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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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읽은 책 중 인상적인 것들

 

 

 라캉과 정신의학 - 브루스 핑크
- 라캉 이해의 폭을 넓힌 책. 임상 중심이라 더더욱...

 

아이의 사생활 - EBS
- 육아의 교과서적인 책. 올해 다시 읽으니 좀더 이해가 잘 되는 면이 있더라.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울리히 벡
- 연애강의를 위해 읽은 책 중 단연 으뜸이었던 책.

 

당신으로 충분하다 - 정혜신
- 나의 심정적 마음 주치의 정혜신 선생의 집단치료서

 

 미생 - 윤태호
- 올해는 윤태호 작가의 해가 아니었나.

 

현시창 - 임지선
- 한달 동안 고통스럽게 읽은 책. 사례들을 잊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다시 읽고 싶지도 않다.

 

하버드 사랑학수업 - 마리 루티
- 연애 강의를 계획하도록 화두를 던진 책. 정혜윤님의 추천사 또한 백미.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정희진
- 정희진 선생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책. 현시창과 더불어 읽기엔 괴로운 가정폭력서.

 

피로사회 - 한병철
- 짧고도 굵었던 책. 서평에 많은 얘기를 한 지라...

 

엄마되기, 킬링과 힐링사이 - 백소영
- 서평에다 옷을 팔아서라도 이 책을 사라고 했다가 욕 좀 먹었던 책. 그렇다고 생각이 바뀌진 않았다.

 

대한민국 부모 - 이승욱 외
- 결혼, 육아, 자녀교육, 중년이라는 이슈를 관통하는 한국사회 '부모'라는 괴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 책.

 

마흔앓이 - 크리스토프 포레
- 곧 다가올 미래체험? 우울한 건 다 공감이 가더라는 거...

 

거대한 사기극 - 이원석
- 올해는 이원석 형님의 해가 아니었던가.ㅋㅋ

 

 다른 길이 있다 - 김두식
- 나는 충직한 김두식 교수님 저서들의 애독자. 한겨레 인터뷰 때부터 행복했음.

 

올드보이 한대수 - 한대수
- 오늘 다 읽음. 뇌세포 하나하나가 즐거웠던 경험. 올해엔 한대수빠로 살까 고민 중...

2014/01/15 23:46 2014/01/15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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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일상성에 관하여

[서평] 김동건 <빛, 색깔, 공기>

 

 

연초부터 소화도 안 되고 배에 통증이 느껴졌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약을 먹어도 그 증상이 사라지지 않자 혹시 큰 병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되었다. 몇 달 사이 몸무게도 7~8kg이 빠져 걱정이 가중되었고, 어느새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건강염려증' 수준으로 심리적으로도 불안해지는 것 같아서 위장 내시경 검사 예약을 했다. 검사 결과 다행히 큰 병은 아니었다. 의사는 만성 위염이라고 했다. 내 염려는 하나의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몸이 안 좋아진 순간부터 검사 결과를 알게 된 몇 달 동안은 이런저런 생각이 참 많았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한 번도 내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나 미치 엘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같은 훌륭한 책을 통해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의 인생 정리 방식을 간접적으로나마 인상 깊게 지켜보긴 했지만, 내가 진짜 '관'에 들어간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올해 전까지는 말이다. 그저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 통찰, 그 삶의 혜안들을 얻는 것이라면 모를까.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생기고 나니 죽음이란 단어는 참 심각하게 다가왔다. 혹시 내가 큰 병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드니 아내와 아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불현듯 회사에 입사하면서 얼떨결에 든 사망보험이 생각이 나자 조금 안심이 됐다. 적어도 내가 죽으면 당장 생활비가 끊기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혹시 병이 심각해서 갑작스럽게 죽게 되면 아내에게 알려 줘야 할 정보들, 이를테면 통장 비밀번호나 컴퓨터 하드디스크 안에 든 자료들 같은 게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가진 책들을 누굴 줄 것인지, 내가 쓴 글들과 메모들은 정리본을 만들어놔야 할 텐데 하는 걱정 등등 이른바 현실적 미련들도 들었다.

 

이런저런 걱정들로 시작된 죽음에 대한 공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전하니, 어느새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에 휩싸였다. 죽음을 둘러싼 신앙적인 회의감이랄까.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음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좀더 실제적인 궁금함, 걱정들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내가 지금 죽으면 내 아이를 멀리서 지켜보게 될까, 아니면 어딘가로 가게 되어 잠시 헤어져 있게 될까,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이 세상을 창문 너머로 내려다볼 수 있는 걸까 같은 류의 궁금함이랄까. 나아가, 죽고 나면 나는 더 이상 내 아내의 남편일 수 없고 내 아이의 아빠일 수는 없는 건가. 혹은 이 모든 신앙과 달리 그냥 죽으면 사라지게 되는 건 아닐까.

 

   
▲ <빛, 색깔, 공기> / 김동건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 320면 / 1만 3000원

 

<현대신학의 흐름>으로 유명한 김동건 교수의 <빛, 색깔, 공기>를 다시 읽었다. 이 책은 홍성사에서 나왔던 책을 개정하여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새로 출판한 것이다. 홍성사에서 나온 책을 읽었으나 그땐 너무 어렸기에 더더욱 이 책의 바른 '독해'가 쉽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도 나름의 감흥, 감상이 있었지만 그건 정말 형이상학적 그 무엇이었지 저자의 가정에 일어난 죽음이라는 사건에 깊이 공감할 만한 마음의 넓이가 부족했다. 내 죽음에 깊이 매몰된 최근에서야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느낌을 많이 받았다.

 

가장 큰 깨달음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죽음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변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죽음'이란 현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한다. 죽음을 터부시하므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끝까지 '기적', '치유'의 기대감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자체를 부정하면서 우리의 일상에서 비껴가기를 기대한다. 죽음 자체가 비극이며 슬픔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일상의 영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또한 건강한 반응은 아닌 셈이다.

 

김동건 교수의 아버지이신 고 김치영 목사의 죽음 여정에서 나는 죽음의 '일상화'를 경험했다. 김 목사는 당신의 죽음을 에둘러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주 직설적으로 가족과 나누었고 가족들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물론 죽음을 앞에 둔 가족들 모두가 힘들고 슬펐겠지만 그것을 애써 외면하거나 덮어 두거나 미화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책 속에서 김 목사는 자신의 장례식에도 상복을 입지 말고 평상복을 입은 채로 울거나 곡을 하지 말 것을 권했다. 기독교인은 죽음을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것이라는 당신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분은 적절한 때에 단백질 주사를 제거해 달라고 부탁했고 매 순간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며 그 시간들을 잘 준비하고 실행해 나갔고 그렇게 종국에는 당신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 책은 병상 일기로 독해할 수도 있고 혹은 죽음에 관한 신학 교수 아들과 목사 아버지 사이의 대화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한 가족이 어떻게 아버지를 떠나보냈는가에 대한 짧은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죽음의 일상성'을 일깨운 귀한 책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하루하루 숨을 잃어 가고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 죽음의 일상성에서 배제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내 인생의 주인공인 나조차도.

