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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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스타급 연예인으로 활약 중인 이들의 경험담을 종합하면,
연예인 선발 오디션 현장에선 간절한 소망과 준비가 많았던
당사자는 떨어지고 무심결에 그들을 따라나선 친구나 동생이 발탁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지요.

제 생각에 머피의 법칙같은 이 희안한 현상의 핵심은,
인공적이고 의도적인 꾸밈보다 있는 그대로의 ‘무심함’이 더 강력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극도로 공을 들인 신부 화장이 그 사람의 가장 매력적인 모습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처럼요.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띠동갑 정도 되는 연하남의 구애가 심심치 않은
한 여성 화가는 그 비결을 묻는 주위의 부러운 시선에 ‘무심함’ 때문일
것이라고 자체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그 연하남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적극적인 구애가 있다는 거지요.

때론,
열정조차도 없는 고요한 상태에서 자신의 심리적 속살이 무심하게
드러날 때 자기매력이나 자기 에너지가 가장 파워풀해 집니다.
아무 거칠 것 없이 활짝 기지개를 켜고 있는 봄의 산과 들이 어디에도
견줄 수 없을만큼 설레이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처럼요.

그렇게 본다면,
심리적 속살을 가로막는 지나친 몰입이나 욕망 혹은 집착이
문득 문득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지도요.
2009/03/30 22:47 2009/03/30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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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에서는 내담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침묵을 하면
침묵 직전의 이야기에 그 사람의 핵심 메시지가 담겨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합니다.

둘 이상이 모인 자리에서 침묵이 흐를 때 가장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침묵의 불안을 견디는 인내지수가 제일 낮은 사람입니다.
침묵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일종의 심리적 능력입니다.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침묵이 없는 이야기는 무의미한 경우가 많습니다.

심리적 휴지기(休止期)를 견디지 못하는 삶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적절한 휴지기를 삶이 정체된 것으로 착각해
침묵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필요하게 신발끈을 조이다 보면 괜한 에너지 소모가
많을 수밖에요.

침묵 직전의 이야기에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듯이
심리적 휴지기 뒤에는 반드시 삶의 고갱이가 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2009/03/13 22:47 2009/03/13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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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다른 이름] - 시에틀 추장의 글


워싱턴의 얼굴 흰 대추장이 우리에게 우정의 표시와 안부를 전해왔다. 무척이나 친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는 우리의 우정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의 부족은 숫자가 많다. 그들은 초원을 뒤덮은 풀과 같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적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에 드문드문 서 있는 들판의 나무들과 같다.

위대하고 훌륭한 백인 추장은 아울러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당신의 제안에 대해 심사숙고 할 것이다. 나의 부족은 물을 것이다. 백인 추장이 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로서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우리가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 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우리로부터 사들이겠단 말인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려있는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 부족의 기억과 가슴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에서 솟아오르는 수액은 우리들 붉은 얼굴 가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우리의 누이고, 순록과 말과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강의 물결과 초원의 꽃들의 수액, 조랑말의 땀과 인간의 땀은 모두 하나이며 모두가 같은 부족, 우리의 부족이다.
따라서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의 땅을 사겠다고 한 제의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우리의 누이와 형제와 우리 자신을 팔아 넘기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문명인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함을 안다. 그에게는 우리의 땅 조각이 다른 땅 조각들과 똑같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땅을 손에 넣기 위해 밤중에 걸어오는 낯선 자이다. 대지는 그의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는 대지를 정복한 다음에 그곳으로 이주를 한다. 그는 대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다. 어머니인 대지와 맏형인 하늘을 물건처럼 취급한다. 그의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 치워 사막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 우리는 당신의 방식과 다르다. 우리의 대지를 팔아야 한다면, 그 공기 또한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불어 보내는 것이 공기이며, 세상의 모든 아침마다 우리가 맞이하는 것이 그 공기이다. 바람은 나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과 마지막 숨을 주었다. 그 바람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생명을 불어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묶여 있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이들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사람이 삶의 거미집을 짜 나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 역시 한 오라기의 거미줄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거미집에 거하는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아온다.
당신의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조상들의 육신과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대지를 존중하도록 해야 한다. 대지가 풍요로울 때 우리의 삶도 풍요롭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르치듯이, 당신도 당신의 아이들에게 대지가 우리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대지에게 가해지는 일이 곧 대지의 아이들에게 가해진다. 사람이 땅을 파헤치면 곧 그들 자신의 삶도 파헤치는 것이 된다.
이것을 우리는 안다. 대지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며, 인간이 오히려 대지의 소유물이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머지않아 당신의 부족이 홍수 뒤의 강물처럼 이 대지를 온통 뒤덮을 것이다. 반면에 나와 내 부족은 썰물과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이러한 운명은 얼굴 붉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신비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스라한 별을 지켜보듯이 우리의 소멸해 가는 운명을 지켜볼 뿐이다.
얼굴 흰 사람들의 꿈을 우리가 알 수 있으려면 좋으련만. 그들이 마음 속으로 어떤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으며, 긴 겨울밤에 자기의 자식들에게 그려 보이는 내일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우리가 알 수 있다면...하지만 우리는 야만인들이고, 문명인들의 꿈은 우리에게 가리워져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며, 얼굴 흰 형제들에게 그 책임을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며 우리들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니까.
당신의 부족과 나의 부족은 기원도 다르고 운명도 다르다. 이 두 부족 사이에는 공통점이란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는 우리 조상들의 유해가 더없이 성스러우며, 그들이 휴식하고 있는 장소는 신성한 곳으로 모셔진다. 그러나 당신들은 당신 조상의 무덤 위를 마구 돌아다니며, 그럼에도 후회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들의 조상은 무덤의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자기가 난 이 땅과 당신들을 사랑하기를 그치고 먼 별들 아래를 헤맨다. 그리고는 금방 잊혀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의 죽은 혼들은 자기를 태어나게 한 아름다운 세계를 결코 잊지 않는다. 육체를 떠나서도 구불거리는 강과 숨은 골짜기, 이 거대한 산과 호수들을 변함없이 사랑한다. 저마다 외로운 사냥꾼들인 살아있는 우리에게 부드러운 애정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으며, 그래서 자신들이 가 있는 저 '행복한 사냥터'로부터 돌아와 종종 우리를 방문하고 위로하고 길을 인도하는 것이다.
밤과 낮은 한 집에 살 수 없다. 얼굴 붉은 사람들은 떠오르는 아침 녘 해에 새벽 안개가 달아나듯이 문명인들이 다가오면 뒤로 달아날 수 밖에 없다. 남은 날들을 어디에서 보내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남은 날들도 많지 않으니까.

