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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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인 캠퍼스보기 1>: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라!

/김용주


항상 글을 쓸 때면 머리 속에서 뭔가 잘 정리가 되어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때때로 항상 생각이 맴도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것을 제대로 언급조차 못할 때가 많이 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가고 있다.

복음과상황에 99년 12월부터 연재가 되고 있는 본인의 글(세상보기)은 솔직히 말하자면 매번 나의 마음을 아주 힘들게 만든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부끄러움이다. 집으로 배달된, 발송하느라 수고를 했을 법한 무명의 독자들과 논고개 분들의 애정어린 손길이 담긴 복상을 받고 목차에서 내 글을 발견할 때면 심히 얼굴이 붉어지고 무안해지는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임을 부인할 수 없다. (목차를 볼 때 느끼는 또하나의 불편함은 목차 왼편에 열거된 우리나라의 대표격인 분들의 이름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이 잡지사에는 왜 기자 한 명조차 충원이 되지 않나하는 아쉬움이다!) 물론 누구나 글을 써 본 사람은 자신의 글에 대한 열등감을 어느정도는 느낄 줄로 안다. 나또한 예외는 아니며 그런 종류의 부끄러움도 물론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의 '부끄러움'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정작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바로 '복음으로 상황을 조명하는' 이 잡지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꼭지의 넌센스 때문이다.

한 동안 복상에 이전까지 보여왔던 상황(context)의 부재와 그로인해 잡지의 날카로움이 예전에 비해 다소 무뎌졌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독자모임에서도 1년동안 그런 류의 지적들은 자주 있어왔고 정당한 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복상에서 발로뛰는 글을 쓰는 이들은 극히 소수이다. 현장성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게다가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거의 30대를 넘어서고 있으며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캠퍼스의 현장성이 담겨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내가 갖는 불편함은 이런 복상의 '상황'에 기인한다. 발로 뛰는, 현장성을 담보로 한 긴장감있는 글들이 30대에서 나오고 있는데,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20대의 철부지 기독학생이 삶이 어떠니 묵상이 어떠니 하는 류의 글을 쓰고 있는 이 '상황'이야말로 정말 이해될 수 없는 넌센스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의 부끄러움은 바로 이 철모르는 학생이 현장성없는 사색적인 글을 건방지게 쓰고 있다는 불편한 심기에 기인한 것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내가 생활하는 공간은 캠퍼스다. 또한 요즘 한창 '잘나가는' 선교단체의 리더이며, 필요성 때문에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기독학생연합회와도 관계를 맺고 있다. 워낙 체육 쪽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또한 그로인해 주변 지체들에게 핀잔도 많이 듣지만, 나름대로는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대학생이다. 처음에 얘기했듯이 나는 동시대의 모든 캠퍼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 모두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고 느낀다. 또한 어떤 뾰족한 대안을 가진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한지 혹은 적절한지조차도 의심하는 수준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주변의 현장성을 담보로 한 글을 쓰고싶다는 생각은 늘 해왔기 때문에 이렇게 너절한 내용이나마 펼쳐놓아보고 싶었다. 그래야 20대의 또다른 누군가가 고민하고 또한 고민했던 이들은 보다 나은 접근과 토론과 대안을 제시하고 실제 현장도 변화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패거리주의적인 성향>

2000년 3월에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했다. 물론 많이 달라진 캠퍼스와 학생들을 보면서 많이 신기해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캠퍼스 사역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까지는 어떤 모토가 공동체를 형성하게 만드는 원천이었지만 지금은 친밀함이 그 원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대자보'가 중요했고 그 대자보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가 중요했다. 지금은 선교단체도 대자보를 읽고 오는 이들보다는 인맥을 통해 교회 선후배들의 소개로 연결이 되는 수가 극히 많다. 대다수 이들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어떤 목적과 모토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목적으로 결성되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으려는지에 민감하지 못하다. 그들의 중심은 항상 주변 관계성에 기인하며 그 공동체의 목적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유보되어질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신들이 수정해 갈 수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나아가 이렇게 마련된 공동체를 통해 캠퍼스 안에서 집단우월주의적인 성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모더니즘을 경험하지 못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한 우리 시대의 한계이자 폐해라고 보는 편이다. 이는 진리성 여부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후기현대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일하게 긴장점도 느낀다. 사실 이런 후기현대주의적 사상의 흐름은 특정한 식자(aUiº)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쉽게 전달이 되는데, 영화가 가장 중요한 매개물이 되고 있다. 진리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며 또한 그것은 힘의 논리에서 강자가 자신의 논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포장하는 형태를 띄게 된다는 이러한 관점은 <LA 컨피덴셜>이나 <pay back>과 같은 영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 시 캠퍼스 이야기로 돌아오면, 많은 학생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보다는 "누가" 혹은 "어떤 집단"이 그 이야기를 하는지에 크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PD수첩에서 대형교회 문제를 건드렸다는 보도를 들었을 때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보다는 MBC가 예전부터 교회 문제에 부정적이었다, 혹은 방송(PD수첩)이 너무 비난위주라는 식의 반응이 기독학생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온다. 광림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침례교에 대한 장로교쪽의 비판문제로 환원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뉴스엔조이에서 <전병욱 비판적 읽기>라는 책이 발간되었는데 그 책을 대하는 주변 기독학생들의 반응이 "뉴스엔조이가 뭐하는 놈들이야"는 식이었다. 텍스트는 사라지고 모든 문제는 단지 집단적 이권싸움 내지는 패거리나누기 식의 문제로 환원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아주 순결한 부류도 있다.


