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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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명>

삶에서 모자라는 것은,
무릎을 꿇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겸손을 위한 훈련으로 알겠다.

삶에서 넘쳐나는 것은,
잘 나누어주라고, 감사함을 배울 줄 알기위해
때때로 주어지는 선물로 알겠다.

삶에서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을 극복하거나 혹은 인정함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을 돌아보는 거울로 알겠다.

삶에서 행복한 것은,
그것이 비록 잠시 주어진 것일지라도
기쁘게 누리고
그로인해 살아야 할 의미를 되새기는 스승으로 알겠다.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뒤따라올 사람들을 위해 곧은 길을 내겠다.


2004. 8. 10.

- 신입사원 교육 중에 적은 나의 사명
2004/08/10 18:52 2004/08/1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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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급(秘笈) ‘다시보기’의 교훈>

어렴풋하지만 무협 영화 중에 그런 류의 내용이 가끔 기억난다. 주인공이 어떤 이유로 위기에 처했다가 무림의 고수에게 구조를 받게 되었다. 이 고수가 죽기 전에 주인공에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비급(秘笈)을 전해주게 되고 주인공은 날마다 비급에 감추어진 무술을 연마하지만 웬일인지 비급을 완벽하게 체득하지 못한다. 어느 날 비급에 음식을 흘렸는데 비급에 묻은 음식을 지우다가 새로운 글자나 그림이 겹쳐져서 나타나게 되고 주인공은 그 숨겨진 부분을 익히게 되어 무림의 달인이 된다는 식의 줄거리다. 명확하진 않지만 음식이 묻은 경우가 아니라도 촛불에 비추어 본다던가 하는 식의 내용 전개가 있었던 듯 하다. 똑 같은 비급을 매일 수련하던 주인공에게 보이게 된 겹쳐진, 그러나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의 심경이랄까. 그 어떤 설렘과 신비감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던 지라 피아노 줄이 다 보이는 시시껄렁한 옛날 무협영화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릴 때부터 꽤나 착실히 교회를 다녔다. 때로는 당시의 나로서도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 종종 있었으나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뿐 별다른 고민을 해보지 못했다. 사실 학생시절에는 신앙 생활을 하는데 그러한 것들이 별로 중요할 성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고 난 때때로 내가 주변적이라고 느끼던 일들로 신앙적으로 자주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무엇보다 내가 교회 안으로 데리고 온 비기독인들은 내가 주변적이라고 느끼던 바로 그러한 일들을 꽤나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곤 했다.

물론, 난 그들이 편파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편파적인 시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교회에서 주변적이라고 느끼는 그러한 관점으로 교회를 바라볼 때마다 자주 나는 철없던 시절에 보던 무협영화의 비급이 떠오른다. 세상이 바라보는-기독인의 시각에서는 비급에 흘린 음식물처럼 약간은 더럽혀진 관점으로-교회라는 조직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후의 내용은 그러한 편파적인 교회보기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계급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회>

“하나님의 대리자인 목사님의 말씀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성도는 기도생활을 제대로 못해서 마귀가 들어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세속화의 전형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신성한 곳이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는 아마 모르긴 해도, 매 주일마다 어느 교회에선가 예배시간에 선포될 말씀이다. 때로는 큰 교회일수록 이러한 말씀 선포에 “아멘!” 하며 화답할 성도들도 많으리라. 이러한 말씀선포가 유효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목사직에 대한 성직화가 가장 큰 원인일 것 같다. 카톨릭적 배경 아래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래로 개신교에서 수없이 반복하여 학습하는 루터의 가르침, 즉 ‘만인제사장주의’, ‘만인사제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유교와 만나 또다른 형태의 계급화를 부추긴다.

이러한 배경에는 또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평신도의 신학 교육이 그리 활발하지 않다는 데에 그 첫째 이유가 있겠다. 아니 좀더 원색적으로 말하자면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 하겠다. 예배에도 그 계급적, 그 상하 위계질서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어서 ‘소’ 예배나 ‘중’ 예배는 없는데 항상 ‘대’ 예배는 존재하며 ‘대’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성도들의 경우에는 아예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 게다가 이 ‘대’ 예배는 기존의 교육 전도사나 부목사가 설교를 할 수 없고, 꼭 담임 목사가 설교를 해야만 유효하다. 담임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에 그런 듯 하다. 단, 예외가 가끔 존재하는데 그것은 담임 목사의 아들이 목사 안수를 받으면 그 ‘육신적’ 아들이 담임목사 다음으로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그에게 ‘대’ 예배의 설교를 위임하는 일이 그 예외에 해당한다. 이러한 교회들의 대부분은 교회 내의 구조를 이해하고 적용하고자 하는 부분에서는 구약을 주로 인용한다. 따라서, 왕과 제사장, 그리고 각 지파들의 장로들과 백성들로 구성되는 구약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목사와 장로, 집사, 평신도를 구약적 모델에 일대일 대응하여 말씀을 적용한다.

왜곡된 신학뿐만 아니라 기존의 습속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위계질서가 유지된다. 유교적인 배경을 가진 한국 사회의 전통에 더하여 군부 독재정권의 오랜 압제 아래 있었던 국민의 대부분이 그렇겠으나, 교회 내의 성도들 간에도 자신들이 스스로 기도하고 말씀을 깊게 묵상하며 판단하여 교회의 일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타나서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오히려 편하고 만족스럽다고 여기는 부류가 많다. 이러한 대다수의 성도들은 자체로 어떤 참여적인 행동을 부담스러워하며 민주적인 절차로 어떤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데에 익숙지가 않다.

따라서, 이러한 need와 seed가 일치하는 지점에 교회의 왜곡이 발생한다. 만인이 제사장이자 사제이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제사장이나 성직자의 중개 없이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할 수 있음에도 대다수의 성도들은 목회자의 안수기도가 자신의 믿음이 담긴 기도보다 효력이 크다고 생각하며,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경우에도 가까운 관계의 성도보다는 교회에서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판단되는 교역자의 기도를 높게 치부하곤 한다. 장로직 선거 시에도 목회자가 후보자에게 크게는 몇 천 만원의 기부를 강요하는 경우도 주변에서 적잖게 듣곤한다. 이런 연유로 선거에 후보자로 올라서 장로직분을 받게 되는 성도는 사회에서 인지도가 있고 부와 명예를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람인 경우도 많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처음 등록한 상당수의 비기독인들은 한국의 중, 대형 교회의 구조는 세상의 조직 구조와 너무도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재벌 기업과 교회 조직체>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칭한다. 사실 이때의 교회는 ‘성도’들 자체를 지칭하지만 흔히 교회에서 ‘우리 교회’라고 말할 때는 특정한 이름의 교회 공동체를 운영하는 조직을 지칭하는 일이 일반적이다. ‘성도’라는 의미의 교회와는 구별되는 이러한 ‘교회 조직체’는 다른 세상 기업들과는 달린 세금을 내지 않으며 조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는 부분에서도 상당히 불합리한 부분이 많다. 담임 목사에 비해 부목사의 급여는 절반에 못 미치는 경우도 많으며 교육 전도사의 경우에는 최저 생활비에도 못미치는 급여를 받는 일도 허다하다.

대체로 대기업의 회장들이 부를 독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조직체가 크면 클수록 이러한 대기업의 생리를 닮은 구석이 적잖이 보인다. 재벌 기업 사이에서 보이는 특수한 부의 세습은 국제 사회에서 한국 기업들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데에 크게 일조하고 있으나, 교회 조직체는 이러한 ‘재벌’의 습성을 책망하지는 못할 망정 그대로 흡수하는 ‘관대함’마저 가지고 있다. 또한, 담임 목사의 직분을 그간 최소 생계비로 헌신해온 주변 동역자에게 넘겨주기보다는 연륜과 경험이 부족한, 한 세대 아래의 아들에게 주려고 한다. 대개는 그 아들이 담임 목사의 성품에 합당한 교육을 통해 길러진 훌륭한 믿음의 자녀이자 검증된 리더임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가정(假定)은 왕정시대, 혹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재벌 그룹에서도 동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되는 원인을 사람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한 사람의 결단이 그 교회 조직체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 조직체에서 부의 세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먼저 짚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교회 조직체의 재정 운영 스타일이 재벌 기업의 그것과 비슷하며, 그런 연유로 재벌 기업가들이 하는 방식과 똑같은 스타일의 세습문제가 교회 조직체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교회 조직체는 교회의 건물이나 부지(敷地), 혹은 교회의 재산이 담임직을 맡고 목회자의 명의로 등록이 되어 있는 경우가 더러 존재하며 재정을 운용하는 그룹도 목회자의 뜻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담임직의 위임은 단순히 설교자로서의 위치를 위임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재산을 넘기는 일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교회 조직체 내에서 그러한 부의 편중형태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한 사람이 결단을 한다고 해서 그 조직체의 견강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조를 견고히 하는데에는 성도들의 그릇된 습속도 한 몫을 거드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목사님은 그 정도의 부는 누려야 한다”거나 “목사님의 위신과 체면을 고려하여 그 정도의 치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의외로 많다. 허나, 이는 그릇된 체면과 허례의식이 조장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성도는 ‘교회 조직체’를 위해 종노릇하라?>

교회 조직체에서 성도의 위치는 상당히 불안정하다. 설교를 통하여 새로운 삶에 대해 도전을 받으며 헌신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지지만 실제로 어떠한 상황적인 문제에 대한 미시적인 행동 지침같은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은 회심 이후에 무거운 마음으로 전도 이외의 일에 대해 시야를 넓히는 일이 쉽지 않다. 게다가 교회 조직체는 교회 내의 견고한 공동체 형성을 위해 끊임없이 여러 가지 형태의 봉사 프로그램을 만들며 그러한 행사의 대부분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교회를 위한’ 행사인 경우가 많다.

결국 교회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하고 스스로의 죄성을 심각하게 뉘우친 대다수의 성도들은 빚진 마음으로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찾게 되는데 이 때 교회 조직체는 교회의 일에 성도들의 노동력을 대가없이 사용하는 일이 생긴다. 분명 말씀은 세상의 ‘빛과 소금’에 대해 선포하지만 교회 조직체는 그에 대한 선행 과제로 ‘교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종용하며 이러한 소명은 직분을 얻은 성도들이 소진될 때까지 지속된다. 이들이 교회 조직체를 위해 사용하는 많은 금전적, 시간적, 물리적인 헌신은 그야말로 대가 없이 행해지는 것이며 그것이 충당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신앙이 흔들린다거나 믿음이 후퇴했다고 치부하기도하고 심지어는 마귀가 들었다는 말도 서슴없이 일삼는다.

교회 조직체가 운영하는 사업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고용된 직원들은 교계의 연줄을 통해 서로가 아는 경우가 많으며 교회 조직체는 이들 대부분을, 정당한 댓가를 받는 정직원이라고 여기기 보다는 사회 봉사활동을 하는 자원봉사자 정도로 생각하는 듯 하다. 교회 조직체가 운영하는 사업체의 경우, 급여가 몇 달이고 밀리는 경우도 많고 그러한 경우에는 천국에 보화가 쌓이고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펴기도 하며 금전적인 문제로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 자체를 책망하기도 한다. 교회 내의 분위기에서 금전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세속화된 증거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이러한 배경을 가진 교회 조직체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의 교회 조직체 안에서도 재정적으로 풍요함은 누리고 있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상’을 담보로 헌신을 강요당하며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종노릇’하고 있는 계급이 교회 조직체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한 상상인가.



<교회가 무림의 고수로 거듭나기까지>

이렇게 생각해보자. 교회 내에 하나님에 관한 부분이 없다고. 교회는 단순한 또 하나의 조직이라고. 성령의 사역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없는 단순한 하나의 조직 사회라고. 대다수의 불신자들은 그런 시각으로 우리를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과연 이러한 것들을 모두 제외한 후에도 교회 공동체는 이상적인 공동체인가.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조직원들을 위하며, 재정사용에 있어서 전혀 거리낌 없이 어느 조직 사회보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운영되는가. 어느 특정 부류가 부를 선점하고 있거나 특정 부류의 희생을 담보로 유지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교회가 만인이 제사장이며 만인이 사제라는 원리에 충실한, 그야말로 평등한 조직인가. 재정 사용이 투명하며 정당한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주고 있는 조직인가.

그러한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기독인들에게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하며 이 사회에서 ‘기독교 윤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교회는 이율배반적인 말씀의 선포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낫다. 혹은 어렴풋한 무협영화처럼 교회도 더러운 세상의 시야를 통해 새롭게 스스로를 연마하여 진정한 고수가 되거나. **

 
2004/02/01 08:09 2004/02/01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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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Sartre)로부터 시작된 나의 고민


내가 처음으로 교회가 혹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보다 결코 낫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장 폴 사르트르(J. P. Sartre)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다. 물론 처음 사르트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도와준 책은 제임스 사이어(James Sire)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이었다. 그 책에서는 사르트르를 실존주의자로 분류하여 그의 사상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서술해 놓았다. 이후에 나는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사르트르의 약력이라거나 두껍지 않은 그의 책들 몇 권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잠시 관련된 내용 중 사르트르에 대해 설명한 발라스 듀스의 글을 인용해보자.

