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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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기독교 교리 관련된 글들이 올라온다. 뭐 내가 기독교 배경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SNS나 일반 사석에서 교리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능력이 안 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솔직히 일부러 안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뭐 개신교 특화된 공간, 인터넷 카페, 그룹 같은 곳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일상적으로는 교리에 관해 왈가왈부 내지는 중요하네 안 하네 등등을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은... 개신교에서 교리는 지금보다 더 '내재화'되어야 할 요소라고 본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충분한 논의와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 있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그 유일성을 자랑을 하거나 논증하는 것, 나아가 전도라는 이름을 광고, 홍보하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다.

교리는 이를테면 기본기다. 운동선수의 기본기는 시합에서 자연히 드러난다. 날카로운 슛을 한두번 날리지만 이내 헉헉 거리며 움직임이 둔해지거나 정석의 상황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선수와 그 반대의 선수는 '기본기'라는 이름으로 평가된다.

한 종교의 위대함은 내재화된 교리를 통해 드러나는 공동체 개개인의 삶이다. 약장사처럼 한번만 먹어봐...라고 읖조리지 않아도 명약은 소문으로도 불티나게 팔린다. 내가 느끼기에 개신교 신자들 대부분은 가짜약을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일반인에게 팔아넘기려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더더욱이 한국 개신교는 현실세계에서 어떤 조직이나 세력들 못지 않게 부정부패와 비리, 권력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런 컨텍스트 속에서 아무리 정화된 텍스트를 선언, 선포한 들 그 텍스트가 곧이 곧대로 들릴 리 만무하다. 아닌가. 당신이 무종교인이라면 '신천지'의 행동을 보며 신천지를 정통으로 받아들이겠는가.

나를 포함한 개신교도들은 삶 속에서 철저하게 이단처럼 살고 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가짜약을 팔면서 정품이라고 우기고 있다. 물론 종교는 쓰여진 글(성경)과 종교적 전통(교회)를 통해 그 정신이 일정한 교리로 전승된다. 신앙을 갖고자 할 때 그 교리를 피해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효과없는 약 장수, 경기내내 헉헉대는 선수가 전달하는 '옳은 말'이 무슨 소용인가. 그 옳은 말(교리)이 사이비 취급받지 않겠는가.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그 순수한 의도가 오염되지 않겠는가. 아닌가.

솔직히 내 주변에는 고상한 신앙서적 수십권을 설명하고 매주 교리를 설파하는 대형교회 목사들도 있고 수십편의 야동을 보고 그것들을 회사에서 전파하는 직장 동료도 있다. 솔직히 (내가 아는 어떤) 후자가 더 성실하고 더 주변사람들을 잘 돕고 더 겸손하다. 그럼 교리보다 야동이 나은가. 혹은 아닌가.
2013/02/27 22:55 2013/02/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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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목사의 주일 설교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상황을 잘 몰랐다가 오늘 아침 올라온 영상을 보고 하루종일 그 영상을 묵상했다. 아직 다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몇 가지를 풀어본다.

먼저 오정현 목사는 "사안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최근 불거진 논문 표절 문제를 성도들에게 사과했다. 18년전 쓴 논문에서 부분적으로 인용된 부분의 출처표기가 안 되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고 어쨌거나 본인의 부족함에 기인한 일이니 용서를 빈다고 했다.

더불어 이 논문 문제를 처음 제기한 분이 직접 찾아와서, 건축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하면 논문 문제는 덮겠다면서 48시간 내에 사임하지 않을 시 이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통보했으며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이 ...문제를 당회에 처리하도록 부탁했으니 성도들의 중보를 바란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가지가 오정현 목사의 진정한 의도가 회개, 용서라고 하기엔 상당히 껄끄러운 부분이다. 하지만 오 목사는 예배 중 여러 차례 성도들에게 송구스럽다, 죄송하다, 용서를 빈다는 표현을 쓰며 눈물로 사과했다. 힘들지만 이 환란을 잘 헤쳐나가자고 말했고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나는 오정현 목사가 이 문제를 놓고 교인들에게 용서를 구했고 교인들은 용서를 했다고 본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렇다. 사랑의교회가 오정현 목사를 문제삼지 않는한, 혹은 오정현 목사가 자신의 발로 교회를 걸어나가지 않는 한 이제 건축도 잘 이루어질 것이고 오정현 목사도 사임하지(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 한국개신교회는 최근 20년간 단 한번도 교회개혁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특히 외부에서 개교회의 세습이나 기타 부정부패를 지적하여 그것이 개교회 내에 영향력을 끼친 적이 없다.

