을 이제 덮고 마리 루티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제안하고 싶다.

그녀는 책의 말미에서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10가지의 조언이라는 리스트를 아래와 같이 제시했지만 이 조언보다 더 깊이 있는 통찰들이 그녀가 드는 사례와 일화들에 즐비하다는 점을 나는 꼭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개인적으로 그녀의 사랑학 수업보다 나는 초반에 쓰여진 정혜윤씨의 추천사가 더 좋았다. 솔직히 추천사를 읽고 가슴이 뭉클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멋진 글로 이 책을 더욱 빛내준 그녀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10가지 조언>
1. 너무 애쓰지 마세요. 연애가 잘못되는 것은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2. 너무 조심스러워하지 마세요. 용기 내어 다가가지 않으면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3.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하지 마세요. 머리로 고민하기보다 마음의 울림을 믿으세요.
4. 자신의 강인함에 대해 미안해하지 마세요. 약해보여야 애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5. 자신의 약점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랑은 기댈 어깨를 얻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6. 나를 원하지 않는 상대를 쫓아다니지 마세요. 가슴만 아플 뿐입니다.
7. 문제가 없는 남자는 그만 찾으세요. 누구에게나 문제가 있고 나에게도 있으니까요.
8. 사랑하는 사람을 조종하지 마세요. 당신이 조종당한다면 싫듯이 상대도 마찬가지입니다.
9. 지나간 잘못을 일일이 후회하지 마세요. 사랑에서 올바른 선택만 할 수는 없습니다.
10. 상실은 완전한 상실로만 생각지 마세요. 잃어버린 경험이 당신을 더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2013/01/05 23:23 2013/01/05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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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성담론, 복음주의는 대답하지 말고 대안하라!
- 캐시 루디의 <섹스 앤 더 처치> 서평

/김용주

'섹스 앤 더 처지'
유명한 미국 드라마인 '섹스 앤 더 시티'의 아류 같은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온 건 순전히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추천사 때문이었다. 그는 이 책에 대해 "동성애에 대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의 견해와 정서에 도전한다. 정말 독특하고 뛰어나다!?"라고 평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마지막 물음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지막 장을 읽을 때 즈음 그 의미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나는 개인적 관심에 의해 페미니즘, 젠더와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고 있는데 이 책은 내가 읽은 책 중 성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젠더화된 신학, 가정예찬 문화
저자인 캐시 루디는 듀크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철학, 신학, 정치학, 여성학, 윤리학의 학제간 통섭을 시도한다. 본서는 그녀의 역량이 탁월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본서에서 펼친 그녀의 교회 내의 현실 인식 및, 진단은 놀랍기까지 했다. 서평을 하기에 앞서 먼저는 공감하는 그녀의 논지를 따라가 보기로 하겠다. 그녀는 미국 기독교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젠더화된 신학’의 위계가 역전되었음을 설명한다.

 

"영역이 분리되기 전(19세기)에 미국 기독교 여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 밖에 없었다. 여성은 욕정이 가득하고 영혼이 없으며 죄에 빠지기 쉬운 존재로 간주되었다. 여성 기독교인은 국가나 지역 교회와의 관계에서 남편에게 의존했다. 아버지 혹은 남편은 자녀를 영적으로 양육하는 일을 혼자 감당했다. 그런데 산업화와 함께 나타난 이데올로기의 변화로 남자는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불사신처럼 단련해야 했고 그래서 여성은 영성이 남달라야 한다는, 특히 양육과 살림 같은 중요한 일들과 관련해서 더 그래야 한다는 믿음이 퍼졌다.

 

이처럼 젠더화된 신학의 위계가 역전되었다. 즉 영역 분리 이전에는 여성이 구원과 관련해 남성에 종속되었다. 반면 영역분리 후에 남성은 아내를 통해서, 그리고 아내가 만들어주는 안식처를 통해서만 하느님과 건강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가정 예찬 문화는 미국 기독교인에게 강력한 신학적 유산을 남겨놓았다. 이 유산에 따르면 기독교는 전업주부 어머니가 있는 가정에서 더 기독교 다울 수 있었다...가정 예찬 풍조로, 여성은 가족의 영적 생활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그 역할 때문에 사실상 공적 생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가족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능력을 갖춘 여성들은 가혹하고 무정한 경제 세계에서 협상하고 일하는 능력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젠더화된 신학적 인간학이 여성이 하느님과 더 깊고 중요한 관계를 맺게끔 할지는 몰라도, 이러한 관계는 실질적인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우파가 여성이 받는 실질적인 억압과 견제에 감응하는 방법은 사회권력, 물적 자원, 역사적 영향력을 경시해버리는 것이다. 곧, 오직 영적 능력에만 주안점을 두면서 현재 여성이 당하는 아주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차별은 간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은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과 사회경제적 정의 모두이다. 이 둘을 서로 경쟁하거나 상호배타적인 요구로 설정하는 어떤 모델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파의 젠더화된 신학은 다른 방식으로 남성을 억압힌다... 간단히 말해 남자는 아내가 전업주부로 집에 머물 수 있도록 충분한 소득을 올려야 한다. 게다가 영적 관계에서 여성에게 실질적으로 의존한다. 교회 활동에서 이 논리는 그대로 반복된다."
(캐시 루디, "섹스 앤 더 처치", 이하 같은 책)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남편들도 '산업 역군'으로서 해외에 나가기도 하고 국내에서도 과도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로 인해 남성들의 ‘밥벌이 시장’ 경쟁은 보다 심해졌고, 여성은 더욱 육아와 집안일에 대한 책임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전업주부인 아내를 둔 남편들이 흔히 "집에 오니 살 것 같다"거나 "아내가 잠시만 집을 비워도 남편이나 애들이 티가 난다"고 하는 말들이 이를 테면 가정 예찬 문화의 전형적인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교회 문화 속에서도 80-90년대 교회 성장의 주축은 여성도, 여집사들, 그리고 교회 여전도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새벽기도와 각종 예배 참석뿐 아니라 봉사활동에 참여도가 높았는데 자연스럽게 여성이 가정의 신앙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된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여성의 영적 역할론은 세속 사회에서 여성 차별의 결과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사회의 구조적 여성 차별이 여성을 가정이라는 울타리에만 갇히게 만들었고 여성은 그 안에서 세속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스윗홈'을 구현할 전적인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특히 저자는 "여성의 가정적이고 도덕적인 본성을 추켜세우는 동안 공적 영역에서 여성은 어떤 권력도 얻지 못했"고 "가정은 대체로 남성에게만 피난처였으며 여성에게 가정이란 단지 일하고 억압받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동성애의 단혼제 프레임
저자인 캐시 루디는 동성애 기독교인이다. 그녀는 기독교 우파가 혼외 성관계나,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를 앞서 말한 ‘젠더화된 신학’과 ‘가정 예찬 문화’에서 찾고 있다.