사르트르는 인간이 누구보다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의해 조건 지워지고 구속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사르트르 이전의 앙가주망(engagement)에 대한 낡은 내용이다. 그러나 실존의 분석에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처럼, 인간은 사전에 본질이 결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인간은 그 한계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을 선택할 수 있고, 숙고한 행동은 물론 상황을 무시한, 혹은 자유를 방기한 선택까지도 책임을 져야 한다. 또, 어떤 행동의 선택은 당연히 이후의 행동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에 자유 속에 던져진 인간은 항상 선택을 하고 자기를 새롭게 구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그런 책임에 부합하는 올바른 선택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사는 사계 전체의 움직임과 상황으로 인해 좁혀진 선택의 가능성을 확장해서 자기를 차츰차츰 해방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전의 전체주의 하에서 사람들의 선택의 폭은 몹시 좁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새롭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냉전, 혹은 고도의 자본주의라는 상황 하에서 다시 선택의 가능성이 좁아져서는 안 된다.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자기를 해방시켜라.' 바로 이것이 사회 참여라는 새로운 의미로서의 앙가주망이다.
(발리스 듀스, "현대사상-앙가주망" 중에서)

듀스의 표현대로 실존주의자들의 미덕은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자기를 해방’시키려는 책임과 참여(앙가주망, engagement)에 있다. 사르트르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약력을 살펴본다면 그러한 삶의 자세가 그의 생애 전반에 잘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수복(사회운동연구소 소장)은 사르트르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요소들과 융합하며 자신의 사상을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는 인간이 기독교적 교리와 사회적 제도의 구속을 넘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나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또한 사르트르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이후 고전적 좌파 지식인의 전형이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선택과 참여는 역사적 결정론을 거부하고 억압 받는 자의 편에 서서 행위자의 실존적 선택과 자유를 옹호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많은 지식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그런 이유에서 마르쿠제는 사르트르를 가리켜 '세계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사르트르는 항상 기득권을 옹호하는 지식인이 되기 보다는 기존의 불합리한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사회참여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역사적 결정론과 환원론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가 실존주의자로서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그의 사상의 근본에 충실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1964년 10월 노벨 문학상이 주어졌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고 생애 말년까지도 알제리 사태에 대한 계속적인 반대 운동, 1966년 베트남에서 자행된 전범을 재판하기 위해 구성된 '러셀 재판소'에서의 열렬한 활동, 쿠바 사태에 대한 항의, 1968년 5월의 프랑스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 체코 사태에 관한 소련의 무력적인 개입 비난 등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사르트르를 단순히 기독교 세계관에서 벗어난 실존주의자로만 평가한다. 이는 그가 어떤 일을 했건, 평생에 걸쳐 사회에 어떠한 이바지를 했건 간에 그가 명시했던 실존주의자로서의 명제, 이를테면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거나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와 같은 고백들을 대다수의 기독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이해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사상을 비난하거나 가볍게 대하는 많은 수의 기독인들의 삶에 비해,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역사와 사회에 끼친 비중 있는 책임과 참여의 폭은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의 ‘양심’은 대다수의 기독인들이 한 구성원으로써 사회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평균적인 도덕성보다 더 순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보다 좀더 나아가 그러한 질문도 던져보고 싶다. 그러면 과연 누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인가. 실존주의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누구를 사용하는가. 실존주의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세상이 더럽다고 구별된 건물 안에서 세금조차 내지 않으며 고고한 성을 쌓던 교회는 또한 얼마나 세상과 닮았던가. 일말의 대화와 타협도 없이, 그대로 선포되어야 한다던 로고스(Logos)는 그 막힌 건물 안에서 얼마나 위조되고 또한 더럽혀졌던가.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실존주의자보다 못한 우리의 자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딴지일보>의 교훈
 
“우리는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하다.”
(김어준, "딴지일보")

딴지일보가 처음 인터넷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일반인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많은 기독인들은 딴지일보의 스타일에 마음이 많이 불편했던 듯하다. 물론 이러한 ‘글쓰기 스타일’에 관한 문제는 강준만으로부터 비롯되어 진중권과 같은 류의 논객에 대해서도 여전히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선정적인 표현이라거나 특정 인물에 직격탄을 날리는 듯한 비판조의 글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술수라는 말도 많았다.

물론 일정부분에서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가지가 넘쳐날 정도로 사회에 뿌려대는 극우 신문과 극우 잡지들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스타일의 ‘오버’는 어떤 면에서 오히려 공정한 게임을 위한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나는 딴지일보를 좋아한다. 그리고 딴지일보의 총수인 김어준의 생각을 존중한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호감을 갖는 부분은 딴지일보적이라 할 수 있는 그 ‘편파성’에 있다. 나는 딴지일보의 ‘편파성’이 좋다. 물론 많은 기독인들이 편파적인 글, 편파적인 행동, 편파적인 처우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조의 의미로 초반에 김어준의 말을 넣었다.

나는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선교단체와 교회 안에서 ‘균형’에 대한 많은 조언들을 들어왔다. 아니, 균형을 말하는 정도의 교회라면 교회 전반적으로 볼 때 소수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거다. 최소한 ‘복음주의’ 내지는 ‘사회참여’라는 용어를 쓰는 그룹에서만 균형이라는 단어가 소위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사이의 균형, 교회와 사회 사이의 균형, 신앙서적과 일반서적 사이의 균형,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 사이의 균형 등.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균형 잡힌 신앙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의 경험을 비추어볼 때, 균형을 말하는 기독 공동체의 상당수는 기만적이었다. 내가 속했던 선교단체가 그러했고 내가 아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그러했다. 항상 어떠한 실천적인 움직임을 동반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래, 그것은 우리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야. 하지만 그것만이 신앙의 전부는 아니거든. 마치 그것을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너의 편파적인 사고는 자칫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리게 되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어.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하지. 그래서 말씀 묵상과 기도가 중요한 거야.’라며 문제를 회피했다. 결국 이러한 고백의 속내는 균형을 잡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세상에 대한 치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변화 자체에 대한 무관심과 불편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기만적인 ‘그럴듯함’에 그 목적이 있는 듯 하다.

딴지일보는 편파적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하다. 스타일이 다소 껄끄럽게 느껴진다 해도 편파성에 이르게 된 과정을 누구나가 검색할 수 있고 필요하면 따질 수도 있다. (이것은 양방향 전송이 가능한 인터넷 매체의 유익이라 할 수 있다.) 과정 자체가 오픈 되어 있으며 내용을 담는 데에도 학구적인 냄새로 그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지 않은, 그야말로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는 네티즌의 말투 그대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딴지일보의 이러한 편파성이 복음주의 권의 균형성보다 낫다고 느낀다.
 


편파적인 세상보기를 시작하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이 연재의 흐름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입가를 맴도는데 막상 풀어내려 하니 그 첫 단추가 잘 떠오르지 않는 기분이랄까.

흔히들 기독인의 눈으로 보기에 세상은 기독인과 비기독인, 이렇게 두 가지의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 듯하게 보일 때가 많다. 문제는 현실 세계에서는 기독인 부류도 비기독인 못지않게 동일한 불합리성을 가지거나 혹은 그보다 더한 악행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럴 경우 기성 교회는 그에 대한 대답을 칼빈에게서 찾는다. 기독인 중에도 두 부류가 있으며 이 둘은 가시적인(명목상의) 기독인과 비가시적인(진정한) 기독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전통적 구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 구조적인 악행들과 집단적인 행동도 많이 있다. 그리고 실제 세상은 기독인의 생각처럼 사회가 기독인과 비기독인 두 부류로 정확하게 나누어져 정신적, 물리적 활동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은 어떤가. 세상의 잣대 하나로만 두 부류를 평가해 보는 건 어떤가. 교회를 세상의 구조에 맞게 해석하여 그 불합리성을 분석해보는 건 어떻겠는가. 혹은 기존의 세상을 권력을 가진 소수의 조작으로 해석하는 것을 그만두고, 공정한 과정을 통해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건 어떤가. 이 모든 부분에 있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적인 표현들을 걷어내고 비기독인의 언어로 대화하였을 때 과연 우리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혹은 윤리의 기준으로서 편파적인 우세를 얻어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런 것들이 내가 써 내려갈 연재의 시도들이 될 것 같다.**

2004/01/01 08:03 2004/01/01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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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회색지대 보고서 (8): 운동성을 가진 사회인이 되기까지 (2003. 12.)  

/김용주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

세 번에 걸친 ‘직장 생활 보고서’에서 나는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여러 가지의 문제들에 얽혀있고 그러한 문제들로 인해 결국 자신의 삶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정작 운동성을 가진 사회인으로서의 역량은 사라지고 있음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다시 부연하지 않더라도 짧게 말한다면 많은 기독인들이 라인홀트 니버의 책 제목처럼 ‘도덕적 인간’이 되고자 애쓰지만 ‘비도덕적 사회’에 대한 불편함, 부조리함에 대한 변화의 갈망과 같은 거시적 관점은 상대적으로 많이 잃어가고 있다.

많은 대중들이 흥미롭게 대하는 기사는 스포츠 신문에서나 접하게 되는 선정적이거나 충격적인 내용이며, 정치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와 비판들이 쏟아지지만 정작 관심사는 정치의 발전과 시민의 참여라기보다는 암실 정치의 ‘폭로’ 그 자체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는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직장에 묶여있는 시간과 노력이 늘어나면서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여가에 대해서 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점점 자신의 주변과 관계없는 일에는 귀와 입을 막고, 일하는 시간 외에는 되도록이면 머리가 복잡해지는 일을 하거나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는 일은 피하게 되는 것 같다. 주변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채로 출근길에 마주치는 이웃을 장애물 피해가듯 지나치게 되고, 주변에 어려운 환경에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도 줄어간다.

무엇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다양하게 이해하고 접근해야 하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냉담해지기 마련이다. ‘넥타이 부대’ 운운했던 시기는 이제 과거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는 듯 하며, 과거 군사 독재시절과는 달리 권력관계와 구조적인 악의 문제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바라보아야 할 관점도 많고 운동성 있는 사회인으로 살아가기에는 그만큼 알아야 할 것도 많아졌다. 특히 교인의 경우, 대다수의 기독인들에게는 교회 개혁에 대한 문제도 매주마다 피부로 느낄 만큼 민감한 문제이지만 직장인의 입장에서는 주일을 빼먹지 않고 교회 가는 것만으로도 할 도리는 다한 것이라고 자위하는 모습도 흔히 보게 된다. 이러한 다수의 기독 직장인들을 이해하는 것과 그들을 운동성 있는 사회인으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문제다.


무늬만 진보, ‘껍데기는 가라’

이렇듯 문제의식이 없는 이들이 대다수인 반면 또 다른 부류도 있다. 진보임을 자처하지만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희생도 없는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이상과 현실을 극단적으로 구분하여 스스로의 언행불일치에 대한 심적 자위책을 찾는다. 캠퍼스에 있을 때는 기독교 세계관 운운하던 학생들이 그러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구성원 중 다수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중 일부는 특정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다시 그 중 다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비평하는 일에 멈춰서게 되며 그 중의 하나 내지는 둘 정도가 그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더 나은 방향을 향한 행동을 시작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을 배우던 우리 세대를 예로 들어보자. 쉐퍼나 송인규로부터 시작하여 제임스 사이어나 브라이언 월쉬의 책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당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에 매료되었고 그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리차드 니이버나 도예빌트와 같은 이들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어느덧 이제는 무언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다시 기독교 세계관이 모더니즘적인 토대 위에 서 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되면서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하여 생각의 균형을 잡아갔다. 그 와중에 대다수의 학생들은 어떤 해결책을 모색하기 보다는 기존의 담론에 대한 비판에 많은 시간을 썼던 듯 하다. 물론, 여전히 내 또래의 기독인들 사이에는 기독교 세계관이 행동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 삶 속에서 아는 선 만큼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의 일부는, 자신의 신앙고백에 합당한 몸부림이 없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정직한 자성이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모든 문제에 있어 현실에 뿌리박은 해결책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특별히 세계관의 문제, 그리고 신앙과 결부된 문제들은 현실을 반추하는 것 이상의 어떠한 움직임을 동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한 움직임이 결여되어 있을 때 그 상부구조는, 적어도 그것을 붙잡고 있는 개인에게는 허구일 따름이다. 그러한 안일함은 마치 자신이 살아본 적이 없는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만큼이나 기만적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기지촌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무늬만 진보 흉내를 내면서 속으로는 보수적인 흐름에 편승하는 이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다. 하긴, 사회주의 혁명가에 대한 이야기를 극우 신문에 개재하는 일이나 진보잡지를 표방하면서 극우 잡지에 홍보를 일삼는 일, 진보를 자처하는 교수가 극우적인 단체의 후원을 받으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도 이제까지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진보의 상품화’라고까지 이야기해왔다. 손가락질 할만한 일이란 생각이 들다가도 정작 그 손가락을 나 자신에게 가져다 놓아보면 사뭇 그 느낌은 달라질 것 같다. 그만큼 우리의 사고는 타자화 되어 있으며, 동일하게 행동의 결여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나 또한 그 손가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운동가의 편견-‘건곤일척’의 문제

여기에 반해 극소수의 운동가들이 있다. 이들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길로 들어섰다. 운동가들은 시작부터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이 운동 자체가 춥고 배고픈 일이다. 그리고 애써 노력한 데에 반해 변화의 폭도 그리 확연히 드러나지 않아서 그만큼 운동의 길은 길고 지루하다. 또한 항상 타협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어디까지가 타협의 올바른 한계선인지에 대한 구분이 불명확하며 그로 인해 생기는 유혹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깨끗함을 목숨처럼 여겨야 하는 운동가들의 입장에서는 한 번의 실수로 이제까지 지켜온 명예가 더럽혀지는 일도 있다.

무엇보다 운동가들의 목적은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현실 사회의 문제를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야 하는 과정이 선행되기 때문에 운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때로는 극단적인 행동을 일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은 이미 삶의 많은 부분에서 희생을 치루었고, 공의를 위해 사욕을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가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도덕적 우월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나는 추호도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자존감은 세워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내가 가까이에서 접한 운동가들이 겪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아는 이상, 그분들을 범접할 수 없는 나의 처지를 질책할 수는 있어도 그분들의 헌신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수 없으리라. 따라서 전에도 언급했듯이 내가 짚고 싶은 부분은 원론적인 부분에서의 운동가들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분들의 방법론적인 문제이다. 결국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대다수의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현실의 모순들을 드러내주고 그들이 그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인식하여 정작 운동성있는 개인으로 거듭나게 만들기 위함이라면, 현재 운동가들의 운동 스타일에는 어느 정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건곤일척’의 정신에서 오는 문제다.