그리고, 보다 원론적으로 본다면 이처럼 담임목사가 자신의 허물을 공개하고 그것에 용서를 구하였는데 그것을 용서해주지 않을 수 없다.(물론 논문 취소와 같은 문제는 차치하고 말이다) 그의 눈물의 진정성에 대해 우리는 추측하여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가 오정현 목사에게 '악어의 눈물'이니 비열하다느니 하는 표현을 쓰게 된다면 차후에 또다른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진정성있는 회개를 해도 교회가 그것을 비아냥댈 여지 내지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 나는 이점을 우려한다. 오정현 목사를 비난하기 위해 '공개 회개'에 대한 의미를 퇴색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우리는 당사자가 회개를 해도 계속 그 죄를 비판하는 '외부 성도'가 된다. 이렇게 되면 오정현 목사를 용서한 사랑의교회 개교회 성도와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외부 성도간의 감정 대립과 분열로 이어질 것이다. 물론 오정현 목사는 그것을 원했을 수도 있다. 개교회 안에서 더 강한 신임을 얻고자 그렇게 유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추측'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최근 사건의 추이로 볼때 점점 오정현 목사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건축문제로 그동안 내우외환이 많았는데 최근 불거진 논문 표절 사건으로 주변에서는 더욱 사임 밖에 대안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사랑의교회를 사임하면 오정현 목사는 건축도 잘못이고 논문도 표절임을 인정하게 된다. 결국 그의 사임은 그 사역 전체의 부정이며 이후 재기 가능성이 희박하다.

오정현 목사는 자신의 처우를 당회에 맡겼고 별 이변이 없는 한 당회는 오목사를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도 이것을 외부에서 막으려들면 교회 내부는 더욱 오목사 사랑이 견고해질 것이며 분열과 상호비방이 커질 것이다. 최근 20년 한국교회의 전통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나는 오정현 목사의 사임이나 건축 반대가 아닌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오정현 목사의 사과에는 당연히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개교회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므로, 오정현 목사가 담임직을 유지하고 이끄는 사랑의교회의 복음주의권 사역들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사랑의교회의 외부 사역들에 대해서는 연합이 축소되어야 마땅하고 주변 교회와 단체들은 오정현 목사와 그 교회가 건강해졌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연합을 유예하는 것이다. 일례로 CTK 발행인을 교체하는 것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은 이 이야기는 사랑의교회에서 나오는 돈을 받지 않겠다는 얘기와 같다. 그 규모가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감수할 다른 대형교회가 필요하다. '배제'에는 '비용'이 따른다. 오정현 목사의 눈물의 사죄가 진심이라면 나또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초반에 언급한 두 가지의 껄끄러움(논문 표절이 경미하다는 해명과 사임을 종용받았다는 고발)이 여전히 내겐 그 분의 사죄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 결국 개교회도 그를 용서하고 복음주의권도 그와 사랑의교회를 방기할 것이다. 이번에도 내부 고발자만 축출되고 반대의 목소리만 유명무실해질 것 같다. 내 신앙의 본산, 한국 복음주의의 현실이 그렇다.
2013/02/13 22:47 2013/02/13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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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독교인들이 육아나 운전, 인간관계 등 일상적으로 겪는 이야기들을 적다가 마지막에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로 환원 혹은 유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아이의 어리석음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로 환원하거나 새 한마리를 살리기 위해 많은 비용이 드는 대목은 죄많은 인간 하나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한 존재가 그들의 죄를 위해 값진 희생을 치르는, 보다 고차원적인 '유비'(analogy)가 된다.

