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비급(秘笈) ‘다시보기’의 교훈>
어렴풋하지만 무협 영화 중에 그런 류의 내용이 가끔 기억난다. 주인공이 어떤 이유로 위기에 처했다가 무림의 고수에게 구조를 받게 되었다. 이 고수가 죽기 전에 주인공에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비급(秘笈)을 전해주게 되고 주인공은 날마다 비급에 감추어진 무술을 연마하지만 웬일인지 비급을 완벽하게 체득하지 못한다. 어느 날 비급에 음식을 흘렸는데 비급에 묻은 음식을 지우다가 새로운 글자나 그림이 겹쳐져서 나타나게 되고 주인공은 그 숨겨진 부분을 익히게 되어 무림의 달인이 된다는 식의 줄거리다. 명확하진 않지만 음식이 묻은 경우가 아니라도 촛불에 비추어 본다던가 하는 식의 내용 전개가 있었던 듯 하다. 똑 같은 비급을 매일 수련하던 주인공에게 보이게 된 겹쳐진, 그러나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의 심경이랄까. 그 어떤 설렘과 신비감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던 지라 피아노 줄이 다 보이는 시시껄렁한 옛날 무협영화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릴 때부터 꽤나 착실히 교회를 다녔다. 때로는 당시의 나로서도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 종종 있었으나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뿐 별다른 고민을 해보지 못했다. 사실 학생시절에는 신앙 생활을 하는데 그러한 것들이 별로 중요할 성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고 난 때때로 내가 주변적이라고 느끼던 일들로 신앙적으로 자주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무엇보다 내가 교회 안으로 데리고 온 비기독인들은 내가 주변적이라고 느끼던 바로 그러한 일들을 꽤나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곤 했다.
물론, 난 그들이 편파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편파적인 시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교회에서 주변적이라고 느끼는 그러한 관점으로 교회를 바라볼 때마다 자주 나는 철없던 시절에 보던 무협영화의 비급이 떠오른다. 세상이 바라보는-기독인의 시각에서는 비급에 흘린 음식물처럼 약간은 더럽혀진 관점으로-교회라는 조직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후의 내용은 그러한 편파적인 교회보기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계급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회>
“하나님의 대리자인 목사님의 말씀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성도는 기도생활을 제대로 못해서 마귀가 들어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세속화의 전형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신성한 곳이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는 아마 모르긴 해도, 매 주일마다 어느 교회에선가 예배시간에 선포될 말씀이다. 때로는 큰 교회일수록 이러한 말씀 선포에 “아멘!” 하며 화답할 성도들도 많으리라. 이러한 말씀선포가 유효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목사직에 대한 성직화가 가장 큰 원인일 것 같다. 카톨릭적 배경 아래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래로 개신교에서 수없이 반복하여 학습하는 루터의 가르침, 즉 ‘만인제사장주의’, ‘만인사제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유교와 만나 또다른 형태의 계급화를 부추긴다.
이러한 배경에는 또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평신도의 신학 교육이 그리 활발하지 않다는 데에 그 첫째 이유가 있겠다. 아니 좀더 원색적으로 말하자면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 하겠다. 예배에도 그 계급적, 그 상하 위계질서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어서 ‘소’ 예배나 ‘중’ 예배는 없는데 항상 ‘대’ 예배는 존재하며 ‘대’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성도들의 경우에는 아예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 게다가 이 ‘대’ 예배는 기존의 교육 전도사나 부목사가 설교를 할 수 없고, 꼭 담임 목사가 설교를 해야만 유효하다. 담임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에 그런 듯 하다. 단, 예외가 가끔 존재하는데 그것은 담임 목사의 아들이 목사 안수를 받으면 그 ‘육신적’ 아들이 담임목사 다음으로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그에게 ‘대’ 예배의 설교를 위임하는 일이 그 예외에 해당한다. 이러한 교회들의 대부분은 교회 내의 구조를 이해하고 적용하고자 하는 부분에서는 구약을 주로 인용한다. 따라서, 왕과 제사장, 그리고 각 지파들의 장로들과 백성들로 구성되는 구약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목사와 장로, 집사, 평신도를 구약적 모델에 일대일 대응하여 말씀을 적용한다.
왜곡된 신학뿐만 아니라 기존의 습속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위계질서가 유지된다. 유교적인 배경을 가진 한국 사회의 전통에 더하여 군부 독재정권의 오랜 압제 아래 있었던 국민의 대부분이 그렇겠으나, 교회 내의 성도들 간에도 자신들이 스스로 기도하고 말씀을 깊게 묵상하며 판단하여 교회의 일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타나서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오히려 편하고 만족스럽다고 여기는 부류가 많다. 이러한 대다수의 성도들은 자체로 어떤 참여적인 행동을 부담스러워하며 민주적인 절차로 어떤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데에 익숙지가 않다.
따라서, 이러한 need와 seed가 일치하는 지점에 교회의 왜곡이 발생한다. 만인이 제사장이자 사제이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제사장이나 성직자의 중개 없이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할 수 있음에도 대다수의 성도들은 목회자의 안수기도가 자신의 믿음이 담긴 기도보다 효력이 크다고 생각하며,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경우에도 가까운 관계의 성도보다는 교회에서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판단되는 교역자의 기도를 높게 치부하곤 한다. 장로직 선거 시에도 목회자가 후보자에게 크게는 몇 천 만원의 기부를 강요하는 경우도 주변에서 적잖게 듣곤한다. 이런 연유로 선거에 후보자로 올라서 장로직분을 받게 되는 성도는 사회에서 인지도가 있고 부와 명예를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람인 경우도 많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처음 등록한 상당수의 비기독인들은 한국의 중, 대형 교회의 구조는 세상의 조직 구조와 너무도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재벌 기업과 교회 조직체>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칭한다. 사실 이때의 교회는 ‘성도’들 자체를 지칭하지만 흔히 교회에서 ‘우리 교회’라고 말할 때는 특정한 이름의 교회 공동체를 운영하는 조직을 지칭하는 일이 일반적이다. ‘성도’라는 의미의 교회와는 구별되는 이러한 ‘교회 조직체’는 다른 세상 기업들과는 달린 세금을 내지 않으며 조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는 부분에서도 상당히 불합리한 부분이 많다. 담임 목사에 비해 부목사의 급여는 절반에 못 미치는 경우도 많으며 교육 전도사의 경우에는 최저 생활비에도 못미치는 급여를 받는 일도 허다하다.