 

갑작스럽게 비극적 사건처럼 생겨나는 이 실존 앞에, 자주 우리는 흔들리며 마음의 평정을 잃는다. 물론 우리가 죽음의 일상성을 인지한다고 해서 슬픔을 극복할 수 없고 고통이 경감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삶의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어떻게 낭비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저자는 우리에게 큰 선물을 남겼다. 고 김치영 목사님과 김동건 교수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김용주 / 현대·기아자동차연구소 연구원, 전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5780

2013/12/22 01:00 2013/12/22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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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의식 극복을 위한 핸드북 
코넬리아 마크 <네 모습 그대로 괜찮아>

 

모든 비극은 비교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물론 그 반대로 자신을 넘어서는 노력은 비슷한 실력의 상대와의 지속적인 비교에서 꽃피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비교 의식은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긍정적이기보단 부정적인 뉘앙스를 자주 갖는다. 여러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비교에는 '덫'에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지를 따르자면 그것도 무려 세 가지의 덫이 존재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비교의 분야와 긍정적 측면, 그리고 인간관계에서의 네 가지 태도(건강, 우울, 독재, 염세적 사고)를 소개한 후 책의 나머지 모든 부분은 이 세 가지의 덫에 대한 정의와 사례들을 언급하고 그 덫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제시한다. 결국 논지의 끝은 매력적이고도 탁월한 제목에서 드러나듯 "네 모습 그대로 괜찮아"이다.

 

이 책은 분량도 짧고 내용도 많지 않다. 느낌상 <비교 의식 극복을 위한 포켓 핸드북>이라고 제목을 정해도 될 법하다. 연역적이고도 구획이 잘 나뉜 명제들로 특정 심리를 분류하고 그 개별 사항에 대한 대안들을 사례들과 함께 엮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성경 속 인물들을 나열했지만 모더니즘적이면서도 계몽적인, 참 착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실 마인드맵으로 요약하기에 가장 적합한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제로 마인드맵을 구성해 보았다! 아래 사진 참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심리적인 이슈들은 좀 더 들어가면 미궁에 빠지기도 하고 그 명제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개별 개인에게 어떤 일반론적인 대답, 행동 지침이 되지 못하는 수가 많다. 성경 속 많은 인물들을 비교 심리의 갈등 구도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옳은 자와, 그른 자를 나누는 행위는 결과론적으로는 옳을 수 있겠지만 과정 가운데에서 체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더 많은 사적 내러티브(이야기)를 간과하고 무시할 위험이 있다.

 

이 책을 평가절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시작에는 어떤 유의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질투심과 비교 의식, 그것을 처음 인지했을 때 붙잡고 싶은 어떤 일반적이고도 간결한 명제들은 입문자들에게는 언제나 유용하다. 책의 분량이나 내용 면에서 이 책은 그런 입문자들을 위한 가이드를 제시한다. 그 이상의 질문에 대해서는 좀 더 비싸고 두껍고 고민을 더 해야 하는 책들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필요가 있겠다.

2013/12/10 00:58 2013/12/10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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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서의 덕후, 자기 계발 비평서를 읽다

   
▲ <거대한 사기극> / 이원석 지음 / 북바이북 펴냄 / 252면 / 1만 3500원

 

고백하건데 나는 이른바 '자기 계발서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인'이다. 스티븐 코비와 하이럼 스미스의 책을 읽고 프랭클린 플래너를 10년간 사용했다. 최근 2~3년간은 데이비드 알렌의 GTD('Getting Things Done'의 약자로 우리나라에서는 '끝도 없는 일 깔끔하게 해치우기'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방식을 익힌 이래로 좋은 도구로 지금까지 쓰고 있다. 그 외에도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 라이어>라거나 토니 부잔의 <마인드맵>, 그리고 황병구의 <관계 중심 시간 경영>까지, 스스로가 직장 생활, 사회생활에 유효한 자기 계발서들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고로, 만약 자기 계발 비평서에 대한 독후감을 써야 한다면 나 같은 자기계발서 '덕후'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원석의 <거대한 사기극>은 부제가 암시하듯 '자기 계발서 권하는 사회의 허와 실'을 밝히는 책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자주 느끼지만 재미있고 유익했던 책이 항상 서평 혹은 독후감을 쓰기 좋은 책은 아니라는 거다. 정말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고 주변에 권하고 싶은 책인데 정작 책에 대한 감상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한두 줄 이상의 문장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사실 나는 최근 김용민의 <한국 종교가 창피하다>를 읽고 서평을 쓰겠다고 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책도 재밌게 읽었고 김용민 교수의 최근 행보에도 지지하는 마음 간절했으나 그 책에 대해서는 끝내 한두 줄 이상의 문장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윤리적 패러다임 vs. 신비적 패러다임

본서도 그런 의미에서 할 말이 별로 없는 책이었다. 논지뿐만 아니라 200쪽을 살짝 넘긴 분량에 웬만한 자기 계발서들을 다 언급한 부분은 놀랍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본서의 최대 장점은 자기 계발서의 시대적 흐름을 짚고 그에 따라 분류하여 그 특징들과 배경이 되는 가치관들을 규명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 계발서는 미국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하며 크게 두 가지의 패러다임으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윤리적 패러다임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적 패러다임이다. 윤리적 패러다임은 청교도 윤리를 강조한 막스 베버로부터 시작해서 벤저민 프랭클린과 그의 사상적 계보를 잇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스티븐 코비, 데일 카네기의 책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윤리적 패러다임 기반의 자기 계발서들은 근면의 힘을 신뢰하며 외부의 환경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성실한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반면 신비적 패러다임은 19세기 미국에서 번성했던 두 운동 흐름, 즉 초절주의와 신사고 운동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전자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이, 후자는 메리 베이커 에디가 창시한 크리스천 사이언스로 대변된다. 이런 흐름 속에 있는 책들이 론다 번의 <시크릿>,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같은 류이다. 신비주의 패러다임 자기 계발서들의 특징은 상상(긍정)의 힘을 신봉하며 원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노력을 내려놓고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이루어진다고 강변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자기 계발서