<사회를 보는 시각이 흐려짐>

이 렇게 학생들이 모든 문제를 집단의 이권다툼식으로 보는 것은 물론 상황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때문이며 그것은 너무 여러 정보들 사이에서 가라지들을 가려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상 너무나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우리는 파뭍혀 있고 그런 많은 정보 중에서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무래도 광고의 효과가 뛰어난 것들이다. 물론 광고는 돈의 문제이고 이 가치중립적(?)인 돈의 문제는 사실상 우리에게는 맘몬적 능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쉽게 정리하자면 캠퍼스의 대학생들에게 전달되는 많은 정보 중 결국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전달되어지는 정보는 끊임없이 광고를 해댈 수 있는 돈을 가진 집단으로부터 나오며, 그 집단은 대다수 성경적이지 않은 과정을 통해 힘을 갖게 된 집단임에 틀림없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리고 자본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깔끔한 포장으로 다가오는 정보들을 우리는 쉽게 '사실'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런 정보들은 텍스트가 충실하다기 보다는 피상적이며 문제를 단순히 흥미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상 대형교회의 목회세습문제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소수에게는 큰 희생이 따르고 있으며 이 문제는 캠퍼스에서 접하는 피상적인 것, 흥미위주의 것 이상이다. 당사자들에게는 삶을 담보로 한 운동임에도 그런 것들은 쉽게 잊혀지게 된다. 주변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매체들을 본다. 조선일보가 그렇고 스포츠투데이가 그렇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정치건 경제건, 종교건 모두가 썩었고 진흙탕이니 관심갖지 말자는 식의 홍보효과를 노리는 것 같다. 그래야 밤의 대통령도 유지되고 기득권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까지 할테니...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깊이 있는 대화를 꺼려하는 것 같다. 토론 부재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좀 엉뚱한 얘기 같지만, 나는 '썰렁하다'는 말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의 토론문화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조금만 얼굴을 진지하게 고쳐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일 것라고 생각한다. '썰렁하다"는 말이 유행하기 이전에는 모든 대화는 텍스트 위주였다. 비록 재미없는 이야기라 할 지라도 그 말을 끊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못했던 탓에 나를 비롯한 많은 90년대 중반 학번들은 지루하기 짝이없는 선배들의 세상 이야기와 신앙 이야기를 인내와 연단(?)의 마음으로 듣곤 했다. (물론 그런 탓에 나는 관심도 없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내 신앙의 색깔도 많이 넓어지는 풍요함을 경험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 안에 퍼져든 이 '썰렁함'이란 단어는 우리의 대화체계를 순식간에 바꿔 버렸다. 케이블 TV의 수많은 채널들이 조금이라도 식상하거나 정적인 화면을 못참게 만들었다면, 이 썰렁하다는 말은 모든 대화 안에서의 텍스트를 '재미'가 있냐 없냐의 문제로 바꿔 놓았고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면 쉽게 말을 끊어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썰렁하다는 단어가 그런 상황을 가져왔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얘기가 재미가 없어서 썰렁하다는 딱지를 받게 될까 두려워 해야하며 그렇게 각인된 사람은 대화에 주격으로 참여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점점 짧고 코믹하거나 심지어 엽기적이어야 수용된다.

물론 토론의 장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캠퍼스는 비교적 많은 세미나와 좌담회 등이 이뤄지고 있고, 미미하게나마 기독학생들 속에서도 사회참여적인 움직임들이 진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들을 본다. 하지만 그들은 엄연한 소수다.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는 소수인 셈이다. 또한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있어 그것은 골수분자, 혹은 흔히들 하는 말로 '매니아'나 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또한 거시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 개인의 기호로 치부되며 파편적 선택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악순환이다.


<청년 사역자들의 책임>

이 즈음에 와서는 선교단체 사역자들의 책임 문제가 나와야만 한다. 모순처럼 들릴 지는 모르지만 내 주변에서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발견하고 흐름을 읽어낼 줄 아는 기독학생들은 기존의 선교단체의 제자도로 키워진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혼자 습득하고 고민한 부류의 학생들이 더 많은 관심과 움직임들을 보이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이것은 두 가지의 문제를 말해준다. 먼저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선교단체의 제자훈련이 철저히 '상황'을 배제한 채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캠퍼스 내에서 선교단체는 마치 지하조직과 같다. 모두가 강의실 구석에 숨어서 모임을 가지며 이 집단들은 대개 학내 문제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 통일 문제, 노근리 사건, 고엽제, 신자유주의, 노동 문제, 장애학우들의 복지문제 등 부지런한 운동권 학생들이 끊임없이 화두를 던져대며 아우성을 쳐도, 기독학생들은 스스로 참된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배우며 그것들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대다수의 학생들처럼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캠퍼스에, 그리고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너무 익숙한 모습이다. 그런 학내 문제가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며 정말 '익숙한' 우리의 모습이다.