우리에 대한 당신의 제안을 공정한 것이라고 나는 여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부족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당신이 제공하는 인디언 거주지역 안으로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얼굴 흰 대추장의 명령을 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대자연의 목소리라 여기고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다.

몇 번의 달이 더 기울고, 몇 차례의 겨울을 더 넘기고 나면 한때 이 드넓은 대지 위를 뛰어다니던, 한때 위대한 정령의 보호를 받으며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실던 힘센 부족의 아들들은 모두 무덤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한때는 당신들보다 더 강하고 더 희망에 넘쳐있던 한 부족의 아들들이.

하지만 내가 왜 내 부족의 운명을 슬피 여길 것인가? 언제나 그래왔듯이 한 부족이 가면 한 부족이 오고, 한 국가가 일어나면 한 국가는 물러난다. 바다의 파도와 같은 것이다. 한 차례의 눈물, 한 번의 타나마우스, 즉 한 번의  만가(輓歌)와 더불어 그들은 우리의 눈앞에서 영원히 떠나간다. 그것이 자연의 질서이다.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신의 부족이 쓰러질 날이 지금으로선 아득히 먼 훗날의 일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날은 틀림없이 온다.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문명인들이라 해도 공통된 운명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한 형제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제안에 우리는 깊이 생각할 것이며, 결정이 나는 대로 알려 주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가지 조건을 제시하는 바이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당신에게 팔더라도 항시 자유롭게 우리 조상의 무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친구와 아이들의 무덤도 마찬가지다.

우리 부족에게는 이 대지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신성한 것이다. 모든 언덕빼기, 모든 골짜기, 모든 평야와 숲덤불이 우리에게는 아득히 사라져간 날들의 슬프고 기뻤던 사건들을 간직하고 있다. 고즈넉한 해안을 따라 태양 아래 죽은 듯이 입다물고 있는 바위들조차도 우리 부족의 삶과 연결된 사건들에 대한 추억으로 몸을 떨고 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이 흙도 우리 부족의 발이 닿으면 훨씬 더 다정하게 반응한다. 이 흙은 우리 조상들의 뼈로 이루어졌고, 당신들의 구두 신은 발보다 우리의 맨발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짧은 계절 동안 이곳에서 삶을 누렸던 흩어진 전사들과 그리운 어머니들, 마음씨 좋은 아줌마들은 아직도 이곳의 장엄한 침묵을 사랑한다. 설령 최후의 얼굴 붉은 사람이 사라져서 우리 부족에 대한 기억이 백인들 사이에 하나의 신화로 남을지라도 이 해안은 우리 부족의 보이지 않는 혼들로 가득할 것이다. 따라서 먼 훗날 당신의 아이들이 황야에서, 슈퍼마켓에서, 고속도로 위에서 또는 고요한 삼림 속에서 자기가 혼자라고 느낄지라도 결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우리 부족의 보이지 않는 혼들이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므로.

