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복음과상황

<비급(秘笈) ‘다시보기’의 교훈>

어렴풋하지만 무협 영화 중에 그런 류의 내용이 가끔 기억난다. 주인공이 어떤 이유로 위기에 처했다가 무림의 고수에게 구조를 받게 되었다. 이 고수가 죽기 전에 주인공에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비급(秘笈)을 전해주게 되고 주인공은 날마다 비급에 감추어진 무술을 연마하지만 웬일인지 비급을 완벽하게 체득하지 못한다. 어느 날 비급에 음식을 흘렸는데 비급에 묻은 음식을 지우다가 새로운 글자나 그림이 겹쳐져서 나타나게 되고 주인공은 그 숨겨진 부분을 익히게 되어 무림의 달인이 된다는 식의 줄거리다. 명확하진 않지만 음식이 묻은 경우가 아니라도 촛불에 비추어 본다던가 하는 식의 내용 전개가 있었던 듯 하다. 똑 같은 비급을 매일 수련하던 주인공에게 보이게 된 겹쳐진, 그러나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의 심경이랄까. 그 어떤 설렘과 신비감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던 지라 피아노 줄이 다 보이는 시시껄렁한 옛날 무협영화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릴 때부터 꽤나 착실히 교회를 다녔다. 때로는 당시의 나로서도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 종종 있었으나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뿐 별다른 고민을 해보지 못했다. 사실 학생시절에는 신앙 생활을 하는데 그러한 것들이 별로 중요할 성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고 난 때때로 내가 주변적이라고 느끼던 일들로 신앙적으로 자주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무엇보다 내가 교회 안으로 데리고 온 비기독인들은 내가 주변적이라고 느끼던 바로 그러한 일들을 꽤나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곤 했다.

물론, 난 그들이 편파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편파적인 시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교회에서 주변적이라고 느끼는 그러한 관점으로 교회를 바라볼 때마다 자주 나는 철없던 시절에 보던 무협영화의 비급이 떠오른다. 세상이 바라보는-기독인의 시각에서는 비급에 흘린 음식물처럼 약간은 더럽혀진 관점으로-교회라는 조직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후의 내용은 그러한 편파적인 교회보기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계급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회>

“하나님의 대리자인 목사님의 말씀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성도는 기도생활을 제대로 못해서 마귀가 들어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세속화의 전형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신성한 곳이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는 아마 모르긴 해도, 매 주일마다 어느 교회에선가 예배시간에 선포될 말씀이다. 때로는 큰 교회일수록 이러한 말씀 선포에 “아멘!” 하며 화답할 성도들도 많으리라. 이러한 말씀선포가 유효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목사직에 대한 성직화가 가장 큰 원인일 것 같다. 카톨릭적 배경 아래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래로 개신교에서 수없이 반복하여 학습하는 루터의 가르침, 즉 ‘만인제사장주의’, ‘만인사제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유교와 만나 또다른 형태의 계급화를 부추긴다.

이러한 배경에는 또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평신도의 신학 교육이 그리 활발하지 않다는 데에 그 첫째 이유가 있겠다. 아니 좀더 원색적으로 말하자면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 하겠다. 예배에도 그 계급적, 그 상하 위계질서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어서 ‘소’ 예배나 ‘중’ 예배는 없는데 항상 ‘대’ 예배는 존재하며 ‘대’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성도들의 경우에는 아예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 게다가 이 ‘대’ 예배는 기존의 교육 전도사나 부목사가 설교를 할 수 없고, 꼭 담임 목사가 설교를 해야만 유효하다. 담임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에 그런 듯 하다. 단, 예외가 가끔 존재하는데 그것은 담임 목사의 아들이 목사 안수를 받으면 그 ‘육신적’ 아들이 담임목사 다음으로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그에게 ‘대’ 예배의 설교를 위임하는 일이 그 예외에 해당한다. 이러한 교회들의 대부분은 교회 내의 구조를 이해하고 적용하고자 하는 부분에서는 구약을 주로 인용한다. 따라서, 왕과 제사장, 그리고 각 지파들의 장로들과 백성들로 구성되는 구약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목사와 장로, 집사, 평신도를 구약적 모델에 일대일 대응하여 말씀을 적용한다.