 

"기독교 우파는 이런 변화(지난 30년간의 성 혁명)에 반발하면서 부부의 성관계만이 도덕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보수 기독교가 순결을 강조하는 이유는 전반적으로 신학적 이해관계, 특히 젠더화된 신학과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섹슈얼리티와 기독교의 관계는 오래되고 복잡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현대 기독교 순결 운동의 신학적 토대로서 봉사하는 가정 예찬과 관련되어 있는 사태이다.

동성애에 대한 우파의 비난은 젠더, 결혼, 가족 생활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동성애자가 전통 가족 이데올로기와 충돌하는 이유는 성행위를 (국가가 승인한) 결혼관계에 국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는 합법적인 결혼을 하지 않기에 우파는 성관계를 맺는 모든 게이와 레즈비언을 처음부터 문란한 사람들로 치부한다."

 

그녀의 동성애 옹호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나는 그녀가 지적하고 있는 북미 기독교 우파 가정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사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녀는 우파 가정의 개인화된, 사회나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삶의 문제를 지적한다. 또한 최근 동성애를 포용하려는 우파 내부의 분위기도 바로 이 개인화되고 분리된 핵가족 문화를 향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전통 가족 가치와 결부된 양분된 젠더 역할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개인의 젠더를 기준으로 예측할 뿐만 아니라 "전통 가족"이 기독교 공동체의 자리를 빼앗아버리는 사회구조를 형성한다. 직계 가족만을 책임지며 사는 기독교인이 늘어가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능력을 상실한다. 가족 가치 운동은 우리를 더 관계 중심적이고 공동체적인 삶 대신 더 고립되고 분리된 삶으로 밀어 넣고 있다.

그런데 단혼제에 대한 이러한 암묵적인 강조머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 관계의 구조를 모방하도록 강요한다. 동성애자도 이성애자처럼 공동체가 아닌 배우자나 핵가족에 충성과 헌신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 집을 사서 "함께" 살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라고 권고를 받는다... 오늘날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의 핵가족을 흉내내는 달인들이 되어버렸다. 유일한 차이는 우리 한 명은 성별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생식, 상호 보완, 그리고 상호 합의(상호성)
캐시 루디는 역사적으로 섹스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녀의 논지에 따르면, 현대 교회는 섹스를 생식의 목적에서만 유의미한 행위로 간주하던 시기를 지나 상호 보완적인 의미로 나아갔다고 진단한다.

 

 

"생식에서 상호보안으로의 변화에서 유지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관심이다. 기독교 우파들을 포함하여 젠더화된 신학에 입각한 공동체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장하려는 욕구였다. 상호보완을 뒷받침하는 생각은, 하느님께서 남녀가 성적으로 결합하도록 의도하셨고 그러한 성적 연합으로 그들은 하느님과의 일체감과 친밀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상호보완의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은 남녀가 함께 살도록 계획하셨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보다 급진적인 성담론으로 나아간다. 이른바 상호 합의, 혹은 상호성(mutuality)으로서의 섹스가 그것이다. 그녀의 급진적 성 윤리에 따르면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 더 나아가 단혼제의 구속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막 나가자는 거지요?"라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떠오를 정도로.)

 

"해방운동가들은 기독교 성 윤리를 위한 규범으로서 생식성과 상호보완성 모두를 폐기하고 성인이 상호 합의한 성적 행위는 도덕적이라고 본다. 상호 합의한 섹스가 우리를 서로 그리고 하느님과 가깝게 하고 모든 환경에서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도록 장려하여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데 카터 헤이워드는 상호성(mutuality)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섹스가 하느님과 정의 둘 다와 관계된다고 제시한다."

 


공동체에 충실한 젠더 문화의 탄생(?)
급진적 성담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진단과 현실 인식에 크게 공감한다. 특히, 가정 예찬 문화라거나 단혼제가 교회 내에서 핵가족화되고 자기 가족만을 책임지려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 교회 공동체는 점점 붕괴되어가는데 남성은 사회 생활을 통한 가족 부양에 ‘올인’하고 여성은 가정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미명하래 가족 이기주의에 갇힌 현대 문화에 대한 그녀의 인식 말이다.

 

"제임스 넬슨은 이렇게 말한다. "독신자들은 파트너가 없다는 이유로 온전하지 못한 존재로 빈번하게 간주됩니다... 사실 자발적인 독신생활이란 어쩐지 기독교인 답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많은 교회에서 독신들이 안식처를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녀는 (이성애에 국한된) 가족 이기주의가 팽배한 교회 안에서 독신자, 동성애자들은 공동체성을 느낄 수 없이 교회를 겉돌거나 급기야는 떠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을 정확히 짚고 있다. 이것이 무슨 공동체이며 이것이 무슨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관계 맺는 형제 자매들의 집단인가.

 

그렇다면 그녀의 대안이자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녀가 이러한 문제, 즉 기독교 공동체의 긴밀함을 회복하기 위해 집중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성 해방이 그것이다. 그녀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바보야, 문제는 섹스야."라고.

 

"낯선 이들끼리 우연히 성적 관계를 맺을 때조차 아주 종종 만남 그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거나 관계를 맺는 이들에게 의미를 남긴다. 보통 우리는 섹스를 하면서 개인의 경계를 잠시나마 잊는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변화하면서 타인과 연합하게 된다. 섹스가 설명할 수 없지만 아주 깊이 우리를 타인과 연결하기 때문에 우리는 섹슈얼리티의 도덕성을 생각해야만 한다. 성 윤리는 친교와 소속의 신비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비록 모든 동성애자 공동체가 그렇게 이상적인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할 지라도, 각각의 성적 만남은 일정부분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을 공고히 하고 각 개인의 참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공동체를 더 튼튼하게 한다. 비록 섹스 파트너의 이름을 다 알지 못할지라도 그런 만남 각각은 자신의 소속감을 강화한다."