대체로 대기업의 회장들이 부를 독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조직체가 크면 클수록 이러한 대기업의 생리를 닮은 구석이 적잖이 보인다. 재벌 기업 사이에서 보이는 특수한 부의 세습은 국제 사회에서 한국 기업들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데에 크게 일조하고 있으나, 교회 조직체는 이러한 ‘재벌’의 습성을 책망하지는 못할 망정 그대로 흡수하는 ‘관대함’마저 가지고 있다. 또한, 담임 목사의 직분을 그간 최소 생계비로 헌신해온 주변 동역자에게 넘겨주기보다는 연륜과 경험이 부족한, 한 세대 아래의 아들에게 주려고 한다. 대개는 그 아들이 담임 목사의 성품에 합당한 교육을 통해 길러진 훌륭한 믿음의 자녀이자 검증된 리더임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가정(假定)은 왕정시대, 혹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재벌 그룹에서도 동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되는 원인을 사람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한 사람의 결단이 그 교회 조직체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 조직체에서 부의 세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먼저 짚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교회 조직체의 재정 운영 스타일이 재벌 기업의 그것과 비슷하며, 그런 연유로 재벌 기업가들이 하는 방식과 똑같은 스타일의 세습문제가 교회 조직체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교회 조직체는 교회의 건물이나 부지(敷地), 혹은 교회의 재산이 담임직을 맡고 목회자의 명의로 등록이 되어 있는 경우가 더러 존재하며 재정을 운용하는 그룹도 목회자의 뜻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담임직의 위임은 단순히 설교자로서의 위치를 위임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재산을 넘기는 일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교회 조직체 내에서 그러한 부의 편중형태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한 사람이 결단을 한다고 해서 그 조직체의 견강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조를 견고히 하는데에는 성도들의 그릇된 습속도 한 몫을 거드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목사님은 그 정도의 부는 누려야 한다”거나 “목사님의 위신과 체면을 고려하여 그 정도의 치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의외로 많다. 허나, 이는 그릇된 체면과 허례의식이 조장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성도는 ‘교회 조직체’를 위해 종노릇하라?>
교회 조직체에서 성도의 위치는 상당히 불안정하다. 설교를 통하여 새로운 삶에 대해 도전을 받으며 헌신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지지만 실제로 어떠한 상황적인 문제에 대한 미시적인 행동 지침같은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은 회심 이후에 무거운 마음으로 전도 이외의 일에 대해 시야를 넓히는 일이 쉽지 않다. 게다가 교회 조직체는 교회 내의 견고한 공동체 형성을 위해 끊임없이 여러 가지 형태의 봉사 프로그램을 만들며 그러한 행사의 대부분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교회를 위한’ 행사인 경우가 많다.
결국 교회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하고 스스로의 죄성을 심각하게 뉘우친 대다수의 성도들은 빚진 마음으로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찾게 되는데 이 때 교회 조직체는 교회의 일에 성도들의 노동력을 대가없이 사용하는 일이 생긴다. 분명 말씀은 세상의 ‘빛과 소금’에 대해 선포하지만 교회 조직체는 그에 대한 선행 과제로 ‘교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종용하며 이러한 소명은 직분을 얻은 성도들이 소진될 때까지 지속된다. 이들이 교회 조직체를 위해 사용하는 많은 금전적, 시간적, 물리적인 헌신은 그야말로 대가 없이 행해지는 것이며 그것이 충당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신앙이 흔들린다거나 믿음이 후퇴했다고 치부하기도하고 심지어는 마귀가 들었다는 말도 서슴없이 일삼는다.
교회 조직체가 운영하는 사업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고용된 직원들은 교계의 연줄을 통해 서로가 아는 경우가 많으며 교회 조직체는 이들 대부분을, 정당한 댓가를 받는 정직원이라고 여기기 보다는 사회 봉사활동을 하는 자원봉사자 정도로 생각하는 듯 하다. 교회 조직체가 운영하는 사업체의 경우, 급여가 몇 달이고 밀리는 경우도 많고 그러한 경우에는 천국에 보화가 쌓이고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펴기도 하며 금전적인 문제로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 자체를 책망하기도 한다. 교회 내의 분위기에서 금전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세속화된 증거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이러한 배경을 가진 교회 조직체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의 교회 조직체 안에서도 재정적으로 풍요함은 누리고 있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상’을 담보로 헌신을 강요당하며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종노릇’하고 있는 계급이 교회 조직체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한 상상인가.
<교회가 무림의 고수로 거듭나기까지>
이렇게 생각해보자. 교회 내에 하나님에 관한 부분이 없다고. 교회는 단순한 또 하나의 조직이라고. 성령의 사역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없는 단순한 하나의 조직 사회라고. 대다수의 불신자들은 그런 시각으로 우리를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과연 이러한 것들을 모두 제외한 후에도 교회 공동체는 이상적인 공동체인가.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조직원들을 위하며, 재정사용에 있어서 전혀 거리낌 없이 어느 조직 사회보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운영되는가. 어느 특정 부류가 부를 선점하고 있거나 특정 부류의 희생을 담보로 유지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교회가 만인이 제사장이며 만인이 사제라는 원리에 충실한, 그야말로 평등한 조직인가. 재정 사용이 투명하며 정당한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주고 있는 조직인가.
그러한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기독인들에게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하며 이 사회에서 ‘기독교 윤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교회는 이율배반적인 말씀의 선포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낫다. 혹은 어렴풋한 무협영화처럼 교회도 더러운 세상의 시야를 통해 새롭게 스스로를 연마하여 진정한 고수가 되거나. **
사르트르(Sartre)로부터 시작된 나의 고민
내가 처음으로 교회가 혹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보다 결코 낫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장 폴 사르트르(J. P. Sartre)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다. 물론 처음 사르트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도와준 책은 제임스 사이어(James Sire)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이었다. 그 책에서는 사르트르를 실존주의자로 분류하여 그의 사상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서술해 놓았다. 이후에 나는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사르트르의 약력이라거나 두껍지 않은 그의 책들 몇 권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잠시 관련된 내용 중 사르트르에 대해 설명한 발라스 듀스의 글을 인용해보자.