왜곡된 신학뿐만 아니라 기존의 습속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위계질서가 유지된다. 유교적인 배경을 가진 한국 사회의 전통에 더하여 군부 독재정권의 오랜 압제 아래 있었던 국민의 대부분이 그렇겠으나, 교회 내의 성도들 간에도 자신들이 스스로 기도하고 말씀을 깊게 묵상하며 판단하여 교회의 일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타나서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오히려 편하고 만족스럽다고 여기는 부류가 많다. 이러한 대다수의 성도들은 자체로 어떤 참여적인 행동을 부담스러워하며 민주적인 절차로 어떤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데에 익숙지가 않다.

따라서, 이러한 need와 seed가 일치하는 지점에 교회의 왜곡이 발생한다. 만인이 제사장이자 사제이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제사장이나 성직자의 중개 없이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할 수 있음에도 대다수의 성도들은 목회자의 안수기도가 자신의 믿음이 담긴 기도보다 효력이 크다고 생각하며,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경우에도 가까운 관계의 성도보다는 교회에서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판단되는 교역자의 기도를 높게 치부하곤 한다. 장로직 선거 시에도 목회자가 후보자에게 크게는 몇 천 만원의 기부를 강요하는 경우도 주변에서 적잖게 듣곤한다. 이런 연유로 선거에 후보자로 올라서 장로직분을 받게 되는 성도는 사회에서 인지도가 있고 부와 명예를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람인 경우도 많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처음 등록한 상당수의 비기독인들은 한국의 중, 대형 교회의 구조는 세상의 조직 구조와 너무도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재벌 기업과 교회 조직체>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칭한다. 사실 이때의 교회는 ‘성도’들 자체를 지칭하지만 흔히 교회에서 ‘우리 교회’라고 말할 때는 특정한 이름의 교회 공동체를 운영하는 조직을 지칭하는 일이 일반적이다. ‘성도’라는 의미의 교회와는 구별되는 이러한 ‘교회 조직체’는 다른 세상 기업들과는 달린 세금을 내지 않으며 조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는 부분에서도 상당히 불합리한 부분이 많다. 담임 목사에 비해 부목사의 급여는 절반에 못 미치는 경우도 많으며 교육 전도사의 경우에는 최저 생활비에도 못미치는 급여를 받는 일도 허다하다.

대체로 대기업의 회장들이 부를 독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조직체가 크면 클수록 이러한 대기업의 생리를 닮은 구석이 적잖이 보인다. 재벌 기업 사이에서 보이는 특수한 부의 세습은 국제 사회에서 한국 기업들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데에 크게 일조하고 있으나, 교회 조직체는 이러한 ‘재벌’의 습성을 책망하지는 못할 망정 그대로 흡수하는 ‘관대함’마저 가지고 있다. 또한, 담임 목사의 직분을 그간 최소 생계비로 헌신해온 주변 동역자에게 넘겨주기보다는 연륜과 경험이 부족한, 한 세대 아래의 아들에게 주려고 한다. 대개는 그 아들이 담임 목사의 성품에 합당한 교육을 통해 길러진 훌륭한 믿음의 자녀이자 검증된 리더임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가정(假定)은 왕정시대, 혹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재벌 그룹에서도 동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되는 원인을 사람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한 사람의 결단이 그 교회 조직체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 조직체에서 부의 세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먼저 짚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교회 조직체의 재정 운영 스타일이 재벌 기업의 그것과 비슷하며, 그런 연유로 재벌 기업가들이 하는 방식과 똑같은 스타일의 세습문제가 교회 조직체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교회 조직체는 교회의 건물이나 부지(敷地), 혹은 교회의 재산이 담임직을 맡고 목회자의 명의로 등록이 되어 있는 경우가 더러 존재하며 재정을 운용하는 그룹도 목회자의 뜻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담임직의 위임은 단순히 설교자로서의 위치를 위임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재산을 넘기는 일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교회 조직체 내에서 그러한 부의 편중형태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한 사람이 결단을 한다고 해서 그 조직체의 견강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조를 견고히 하는데에는 성도들의 그릇된 습속도 한 몫을 거드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목사님은 그 정도의 부는 누려야 한다”거나 “목사님의 위신과 체면을 고려하여 그 정도의 치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의외로 많다. 허나, 이는 그릇된 체면과 허례의식이 조장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성도는 ‘교회 조직체’를 위해 종노릇하라?>