 

그녀가 경험한 성적 교제는 우리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깨고 "섹스를 하면서 개인의 경계를 잠시나마 잊는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녀는 섹스가 "아주 깊이 우리를 타인과 연결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친교와 소속의 신비를 규명"하게 된 셈이다. 그녀는 결국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급진적 젠더 문화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나는 다르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많은 게이 및 급진적 성 공동체의 구성원은 배타적 관계라는 "보편적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모델 -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인 - 에 맞춰 성적, 사회적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세계에 있는 많은 이에게는 보통 공동체 전체에 충실하는 것이 내부 구성원들의 짝짓기보다 필수적이고 의미가 있다.

 

나는 동성애자 사회의 공동체적 섹스를 부도덕한 행위로 서술하는 것보다는 동성애자들과 급진적 성 문화의 긍정적이고 공동체적인 측면을 연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 공동체들이야 말로 동성애 차별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가부장적인 핵가족이라는 헤게모니가 도전받는 얼마 남지 않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하는 섹스가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관계는 모든 교회에서 도덕적이라고 선포되고 축복받아야 한다.

 

나의 제안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또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놓인 구분선을 교회와 세상 사이에 재정렬하자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남성/여성 또는 동성애자/이성애자라는 낡고 억압적인 구분을 적극적으로 무시하면서 교회/세상이라는 새로운 구분을 지지하는 성 윤리 체계를 추구하기를 제안한다."

 


그녀의 급진적 도전, 복음주의 교회는 대답하지 말고 대안하라.
아마도 다수의 기독인들은 이 책을 무시하거나 교회 안에서도 성적 문란함이 경건한 시대정신을 물들이고 있다고 비판할 것이다. 혹은 성경에 근거하여 동성애나 그녀가 제시하는 급진적 성 해방 공동체의 문제들을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혹자는 책을 집어던지거나 불태울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도 이 책은 그간 내가 경험한 어떤 페미니즘보다 '리버럴'했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내가 익숙한 신학자들을 자주 인용한다. 이를 테면 기독교 근본주의 역사를 짚으면서 조지 마스던이나, 마크 놀, 나단 해치, 그리고 짐 월리스 같은 복음주의자의 저작들을 인용한다. 그리고 젠더 논쟁에 있어서는 ‘퀴어 이론’을 교회공동체의 성 해방 문제와 접목시킨다. 학제간을 넘나드는(interdisciplinary) 그녀의 논지는 현란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그녀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실질적’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녀의 대안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안에는 역사 속에서 차별받고 상처받은 여성들과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근본적 공감이 깔려 있다. 진보적인 성향의 남성과 결혼한 많은 여성들이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폭력에 시달렸고 그녀들은 가정에서 성적 만족을 누리기 보다는 억압받고 ‘창녀 취급’(성적 서비스만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받아왔다. 오죽하면 부부싸움 후의 상대와의 성관계에 대해 남성은 "부부싸움 후 육체적 화해를 이루었다"고 보는 반면 여성은 "부부싸움 후 성폭행까지 당했다"고 받아들인다는 얘기가 자주 회자되겠나.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페미니스트 알리스 슈바르처는 "아주 작은 차이"란 책을 통해 많은 여성들이 성적 만족을 얻지도 못하면서 남편들에게 성관계를 요구 받는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많은 여성들은 가정에 갇혀서 가사노동과 육아의 짐을 벗을 수도 없다.

 

캐시 루디는 교회 안에서 '정상적'이라고 평가되는 가족이 단혼제 구조 속에서 여성을 억압하고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서 오히려 교회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과정을 냉정하게 짚고 있다. 결국 그녀는, 앞서 얘기한대로 섹스가 "아주 깊이 우리를 타인과 연결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친교와 소속의 신비를 규명"하며 결국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서 성적 경험을 공동체 사람들과 공유하는 급진적인 성 해방 공동체를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녀의 대안이 이른바, '섹스 환원주의', '젠더 환원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느낀다. 성교로써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그녀의 대안에 동의할 수도 없고 성경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비판을 길게 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간 우리는, 기성 교회는 말만 무성하게 해댔다. 비정상적인 신학과 비정상적인 공동체, 비정상적인 정치의식에 대해 말은 참 많이도 한다. (지금도 내 페북 담벼락에선 칼빈주의, 성추행 목사, 정부비판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하지만 캐시 루디의 ‘비정상적인 대안’에 이르게 되는 과정 안에서의 미시적이지만 현실적인 문제, 그 안에서 고통 받은 소수들에 대한 진심어린 공감과 치열한 진단이 없었던 건 아닌가. 동성애, 낙태 등에 대하여 "어떻게 볼 것인가"만 떠들어댔지, 우리 중에 누가 진정으로 이슈 자체보다 그 당사자들의 친구가 되어준 이들이 얼마나 있었나 싶다. 관계를 떠나 논리적인 선포만 난무하는 기성 교회는 이제 이런 책들에 대답하지 말고 대안하자. 난 이렇게 말하고만 싶다. (끝)

2012/10/21 01:51 2012/10/21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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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논쟁
Did the Resurrection Happen?
앤터니 플루, 게리 하버마스 지음|데이비드 바게트 편집

 

 