사르트르는 인간이 누구보다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의해 조건 지워지고 구속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사르트르 이전의 앙가주망(engagement)에 대한 낡은 내용이다. 그러나 실존의 분석에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처럼, 인간은 사전에 본질이 결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인간은 그 한계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을 선택할 수 있고, 숙고한 행동은 물론 상황을 무시한, 혹은 자유를 방기한 선택까지도 책임을 져야 한다. 또, 어떤 행동의 선택은 당연히 이후의 행동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에 자유 속에 던져진 인간은 항상 선택을 하고 자기를 새롭게 구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그런 책임에 부합하는 올바른 선택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사는 사계 전체의 움직임과 상황으로 인해 좁혀진 선택의 가능성을 확장해서 자기를 차츰차츰 해방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전의 전체주의 하에서 사람들의 선택의 폭은 몹시 좁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새롭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냉전, 혹은 고도의 자본주의라는 상황 하에서 다시 선택의 가능성이 좁아져서는 안 된다.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자기를 해방시켜라.' 바로 이것이 사회 참여라는 새로운 의미로서의 앙가주망이다.
(발리스 듀스, "현대사상-앙가주망" 중에서)
듀스의 표현대로 실존주의자들의 미덕은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자기를 해방’시키려는 책임과 참여(앙가주망, engagement)에 있다. 사르트르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약력을 살펴본다면 그러한 삶의 자세가 그의 생애 전반에 잘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수복(사회운동연구소 소장)은 사르트르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요소들과 융합하며 자신의 사상을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는 인간이 기독교적 교리와 사회적 제도의 구속을 넘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나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또한 사르트르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이후 고전적 좌파 지식인의 전형이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선택과 참여는 역사적 결정론을 거부하고 억압 받는 자의 편에 서서 행위자의 실존적 선택과 자유를 옹호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많은 지식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그런 이유에서 마르쿠제는 사르트르를 가리켜 '세계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사르트르는 항상 기득권을 옹호하는 지식인이 되기 보다는 기존의 불합리한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사회참여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역사적 결정론과 환원론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가 실존주의자로서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그의 사상의 근본에 충실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1964년 10월 노벨 문학상이 주어졌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고 생애 말년까지도 알제리 사태에 대한 계속적인 반대 운동, 1966년 베트남에서 자행된 전범을 재판하기 위해 구성된 '러셀 재판소'에서의 열렬한 활동, 쿠바 사태에 대한 항의, 1968년 5월의 프랑스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 체코 사태에 관한 소련의 무력적인 개입 비난 등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사르트르를 단순히 기독교 세계관에서 벗어난 실존주의자로만 평가한다. 이는 그가 어떤 일을 했건, 평생에 걸쳐 사회에 어떠한 이바지를 했건 간에 그가 명시했던 실존주의자로서의 명제, 이를테면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거나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와 같은 고백들을 대다수의 기독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이해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사상을 비난하거나 가볍게 대하는 많은 수의 기독인들의 삶에 비해,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역사와 사회에 끼친 비중 있는 책임과 참여의 폭은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의 ‘양심’은 대다수의 기독인들이 한 구성원으로써 사회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평균적인 도덕성보다 더 순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보다 좀더 나아가 그러한 질문도 던져보고 싶다. 그러면 과연 누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인가. 실존주의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누구를 사용하는가. 실존주의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세상이 더럽다고 구별된 건물 안에서 세금조차 내지 않으며 고고한 성을 쌓던 교회는 또한 얼마나 세상과 닮았던가. 일말의 대화와 타협도 없이, 그대로 선포되어야 한다던 로고스(Logos)는 그 막힌 건물 안에서 얼마나 위조되고 또한 더럽혀졌던가.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실존주의자보다 못한 우리의 자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딴지일보>의 교훈
“우리는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하다.”
(김어준, "딴지일보")
딴지일보가 처음 인터넷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일반인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많은 기독인들은 딴지일보의 스타일에 마음이 많이 불편했던 듯하다. 물론 이러한 ‘글쓰기 스타일’에 관한 문제는 강준만으로부터 비롯되어 진중권과 같은 류의 논객에 대해서도 여전히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선정적인 표현이라거나 특정 인물에 직격탄을 날리는 듯한 비판조의 글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술수라는 말도 많았다.
물론 일정부분에서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가지가 넘쳐날 정도로 사회에 뿌려대는 극우 신문과 극우 잡지들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스타일의 ‘오버’는 어떤 면에서 오히려 공정한 게임을 위한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나는 딴지일보를 좋아한다. 그리고 딴지일보의 총수인 김어준의 생각을 존중한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호감을 갖는 부분은 딴지일보적이라 할 수 있는 그 ‘편파성’에 있다. 나는 딴지일보의 ‘편파성’이 좋다. 물론 많은 기독인들이 편파적인 글, 편파적인 행동, 편파적인 처우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조의 의미로 초반에 김어준의 말을 넣었다.
나는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선교단체와 교회 안에서 ‘균형’에 대한 많은 조언들을 들어왔다. 아니, 균형을 말하는 정도의 교회라면 교회 전반적으로 볼 때 소수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거다. 최소한 ‘복음주의’ 내지는 ‘사회참여’라는 용어를 쓰는 그룹에서만 균형이라는 단어가 소위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사이의 균형, 교회와 사회 사이의 균형, 신앙서적과 일반서적 사이의 균형,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 사이의 균형 등.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균형 잡힌 신앙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의 경험을 비추어볼 때, 균형을 말하는 기독 공동체의 상당수는 기만적이었다. 내가 속했던 선교단체가 그러했고 내가 아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그러했다. 항상 어떠한 실천적인 움직임을 동반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래, 그것은 우리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야. 하지만 그것만이 신앙의 전부는 아니거든. 마치 그것을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너의 편파적인 사고는 자칫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리게 되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어.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하지. 그래서 말씀 묵상과 기도가 중요한 거야.’라며 문제를 회피했다. 결국 이러한 고백의 속내는 균형을 잡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세상에 대한 치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변화 자체에 대한 무관심과 불편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기만적인 ‘그럴듯함’에 그 목적이 있는 듯 하다.
딴지일보는 편파적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하다. 스타일이 다소 껄끄럽게 느껴진다 해도 편파성에 이르게 된 과정을 누구나가 검색할 수 있고 필요하면 따질 수도 있다. (이것은 양방향 전송이 가능한 인터넷 매체의 유익이라 할 수 있다.) 과정 자체가 오픈 되어 있으며 내용을 담는 데에도 학구적인 냄새로 그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지 않은, 그야말로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는 네티즌의 말투 그대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딴지일보의 이러한 편파성이 복음주의 권의 균형성보다 낫다고 느낀다.