이 모든 대지 위에 자기 혼자라고 할 만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마을과 도시의 거리들이 밤이 되어 고요해지고 당신은 황량하다고 느낄지 몰라도 아직도 이 아름다운 땅을 사랑하는 우리 부족의 숨결이 모든 곳에 가득하다. 문명인들은 결코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죽은 자라 해서 아무런 힘을 갖지 않은 것이 아니므로, 당신은 우리 부족에게 공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그들은 다만 세상의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내가 '죽은 자'라고 말했던가? 그렇지 않다.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2009/01/10 20:11 2009/01/1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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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za and the New Year”
"가자 지구와 신년"
By Daniel Barenboim
다니엘 바렌보임

31 December 2008

I have just three wishes for the coming year. The first is for the Israeli government to realize once and for all that the Middle Eastern conflict cannot be solved by military means. The second is for Hamas to realize that its interests are not served by violence, and that Israel is here to stay; and the third is for the world to acknowledge the fact that this conflict is unlike any other in history. It is uniquely intricate and sensitive; it is a human conflict between two peoples who are both deeply convinced of their right to live on the same very small piece of land. This is why neither diplomacy nor military action can resolve this conflict.
저는 다가오는 새해에 단 세가지의 소망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수라엘 정부가 단 한번만이라도 군사적 수단으로 중동의 갈등을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마스 진영이 그들의 관심사가 폭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이스라엘은 그곳에 존속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길 바랍니다. 세번째는 온세계가 이 갈등은 역사적으로 다른 갈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길 바랍니다. 이 문제는 유례없이 복잡하고 민감합니다. 하나의 아주 작은 땅에 살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깊이 확신하는 두 민족의 인간적 갈등입니다. 그래서 외교적이나 군사적 행위가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The developments of the past few days are extremely worrisome to me for several reasons of both humane and political natures. While it is self-evident that Israel has the right to defend itself, that it cannot and should not tolerate continuing missile attacks on its citizens, the Israeli army’s relentless and brutal bombardment of Gaza has raised a few important questions in my mind.
저는 지난 며칠간 일어난 일들로 인해 인도적 정치적인 여러가지 이유들로 극심한 우려가 생깁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방어할 권리가 있고 자국민에 대한 연이은 미사일 공격을 참을 수도 참아서도 안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이스라엘 군의 가자지구에 대한 무자비하고 잔혹한 폭격은 제 맘속에 몇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야기시킵니다.

    The first question is whether the Israeli government has the right to make all Palestinians culpable for the actions of Hamas. Is the entire population of Gaza to be held responsible for the sins of a terrorist organization? We, the Jewish people, should know and feel even more acutely than other populations that the murder of innocent civilians is inhumane and unacceptable. The Israeli military has very weakly argued that the Gaza strip is so overpopulated that it is impossible to avoid civilian deaths during their operations.
첫번째 질문은 이스라엘 정부가 하마스의 활동에 대해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이 유죄라고 할 권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자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한 테러러스트 조직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겁니까? 우리 유대인들은 선량한 시민들을 살인하는 것이 비인도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다른 민족들보다 더 민감하게 알아야하고 느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군당국은 가자 지구가 인구 과밀이라 자신들의 군사행동으로 야기되는 민간인들의 사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변명을 합니다.

    The weakness of this argument leads me to my next set of questions: if civilian deaths are unavoidable, what is the purpose of the bombardment? What, if any, is the logic behind the violence, and what does Israel hope to achieve through it? If the aim of the operation is to destroy Hamas, then the most important question to ask is whether this is an attainable goal. If not, then the whole attack is not only cruel, barbaric, and reprehensible, it is also senseless.
이 변명은 저의 다음 질문으로 이끕니다. 만약 민간인 사상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폭격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논리가 설령 있다고 한다면 폭력의 배후 논리는 무엇이고 이스라엘이 그것을 통해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가요? 작전의 목표가 하마스를 괴멸하는 것이라면, 물어볼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게 실현 가능한 목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공격은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비난받아야할 뿐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If on the other hand it really is possible to destroy Hamas through military operations, how does Israel envision the reaction in Gaza once this has been accomplished? One and a half million Gaza residents will not suddenly go down on their knees in reverence of the power of the Israeli army. We must not forget that before Hamas was elected by the Palestinians, it was encouraged by Israel as a tactic to weaken [Yasser] Arafat. Israel’s recent history leads me to believe that if Hamas is bombarded out of existence, another group will most certainly take its place, a group that would be more radical, more violent, and more full of hatred toward Israel than Hamas.
반면에 군사작전을 통해 하마스를 괴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괴멸후의 가자에서의 반응은 어떠리라 보는겁니까? 150만명의 가자 주민들은 이스라엘 군대의 힘에 존경을 보내며 갑자기 무릅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기 전에 아라파트를 약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하마스가 선출 되도록 하는 것이 [이스라엘에 의해] 권장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근 역사를 볼 때 하마스가 폭격으로 괴멸된다면 또 다른 그룹이 그 자리를 차지 할 것이라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 그룹은 어쩌면 더 극단적이고 더 폭력적이며 하마스보다 훨씬 더 이스라엘을 증오할 지도 모릅니다.