운동가들은, 흔히 하는 말로 99% 헌신된 일백 사람보다 100% 헌신된 한 사람을 원한다. 전적으로 어떤 일에 집요하고 끈기있게 매달릴 때에야 어떤 일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집요함이나 끈기가 운동가들에게는 권장되는 자질 중 하나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판단으로 볼 때, 매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매달리는 운동가의 자질은, 운동을 이끄는 그룹 내부에서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자 권장되어야 하는 태도이겠지만 하루하루를 일에 찌들어 사는 대다수의 직장인들에게 그러한 자질의 ‘강요’가 적지않은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운동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무엇보다 그러한 접근방법은 대다수의 직장인들에게 처음부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해버리고 싶어지게 만드는 게 문제인 셈이다. ‘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고 결연하게 말하는 운동가에게 대다수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아마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발을 빼기에 급급한 겁쟁이가 되어 수면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운동가들이 다수의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실제적인 문제 – 돈, 연합, 그리고 헌신의 대가에 대한

사실 이러한 운동가들의 문제를 그분들이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설득을 효과적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돈 문제와 인맥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소리를 내려고 할 수록 때로는 그 수위가 날카로울 수밖에 없으며 쉽게 주변의 강요에 쉽게 타협하거나 무너져서는 안 되는 문제가 존재한다. 후원을 받을 때에도 특정한 단체에서 그 단체의 이익을 대변할 정도로 큰 금액을 받으면, 이후에 그 단체가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에도 바른 소리를 내야 할 비판의 ‘칼날’이 무뎌지는 문제가 생긴다. 하여간 ‘돈’이 문제다! 그 흔한 행사 한 번 할 때에도 사용되는 금전적인 지출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인건비는 어떠한가. 마음 같아서야 부서마다 사람들을 원하는 만큼 두고 싶고, 그러한 인력을 바탕으로 깔끔하고 풍성한 움직임으로 세련된 운동 스타일을 구사하고 싶은 욕심이 많은 것을 안다.

하 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는 곳에는 사람도 버텨낼 재간이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기독인들은 그것을 너무 쉽게 치부해버리는 듯 하다. 흔히 돈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기독인들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타부(taboo)시 한다. 은혜롭지 못하다고, 혹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들어온 이방인의 불필요한 걱정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일정부분은 공감한다. 하지만 금전적인 문제에 있어서 ‘규모없음’이 ‘신실함’의 표증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오히려 금전적인 규모를 잘 관리하지 못함으로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청지기적 사명이 강조되어야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최소한 사회인으로서 그러한 운동단체에 지속적인 후원이 꼭 필요하며 다소 입장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이 치명적인 부분이 아닐 경우에는 일단 후원을 하면서 운동단체에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옳다.

두 번째는 연합에서 오는 불협화음의 문제이다. 내가 대학시절부터 줄곧 고민해 오던 두 가지의 키워드는 “운동성”과 “연합”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단어들은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으며 지금도 아직 그 현현(顯現)을 접할 기회가 적은 편이다. 어떤 행사를 하게 될 경우 대중들은 깔끔한 구성과 잘 짜여진 프로그램의 행사들을 선호한다. 장소도 깔끔하고 자리도 편안하며 음향시설도 어느 정도 받쳐주는 그런 곳에서 정서를 자극하는 음악과 부드럽게 넘어가는 진행이 대중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연합 행사는 위와 같은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경우가 많다. 일단 금전적인 어려움 때문에도 그렇지만, 워낙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 모이기 때문에 회합 회수부터 시작해서 준비과정, 그에 따른 의견 조율까지 하나같이 어려움을 겪는다.

끝내 단체들간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해 중도에 참여를 그만두는 단체들이 생기는 경우에는 더더욱 분위기가 냉랭해지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진행된 연합 행사는 적은 자본과 미흡한 준비, 그리고 연륜의 부족으로 인해 다소 부자연스럽고 껄끄럽게 진행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연합행사의 진행은 한 단체에서 완전히 전담하여 진행하는 것보다도 더 질이 떨어지는 행사가 될 확률이 높으며 그런 연유로 많은 사람들은 연합 행사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연합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해 주의환기를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결 국 단체간의 연합은 불완전하며 과정도 험난하고 결과도 그다지 좋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연합은 그 자체로 완벽함을 얻는다. 이 말이 다소 모순되게 들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이 가족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어떤 효율적인 성취에 있지 않는 이유에서 그렇다. 또한 모난 자식이 있어도 모두가 함께 모여 식사하는 자리가 잘난 자식 몇몇과 앉아 식사하는 자리보다 더 행복한 이유에서 그렇다. 특별히 기독인은 스스로를 몸된 교회의 한 지체라고 일컫지 않는가. 지체들이 다 같이 모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기뻐해야 할 본질적인 이유이고 그렇기 때문에 연합은 우리의 ‘목적 자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되도록이면 격려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연합운동에는 동참하는 것이 옳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잃을 것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흔히 기독인은 스스로를 헐리우드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생각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으며, 약간의 고통을 겪고 나면 이내 행복한 결말이 보장되어 있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리라. 하지만, 많은 신앙인들은 그 기한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지속적으로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기독인들이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에게 왜 고통을 허락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놓고 주기적으로 고민한다. 왕이 된 다윗이나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에 대해서는 ‘아멘’으로 ‘화답’하지만 많은 은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순교한 ‘스데반’은 왠지 들을 때마다 껄끄럽기만 하다. 이 세상에서의 지속적인 고난은 여전히 기독인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이 가감 없이 말하듯 현실 사회에서 실제로 운동을 하는 이들은 많은 위협을 받는다. 타협을 거절하였을 때 오는 인맥 상의 따돌림이라거나 신변의 위협을 당할 때도 있다. 게다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집으로 걸려오는 협박전화를 운동가들의 가족이 받고 고통 받는 일도 다반사이다. 그런 극단적인 형태의 위협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비판하거나 문제를 지적하다가 쫓겨나는 일도 있으며, 그 이후에도 그 공동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맥의 방해로 결국 그 바닥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일도 잦다. 결국 바른 소리를 내며 행동하는 사회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일정부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는 자주 그러한 헌신의 대가를 뼈 속 깊숙이까지 새겨보아야만 한다.


연재를 마치면서

‘회색지대’라는 말은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다. 어느 한 쪽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어느 쪽에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특히 문제제기를 하는 입장이 그렇다. 게다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면서는 원고를 쓸 때마다 몇 번이고 망설이기도 했다. 이런 잡글이 복상의 소중한 지면을 차지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류의 고민 때문이다. 항상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시행착오를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족함들을 가감없이 써 내려가는 일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이전에 글을 쓰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내가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글의 수위, 행동의 한계선. 이런 것들을 계산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불편하고 부끄러웠다. 연재의 시작은 캠퍼스 학생들을 위함이라 얘기했지만 정작 이 글들은 오히려 무뎌져 가는 나에 대한 질책이 되었던 것 같다. 늦은 원고에도 항상 느긋했던 서부장님과 재홍이 형에게 감사한다. **
2003/12/01 23:28 2003/12/01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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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회색지대 보고서 (7): 개인생활 보고서 (2003. 11.)

/김용주


하루

알 람을 3개나 맞추어도 요즘은 쉽사리 일어나 지질 않는다. 새벽에서야 잠이 드는 생활이 익숙한 지라 역시 아침은 그리 달갑지 않다. 얼마 전에는 시계를 snooze 기능이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 5분 간격으로 다시 벨이 울리기 때문에 최소한 이 친구가 있으면 늦게라도 일어나지는 장점이 있다! 대학교 때는 손수 아침식사를 만들어 먹고 나가는 일도 많았건만, 대학원 생활이 시작된 이후로는 직장인들의 아침 생활과 비슷해져 버렸다. 전에는 눈에도 띄지 않던 길거리 포장마차의 김밥과 토스트가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침을 거르지 않아야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항시 하기 때문인 듯 하다.

학교 가는 길은 1시간 정도 걸리는데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서 30분 정도가 더 걸리는 편이다. 보통 전반 30분은 영어회화 테이프를 들으면서 가고, 후반 30분은 근처에서 산 <한겨레> 신문을 읽으면서 간다. 물론 전날 연구실 일이 늦어져서 막차를 타고 들어가서 새벽까지 잠을 못 잔 경우에는 음악을 들으며 버스를 타고 지하철에서는 앞사람에게 인사하듯 졸기도 한다.

도착해서는 200원이 채 되지 않는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자리에 앉아 간단하게 성경을 읽는다. 귀납적 성경공부에 한창 정신을 잃던 시절에는 아침 Q.T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기면서 주변을 충동질하던 적도 있었고 Q.T 교제가 없으면 책 없이 등교한 학생처럼 어딘가 불안한 마음에 집중이 안되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냥 관주성경을 가지고 짧은 본문을 반복해서 읽는 것도 묘미가 있는 것 같다. 항상 많은 것들을 종합해서 어떤 결론을 내려야 직성이 풀리던 나에게 작다면 작은 변화인 셈이다. 연구실에서는 대체로 오전에는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수업과 연구실 일들을 하다 보면,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를 하게 되고 저녁을 먹은 후에야 깊이 있는 주제의 연구가 가능하다. 물론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이르는 경우에는 그 조차도 쉽지 않다. 그런 연유로 식사 후의 시간에는 대다수의 동료들이 사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웹 사이트에서 스포츠 신문이나 물건을 구매하는 일이 많다. 나는 주로 그 시간에 <뉴스앤조이>나 <복음과상황>의 게시판, 혹은 다른 기독 매체의 토론방이나 진보 잡지의 게시판들을 둘러보고 관심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때로 글들을 남기는 일도 있다. 인터넷 상거래는 주로 책을 구입할 때 많이 쓰는데, 읽고 싶은 책들의 명단을 틈틈이 만들다가 마일리지가 쌓였거나 행사기간에 구매를 하는 편이다.

대체로 10시와 11시 사이에 연구실을 나오게 되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정기 구독하는 잡지나 읽고 싶던 책을 읽는다. 전에는 구독하는 잡지가 많았으나 지금은 금전적, 시간적 여력이 없어서 <복음과상황>, <인물과 사상>, <객석> 정도를 읽고 있다. 그나마 <객석>의 경우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만만찮은 가격 때문에 격월 간격으로 사서 본다고 하는 게 맞다.

예전엔 신앙서적을 많이 보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고종석, 진중권 같은 논객들의 글이나, 제레미 리프킨, 노암 촘스키 같은 운동가적 기질의 학자들이 쓴 책들, 그밖에는 사상서적, 심리학 책들에 더 관심이 가는 편이다.

집 에 오면 음악을 들으면서 방 정리를 한다. 밤 시간에는 과제나 프로젝트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주로 논문을 읽거나 노트 정리를 요하는 책들을 읽는다. 대충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에는 묵상집을 읽으면서 영육간의 쉼을 갖는다. 자기 전에는 하루를 정리하면서 기도 시간을 갖는데 기도 시간이 뜨겁거나 열정적이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하루를 돌아보며 내 생각으로 가득했던 머리를 비우는 작업들이 내가 계획하지 않은 좋은 것들로 채워질 수 있게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름대 로 충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나의 하루에는 몇 가지의 좋은 기반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미혼(?)이기 때문에 아직은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아직 완전하게 경제적으로 자립한 상태는 아니지만 공대 대학원생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서 일정한 수입이 있다는 점이다.


한 달

시간 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내게 처음 일깨워준 분은 고든 맥도날드 목사다. 스무 살의 나이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대학 초년생의 티를 벗지 못하고 여기저기 배회하던 내 손에 잡힌 첫 신앙서적은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었고, 그 책의 저자로부터 지금껏 큰 빚을 진 사람처럼 그 분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다. 나는 매달 하루 정도는 안식과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집이 비는 날이면 집에서 쉬는 편이지만,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근교의 조용한 공간이나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곳을 찾아간다. 그런 날은 책을 주로 가지고 다녔었는데 요즘은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편이다. 어떤 일에 몰입하거나 시간에 쫓겨 바쁘게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무엇이 중요한 일이고 무엇이 주변적인 일인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 결국 그 목적과 가치가 어떠한지에 대한 생각을 잊게 되거나 혹은 그런 생각들이 희미해져 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나와 나의 주변을 관조적(觀照的)인 태도로 혹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둘러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특히 요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서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지내려고 해도 시시각각으로 시간 절약(time-saving)과 기술(technology)에 대한 무조건적인 가치부여에 휘둘리게 되는 게 사실이다. 직장에서도 특정한 기한 내에 일을 처리하는 것이 기업의 진정한 가치이자 목적이며, 연구실에서도 연구분야는 프로그램이나 알고리듬의 실행(run time) 시간이 절약되거나 여러 가지 일들을 한꺼번에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시스템(multi-tasking system)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런 분위기에서 시간 죽이기를 시도하는 이들은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무능하다는 딱지를 달고 다니는 게 지배적인 분위기인지라 나도 모르게 그런 분위기 안에서는 호흡이 빨라지고 그런 가치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모습도 심심찮게 직면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매 주기마다 한 번 정도, 일주일 중의 반나절, 한 달 중의 하루, 일년 중의 한 주간, 그런 식으로 잠깐씩 달리던 길에서 멈춰 서서 이제껏 걸어온 궤적을 돌아보고 그 흐름을 객관적으로 차근차근 짚어보면서 수정할 부분은 수정하고 바른 방향은 키워주는 일이 필요하다.