편파적인 세상보기를 시작하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이 연재의 흐름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입가를 맴도는데 막상 풀어내려 하니 그 첫 단추가 잘 떠오르지 않는 기분이랄까.
흔히들 기독인의 눈으로 보기에 세상은 기독인과 비기독인, 이렇게 두 가지의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 듯하게 보일 때가 많다. 문제는 현실 세계에서는 기독인 부류도 비기독인 못지않게 동일한 불합리성을 가지거나 혹은 그보다 더한 악행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럴 경우 기성 교회는 그에 대한 대답을 칼빈에게서 찾는다. 기독인 중에도 두 부류가 있으며 이 둘은 가시적인(명목상의) 기독인과 비가시적인(진정한) 기독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전통적 구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 구조적인 악행들과 집단적인 행동도 많이 있다. 그리고 실제 세상은 기독인의 생각처럼 사회가 기독인과 비기독인 두 부류로 정확하게 나누어져 정신적, 물리적 활동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은 어떤가. 세상의 잣대 하나로만 두 부류를 평가해 보는 건 어떤가. 교회를 세상의 구조에 맞게 해석하여 그 불합리성을 분석해보는 건 어떻겠는가. 혹은 기존의 세상을 권력을 가진 소수의 조작으로 해석하는 것을 그만두고, 공정한 과정을 통해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건 어떤가. 이 모든 부분에 있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적인 표현들을 걷어내고 비기독인의 언어로 대화하였을 때 과연 우리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혹은 윤리의 기준으로서 편파적인 우세를 얻어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런 것들이 내가 써 내려갈 연재의 시도들이 될 것 같다.**
청년들이 본 사랑의교회 '새벽기도' 열풍
"이제는 행동에 나설 때"…"교회 변화 기다려 달라"
/ 뉴스앤조이, 2003년 10월 16일 제 71호
젊은이들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랑의교회 새벽기도 열풍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런 큰 물음을 가슴에 안고 두 청년을 만나러 강남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모두 서른 내외의 청년이라는 점, 올빼미 생활로 유명한 공대 대학원생이라는 점,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는 점 등이 그렇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김용하 씨는 사랑의교회의 오래 된 성도. 중간에 잠시 다른 교회를 다녔던 기간을 합치면 20년 가까이 사랑의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김용주 씨는 이에 비해 대학교에서 IVF 활동을 했으며, 현재 예수가족교회에 출석하면서 월간 <복음과상황> 서울 독자 모임을 이끌고 있는 '외부인'이다.
사랑의교회 특별새벽기도회가 한창 막바지를 향해 가던 10월 10일, 교회 근처의 찻집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이들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진지하고 뜨거운 대화를 두 시간 넘게 이어나갔다. 다음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다.
먼저 자신의 기도 생활을 소개해 달라.
김용주 : 주로 저녁에 기도하고 아침에 말씀을 보는 스타일이다. 아침에 말씀을 보고 하루를 준비하고 저녁에는 회개하는 식인 셈이다(웃음). 개인적으로 소리를 내거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같이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대화인데,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사적인 기도가 어렵다. 새벽기도는 고3 때 참여한 일이 있다. 요즘에는 생활 패턴과 맞지 않아 새벽기도는 피하고 저녁기도를 즐기는 편이다.
김용하 :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지는 못하지만 최근 들어 기도의 필요성을 많이 느낀다. 새벽기도는 가끔 나가는데, 사실 사랑의교회 새벽기도는 이번에 처음 왔다. 집에서 교회까지 버스로 다섯 정거장 거리인데 새벽에 오는 것이 쉽지 않아 집 앞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나도 아침잠이 많은 편이다. 새벽기도 시간까지 깨어 있는 것은 자신 있지만,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어려울 때가 많다. 주로 금요일에 있는 심야기도회에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 새벽기도는 일종의 결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적으로 흐트러져 있을 때 생활의 규모가 사라진다. 새벽기도의 부수적인 이익으로 생활을 다잡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늦게 자는 것이 몸에도 안 좋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와도 어긋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늦게 잠이 드는 편이다.
김용주 : 전병욱 목사님이 쓴 「새벽무릎」을 무협지 읽듯 앉은자리에서 아주 재미있게 읽은 경험이 있다. 전 목사님은 9시가 넘어서 거리에서 교인을 보면 새벽기도를 위해 일찍 귀가하라고 말한다고 한다. 새벽기도는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녁에 활동한다. 늦게 자면서 새벽기도에 꾸준히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새벽기도가 가능한 시간대에 활동하는 사람들만 모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교회와 세상을 이원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일반 사람들과의 약속이나 만남을 제한하는 효과가 있다. 새벽기도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경우도 있다.
김용하 : 그 부분을 비중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기도회니 격려를 하는 차원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새벽기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수성이 반영되는 현상이다. 새벽기도가 한국 기독교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지만, 그 자체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옳지 않다. 새벽기도에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
우리 집 같은 경우 집이 작아서 마음 놓고 기도할 공간이 없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어렵던 시기에는 이런 현상이 더 심했을 것이다. 방해받지 않는 기도 시간과 장소 확보가 어려웠을 것이다. 왜 하필 새벽일까. 기도 끝나고 바로 일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김용주 : 과거 농경사회는 동트면 하루가 시작했다. 그래서 그 시간대에 새벽기도가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부 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벽기도가 어렵다. 우리 교회의 경우 새벽기도가 끝나고 직장에 바로 갈 수 있도록 시간을 조절했다. 새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위해 예배를 만들어야 한다면 시간대를 현실적인 것으로 조절해야 한다.
김용하 : 사랑의교회 새벽기도의 경우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진행한 일이 없다. 지금의 새벽기도는 부흥회 성격이 강하다. 사랑의교회는 말씀에 비중을 둔 교회였다. 성도들 안에 기도의 필요성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고 머리만 큰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었다. 점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지도자가 바뀌는 상황이다. 지금의 새벽기도는 겨우 내 움튼 땅을 갈아엎듯이 성도들 마음 밭을 일구는 작업이다. 만일 지금과 같은 새벽기도가 40일이 아니고 계속 지속되면 문제가 있다. 생활이 안 되고 사회 생활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도 자주 말한다. 사랑의교회 상황을 너무 절대화하지 말아달라고. 사랑의교회만의 특수성이 있다.