물론, 이들이 캠퍼스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도 가끔 있다. '예수대행진'이라 불리는 이 행사는 "세상이 알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이 "행진"을 통해 기독학생들 내부는 더욱 견고하게 뭉쳐지며 구성원들 간에는 일방적 승리감을 얻게 되는 반면, 일반 학우들에게는 그들과의 괴리감을 증가시키고 캠퍼스 내에서는 기독학생들을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 집단으로 규정짓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진단이 나만의 과장된 생각인가.

두 번째는 시간의 문제이다. 까놓고 얘기해서 선교단체에 있는 리더급 학생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어 보인다. 학사의 삶을 살고 있는 동역자의 입을 빌리자면 어느 단체든 그 공동체는 구조적으로 그 구성원들을 그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이용하게 된다는 말을 했다. 조직에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고 더 견고한 공동체성의 확립을 위해 구성원들은 소진되는 수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비단 기업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선교단체에서도 보여지는 일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학생들의 경우 그 충성과 헌신은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전적인 헌신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전적'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대상으로 생각하는 수가 많다. 기연활동을 예로 들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 기독학생 연합은 각 선교단체의 '리더 빼가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 두고 대표자 모임에서 '고통 분담'이라는 말을 쓰기까지 하니 더 할 말은 없는 셈이다. 캠퍼스는 고사하고 선교단체조차 조망할 수 없이 자신의 단체에서 소진되고 있는 리더들이 어떻게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겠는가. 다시 여기에서 선교단체들의 구조조정(?) 문제를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다. (이 얘긴 99년에 TNT사이버 방담 때에도 나누었던 부분이다.)

솔직히 나는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안을 알지 못한다. 구조는 너무 견고하고 우리네 학생들은 너무나 세상에 대해 보수적이며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이 피상적이다. 변화 자체를 싫어하는 성향도 느낀다. 더 깊이 고민하고 더 많이 기도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한 더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내내 글 모양새가 너무 조잡하고 진단이 나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비판할 거리들도 많을 것이고, 또한 나와는 다른 캠퍼스의 상황을 이야기해 줄 동역자들도 있을 줄로 안다. 나의 부족한 글이 그런 많은 숨겨진 기독학생들을 자극하고 목소리를 높이게 할 수 있었다면 일단 그것은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침묵하지 말고 이 불씨를 살려 주었으면 한다. 냉정한 비판이나 논리적인 반론도 좋다. 그리고 그럴듯한 대안이나 이미 과정 중에 있는 좋은 운동의 본이 소개된다면 더할 나위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복상의 20대들도 기나긴 겨울잠에서 이제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2001/04/01 22:59 2001/04/01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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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사람들은 내게 그런 말을 한다.

"무슨 생각해?
딴 생각하는 거 같아서.."

..사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게 문제인 것 같지만 예전과는 달리
길을 걷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거나 업무 중에도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머리 속이 텅 빈 것처럼
약간은 피곤하면서도 나른한 그런 느낌의
일상이 계속될 뿐...

마치 몹시 큰 병을 앓았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상처난 부위가 너무 커서
수술 후에도 매사에 조심하는 사람처럼
하루 하루를 조심조심 살아가다보니
그게 가장 중요한 삶의 부분이 되고보니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다른 표정의 내가 되었을 뿐인걸..

2001/03/15 18:43 2001/03/1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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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과거를 돌아볼 줄 아는 것이 삶에 유익입니다 (2001. 3.)
/ 김용주


"이제까지 어떻게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우리의 정체성은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어."

새로운 학기를 맞으면서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후배가 던져놓은 화두였습니다. 매해 연말이면 '망년회(ØIO´ua)'를 통해 지난 해의 과오들은 잊고 다가올 새 해에는 다시 새로운 각오로 삶에 임하자는 생각은,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이며 이러한 '각오'는 1월과 2월 동안에도 신정과 구정이라는 두 번의 기회를 통해 다시 새롭게 다질 수 있음을 봅니다.

게다가 지난 한 해 동안의 삶을 돌아볼 때 다시 떠올리기 힘들었던, 그렇게 유난히도 어려웠던 시간들을 보낸 이들에게는 더더욱 과거란 잊고 싶은 하나의 단어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것이 단지 한 해의 일이 아닌,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게도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지루하고 건조하기만 했던 시간의 연장이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의 과거란 미래를 설계하고 보다 긍정적인 관점을 갖게 하는데 큰 장애물이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후배의 말을 들으며 그러한 과거들을 돌아볼 때 일면으로는 그가 그렇게 이야기하게 되는 사정을 이해할 만도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 자체만으로 다가올 삶을 준비한다는 것은 또 다른 잘못이며 비극임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실패한 과거를 인정하지 않음이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함은, 똑같은 문제에 부딫혔을 때 회피하게 되거나 동일하게 뼈 아픈 과거를 반복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비단 한 개인의 일생에서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나아가 한 국가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역사를 무시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류를 반복하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설령 그것이 승리와 커다란 업적을 쌓은 기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낙담케 하고 절망 가운데로 몰아넣었던 쓰디쓴 기억이라 할 지라도 그 과거의 기억들을 무시하지 않고 도리어 직시하고, 고민하고, 항상 기억하며 살아갈 때만이 그 길고 긴 저주의 사슬을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중요하며 역사는 항상 고려되어야 함을 기억해 봅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당신의 규칙대로 세상을 내던진 것이 아니라 친히 역사를 주관하심을 신뢰하며 우리 자신의 삶에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의 삶과 나아가 온 세상의 역사를 통해 그분이 이끌어오신 손길들을 되짚어 보며, 또한 그것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며 앞으로도 동일하게 은혜로운 방법으로 인도하실 그 분의 손길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001/03/01 00:59 2001/03/0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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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공동체에 속한 기독학생들에게 띄우는 편지" (2001. 2.)