나는 모든 일상을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공의, 정의로 환원하는 신심을 추호도 의심하지는 않으나 사실 자주 이런 글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신심으로 도약하는 모든 '개별 이야기'는 퇴색되기 때문이다. 본론은, 더 고차원적인 의미는, 더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이런 너저분한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다수가 설교욕구가 있다. 어떤 사건의 의미를 신심에 비추어 조명하고 그것을 설파하고자 한다. 그 결과로 그는 신심도 검증받고 대중의 구루 지위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들이 점점 현실의 디테일한 일상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일상을 설교거리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 내 작은 일상의 깨달음을 신심으로 환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요즘엔 챙겨서 그런 욕구를 억제한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 신앙은 어떤 고차원적인 의미로 유비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 남루한 일상 자체를 더도 덜도 말고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3/02/06 22:35 2013/02/06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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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정현 목사와 작금의 사랑의교회 문제의 모든 책임이 원래 옥한흠 목사에게 있었다는 논지에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시련과 문제가 있을 때 부수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존의 틀을 유지하면서 변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신사참배 문제로 나뉜 한국의 기독교 교파나, 흔히 로이드존스와 존스토트의 WCC에 대한 입장 차로 구분되는 복음주의의 분열에서 어느 쪽을 선택했다고 해서 반대쪽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에 나는 반대한다.

사랑의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해 옥한흠 목사는 교회로 온 성도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교회를 몇 개로 쪼갤 마음을 먹지 못했다. 그것도 어찌보면 성도들에 대한 그의 애정과 걱정에 기인했다.

그는 일찍 은퇴했고 대형교회 세습 문제를 조기에 털기 위해 일찍 오정현 목사를 세웠고, 오정현 목사가 후임이 된 후 교회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정현 목사의 과는 모두 자기가 그 원인이라고 서슴없이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 나는 무엇보다 그의 '애티튜드'를 본다. 많은 사람들이 말과 글과 논리와 당위로서 어떤 대상을 비판하지만 그 사람이 되어보고 그 사람의 고충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어떤 삿대질이 나는 싫다. 그가 교회를 향해 분투하고 괴로워했던 많은 시간들을 그저 '어쨌거나 그의 책임'으로 돌리는 그 명료함이 싫다.

내가 기독교를 진리로 믿으면서까지 냉정한 결과주의적 목소리를 받아들여야 하나. 결과적으로 옥한흠과 오정현이 사랑의교회를 망치지 않았냐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는 좌절한다. 정녕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저, 나는 그 두 사람의 애티튜드가 극단적으로 갈렸다고만 말하고 싶다.

결과적으로 내 삶도 별볼일 없이 끝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신앙적으로 많은 실패와 실망감을 사람들에게 안겨줄 것이다. 굳이 내 삶을 스토킹하지 않아도 된다. 몸부림치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쉽게 결과만을 재확인시켜줄 많은 이들과 나는 삶을 공유하고 싶지 않다. 부디 내 곁에서도 떠나주길 바란다.
2013/02/04 22:26 2013/02/04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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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가장 절실한 건 늦잠이다. 하지만 성하가 날 가만놔두지 않는다. 애들의 심장이나 뇌에 알람시계가 들어가 있는지 7시반이면 어김없이 척척 일어나서 나를 깨운다. "성하야 아직 아침이 아니야. 좀더 자자"라고 구라를 쳐보지만 방안 어두운 커텐의 틈새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아빠 거짓말 하지마. 밖은 밝거든!!!"

대학생 때부터 직장 초반까지 나는 크고 작은 교계 이슈에 참여했다. 특히 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 문제로 몇몇 지방교회와 광림교회, 소망교회, CCC 선교단체의 시위도 나가고 게시판에서 논쟁도 많이 했다. 처음엔 학생들만 집에서 만든 피켓을 들고 나갔다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기윤실이 합류했고 그것을 가지고도 왈가왈부하다가 기윤실에서 교회개혁실천연대가 떨어져나왔다.