내가 기독매체에 처음 기고했던 글은 누군가가 쓴 글에 대한 반론이었다. 그 때가 1999년이었는데, 당시는 강준만 교수가 “인물과사상”이라는 일인저널룩을 통해 한국 보수진영 인사들과 매체들에 대한 이른바 ‘실명비판’을 활발하게 시도하던 시기였고, 이제 막 유명해진 진중권이 내게 아이돌 스타만큼이나 멋있어 보이던 때였다. 나는 한동안 잡지에 실린 그의 논쟁 글이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같은 책들을 읽으며 그의 글쓰기 스타일을 따라 했고, 매체에 기고한 나의 첫 반론 글에는 자연스럽게 논쟁을 유발하는 냉정한 스타일이 묻어났다. 나는 그 글로 인해 온·오프라인에서 몇 차례 더 논쟁을 주고받았고, 그 일을 계기로 이후 몇 년 동안 교계 온라인 논객 ‘행세’를 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처음 원고를 쓰던 날 상대에 대해 공격적인 표현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심약한 마음에 심장이 두근거려 글을 쓴 후에도 잠을 설쳤다. 많은 논쟁을 겪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진중권의 그것과는 다른 내 스타일을 찾아갔는데, 특별히 교계 논쟁은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한 몸 된 지체 안에서 주고받는 것이므로 더 신중하게 사랑으로 행해야 함을 절감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논쟁」은 가히 우리가 배워야 할 명품 논쟁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이 책은 무신론자의 대표 격인 앤터니 플루 교수와 예수 부활에 대한 역사적 논쟁의 전문가인 게리 하버마스 교수가 베리타스 포럼에서 진행한 세 차례의 논쟁 중 마지막 논쟁을 담고 있다. 하버마스 교수와 플루 교수는 1985년에 한 컨퍼런스에서 만난 이후로 우정을 쌓아 왔고, 그런 신뢰 속에서 세 차례에 걸쳐 논쟁이 이뤄졌기에, 이들의 논쟁은 태생적으로 양질의 토론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며 진지하게 경청하는 논쟁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이 논쟁에서 하버마스가 토론을 거의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이 논쟁은 2003년 1월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행해졌고, 이듬해에 플루는 유신론으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한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이와 관련한 대화를 녹취하여 출판했고, 그 내용은 이 책의 2부에 실렸다.) 또한 플루는 2007년에 에이브러햄 바기즈와 「존재하는 신」을 출판하면서 무신론에서 이신론으로, 다시 유신론으로 입장을 바꾼 자신의 지적 여정을 풀어냈으면서 이 책은 관련된 논의를 지켜보던 많은 이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플루의 지적 여정을 돌이켜볼 때, 이 책에서는 하버마스가 우세하게 논쟁을 끌고 갈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을 마치 ‘유명한 무신론자와 싸워 이긴 유신론의 승리’에 관한 책으로 독해하면 안 된다. 여전히 많은 무신론자가 유신론에 대한 회의와 심한 조롱을 일삼고 있으며, 유신론도 ‘젊은 지구 창조설’이나 ‘지적설계 이론’으로 말미암아 학문적으로는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아 오지 않았는가. 또한 플루의 고백처럼, 그는 ‘레알’(real) 기독교로 회심한 것이 아니며, 여전히 계시를 믿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노년의 무신론자가 회심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유신론에 대해 열린 자세를 견지한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도리어 폄하하는 기독교인들도 종종 있는 듯하다. 이런 이들은 무릎 꿇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하지 않는 한 기독교와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비전문가로서 조금만 생각을 덧붙인다면, 나는 플루의 회심이 학계나 일반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고 본다.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앤터니 플루는 큰 의미가 없는 이름이겠지만, 무신론자들에게 플루는 중심적인 인물임에 분명하다. 특히 1950년에 발표한 「신학의 위증성」은 현대 무신론의 방향성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되며, 「신과 철학」, 「무신론 추정」은 무신론의 고전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플루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배경지식이 없는 이들이 여간해서는 따라잡기 어려운 무신론 논쟁의 학문적 추이를 경험하게 된다. 일례로 이 책의 부록에 실린 데이비드 바게트의 “부활의 의의”를 읽어 보면 늪에 빠진 기분이 들 것이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저작으로부터 시작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유신론 비판과 창조, 진화 논쟁에서 언급되는 ‘틈새의 신’, 지적 설계 이론, 방법론적 자연주의, 과학주의 등을 이해하려면 과학철학사 전반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데이비드 흄의 기적에 대한 반대 주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리처드 도킨스와 샘 해리스로 대변되는 ‘신 무신론자’들의 저서, 그리고 하버마스의 ‘최소한의 증거’에 대한 입증과 비판에 동원되는 역사적 예수 논쟁에 이르기까지, 실로 비전문가가 다루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깊이와 넓이의 논의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론은 실상 현대 학문적 풍토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지만 플루의 ‘변절’이 다시 이 논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불완전한 회심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그가 쓴 「존재하는 신」의 후반에는 로이 에이브러햄 바기즈의 신 무신론 비판과 톰 라이트의 역사적 예수에 관한 대화가 실려 있다. 관심 있는 이들은 이 책을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가장 큰 유익은 오랫동안 무신론의 학문적 여정을 걷던 노학자가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의 학자와 오랜 시간 격을 갖춰 논쟁을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해 나가는 모습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오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불행히도 나는 논쟁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 가운데 서로 다른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한두 번은 있었겠지만, ‘뜨거운 감자’와 같은 사안을 두고 이런 경우를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글의 초반에 언급했던 강준만의 “인물과사상”이 많은 논객을 양산했지만, 그들은 2000년대 초반에 ‘안티 조선운동’으로 뭉쳤다가 노무현 정권 후 뿔뿔이 흩어졌다.

 

내 기억에 당시의 논객들은 서로 교제도 나눴는데, 그들이 지나치게 호된 비난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흩어져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한때 나도 논쟁에 대한 ‘쿨’한 룰이 있었다. ‘깔 때는 살벌하게 제대로 까주고 당하고 나서도 내가 틀렸으면 깔끔하게 인정하자’는 것. 문제는 깔끔하게 인정할 수 있는 사안이 그리 많지 않고 (‘너도 말실수 했잖아’ 식의) 인신공격이나 상호 비방이 이어지면 그 사람에 대한 불쾌감을 떨칠 수 없더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표 논객 강준만이 요즘 자신이 그렇게도 비판하던 양비론을 글쓰기 전반에 내세운 것이 못내 아쉽지만, 오랜 논쟁으로 인해 어떤 입장을 떠나 인간 자체에 대한 환멸이 그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가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존 스토트가 영혼소멸설을 주장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 누군가가 ‘그 영감 이제 노망이 나셨군’ 하고 썼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 지인의 글에 ‘이런 글 안 쓰려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댓글을 쓴 이도 있었다. 정해진 종교적 룰에 따라 쉽게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만, 신뢰를 잃지 않는 가운데 상대의 입장을 비판하는 훈련은 우리에게 여전히 부족하지 않나 싶다. 그런 연유로, 치열한 논쟁을 위한 이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가 될 것 같다.(끝)