김용주 : 실제 새벽기도의 주된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 사회에 대한 이슈도 들어 있고, 매우 다양하게 보인다. 인터넷에서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 문구가 상당히 기복적으로 들린다.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면서 새벽기도를 통해 자녀의 축복을 빌라는 내용으로 들린다.
김용하 :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다 적다의 명확한 기준을 긋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랑의교회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와 인터넷을 보면 사회에 대한 관심과 기도 제목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물론 개인적인 아쉬움은 있다. 처음에는 나도 기도회가 끝나고 거리청소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색내기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어쨌건 작은 실천 중에 하나다.
김용주 : 사랑의교회 새벽기도를 보면서 열린음악회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해만 되어진 신앙의 한계가 보인다. 뭔가 하고 싶어하는 데, 실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한계를 보는 것 같다. 새벽기도회가 동기부여 효과는 있겠지만, 이제는 어떤 열매를 맺을지 고민할 시점이다.
특별새벽기도회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용하 : 교회 안에서도 이 부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수련회 후 생활이 금세 도루묵이 되는 경우 많은데,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이를 위해 리더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에너지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옮겨져야 한다. 만일 여기서 잘못 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교회 사람들의 색깔이 너무 다양하다. 신앙의 깊이와 색이 다 다르다.
<뉴스앤조이>에 올라온 사랑의교회 새벽기도회 논쟁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25년 된 젖먹이'였다. 물론 그 말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특수한 상황이 있다. 교회가 25년이 되었다고 하지만 25년 동안 꾸준히 교회에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일까.
내가 소속된 청년부만 해도 사랑의교회에 다닌지 5년 이상 된 사람이 드물 정도다. 다양한 이유로 교회를 옮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아직 젖먹이냐'고 다그치는 것은 조금 아쉽다.
김용주 : 사랑의교회는 '우선 내가 잘 되어서 나중에 남을 돕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회개에서 나오는 역동성이 없다. 교회가 세워지고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다면 이제 열매를 거두는 기도 제목이 나와야 오히려 교회가 하나 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결단과 열매보다는 감정적인 고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를 묶는 행동이 나와야 할 시점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평양의 부흥운동과 사랑의교회 새벽기도회를 연결하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용하 : 이번 특별새벽기도회의 평가는 후세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양 사건이 모델이 될 수는 있지만 자화자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김용주 : 그렇게 연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랑의교회 새벽기도가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와 각성이 일고 있다는 조짐은 잘 보이지 않는다. 더 지켜봐야 한다.
김용하 : 시간이 필요하다. 작년에 몇몇 교회 친구들에게 촛불집회 이야기를 꺼낸 일이 있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친구가 "갑자기 선동하는 것이 먹히겠냐. 평소에 이런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라"며 방법론상의 문제 제기를 했다. 그 이야기에 공감을 했다. 우리교회가 강남에 있고 교인 대부분이 중산층이다. 소득 수준이 일정 이상인 사람이 많다.
이 사람들의 평균적인 의식을 고려해야 한다. 오정현 목사가 부임하자마자 이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했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천천히 이야기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강남에서 투표하면 무조건 한나라당이 일등이다. 이런 점이 강남의 보수성을 반증한다. 이런 기회를 시작으로 변화의 첫발을 내딛어야 한다. 결국 속도의 문제다. 열매가 늦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굳어져 있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담임 목사님 이야기를 대부분 신뢰하는 편이다. 오 목사님이 부임 때 하신 말 "무너져 가는 한국 사회를 바로 세우는 영적 발원지가 되게 하소서"를 기억하고 있다. 이 말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내가 오 목사님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가 천명한 사실이 있으니 우선은 믿고 함께 가야할 목표라고 생각한다. 교역자와 성도의 역할이 각각 중요하다. <뉴스앤조이> 독자로 바란다면 많이 마음을 열고 이런 부분에 관심이 없는 성도들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지 않지만 노력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사랑의교회 교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선 우리의 슬로건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이기적일 수 있는 부분이 가족이다. 가족을 하나님의 원리로 가르치는 것이 먼저다. 과연 축복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좋은 대학 가고, 승진하고, 많은 소득을 얻는 것은 수단이지 성공과 승리 자체가 아니다. 기독인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집단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특정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인 모두가 고민할 문제라고 본다.
부시 같은 경우 신실한 기독인으로 소문이 났다. 나는 그 사람의 신앙은 평가하지 못하겠지만, 이라크전을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있다. 부시의 행동에 전략이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원리는 없다.
이는 부시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시어머니 중에 가장 피해야할 사람이 강남에 사는 권사라는 말이 있다(웃음). 신문에 나오는 다양한 사건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교역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이라크 파병 문제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경제 효과를 말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하나님 원리로 볼 때, 하나님의 생명 사랑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주변의 사람들을 고민에 동참시킬 수 있을까.
김용주 : 사랑의교회의 강점은 모든 부분에 균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경제 등등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기복적 성향이 있는 사람을 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균형을 중시하다보니 행동을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특정 사안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 목사님이 파병 반대를 설교하지 못할 것이다. 한나라당이 문제를 일으켜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교인들에게 헌신이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교회가 명확한 입장을 나타내면 공동체에 분열이 생긴다는 생각이 있다.
김용주 : 목회자 말씀 선포에 너무 큰 무게가 실리는 것이 문제다. 그런 부분을 토론하고 포용하는 공동체가 건강하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교회가 이것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방법을 말하지만 그 실체는 없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어떤 행동도 안 하게 된다. IVF도 사회 참여와 로잔 언약을 늘 말하지만 아무 행동도 안 한다. 추상성에 원인이 있다.
김용하 : 교회 안에 전도를 강조하는 사람이 있고, 구제를 중시하는 사람도 있다. 후배 양성에 힘쓰는 사람, 문화 사역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모두가 중요하다. 다양한 공동체를 아우르는 것은 영원한 숙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완전한 입장을 말하기보다는 이 사안을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가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역자들이 신문을 보며 그냥 지나치지 말고 어떻게 사회를 볼 것인지 고민하도록 만드는 메시지를 제시해 주었으면 한다. 이런 부분이 개발이 되어야 성도 스스로 자생할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파병은 그 자체가 정치 색깔이 드러나는 부분이니 교회가 조심하는 것이라고 본다.
정치 색깔은 없어도 사회적인 관심을 모을 수 있는 부분부터 시작하면 성도들도 충분히 바뀔 것이다. 사랑의교회는 내 고향이다. 나는 내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이 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주변에 이런 주제로 같이 이야기할 친구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교회의 무게 중심이 한 곳으로 쏠리지 않는 것이다.