/ 김용주


<시작하면서...>

지부의 몇몇 가족들에게서 몇 번이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기들이 변했으면 좋겠어요."

" OO가 바뀌도록 기도하고 있어."

" OO는 XX가 부족한 것 같아."

저는 여러분께 조심스럽게 질문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성숙'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그 모습 그대로를 고수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서 사랑을 거두려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기질: 하나님이 주신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질'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외적요인, 즉 환경의 영향으로 생긴 후천적 성격이 한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원죄로 인해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충분히 가치있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환경이란 외적 요인은 이런 개인의 본성을 아름답게 가꿔 갈 수도 있고 - 대다수의 경우처럼 - 과거의 상처로 인해 왜곡된, 그리고 다소 억압된 자아로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상처'조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과 함께 아파하셨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주변 사람이 변하길 원하는 것은 제 생각으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화'같은 개념과는 의미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성도들이 자신과 똑같은 복제품의 영적 존재를 이루어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얼굴과 손발, 심지어 지문까지 다르게 창조한 것은 우리 각각의 생각과 성격조차도 다양함 속에서 하나됨의 풍성함을 누리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그렇게 이야기한 분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이들이 똑같이 말하며, 똑같이 생각하며, 똑같이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IVF의 어떤 신앙 프로그램이 몇 년 안에 그것을 이루어 주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은 필요한 요소일 수 있겠으나 저의 견해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회심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하나님은 어떤 기질의 불신자를 다른 기질의 회심자로 바꾸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기질로 인해 행했던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가졌던 이가 삶에 대해 긍정적이며 감사하게 변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옛 성품을 버린다'는 말은 그 본성이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다는 뜻이지 자신의 기질이 다수의 Christian의 것으로 적응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기질에 대해 말하길 "우리의 성격과 기질의 근본적인 요소들은 회심과 신생(新生)에 의하여 변화되지 않습니다....심리학적으로 그 사람은 본질적으로 이전의 그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쓴뿌리": 환경을 통해 생성된 상처들과 그로 인한 부정적 성격의 형성>

두번째로 지적할 것은 외적요인으로 인해 생긴 부정적 성격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을 흔히 IVF에서는 '쓴뿌리'라고 표현합니다. 가령 과거에 자신의 동생만을 편애하는 가정에서 자랐다거나, 부모가 이혼한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자신의 핸디캡으로 인해 받았던 학대와 같은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어떤 성격적 결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공동체에 있는 모든 가족들이 이런 쓴뿌리들을 하나씩 은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하게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일수록 무의식중에 더 상처가 드러나길 원치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청년 시절 종교에 너무 집착하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시련이 없으면 절대자를 찾기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모임 가운데에는 자기만의 "쓴뿌리"를 소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그것은 지나친 판단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심각한 긴장점이 발생하는데, 그 긴장점은 바로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는 온통 상처를 주고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상처를 주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상 속의 대화에서도 서로에 대한 상처가 쌓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지체에게 상처를 받고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겐 오직 하나님뿐입니다."라고. 그리고 밖에서는 자신을 보여주고 교제하려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채, 날씨 얘기, 지부의 일정들, 난해한 신앙이야기, 레포트 등으로 분주하게 보이려 애씁니다. 그러다가 자신을 빚댄 듯한 주위의 발언에 대해 "넌 내 입장이 아니니까."라며 아예 대화의 문을 막아 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조차 불안해하던 자신의 결점에 대해 타인이 공격할까봐, 오히려 그것을 확인하는 게 더 큰 고통이기 때문에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한 예로, 제가 처음 신입생을 맞았을 때 저는 내 부족함과 상처들을 한사람, 한사람에게 드러냈습니다. 물론 내 부족함이 드러나면 후배들이 나를 선배로 여겨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집에 오는 길엔 속이 상해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내 얘기에 그들이 침묵할 때, 나는 그들이 나를 판단하고 있다는 비참한 느낌 속에 가슴을 찢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길 바랬습니다. 어차피 내 부족함은 내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드러날 테니. 오히려 후배들이 날 이해해주며 부족한 가운데에도 신뢰해 주길 바랬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려는 형제애가 필요>