다시 지난 날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것도, 나도 한때 나가서 피켓도 들었노라 생색을 내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니다. 내 '명함'으로는 썩소를 날릴 법한 더 훌륭한 분들이 주변에 넘쳐난다. 정작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이거다. 세습반대 이슈는 크게 번졌고 우리도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내가 참여했던 모든 단체의 세습이 이루어졌다. 내 생각에 사랑의교회도 정상적으로 새로운 교회당을 지을 것 같다.

레미제라블을 보며 가장 나를 자극했던 인물은 자베르다. 그도 낮은 신분 출신이며 나름 신앙심 돋는 인물이다. (내 입장에서는) 황당하게도 신의 이름으로 혁명 세력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한다. 결국 혁명을 꿈꾸던 청년 시위대는 모두 죽는다. 시민들은 잠시 그들의 선동에 마음이 동하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 집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혁명이 일상과 만나면 동력을 잃는다.

아마도 자베르는 수많은 혁명 세력을 경험하고 그들의 논리나 그들의 비참한 삶의 실체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베르는 한번도 그들의 진영논리에 동화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직업이 신이 주신 소명인 것처럼 움직였다. 아우슈비치에서 유대인을 불태운 교도관들, 이라크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미군병,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이스라엘 군인들, 세습이나 건축을 추진하는 교회들의 교역자들.

세상에서 거대화된 조직, 위계질서가 갖춰져 있는, 마치 컨베이어벨트 위를 흘러가는 부품들처럼 자동으로 흘러가는 프로세스를 갖는 많은 거대 구조는 쉽게 '악'으로 향한다. 그것이 '악'한 이유는 언제나 소수약자를 무시하는 방향의 효율성을 내부적 가치로 삼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소수이자 약자를 편드는 이들의 목소리는 이미 효율적으로 잘 굴러가는 구조 속에 묻히기 쉽다. '구조'는 언제나 '개별 양심'을 이긴다. 내 짧은 경험이 그렇다.

레미제라블이 고전이 된 건 은혜를 배신하고 도둑질한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쥐어주는 한 신부의 마음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만들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떤 자기합리화나 홍보, 미사여구 등을 붙이지 않아도 타인의 마음을 녹인다. 신부의 사랑이 장발장에게, 장발장의 사랑이 자베르에게 전달되고 자베르는 자기 가치관의 흔들림을 참지 못하고 자살한다.

내가 관심있게 본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혁명의 실존적 주체는 신부요, 장발장의 값없는 용서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바꾸어 말한다면 그만큼 진영의 논리, 혁명의 저항으로는 악한 구조를 넘어서기가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대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가 체 게바라같은 급진적인 정서를 갖지 못한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인간적으로 신부의 용서는 보편 인간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장발장은 감옥으로 돌아가고 자베르는 혁명을 꿈꾸는 청년들 손에 피값을 치루어야 한다. 그게 정의이고 개혁이고 법치이다. 그것을 거스르는 레미제라블은 불편한 정서 속에 사람의 마음을 들쑤셔놓는다. (물론 소설의 배경에는 가난, 사회계급, 로맨스 등의 문제가 얽혀있지만) 눈을 크게 뜨고 굵은 라인으로 바라보는 이 소설의 키워드는 '불편할 정도로 값없는 용서'다. 끈질기게 나를 쫓던 적군마저도 돌이키게 만드는.

