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점점 좋은 영화에 설명을 덧붙이는 게 참 별로라는 생각이 들지만. 
솔직히 30년전에 본 영화의 시리즈가 부활했다는 사실 자체에 같은 세대의 키덜트들은 많이 감동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
영화 시작할 때 스타워즈 로고라거나 시작 스토리를 화면에 띄우는 부분에서부터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ㅠㅠ
많이 언급된 대로 스타워즈의 새 시리즈는 흑인과 여성의 '깨어난 포스'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이미 전작의 시대정신을 넘어서고 있다.
.
하지만 이 영화는 전작 내러티브의 반복과 향수를 되살리면서 여전히 4-50대의 감성을 자극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지금봐도 디자인이 훌륭한 밀레니엄 팔콘과 저항군 전투기, 그리고 늙었지만 여전히 젊은 시절의 아우라를 그대로 간직한 한 솔로, 레아 공주, 그리고 루크 스카이워커의 등장은 여전히 그들이 동시대에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통해 4-50대의 관객도 위로를 받는 한편, 그들이 이제 젊은 제다이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또다른 아쉬움과 슬픈 정서의 자극을 받는다.
.
이 시리즈가 디즈니를 통해 다시 부활하게 된 건 무엇보다 시대를 넘어서는 일종의 집단무의식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스타워즈의 주된 내러티브는 성장기 소년이 겪는 '아버지와의 갈등'이다.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루크 스카이워커가 그랬고 이제는 한 솔로와 벤 솔로가 그렇다. 
.
소년은 성장하면서, 아버지 제거와 극복을 꿈꾸기도 하고 복종과 화해를 꿈꾸기도 한다. 이른바 '아버지의 이름'은 라깡의 정신분석에서도 중요한 테마이다.
또한 오비완과 아나킨, 벤과 루크의 사제 관계도 비슷한 갈등의 반복을 통해 내러티브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 모든 갈등에는 종교성으로 대변되는 선과 악의 대립과 조화, 그리고 우주 에너지의 신화화 요소인 '포스'가 그들을 추동한다. 
.
나에겐 특별히, 뭐랄까...
광선검에 매혹되었던 초등학교 꼬마가 불혹이 되어 같은 시리즈를 접하게 되는 기분은, 겪어봐야만 알 것 같다. 물론, 앞으로의 세대들은 더욱 이런 경험을 자주 하게 되겠지만...
개인적으로도 참 기억에 남을 시리즈가 될 것 같다.
.
p.s.
한 솔로와 추바카의 등장씬도 어찌나 추억이 돋던지, 참 뭉클하게 하더만.ㅠㅠ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6/01/03 22:01 2016/01/03 22:01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서평
총 12권을 꼽아 보았습니다.
예전엔 평을 길게 썼는데, 
다... 의미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걍 땡기면 읽으시길.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라며. (제이언니)
----
.
1.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 비비안 마이어
: 그녀의 사진, 그 무게감이란.
.
2. 내 무의식의 방 - 김서영
: 15년에 김서영 교수를 알게된 건 큰 행운.
.
3. 이중섭 편지 - 이중섭
: 이중섭의 편지 사이사이에 그의 부성애가.
.
4. 진격의 대학교 - 오찬호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이후 진격의 저자, 오찬호
.
5.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 다니엘 튜더
: 익숙하지만 미세하게 낯선 이방인의 시선.
.
6. 프로이트 패러다임- 맹정현
: 프로이트의 내러티브적 독해.
.
7. 전복과 반전의 순간 - 강헌
: 무려 강헌 선생이 책을 쓰셨으니.
.
8. 이기적 섹스 - 은하선 
: '그놈'의 섹스만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주옥같은 관점.
.
9. 담론- 신영복
: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책'이 아니길 바라며.
.
10. 메시지 완역본 - 유진 피터슨
: 올해 손꼽는 신앙서적. 올해 성경 '대용품'
.
11. 어쩌다 한국은 - 박성호
: 물뚝심송님의, 간만의 책.
.
12. 페이스북 심리학 - 수재나 플로레스
: 이건 페친을 위한 보너스. 중독증세가 있으면 가볍게 일독을.
