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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회색지대 보고서 (8): 운동성을 가진 사회인이 되기까지 (2003. 12.)  

/김용주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

세 번에 걸친 ‘직장 생활 보고서’에서 나는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여러 가지의 문제들에 얽혀있고 그러한 문제들로 인해 결국 자신의 삶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정작 운동성을 가진 사회인으로서의 역량은 사라지고 있음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다시 부연하지 않더라도 짧게 말한다면 많은 기독인들이 라인홀트 니버의 책 제목처럼 ‘도덕적 인간’이 되고자 애쓰지만 ‘비도덕적 사회’에 대한 불편함, 부조리함에 대한 변화의 갈망과 같은 거시적 관점은 상대적으로 많이 잃어가고 있다.

많은 대중들이 흥미롭게 대하는 기사는 스포츠 신문에서나 접하게 되는 선정적이거나 충격적인 내용이며, 정치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와 비판들이 쏟아지지만 정작 관심사는 정치의 발전과 시민의 참여라기보다는 암실 정치의 ‘폭로’ 그 자체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는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직장에 묶여있는 시간과 노력이 늘어나면서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여가에 대해서 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점점 자신의 주변과 관계없는 일에는 귀와 입을 막고, 일하는 시간 외에는 되도록이면 머리가 복잡해지는 일을 하거나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는 일은 피하게 되는 것 같다. 주변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채로 출근길에 마주치는 이웃을 장애물 피해가듯 지나치게 되고, 주변에 어려운 환경에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도 줄어간다.

무엇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다양하게 이해하고 접근해야 하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냉담해지기 마련이다. ‘넥타이 부대’ 운운했던 시기는 이제 과거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는 듯 하며, 과거 군사 독재시절과는 달리 권력관계와 구조적인 악의 문제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바라보아야 할 관점도 많고 운동성 있는 사회인으로 살아가기에는 그만큼 알아야 할 것도 많아졌다. 특히 교인의 경우, 대다수의 기독인들에게는 교회 개혁에 대한 문제도 매주마다 피부로 느낄 만큼 민감한 문제이지만 직장인의 입장에서는 주일을 빼먹지 않고 교회 가는 것만으로도 할 도리는 다한 것이라고 자위하는 모습도 흔히 보게 된다. 이러한 다수의 기독 직장인들을 이해하는 것과 그들을 운동성 있는 사회인으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문제다.


무늬만 진보, ‘껍데기는 가라’

이렇듯 문제의식이 없는 이들이 대다수인 반면 또 다른 부류도 있다. 진보임을 자처하지만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희생도 없는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이상과 현실을 극단적으로 구분하여 스스로의 언행불일치에 대한 심적 자위책을 찾는다. 캠퍼스에 있을 때는 기독교 세계관 운운하던 학생들이 그러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구성원 중 다수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중 일부는 특정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다시 그 중 다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비평하는 일에 멈춰서게 되며 그 중의 하나 내지는 둘 정도가 그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더 나은 방향을 향한 행동을 시작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을 배우던 우리 세대를 예로 들어보자. 쉐퍼나 송인규로부터 시작하여 제임스 사이어나 브라이언 월쉬의 책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당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에 매료되었고 그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리차드 니이버나 도예빌트와 같은 이들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어느덧 이제는 무언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다시 기독교 세계관이 모더니즘적인 토대 위에 서 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되면서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하여 생각의 균형을 잡아갔다. 그 와중에 대다수의 학생들은 어떤 해결책을 모색하기 보다는 기존의 담론에 대한 비판에 많은 시간을 썼던 듯 하다. 물론, 여전히 내 또래의 기독인들 사이에는 기독교 세계관이 행동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 삶 속에서 아는 선 만큼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의 일부는, 자신의 신앙고백에 합당한 몸부림이 없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정직한 자성이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모든 문제에 있어 현실에 뿌리박은 해결책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특별히 세계관의 문제, 그리고 신앙과 결부된 문제들은 현실을 반추하는 것 이상의 어떠한 움직임을 동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한 움직임이 결여되어 있을 때 그 상부구조는, 적어도 그것을 붙잡고 있는 개인에게는 허구일 따름이다. 그러한 안일함은 마치 자신이 살아본 적이 없는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만큼이나 기만적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기지촌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무늬만 진보 흉내를 내면서 속으로는 보수적인 흐름에 편승하는 이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다. 하긴, 사회주의 혁명가에 대한 이야기를 극우 신문에 개재하는 일이나 진보잡지를 표방하면서 극우 잡지에 홍보를 일삼는 일, 진보를 자처하는 교수가 극우적인 단체의 후원을 받으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도 이제까지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진보의 상품화’라고까지 이야기해왔다. 손가락질 할만한 일이란 생각이 들다가도 정작 그 손가락을 나 자신에게 가져다 놓아보면 사뭇 그 느낌은 달라질 것 같다. 그만큼 우리의 사고는 타자화 되어 있으며, 동일하게 행동의 결여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나 또한 그 손가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운동가의 편견-‘건곤일척’의 문제