가끔 성하에게 구라를 치면서도 나는 커텐의 작은 틈을 비집고 새어나온 햇빛을 감지한다. 어둠을 몰아내고자 애쓰지 않아도 조그만 구멍으로 빛이 틈을 내면 어둠은 반전된다. 나는 일어나야 하고 아침밥을 준비하고 성하와 재밌는 아침시간을 보내야한다. 내가 아침이 아니라고 우겨도 소용이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인생에도 참 많은 자베르들이 있었다. 그들을 두둔하거나 그들이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나에게 적이었던, 나를 괴롭혔던 개인이나 큰 구조속의 무리들에게 나는 신부나 장발장 같은 존재였던가. 자베르가 자베르인 건 내가 그리스도의 빛이 아니기 때문은 아니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4-15)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요일2:8-11)
2013/01/29 22:13 2013/01/29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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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페친분들의 포스팅을 받지 않고 있지만 가끔 다른 페친의 좋아요로 그 분들의 포스팅이 쓰리쿠션 찍고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도 교계에 스타급 목사님의 포스팅이 그렇게 내 담벼락에 떠서 할 수 없이 읽었다... 페친의 상당수가 목사님이라 자주 지적(질)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목사님들의 포스팅을 보면 그분들의 '욕망' 같은 게 읽힌다. 이른바 설교 욕구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나름의 정체성, 자신감 같은 것도 생겨서인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부분에 있어 거침이 없다.

 

흥미로운 건 글의 도입에 자신에 대한 약점 내지는 험담을 툭 던지는 게 상례인데 중반 이후를 읽다보면 그 약점에 대한 고백은 장대한 피날레를 위한 하나의 예화, 혹은 에피타이저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난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훌륭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다...라는 내러티브가 사례들을 바꿔가며 반복된다.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것이 흡사 미국드라마의 시즌2, 3로의 진화를 보듯 흥미진진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그런 글들을 보면 조금 씁쓸하다.

 

어림잡아 개신교인 반, 비개신교인 반의 친구를 가진 내 입장에서 그런 글들이 반대쪽 분들에게 어떻게 읽힐까를 생각하면 좀 오글거릴 때가 있다. 기온차가 너무 크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 구획(교계내) 안에서는 좋아요 작렬이니... 그 프레임이 깨질리는 없겠으나, 내가 기대하는 포스팅은 좀 다른 것들이다. 페북의 특성상 좋아요를 유도하는 글들이 요구된다. 목사님들은 된장남처럼 자기가 입고 먹고 마시는 것들을 자랑하지는 못하니 주로 자신의 거룩한 생각, 행실, 선행사례들을 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유명 목사님들의 회개거리, 실수, 분노, 망가짐,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고백들을 읽은 적이 별로 없다. 하다못해 자신이 풀 수 없는 문제를 놓고 '하등한' 일반 성도들에게 기도부탁하는 글도 본 적이 없다. 요즘은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이 극도의 갈등을 겪는 게 적나라하게 표현되는데(배트맨은 허리까지 부러지지 않던가) 우리네 유명 목사님들은 죄지을 틈도 없이 성공만 하시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초류향이나 레밍턴 스틸같은 실력자(?)이셨는지 전혀 일상사에 어려움이 없이 성도들에게 모범 사례들만 설파하신다.

 

아무래도 페북이, 목회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부족해요', '실패했어요' 같은 버튼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2013년 1월 3일

2013/01/10 21:58 2013/01/10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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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년전 식민지 땅에서 태어난 예수.
나면서부터 제국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갈릴리라는 변두리 시골땅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
제국에 대항하는 자들과 제국에 동조하는 자들 사이에서
그 출신 성분이나 성별, 진영을 가르지 않고
제자를 삼아 새 하늘과 새 땅의 진리를 선포한 사람.
 
함께 이동 중에도 걸음을 멈추고 
질병 가운데 고통받는
 이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인간 대접 받지 못하던 아이들을 가까이 두며
모든 사람들이 아이들 같이 되야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던 순수한 사람.
누구보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위로한 사람.
 
나는 그가 단 하나의 희망이라고 믿는 기독교인이다.
 