*IVP 북뉴스 2012년 5-6월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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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1 01:49 2012/10/21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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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IVP BOOKNEWS 11년 11/12월호에 실린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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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때, IVF에서 나름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었던 나는 프란시스 쉐퍼의 대표적 기독교 변증서인 「거기 계시는 하나님」, 「이성에서의 도피」를 읽으며 기독교가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있고 복음에 대해 합리적인 방식으로 비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그렇게 지적으로 충만한 시간을 보내던 중 내가 속한 지부에서 ‘추구팀 수련회’를 계획했고, 나는 부조장으로 그 수련회에 참석했다. 이 흥미로운 소그룹에서 조장 누나와 나는 각각 한 명의 1학년생을 맡아 1박 2일간 전도를 하게 되었다. 나는 알고 있는 지식을 모조리 쏟아 부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나를 준비시키셨구나 싶기까지 했다. 일대일 나눔의 시간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자신을 아무개 대학교의 물리학과 새내기라고 소개한 그 학생과 세 시간 정도 쉬지 않고 논쟁했다. 그는 신앙 추구자라기보다 기독교 혐오론자에 가까웠다. 허나 그는 입시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신념에 비해 실제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던 반면, 나는 그간 특수훈련을 마친 특공대원처럼 현란하게 대화를 주도하며 그 학생의 논리적 허점들을 짚어 나갔다.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 “형 얘기가 다 맞네요. 근데 저 이제 집에 가도 되죠?” 나는 귀를 의심했다. 집에 가겠다고?

그 학생을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 준 간사님 말에 따르면, 그는 다시는 이런 모임에 오지 않겠다며 갔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다. ‘내가 이겼는데 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 도대체 왜 내빼는 거야.’ 당시에는 화를 달래기 위해, 그가 당장은 받아들이지 못해도 언젠가 내 주장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돌아오리라고, 내가 그 씨앗을 심었다고 자위하려 애썼다. 하지만 내 영험(靈驗)한 기대와 달리 그는 영영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나는 한동안 전도의 기회를 날렸다는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여전히 기독교 변증 자체에 대해 대놓고 부정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날의 트라우마로 인해 실제로 비그리스도인에게 기독교 변증을 시도한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변증이나 설교가 아닌 삶 자체를 통해 예수를 알려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뿌리 깊게 내재되었다.

최근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기독교를 믿을 수 없는 17가지 이유」라는 책을 발견했다. 책이 눈에 띈 건 순전히 표지 때문이었는데, 나와 아내가 좋아하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반들과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이라는 책의 독특한 타이포 디자인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흥미롭게도 모두 김기조 씨의 디자인이었다.) 아마 이 책이 변증서라는 걸 알았다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익숙한 책표지가 눈길을 끌었고(기독교 변증서와 인디 문화 디자인의 조화라니!), 그에 더해 뒤표지에 실린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대단히 재미있다. ‘새로운 무신론’에 응답하는 지금까지의 책들 중 단연 최고다”라는 추천사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렇게 이 책을 펼쳐들고 단숨에 완독했다.

이 책의 묘미는 분량이 짧고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는 데 있다. 사실 그런 책들은 대개 내용이 부실하다. 물론 이 책도 그렇다. 좀더 궁금한 독자는 ‘주’에 표기된 자료들을 찾아봐야 할 성싶다. 하지만 비슷한 분량의 변증 입문서들과는 다르다. 대개 변증 입문서들은 아주 일반적인 내용들을 간략히 다루기 때문에 책의 전반적인 논조에는 동의가 되더라도 특별히 ‘써먹을 알맹이’가 없는 데 반해, 이 책은 17가지 이유를 변호하는 각 장마다 조사된 통계 수치와 자료들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해 막연한 반감을 토로하는 비그리스도인에게도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다가갈 것 같다. 또 이 책은 모든 종교는 거짓이고 해롭다는 21세기 초 ‘신(新)무신론자’들의 주장에 충실히 응답한다. 그중에서도 진화론자이자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책들은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의 논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도킨스를 중심으로 한 ‘신무신론자’들의 입장과 그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특별히 기독교에 대한 논쟁의 두 축을 이루는 진화론과 동성애 문제에 대한 논증은 이 책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진다. 먼저 진화론 문제로, 미국인의 43퍼센트(2007년, 갤럽 조사), 복음주의 개신교도의 73퍼센트(같은 해, 뉴스위크 조사)가 진화론을 반대하며, 하나님이 약 1만 년 전에 인간을 단번에 창조하셨다는 ‘젊은 지구 창조론’과 생물이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가진 존재이므로 설계자인 신적 존재가 필요하다는 ‘지적설계’ 이론을 대안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과 달리 진화론에 근거한 현대 과학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화석의 연대가 그보다 더 오래되었음을 밝혀냈고, 중간 화석의 존재를 예견한 바로 그 장소와 시점에서 화석을 발견했다. 프랜시스 콜린스는 「신의 언어」에서 ‘불용 DNA’(하는 일이 없는 DNA 흔적)조차도 인간과 생쥐가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지적설계운동은 어떤가? 저자는 이 책에서 지적설계 옹호론자의 주장, 즉 ‘빈틈을 메우는 신’이란 개념에서는 과학이 그러한 생물의 복잡성을 하나하나 설명해 가면서 신의 개입 여지가 점점 줄어든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이런 이유로 국제과학종교학회는 2008년에 과학으로서의 ‘지적설계’를 배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성소수자(동성애자) 문제에 있어 마이어스는 기독교가 원래 동성애자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는다고 전제한 후, 성적 성향은 생물학적 영향에 근거한 자연적 성향이자 ‘지속적’ 성향이기에 개인의 의지나 목사의 설득으로도 바꿀 수 없음을 설명한다. 또한 성경은 이처럼 지속적인 동성애적 성향에 대해 언급한 바 없으며, 동성애에 관해 언급된 일곱 구절도 우상숭배, 사원매춘, 아동학대, 폭력과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록 가수 보노의 말을 인용하며 성경이 가난에 대해서는 2,100번 이상이나 언급하는데도 극소수의 논쟁적 구절에 매달리는 것은 예수가 중요하게 여긴 문제와 거리가 멀다고 논증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대학교 2학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지금 그 학생을 만난다면 그때만큼 ‘미친 짓’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저 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이 책을 전해 줄 것 같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일정 부분 편견을 버리고 기독교에 대한 혐오적인 반응을 누그러뜨릴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전제하는 동성애나 진화론에 대한 열린 자세로 인해 보수적 그리스도인의 상당수는 강하게 반발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빨갱이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동성애자들은 지옥불로 떨어져야 한다고, 진화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진정한 창조주인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회들이 많지 않은가. 김두식 교수도 자신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성소수자(동성애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내용을 썼다가 그리스도인들의 호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거룩한 소망의 측면에서 매사에 조심하고 선을 먼저 긋는 보수적인 교회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이유로 인해 교회로 어렵게 발걸음을 옮기려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맘 편히 소개해 주고 싶은 교회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과연 한국 교회가 이 책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논지들은 먼저 기독교 내부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12/10/21 01:48 2012/10/21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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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이긴다 Love Wins
랍 벨 지음, 양혜원 옮김/포이에마