여기에 반해 극소수의 운동가들이 있다. 이들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길로 들어섰다. 운동가들은 시작부터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이 운동 자체가 춥고 배고픈 일이다. 그리고 애써 노력한 데에 반해 변화의 폭도 그리 확연히 드러나지 않아서 그만큼 운동의 길은 길고 지루하다. 또한 항상 타협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어디까지가 타협의 올바른 한계선인지에 대한 구분이 불명확하며 그로 인해 생기는 유혹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깨끗함을 목숨처럼 여겨야 하는 운동가들의 입장에서는 한 번의 실수로 이제까지 지켜온 명예가 더럽혀지는 일도 있다.

무엇보다 운동가들의 목적은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현실 사회의 문제를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야 하는 과정이 선행되기 때문에 운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때로는 극단적인 행동을 일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은 이미 삶의 많은 부분에서 희생을 치루었고, 공의를 위해 사욕을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가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도덕적 우월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나는 추호도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자존감은 세워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내가 가까이에서 접한 운동가들이 겪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아는 이상, 그분들을 범접할 수 없는 나의 처지를 질책할 수는 있어도 그분들의 헌신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수 없으리라. 따라서 전에도 언급했듯이 내가 짚고 싶은 부분은 원론적인 부분에서의 운동가들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분들의 방법론적인 문제이다. 결국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대다수의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현실의 모순들을 드러내주고 그들이 그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인식하여 정작 운동성있는 개인으로 거듭나게 만들기 위함이라면, 현재 운동가들의 운동 스타일에는 어느 정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건곤일척’의 정신에서 오는 문제다.

운동가들은, 흔히 하는 말로 99% 헌신된 일백 사람보다 100% 헌신된 한 사람을 원한다. 전적으로 어떤 일에 집요하고 끈기있게 매달릴 때에야 어떤 일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집요함이나 끈기가 운동가들에게는 권장되는 자질 중 하나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판단으로 볼 때, 매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매달리는 운동가의 자질은, 운동을 이끄는 그룹 내부에서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자 권장되어야 하는 태도이겠지만 하루하루를 일에 찌들어 사는 대다수의 직장인들에게 그러한 자질의 ‘강요’가 적지않은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운동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무엇보다 그러한 접근방법은 대다수의 직장인들에게 처음부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해버리고 싶어지게 만드는 게 문제인 셈이다. ‘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고 결연하게 말하는 운동가에게 대다수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아마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발을 빼기에 급급한 겁쟁이가 되어 수면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운동가들이 다수의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실제적인 문제 – 돈, 연합, 그리고 헌신의 대가에 대한

사실 이러한 운동가들의 문제를 그분들이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설득을 효과적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돈 문제와 인맥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소리를 내려고 할 수록 때로는 그 수위가 날카로울 수밖에 없으며 쉽게 주변의 강요에 쉽게 타협하거나 무너져서는 안 되는 문제가 존재한다. 후원을 받을 때에도 특정한 단체에서 그 단체의 이익을 대변할 정도로 큰 금액을 받으면, 이후에 그 단체가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에도 바른 소리를 내야 할 비판의 ‘칼날’이 무뎌지는 문제가 생긴다. 하여간 ‘돈’이 문제다! 그 흔한 행사 한 번 할 때에도 사용되는 금전적인 지출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인건비는 어떠한가. 마음 같아서야 부서마다 사람들을 원하는 만큼 두고 싶고, 그러한 인력을 바탕으로 깔끔하고 풍성한 움직임으로 세련된 운동 스타일을 구사하고 싶은 욕심이 많은 것을 안다.

하 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는 곳에는 사람도 버텨낼 재간이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기독인들은 그것을 너무 쉽게 치부해버리는 듯 하다. 흔히 돈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기독인들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타부(taboo)시 한다. 은혜롭지 못하다고, 혹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들어온 이방인의 불필요한 걱정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일정부분은 공감한다. 하지만 금전적인 문제에 있어서 ‘규모없음’이 ‘신실함’의 표증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오히려 금전적인 규모를 잘 관리하지 못함으로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청지기적 사명이 강조되어야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최소한 사회인으로서 그러한 운동단체에 지속적인 후원이 꼭 필요하며 다소 입장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이 치명적인 부분이 아닐 경우에는 일단 후원을 하면서 운동단체에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옳다.