정리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의 약함과 결점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상대방의 결점을 비판하거나 행여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의 결점은 감싸주라고 있는 것이지 찔러서 더 큰 상처를 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충고를 했을 경우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용납되었다는 감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판에 대처하는 법"에서 제람 바즈 교수는 평생 그 사람의 문제로 자신이 그 멍에를 함께 질 수 있을 때에만 비판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이야기를 맺으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고유한 본성이 있으며 환경으로 인해 왜곡된 모습 또한 본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신에게 있어서의 자유함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 자신에게도 같은 상처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상대방에게 용납되길 바라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상대방을 용납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솔직할 때 그 누구도 자신의 모습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셔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까지" 제자들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분은 그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인간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형벌대인 십자가에서 파격적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있는 모습 그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그분의 은혜, 그 자체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Christ)의 제자(Christian)로서 가족인 지체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수 없겠습니까? 지체의 급변(?)을 위해 조바심을 내며 섣불리 비판하기보다는 그가 그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인내하며, 인내로써 교제하여 죽기까지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갖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원리가 아닌 역사 속에 실재했던 그분의 사랑의 본이기 때문입니다. 입보다는 귀를 여십시오. 그리고 함께 아파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공동체" 입니다.**
2001/02/01 00:59 2001/02/0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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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순수함'은 변하지 않을 때 아름답습니다 (2000. 8.)
/ 김용주


조카가 난 지 6주 정도가 지났습니다. 한 식구가 더 늘어난 이유로 집안은 전보다 더 분주해진 요즘입니다. 천진난만한 조카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전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생명에게는 많은 주의가 필요함을 새삼 깨닫습니다. 아울러 지금의 나 자신이 스스로의 공덕이 아닌 어머니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바로 설 수 있었음을 돌아보면, 그 동안 가졌던 저의 짧았던 생각들에 얼굴이 절로 숙여집니다.

요사이 자주 조카녀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합니다. 어쩌다 함박 웃음을 지을 때면 그렇게 마음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다 지닌 듯, 세상의 순수함은 모두 그 아이가 가진 듯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와 동시에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어지럽게 스쳐갑니다.

그 웃음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다름 아닌 세상과 격리된 그 아이의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낸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 아이가 자라서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장성하여 세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어도 그 웃음이 한결같길 바라는 조바심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조카가 그 웃음을 지켜가기엔 삶이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은 이유에서입니다.

"참 순수하던 사람이었는데..."

관공서에서 군복무를 하던 때에, 갓 승진한 동료 직원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다못한 주변 사람들이 내뱉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특유의 낙관적 생각들이 무너지고, 삶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 처음의 좋은 모습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일은 정말 너무 힘들고 현기증을 느끼도록 마음이 상하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 사람과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순수함이었나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그렇다면 순수함은 한 사람이 사회에서 군림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지 않을 때에만, 그가 아무런 악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그런 낮은 자, 여리고 힘없는 자의 위치에서만 유지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자신없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그건 아니라는 의미의 고개를 저어 봅니다.

조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 보며 이 아이가 평생을 창조주가 이 땅에 보내신 뜻대로, 그 분의 형상대로 이 척박한 땅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살아가길 바라는 기도를 해봅니다. 또한 이 아이가 자라서는 좀더 좋은 터전에서 나의 세대보다는 더 좋은 여건에서 살 수 있도록 지금부터 더욱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다짐도 해 봅니다. 선한 경주를 마치고 조카와 마주서서 서로의 변치않는 웃음을 보여주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2000/08/01 00:57 2000/08/01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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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사랑의 목적은 사람 '그 자체'입니다 (2000. 8.)

/ 김용주


한 공동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몇 개의 작은 성경 공부 모임이 있었고, 각자의 모임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이들이 따로 모여서 함께 공부도 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누고 기도도 하는, 그런 모임이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나누는 이야기들 중에서는 모임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 날은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는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타인에게 먼저 상처주는 말을 하여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의 행동으로 인해 모임의 몇몇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모임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지 않게 되었고 어느새 그 자신도 서서히 모임에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날 모임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연락을 하여 다시 그가 모임에 나오게 하기로 어렵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났습니다. 그 사람은 갑자기 모임의 사람들에게 많은 연락을 받게 되었고, 그 모임의 사람들의 격려와 함께 그가 자신에게도 참 소중한 사람이라는 고백들을 듣게 되자 그의 마음은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연락을 해 준 사람들이 너무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이지요. 그는 모임에 있는 다수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가치있는 대접을 받고 있는 것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은 얼마 후 다시 모임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다시 모임에 나오게 되었고, 사람들은 다시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애정어린 말들을 하던 사람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없게 되자 그 사람은 당황하였습니다. 모임을 떠나 있었을 때 그렇게 애타게 자신을 기다렸던 사람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얼마 후에 그는 모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행동들은, 자신이 없을 때 그 모임에서 결정했던 하나의 '사안'이었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목적은 '그 사람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아니라 '그 모임에 나오게 하는 것' 자체였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더 큰 좌절감과 상처를 가지고 모임에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신영복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진실되지 않은 위로는 또다른 절망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의 영혼을, 그 영혼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조직의 논리만을 앞세운 공동체는 종교라는 굴레를 넘어서서 보더라도 하나의 큰 재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공동체에서 동료로부터 그런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듣곤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나를 끼워 주는 것 같아. 나를 진정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곳에 속해있기 때문에 대접해 주는 것처럼 느껴져. 그래서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아."

오래 전에 다니던 공장에서는 한 친구가 손을 다쳤었습니다. 그 때 그 공장의 관리부장이라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빨리 나아야지. 자네가 일을 비우면 공장이 얼마나 손해를 보는데. 오래 쉴 거면 다른 사람을 구할테니 왠만하면 나오라고."