단순히 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회 봉사와 사회 참여라는 대목에서도 이 한 달의 주기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물론 일 주일의 주기가 더 적당하겠지만. 나는 "복음주의 바이러스"라는 작은 모임을 하고 있다. 귀납적 성경공부를 하기도 하고 스터디 모임도 갖지만 주로 우리가 하는 일은 수다를 떠는 거다! 내가 홍세화님의 책에서 접한 프랑스 문화 중 가장 부러워했던 대목은 식사 시간이 충분히 길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충분히'는, 대화가 어느 정도 깊어질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시간을 감안한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식사 중에 "그 영화 어땠니?"라는 질문에 "난 별로였어."라거나 "정말 죽여주던걸?"이라는 대답 몇이 오고 가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는 인스턴트 문화에 젖어있는 내 주변 분위기에서 "나는 그 영화가 좋았어. 왜냐하면, 그 감독이 찍은 이전의 작품을 보면.."이라며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충분히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치, 신학, 문화, 영화, 심지어 연애에 대한 이야기까지 좀더 자세히 조목조목 이야기할 수 있는 모임이 기독 청년들에게는 절실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들이 정립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의 일관성에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연유로 바쁜 와중에도, 그리고 그리 많이 모이지 않는 독자 모임도 지속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지적 유희 아니냐,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가끔씩 듣는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문제의식을 갖게 만드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행동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지만 믿음 또한 들음에서 난다고 하지 않던가. 결국 문제의식을 나누던 이들이 인적 인프라로 어떤 참여적인 형태의 일들을 해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하고 있는 많은 행보들에는 되도록이면 참여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대해서는 언젠가 더 깊게 이야기할 때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사회 봉사의 문제는 최근 내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학부 시절에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도서 워드 입력이나, 음성 녹음과 같은 일들을 곧잘 했었다. 학교 주변에 그런 연결점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고, 바쁘다는 핑계를 자주 대긴 했지만 실제로 대학 생활에서 시간을 내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는 게 훨씬 정직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굳이 감추지 않는 것이다. 유일한 변명거리라고 한다면 그런 것이다. 곧 나의 대학원 생활이 마무리될 것이고 또 어딘가에 정착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봉사할 단체를 찾아서 주기적으로 찾아가겠다고. 하지만 지금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구두 속에 들어간 작은 돌맹이처럼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되고 있다. 사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불편함이 어느 정도 익숙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또한 느끼고 있다. 내 대학원 이후의 생활에서 아무런 봉사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내 주변에서 누군가는 나의 안일함을 질책해주기를 바란다. 이 글을 들이대면서 말이다(웃음).


일 년, 그리고..

일년을 주기로 고려해야 하는 일은 주로 경조사이다. 가족의 생일이나 결혼식, 스승의 날에 스승을 찾아 뵙는다거나 하는 일이 여기에 속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의 생일은 미리 메모를 해 두었다가 의미 있게 챙기는 것이 좋은 듯 하다. 나는 이런 일을 잘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결혼식에 잘 가지 못하는 일도 많고, 생일은 가벼운 선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 무의식 깊은 곳에는 인맥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 이유도 큰 듯 하다. 자주 겪는 일이지만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인맥의 병폐들에 큰 환멸감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인맥의 관리 차원에서 일어나는 주변 분위기를 잘 참아내지 못하는 것이 내 성격의 모난 점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공적인 일들에 그런 주변 사람들의 일들이 파묻히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진중권씨가 자기 동문 선배에게 표를 주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개새끼'라는 욕을 먹었다는 글을 읽고 한참을 웃은 적이 있었는데, 나도 그런 전철을 밟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즘은 자주 든다.

다음 얘기를 하기 전에 잠깐 얼마 전에 들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한국 학생들과 미국 학생들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개의 예문이 있다. 먼저 미국 학생들의 대화다.

A: 나 어제 시험을 망쳤어. 정말 기분 꽝이다.
B: 과목이 뭐니? 수학이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고 다른 과목은 잘하는 조교를 소개시켜줄 수도 있거든.


다음은 한국 학생들의 대화다.

A: 나 어제 시험을 망쳤어. 정말 기분 꽝이다.
B: 그럴 수도 있지 뭐. 인생이 다 새옹지마 아니겠어? 술이나 마시러 가자.

시험을 망친 후에 생각하는 학생들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다. 한쪽은 이미 지난 문제에 대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다른 한쪽은 지난 문제를 잊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사 실 일년을 주기로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 망년회다.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의 연장선 상에서 나는 망년회라는 말 자체부터 싫어하는 사람이다. 이름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좋지는 않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그 내용을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망년회는 정말 짜증나는 이름이다.

나는 역사에 관한 책들을 재미있게 보는 편이다. 사상에 관한 책도 흐름과 시대상이 반영된 시각을 주는 저자의 책이 좋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때론 너무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항상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버팀목이나 발판이 된다는 점에서 좋은 행위임에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 해를 잊어버리겠다는 느낌이 강한 망년회라는 말보다는 한 해를 깊이있게 돌아보겠다는 회년(懷年)회가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한 해를 한 달 정도 남긴 시간에 한 해를 돌아보고 나머지 한 달 동안 새해에 대한 계획들을 세워보는 것이 일년의 마지막에서는 참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이 나올 때 즈음이면 어느 정도 시의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에 11월 말에 내가 속한 모임에서 만들었던 회년회 모임 자료의 토론 문항들을 소개해 본다.


<회년모임 나눔 자료> 2002. 11. 30.

1. 올 해의 가장 즐거웠던 일은?
2. 올 해의 가장 힘들었던 일은?
3. 올 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어디어디인가?
4. 공동체로부터 공급 받은 것들은 무엇이며, 공급한 것들은 무엇인가?
5. 올해 자신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어떤 노력들과 어떤 어려움들이 있었나?
6. 올해 자신이 중점적으로 노력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예. 제자 양육, 학업, 직장 사역, 사회봉사, 안식 등)
7. 올해 자신이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부분, 혹은 균형이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었는가?
8. 내년의 계획을 간단하게 세워보자.
9. 내년의 계획들을 통해서 자신이 5년, 혹은 10년간 이루어갈 일들을 생각해보자.

개 인의 삶이 드러나는 일은 나에게도 참 불편한 무엇이다. 놓치는 일도 많고 연륜이 없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달려드는 일도 아직은 상당수임을 감안하면 이런 류의 글들이 과연 좋은 글인가 하는 자성도 해본다. 하지만, 간혹 만나는 선배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끝에 다급한 마음으로 "형은 어떻게 살고 있어요? 직장인으로서 기독인으로서 사회를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하거든요."라는 물음에 "뭐, 사는 게 다 그렇지."라거나 "내 삶을 나누면 은혜가 안 되서."라고 한 발 물러서는 이들도 많다. 혹은 괜히 튀려고 하지말고 큐티나 열심히 하라는 권면도 듣는다. 아직은 자신이 바르게 살고 있지 못하니 자신을 추스리고 신앙의 연륜이 좀 쌓이면 그 때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쓰겠다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간단하게 대답하자면 그런 류의 반응은 몸부림치면서 하루하루를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고민하는 기독청년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과정 중에 일어나는 다이나믹한 고민들, 그 복잡다단한 선택과 일상의 문제들이 드러나지 않는 한, 청년들의 고민은 한 번 펼쳐지지도 못한 채로 머리 속에서만 꿈틀대다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개인 생활 보고서를 써 내려가 보았다. 자신의 로맨스가 타인의 불륜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직장인의 농 섞인 얘기가 있다. 내 삶도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실제 삶보다는 조금 포장이 되었을 수 있다. 감안하고 읽으면서 자신의 생활 보고서도 한 번 스케치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003/11/01 23:27 2003/11/01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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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본 사랑의교회 '새벽기도' 열풍
"이제는 행동에 나설 때"…"교회 변화 기다려 달라"
/ 뉴스앤조이, 2003년 10월 16일 제 71호

 

젊은이들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랑의교회 새벽기도 열풍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런 큰 물음을 가슴에 안고 두 청년을 만나러 강남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모두 서른 내외의 청년이라는 점, 올빼미 생활로 유명한 공대 대학원생이라는 점,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는 점 등이 그렇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김용하 씨는 사랑의교회의 오래 된 성도. 중간에 잠시 다른 교회를 다녔던 기간을 합치면 20년 가까이 사랑의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김용주 씨는 이에 비해 대학교에서 IVF 활동을 했으며, 현재 예수가족교회에 출석하면서 월간 <복음과상황> 서울 독자 모임을 이끌고 있는 '외부인'이다.

사랑의교회 특별새벽기도회가 한창 막바지를 향해 가던 10월 10일, 교회 근처의 찻집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이들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진지하고 뜨거운 대화를 두 시간 넘게 이어나갔다. 다음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다.

 


먼저 자신의 기도 생활을 소개해 달라.

김용주 : 주로 저녁에 기도하고 아침에 말씀을 보는 스타일이다. 아침에 말씀을 보고 하루를 준비하고 저녁에는 회개하는 식인 셈이다(웃음). 개인적으로 소리를 내거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같이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대화인데,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사적인 기도가 어렵다. 새벽기도는 고3 때 참여한 일이 있다. 요즘에는 생활 패턴과 맞지 않아 새벽기도는 피하고 저녁기도를 즐기는 편이다.

김용하 :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지는 못하지만 최근 들어 기도의 필요성을 많이 느낀다. 새벽기도는 가끔 나가는데, 사실 사랑의교회 새벽기도는 이번에 처음 왔다. 집에서 교회까지 버스로 다섯 정거장 거리인데 새벽에 오는 것이 쉽지 않아 집 앞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나도 아침잠이 많은 편이다. 새벽기도 시간까지 깨어 있는 것은 자신 있지만,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어려울 때가 많다. 주로 금요일에 있는 심야기도회에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 새벽기도는 일종의 결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적으로 흐트러져 있을 때 생활의 규모가 사라진다. 새벽기도의 부수적인 이익으로 생활을 다잡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늦게 자는 것이 몸에도 안 좋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와도 어긋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늦게 잠이 드는 편이다.

김용주 : 전병욱 목사님이 쓴 「새벽무릎」을 무협지 읽듯 앉은자리에서 아주 재미있게 읽은 경험이 있다. 전 목사님은 9시가 넘어서 거리에서 교인을 보면 새벽기도를 위해 일찍 귀가하라고 말한다고 한다. 새벽기도는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녁에 활동한다. 늦게 자면서 새벽기도에 꾸준히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새벽기도가 가능한 시간대에 활동하는 사람들만 모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교회와 세상을 이원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일반 사람들과의 약속이나 만남을 제한하는 효과가 있다. 새벽기도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경우도 있다.

김용하 : 그 부분을 비중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기도회니 격려를 하는 차원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새벽기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수성이 반영되는 현상이다. 새벽기도가 한국 기독교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지만, 그 자체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옳지 않다. 새벽기도에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

우리 집 같은 경우 집이 작아서 마음 놓고 기도할 공간이 없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어렵던 시기에는 이런 현상이 더 심했을 것이다. 방해받지 않는 기도 시간과 장소 확보가 어려웠을 것이다. 왜 하필 새벽일까. 기도 끝나고 바로 일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김용주 : 과거 농경사회는 동트면 하루가 시작했다. 그래서 그 시간대에 새벽기도가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부 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벽기도가 어렵다. 우리 교회의 경우 새벽기도가 끝나고 직장에 바로 갈 수 있도록 시간을 조절했다. 새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위해 예배를 만들어야 한다면 시간대를 현실적인 것으로 조절해야 한다.

김용하 : 사랑의교회 새벽기도의 경우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진행한 일이 없다. 지금의 새벽기도는 부흥회 성격이 강하다. 사랑의교회는 말씀에 비중을 둔 교회였다. 성도들 안에 기도의 필요성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고 머리만 큰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었다. 점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지도자가 바뀌는 상황이다. 지금의 새벽기도는 겨우 내 움튼 땅을 갈아엎듯이 성도들 마음 밭을 일구는 작업이다. 만일 지금과 같은 새벽기도가 40일이 아니고 계속 지속되면 문제가 있다. 생활이 안 되고 사회 생활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도 자주 말한다. 사랑의교회 상황을 너무 절대화하지 말아달라고. 사랑의교회만의 특수성이 있다.

김용주 : 실제 새벽기도의 주된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 사회에 대한 이슈도 들어 있고, 매우 다양하게 보인다. 인터넷에서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 문구가 상당히 기복적으로 들린다.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면서 새벽기도를 통해 자녀의 축복을 빌라는 내용으로 들린다.

김용하 :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다 적다의 명확한 기준을 긋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랑의교회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와 인터넷을 보면 사회에 대한 관심과 기도 제목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물론 개인적인 아쉬움은 있다. 처음에는 나도 기도회가 끝나고 거리청소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색내기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어쨌건 작은 실천 중에 하나다.

김용주 : 사랑의교회 새벽기도를 보면서 열린음악회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해만 되어진 신앙의 한계가 보인다. 뭔가 하고 싶어하는 데, 실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한계를 보는 것 같다. 새벽기도회가 동기부여 효과는 있겠지만, 이제는 어떤 열매를 맺을지 고민할 시점이다.

 
 

 

특별새벽기도회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용하 : 교회 안에서도 이 부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수련회 후 생활이 금세 도루묵이 되는 경우 많은데,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이를 위해 리더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에너지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옮겨져야 한다. 만일 여기서 잘못 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교회 사람들의 색깔이 너무 다양하다. 신앙의 깊이와 색이 다 다르다.

<뉴스앤조이>에 올라온 사랑의교회 새벽기도회 논쟁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25년 된 젖먹이'였다. 물론 그 말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특수한 상황이 있다. 교회가 25년이 되었다고 하지만 25년 동안 꾸준히 교회에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일까.

내가 소속된 청년부만 해도 사랑의교회에 다닌지 5년 이상 된 사람이 드물 정도다. 다양한 이유로 교회를 옮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아직 젖먹이냐'고 다그치는 것은 조금 아쉽다.

김용주 : 사랑의교회는 '우선 내가 잘 되어서 나중에 남을 돕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회개에서 나오는 역동성이 없다. 교회가 세워지고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다면 이제 열매를 거두는 기도 제목이 나와야 오히려 교회가 하나 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결단과 열매보다는 감정적인 고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를 묶는 행동이 나와야 할 시점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평양의 부흥운동과 사랑의교회 새벽기도회를 연결하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용하 : 이번 특별새벽기도회의 평가는 후세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양 사건이 모델이 될 수는 있지만 자화자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김용주 : 그렇게 연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랑의교회 새벽기도가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와 각성이 일고 있다는 조짐은 잘 보이지 않는다. 더 지켜봐야 한다.