2015/12/31 22:52 2015/12/31 22:52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서평
올해의 책읽기의 특이점은.
생각보다 엄청난 양의 책을 샀으나
끝까지 읽은 책은 생각보다 아주 적더라는 점.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책을 많이 안 읽었으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한번 잡은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은 건 내 평소의 
독서 습관에 비추어 보면 꽤 낯선 일이기도 하다.
.
언제부턴가 책에 대한 기대, 맹신, 집착 그런 게 없어졌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
단적으로 책에는 좋은 말들이 가득하고, 저자들은
정말 기똥찬 아이디어가 넘치고 지식의 깊이가 헤아릴 수 없으나
... 정작 레알 월드에서는 그닥 '쓸모'가 없더라는 편견이
해를 더해갈수록 나를 누르고 있다.
물론 그 '쓸모'라는 표현이 책읽기가 어떤 효용성이나 실용성을 
함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
책을 읽다보면 
'뭐야, 결국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변죽을 울리고 500페이지나 넘게 주절거린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서문에 혹하여 책을 읽다가 초반을 축지(독)법으로
넘기고 중반에 잠시 홀렸다가는 후반으로 가면서 흐지부지 책을
덮게 되는 경우가, 올해는 꽤나 많았다.
.
모르겠다. 게을러진건지도 모르겠지만.
언제부터 독서의 매력이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건지.
정직하게 말하자면 책읽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드는 
낯선 경험을 하고 있다.
.
어쨌거나,
올해의 책 10권 정도를 고르려고 구매한 책과 읽은 책을 
정리하다보니 추천할 10권을 고르는 게 너...무... 힘들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2-30권 내외의 책들을 놓고 혼자 선별하느라 
애를 먹으며, 그또한 즐거워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
좀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예전에 비해 글쓰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이랄까
환상, 아우라 같은 게 사라진 것 같다.
TED, 팟캐스트, 세바시, SNS, 허핑턴 찌라시 등, 수많은 독립 매체들을 통해
수많은 컨텐츠가 쏟아지면서 글쟁이 고유의 정보력, 분석력, '덕후'력이
더 이상 '수퍼히어로'들만 가진 능력으로 보이지 않게 됐다.
(솔직히 집에서 쓱싹쓱싹, 갑자기 뙇! 가구를 만들어내는 아내가 더 경외스럽다.)
.
차라리 요즘은 그런 글이 더 눈에 들어온다.
대단치 않더라도 개인이 직접 경험한 독특한 이야기, 가감없는 실패담,
글보다는 사람 자체에 더 호감이 가는 글,
그것도 아니면 희귀한 자료들을 오랜시간 추적하여 잘 정리한 글들이 좋다.
무엇보다 글뒤로 숨지 않고 정직하게 가감없이 자기를 드러낸 저자가 좋다.
.
아마도 내년에는 책에 대한 애정이 더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책은 여전히 가까이 두고, 많이 사고 적절하게 읽을 것이다.
여전히 난 자신의 짧은 삶의 궤적과 경험이 전부인 양,
간접 경험과 삶의 다양성을 견지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해버리는 부류를
다분히 경계한다.
하지만 그녀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첫사랑의 기억이
점점 무의미해지는 것처럼 책에 대한 나의 맹신, 추종도 
그렇게 옅어지고 흐려지는 것 같다.
.
올해의 책을 고르다가 문득 이런저런 잡생각을 끄적여본다..
2015/12/30 22:06 2015/12/30 22:06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이터널 선샤인(2004)'.

사용자 삽입 이미지

11년 전에 봤다지만 영화속 설정처럼 정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꼭 봐야할 영화에 항상 오르고 최근에는 재개봉도 했다기에 다시 본 이 영화에 대한 내 기억은 망각, 그 자체였다. 막연하게나마 기억이 나는 내 인상비평은 '이별에 관한 기억이라는 메타포를 신선하게 풀어냈다' 정도. 
.
이 영화를 다시 곱씹으며 새삼 깨달은 건 영화에 대한 인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나란 사람의 변화였달까. 11년 전의 나는 잘 정돈된 내면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람을 겪을 때도 어떤 거대한 DB에 주요 태그들로 하부구조를 생성하고 거기에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는 느낌. 내 뇌가 그/그녀(에 대한 정보)를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해했던 것 같다. 