그를 희망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기득권이 되고
여성을 비하하고 아이들과 노인들의 복지를
 
사회적 비용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사회 개독교의 신자다.
예수의 길. 그 순수한 청년이 걸은 길을
걷지 않고 
성경을 읽되 이해조차 못한 채
말로만 고상하고 예배시간에만 헌신된 한국 교회.
이미 그리스도가 잊혀진 그리스도교의 부끄러운 신자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 역설 속에 올해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당신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회개한다고.
당신의 교회가 속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시민으로 회개한다고.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당신의 도를 우리가 다시 몸으로 받게 해달라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
제국의 힘에 저항하거나 동조하던 이스라엘 시민들처럼
우리도 세상의 큰 흐름에 때로 저항하고 때로 동조한다.
역사가 때로 우리의 편인 것 같은 날도 있고
적의 편인 것 같은 날도 있다.
하지만 역사가 우리편이라고 생각했던 날들조차
어두운 곳에서는 흐느끼는 슬픔이 있었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뻐하는 나는 예수의 길을 믿는다.
현대의 많은 불가지론자들, 무신론자들 사이에서도
나는 그가 단 하나의 희망이라고 믿는 기독교인이다.
 
이천년전 제국의 압제 속에 중동땅에서 태어난 예수란 청년의 길.
그 시작을 기념하며.
우리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2012년 12월 25일
2012/12/25 21:58 2012/12/2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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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상과의 인연은 건 대학교 휴학 중에 우연찮게 기고한 글로 인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십대 초반이었던 나는 대학생을 필자로 대접해주는 분위기에 자뻑하여 잡지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는데 깊이 들어간 복상이라는 잡지는 당시 위상과는 달리 거의 폐간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매달 발송 도우미를 모집하는가 하면 기자들 없이 편집장이 교정 교열을 일일이 보고 과장 한 분이 영업과 기타 모든 행정업무를 보는 식이었다. 매월 적자가 누적되어 급여 및 디자인 업체에 비용 지불이 안 된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갔다. 당시에 독자모임을 만들었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후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 때 편집부의 멤버들이 모두 물러났고 혼란스럽던 재정문제를 뉴스앤조이가 떠 안았다. 뉴스앤조이는 복상이라는 잡지 자체를 살리려는 생각 하나로 뛰어들었지만 괜히 복상을 탐낸다는 오명을 얻었고, 복상 또한 그렇게까지 생명을 연장해야겠냐는 비난도 받았다.
 
이후로 나는 다소 거리를 두고 이 매체를 지켜봤다. 잡지 자체가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부실하던' 시절도 있었다. 작년 초엔가 박총형이 귀국하여 복상 편집장으로 일하게 됐고 나는 그의 권유로 편집위원으로 합류했다. 거지꼴 같은 복상이지만 그 와중에도 오랜 생명력과 좋은 컨텐츠로 말미암아 한국의 크리스채너티투데이급으로 분류하는 이 잡지의 편집위원이 된 것이 한편으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편집부의 열악한 상황으로 박총형은 근무중 병을 얻어 편집장 직을 내려놓았다. 대체로 내부 분위기는 잡지를 살리자는 의견이었고 사실상 편집위원 중 존재감이 없는 나는 박총형의 사임에 함께 책임, 내지는 입장을 정하자는 의도로 편집위원직을 내려 놓았다.
 
그 이후로 복상은 힘들게 운영되다가 최근 새 편집장을 영입했고 10월호를 휴간하고 다시 정상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정말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때때로 나는 복상이 참 '악마같은 잡지'란 생각이 든다. 잡지와 관련된 사람들을 괴롭히고 상처를 주면서 정작 잡지의 명성은 커가는 느낌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복상을 대할 때 극단적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잡지의 생존을 걱정하며 달려들었다가 불에 덴 것처럼 아파서 멀어지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채 이 잡지 주변을 기웃거린다.

이 잡지를 통해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또한, 원치않게 그 소중한 관계가 틀어지는 걸 지켜봐야했다. 십여년 동안 반복되는 이 뒤틀린 관계를 생각할 때면 이제는 현기증으로 물리적인 구토가 날 지경이다. 오늘 아침에는 영화 '서편제'가 생각났다. 이 영화에서 판소리꾼은 자기 딸의 득음을 위해 일부러 눈을 멀게 만든다. 오빠도 떠나보낸다. 그 고통 속에서 그 딸은 판소리의 대가로 성장하고 그 목소리는 어떤 판소리꾼보다 깊어진다.

