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상황] 사랑의 목적은 사람 '그 자체'입니다 (2000. 8.)
/ 김용주
한 공동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몇 개의 작은 성경 공부 모임이 있었고, 각자의 모임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이들이 따로 모여서 함께 공부도 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누고 기도도 하는, 그런 모임이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나누는 이야기들 중에서는 모임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 날은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는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타인에게 먼저 상처주는 말을 하여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의 행동으로 인해 모임의 몇몇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모임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지 않게 되었고 어느새 그 자신도 서서히 모임에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날 모임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연락을 하여 다시 그가 모임에 나오게 하기로 어렵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났습니다. 그 사람은 갑자기 모임의 사람들에게 많은 연락을 받게 되었고, 그 모임의 사람들의 격려와 함께 그가 자신에게도 참 소중한 사람이라는 고백들을 듣게 되자 그의 마음은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연락을 해 준 사람들이 너무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이지요. 그는 모임에 있는 다수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가치있는 대접을 받고 있는 것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은 얼마 후 다시 모임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다시 모임에 나오게 되었고, 사람들은 다시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애정어린 말들을 하던 사람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없게 되자 그 사람은 당황하였습니다. 모임을 떠나 있었을 때 그렇게 애타게 자신을 기다렸던 사람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얼마 후에 그는 모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행동들은, 자신이 없을 때 그 모임에서 결정했던 하나의 '사안'이었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목적은 '그 사람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아니라 '그 모임에 나오게 하는 것' 자체였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더 큰 좌절감과 상처를 가지고 모임에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신영복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진실되지 않은 위로는 또다른 절망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의 영혼을, 그 영혼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조직의 논리만을 앞세운 공동체는 종교라는 굴레를 넘어서서 보더라도 하나의 큰 재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공동체에서 동료로부터 그런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듣곤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나를 끼워 주는 것 같아. 나를 진정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곳에 속해있기 때문에 대접해 주는 것처럼 느껴져. 그래서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아."
오래 전에 다니던 공장에서는 한 친구가 손을 다쳤었습니다. 그 때 그 공장의 관리부장이라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빨리 나아야지. 자네가 일을 비우면 공장이 얼마나 손해를 보는데. 오래 쉴 거면 다른 사람을 구할테니 왠만하면 나오라고."
바로 나 자신의 주변에서도 그런 모습들을 발견합니다. 나에게 효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가까이 가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며, 내가 속한 하나의 모임에서도 그 모임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한 '수단'으로 동료들을 대하고 있는, 정작 진정한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버린 저의 인간 관계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아가 그러한 그릇된 사고의 시작이, 사람을 단순한 효용적 잣대로만 평가하여 결국에는 장애인을 무시하고 소외된 이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그릇된 사회 구조를 와해시키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그런 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 잘못된 밑거름이 되리라는 생각에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창조주가 가치있게 창조하신 한 사람, 그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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