바로 나 자신의 주변에서도 그런 모습들을 발견합니다. 나에게 효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가까이 가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며, 내가 속한 하나의 모임에서도 그 모임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한 '수단'으로 동료들을 대하고 있는, 정작 진정한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버린 저의 인간 관계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아가 그러한 그릇된 사고의 시작이, 사람을 단순한 효용적 잣대로만 평가하여 결국에는 장애인을 무시하고 소외된 이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그릇된 사회 구조를 와해시키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그런 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 잘못된 밑거름이 되리라는 생각에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창조주가 가치있게 창조하신 한 사람, 그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000/08/01 00:56 2000/08/01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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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낮아진다는 것..." (2000. 5.)
/ 김용주


요사이 많이 분주한 편입니다. 우리 기관에 새로운 기관장이 부임했기 때문입니다. 기관장이 묵을 "관사"를 삼일 째 수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속실은 새로운 기관장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합니다. 청의 깨끗한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많은 부서들도 근무 외에 많은 시간을 환경 정리에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기관 앞에는 항상 경구를 앞에 써 붙이곤 합니다. 청소를 하다가 문득 눈 앞에 커다랗게 쓰여있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가장 낮은 곳부터 시작하라!"

마치 얼핏 보면 성경의 한 구절과도 같은 이 말은 나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였습니다. 이 말에 새겨진 그릇된 가치관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한 숨을 쉬게 됩니다.

'이 말은 많은 관료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말의 이면에는, 종국에는 군림을 하려는, 평안과 향락이라는 삶의 목표를 위해 지금은 고생하라는 그릇된 논리가 숨어있음을 발견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끊임없는 노력과 낮은 자로의 삶이 그 자체로서가 목적이 아닌, 더 형이하학적이고 소인배적인 이기를 위한 권력사용의 수단임을 말하고 있는 이 시대의 그릇된 경구가 나를 몹시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항상 가장 낮은 곳에 있어야 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자리는 결코 높을 곳을 오르기 위한 발판도 아니요,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가치 뿐인 곳도 아닙니다. 낮은 자로의 삶. 항상 낮은 자리에 있음으로 주변의 어려움을 읽어낼 줄 알며 그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려는 "더불어 삶"을 위한 낮아짐이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막 노동을 해 본 사람만이 그 일의 어려움을 알며, 집안 일을 도와주는 가장만이 아내의 수고를 아는 법인 것 같습니다. 또한 주변의 어려움을 아는 이들만이 진정 서로를 위한 작지만 소중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나의 삶도 더 높은 고지를 바라보며 주변의 인간 관계를 "수단화"하는 것이 아닌, 권력 지향적이며 목표 중심, 업적의 성취 중심으로써의 삶이 아닌, 내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아파하고 더불어 웃을 수 있는 삶을, 나의 직업과 나의 성취한 일련의 업적들이 모두 그들에게 환원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더 친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관계론"적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2000/05/01 00:55 2000/05/01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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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동안 너무 피곤하였습니다. 특히 이번 주는 하루에 4시간도 채 못자는 날들이 많았던 지라 주말이 다가오자 부족했던 잠을 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습니다.

"용주야, 너 토요일에 뭐하냐?"
"글쎄, 뭐 특별한 일은 없는데...좀 피곤하긴 해. 근데 왜?"
"아니, 별 일 없으면 토요일에 애들이랑 농구나 하고 밥이나 같이 먹게."
"그러지 뭐. 요즘 같이 놀아본 지도 오래되었는데..."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워낙에 좋은 녀석들이라 쉬고 싶은 마음은 접어둔 채 그렇게 말해 버렸습니다. 사실 녀석들에게 매번 도움도 많이 받고 항상 서로를 걱정해 주는 이 친구들을 만난 것이 그 동안에도 너무 감사했거든요.(^^)
키에 걸맞지 않게 농구에 약한 나이지만, 그래도 잘 해야 좋아하는 건 아니란 생각에.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으로 조금은 피곤하게 또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토요일 아침을 맞았습니다.

일어나 보니, 시간은 30여분 늦어졌고, 도착 시간도 그 정도로 늦어질 것 같았습니다.
허둥지둥 옷을 챙겨입고 버스를 타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용주야, 어디냐?"
"이제 출발했는데 한 30분 정도 늦을 거 같아."
"그래? 그럼 오면 한마당 쪽으로 와~"
"알았어."

그럭저럭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도착할 즈음에 문자 메세지가 왔습니다.
'나  집에 간다"...허둥지둥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이제 학교에 가는 길인데, 너 왜 집에 가니?"
"야이 자식아! 지금이 몇 신데 이제 오는 거야?"
"내가 한 30분 늦는다고 했잖아?"
"언제? 10분정도 늦을 거라더니...하여튼 나 집에 다 왔어. 학교에 애들 아직 있으니까 거기나 가봐."
"야,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미안한 줄 알면 다음에나 잘해!"

갑자기 크게 잘못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은 학교를 올라가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지친 상태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당에 가니 친구들 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호가 너 기다리다가 먼저 갔어."
"이제오면 어떻게 해!"
"미안해..."