바른 기도는 무엇일까. 어떻게 나와 가족, 공동체라는 울타리를 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김용주 : 혼자 드리는 기도는 친밀해야 한다. 다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친밀하게 하나님과 만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에 민감해야 한다. 자신의 공동체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설득하고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구성원을 쫓아내는 공동체는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적절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의교회 새벽기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열매 맺길 바란다. 하나님을 만난 공동체는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할 것이다. 믿음에는 세부적인 행동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건강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랑의교회가 균형에 너무 치중하다가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는 욕구에 매몰돼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모순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치열함이 균형보다 높게 평가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한국사회에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기 바란다.
김용하 : 자신의 위치에서 기독인으로서 하나님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시험의 연속이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내 부분을 내어 드리고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인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소극적 봉사관이다. 열매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 교회는 이런 일을 한다"는 논리 뒤에 숨어서 이것이 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그 열매는 내가 맺은 것도 아니다. 봉사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
또한 회개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것으로 타자화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세습을 하는 목사들이나 김홍도 목사 같은 사람에게 넘기고 자신은 의롭다고 여긴다. 기독인이 조소를 당하는 것은 죄의 문제를 남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양정지건 nunmul25@newsnjoy.co.kr
[복음과상황] 회색지대 보고서 (5): 직장생활 보고서 (3) (2003. 9.)
/ 김용주
<직장 문화, 대중 문화, 그리고 소비 문화>
많은 직장인의 경우, 아침에 출근을 하면 일단 컴퓨터를 부팅함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컴퓨터가 켜지면 메신저에 접속을 하고 스포츠 신문을 검색하면서 무슨 재미난 기사거리가 없나 헤드라인들을 훑어 본다. 다음은 주식에 관련된 컨텐츠들을 검색한다. 이미 주식을 가진 직장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주가의 오르고 내림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틈틈이 자신들이 주로 이용하는 쇼핑몰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낸다. 대개 쇼핑몰을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은 잠시라도 사람들의 눈을 잡아두기 위해 여러 가지의 볼거리들을 제공한다. 곳곳에서 "2시간 동안 50% 대박 세일"이라거나 마일리지 적립과 같은 방식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대개 많은 직장인들은 당일에 생기는 이런 류의 기회들에 항상 눈을 떼지 못하게 된다. 남성들의 경우에는 중고차 사이트라거나 컴퓨터 주변기기, 디지털 카메라와 같은 전자제품에 관한 사이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제품들을 고르면서 쉬는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이런 직장인들의 성향에 발맞추어 가장 낮은 가격을 찾아주는 사이트들도 꽤 많아졌다.
또한 인터넷 상에서 결제할 수 있는 사이버 머니들도 마일리지나 충전 방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결제 체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를 넘나들며 할인 혜택까지 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대개 회사에서 소위 인기 있는 동료는 그러한 정보들에 민감한 사람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 직장인들은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점점 소비문화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느낌이며 그런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물건을 구매하거나, 유명한 음식점이나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일에 혈안이 되는 듯 하다. 대개 커피를 마시며 보내는 짧은 시간의 대화는 아침에 검색한 스포츠 신문에 나온 연애인의 스캔들과 같은 내용이 아니면, 맛있는 음식점의 위치나 좋은 제품을 싸게 살 수 있는 사이트, 마일리지로 결제할 수 있는 페밀리 레스토랑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그러한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직장에서 인기도 높다. 물론 정치 이야기가 가끔 나오지만 항상 "더러운 판"이라거나, "정치하는 이들은 모두다 썩었다"는 식으로 흘러서 금새 화제는 바뀌고 만다.
결국 회사에서 생활하는 많은 시간에서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의 대부분을 거의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이러한 소비 문화를 잘 할 수 있는 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그러한 기호에 아주 민감하게 기업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방향의 소비 패키지 상품들을 개발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직장 문화의 중심에 서게 되는 듯 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했던 고민 두 가지는 직장과 이성교제였다. 둘 중에 하나가 해결된 사람은 자연히 다른 쪽으로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면서 주변에서는 보다 진지한 연애 소식들이 들려왔고, 조금씩 주말이면 정장을 입고 국수를 먹으러 다녀야 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러다가 집들이를 한다고 여기저기 찾아가는 일도 생기더니, 급기야 이제는 돌잔치에 가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어린 시절, 가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은 일일 연속극을 어른들은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한 회도 빠지지 않고 보는 것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은 비슷한 이야기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니까 설령 드라마에서 엇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어도 동질감이 느껴지고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는 상황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드라마 속 집안 이야기의 전개가 궁금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씩 주변에서 가정을 이루어 가는 선배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실 그 중에는 학부시절에 존경하던 선배들도 많이 있다. 캠퍼스에서 그들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몸을 불태워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것 같았고, 세상의 구조적인 악행들에 크게 분노하고 마음 아파하며 자신들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부르짖곤 했었다. 정치인들에게 내밀던 날카로운 잣대들과 하루하루 자신을 연단하고 모임 때마다 고백하던 그 도전적인 이야기들이 나에겐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나 보던 영웅담처럼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 나이가 되어 그런 리더가 되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곤 했다.
그들이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갔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다. 난 조만간 그들이 속한 곳에서부터 무언가 대단한 움직임이 생길 거라 기대했다. Home Coming Day처럼 올드 멤버들이 캠퍼스 후배들을 찾아오는 행사가 있는 날이면, 나는 그들의 '승전보'를 들을 마음에 가슴이 설레곤 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들의 대부분은 나타나지 않았다. 간혹 들리는 이야기들만 무성했다. 취업이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겠다는 선배도 있었고, 때론 선배 중에 그렇게 자신이 비난하고 정죄의 화살을 던지던 불신자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릴 때의 철없던 열정이었다고 이야기하는 선배도 만났다.
솔직히 말해서 난 선배들에 대한 배신감 비슷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들의 신앙이 '영적 허구'였다며 그들이 캠퍼스 시절에 세웠던 칼날 그대로, 그 텍스트를 가져다가 그들의 컨텍스트를 해체해 버리고 싶었다. 그 모순된 삶의 방향에 딴죽을 걸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부끄럽지만 당시의 내 마음이 그러했다. 나에게 그들은 신화나 전설에나 나오던 영웅이었으니까.