특별히 저자가 주목한 점은 이 두 가지의 흐름이 미국의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경기가 부양되었을 시기에는 성실하게 노력하기를 권하는 윤리적 패러다임이 강조되었다면 최근 경기 침체와 불황의 시기에는 다분히 믿음의 도약을 요구하는 신비적 패러다임이 중흥기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자기 계발서들도 결국은 사회와 경제적인 영향 아래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계발서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하는 배경에는 미국 사회보장 시스템의 부재에 그 원인이 있음도 지적할 부분이다. 사회보장 인프라조차 없는 사회는 개개인에게 불안을 조장하고 국가가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가 발전(자조, self-help) 하도록 독려하는 어떤 도구로 자기 계발서들이 소비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는 미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통해 이제 전 세계가 이 철학을 수용하도록 권하고 있다. 결국 자기 계발서들은 스스로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구조의 불합리성을 방기한 채 개인에게 초점을 돌리게 만들고 개인에게 자기 세뇌를 시키고 무한책임을 지운다는 점에서 악한 측면이 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자기 계발서들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가. 저자는 자기 계발서의 넓은 스펙트럼을 전제한 후 그 활용 측면에서 긍정적 역할이 있음도 언급한다. (부정적으로만 다루었다면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실패다.) 단적으로 말해 신비적 패러다임의 책들은 진통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므로 권하지 않으나 윤리적 패러다임의 책들은 읽되 습관이나 인격을 다루는 책보다는 기술을 다루는 책이 낫다고 평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보여 준 자기 계발서의 '거대한 사기극'을 하나하나 규명하면서 보다 더 근본적인 고민으로 이끈다. 요는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더욱 가속화시킨 위계와 경쟁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회 안정망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회에서 불안을 느껴 자기 계발서에 환호하고 열심히 그 논리와 방법론을 섭렵하려고 애쓰는 집단은 직장인(세일즈맨), 여성(우먼 파워, 재테크), 어린이들(영어 유치원, 독서 지도)이다. 정작 사회의 상위 집단은 세습된 부와 부모의 취득된 문화 권력(아비투스)으로 인해 손쉽게 자녀들을 '성공'으로 이끈다. 80%였다가 이제는 99%로 대변되는 비기득권층 사이에서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비약하거나 죽도록 애쓰는 형국이다. 물론 그중 소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그 증거를 바라보며 대중은 사기극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그게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이자 나 또한 동의하는 미국과 미국을 사랑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한마디만 첨언한다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계발서는 적절히 읽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사실상 자기 계발서는 거대 담론보다는 미시 영역에서 효과가 있다. (물론 저자도 습관이 아닌 기술로서의 자기 계발서를 긍정한다.) 나는 학문이나 사회 흐름으로서 이른바 사상적 배경에서 자기 계발서를 소비한다기보다는 내 하루하루의 산적한 업무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간 관리 도구로서의 자기 계발서들에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3~4년차 직장인일 때 자주 과도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없었고 업무에 우선순위를 매기지 못했고 시간 배분에 실패해서 죽도 밥도 아닌 삶에 허덕였다. 당연히 시간 관리, 자기 계발서들은 당시 과로로 흐트러진 내 삶을 정리해 준 비서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둘째로 나는 긍정의 힘을 믿는 편이다. 문제는 긍정의 힘, 긍정적 사고방식을 '누가' 요구하는가의 문제다. 종단 연구를 통해 노년의 삶의 만족도를 다룬 것으로 유명한 조지 베일런트의 <행복의 조건>을 비롯하여 많은 장년층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개개인의 긍정적 사고가 그들의 행복한 삶을 추동하였음을 언급한다. 사실, 사회가 불합리한 순간에서조차 긍정, 순응, 복종을 요구하는 것과, 개인이 일상적으로 낙천적으로 긍정적으로 살기를 권장받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억압사회이고 후자는 한량사회일 테니. 정작 문제는, 후자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낮춰야 하는데 자기 계발서들이 오히려 불안을 조장하면서도 긍정 흉내 내기를 권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긍정의 메시지는 <욕망해도 괜찮아>,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당신으로 충분하다> 같은 게 아닐까.

 

김용주 / 현대·기아자동차연구소 연구원, 전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2013/12/10 00:57 2013/12/10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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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팔아서라도 이 책을 사라, 지금 당장!"
[서평] 백소영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옷을 팔아서라도 이 책을 사라. 지금 당장."

 

이 문구는 제임스 패커가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읽고 했다는 유명한 말이다. 백소영 교수의 이 책을 읽은 직후, 나는 페이스북에 같은 문구를 남겼다. 아마 지인들 몇몇은 농담처럼 여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당신이 신앙을 가진 한국교회의 교인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기를 권한다. 물론 이 책은 신학 책은 아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에 대한 사적인 경험, 182명의 여성의 인터뷰를 다룬 책이다. 하지만 본서는 엄마라는 존재의 미시사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사회와 개신교 내 여성 문제의 큰 화두들을 아우르고 있다. (고로, 만일 누가 나에게 개신교, 여성주의, 육아, 자녀 교육에 관한 한 권의 책을 권하라면 나는 주저함 없이 이 책을 꼽을 것이다.)

 

저자는 먼저 이 사회에서 '엄마'라는 존재가 대체 불가능한 사회 계급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엄밀히 말해 전업주부는 현대 이후에 고안된 일이라는 말이다. 아침 8시에 차를 몰고 도시로 나가서 저녁이 늦도록 가정과 격리된 공간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현대 사회는, 점점 더 일을 남성만의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봉건사회에서 노예나, 종들이 하던 일을 무보수로 대신해 줄 존재가 현대 사회에는 절실하게 필요해졌고, 따라서 남편이 경제력을 유지하도록 내조하고 무한 경쟁 속에서 자녀의 발전을 위해 최상의 교육 환경을 만들어 줄 존재로서의 '엄마'라는 계급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여성이 직장 내 경쟁 체제에 끼어들어 경쟁률을 높이는 것도 괴로운 일이며 저녁에 칼퇴근이 불가한 아빠의 부재를 메울 '전문 엄마'(전업주부)가 절실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를 낳은 여성은 점점 회사에 있어도 미안하고 집에 있어도 미안한, 양쪽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죄인 취급받고 있으며 점점 자녀 교육은 고학력의 전업주부만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그 결과로 점차 자신의 꿈을 접는 여성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때 여성들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잘 해 온 일', '하면 즐겁고 신나는 일'을 접고 이제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삶을 살게 되며 그 옥죄는 일상 속에 엄마들은 몸도 마음도 병들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전업주부가 되면) 아프거나 ('직장 맘'이 되면 바빠서) 미치게 된다고 표현했다. (이 책의 초판 제목이 <엄마 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개신교는 어떨까. 1990년대 이후 개신교에서 가정 회복 세미나를 통해 가정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런 한국교회의 많은 세미나들이 여성을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가부장적 여성성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강조되고 있다고 말한다.

 

서울 근교의 한 복음주의적 대형 교회에서 나누어 준 <가족 사랑 실천 노트>라는 소책자의 내용을 보자. (…) 남편의 아내 사랑 실천에는, 출근길에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출근길에 사랑하는 아내를 따뜻하게 안아 주기, 퇴근길에 꽃 한 송이 사 들고 아내에게 전해 주기, 아내의 음식 솜씨 칭찬하기. 아내에게 "오늘 내가 집안일 도울 것 없어?"라고 물어본 뒤 아내의 요청 들어주기, 함께 장보러 가기, 아내가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을 함께 보면서 아내의 정서 공감해 주기 등등이 묘사되어 있다.