김용하 : 시간이 필요하다. 작년에 몇몇 교회 친구들에게 촛불집회 이야기를 꺼낸 일이 있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친구가 "갑자기 선동하는 것이 먹히겠냐. 평소에 이런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라"며 방법론상의 문제 제기를 했다. 그 이야기에 공감을 했다. 우리교회가 강남에 있고 교인 대부분이 중산층이다. 소득 수준이 일정 이상인 사람이 많다.

이 사람들의 평균적인 의식을 고려해야 한다. 오정현 목사가 부임하자마자 이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했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천천히 이야기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강남에서 투표하면 무조건 한나라당이 일등이다. 이런 점이 강남의 보수성을 반증한다. 이런 기회를 시작으로 변화의 첫발을 내딛어야 한다. 결국 속도의 문제다. 열매가 늦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굳어져 있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담임 목사님 이야기를 대부분 신뢰하는 편이다. 오 목사님이 부임 때 하신 말 "무너져 가는 한국 사회를 바로 세우는 영적 발원지가 되게 하소서"를 기억하고 있다. 이 말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내가 오 목사님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가 천명한 사실이 있으니 우선은 믿고 함께 가야할 목표라고 생각한다. 교역자와 성도의 역할이 각각 중요하다. <뉴스앤조이> 독자로 바란다면 많이 마음을 열고 이런 부분에 관심이 없는 성도들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지 않지만 노력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사랑의교회 교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선 우리의 슬로건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이기적일 수 있는 부분이 가족이다. 가족을 하나님의 원리로 가르치는 것이 먼저다. 과연 축복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좋은 대학 가고, 승진하고, 많은 소득을 얻는 것은 수단이지 성공과 승리 자체가 아니다. 기독인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집단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특정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인 모두가 고민할 문제라고 본다.

부시 같은 경우 신실한 기독인으로 소문이 났다. 나는 그 사람의 신앙은 평가하지 못하겠지만, 이라크전을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있다. 부시의 행동에 전략이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원리는 없다.

이는 부시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시어머니 중에 가장 피해야할 사람이 강남에 사는 권사라는 말이 있다(웃음). 신문에 나오는 다양한 사건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교역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이라크 파병 문제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경제 효과를 말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하나님 원리로 볼 때, 하나님의 생명 사랑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주변의 사람들을 고민에 동참시킬 수 있을까.

김용주 : 사랑의교회의 강점은 모든 부분에 균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경제 등등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기복적 성향이 있는 사람을 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균형을 중시하다보니 행동을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특정 사안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 목사님이 파병 반대를 설교하지 못할 것이다. 한나라당이 문제를 일으켜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교인들에게 헌신이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교회가 명확한 입장을 나타내면 공동체에 분열이 생긴다는 생각이 있다.

김용주 : 목회자 말씀 선포에 너무 큰 무게가 실리는 것이 문제다. 그런 부분을 토론하고 포용하는 공동체가 건강하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교회가 이것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방법을 말하지만 그 실체는 없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어떤 행동도 안 하게 된다. IVF도 사회 참여와 로잔 언약을 늘 말하지만 아무 행동도 안 한다. 추상성에 원인이 있다.

김용하 : 교회 안에 전도를 강조하는 사람이 있고, 구제를 중시하는 사람도 있다. 후배 양성에 힘쓰는 사람, 문화 사역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모두가 중요하다. 다양한 공동체를 아우르는 것은 영원한 숙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완전한 입장을 말하기보다는 이 사안을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가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역자들이 신문을 보며 그냥 지나치지 말고 어떻게 사회를 볼 것인지 고민하도록 만드는 메시지를 제시해 주었으면 한다. 이런 부분이 개발이 되어야 성도 스스로 자생할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파병은 그 자체가 정치 색깔이 드러나는 부분이니 교회가 조심하는 것이라고 본다.

정치 색깔은 없어도 사회적인 관심을 모을 수 있는 부분부터 시작하면 성도들도 충분히 바뀔 것이다. 사랑의교회는 내 고향이다. 나는 내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이 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주변에 이런 주제로 같이 이야기할 친구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교회의 무게 중심이 한 곳으로 쏠리지 않는 것이다.

 

 

바른 기도는 무엇일까. 어떻게 나와 가족, 공동체라는 울타리를 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김용주 : 혼자 드리는 기도는 친밀해야 한다. 다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친밀하게 하나님과 만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에 민감해야 한다. 자신의 공동체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설득하고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구성원을 쫓아내는 공동체는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적절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의교회 새벽기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열매 맺길 바란다. 하나님을 만난 공동체는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할 것이다. 믿음에는 세부적인 행동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건강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랑의교회가 균형에 너무 치중하다가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는 욕구에 매몰돼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모순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치열함이 균형보다 높게 평가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한국사회에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기 바란다.

김용하 : 자신의 위치에서 기독인으로서 하나님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시험의 연속이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내 부분을 내어 드리고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인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소극적 봉사관이다. 열매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 교회는 이런 일을 한다"는 논리 뒤에 숨어서 이것이 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그 열매는 내가 맺은 것도 아니다. 봉사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

또한 회개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것으로 타자화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세습을 하는 목사들이나 김홍도 목사 같은 사람에게 넘기고 자신은 의롭다고 여긴다. 기독인이 조소를 당하는 것은 죄의 문제를 남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양정지건 nunmul25@newsnjoy.co.kr

2003/10/16 00:49 2003/10/16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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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회색지대 보고서 (6): 연애문화 보고서 (2003. 10.)

/ 김용주


소개팅 이야기

첫 주가 지나고 어느 날, 소개팅을 다녀온 동기의 얘기를 들었다. 처음에 이 친구녀석은 소개팅에 나온 여학생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이어진 그녀의 네 가지 질문에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고 했다. 난 혼자 생각에 ‘고만고만한’ 호구조사 정도거니 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는 무슨 일하세요?
2. 졸업하고 뭐 할 거에요?
3. 무슨 차 몰고 다니세요?

처 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소개팅 자리에서는 주로 좋아하는 음악이 뭐냐, 영화 많이 보냐, 전공이 뭐냐, 재미는 있냐 같은 것들을 물어보던 과거를 떠올리며 약간 놀라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들기 전에 미리 안정된 남자임을 확인하려는 그 여학생의 노련함이 돋보이는 부분이긴 했다. 헌데, 정작 뒤끝이 씁쓸했던 건 마지막 질문이었다.

“교회 다니세요?”

물 론 기독 학생들 간에도 남학생은 여학생의 외모를, 여학생은 남학생의 능력을 암암리에 따진다는 것이 보편적이긴 하지만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화끈하게(?) 물어보는 변화에 꽤 당혹스러웠다. 차라리 그 여학생이 마지막 질문을 처음에 물어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남자의 눈: 여자의 눈

이성교제에도 약간의 변화가 느껴진다. 사실 내가 처음 학교를 들어온 시기는 캠퍼스에서 ‘페미니즘 번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항상 여성은 남성과의 평등에 대한 시각으로 다가왔고, 이상적인 여성상은 프리랜서 내지는 직장에서 남성과 나란히 경쟁하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하지만 IMF 이후에 변화된 것인지, 아니면 페미니즘을 화두로 했던 캠퍼스 문화가 시들해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집안 좋고 능력 있는 남성에게 어느 정도 의존적인 여학생들이 늘고 있다.

아니, 과거를 돌아보면 그건 90년대 중반의 일시적인 흐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여학생은 연애를 3번 하는데, 저학년 때는 동기와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가 고학년이 되면 학업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같은 과의 실력있는 복학생 선배가 되고, 졸업을 하면 취업한 회사에서 능력 있는 직장 선배가 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저학년 동기는 곧 군대를 가게되고, 졸업을 하면 주변 환경이 바뀌는 부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들은 농 섞인 이야기다. 예전에는 자수성가한 사업가형 남성들이 상당히 호감을 샀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자수성가한 사람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서 노년에 단명하거나 지병을 앓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최근의 캠퍼스에서 선호하는 남성상은 아버지가 사업가라 집안도 여유가 있고 똑똑하며, 성격이 어둡지 않고 생각이 비뚤거나 모나지 않은 재미있는 사람이다.

남학생의 경우에는 여전히 외모에 의존적인 이들이 많다. 처음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는 술자리에서나 그런 이야기들을 하던 학생들을 보곤 했는데, 복학한 후에는 연애 이야기가 나오면 대놓고 여학생들의 몸매와 얼굴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이들도 심심찮게 만난다. 그런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가 아니라도 보통 남성들의 경우, 이상적인 여성상이 실리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실제로 자기 혼자서만 벌어서는 가정 생활 유지가 안 된다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의식이다. 그래서 집에서 살림을 하는 여성보다는 같이 가사를 돌보더라도 직장을 가지는 여성을 선호하고 있다. 직업은 보수가 적더라도 안정적이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공무원이나 교사가 좋다는 말들을 많이 듣는다.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

얼마 전 2%라는 음료 선전용으로 5분짜리 광고가 인터넷 상에 뜬 적이 있었다. 사랑에 대한 짧은 드라마형식이었는데 처음 보았을 때 그 영상이 너무 충격적이라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던 기억이 난다. '충격적'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내 또래의 직장 초년생 내지는 취업을 앞둔 대학생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내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이유 때문이라 하겠다. 내용을 대충 이야기하자면, 동갑내기 커플 중 남자는 군대를 갔다와서 복학을 한 학생신분이고, 여자는 갓 취업하여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이다. 이 여자는 직장에 가서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고 직장에서 능력있고 매너도 좋은 직장 선배 남자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다. 그 사실을 남자친구가 알게 되고 다투는 대목에서 여자는 울면서 자신에게 언제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 본 적 있느냐며, 사랑만 있다고 사랑이 되냐는 말로 남자에게 상처를 준다. 나에게 이 영상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나온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자 주인공의 나레이션에서 보이는 합리성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감정은 2년이 넘지 못한다"는.

주위 사람들을 만나보면 사랑에 대한 나름의 여러 생각들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또한, 그러한 사랑에 대한 고유한 정의는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준의 것이고 그런 연유로 사랑에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과 정의, 그리고 경험에 맞추어 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함부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곤 한다. 위에서 예로 든 광고회사에서 자신의 광고에서도 누구의 '사랑관'을 선호하는지 투표를 했고, 두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다는 점을 보면 그러한 서로의 입장에 대해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실제 투표에서는 여자 주인공의 입장이 좀더 높은 동의를 얻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광고에 나온 여자 주인공의 나레이션과 반응에 큰 공감을 표하게 된다. 물론 대부분의 순수파 혹은 순정파 연인들에게 여주인공의 행동은 비난을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고 있는 또래 학생들과 직장 초년생의 연애관은 그들이 여전히 자신을 규정짓지 못하고 있는 만큼 불안정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결단대로 행동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도 허다하다. '영원한 사랑', '변치 않는 마음'과 같은 류의 고백들이 진정 서로가 지켜나갈 수 있는 류의 고백인지 아직 스스로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연인들 상호간에 '사랑'이라는 정의도 개인의 경험에 따라서 그 의미와 규모는 사뭇 차이가 난다. 그간 무수한 사랑에 관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이 처음 만나서도 부드러운 대화가 이어지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어 만난 당일에 깔끔한 세트로 꾸며진 집 안에서 잠자리를 같이 하는 식의 작위적 설정으로 인해 젊은 남녀도 그런 상상 속에 많이 휘둘리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이들은 운명적 만남에 대한 환상이 너무 큰 경우도 많다. 이들은 자신의 결정에 항상 회의감을 가진 관계로 의지적인 측면에서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광고 속 여주인공의 대사처럼 그러한 감정적인 설레임은 2년 이상을 넘지 못하고 그 이후에는 자신이 선택한 이성이 운명이 아니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정이라 믿게 된다. 갈수록 많은 연인들 간에는 감정이 식으면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불편한 무엇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듯 하다.

이런 순수파, 감정파에 비해 광고 속 여주인공이 더 많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연인들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적인 무엇, 첫 눈에 반하는 무엇, 혹은 운명적인 만남과 같은 이상적인 형태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첫눈에 반하는 요소들은 대부분인 외모, 말하거나 행동할 때의 깔끔한 매너, 목소리 정도이며 간단한 대화를 통한 상대방의 기호 정도가 된다. 그것을 운명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결국 일상에서의 지루한 관계가 지속될수록 무료함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그런 연유로 부모들 입장에서, 혹은 광고 속 여주인공 입장에서 상대방의 배경이나 재산,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것도 동의까지는 아니라도 때로는 납득이 된다. 사람이 만나서 부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 순정파의 입장에서는 너무 성글게 생각하는 듯 하고, 속물파의 입장에서는 너무 치밀하게 계산하는 듯 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연애를 막는 선교단체의 폭력성

결 국 서로를 알아가는 데에는,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연애관을 수정하고 또한 돌아보게 되는 데에는 이성간의 만남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너무 진지한 시작은 좋지 않겠지만 주위의 관심아래에서 연애는 권장되어 마땅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교단체는 이에 역행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지난 번에 연재되었던 “약간은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선교단체의 학생들은 전적으로 시간에 쫓기게 되어 있고, 결국 공동체의 운영에 있어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영역들은 공동체 자체적으로 금지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성교제와 아르바이트이다. 내가 아는 한 선교 단체에서는 이성교제와 아르바이트를 하면 공동체에서 제명되는 일도 있었다. 이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잘못 구분한 탓이다. 이성교제를 금지하는 공동체는 많다. 많은 동아리들도 동아리 내에서 이성교제를 금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동아리 활동을 등한시하고 때때로 두 사람이 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기독 공동체에서도 이성교제를 음성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금하는데 이는 많은 시간을 교제에 쏟게 되고, 지체를 섬겨야 할 리더들의 감정기복이 심해지며 두 사람이 함께 공동체를 떠나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성훈련이 제대로 선행되지 않은 학생들의 이성교제가 문제가 될 위험성이 있으며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경우에 공동체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등의 이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에 위험성을 뿌리뽑자는 심산인 듯하다. 많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황당한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 학생시절에 이성교제를 놓고 힘들어하며 이런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했더니, 어머니는 내가 통일교 내지는 이단 단체에 들어간 줄 알고 동아리 활동을 중단하도록 권면을 받은 적도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 세대 공동체보다도 개화된 여성인 모양이다.