<사랑은 이긴다>를 다 읽었다. 논쟁 지향적인 성향이 내재해 있어서 그런지 책 읽는 속도가 평소대비 두세배는 되었던 듯 하다. 다 읽고 보니 사실 얘기할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 개인적으로 기대보다는 (논쟁할만한) 내용 자체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랄까. 이 책은 천국, 지옥, 진노하는 하나님 이런 개념 때문에 교회의 문지방을 넘지 못했던 semi-christian에게 큰 울림을 줄 책이라 확신하지만 성경을 비교적 깊이있게 공부한 학자풍의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보수적 신학도들에게는 약간의 실망감을 줄 수도 있으리라 사료된다. (그런 의미로 나는 이 책에 대한 논쟁은 '깊이'보다는 '입장'에 기인하리라고 예상한다. 나또한 그런 부분에서 글을 쓰려고 한다.)

총평. 기존에 많은 이들이 이 책에서 생길 법한 논란거리들에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관계로 내가 굳이 동어반복의 글을 쓸 필요는 없겠다. 더 잘 쓸 자신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김영봉 목사님의 추천 서문과 의견이 일치한다. 교계의 배경 때문인지 내가 약간 더 보수적인(비판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특히 그가 신학자가 아니라 설교자라는 점, 이 책이 현대 기독교의 내세주의적 사고에 균형을 준다는 점, 그리고 지나치게 정죄하는 교회 분위기를 쇄신한다는 점에서 크게 김영봉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한다.

조금 불편한 부분은 그의 성경해석이 다소 가볍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과장된 해석이 보이면 그의 논리적 큰 흐름에 상관없이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아마도 이런 부분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은 '사랑이 절대 이기지 못한다'로 목소리 높일 것이다. 두번째로 불편한 부분은 신앙의 균형점인데 제자도로서의 예수의 희생, 헌신이 배제된 채 '나를 위한 하나님'이란 측면에서 사탕발림의 메시지만 풀어낸 게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도 든다. (곧 포이에마에서 복음주의진영의 비판서 '하나님이 이긴다'도 번역 출간한단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 내가 랍벨이 말하는 큰 형의 모습은 아닌가 되돌아보게 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내 신앙적 입장에서는 회심 이후의 고난에 대한 균형이 다소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최근 고인이 된 존 스토트 신부님이 '더' 좋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되는 각각의 이슈마다, 필요 이상으로 균형 잡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그의 성실함이 '더' 좋다.

마지막으로 그의 확신에 차서 말하는 '스타일'이다. 난 겸손한 사람이 좋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마음이 커지는 게 개인적으로도 참 우려스럽지만,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설교자들, 웅변가들에 일단 점수를 후하게 주지 못하는 게 요즘 내 솔직한 심정이다. 사족이긴 하나, 기독교 내부에서 자기 PR에 유능하고 자신과 반대성향의 집단에 지나치게 과격한 이들은 이제 부담스럽다. (사족으로, 예수님도 욕을 하셨다지만 예수에게 배울 게 욕밖에 없는 건 아니잖나. 욕의 제자도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조폭에게서도 그 제자도를 실현할 수 있잖나.) 좋은 방향성을 가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랍벨의 이런 확신에 차고 단호한 태도가 조금은 아쉽다. 특히 논란의 중심에서, 지옥의 존재 부정이나 보편적 구원론으로 치달을 수 있는 그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너무 '하이웨이 스타'처럼 내달리는 것 같아 간간이 혼자서 '워-워-'를 되내인다. 때때로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도올 김용옥을 떠올렸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 분노하며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것 같은 칼빈주의자들을 더 자주 그려보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이란 설교에 감동하며 회개하고 '이 벌레같은 날위해'라는 가사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대다수의 개혁주의 성도들에게 이 책은 치명적으로 불온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니! 성경에 명시한 지옥을 상상할 수 없다니. 불신자들의 구원에 대해 열린 태도라니. 김영봉 목사님에 따르면 실제로 이 책의 여파로 인해, 2011년 6월 15일, 남침례교 연차 회의에서는 '지옥에서의 영원하고도 의식적인 징벌을 믿는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고 한다!

내 주변에도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복음을 인간(편의를 위한) 복음으로 추락시켰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핵심교리를 버렸다는 비판을 할 '구름같이 허다한' '칼빈의 후예들'이 몇몇 떠오른다. 그들은 교리를 잣대로 랍벨의 책을 대충읽고 쓰레기통에 쳐넣을 것이다. 혹은 조목조목 오류를 짚어내면서 정통 교리를 사수하려는 정의감에 불타오를 것이다. 솔직히 나는 교회의 성도들, 그 개별적인 삶을 돌아보고 고민하지 않는 목사, 신학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가 더 걱정스럽다. 교리를 떠받들고 자기 성도는 '벌레'같이 보는 목회자가 두럽다. 의심에 찬 성도들을 이교도 취급하고 그들의 회의감을 제대로 해결해주지도 못하면서 교회에서 떨어져나가도 예정설이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설교하는 기성 교회 목사님들이 두렵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지, 생각보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짧게 마무리하자면, 그들보다 랍벨이 낫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끝)

2012/10/16 01:44 2012/10/16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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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미국사 산책
:한국 기독교가 미국사 산책에 동참하길 바라며


강준만 교수가 만만치 않은 분량의 미국사 책을 냈다. 물론 강 교수는 이미 4년 전에 <한국 현대사 산책>이라는 18권짜리 대작을 낸 바 있으며, 2년 뒤에 다시 10권의 <한국 근대사 산책>을 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실 한때 단행본과 월간 <인물과사상>으로 대한민국의 대표 논객이었던 그는 언제부턴가 쟁점이 되는 정치 이슈와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집필 활동에 자신의 내공을 쏟는 느낌이다. 어쨌거나 그의 신간은 항상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쓴 미국사는 어떤 책일까. 일단 분량부터가 만만치가 않다. 모두 15권으로 기획된 이 책은 이제까지 7권이 출판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간 역사학계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통합, '통섭'이라는 시각에서 미국사를 읽어 내려 한다. 그간 역사학자들이 전문성이라는 미명 아래 특정 주제나 특정 시대에 국한된 파편적인 내용을 좁고 깊게 파는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녹아 있다.