<연애, 결혼, 그리고 육아>
내가 칼자루를 놓게 된 건 친 누나가 결혼을 하고 그 집에서 자취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때 난 30대 전후의 가정의 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고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 이후로 난 '생존'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경기가 나빠진 이후로 대부분 내 주변의 직장인들은 정상적인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지만 그에 비해 장래에 대한 보장은 더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항상 제2의 직장에 대한 기대와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며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이 사회에서 심하게 휘둘리면서 말이다. 때론 자신이 그렇게 신봉하던 가치관의 혼란을 겪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성 교제가 시작되고 대개 서로 직장을 가지고 있는 남녀 직장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문화가 이끄는 대로 연애를 하기에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바쁜 가운데에서도 서로 시간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하여 백일, 이백일, 오백일, 천일 기념, 그리고 Valentine Day, White Day부터 시작하여 Yellow Day에서 '빼빼로' Day까지! 나름대로 의미를 담아서 챙겨야 한다. 사실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이런 기념일들은 기업들의 횡포로 인해 그 가치가 퇴색하고 있으며 각종 기념일마다 거리에 쏟아지는 소모적인 상품들은 마치 그러한 상품을 주고받지 않으면 친밀함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하나의 소비의 '장'을 형성한다.
결혼을 하고 나면, 이제는 집을 장만하기 위해 정신 없이 돈이 되는 일에 매달리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수도권에 살고 있는 맞벌이 직장인 커플의 경우에는 그것이 생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로 주식에 손을 대거나 아니면 자신의 직업 외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도 많다. 게다가 결혼을 하고 나면 두 집안 사이에 있는 경조사를 챙기는 일도 두 사람이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 중에 하나가 된다.
조금 안정이 될 때 즈음에는 아이가 생기고, 아이가 자라면서 육아에 대한 부담으로 여성의 경우는 직장을 그만 두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생후 몇 년 간은 아이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육아에 대부분의 관심을 집중하게 되고 아이가 크면서부터는 또다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한 스타일의 교육 열풍에 휘둘리게 된다. (많은 부모들은 남들이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바보가 되고 있다는 이상한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는 듯 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서로 관계를 맺고 그 가운데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하루하루 성실하고 자족하며 사는 것이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일상을 시간을 배분하여 삶에서 필요한 일들을 하기 위해 나누어 쓰는 개념으로 따져본다면, 정작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미시적인 부분에서만 최선을 다하고 살아도 항상 부족함이 느껴지고 한계가 느껴지기 마련이다.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일수록 가까운 자신의 주변 관계 속에서도 부족함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되고 그렇게 대부분의 기독 직장인들은 나름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분투하며 살고 있다. 내가 쉽게 생각한 것처럼, 그들은 사회에서 사라진 게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놀면서 삶을 향유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금도 그들은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을 따름이다.
<운동가의 편견>
직장인들의 반대편에는 운동가들이 있다. 내 주변에는 이러한 운동가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대부분 청빈하고, 검소하고 또한 소박하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며 소비문화가 이야기하는 요구들에 둔감하다. 그러한 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이며 그러한 것들에 휘둘리는 삶의 무가치함을 일찌감치 깨우친 탓이다.
그 분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항상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내 안에 그들과 같은 삶이 정답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그리고 나는 아직은 정답에 이르지 못한 삶 가운데 있다는 자괴감으로 인해서 오는 불편함 때문이다.
물론 그 분들이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버려야 할 것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으며 이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 구조적인 악행들에 대해 자신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는 거룩함이 그 분들에게는 있다.
사실 난 그 분들에게 어떠한 문제제기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안다. 하지만, 나는 불편한 마음을 한 편에 두고서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겠지만 운동가들의 대부분은 일반적인 사람들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많은 일반인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져야지만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별 문제의식 없이 소비 문화에 젖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각성을 요구하는 운동가들의 의식은 그들의 정중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결국 '너, 똑바로 살아'의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 깊게 발을 들여 놓았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며 살고 있다. 운동가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세상을 편하게 산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름의 삶은 누구보다 고단하고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독 직장인들은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악행을 저지르는 일은 드물며 오히려 누구보다 더 자상하고 배려를 잘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운동가들은 어쩔 수 없다. '비도덕적인 사회'를 위해 대부분 자신의 미시적인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도덕적인 개인'에게, 힘들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너, 똑바로 살아.'
<중간 지점을 모색하다>
독자들에 따라서는 약간 편향되게, 때론 과장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이제까지의 이야기가 내가 경험하고 있는 직장 생활의 이모저모이다. 꽤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직장인들이 사회에서 묻힐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변명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그리고 한편에서 내심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운동에 대해 이야기였다.
나는 복학 후에 저학년 때 나와 친했던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를 잃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친구 관계는 그럭저럭 유지되었지만 많은 비전을 나누던 선교단체의 동료들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그들은 폐쇄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며 그 안에서 어떠한 경건의 훈련들을 모색했던 데에 비해, 당시의 난 기독인의 사회 참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문서운동이나 학내 문제, 기독 시민운동에 대한 고민들, 대안들을 모색하고 움직이려고 주변을 '충동질'했기 때문이었다. 내 주변에는 시위를 나가는 이도, 총학생회에 진출하겠다는 생각에 뜻을 같이 하겠다는 이도, 사회에 대하여 바르게 인식하고 기독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그 대안들을 모색해 가자는 제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이도 없었다. 내가 내 것들을 포기해 감에 따라 주변의 기독인들은 그런 나를 부담스러워 했다.
다수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에 가까운 나를 '좌편향'으로 위치매김시켜 균형 잡히지 않은 부류라며 거리를 두었고, 가까운 리더들은 내가 가진 잣대로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려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식의 정죄는 시대착오적인 운동권의 잔재라고 충고했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학생이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면 '급진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급진적' 복음주의라고..)
나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의식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90년대 선배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도리어 그들을 비난하려던 나의 시도는 비슷한 판에 속하게 되고 함께 공유하는 문화를 통해 조금씩 무뎌지게 되었다.