 

한편 아내가 남편에게 실천해야 하는 덕목으로는 남편이 오케이 할 때까지 안마해 주기, 출근길 칭찬과 격려의 말 전하기,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사랑이 담긴 격려와 칭찬 문자 보내기, 출근길 칭찬을 적어 놓은 쪽지를 남편 주머니에 살짝 넣어 주기, "여보,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밝은 미소와 함께 남편 퇴근 맞이하기, "여보, 당신 건강해야 해요. 당신 건강이 우리 집 행복이에요. 일찍 들어오세요" 격려의 말 전하기, 퇴근한 남편의 가방(겉옷)을 들어 주고 시원한 물 한 컵, 주스 한 잔 대접하기, 특별 요리 준비하기, 남편이 하는 모든 말에 "예" 혹은 "당신 생각이 참 멋있네요"하고 반응하며 모든 요구 들어주기 등이 제시되었다. (본문 중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의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게다가 여기서의 모든 요구는 성관계를 암시하기도 하는데, 주변에서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내는 남편이 원하면 언제나 성행위에 응하는 것이 기독교 가정의 행복이라고 얘기하는 세미나가 여전히 성행한다고 전해 듣기도 했다. 저자는 마틴 루터도 아내의 또 다른 기능은 '유혹으로부터의 예방책 기능' 즉, 남편이 정욕을 그릇되게 다스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 아내는 성적 헌신으로 그에게 예방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러한 주장은 아내에게 남편이 요구할 때 언제나 응해야 한다는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르침이었다고 지적한다. 이쯤 되면 아내는 육아, 가사 전담뿐 아니라 '감정 노동자' 수준으로 봐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그러니 농담처럼 직장 여성들 사이에서는 우리도 퇴근하면 차도 타주고 목욕물도 받아주고, 저녁상도 차려 주는 아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사실, 책을 읽는 도중 너무 참조하고 싶은 내용이 많아 책의 사방에 검은 줄이 그어졌다. 책 속에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언급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생각할 거리들이 넘쳐난다. 유대 한 랍비가 "만일 한 남자가 그의 딸에게 토라를 가르친다면 그건 그녀에게 음탕함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 성종은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큰 일"이라고 했다는 과거 이야기에서부터, 의대에서 전공의가 되기 전까지는 임신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 산부인과에서 딸을 낳으면 한국의 간호사들이 "예쁜 공주님이에요. 한 번 더 고생하셔야겠어요"라고 말한다는 최근 이야기까지 정말 여성들의 깊은 좌절과 아픔을 공감할 만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그중 유독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소개할까 한다.

 

할머니 세대야 손가락에 꼽을 만한 신여성들이 있기는 했으나 다수의 여성들은 신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20세기 대표적 지성이라는 함석헌 선생님의 아내 황득순 여사도 겨우 글을 읽을 정도인 초등교육만을 받은 채 부모들에 의해 정해진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례는 당시의 '보편'이었다. 평생 "나야 뭐"하며 사셨다는 황득순 여사. 남편이 "생각하는 백성만이 산다"고 "모든 씨알(민초)이 다 깨어나고 비판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느라 외부 강연을 숱하게 다니는 동안, 그러느라 고정적인 생활비도 준 적 드문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저 묵묵히 아이들과 가정을 책임지고 산 그런 '황득순스러운' 여자들의 삶은 우리 할머니 시대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수적인 면에서 볼 때 '보편'이었다. (본문 중에서)

 

최근 100년 사이 여성의 지위는 비약적으로 신장되었다. 반대로 말한다면 여성이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은 지가 불과 1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역사 속에서 노예제가 해방되고 여성의 지위도 나아지는 걸 보면 문명이 진보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겠지만, 사회의 거대 담론 안에서 천명한 여권이 미시적인 개별 여성들에게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도리어 현대 사회, 신자유주의 경쟁 구도 속에서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여성은 자주 전업주부의 삶을 종용당하는 추세다. 함석헌 선생의 민초에도 포함되지 않은 '아내'라면 더할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

 

저자는 말미에 엄마들에게 이른바 공동육아로 대변되는 몇 가지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그 이상을 보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여성 문제에 있어서 한국 사회,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정 내의 미시 담론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현대 거대 담론의 한 축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 책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2013/09/05 00:55 2013/09/05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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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교회, 세가지를 버리면 산다?! 
 진 에드워드 <오래된 교회, 가정집 모임>


초등학교 시절, 하루는 늦잠을 자서 부모님과 함께 '대'예배를 참석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어머니는 화장과 몸단장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고 아버지는 회사를 가지도 않는데 정장을 입었다. 교회에 도착하니 안내에 따라 긴 의자에 차례차례 앉고 나면 찬양인도자가 찬양을 했다. 모두가 앞사람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는데 앞사람은 결코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잠시 후 내 키의 세 배는 높아 보이는 강대상에 목사님이 나타났다. 이어지는 설교. 내 기억에 그 시간은 '세상 그 무엇보다' 지루했다. 아마도 나는 어머니에게 "이제 끝이야?"라고 열 번은 물어 본 것 같다. 예배를 마치고 다들 서로 친하지 않은 듯 어색한 눈인사를 한 채 교회당 밖으로 물밀듯 빠져나갔다. 어렴풋이 나도 어른이 되면 대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개신교 예배의 오랜 전통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아마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회중 예배의 형식에 대한 거부감이 덜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여전히 익숙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이런 형태의 예배에 회의감을 갖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의 저자인 진 에드워드도 이러한 고착화된 미국 복음주의 예배의 전형을 비판하고, 오랜 시간 가정 교회 운동(house church movement)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세 왕 이야기>와 <크리스천에게 못 박히다>의 저자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그가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 형태를 강하게 비판한 사람임을 아는 이들은 의외로 적은 것 같기도 하다.

책의 시작부터 저자는 강한 논조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가 처음 예로 든 사례는 알바니아의 개방과 함께 찾아든 복음주의 전도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다.