그렇게 고개를 숙이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붙잡았습니다.

"하하하. 내가 집에 간 줄 알았지?"
"휴, 야 너 뭐야. 내가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었는지 알아? ...니들 짰구나?"
"너 오늘이 만우절인거 모르냐?"

우린 다 같이 웃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늦긴 늦은 관계로 운동은 못하고 바로 점심을 먹으러 음식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갑자기 한 녀석이 케잌을 꺼내들었지요. 다들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습니다.

"생일 축하한다. 용주야!"

하하. 고마운 녀석들...가슴 한 구석이 뜨겁게 번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친구들이 생일 선물까지 준비했다고 합니다. 눈을 감고 셋을 세면 눈을 떠도 좋다고 해서 셋에 눈을 떴습니다.

"하나, 둘, 셋!"
"윽, 이게 뭐냐?"
"하하하! 뭐 좋은 거 줄 줄로 알았냐?"

  순진한 나는 피할 생각도 못한 채로 케잌 세례를 받았습니다. 많이 준비한 친구들의 흔적이 역력한 자리였습니다.

"이래놓고 밥은 나더러 사라는 얘기지?"
"무슨 소리야? 생일 날 밥 한끼로 그냥 넘어가려는 거야?"
"그럼, 밥까지 니네들이 낼래?"

그렇게 농담을 섞어가며 축하도 받고 케잌도 먹고 서로의 사는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서 집에 가려는데 또 다시 이 녀석들이 나를 잡았습니다. 용산에 가자는 것입니다.
일전에 컴퓨터의 ram 용량이 적어서 투덜댄 적이 있었는데 글쎄 이 녀석들이 그걸 용케 기억하고 있다가 오늘 용산에 같이 가기로 한 모양입니다. 다짜고짜 나를 끌고 용산에 가서 지네들이 가게마다 들어가서 가격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냥 사자고 하는데도 마치 자기 일인 듯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더 싼 곳을 없나 알아보더니, 가장 적절한 가격에 64메가짜리 램을 제 손에 쥐어 주고야 말았습니다.

"자아식! 빨리 가서 보드에 꽂아보고 싶지? 빨리 가봐! 성공하면 우리 집에 전화해."

함박 웃음 지으며 집에 돌아와서 ram을 꽂고 컴퓨터를 돌려보니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전화를 걸었습니다.

"야, 잘 된다."
"용주는 좋겠네! 아무튼 축하한다. 생일도 그렇고 컴도 그렇고."
"오늘 너무 고마웠어. 그럼 월요일에 보자."
"그래, 좋은 주말 보내~"

요즘은 마음이 좀 우울했었습니다. 일도 많았고 삶도 즐겁지 않아 보인 적도 많았습니다. 특히, 새로 시작된 나의 삶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집에서 컴퓨터를 보며,  얼굴에서 나는 크림 냄새를 맡으며, 감쪽같이 속이긴 했지만 리얼했던 친구의 화난 표정을 떠올리며...
친구들이 나를 향해 외쳐주었던 고마운 말 "생일 축하한다!"을 되내이며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광고 속의 대사 같지만 정말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2000/04/02 18:21 2000/04/0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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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모조미학 (模造美學) (2000. 4.)
/ 김용주


얼마 전 할머니께서 조화(造花)를 만드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홀로 지내셔야 하는 적적함을 견디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라는 생각에 어머니와 함께 마음 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 할머니가 손수 만드신 꽃을 보내 오셔서 오랜 만에 집안에 꽃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걸음만 뒤에서 본다면 마치 살아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세련된 꽃의 생기있음에 자주 놀라곤 합니다.

하루는 방 안을 정리하다가 너무나 삭막해져 있는 내 주변을 보게 되었습니다. 컴퓨터와 그 주변 도구들, 전화기, 그밖의 여러 전자 제품들, 그리고 난해한 책들로 수북히 쌓여있는 제 방에서 인간의 정서를 느끼기엔 너무 모자람이 많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제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다름아닌 가짜 꽃들이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선택해서 꽃꽂이를 해 놓으면 내가 원하는 임의대로의 완벽한 미(美)를 갖출 수 있고 물을 주지 않아도 되고 시간이 지난다고 지지도 않는 꽃을 생각하니, 작은 노력으로도 좋은 볼거리를 제공할 그것의 효용에 마음이 "동"하는 것이었습니다.

혼자서 분주히 꽃을 놓을 자리를 생각하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나의 어리석음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습니다. 방 안에 인간적 정서를 회복하기 위해 기껏 궁리한 것이 모조품이라는. 그 희한한 모순성을 가지고도 스스로에게 흐뭇해함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생화와 모양이 비슷하면서 어떠한 정성없이도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을 탐하였다는 생각, 매일 정성을 들여 물을 주고 햇볕을 쬐여 주어야만 되는, 그 "당연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꽃가꿈의 기본적 소양없이 그 결과적 미학만을 추구하였던 저의 속물 근성에 저를 심하게 질책하였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인의 습성에 많이 젖어들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현대적 사고가 모두 이기적이고 기계적이고 냉정하다는 식의 극단적 사고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간혹 아무런 여과없이 베여드는 현대적 가치들은 수시로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닌지. 특히나 이른바 모조미학이라는 이름아래 우리가 얻고자하는 극단적 효용론과 속도로 대표되는 그 내부적 가치의 간과성은 비판이라는 이름아래 재고해 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관계란 것도 수많은 관심과 대화 속에서 그 소중함을 체험하게 되는데 적은 투자로 큰 가치를 누리려는 현대의 어리석은, 그러나 당연시되고 있는 그 모순적 철학들을 이제는 지양해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닌지...