두 번째는 연합에서 오는 불협화음의 문제이다. 내가 대학시절부터 줄곧 고민해 오던 두 가지의 키워드는 “운동성”과 “연합”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단어들은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으며 지금도 아직 그 현현(顯現)을 접할 기회가 적은 편이다. 어떤 행사를 하게 될 경우 대중들은 깔끔한 구성과 잘 짜여진 프로그램의 행사들을 선호한다. 장소도 깔끔하고 자리도 편안하며 음향시설도 어느 정도 받쳐주는 그런 곳에서 정서를 자극하는 음악과 부드럽게 넘어가는 진행이 대중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연합 행사는 위와 같은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경우가 많다. 일단 금전적인 어려움 때문에도 그렇지만, 워낙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 모이기 때문에 회합 회수부터 시작해서 준비과정, 그에 따른 의견 조율까지 하나같이 어려움을 겪는다.

끝내 단체들간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해 중도에 참여를 그만두는 단체들이 생기는 경우에는 더더욱 분위기가 냉랭해지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진행된 연합 행사는 적은 자본과 미흡한 준비, 그리고 연륜의 부족으로 인해 다소 부자연스럽고 껄끄럽게 진행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연합행사의 진행은 한 단체에서 완전히 전담하여 진행하는 것보다도 더 질이 떨어지는 행사가 될 확률이 높으며 그런 연유로 많은 사람들은 연합 행사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연합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해 주의환기를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결 국 단체간의 연합은 불완전하며 과정도 험난하고 결과도 그다지 좋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연합은 그 자체로 완벽함을 얻는다. 이 말이 다소 모순되게 들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이 가족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어떤 효율적인 성취에 있지 않는 이유에서 그렇다. 또한 모난 자식이 있어도 모두가 함께 모여 식사하는 자리가 잘난 자식 몇몇과 앉아 식사하는 자리보다 더 행복한 이유에서 그렇다. 특별히 기독인은 스스로를 몸된 교회의 한 지체라고 일컫지 않는가. 지체들이 다 같이 모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기뻐해야 할 본질적인 이유이고 그렇기 때문에 연합은 우리의 ‘목적 자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되도록이면 격려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연합운동에는 동참하는 것이 옳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잃을 것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흔히 기독인은 스스로를 헐리우드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생각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으며, 약간의 고통을 겪고 나면 이내 행복한 결말이 보장되어 있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리라. 하지만, 많은 신앙인들은 그 기한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지속적으로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기독인들이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에게 왜 고통을 허락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놓고 주기적으로 고민한다. 왕이 된 다윗이나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에 대해서는 ‘아멘’으로 ‘화답’하지만 많은 은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순교한 ‘스데반’은 왠지 들을 때마다 껄끄럽기만 하다. 이 세상에서의 지속적인 고난은 여전히 기독인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이 가감 없이 말하듯 현실 사회에서 실제로 운동을 하는 이들은 많은 위협을 받는다. 타협을 거절하였을 때 오는 인맥 상의 따돌림이라거나 신변의 위협을 당할 때도 있다. 게다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집으로 걸려오는 협박전화를 운동가들의 가족이 받고 고통 받는 일도 다반사이다. 그런 극단적인 형태의 위협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비판하거나 문제를 지적하다가 쫓겨나는 일도 있으며, 그 이후에도 그 공동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맥의 방해로 결국 그 바닥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일도 잦다. 결국 바른 소리를 내며 행동하는 사회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일정부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는 자주 그러한 헌신의 대가를 뼈 속 깊숙이까지 새겨보아야만 한다.


연재를 마치면서

‘회색지대’라는 말은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다. 어느 한 쪽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어느 쪽에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특히 문제제기를 하는 입장이 그렇다. 게다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면서는 원고를 쓸 때마다 몇 번이고 망설이기도 했다. 이런 잡글이 복상의 소중한 지면을 차지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류의 고민 때문이다. 항상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시행착오를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족함들을 가감없이 써 내려가는 일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이전에 글을 쓰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내가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글의 수위, 행동의 한계선. 이런 것들을 계산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불편하고 부끄러웠다. 연재의 시작은 캠퍼스 학생들을 위함이라 얘기했지만 정작 이 글들은 오히려 무뎌져 가는 나에 대한 질책이 되었던 것 같다. 늦은 원고에도 항상 느긋했던 서부장님과 재홍이 형에게 감사한다. **
2003/12/01 23:28 2003/12/01 2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