또한 그는 "친미·반미 이분법이 우리의 미국에 대한 이해를 망치고 있는 것 같다"며 미국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른바 '미국인도 몰랐던 미국 역사의 진실'이라는 소개 글이 단순한 광고 카피 같지만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하워드 진이나 노엄 촘스키처럼 미국에 비판적인 진보 학자들의 저서들도 활용했지만,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저자들의 목소리도 가감 없이 전달하려 했으며 "어느 한쪽만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기존의 반(反)통합적 미국사와는 결별하고 미국의 명암을 동시에 살펴보려 했다"고 밝혔다.

나는 이 시리즈물을 읽기 시작하면서 기독인, 특별히 개신교, 장로교 배경의 기독인들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렇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크게 보면 기독인이 두 동강이 나 있다. 한편에서는 진보 진영을 지지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친미 집회를 하고 정치적 좌파들을 사단 취급한다. 또한 교파에 있어서도 폐쇄적이다. 루터나 칼뱅으로부터 비롯된 개신교의 역사, 교리에 대해서는 은혜로운 예화들 위주로 알려져 있으며, 개신교의 악행에 대해선 함구하기 일쑤다. 반대로(최근에 많이 소개되긴 했지만) 아나뱁티스트나 퀘이커 교도와 같은 평화주의적인 기독교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적고 때때로 그들을 이단시하고 정죄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몇 부분만 나누어 보자. 본서에서는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 불려지는 루터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들이 자주 언급되는데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루터는 농민 반란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외형과 의식에서 가톨릭 예배의 색체와 허식의 많은 부분을 유지하는 등 보수적 개혁주의 노선을 걸었다. 1525년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이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셨다'고 부르짖자 루터는 귀족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폭도를 죽이는 사람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 따라서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비밀리에 또는 공공연히 때려 죽이고, 목 졸라 죽이고, 찔러 죽여야 한다. …… 만일 여러분이 이런 투쟁에서 죽는다면 여러분은 진정 축복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보다 숭고하게 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46쪽)

대체로 장로교에서는 루터가 가톨릭을 극복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는 편이지만 <기독교 강요>를 집필한 장 칼뱅에 대해서는 그 입장이 다르다. 한국 교계의 칼뱅 숭배는 바이블 수준이다. 물론 강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 준다.

"미겔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와 유아 세례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불타는 장작 더미 위에서 그가 쓴 책들과 함께 불타 사라졌던 장면을 보자. …… 세르베투스는 말짱한 정신으로 서서히 불에 그을리면서 생살이 타는 고통을 오랜 시간 느끼며 죽어 가야 했다. 이 극악한 형벌의 이유는 오직 하나, 칼뱅과 다른 성서해석을 책으로 낸 행위뿐이었다. …… 칼뱅은 다음 일요일 검은 수도복을 입고 강단에 서서 그 화형은 위대하고도 꼭 필요한 일이며 정당한 일이었다고 찬양했다.(56쪽) …… 칼뱅의 예정설에 반대 발언을 하면 화형에 처해졌다. 술에 취해 칼뱅을 욕한 어떤 출판업자는 불타는 쇠꼬챙이로 혀를 찔린 다음 도시에서 추방되었으며 칼뱅을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처벌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58쪽) …… 일찍이 칼뱅은 '여성으로 하여금 복종하는 것에 만족하게 하라. 그리고 여성이 한층 우월한 성보다 열등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라'고 주장했으며, 퓨리턴은 이 원리를 따랐다. (170쪽)"

특히 청교도들은 근면하고 금욕적인 모습으로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종교라는 미명 아래 많은 악행도 일삼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녀사냥'이라 할 수 있겠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유럽 전역에서 마녀 사냥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는 1585년부터 1635년 사이의 약 50년 동안이었으며 마녀사냥으로 처형된 희생자의 수에 대해선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900만 명으로 역사가들마다 견해가 다양하다. (188쪽) …… 마녀사냥꾼의 주요 마녀 감별법은 용의자를 물에 던지는 것이었다. 마녀 용의자의 팔다리를 묶고 담요에 말아 연못이나 강에 던져 가라앉으면 가족에게 무죄라고 위로하면 그만이었고 물에 뜨면 마녀라는 증거이므로 화형에 처해졌다. (192쪽) …… 고발된 마녀들은 대부분 중년 여자들로 자식이 없는 과부였다. 사회적 신분이 낮고 가정에 문제가 있고 다른 죄가 있다고 자주 고발당하고 이웃들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퓨리턴 규범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 게 문제였다. (196쪽)"

이뿐이랴. 미국 역사에 있어 청교도의 아메리카 이주와 독립 혁명은 역사책과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자주 미화되었고 불행히도 우리는 그것을 비판 없이 흡수하곤 했다. 저자는 청교도들이 신대륙에서 인디언에게 행한 야만적 행동들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백인이 인디언을 매우 잔혹하게 공격한 것은 원주민에 대한 퓨리턴의 태도에 기인하였다. …… '피쿼드 전쟁'이라 알려진 이 전쟁에서 백인들은 인디언 주민 600명을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성인 남자들은 모두 살해했는데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훗날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는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그러나 승리하는 데 있어 이것은 달콤한 희생처럼 보였는지,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이런 놀라운 일을 하신 신을 찬양하였다'고 썼다." (118~120쪽)