"알바니아가 개방되고 얼마 되지 않아 서방 세계 곳곳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인 수백 명이 물밀듯이 알바니아로 몰려들었다. 곧 여기저기서 복음 전도가 활발하게 벌어졌다. 알바니아의 관계 당국에서 집계한 바에 의하면, 알바니아 전역에 있던 기독교 단체들이 첫해에 3만 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고 한다. 첫해에 회심한 3만 명 중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몇 명이나 교회 모임에 참석했는지 아는가? 200명이었다. 3만 명의 회심자 중에 겨우 200명이 교회 모임에 참석했다.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의해 소개된 교회는 우리에게나 알바니아인들에게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수출해서 알바니아의 기독교인들을 미국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나 새로운 회심자들이나 다 '교회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정장을 입고 성직자, 목회자로 대변되는 인도자가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는 예배, 모두가 긴 의자에 앉아 앞에서 설교하는 목회자의 말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 지루하고 따분한 예배의 형태가, 많은 회심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장본인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진부한 관습이 칼벵과 루터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 혹은 강요된 것이며 이와 달리 초대 교회는 인도자의 주도가 아닌, 그들 스스로 예배의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다. 고로 각 나라마다 교회 스스로가 북미 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모임을 가져야 하며 그 방식은 특정한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본능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무엇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서에서 그가 말하려는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바울의 전도 여행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단기간 안에 교회가 아무런 지도자 없이 남겨져야 하고 어떤 건물을 사용하지 않고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방식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귀가 시간이 정해지지도 않으며 더 탄탄한 설교를 찾아 돌아다니는 일에 관심이 없다. 저자는 작금의 예배를 초대 교회의 그것과 달리 진부하고 지루하고 정작 공동체의 풍성함에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핵심 요소가 교회 건물 중심, 설교 중심, 회중석의 구분이라고 보고 있다. 진 에드워드는 이것들이 완전히 파괴될 때에만이 새로운 예배가 시작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의 감정적이면서도 때론 극단을 치닫는 논조를 읽으며 다소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나에게 있어 개혁주의(칼빈주의), 복음주의는 폐기처분될 그 무엇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예배 형식의 원흉이 오로지 루터와 칼뱅이라는 주장 또한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나는 현대 교회의 침체, 기독교인들마저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이 예배 자체가 재미없어서, 혹은 수동적인 자세를 강요하기 때문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재미, 신선함의 부재가 문제라기보다는 교회의 세속화에 더 큰 원인이 있지 않은지, 가난을 말하지만 중상류층이 득세하고, 진부하기보다는 쇼와 더 달콤한 메시지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하는 반감도 다소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믿는다. 논리 전개나 학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반론의 여지가 많겠지만,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저자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런 생각도 든다. 눈 딱 감고 교회 건물, 회중석, 설교자(담임목사) 이 세 가지를 교회에서 없애면 정말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 않겠냐는 아주 현실적인 기대감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어느새 균형을 말하면서 개혁을 저지하는 보수 기독인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자성과 함께. 저자는 현대 교회를 한참 비판하고는 그 대안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논의를 끝내 버린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그룹은 아래의 주소로 편지하면 다음 단계에 대해 알려 주겠다." 그리고는 주소가 적혀 있고 책은 끝난다. 이런, 유머러스한 분이라니. 내 추측이긴 하지만 실제 그의 생각대로 실천한다면, 굳이 연락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이후에는 어떤 지침이 없이도 자연스레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김용주 /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전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2013/09/05 00:52 2013/09/05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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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성적인 줄 몰랐어... 그저 고약한 인간인 줄"
[서평]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를 읽고

 


돌이켜보면 주변엔 항상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흥을 깨는 사람들,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고는 전화조차 받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맥주나 한잔 더 하자고 할 때 꼭 자기는 집에 가겠다고 해서 맹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약속시간이 지났든데 연락이 두절되어 당황했는데 간신히 연락이 되자 그 시간에 특별한 일 없이 집에 있었다는, 그런 속을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 주변에 종종 있지 않던가.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문제아 내지는 사회부적응자라고 칭한다.

"우리는 네가 내성적인 줄 몰랐어. 그저 고약한 인간인 줄 알았지"

어디서 자주 듣던 얘기가 책에 나온다. 어느 내성적인 성향의 사람이 저녁식사 자리에서 식구들에게 내향성을 설명하려 하자 그녀의 친오빠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향성이라. 무심코 집어든 책을 읽다가 갑자기 과거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혹시 내가 답답해하고 자주 비난했던, 무책임하고 게으르고 악의적으로 약속을 깨던 그 사람들이? 혹시나 하던 마음이 역시나 그러했다. 이렇게 나는 이 책,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에 몰입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소피아 뎀블링은 <사이콜로지투데이>에서 쓴 내향성의 사람들에 관한 에세이로 최고 조회수를 기록한 심리학자다. 그는 결국 내향성에 관한 책까지 쓰게 되었고 국내에도 번역서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칼 융의 가장 큰 업적은 외향성과 내향성을 구분함과 동시에 내향성을 가치중립적인 성격으로 정의했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어떤 사회든 매사에 밝고 적극적이고 조직에 적응력이 뛰어난 기질을 긍정하고 그 반대의 기질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개개인을 윤리적으로 옥죄지 않았던가.

최고의 에세이스트답게 저자는 내향성의 문제를 일상적인 묘사와 평이한 문장을 통해 과한 끄덕임을 유발한다. 나는 스스로가 내향성이 아니면서도 책을 읽으면서 과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가장 가까운 예는 전화 혐오증이다. 내향성의 사람들은 전화가 울리는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문제는 전화에 대한 회피는 쉽게 도덕적 결함으로 취급되더라는 사실이다. 친구와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들과 통화하는 것도 좋아하리라고 믿고 나아가 직장에서는 언제든 휴대폰이 울려도 받아야 할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향성의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 없이 불쑥 불쑥 사람들이 자신과 대면하길 원하는 이 몹쓸 기계에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전화기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성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에너지 관리'인데 그것이 잘 관리되지 않으면 사람들과의 만남이 전혀 즐겁지도 않고 잘못하면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말실수나 극단적인 표현으로 상대를 위협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성적인 사람들을 외향적인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비극의 시작이다. 설상가상으로 내향성의 사람들은 마치 듣는 것을 좋아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수다쟁이들의 만만한 대상'이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들은 불필요한 대화 자체를 꺼려하는데 이런 수다쟁이들에게 걸리면 십중팔구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언제나 비난의 대상은 싹싹하지 않고 대화의 의지조차 없어보이는 까칠한 내향성의 사람들이 된다.

저자는 내향성의 사람들이 잘못되었거나 무례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창의적이고 침착하고 계획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문제는 외향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줄 수 없기 때문에 내성적인 사람들이 평가절하, 나아가 비난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내성적인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들에 대해 설명하고 그에 대한 간단하지만 강력한 팁들을 제시한다. 그 실수라는 것은 크게는 이런 것들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다, 곧바로 진지한 대화로 뛰어든다, 정신없이 이야기한다, 내향성과 두려움을 혼동한다, 지나치게 적은 사람에게 의지한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소제목에 딱 맞는 내향성의 사람들이 꽤 많이 떠올랐다는 사실에 또한번 놀랐다.)

슬프게도 내향성의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비난을 받는 경우가 너무 많다. 가족들이 내향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탓에 당사자보다 더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게다가 가족이 퍼붓는 비난은 여간해선 무시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런 비난은 곧장 자기비하의 늪으로 향하게 만든다. 남편, 아내 또한 그렇다. 내향성의 사람들은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만 상대가 원할 때조차 절실하게 부부동반 모임에 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으며 배우자와 떨어져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물론 외향성의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을 밀어내는 일이라고, 사랑없는 행동으로 치부하여 배우자에게 실망하고 그를 비난하고 급기야 이혼에 이르기도 한다.

책을 덮으면서 정말 많은 수의 사람들의 얼굴들과 행동들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행동을 성격으로 이해했다면 아마 나는 더 풍성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때로 그들을 무례하게 생각하기도 했고 심지어 병리적으로 치부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사실 나에게도 내향성의 성격이 약간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나는 즉흥적이지 않고 판단을 잠시 유보한다. 가벼운 질문의 문자를 받고 다음날 회신을 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주변에서는 나에게 한소리씩 해댔다.