.
지식에 갈급했기에 수많은 책을 읽었던 것처럼 인간관계의 갈급함도,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고 사실상 그 시기엔 인간관계도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 더 많은 정보를 얻고 더 깊이 분석할수록 세상을, 사람을, 여자를, 그 안에서 생기는 복잡한 감정을 다 알게될 거라고 믿었다.
.
이 영화의 화두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제거'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은 자주 가장 사랑하는,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기인하기도 한다. 기억을 제거하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윤리적으로도 옳고 내 남은 삶을 버티기에 합리적이고도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를 찾는다. 
.
매리(커스틴 던스트)의 입을 통해 영화의 제목이자 알렉산더 포프 시의 한구절이 낭송된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
기억의 고통에 해매던 주인공들은 기억의 제거를 통해 '영원한 햇살'을 얻으려 하지만, 정작 제거할 기억들을 되내이면서 그 기억들을 붙잡기 위해 망각에 저항하는 처지가 된다. 더 나아가 이 기억 하나만은 보존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마저 생긴다. 그리고 제거해야 했던 기억의 되내임은 어느덧 서로의 종국을 알면서도 새롭게 관계를 시작할 용기마저 가져다 주었다. 
.
11년 전에는 스토리조차 기억나지 않던 이 영화가 문득 내게도 강하게 다가왔다. 더 정교하게 정리되어야 할 기억들. 잘 정리된 하부 구조를 만들고 그 기억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려는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내 머리와 가슴, 손끝과 눈빛, 정서 하나하나에 뿌리를 내린 이 기억이란 신기루가, 사실 삶의 '영원한 햇살'이라는 사실을. 더디게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2015/12/13 19:24 2015/12/13 19:24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이민자>를 봤다.
상당히 훌륭한 영화였다.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 제레미 레너라니.
그 연기만으로도 이미 영화는 하늘로 올라선다.
이미 <투 러버스>에서 보여준 감독의 독특한 느와르적
분위기도 좋았고.
그런데, 뭔가 불쾌하다. 뭔가가...
그 뭔가를 찾기 위해 며칠을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듯
영화의 장면들을 이리저리 복기해보았다.
.
#2.
일단 이 영화는 1920년대 미국으로 입국하려던 한 여성의
한없는 추락을 소재로 삼고 있다. 
보는 내내 그 여성, 마리옹 꼬띠아르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 여성, 끝내주게 예쁘다. 예뻐서 더 안타깝다. (원래 그렇다..)
내가 그녀를 구해주고 싶을 정도로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영화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부르노역의 남성은
이 이민 여성을 소유하려들고 클럽에서 춤을 추게하고 
결국 매춘에까지 끌어들인다.
하지만 '나쁜 남자' 부르노마저도 영화의 말미에 가서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녀가 떠나도록 돕는다.
.
#3.
20년대 미국의 암울한 밤거리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한없이 추락하는 내러티브.
흥미롭게도 그 많은 댄서들과 매춘부들 중 영화 속에서
그녀만이 누드장면이 없다. 
그리고 다른 여성의 벗은 몸은 야하다기 보다는 
불편함 나아가 불쾌함마저 유발하지만, 
유독 '예쁜' 그녀는 왜인지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다는 듯
벗은 몸으로 목욕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침실에 눕지도 않는다.
그저 2달러에 그녀가 팔리고 있다는 대사가 그녀의 몸을 대신한다. 
물론, 
마리옹 꼬띠아르의 뛰어난 연기가 그 영화적 어색함을 무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녀만이 안타깝고 그녀만이 빛이 난다. 
.
#4.
나는 자주 영화를 평가하는 나만의 잣대로 
영화 속 등장인물 중 특히 주변 인물들을 
감독이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하는가에 집중하는 편이다.
특정 인물을 절대선 혹은 절대악으로 배치한다거나
주인공에게 전적인 내러티브를 내어주는 경우
대체로 나는 그 영화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결국 내가 불편한 지점은 그런 거였다. 
'이민자'가 이민자'들'이 아닌게 불편했다. 