강 교수는 루터교나 장로교 등 종교 개혁 이후 우파에 해당하는 주류 개신교의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주류로부터 핍박을 받은 퀘이커 교도들과 같은 신자들이 역사적으로 볼 때 인종 차별의 극복이나 평화주의 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는 퓨리턴과는 달리 완전한 남녀평등을 지향했으며, 성과 계급도 구분하지 않았다. 교회 건물이나 행정 기구도 없고 집회소만 있을 뿐이었다. 월급을 받는 목사도 없었으며 예배를 볼 때엔 성령에 의해 감동받은 사람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했다. 폭스는 성서의 계명 '살인하지 말라'를 원뜻 그대로 취해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퀘이커 교도들은 철저한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찰스 2세 치하에서 퀘이커 교도 3,000명이 투옥되는 등 영국에선 박해를 받았기에 이들은 아메리카로 이주해 자신들만의 식민지를 원했으나 특허장을 얻을 만한 영향력이 없었다. (170쪽) …… 실제로 퀘이커 교도의 인도주의는 인디언에 대한 양심적인 대우와 흑인 노예에 대한 선구적인 반대로 나타났다. 이미 1657년에 일부 퀘이커 교도들은 기독교의 정신과 노예 제도의 상응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 (174쪽)

이 책을 읽다 보면 믿음의 선조들이 남긴 발자취에 때론 당혹스러워서 마음 한편이 쓰리기까지 하다. 이미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의 위상이 바닥임에 분명한데 이 책을 통해 한국 기독교만 문제가 아니라 청교도와 개신교의 역사에서부터 기독인이 저지른 악행들이 문제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도 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의 역사도 되짚어 볼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전히 한국교회에서는 이단 시비를 통해 멀쩡한 목사를 매장시키려 들기도 하며 영적인 세계를 빌미로 마녀사냥에 버금가는 폭력을 일삼기도 하지 않은가. 특히, 미국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들로 인해 한국교회 자체도 하나의 몸 된 지체가 되지 못하지 않은가. 강 교수의 모든 논지를 긍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적어 나가는 미국사 산책의 여정에서 한국교회도 미국에 대한, 그리고 그 영향력 아래 있는 개신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지평을 넓혀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ㅊ
2012/10/16 01:42 2012/10/16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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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멘토의 시대'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해 '멘토'에 관한 책은 아니다. 강교수는 이 책을 통해 지금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하고픈 말을, 몇몇 멘토로 각광받는 이들을 지명하여 그들의 명과 암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듯 하다.

강준만 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개혁과 진보를 외치는 것 같은 몇몇 열혈 네티즌은 [강남좌파]가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책이라고 비난하는 수고를 해 주셨다. 인물과사상에 실린 '박원순 현상의 명과 암'이라는 글에 대해서도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네티즌이 많았다... 이 사건은 한국 정치가 갈수록 종교화돼 간다는 내 생각을 재확인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은 대중으로 하여금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적 지지, 내지는 냉정하고도 자성적인 판단을 촉구하려는 목적성을 가지고서 멘토로 치부할 만한 몇몇 진보적 인물들을 해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런 이유로 아마 이 책을 읽고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강교수의 '변절'에 실망감을 갖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강준만 교수는 자신이 처음부터 진영에 상관없이 그들의 명암을 드러내는 일을 자처해왔고 그로 인해 비판도 많이 받아왔다고 고백하지만, 내 생각에 그의 억울한 마음의 초점이 약간은 빗나가지 않았나 싶다. 사실 박원순 시장의 당선에는 나꼼수의 영향력이 있었듯,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의 일등공신은 강준만과 그의 [인물과사상]이지 않았던가.
 
강준만 교수는, 현재로서는 그런 평가로부터 벗어나길 바라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타부시 되어온 실명 비판과 양비론 비판의 효시라 할 만 하다. 특히 그는 정치에 관한 한 '도토리 키재기'가 필요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놈을 골라 그를 지지하는 꼼꼼한 수고가 필요하다고 역설해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진보진영에 강한 자신의 스탠스를 유지해왔다. 그가 한국논단이나 김대중, 조갑제 같은 언론과 언론인의 진상 짓거리들을 촘촘하게 비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진보진영 논객들이 함께 참여한 '안티조선 운동'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의 강준만 교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강 교수는 진보정치에 실망하고 특히 민주당에서 열우당 창당 시기에 논쟁을 하다가 정치 이슈에 대해 절필을 선언한다. 문제는 그 지점에서 그는 언로를 스스로 닫았고 그 후로 심경의 변화 내지는 -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 지평의 확장이 일어났겠지만, 그 부분이 사실상 크게 대중이나 논객들에게 각인되지는 못한 느낌이다.
 
결국 이후로 나오는 [인물과사상] 기고글들이나 [강남좌파], 이번에 출간된 [멘토의 시대]에서 취하는 그의 정치적 스탠스는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느끼기에 왠지 낯설고 불편한 것이 되고 있다. 강 교수는 또다시 네티즌들이 그런 불편함을 표하는 것이 불편한 악순환을 돈다.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멘토라고 생각하는 '강준만'의 변화에 나도 적응하지 못해 작년 초인가..한동안 그의 기고글이나 관련 기사들을 매의 눈으로 열심히 찾아서 읽어대던 기억이 난다. 그의 궤적을 훑어간 지금은 그를 이해한다. 여전히 동의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지만 대체로 그의 지적에 공감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 책도 나는 귀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진영 구획'을 여전히 좋아할 지는 모르겠으나 진보 진영에서 여전히 그는 귀한 존재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덧글)
강준만 교수의 책을 보면서 든 생각2. 우리나라 중도진보는 노빠를 중심으로 분열된 것 같다. 문제는 노무현 전대통령 사후에 정서적으로는 국민 모두가 노빠가 되어 그 정치적 입장조차 비판할 수 없게 된 점. 둘째는 노무현을 아끼는 정서가 노무현의 세력에게는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
전자는 정치사적으로 어려운 부분이고 후자는 당장 대선에서 어려운 부분이다. 후자는 통진당 사태로 대선직전까지 장기적인 카오스 상태가 지속될 듯 하지만 전자라도 어서 빨리 노대통령을 끼고서도 합리적인 논쟁이 가능한 지점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무학의, 아니 독학의 진단을 해본다.

2012/05/30 22:45 2012/05/30 2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