그래, 이런 게 한 사람의 전반적인 성격이자 기질이라면? 상상만으로도 정말 많은 반성을 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학을 하는 나에게 내향성의 사람들은 포스트프로세싱에 강한 존재처럼 다가왔다. 즉각적인 반응이나 솔루션을 줄 수는 없지만 자신이 준비가 되기만 하면 어떤 외향적인 사람들보다 더 치밀하고 적극적일 수 있는 사람들이란 사실. 당신이 외향적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으라, 그리고 주변을 보라, 그러면 단지 성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78734

2013/06/25 00:52 2013/06/25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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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지금껏 이런 일을 해왔단 말인가
웹툰 <미생>에 공감... 남편, 아내의 일상적 책임부터 나눠가져야


 

 

최근 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 121회(4월 19일)를 보면서 갑자기 예전에 '귀남이'로 유명했던 드라마 <아들과 딸>이 생각났다. 가부장적인 창작물의 대명사였던 <아들과 딸>을 넘어서는 디테일에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미생>(프로기사만을 목표로 살아오던 주인공 장그래가 '회사'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겪는 일들을 그린 웹툰) 121회분 에서도 보여주듯, 이 나라의 여자들은 일상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직장생활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어야 살아남는다.

 

그래서 성공신화의 여성 임원들은 모두 수퍼우먼들이다. 열정적인 실무자이면서도 자상한 어머니상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남는다. <미생>에 나오는 여성도 가사 육아를 모두 해내면서 대기업 '차장'으로 진급했지만 엄마의 역할을 강요받으며 가장 인정받아야 할 가정에서마저 그 자리를 위협받는다.

 

남성은 '가장'이라는 명분으로 더 좋은 직장을 위해 몇 개월의 '잉여생활'도 이해받을 수 있고, 진급을 위해 집에서도 모든 노동에서 면제받는다. 진급 문제가 아니어도 직장에서의 '생존' 그 자체의 명분을 위해서도 집에서는 피로회복을 위해 낮잠도 자고 사람도 만나러 다니고 회사 단합대회로 낚시나 등산도 한다. 반면 여성은 퇴근 후 엄마의 부재에서 오는 아이의 '정서적 결핍'에 노심초사하며 짜투리 시간 모두를 쏟아 붓는다. 그도 모자라서 직장생활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남성은 결혼 이전부터 공부만 하면 모든 가정일에서 면제 혜택을 누렸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남성들은 밤새도록 공부만 해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오고 과일도 깎아주고 행여 방해될까 부모들이 TV도 꺼주고 과외학원도 알아봐줬다.

아이돌 가수 키우듯 대학 입학 때까지 공부 외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던 남성들은 결혼을 한 후에도 직장이라는 또 다른 '장'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생존 경쟁을 한다. 그 동일한 방식이라는 것이 자신의 목표를 위해 주변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희생의 대상은 자주 '아내'의 몫이 되곤 한다.

 

아내는, 한 회사의 모범 직원이자 가정의 성실한 가사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일들을 잘 소화하고도 '엄마'로만 남기를 종용당한다. 그리고 그 논리는 '여성' 그 자신이 아닌 누구의 엄마로서, 대출을 갚는 식구로서, 남편의 성공을 돕는 아내로서의 정체성일 뿐. <미생>은 이런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잘 담았다. 나도 많이 배웠다. 여성문제에 더 고민하고 더 좋은 조력자가 되기 위해. 갈 길이 멀다.

 

 

많고 많은 집안일... 하지만 티가 안 난다
<미생>에서 개인적으로 주의깊게 지켜본 부분은 남편과 아내가 말다툼을 하는 과정에서도 아내가 쉴 새 없이 집안 일을 하는 대목이었다. 남편은 '그만하자'며 자리를 피하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아내는 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하고 방을 닦은 후 가계부를 펴고 계산기를 두드리다 새벽 2시 즈음에나 잠자리에 든다. '혼자 낭만 다 차지하고 앉아서 나만 현실과 싸우란 거야, 뭐야' 그녀의 넋두리가 들린다.

 

우리 부부도 만화 속 장면에 공감하게 된 계기가 있다. 신혼 초에 아내가 직장을 잠시 그만 두었고 나는 갑자기 회사일이 바빠져서 자연스럽게 어영부영 집안 일은 아내 몫이 되었다. 나는 작은 일을 해도 생색을 내는 게 익숙한 캐릭터라 집안일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아내에게 생색내기 일쑤였고 아내도 초반에는 그런 나를 다독여줬다. 허나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아내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당신도 집안일의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실제적으로 나에게 다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아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집안일을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난 그 둘의 '차이'를 알지 못해 아내와 많이 다퉜다.

 

지금도 아내의 기대에는 못 미치겠지만 요즘은 빈말이라도 간간이 칭찬도 해줄 때도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제서야 고백하건대 집안 일은 정말 지랄같다. 회사원 마인드로 보자면 맨아워(1인 1시간의 노동량)는 끊임없이 드는데 티가 정말 하나도 안 나는 일이다. 젠장.

 

요즘 주말 매식비가 많이 들어 한 번은 이틀간 밥 여섯끼를 다 만들어 먹어보았다.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일단, 아침 점심 저녁을 먹으려면 식단을 짜야 한다. 5살 아이가 있으니 대충 먹더라도 영양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고로, 하루 한두 끼는 밥상을 제대로 차려야 한다. 밥상을 차리고 나면 먹는 건 10~20분이지만 다시 끼니마다 설거지가 쌓인다. 설거지를 다하면 음식 쓰레기를 모아서 버려야 한다.

 

밥 뿐이랴. 누가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속옷과 아이 옷은 삶아야 하니 따로 분리하고 울빨래거리와 걸레들도 따로 돌리니 분류할 때부터 나름 손이 많이 간다. 빨면 널고, 마르면 거둬서 갠다. 세탁기의 세탁망도 주말에는 뜯어서 찌꺼기를 제거해야 한다. 침대 시트도 갈아야 하고 주 1~2회는 침구 청소기를 돌린다. 침구 청소기는 망을 매번 빨아야 한다.

 

가습기 물도 매일 보충해야 하고 매번 깨끗이 행궈야 균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여 매번 열과 성을 다하여 행군다). 청소기 돌리고 집안 구석구석 먼지를 제거하는 일도 해야한다. 그 외에도 휴지통 비우기,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 식수 채우기 등 자잘하고 귀찮은 일들이 부지기수고 왔다갔다 하며 그런 일들 하다보면 두세 시간은 금방 가버린다.

 

아이 어린이집 준비물에 독서 숙제도 있고 날짜마다 입금해야 하는 돈도 많고, 씀씀이가 커질까봐 작년부터 시작한 가계부 쓰기도 해야 한다. 키우는 강아지도 주 1회는 목욕을 시켜줘야 하고 간간이 산책을 다녀야 이 녀석도 우울해하지 않는다. IT기기들도 펌웨어, OS업그레이드에 그간 찍은 사진 정리, 자료 정리, 아이 동영상 파일 정리들을 수시로 해줘야 나중에 지워지거나 분실할 염려가 없다.