밑바닥 매춘부들로 전락한 
이민 여성들의 면면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지나갈 때 모든 남성들이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빼어난 외모의 
여성 한명의 몰락에만 몰입하고 애틋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그 구도가, 또다른 소극적 '마초성'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하는 불편함.
...
며칠 지난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15/10/02 22:28 2015/10/02 22:28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서평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책에 대해서도 한 마디를 해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제목과 목차, 그리고 간단한 소개글로 접한 이 책에 대해서 나는 충분히 공감했다. 그저, 책을 읽자 그 감흥이 사라졌을 뿐이다. 이 책은 좋은 책이었나, 아니다. 그럼 이 책은 나쁜 책이었다, 그것도 아니다.
.
내가 이 책에 공감한 주된 논조는 다수의 직장인들이 자기 직장을 '필요악'으로 대한다는 사실이다. 직장에 대한 애정, 직종, 자기 업무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이 보다 더 윤리적이고, 더 의식있고 더 나은 인간인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찌든 존재가 아니야', '지금은 잠시 이 하찮은 일에 매몰되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이 일과는 매칭되지 않는 순결한 인간이지'.
.
이 책의 저자가 몇 가지의 지적을 한다. 입사 첫날부터 진급(사장)을 목표로 질주했어야 했다, 회사의 색깔에 물들었어야 했다, 사내 인간관게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싫어하는 상사에게도 다정했어야 했다, 창의적이기보다는 성실했어야 했다...고. 나또한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특히 예전처럼 졸업 후에 2개의 기업 중 하나를 골라가던 시절을 지나 1개의 기업에 2명의 구직자가 몰리는 구도에서 그 안일하고도 편안한 자세는 '조만간 나를 잘라라'라는 메시지와 다름없다.
.
가끔 이런 류의 글이나 논조를 읽고는 "그럼 나를 없애고, 회사의 개가 되란 말이냐"라는 심경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나도 그런 류에 가까울 것 같다. 하지만 저자의 몇몇 지적이 곧바로 '회사의 개'라는 인식으로 급전환되는 불편한 우리의 속내를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왜 직장생활에 대한 적절한 지적을 여지도 없이 묵살하려 드는건지, 내가 직장에서 정말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
저자의 후회에 동의되지 않는 지점도 있다. 저자는 자신의 직장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를 가진 채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다. 직장이라는 게 지금은 어정쩡하게 주저앉은 것처럼 보여도 내 시간의 대부분을, 내 청춘의 대부분을 내어주는 공간이다. 일상 시간과 노력의 대부분을 투자하는 직장에서 진급도, 애정도, 미래도 발견할 마음이 없다면,
어서 저자의 조언대로 '생각'을 바꾸거나, 어서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더) 일치하는 직장으로 옮겨야 한다. 
.
내가 와닿았던 지점은 '18년'이란 단어 자체였다. 여차 하면 그대로 갈 것 같은 시간. 7년이 지나면 곧올 직장생활 18년차...
.
p.s)
저자의 필력도 아쉬운 부분. 읽다보면 왠지 아버지나 회사 선배의 꾸중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하지만 그건 좋은 신호다. 가식이나 포장없이 순수한 사람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2015/10/02 22:26 2015/10/02 22:26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사도>를 봤다.
솔직히 영화는 30분전에 끝났어야 했는데
필름이 남았던 걸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영화가 아주 나쁘진 않았지만,
영화의 소재와 주제의식? 뭐 그런게 싫었다.
.
영화를 보고 꽤 많은 여성들이 울며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꽤나 의외라고 생각했다. 만약 반대로 고부간의 갈등을 
아름답게 다룬 영화를 봤다면 도리어 남성들은 감동하며 
영화를 즐길 수 있었겠지 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
아버지가 기대하는 왕의 지위와 역할을 
철저히 수행하도록 질책받으며 자라난 아들의 비극. 
살아남기 위해 타협한 영조와 그 아들이 해야하는 처세.
영화 시작부터 머리가 아팠다. 
.
후반에 가서는 간간이 나타나는 아버지의 값싼 눈물,
그리고 그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 감동적인 자식사랑의 독백이.