교회 조직체에서 성도의 위치는 상당히 불안정하다. 설교를 통하여 새로운 삶에 대해 도전을 받으며 헌신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지지만 실제로 어떠한 상황적인 문제에 대한 미시적인 행동 지침같은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은 회심 이후에 무거운 마음으로 전도 이외의 일에 대해 시야를 넓히는 일이 쉽지 않다. 게다가 교회 조직체는 교회 내의 견고한 공동체 형성을 위해 끊임없이 여러 가지 형태의 봉사 프로그램을 만들며 그러한 행사의 대부분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교회를 위한’ 행사인 경우가 많다.

결국 교회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하고 스스로의 죄성을 심각하게 뉘우친 대다수의 성도들은 빚진 마음으로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찾게 되는데 이 때 교회 조직체는 교회의 일에 성도들의 노동력을 대가없이 사용하는 일이 생긴다. 분명 말씀은 세상의 ‘빛과 소금’에 대해 선포하지만 교회 조직체는 그에 대한 선행 과제로 ‘교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종용하며 이러한 소명은 직분을 얻은 성도들이 소진될 때까지 지속된다. 이들이 교회 조직체를 위해 사용하는 많은 금전적, 시간적, 물리적인 헌신은 그야말로 대가 없이 행해지는 것이며 그것이 충당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신앙이 흔들린다거나 믿음이 후퇴했다고 치부하기도하고 심지어는 마귀가 들었다는 말도 서슴없이 일삼는다.

교회 조직체가 운영하는 사업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고용된 직원들은 교계의 연줄을 통해 서로가 아는 경우가 많으며 교회 조직체는 이들 대부분을, 정당한 댓가를 받는 정직원이라고 여기기 보다는 사회 봉사활동을 하는 자원봉사자 정도로 생각하는 듯 하다. 교회 조직체가 운영하는 사업체의 경우, 급여가 몇 달이고 밀리는 경우도 많고 그러한 경우에는 천국에 보화가 쌓이고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펴기도 하며 금전적인 문제로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 자체를 책망하기도 한다. 교회 내의 분위기에서 금전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세속화된 증거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이러한 배경을 가진 교회 조직체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의 교회 조직체 안에서도 재정적으로 풍요함은 누리고 있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상’을 담보로 헌신을 강요당하며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종노릇’하고 있는 계급이 교회 조직체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한 상상인가.



<교회가 무림의 고수로 거듭나기까지>

이렇게 생각해보자. 교회 내에 하나님에 관한 부분이 없다고. 교회는 단순한 또 하나의 조직이라고. 성령의 사역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없는 단순한 하나의 조직 사회라고. 대다수의 불신자들은 그런 시각으로 우리를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과연 이러한 것들을 모두 제외한 후에도 교회 공동체는 이상적인 공동체인가.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조직원들을 위하며, 재정사용에 있어서 전혀 거리낌 없이 어느 조직 사회보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운영되는가. 어느 특정 부류가 부를 선점하고 있거나 특정 부류의 희생을 담보로 유지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교회가 만인이 제사장이며 만인이 사제라는 원리에 충실한, 그야말로 평등한 조직인가. 재정 사용이 투명하며 정당한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주고 있는 조직인가.

그러한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기독인들에게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하며 이 사회에서 ‘기독교 윤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교회는 이율배반적인 말씀의 선포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낫다. 혹은 어렴풋한 무협영화처럼 교회도 더러운 세상의 시야를 통해 새롭게 스스로를 연마하여 진정한 고수가 되거나. **

 
2004/02/01 08:09 2004/02/01 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