 

이런 모든 일들이, 하나하나 적어보면 많아도 정작 해도 생색낼 거리가 하.나.도. 없.다. 안 하면 티가 확 나지만 200%를 해도 차이를 잘 모를 일들이다. 차라리 자크 라깡 같은 사상가의 책 한 권을 읽고 서평 몇 줄 끄적이는 것만 못하다(때로 인터넷에서 파워블로거나 서평의 달인으로 인정받는 남편들이 키보드에 붙어사는 동안 아내는 허드렛일로 앉을 새도 없이 왔다갔다 분주한 건 아닌지 관찰할 필요가 있다).

 

 

남편이 아내의 일상적 책임부터 분담해야

사실 신혼 초에도 나는 위에 언급한 모든 일 중 많아야 두세 가지의 일만 했다. 이유는 아내가 휴직을 했다는 것. 공학도인 내 입장에서 나름 공평한 업무 분배였다. 그 몇 가지의 일을 하면서도 나는 내심 내가 '아내가 할 일'을 돕는 좋은 남편이라고 으쓱댔다. 언젠가, 부부싸움 끝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내가 다 하겠다고 큰소리 치고는 아내가 하는 일을 일일이 따라 해보았다. 물론 매일매일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집안 일은 내 회사 업무량과 비슷했다. 특히 출산과 육아 초반의 가사노동량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나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아내에게 얘기한다. 내가 자취할 때 난 이런 프로세스로 살지 않았다고(더럽게 살았다는 말이다). 아내는 대답한다. 아이와 자기와 함께 살려면 내가 자취하던 그 프로세스로는 살 수 없다고. 물론,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를 분담하고 때때로 전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동료가 계속 허드렛일을 하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다들 걱정한다. 그가 혹여 '내가 이런 일 하러 고생하며 이 회사 들어왔나' 하는 생각을 할까봐, 그러다 퇴사를 하거나 팀을 옮길까봐 그렇다.

 

집에서 아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 받아줄 사람은 남편 밖에 없다. 짐을 나눠질 사람도 남편 밖에 없다. 등산도 다니고 낚시도 다니고 동호회 활동도 할 수 있는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자기계발을 해서 더 나은 사회적 입지를 얻을 아내를 만들어 줄 사람은 남편 뿐이다. 이른바, 남편이 가사와 육아를 모두 전담할 수 있는 탁월한 '엄마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면 아내의 자기계발, 혹은 2~3일의 정줄(정신줄) 놓은 외출이 가능하다.

 

이제 나의 아내는 외출이 가능하다. 며칠 친구들과 놀다와도 일상에 별 지장이 없다. 이 사실이, 가부장적 한국사회에서 의미하는 바는 크지만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만 한정해서 말한다면, 내가 가정에서 '엄마역할'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간간이 쓰는 현학적인 글들보다 더 의미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내가 낼 수 있는 생색은 이런 거라고 본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8131

2013/04/26 00:50 2013/04/2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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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조장하는 '피로사회', 그 해결책은
한병철의 <피로 사회>를 읽고

 

/김용주

 

작년 즈음인가. TV에서 직장인 두 사람의 스트레스에 관한 검사를 하는 내용을 보며 흥미로워했던 적이 있다. 기억을 더듬고 약간 나름의 각색을 더한다면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한 사람은 회사에서 항상 웃는 얼굴이다. 팀원들이 무슨 부탁을 해도 매사에 적극적이며 일이 주어지면 주도적으로 한다. 회식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기막히게 뽑아낼 수 있는 몇 곡의 노래가 있는데 이는 아마 집에서 연습도 많이 한 것 같다. 사적인 대화에서도 주식투자부터 문화예술 분야까지 상당히 많은 영역에서 화제거리를 곧잘 풀어낸다. 살짝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동료들과 함께 담배피는 10분 동안의 대화는 은근 감칠맛이 난다.

 

다른 한 직원은 그와는 다르다. 아침에도 무표정한 모습으로 출근을 해서는, 상사나 선배 동료가 지시하는 일 하나하나를 왜 자기가 그 일을 해야하느냐고 따져대기 일쑤다. 팀원들의 부탁을 다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별 이유없이 타인에게 자기 시간을 내주는 걸 꺼려한다. 퇴근 후에 갑작스런 회식이 잡히면 그는 선약이 있다고 자리를 피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집단생활에 적응을 못한다고,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라며 뒤에서 수군거리기곤 한다. 누군가가 그는 취미생활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악기 레슨을 받는다고 했다.

 

이 두사람의 스트레스 지수를 검사했다. 결과가 어땠을까. 놀랍게도, 매사에 긍정의 힘이 넘쳐나고 적극적인 직원이 심각한 우울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판명났다. 스트레스 지수도 높았고 자살 충동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매일 얼굴을 찌푸리며 까칠하기 그지없는 다른 직원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팀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로사회
한병철 교수는 자신의 유명한 책 <피로 사회>에서 이런 현대 직장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문제를 신선하게 접근한다. 과거 모더니즘 시대는 규율과 법칙, 원리, 강제를 통한 관리체제가 개인을 구속하고 일하게 만들고 압박을 주었다면, 현대는 그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진단한다.

 

바로 긍정의 힘, "예스 유 캔"의 마법이 그것이다. 진위를 따지던 시대, 서구사회의 문명이 진리 그 자체였던 시기를 지나 문화적 다양성, 서로의 기호가 진리를 상대화하는 현대(포스트모던 시대)의 사회 구성원들은 타인, 타문화, 타업무와 같은 기타 자극에 대해 보다 유연한 접근을 요구받는다. 일단 다 긍정하고, 모두를 정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흡수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고로 어떤 조직에서의 이질성과 타자성은 축소되고 대기업에서 그렇게 부르짖는 소통과 협력 그리고 무한한 자기 긍정과 자신의 능력의 과잉을 고양할 것을 요청받는다. 긍정의 힘이나 자기개발, 다양한 분야를 어우르는 통섭적 접근, TRIZ, 어학, 시간관리, 멀티테스킹, 하다못해 두통이나 심한 피로가 몰려와도 약물(포도당 링겔, 피로회복제, 두통약)을 먹어가며 자신을 혹사시킨다. 이렇게해서 자기과잉을 성취하는 자가 글로벌 시대에 진정한 승자이자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된다.

 

하지만 실상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기 긍정의 최면에 빠져 이전 세대와는 다른 병리현상을 경험한다. 면역, 자기방어의 벽을 허물고 무방비상태로 쏟아지는 정보, 대인관계, 처리할 일들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한병철 교수의 진단대로 현대인이 겪는 심리적 문제, 즉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라는 것이다. 결국 긍정의 시대, 시장 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한 개인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학대하며 자책하며 썩어간다.