꽤나 현실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너를 죽여서라도 세워야 할 대의와 명분이란 게 있다.' 
내 아버지가, 내 선생님들이, 내 나라의 지도자들이
내 집안의 어른들이 하던 수많은 말과 행동과 맞닿아 있었다.
.
그런 이유로 
그런 값싼 동정에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에 난 공감할 수 없었다. 
지긋지긋한 가족주의의 그물에 걸린 우리의 자화상이랄까.
왜 굳이 추석에 이런 영화를 개봉하여 마음만 심란하게 만드는가.
왜 굳이 그것을 마치 아름다운 것처럼 현혹시켰는가. 왜.


2015. 9. 28.
2015/10/02 22:22 2015/10/02 22:22
Posted
Filed under 컨텐츠/기타 이슈들
#1.
대체로 나는 동성애 논쟁이 일면 언급 자체를 잘 안하는 편이다. 물론 그건 다분히 의도적인 면이 있다. 이 논쟁은 한국사회에서, 특히 교회 내부에서는 마치 '레드바이러스'처럼 해봐야 당사자에게 그닥 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고는 진흙탕 싸움에서 뒹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우리나라 교계가 논쟁에 취약하다고 굳게 믿고있다. 별 얘길 안 하고 싶었는데 오늘 동성애 결혼이 미국에서 합법화되었기에 이 날을 기억하기 위해 담아둔 속내를 한번 꺼내본다.

#2.
동성애 관련 논쟁이 교회 안에서 펼쳐질 경우, 우리는 동성애에 관해 신학자와 목사의설교와 책을 주석삼아, 혹은 그 권위에 기대어 논지를 풀어가는데 한 몇 년간 '성경이 뭐라고 말하더냐'에 대한 이슈를 깊이 파다보니 내가 내린 결론은 '불가지', 즉 명확히 알 수 없겠다는 것이었다. 
성경 해석도 나름 '정치적'이어서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들은 동성의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문란한 성적 부패가 문제였다거나 성행위와 종교행위가 결합된 이방의 문화의 범주로 해석하는데, 동성애가 죄라고 단언하는 주류도 오버하는 느낌이지만 반대 입장 또한 그 해석이 명백하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가 동성애에 대해 가진 신앙적 입장은 '불가지론'이다.

#3.
교회에서만 곱게 자랐으면 사실 동성애에 대한 고민없이 보수적 성경해석이나 주류 목사와 신학자들이 말하는 반복교육을 받아들였겠지만, 동성애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몇가지의 경험이 이 문제를 실존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오래전 학교 친구 중에 한 명의 별명이 '호모'였는데 그 친구 외에도 그런 아이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주변에 종종 있었다. 아주 어린시절이라 그걸 짓궂은 장난삼아 불러대곤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친구는 아마 여성성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여성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4.
솔직히 주변에서 그런 경험을 하다보면 커밍아웃을 하는 소수의 이들이 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내적 상처에 의해 혹은 성적 방종에 의해 몹쓸 동성애적 '질병'에 걸린다는 말에 선뜻 공감이 가지 않게 된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 생각으로만 혐오하거나 길을 가다가 혹은 공공장소에서 몇몇 동성의 추파를 받고 어이없어 한 짧은 기억이 아닌 가까운 주변에서 꽤 오랜 시간 어릴 때부터 지켜본 지인이 있는 경우, 퍼즐이나 논리학 문제를 풀 듯 이슈를 대하기는 쉽지 않다.

#5.
호모포비아의 단적인 예는 항문성교, 구강성교에 의한 에이즈 등 각종 성병으로 대변되는 신체 질병이다. 그런 충격적인 내용의 만화가 한동안 SNS상에 돌아다녔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사실 동성 간의 이른바 '정상적이지 않은' 성교에 대한, '정상성교'를 하는 이성애자들의 혐오에 가깝다고 나는 본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흔히 이성애자들 중의 일부도 구강성교와 항문성교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이성애자들 중 '정상적이지 않은 성교'를 즐기는 이들의 수가 동성애 커플 중 '정상적이지 않은 성교'를 즐기는 숫자보다 많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더 나아가 성적 방종이 우리가 혐오하는 것의 어떤 본질이라면, 이성애자들 중에서 외도를 하거나 원나잇스탠드를 즐기거나 직장생활의 연장이라며, 접대의 관례라며 2차, 3차를 통해 가지는
밤문화, 성매매 향유, 혹은 여전히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목사들의 성도 성추행 문제에 대한 교회의 혐오는 더더욱 극에 달해야 한다고 본다.