이러한 제재 속에서 대부분의 기독학생들은 이성교제에 있어서는 '순수파'로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선교단체에서 남녀간에 거리낌 없는 관계가 오랜 시간 이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이들에 비해 이성을 대하는 것이 더 낫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동체에서의 남녀 관계와 이성교제에서의 남녀 관계는 사뭇 다르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도 군중 속에 있을 때, 아니 심지어 친한 친구와 있을 때에 비해 애인과 있을 때는 큰 차이를 보였다. 그리고 그게 정상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4년간 제재를 당해온 많은 기독학생들은 자신에게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성교제를 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교제를 시작하게 되고, 이후에 생겨나는 여러 복잡하고 힘든 감정의 기복들로 어려움을 겪다가 이내 기도원에 들어가거나 새벽기도를 꾸준히 가면서 '이 사람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를 되뇌게 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에게 묻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이성교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이루어져야 할 고백이다. 문제는 이런 학생들은 단순히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불편함과 두려움을 신이라는 절대자에게 대신 뒤집어 씌우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캠퍼스 보고서' 때와 마찬가지의 역회심 문제로 돌변하기도 한다. 일례로 이런 학생들은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유치하고 미성숙한 잣대였다고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능력, 연봉, 집안 배경 같은 것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기도 한다.


건강한 연애 보고서를 쓰기바라며
 
첫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꼭 그렇게 된다기 보다는 '처음' 하게 되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생기는 시행착오에 기인하는 듯하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한 일은 낯설기 마련이고, 또한 자기 몸에 꼭 들어맞기까지는 적응을 위한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사물이나 기구, 자동차를 다루는 일도 그러한데 사람을 다루는 일, 사람과 사귀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창조주가 허락한 두 사람이 일체가 되는 과정으로서의 사랑의 시작인 만큼 이성교제에 많은 주의와 노력이 필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리 없다. 그리고 그러한 처음에서 오는 시행착오로 서로간의 감정과 관계성을 잘 조율하지 못해 헤어지게 되는 경우에는 미련과 아픔이 남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그 기간이 길기도 하고 쉽게 회복하지 못하는 일도 다반사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많은 후배들과 동기들에게 이성교제를 권장한다. 한 사람과 완전하게 투명한 교제를 해 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혹은 자신이 말하는 섬김과 헌신이 얼마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던 신기루에 불과한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가 투명하게 자신의 내면을 터놓는 과정을 통해 얼마나 스스로가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사랑을 베풀기를 싫어하는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고, 자기가 말했던 그런 사랑 어린 행동에도 노력과 연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대부분의 동아리나 기독 선교단체, 심지어 대학원 내에서도 이성교제는 암암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금기시 하는 분위기가 많다. 그것은 공동체의 견고함을 위한 제재이기도 하고, 또한 개인이 서투르게 교제를 하다가 헤어진 이후에 오는 상처와 심적 어려움에 대해 과잉보호를 하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제재는 오히려 이성교제를 음성화시키고 음성적으로 만남을 갖는 커플의 경우는 관계에서 더 잘못되기 쉽다.

물론 이성교제 시의 발생할 법한 문제는 항시 존재한다. 헤어질 때 생기는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육체적인 친밀함이 더해지는 것도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애가 시작되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게 되는 문제로 인해 때로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말들이나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 알게 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 일상적인 일들에 대한 편안함을 느끼기도 전에 관계가 급진전되는 것도 경계할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기독인의 경우에는 '신실한 형제', 혹은 '신실한 자매'에 대한 왜곡된 태도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일부로 글 전체에서 신실한 사람에 대한 강조를 제외했다. 나는 그 신앙적 신실성 여부로 그 사람이 이성교제에서도 동일하게 그러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신뢰하지 않는다. 신앙적 신실함은 정작 이성교제를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 분명하지만 나는 그 신실함 때문에 시작된 교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신실함 자체가 체화된 것이 아닌 경건의 외형인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 신앙이 깊어도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를 포함한 젊은 세대들의 신앙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아직 우리의 신앙 자체가 삶의 여러 문제들을 접하고 그 안에서 난관을 통해 얻어진 신앙이 아니라 비닐 하우스에서 재배되고 있는 식물들처럼 머리로만 혹은,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는 신앙적 행동양식들이 실제 삶에서는 그 텍스트대로 드러나질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가 신실해 봐야 얼마나 신실하겠는가. '신실한 사람'이라 칭하는 것은 중년기는 넘긴, 그리고 신앙의 열매를 이제는 조금씩 내고 있는 이들에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가 중시하는 것은 허울뿐인 신실함보다는, 오랜 시간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그 일상적 친밀함, 그 가운데에서 쌓여가는 신뢰를 통해 감정적으로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긴 여정이라고 믿는다. 부디 많은 기독 청년들의 멋진 연애 보고서를 기대한다! **
2003/10/01 23:26 2003/10/0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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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회색지대 보고서 (5): 직장생활 보고서 (3) (2003. 9.)

 

/ 김용주

 


<직장 문화, 대중 문화, 그리고 소비 문화>

 

많은 직장인의 경우, 아침에 출근을 하면 일단 컴퓨터를 부팅함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컴퓨터가 켜지면 메신저에 접속을 하고 스포츠 신문을 검색하면서 무슨 재미난 기사거리가 없나 헤드라인들을 훑어 본다. 다음은 주식에 관련된 컨텐츠들을 검색한다. 이미 주식을 가진 직장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주가의 오르고 내림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틈틈이 자신들이 주로 이용하는 쇼핑몰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낸다. 대개 쇼핑몰을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은 잠시라도 사람들의 눈을 잡아두기 위해 여러 가지의 볼거리들을 제공한다. 곳곳에서 "2시간 동안 50% 대박 세일"이라거나 마일리지 적립과 같은 방식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대개 많은 직장인들은 당일에 생기는 이런 류의 기회들에 항상 눈을 떼지 못하게 된다. 남성들의 경우에는 중고차 사이트라거나 컴퓨터 주변기기, 디지털 카메라와 같은 전자제품에 관한 사이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제품들을 고르면서 쉬는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이런 직장인들의 성향에 발맞추어 가장 낮은 가격을 찾아주는 사이트들도 꽤 많아졌다.

 

또한 인터넷 상에서 결제할 수 있는 사이버 머니들도 마일리지나 충전 방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결제 체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를 넘나들며 할인 혜택까지 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대개 회사에서 소위 인기 있는 동료는 그러한 정보들에 민감한 사람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 직장인들은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점점 소비문화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느낌이며 그런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물건을 구매하거나, 유명한 음식점이나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일에 혈안이 되는 듯 하다. 대개 커피를 마시며 보내는 짧은 시간의 대화는 아침에 검색한 스포츠 신문에 나온 연애인의 스캔들과 같은 내용이 아니면, 맛있는 음식점의 위치나 좋은 제품을 싸게 살 수 있는 사이트, 마일리지로 결제할 수 있는 페밀리 레스토랑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그러한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직장에서 인기도 높다. 물론 정치 이야기가 가끔 나오지만 항상 "더러운 판"이라거나, "정치하는 이들은 모두다 썩었다"는 식으로 흘러서 금새 화제는 바뀌고 만다.

 

결국 회사에서 생활하는 많은 시간에서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의 대부분을 거의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이러한 소비 문화를 잘 할 수 있는 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그러한 기호에 아주 민감하게 기업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방향의 소비 패키지 상품들을 개발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직장 문화의 중심에 서게 되는 듯 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했던 고민 두 가지는 직장과 이성교제였다. 둘 중에 하나가 해결된 사람은 자연히 다른 쪽으로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면서 주변에서는 보다 진지한 연애 소식들이 들려왔고, 조금씩 주말이면 정장을 입고 국수를 먹으러 다녀야 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러다가 집들이를 한다고 여기저기 찾아가는 일도 생기더니, 급기야 이제는 돌잔치에 가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어린 시절, 가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은 일일 연속극을 어른들은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한 회도 빠지지 않고 보는 것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은 비슷한 이야기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니까 설령 드라마에서 엇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어도 동질감이 느껴지고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는 상황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드라마 속 집안 이야기의 전개가 궁금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씩 주변에서 가정을 이루어 가는 선배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실 그 중에는 학부시절에 존경하던 선배들도 많이 있다. 캠퍼스에서 그들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몸을 불태워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것 같았고, 세상의 구조적인 악행들에 크게 분노하고 마음 아파하며 자신들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부르짖곤 했었다. 정치인들에게 내밀던 날카로운 잣대들과 하루하루 자신을 연단하고 모임 때마다 고백하던 그 도전적인 이야기들이 나에겐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나 보던 영웅담처럼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 나이가 되어 그런 리더가 되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곤 했다.

 

그들이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갔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다. 난 조만간 그들이 속한 곳에서부터 무언가 대단한 움직임이 생길 거라 기대했다. Home Coming Day처럼 올드 멤버들이 캠퍼스 후배들을 찾아오는 행사가 있는 날이면, 나는 그들의 '승전보'를 들을 마음에 가슴이 설레곤 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들의 대부분은 나타나지 않았다. 간혹 들리는 이야기들만 무성했다. 취업이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겠다는 선배도 있었고, 때론 선배 중에 그렇게 자신이 비난하고 정죄의 화살을 던지던 불신자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릴 때의 철없던 열정이었다고 이야기하는 선배도 만났다.

 

솔직히 말해서 난 선배들에 대한 배신감 비슷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들의 신앙이 '영적 허구'였다며 그들이 캠퍼스 시절에 세웠던 칼날 그대로, 그 텍스트를 가져다가 그들의 컨텍스트를 해체해 버리고 싶었다. 그 모순된 삶의 방향에 딴죽을 걸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부끄럽지만 당시의 내 마음이 그러했다. 나에게 그들은 신화나 전설에나 나오던 영웅이었으니까.

 


<연애, 결혼, 그리고 육아>

 

내가 칼자루를 놓게 된 건 친 누나가 결혼을 하고 그 집에서 자취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때 난 30대 전후의 가정의 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고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 이후로 난 '생존'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경기가 나빠진 이후로 대부분 내 주변의 직장인들은 정상적인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지만 그에 비해 장래에 대한 보장은 더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항상 제2의 직장에 대한 기대와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며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이 사회에서 심하게 휘둘리면서 말이다. 때론 자신이 그렇게 신봉하던 가치관의 혼란을 겪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성 교제가 시작되고 대개 서로 직장을 가지고 있는 남녀 직장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문화가 이끄는 대로 연애를 하기에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바쁜 가운데에서도 서로 시간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하여 백일, 이백일, 오백일, 천일 기념, 그리고 Valentine Day, White Day부터 시작하여 Yellow Day에서 '빼빼로' Day까지! 나름대로 의미를 담아서 챙겨야 한다. 사실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이런 기념일들은 기업들의 횡포로 인해 그 가치가 퇴색하고 있으며 각종 기념일마다 거리에 쏟아지는 소모적인 상품들은 마치 그러한 상품을 주고받지 않으면 친밀함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하나의 소비의 '장'을 형성한다.

 

결혼을 하고 나면, 이제는 집을 장만하기 위해 정신 없이 돈이 되는 일에 매달리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수도권에 살고 있는 맞벌이 직장인 커플의 경우에는 그것이 생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로 주식에 손을 대거나 아니면 자신의 직업 외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도 많다. 게다가 결혼을 하고 나면 두 집안 사이에 있는 경조사를 챙기는 일도 두 사람이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 중에 하나가 된다.

 

조금 안정이 될 때 즈음에는 아이가 생기고, 아이가 자라면서 육아에 대한 부담으로 여성의 경우는 직장을 그만 두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생후 몇 년 간은 아이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육아에 대부분의 관심을 집중하게 되고 아이가 크면서부터는 또다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한 스타일의 교육 열풍에 휘둘리게 된다. (많은 부모들은 남들이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바보가 되고 있다는 이상한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는 듯 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서로 관계를 맺고 그 가운데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하루하루 성실하고 자족하며 사는 것이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일상을 시간을 배분하여 삶에서 필요한 일들을 하기 위해 나누어 쓰는 개념으로 따져본다면, 정작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미시적인 부분에서만 최선을 다하고 살아도 항상 부족함이 느껴지고 한계가 느껴지기 마련이다.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일수록 가까운 자신의 주변 관계 속에서도 부족함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되고 그렇게 대부분의 기독 직장인들은 나름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분투하며 살고 있다. 내가 쉽게 생각한 것처럼, 그들은 사회에서 사라진 게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놀면서 삶을 향유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금도 그들은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을 따름이다.

 


<운동가의 편견>

 

직장인들의 반대편에는 운동가들이 있다. 내 주변에는 이러한 운동가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대부분 청빈하고, 검소하고 또한 소박하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며 소비문화가 이야기하는 요구들에 둔감하다. 그러한 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이며 그러한 것들에 휘둘리는 삶의 무가치함을 일찌감치 깨우친 탓이다.

 

그 분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항상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내 안에 그들과 같은 삶이 정답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그리고 나는 아직은 정답에 이르지 못한 삶 가운데 있다는 자괴감으로 인해서 오는 불편함 때문이다.

 

물론 그 분들이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버려야 할 것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으며 이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 구조적인 악행들에 대해 자신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는 거룩함이 그 분들에게는 있다.

 

사실 난 그 분들에게 어떠한 문제제기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안다. 하지만, 나는 불편한 마음을 한 편에 두고서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겠지만 운동가들의 대부분은 일반적인 사람들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많은 일반인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져야지만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별 문제의식 없이 소비 문화에 젖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각성을 요구하는 운동가들의 의식은 그들의 정중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결국 '너, 똑바로 살아'의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 깊게 발을 들여 놓았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며 살고 있다. 운동가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세상을 편하게 산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름의 삶은 누구보다 고단하고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독 직장인들은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악행을 저지르는 일은 드물며 오히려 누구보다 더 자상하고 배려를 잘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운동가들은 어쩔 수 없다. '비도덕적인 사회'를 위해 대부분 자신의 미시적인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도덕적인 개인'에게, 힘들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너, 똑바로 살아.'