 

 

해결책은, 탈진에서 무위로

이러한 지식, 문화, 업무의 과잉 속에서 한 개인은 매순간 효율적, 유연한 습득이 요구되기 때문에 멈춰서서 깊은 사색을 할 시간적 여유는커녕 잠시 멍 때리고 있을 시간도 없다. 회사에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라고 닥달하지만 그것은 한 영역 안의 정보를 다른 영역에 카피하거나 적용하는 영역을 넘나드는 모방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현대인은 방만한 일들을 처리하지만 산만하고 불안하며 스스로 마음의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따져보고 걸을 시간이 없는 탓에 등떠밀려 앞으로 전진한다. 결국 지금 한참 잘 나가는 능력자는 어찌보면 빠르게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격이다.

 

저자가 결론이나 대안을 명시적으로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도는 명확하다. 긍정의 힘을 기반으로한 성과사회는 결코 '규율 사회'보다 진보한 패러다임이 아니다. 종국에는 개인 스스로를 (내적 암시를 통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만드는 악순환을 조장할 뿐이다. 인간은 멀티태스킹이나 치밀한 시간관리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병리적 고통 속에 빠질 뿐이다. 따라서 충분한 사색과 여유, 적당한 내적 면역체계의 복구, 나아가 '탈진의 피로'가 아닌 '무위의 여유'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나또한 저자의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6185

2013/04/05 00:49 2013/04/05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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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위기' 그 은밀한 욕망을 털어내려면
크리스토프 포레의 <마흔앓이>를 읽고

 

/김용주

 

'크리스토프 포레? 누구지?' 책 검색을 하다가 찾아낸 책의 저자 이름이 낯설다. 아마존에서 검색을 해도 이 프랑스 저자의 책에 대한 평을 접할 수 없었다. 원제가 <Maintenant Ou Jamais! La Transition Du Milieu De Vie>인 이 책의 번역서 제목은 <마흔앓이>였다. 마흔이란 숫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내 눈을 사로잡았으니 이 책의 편집자는 내용에 상관없이 일단은 제목 선정에서 성공한 셈이다. 원제는 중년의 전환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40대 전후의 전환기를 경험하는 중년을 대상으로 쓴 심리학 책이니 번역서 제목과 그리 동떨어진 건 아니다.

 

순전히 제목에 대한 호감으로 구입하여 읽기 시작한 책은 첫 페이지부터 빠져들어서는 2-3일 만에 다 읽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대단히 좋았다. 누가 내게 요즘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물론 30대 중반을 넘긴 이들에 한하여.

 

누구나 그렇듯 멀리 있는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문제의식을 체감하기 어렵다. 따라서 결혼을 하지 않은 자녀가 없는 이삼십대 초반의 싱글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어설프게 늙은 척하려는 젊은 작가지망생들에게도 추천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책으로 중년의 경험을 취하지 말고 몸으로 겪어나가는 것이 더 유익이다) 허나 당신이 40대 전후의 중년이라면 이 책은 매.력.적.이다.

 

이 책을 읽던 중 영화 <언페이스풀>이 떠올랐다. 그다지 좋은 영화는 아니었지만 이 영화 초반에 코니(다이안 레인)가 남편이 출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멍하게 밖을 내다보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슬픔, 무료함, 의미없음, 늙어감.…. 이 모든 것을 담은 듯한 표정. 이 한 장면은 장차 있을 그녀의 외도를 의도하며 정당화시켜준다. 그녀의 가정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남편도 성실하고 착하며 자녀도 잘 자란다. 그저, 그녀가 중년에 들어섰을 뿐이다.

 

어느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가 컸다. 뭐 하나라도 하려고 치면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던 아이가 어느새 청소년이 되어 부모의 참견을 싫어한다. 아이를 위해 나의 존재 자체를 희생했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아이는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좀 있으면 집에서 독립을 할 판이다.

 

남자는 회사생활도 이제 익숙해졌다. 익숙하다 못해 이젠 무료하다. 매일 하는 일이 똑같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가끔 숨이 막힌다. 창밖을 물끄러미 볼 때가 잦아졌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를 슬픔, 대상이 없는 원망의 감정들이 밀려온다. 부모는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주던 존재에서 도리어 내가 보호해야할 연약한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중년의 위기'인가.

 

저자는 흔히 사용하는 '중년의 위기'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는 과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40대를 전후해서 삶의 전환점이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청년까지는 부모가 원하는 삶, 국가와 사회, 배우자와 아이들,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애썼다면 이제는 다시 나에게 자신의 가치, 욕망에 대해 다시금 집중하게 되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시기가 찾아올 때 그 욕망들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말한다.

 

중년에 많은 이들이 명품 옷이나 고급 취미에 몰두하거나 젊어지려고 성형수술을 반복한다. 혹은 연하의 애인을 사귀어서 데이트를 하거나 불륜관계에 빠진다. 심지어는 술과 도박에 빠지기도 한다. 갑자기 배우자와 이혼을 하거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새로운 분야의 회사로 이직을 하기도 한다. 친절했던 사람이 한순간 괴팍해지기도 하고 헌신적이었던 엄마가 딸처럼 옷을 입고 밖에 나가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부부가 서로의 이야기에 무심해지고 각자의 취미생활과 모임활동에 열을 낸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포레는 본서에서 여러 사례들을 보여주면서 중년의 심리상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융의 심리학에 기대어 그 마음 속의 문제들, 욕망들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많은 중년의 일탈행동들이 본질적이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그런 개별 행동(외도, 술, 성형)으로도 중년의 흔들림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감기의 본질이 콧물이 아니듯 중년의 흔들림의 본질은 '나자신'의 욕망을 바르게 알고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다. 중년의 '내'가 행복해야, 배우자가 행복하고 자녀가 행복하고 나아가 가정과 사회가 행복하다. 하지만 중년의 '나'는 내 맘대로 해서는 안 되는 가정, 사회적 제약들이 너무도 많다.

 

한 1년, 5년, 나아가 10년은 참고 살 수 있다. 하지만 10년을 넘어서면서 이 삶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 때, 사람들은 무너지게 된다. 더이상 참아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타자들이 규정한 페르조나를 뒤집어쓰고 꼭두각시처럼, 노예처럼, 그렇게 늙어갈 수는 없다.

 

그것이 중년을 맞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절규다. 특히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프랑스 중년보다 한국 중년들이 더 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청년들은 점점더 취업도 혼기도 늦어지고 있다. 회사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도 전에 늙는다. 퇴직은 점점더 빨라지고 있다. 청년의 혼란, 어려움을 갓 벗어나면 중년의 흔들림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로 이 책은 우리나라 중년들에게는 더더욱 의미있는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포레의 제안은 의외로 간단하다. 풍선의 압력이 높아지면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진다. 풍선이 터져버리기 전에 미리미리 바람을 빼서 압력을 낮춰야 한다. 나에 대해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들을 천천히 그리고 많이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해나가야, 말년에 일탈행동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현재는 건강한가. 그렇지 않다면 포레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원문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3353

2013/04/05 00:38 2013/04/05 0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