#5-1.
그리고 솔직히 나는 동성애자를 동성간 성교만을 즐기는 성적존재로만 치부하려는 것에 반대한다. 평생 동반자와의 섹스 없이 살아가는 이른바 '보스턴 결혼'에 관한 이야기도 이미 많이 알려져 있고
페미니즘 운동 이후 유럽의 많은 여성들은 결혼 후 남편에게 받은 일상적이고도 반복적인 성폭행에 지쳐 동성 여성 동반자를 찾아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동성간의 결혼을 '성기를 항문에 넣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이성애자들의 변태적 상상과는 달리 이성에 대한 상처, 혹은 혼자 사는 외로움과 불편함 때문에 함께 삶을 공유하려는 '가정의 형태'도 있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6.
사실 교회가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내 생각에는... 물리적 관계망과 구별된 SNS 폐쇄망 안에서 사람들이 연예인이나 진상남녀, 국가 등등을 마음껏 욕해도 상관없듯이 교회가 동성애 문제로는 자기의를 맘껏 펼쳐도 '될만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형교회의 지도자를 까면 관련된 작은 교회 목사들이 돈줄이 막히고 줄줄이 높은 인맥의 전화를 받아야 하겠지만, 교회에서 매주 성매매나 불륜, 성희롱을 회개하라고 설교하거나 그런 이들을 강하게 교회 내에서 퇴출시키려 들면 공동체가 휘청거리겠지만, 이성애자들만 존재하는 폐쇄적 교회공동체 안에서 성경 해석을 들먹이며 나와는 무관한 성적 방종을 심판의 이유로 내세울 때 교회는 구원의 화신이 되고 한줌 LGBT는 심판의 원인이 된다.
.
#7.
그래. 동성애가 심판의 원인이고 그 자체가 죄라고 하자.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다. 교회의 일원으로 동성애에 대해 불가지적 입장이고 신의 생각이 내 좁은 생각보다 크시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그 사실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모든 죄가 그렇듯 동성애 또한 기독교의 용서의 범주안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표적인 인물 다윗왕의 경우, 자기 부하를 살해하고 그의 아내와 외도를 했다. 성적방종과 살인의 중죄를 저질렀기에 사실상 우리는 그를 쓰레기 취급해야 합당하다. (페북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끝이었다.) 하지만 그는 회개했고 외도한 여인과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다윗왕이 용서를 받고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로 남은 것 또한 확실하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동성애 결혼'이 '죄'라면 교회는 동성애 커플은 받아들이고 그 죄는 용서를 해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성적문란함과 성교의 방법을 훈계하고 싶다면 이성애 성도와 동일하게
성적 문란함을 질책하고 한 반려자에게만 충성하기를 설교하고 이성이든 동성이든 질병의 위험이 있는 성교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있다. 적어도 진정한 교회라면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8.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소수자의 인권 측면에서 동성애자들은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학교에서 왕따당하는 아이에게도, 장애인에게도, 성매매 여성에게도, 형을 받은 죄인에게조차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잠잠히 숨어서 죽어지내지 않고 퍼레이드를 펼치고 사회에서 섬세한 재능을 발휘하니까 세상이 그들의 세상이라도 된 듯 공포심을 조성하는데. 솔직히 나는 내가 속한 한국교회가 더 두렵고 무섭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그 새들 옆에는 어디든 십자가가 솟아 있다. 사회면 신문을 읽어보라. 그곳엔 언제나 비리의 중심에 한국 교인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시민들이 개신교포비아를 펼치지 않음에 솔직히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길을 걷는데 돌을 던지거나 린치를 가하지 않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건 진심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국가와 별개로 우리나라 시민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시민 중 한줌 소수의 즐거운 이슈가 터진 날, 나는 함께 웃고 싶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이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2015/06/29 23:58 2015/06/29 2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