직장생활에 대한 글을 마치면서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까 한다. 사실 졸업 후에, 내가 복음주의 기독운동에 뛰어들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에서 기독운동을 하려면 한국 기독교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한국의 복음주의권 보다는 한국의 진보 진영이 도덕적으로 더 깨끗해 보였고, 난 개혁을 외치면서 한국 복음주의권에서 주는 녹을 먹으면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보다 큰 이유는 기독 운동가들보다 기독 직장인들이 많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 한국의 복음주의를 변화시키는 것은 소수의 운동가들이 아니라 다수의 직장인들의 더디지만 전반적인 변화에 의해서일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캠퍼스에서 문서 운동을 하던 것처럼 직장인과 운동가 사이의 중간 지점을 설정하고 거기에서 서로의 벽을 허물고 어떤 적정선의 행동방식을 찾아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행동방식'이 직장인들 나름의 상황을 이해하고 거기에 걸맞는 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언젠가 직장에 갓 들어간 동기와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학생들의 사회참여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친구는 회사에 들어가면 QT조차 제대로 못하는 기독인들이 많음을 지적하면서 학생 시절에는 경건훈련이나 열심히 하고 사회인이 되어서 사회참여를 하라는 충고를 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나름의 공감할 만한 논리를 구사하던 그 친구도 4-5년이 지난 지금 사회참여를 하는 사회인이 아니라 단순한 직장인으로 수면에서 사라졌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과거 가진 것 하나 없던 시절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운동을 해 본 일이 없는 대부분의 기독 학생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사회에 들어가고 난 후에 미시적인 차원에서 너무 많은 책임과 관계에 얽매이기 때문에 적신일 때도 하지 못했던 운동성이 있는 행동은 엄두도 못 내는 채로 결국 주저앉기 마련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내 주변의 그런 친구들과 과거 영웅처럼 대하던 선배들의 적절한 운동성을 살리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회색지대에 머무는 이유일 게다.**
“키 메이커에 대한 단상”
: <매트릭스>는 IT기술의 상징
매트릭스 리로디드를 보는 중에 많은 관객들이 웃었던 장면이 있었다. 2편에서 영화의 전개의 핵심이 되는 키메이커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은 영화관 군데군데에서 황당하다는 투의 웃음소리를 내곤 했다.
그 웃음은 번역된 단어와도 상관이 있는데 굳이 ‘열쇠공’이라는 번역을 하지 않고, ‘키메이커’라는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그대로 씀으로써, 관객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 하다가 결국 우리 나라의 도로변에서도 볼 법한 열쇠집 아저씨가 화면에 나올 때 받는 황당함과 관계가 있었던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에서도 이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이 그런 황당한 웃음을 지었을까 하는 의아함이 생긴다. 그들은 처음부터 키메이커를 말그대로 그냥 '열쇠공'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단순히 단어와 인물의 미스매치를 넘어서는 흥미로움이 키메이커에게는 있는 듯하다. 그 흥미로움으로 인해 웃음을 짓게되는 사연을 조금 소개하자면 이렇다.
니오(Neo)가 오라클(Oracle)을 만나는 장면에 보면 무술을 잘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은 세리프(sheriff)라고 말한다. (세리프(sheriff)는 보안관 정도로 보면 된다) 니오(Neo)는 이제 매트릭스 안을 디지털의 조합으로 인식하는데 세리프(sheriff)는 코드가 보이지 않고 노란색 광채만 띠고 있어서 의아하게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이 두 사람의 쿵후 대결이 액션신을 삽입하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지루하게 느끼기도 한다. 혹은 오라클(Oracle)의 보디가드 정도로 보고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뜬금없이 한참 싸우다 이제 됐다면서 오라클(Oracle)에게 안내한다. 그러면서 당신이 니오(Neo)인지 확인해야 했다면서 싸워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오라클(Oracle)에게 데려다 줄 때 문이 많은 통로를 지나는데 니오(Neo)는 그것을 백도어 즉, 해커들이 소스에 편법적으로 접근하는 곳임을 알아본다. 그러고 세리프(sheriff)에게 프로그래머냐고 묻는다. 그는 중요한 곳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참고로 오라클은 1977년 로렌스 J. 엘리슨(Lawrence J. Ellison)이 설립한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회사다. 오라클이 예언자로 받아들여지던 1편에서도 대부분의 프로그래머 관객들은 DB에 많은 데이터가 있어서 그 DB를 검색하여 미래를 예측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의 장면.
키 메이커라는 영화 전편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진 인물은 그야말로 열쇠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열쇠공의 외모에서 웃고만다.
키 메이커도 백도어를 이용한다. 단지 그는 각 문에 해당하는 키를 가지고 있다. 그 문에 합당한 키를 꽂으므로 각 소스에 접근하게 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니오(Neo)는 매트릭스의 설계자인 아키텍트를 만난다.
IT(정보기술)에서는, 정보의 보안 및 인증에 대한 부분이 하나의 분야로 설정되어 있다.
정보의 유출을 막기위해 네트워크 시스템은 보안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정보에 접근(access)을 허용할지 말 지를 결정하는 인증 과정을 거친다. 대개 이 인증의 방법으로 키 값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키는 크게 두 개의 범주. 즉 공개키와 비밀키가 있다.
공개키는 주변에서 쉽게 다운 받을 수 있으나 암호화되어 있어서 자신이 그 키 값을 가지고 있다해도 그것을 보안프로그램의 방식대로 풀지 못하는 한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비밀키는 암수 구별이 있는 것과 같이, 꼭 들어맞는 열쇠와 자물쇠처럼 유일한 한 세트를 서로 주고받아 인증을 하는 방식이다. 매트릭스가 다른 SF영화와 차별되는 하나의 모티프는 이런 IT쪽의 지식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작동하고 있는 보안프로그램인 세리프(sheriff)의 인증이 필요하다. 세리프(sheriff)는 누구나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개키를 상징한다. (제미있는 것은 보안에서 공개키를 표시할 때 노란색 열쇠로 표현된다. 따라서, 그의 노란색 광채는 공개키의 암시라고 볼 수 있다.) 단, 싸워보아야만 그가 누구인지를 인증할 수 있기 때문에 쿵후대결을 암호해독이라고 볼 수 있다. 쿵후실력으로 인증을 받은 니오(Neo)는 백도어를 통해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게 된다.
그에 반해 키 메이커는 비밀키를 상징한다. 그는 짝이 맞는 키를 만들어서 무수히 많은 비밀키를 들고 다닌다. 아키텍트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니오(Neo)가 키메이커가 만든 키를 문에 꽂을 때 키가 문에 꼭 맞는다는 것을 클로우즈업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비밀키를 이용하여 인증을 받았고 접근이 허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따라서 키메이커를 보면서 웃는 이들 중에는 키메이커의 왜소함이나 아날로그 방식의 키를 만드는 그의 모습에 단순히 웃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하! 하며 그 상징성에 흥미를 느끼며 즐거워하는 프로그래머들도 꽤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