 


<중간 지점을 모색하다>

독자들에 따라서는 약간 편향되게, 때론 과장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이제까지의 이야기가 내가 경험하고 있는 직장 생활의 이모저모이다. 꽤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직장인들이 사회에서 묻힐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변명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그리고 한편에서 내심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운동에 대해 이야기였다.

 

나는 복학 후에 저학년 때 나와 친했던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를 잃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친구 관계는 그럭저럭 유지되었지만 많은 비전을 나누던 선교단체의 동료들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그들은 폐쇄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며 그 안에서 어떠한 경건의 훈련들을 모색했던 데에 비해, 당시의 난 기독인의 사회 참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문서운동이나 학내 문제, 기독 시민운동에 대한 고민들, 대안들을 모색하고 움직이려고 주변을 '충동질'했기 때문이었다. 내 주변에는 시위를 나가는 이도, 총학생회에 진출하겠다는 생각에 뜻을 같이 하겠다는 이도, 사회에 대하여 바르게 인식하고 기독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그 대안들을 모색해 가자는 제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이도 없었다. 내가 내 것들을 포기해 감에 따라 주변의 기독인들은 그런 나를 부담스러워 했다.

 

다수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에 가까운 나를 '좌편향'으로 위치매김시켜 균형 잡히지 않은 부류라며 거리를 두었고, 가까운 리더들은 내가 가진 잣대로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려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식의 정죄는 시대착오적인 운동권의 잔재라고 충고했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학생이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면 '급진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급진적' 복음주의라고..)

 

나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의식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90년대 선배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도리어 그들을 비난하려던 나의 시도는 비슷한 판에 속하게 되고 함께 공유하는 문화를 통해 조금씩 무뎌지게 되었다.

 

직장생활에 대한 글을 마치면서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까 한다. 사실 졸업 후에, 내가 복음주의 기독운동에 뛰어들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에서 기독운동을 하려면 한국 기독교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한국의 복음주의권 보다는 한국의 진보 진영이 도덕적으로 더 깨끗해 보였고, 난 개혁을 외치면서 한국 복음주의권에서 주는 녹을 먹으면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보다 큰 이유는 기독 운동가들보다 기독 직장인들이 많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 한국의 복음주의를 변화시키는 것은 소수의 운동가들이 아니라 다수의 직장인들의 더디지만 전반적인 변화에 의해서일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캠퍼스에서 문서 운동을 하던 것처럼 직장인과 운동가 사이의 중간 지점을 설정하고 거기에서 서로의 벽을 허물고 어떤 적정선의 행동방식을 찾아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행동방식'이 직장인들 나름의 상황을 이해하고 거기에 걸맞는 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언젠가 직장에 갓 들어간 동기와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학생들의 사회참여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친구는 회사에 들어가면 QT조차 제대로 못하는 기독인들이 많음을 지적하면서 학생 시절에는 경건훈련이나 열심히 하고 사회인이 되어서 사회참여를 하라는 충고를 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나름의 공감할 만한 논리를 구사하던 그 친구도 4-5년이 지난 지금 사회참여를 하는 사회인이 아니라 단순한 직장인으로 수면에서 사라졌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과거 가진 것 하나 없던 시절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운동을 해 본 일이 없는 대부분의 기독 학생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사회에 들어가고 난 후에 미시적인 차원에서 너무 많은 책임과 관계에 얽매이기 때문에 적신일 때도 하지 못했던 운동성이 있는 행동은 엄두도 못 내는 채로 결국 주저앉기 마련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내 주변의 그런 친구들과 과거 영웅처럼 대하던 선배들의 적절한 운동성을 살리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회색지대에 머무는 이유일 게다.**

2003/09/01 23:25 2003/09/0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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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보다 못한 복음주의
/김용주

 

영화 <매트릭스>의 열풍

“영화 <매트릭스2-리로디드>가 3주 연속 흥행성적 1위를 기록하며 전국관객 300만명을 돌파했다. 수입ㆍ배급사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에 따르면 <매트릭스2>는 7-8일 서울 관객 9만7천100 명을 동원해 주말 극장 흥행순위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서울 66개, 전국 231개의 많은 스크린 수를 유지하고 있는데도 관객수는 전주말(21만5천 명)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등 감소 폭은 큰 편. 8일까지 이 영화가 동원한 전국 관객 숫자는 312만 명으로 개봉 17일만에 300만명을 돌파했다. 이는 올 최고의 흥행작 <동갑내기..>와 비슷한 추세다.”

(씨네 21 기사 중 부분인용)

영화<매트릭스2-리로디드>가 개봉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봤다. 전작인 <매트릭스>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많은 네티즌들과 매트릭스 매니아들이 열광했고 지금까지도 영화 관련 웹 게시판에는 매트릭스에 관련된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딴지일보>에서는 이런 웹 상의 글들을 모아서 “매트릭스 짝퉁 감상법”과 “매트릭스 짝퉁 문학상”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메이저 급 영화 잡지들은 아직까지도 매트릭스 영화 상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매트릭스2-리로디드>가 개봉하기 전에는 미국의 대학교수들이 전작에 대한 분석과 논평을 모은 <taking the red pill>이라는 책까지 발매되었고 이 책은 아마존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며 많은 매트릭스 매니아와 지식층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이 책은 굿모닝미디어에서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현각 스님도 스스로가 매트릭스의 광이라고 자처하면서 영화를 10번을 보고 한겨레에 관람기를 싣기도 했다. 기학연에서는 이달 초부터 매트릭스에 관한 내용으로 세미나를 연다고도 한다. 이쯤 되면 대충 내용을 알고나면 누구나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갈 듯도 하다.

1999년에 개봉한 <매트릭스>는 컬트 영화 감독이었던 워쇼스키 형제가 사고하는 액션영화를 만들겠다는 선언과 함께 만들어진 그들의 야심작이다. 실제로 그들은 영화 촬영 전부터 주연배우였던 키아누 리브스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인 시뮬라시옹을 읽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촬영 시마다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무슨 의미인지를 서로 토론하도록 권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런 연유로 배우들도 매 장면마다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후문이다. 화면이 정지된 채로 360도 회전하는 장면이라던가, ‘불렛 타임’이라는 획기적인 촬영 기술(총을 쏘는 장면에서 총알이 날아가는 순간과 액션장면을 합성하는 기술)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매트릭스의 하부구조는, 다수의 관객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무엇보다 <매트릭스>는 많은 메타포가 숨겨진 영화이다. 이 영화의 전체 하부구조에는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산재해 있으며(이는 이 글의 본론에 해당하므로 여기에서는 언급을 생략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를 쫓아가는 장면이라거나 플라톤이 언급한 동굴의 우상, 그 밖에 장 보드리야르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상과 최근 SF영화의 교과서가 되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 기동대>에서 보이는 첨단 기술의 사회지배력이 골고루 퍼져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물론 전작에 비해 <매트릭스2-리로디드>는 많은 비판 또한 듣고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2편이 전편에 비해 더욱 구체화되고 세련되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매트릭스>의 뛰어난 하부구조들

많은 부분들이 매체를 통해 언급되었기 때문에 몇 가지만 지적함으로 이 부분을 설명하기로 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매트릭스는 장 보드리야르가 자신의 저서 <시뮬라시옹>에서 설명했던 “더 이상 모방이나 복제, 심지어 패러디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현실이 현실의 기호들로 대체된다는 것이다”라는 시뮬라시옹 사회의 단면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 네오가 불법 프로그램을 숨겨둔 책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시옹>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회를 해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처음에 현대 소비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시뮬라시옹(simulation)과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시뮬라크르는 신의 소상(塑像)이나 화상(畵像), 혹은 표상, 이미지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자신의 책에서 시뮬라크르를 기호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사물에 대한 기호론적인 사고는 마르크스(Marx)의 가치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르크스(Marx)는 사물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보드리야르는 사물에게는 마르크스(Marx)가 가정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이 두 가지 개념만으로는 환원이 불가능한 어떤 ‘상징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특정한 상품에는 단순히 그 상품 자체의 효용성과 교환 시의 가치뿐 아니라 결혼 반지처럼 반지라는 상품에 특정한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고, 나아가서 그 사물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신분의 상징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인간들은 이렇게 기호화된 사물을 소비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호들은 현실로 대체되고 현실은 시뮬라크르가 되는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매개로 거래와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가진 서로 다른 기호가치들의 존재, 즉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기호를 소비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뮬라크르 소비 사회를 가리켜 시뮬라시옹 사회라고 정의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뮬라시옹 사회는 사물에 대응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고 시뮬라크르가 현실이 된 세계이며 따라서 사물은 원초적으로 그것이 존재했던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코드화된 기호와 숫자에 그 기원을 두게 된다.

<매트릭스>의 첫 편에서 매트릭스 안의 세계는 시뮬라시옹 사회를 대변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쉽게 매트릭스 안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물질들이 일대일로 대응되는 완벽한 사회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매트릭스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 입장을 생각해보면 과연 어디까지가 실재로 존재하던 물체를 기호화한 것인지, 내가 먹는 스테이크는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조차도 구분할 수 없다. 실재 물질과 대응되는 스테이크라는 음식은 존재하지 않는데 단순히 상징적인 기호를 통해 만들어낸 허구일 수도 있는 셈이다. 보드리야르가 인식한 현대 소비사회의 코드는 그런 의미에서 고스란히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녹아있다. 한 예로 <매트릭스>의 전편에서 네뷰커네자르(Nebuchadnezzar) 호 안에서 해커들이 하는 잡담은 그냥 넘기기에는 중요한 개념들이 들어있다. 도저가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마우스라는 해커에게 주는 스프처럼 생긴 음식을 먹으면서 “테이스티 휘트”의 맛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자신은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과연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한다면 그 맛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 사물의 맛일지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이 사실은 기계들이 대충 짐작으로 만들어낸 기호체계일 뿐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다소 황당한 잡담을 늘어 놓는다. 따라서 이 장면은 감독이 매트릭스의 토대가 되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대해 그런 가벼운 스케치를 통해서 본질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도 이와 같은 기본 하부구조 위에서 영화는 진행되며 키메이커를만나기 위해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라는 프로그램을 찾는 장면에도 이 개념들은 시각적으로 재현된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 네오(Neo)에게 자신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라고 할 때 네오(Neo) 앞에 펼쳐진 것은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는 디지털 기호들의 조합이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은 웃으면서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매트릭스는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다는 식의 말을 내뱉는다.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시뮬라시옹 사회의 모습. 그것이 매트릭스의 사회학이자 영화 전편에 흐르는 하부구조인 셈이다.

또한, 이 영화의 묘미는 단순히 보드리야르를 대변하는 사회학적인 기반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영화의 보다 탁월한 점은 IT기반의 기술들이 영화의 각 장면 장면마다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정보통신 네트워크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보안과 암호화’이다. 영화를 보는 중에 감탄사를 내며 보고 나서 씨네21에 실었던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중심 내용만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작동하고 있는 보안프로그램인 세리프(sheriff)의 인증이 필요하다. 세리프(sheriff)는 누구나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개키를 상징한다. (제미있는 것은 보안에서 공개키를 표시할 때 노란색 열쇠로 표현된다. 따라서, 그의 노란색 광채는 공개키의 암시라고 볼 수 있다.) 단, 싸워보아야만 그가 누구인지를 인증할 수 있기 때문에 쿵후대결을 암호해독이라고 볼 수 있다. 쿵후실력으로 인증을 받은 네오(Neo)는 백도어를 통해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게 된다.

그에 반해 키 메이커는 비밀키를 상징한다. 그는 짝이 맞는 키를 만들어서 무수히 많은 비밀키를 들고 다닌다. 아키텍트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네오(Neo)가 키메이커가 만든 키를 문에 꽂을 때 키가 문에 꼭 맞는다는 것을 클로우즈업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비밀키를 이용하여 인증을 받았고 접근이 허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씨네 21, 406호, 독자 비평 중에서)

 



<매트릭스>에 나타난 기독교적 메타포

하지만, <매트릭스>에 가장 큰 호감을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 이 영화가 기독교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하부구조는 기독교적인 은유와 상징에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99년에 첫 편이 나오고나서 <딴지일보>의 총수로 있는 김어준이 쓴 기사에 많은 내용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최근에 <taking the red pill>에 실린 글 중에서 하버드 대학 신학대학원 출신의 Paul Fontana의 글에 보다 잘 드러나 있어서 이들의 글들을 참고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한다.

영화 <매트릭스>는 어떤 건물의 ‘303호실’에서 통신을 주고받는 트리니티로부터 시작된다. 트리니티(Trinity)는 성삼위일체를 가리키는 신학적 용어이며 실제로 이 트리니티라는 여주인공은 네오가 자신이 그(the One)임을 발견하는 데에 큰 영향력을 주는 인물이다. 주인공 네오가 살고 있던 방은 101호실로 나중에 네오가 스미스 요원의 총에 맞고 숨지는 방의 번호는 303이다. 결국 그가 스미스 요원의 총에 맞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방의 번호가 303호임은 트리니티의 삼위일체와 연관이 있는 셈이다.

네오는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인물로 매트릭스 안에서 살아가며 밤에는 네오라는 이름의 해커로 이중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 앤더슨은 “앤드류의 아들”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앤드류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 안드레아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풀이하자면 “사람의 아들”, 즉 “인자”라는 기독교적인 메시아로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토마스는 예수의 제자 중 “의심 많은 도마”를 의미하며 영화 속에서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모피어스가 생각하는 “the One”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름에서 유래하는 많은 글들이 나와 있으나, 검증된 것은 아니며 때로 황당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여기에 언급하는 명칭들은 그 중에서 개연성이 높은 것들을 주로 사용한다)

네오의 의미는 “새로움”이라는 의미이며 그는 자신이 세상을 매트릭스 세계 안에서 구원할 구세주이며 메시아라고 믿는 모피어스 무리들에 의해 훈련되고 결국은 자신이 그임을 확증하게 된다. 네오가 메시아,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라는 암시는 영화의 초반에도 나오는데 그에게 불법 프로그램을 사려는 초이라는 인물이 프로그램을 받으면서, “Hallelujah. You're my savior, man. My own personal Jesus Christ.”라고 말한다. 김어준은 이런 류의 대화에서 굳이 기독교적인 표현을 쓴 점에 착안하여, 대화 시 쓰는 흔한 욕설대신 이러한 종교적인 표현을 쓴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설명한다. 게다가 네오가 초이에게 주의를 주자 초이가 대답하길, “알아. 이 일은 없었던 일인거야, 그리고 난 너를 모르는 거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대목은 자신이 병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는 예수의 말과 일치한다.