어릴 적 화단에 꽃을 심은 적이 있습니다. 그 씨앗부터 심어서 줄기가 자라고, 어느 덧 꽃대가 나온 뒤, 그 기나긴 여정의 끝에 만나게 된 꽃의 만발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조바심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투정하듯 '내일은 꽃이 필까'라는 중얼거림 속에 기다림을 배우고 매일 그 꽃에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사랑으로 보살핌이 종국에 그 원색적 아름다움을 안겨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그 내면에 쏟은 정성들과 하루하루의 진일보했던 시간들을 통틀어 얻게 된, 나의 정성에 대한 "꽃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더 큰 아름다움이 그 안에 있었다 하겠습니다.

오랜 만에 꽃씨를 사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00/03/31 00:53 2000/03/31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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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해: 내가 사랑하는 것들


** 이 글은 조동식(한양95)의 카페에 올렸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나에 대해 적어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 얘기하라면 멈칫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무엇을 얘기해야 하는 건지를 모르겠다고 하기보다는 적어도 자신에 대해 소개하려면, '나'라는 사람을 이제까지 가꿔준 많은 일들을 모두 소개하고 그런 일들로 인해 내가 느꼈던 감정들, 깨달았던 사색들, 그로 인해 지금껏 의지적으로 노력해온 부분들을 모조리 털어놓아야 할 것 같은 마음으로 인해서인지...

마치 고향집에 놀러 온 손자들에게 감자를 굽는 화로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얘기 해대는 여염집 할머니의 모습처럼 보일 것 같은 느낌 때문에... 혹은 어쩌면 그런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생각, 상대방에겐 흥미롭지 않은 그저 그런 남의 얘기 취급당할 거란 생각 때문에 글로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파편적인(?) 기호(嗜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련의 일들, 사람들, 가치들을 하나로 묶지 못하겠다. 그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틀을 발견한다면 좀더 쉽게 내 얘길 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고, 그렇다고 일전에 썼던 깨달음으로 대치하기엔 동식이란 친구의 '부탁 무게'가 내겐 너무 크게 느껴진다. 무언가 새로운 글을 써야할 것 같다는 말이다. 해서, 간단하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나열하고 이유를 짧게 달면 나에 대해 보다 '공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아래와 같다.

하나님: 내 삶의 근원. 부르짖으면 응답하는 분. 나를 사랑하시는 분

음악: 난, 음악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특히 "조규찬의 음악": 다양성, 목소리의 깔끔함, 음악의 세련됨 때문

그림: 어릴 때 잘 그려서 상도 많이 받았다.

사람들: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 가장 소중히 대해야 하는 삶의 대상

설거지: 기름기를 닦아낸 그릇을 물로 씻을 때의 느낌이 좋다

비: 마음이 차분해지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거든

비를 가르며 지나가는 자동차 타이어 소리: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공감했지

영화: 감독의 눈에 투영된 현실의 재구성. 현실과 한 사람의 가치관을 동시에 볼 수 있어서

어머니: 날 위해 자신의 평생을 버린 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나는, 나에게 있어 사랑의 최고 본이 되는 분

태권도: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운동. 몸이 개발되는 것이 신기했음

춘천가는 기차: 끊임없이 펼쳐지는 자연의 정경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동이 있었음

사랑했던 자매: 사랑했는데 사랑 안한다고 했었거든. 하하

영어: 꾸준히 하지 않으면 늘지 않는 학문.

강준만 교수, 인물과 사상: 한국 사회의 몇 안되는 희망(?)

기독교 세계관: 살아온 자리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삶이 아니라 살아갈 앞을 바르게 안내하는 내 가치관

짜장면 곱빼기: 어릴 때는 그 참맛을 알지 못했노라~

글쓰기: 머리에 있는 생각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노래 부르기: 노래 부르면 행복하걸랑

노가다: 땀을 흠뻑 흘린 뒤의 맑은 정신. 그 뒤에 벌어지는 술자리의 시끌벅적함.

책과 CD: 책은 500여권, CD는 300장 정도.

조카: 올 7월에 세상에 나오면 무지 이뻐해 줄 것임

시골길: 길 양편에 펼쳐진 논밭들. 허수아비와 참새, 메뚜기. 싫지 않은 두엄 냄새.

그 시골길에서 맞는 가을 아침: 높은 하늘과 따스한 햇볕, 시원한 바람

일몰: "마지막"이란 저런 느낌일거라 생각하게 만드는 풍경

현란한 도시의 네온사인: 내 마음에 따라 아름답게도 보이고 슬프게도 보이는 문명의 이기? 이기!

나: 이제 조금 익숙해지는... 서로 안지 어언 25년 된 친구
2000/03/16 18:44 2000/03/16 1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