물론 복상이란 잡지가 일부러 연관된 사람들에게 고통과 분열을 안겨주는 건 아니겠지만, 어떤 유의미한 목적을 위해 구성원들의 상처와 시련으로 '그 대상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복상과 서편제는 닮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자주 책임 운운하며 이 조직을 떠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선 송구스럽고 백번 사과하고 싶다.

아울러 바라기는. 나는 복상이 누군가가 바라듯 탁월하고 풍성한 컨텐츠가 넘치는 잡지가 되길 기대하지는 않게 되었다. 차라리 사람들이 "도대체 이 쓰레기 같은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맨날 즐거워 보이는거지?"라는 소문이 무성한 잡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 소박한 바람이다.

2012/09/09 21:51 2012/09/09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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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문 선교사님과 대화 중에 김선교사님이 그런 말을 했다. 귀국한 후로 주변 사람(기독교배경)의 대화의 절반은 못알아듣겠다고. 이유인즉슨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할 때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책들과 저자들의 이름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저자명과 서명이 어떤 기호나 암호처럼 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김선교사님은 그간 본인이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음을 반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친 외국 저자들의 이름이 난무하는 대화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살짝 드러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우기도 쉽잖은 미쿡, 유럽 저자들의 책을 읽으면 사실 그 핵심 주장들이 그리 낯설지 않은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풀어내기 보다는 저자명, 서명으로 암호화한다는 말이다. 결국 알맹이는 단순하고도 일반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임에도 많은 대화에서 그 담론을 암호키 주고받더라는 거다.

나는 크게 공감했다. (아마도 원저자, 원저서명을 주고받는 이런 트렌드는 레퍼런스를 장황하게 밝히는 미국학풍을 반영한 것이리라.) 대화를 나누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우리에게 시급한 건 좋은 저자의 핵심 개념, 탁월한 상상력을 캐치하는 것이고 그것을 한국사회에 중첩시켜놓고 실천, 참여(앙가주망)의 방향성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미 내 것이 된 개념의 레퍼런스명들을 장황하게 외우고 그것을 상대에게 전송하는 키값(key value)처럼 주고받을 이유는 없지 않나...하는 거다.

불현듯, 중고등학교 때 사건의 의미보다는 연도나 위인의 이름을 외우던 역사시험 시간이 떠올랐다.

2012/08/20 21:47 2012/08/20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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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가끔씩 자신 혹은 주변에서 일어난 성공이나 다행스러운 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하는 분들을 본다. 당연하다. 우리는 범사에 창조주에게 감사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오늘 먹은 맛있었던 식사나 만났던 친구와의 행복했던 대화, 자녀의 건강, 나아가 명문대를 입학하거나 큰 돈을 벌거나 치명적인 질병에서 낫거나 가족에게 경사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그것이 성도에게 혹은 대중에게 드러내 놓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만한 일인지 따져볼 필요도 있는 부분이다. 누군가의 자녀는 명문대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다면 명문대에 낙방한 부모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없다. 열차 사고나 공공장소에서의 위협에서 누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만 누군가는 그냥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렇듯 그 성공이나 구원이 신자들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 현실 앞에 우리는 특별히 우리에게 임한 특혜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면 누군가는 배제됨의 저주를 하나님께 돌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렇게 되면 고전적인 욥의 문제, 나의 고통과 나의 실패는 모두 나의 죄성에 기인하는 것인가. '나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타 성도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은 왜 나에게는 임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된다.

사실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러 왔지 불평등한 상황 가운데 특혜받는 성도를 표지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신은 모든 사람을 예수의 구원 안에 두고자 하는 종교다. 이렇듯 불행히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많은 사례들은 '범사 감사'의 특수 사례를 넘어 기독교의 본질을 뒤흔든다. 또한 실제로 그 영광에 가려진 성도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므로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다. 동일하게 인간은 주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타인을 더 좌절하게 만드는 감정 표현을 절제할 필요도 있다.
 
2012/07/24 18:41 2012/07/24 1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