네오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미스 요원에게 살해되었다가 트리니티의 키스 이후에 다시 살아나며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수퍼맨처럼 하늘을 날아 오르면서 끝이 나게 되는데, 김어준이 지적한 대로 이는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상징이 아니면 너무나 유치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모피어스나 다른 멤버들도 예수의 제자들처럼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것을 예상치 못했다는 점이 복음서와 일치한다.

네오를 매트릭스 세계에서 구하는 모피어스라는 인물은 “꿈의 신”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존재다. 모피어스는 영화 전반에 걸쳐 “세례 요한”을 상징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김어준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세례 요한은 예수 이전에, 인간을 구원할 예수의 등장을 광야에서 기다리며 예수의 길을 예비한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고 나서야 하여 비로소 예수로서의 '공적' 활동을 시작한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마가복음 1:3-4)
모피어스는 평생을 매트릭스(광야)에서 '그'(the One - 구세주, 네오)의 등장을 기다리며, 인간을 구원할 '그'가 갈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I've spent my entire life looking for you.’(모피어스가 네오를 만나서 하는 말-필자 주)
또한 매트릭스의 인간배양 인큐베이터에서 빠져 나와 '물'에 빠진 후에야 네오는 '그'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딴지일보, “매트릭스 짝퉁 감상법”, 김어준)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도 모피어스는 예언을 신봉하는 선지자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며 자이온(Zion)에서 백성들에게 기도하는 장면에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의 모습에 가까운 이미지를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주인공들 외에도 주변 인물들 중에서도 기독교적인 냄새들이 강하게 배어있는 이들이 있다.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도저와 탱크는 형제로 설정이 되어 있으며 반란군 전체의 수가 겨우 일곱인데 그 중 둘이 굳이 형제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들어볼 때 예수의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서로 형제임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모피어스가 깨어난 네오에게 멤버들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Tank and his big brother, Dozer”라고 소개하는 점이 그러한 심증을 굳히게 한다. 또한 사이퍼(Cypher)는 은 30냥에 예수를 판 '유다'처럼 겨우 스테이크 식사 한 끼에 조직을 배신하는 존재로 나오는데 요원들을 보면 무조건 도망을 쳐야하는 네오쪽 전력을 감안할 때 내부 배신자가 필수적인 설정이 아니었다는 것이 김어준의 설명이다.

Paul Fontana는 사이퍼와 네오가 함께 술 마시는 장면과 최후의 만찬에서 가롯유다가 배신을 하는 장면을 대조하여본다.

“사이퍼와 네오 식의 최후의 만찬은 둘이 밀주를 마시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장면에 이어 바로 배신자가 누구인지를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곧 사이퍼가 스미스 요원을 만나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네오는 가솔린 맛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사어퍼가 건네준 술을 마신다. 이 장면은 예수의 예언적인 말을 상기시킨다. “이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요18:11)”

(폴 폰타나, “매트릭스에 신은 있는가”, 235쪽)

마지막으로 반란군이 타고 있는 우주선의 이름은 네뷰카네자르이며 이는 구약 다니엘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과 일치한다. 느부갓네살 왕은 신상에 대한 꿈은 꾼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꿈은 메시아가 열국을 다스리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 꿈을 담고 있는 네뷰카네자르 호는 매트릭스의 스토리라인과 일치한다. 또한 그 우주선을 지휘하는 모피어스라는 이름 또한 “꿈의 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던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네뷰카네자르 호의 모델 번호가 Mark 3-11이다. 이는 마가복음 3장 11절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 구절은 “더러는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이다. 결국 이 영화에 쓰이는 상징과 은유의 본질은 메시아 사상인 셈이다. 그리고 남겨진 인간의 도시이자, 매트릭스와의 전쟁이 끝나면 축제가 벌어질 곳이 '자이온'(Zion)이라고 불리며 이는 기독교적이자 유대교의 하부구조인 시오니즘과 일치한다. (“The last human city. If the war was over tomorrow, Zion is where the party would be”)

무엇보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믿음”이라는 키워드가 따라다닌다는 사실이다. 네오는 처음에 진리를 지식적으로 이해만 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믿기 시작하고 결국에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궁극적인 예언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이 <매트릭스> 전편의 내용이었다. 또한 개인적인 추측이기는 하지만,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네오는 6번째로 아키텍트를 찾아온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가 아키텍트를 만났을 때, 아키텍트는 이전에 자신을 찾아온 이들과는 다른 요소가 네오에게서 감지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라는 또 다른 불규칙성이라고 설명한다. 이전까지 아키텍트를 찾아온 the One들에게는 자신이 그, 즉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시온을 회복하리라는 소망도 있었지만 그것에 더하여 네오에게서 보여지는 또 다른 불규칙성인 “사랑”이 메시아로서 가진 속성 중 가장 큰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3편에서 네오가 시온을 구하게 되는 식으로 결말을 짓게 되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이러한 네오의 구별된 불규칙성은 자연스럽게 고린도전서를 떠올리게 만듦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그리고 그것은 요한 서신서를 비롯한 성경 전반에 드러난 기독교의 본질이기도 하다.


 


<매트릭스>보다 못한 복음주의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매트릭스>는 단순히 흥행을 달리는 헐리우드 액션영화라기 보다는 다양한 은유와 상징이 녹아있는 이른바 ‘철학하는 영화’이며 그 메타포의 중심에는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숨어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워쇼스키 형제가 기독교에서 중요시하는 문제들에 대한 왜곡되었다거나 가볍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독교적인 기반을 가진 이들도 깊이 있게 돌아보아야 할 성질의 깊이를 그들의 영화를 통해서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연유로 기학연에서도 이런 한낱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가지고서도 세미나를 여는 것이리라.)

위쇼스키 형제는 복음의 전파를 위해 이런 영화를 제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을 영화라는 매개물을 통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고 자신들이 밝혔듯이 고민하는 액션영화의 제작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영화 관람가이자 복음주의자로서 기독교 세계관에 깊이 매료되어 있는 나의 시각으로 판단하기에, 이 영화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영화의 곳곳에 그러한 요소들을 배치함으로써 ‘기독교적이라는 것’ 자체가 멸시와 환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대의 사상 및 문화적인 분위기를 변화시키기까지 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렇다면 내가 몸담고 있는 복음주의권은 어떠한가. 세속에 물든 컬트 영화 감독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야 만큼이라도 복음주의권에서는 세상을 제대로 분석하고 파악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오히려 ‘아 프리오리’(a priori)적이라는, 혹은 메타적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세속적 사상과 문화 뒤에 숨어서, 유치하기 그지없는 잣대와 세상 사람들이 공감할 수 없는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 문화를 가위질하고 있는 모습을 더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방향’이 잘못된 것일 뿐 세상의 모든 ‘구조’가 선하다는 생각을 토대로 삼아 복음으로 문화를 변혁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졌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이제는 세상을 파악할 수조차 없는 낡은 틀(framework)로 변하여 결국 자신이 그렇게 비난하던 이원론적인 사고에 눌러앉게 만드는 악행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되는 요즘이다.

문제는 돈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실상 헐리우드의 막대한 자본이 그러한 뛰어난 수준의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하였다고, 그렇게 현대 자본주의의 ‘맘몬신’에게 절한 이들만이 세련된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변명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헐리우드의 자본조차 워쇼스키 같은 변방의 컬트 영화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보고서 그들의 자본을 거리낌없이 투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반성 거리가 있을 법하다. 게다가 그 시나리오의 메타포는 성경적 원리에 충실하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내가 애정을 갖고 있는 복음주의권이 기독교적 깊이와 세상 문화에서의 창조성, 이 두 마리의 토끼 모두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건가.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이제는 이런 영화를 보면서 ‘뉴에이지 사상’에 젖어있다는 유치찬란한 기사가 복음주의 매체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주하며 도리어 기뻐해야 하는 문제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복음주의권에서 이제까지 세상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고 사상과 문화에서 창조성을 회복하고 변혁하자고 말하지 않았던가. 난 그런 뜨거움 속에서 자라난 마지막 세대가 아니던가. <매트릭스>를 보면서 우리도 이제는 고고한 성에서 이제 그만 내려와야 할 때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해보게 된다. 복음주의의 수혜자를 자처하는 우리는 이제 우리가 그렇게 비난하던 헐리우드 액션영화보다 못하다.**
2003/07/01 00:48 2003/07/01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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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메이커에 대한 단상”
: <매트릭스>는 IT기술의 상징

매트릭스 리로디드를 보는 중에 많은 관객들이 웃었던 장면이 있었다. 2편에서 영화의 전개의 핵심이 되는 키메이커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은 영화관 군데군데에서 황당하다는 투의 웃음소리를 내곤 했다.
그 웃음은 번역된 단어와도 상관이 있는데 굳이 ‘열쇠공’이라는 번역을 하지 않고, ‘키메이커’라는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그대로 씀으로써, 관객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 하다가 결국 우리 나라의 도로변에서도 볼 법한 열쇠집 아저씨가 화면에 나올 때 받는 황당함과 관계가 있었던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에서도 이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이 그런 황당한 웃음을 지었을까 하는 의아함이 생긴다. 그들은 처음부터 키메이커를 말그대로 그냥 '열쇠공'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단순히 단어와 인물의 미스매치를 넘어서는 흥미로움이 키메이커에게는 있는 듯하다. 그 흥미로움으로 인해 웃음을 짓게되는 사연을 조금 소개하자면 이렇다.

니오(Neo)가 오라클(Oracle)을 만나는 장면에 보면 무술을 잘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은 세리프(sheriff)라고 말한다. (세리프(sheriff)는 보안관 정도로 보면 된다) 니오(Neo)는 이제 매트릭스 안을 디지털의 조합으로 인식하는데 세리프(sheriff)는 코드가 보이지 않고 노란색 광채만 띠고 있어서 의아하게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이 두 사람의 쿵후 대결이 액션신을 삽입하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지루하게 느끼기도 한다. 혹은 오라클(Oracle)의 보디가드 정도로 보고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뜬금없이 한참 싸우다 이제 됐다면서 오라클(Oracle)에게 안내한다. 그러면서 당신이 니오(Neo)인지 확인해야 했다면서 싸워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오라클(Oracle)에게 데려다 줄 때 문이 많은 통로를 지나는데 니오(Neo)는 그것을 백도어 즉, 해커들이 소스에 편법적으로 접근하는 곳임을 알아본다. 그러고 세리프(sheriff)에게 프로그래머냐고 묻는다. 그는 중요한 곳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참고로 오라클은 1977년 로렌스 J. 엘리슨(Lawrence J. Ellison)이 설립한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회사다. 오라클이 예언자로 받아들여지던 1편에서도 대부분의 프로그래머 관객들은 DB에 많은 데이터가 있어서 그 DB를 검색하여 미래를 예측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의 장면.
키 메이커라는 영화 전편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진 인물은 그야말로 열쇠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열쇠공의 외모에서 웃고만다.
키 메이커도 백도어를 이용한다. 단지 그는 각 문에 해당하는 키를 가지고 있다. 그 문에 합당한 키를 꽂으므로 각 소스에 접근하게 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니오(Neo)는 매트릭스의 설계자인 아키텍트를 만난다.

IT(정보기술)에서는, 정보의 보안 및 인증에 대한 부분이 하나의 분야로 설정되어 있다.
정보의 유출을 막기위해 네트워크 시스템은 보안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정보에 접근(access)을 허용할지 말 지를 결정하는 인증 과정을 거친다. 대개 이 인증의 방법으로 키 값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키는 크게 두 개의 범주. 즉 공개키와 비밀키가 있다.
공개키는 주변에서 쉽게 다운 받을 수 있으나 암호화되어 있어서 자신이 그 키 값을 가지고 있다해도 그것을 보안프로그램의 방식대로 풀지 못하는 한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비밀키는 암수 구별이 있는 것과 같이, 꼭 들어맞는 열쇠와 자물쇠처럼 유일한 한 세트를 서로 주고받아 인증을 하는 방식이다. 매트릭스가 다른 SF영화와 차별되는 하나의 모티프는 이런 IT쪽의 지식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작동하고 있는 보안프로그램인 세리프(sheriff)의 인증이 필요하다. 세리프(sheriff)는 누구나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개키를 상징한다. (제미있는 것은 보안에서 공개키를 표시할 때 노란색 열쇠로 표현된다. 따라서, 그의 노란색 광채는 공개키의 암시라고 볼 수 있다.) 단, 싸워보아야만 그가 누구인지를 인증할 수 있기 때문에 쿵후대결을 암호해독이라고 볼 수 있다. 쿵후실력으로 인증을 받은 니오(Neo)는 백도어를 통해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게 된다.
그에 반해 키 메이커는 비밀키를 상징한다. 그는 짝이 맞는 키를 만들어서 무수히 많은 비밀키를 들고 다닌다. 아키텍트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니오(Neo)가 키메이커가 만든 키를 문에 꽂을 때 키가 문에 꼭 맞는다는 것을 클로우즈업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비밀키를 이용하여 인증을 받았고 접근이 허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따라서 키메이커를 보면서 웃는 이들 중에는 키메이커의 왜소함이나 아날로그 방식의 키를 만드는 그의 모습에 단순히 웃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하! 하며 그 상징성에 흥미를 느끼며 즐거워하는 프로그래머들도 꽤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2003/06/09 18:06 2003/06/09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