    Israel cannot afford a military defeat for fear of disappearing from the map, yet history has proven that every military victory has always left Israel in a weaker political position than before because of the emergence of radical groups. I do not underestimate the difficulty of the decisions the Israeli government must make every day, nor do I underestimate the importance of Israel’s security. Nevertheless, I stand behind my conviction that the only truly viable plan for long-term security in Israel is to gain the acceptance of all of our neighbors. I wish for a return in the year 2009 of the famous intelligence always ascribed to the Jews. I wish for a return of King Solomon’s wisdom to the decision-makers in Israel that they might use it to understand that Palestinians and Israelis have equal human rights.
이스라엘은 지도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두려움때문에 군사적 패배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군사적 승리를 거둘 때 마다 이전보다 정치적 입지가 더 약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급진적인 그룹들의 출현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정부가 매일마다 해야 할 결정들의 어려움이나 이스라엘의 안보의 중요성에 대해 과소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장기적 안보에 대해 진정으로 유일하게 가능한 계획은 인접 국가들로부터 용인을 얻어내는 것이라는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2009년에는 유태인들이 물려받은 한 유명한 지혜의 귀환을 희망합니다. 이스라엘의 위정자들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동등한 인권을 갖고 있음을 이해하는데 소용이 있을지도 모를 솔로몬왕의 지혜의 귀환을 소망합니다.

    Palestinian violence torments Israelis and does not serve the Palestinian cause; Israeli military retaliation is inhuman, immoral, and does not guarantee Israel’s security. As I have said before, the destinies of the two peoples are inextricably linked, obliging them to live side by side. They have to decide whether they want to make of this a blessing or a curse.
팔레스타인인들의 폭력은 이스라엘인들에게 극심한 성처를 주고 또한 자신들을 정당화 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군의 복수는 비인도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자신들의 안보를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제가 전에도 말했던 것과 같이 이 두 민족의 운명들은 나란히 옆에서 살아가도록 협조해야만 하도록 풀리지 않게 얽혀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축복일지 저주로 만들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Vienna — 31 December 2008


**출처: 유철닷컴 (포스팅 by 엄이재윤님)
2009/01/08 22:42 2009/01/08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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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를 연구한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개미들 중 직접 노동에 종사하는 비율은 1/3정도이고,
나머지 2/3은 위기 관리를 위한 예비자원이라고 한다.

또, 하루 중 개미의 노동시간은
4시간 정도로 인간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배짱이는 원래부터 겨울 이전에 생을 마감하는 곤충으로,
수컷은 여름에 열심히 노래를 불러 암컷을 유혹하고
짝짓기에 성공해야 자손을 남길 수 있다고 한다.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2008/12/27 20:08 2008/12/2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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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의 그림에세이] 상사화相思花

기차 여행에서 마주 앉은 일행이 보는 풍경은 조금 다릅니다.

기차의 진행방향 쪽으로 앉은 사람은 다가오는 풍경을 보지만
반대편에 앉은 사람은 지나온 풍경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풍경에는 미묘한 온도차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얼굴을 자주 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다른 풍경을 보며
대화하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는 때가 있다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마주 보는 사이라는 게 오히려 짐이 됩니다.

친밀한 관계에 있는 어떤 이와 적당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면 더 오랫동안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할 수 있을지도요^^
2008/10/30 22:39 2008/10/30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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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 리얼 스토리ㅣ최민수는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허지웅 기자


세상은 얼마나 쉽게 이유를 만들고 합리를 씌워 결과를 만들어내는가. 누군가의 신념을 매도하고 개성을 희롱하고 사실을 왜곡하기에 얼마나 편리한 곳인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게, 누군가는 괴물이 된다.

최민수가 산에 들어 간지 4개월이 지났다. 산 속에서 홀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다. 가끔 급하게 필요한 물건을 매니저에게 부탁할 때를 제외하면 대개 그렇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최민수 사건은 어렴풋한 자취만 남기고 지워진지 오래다. 최민수가 훈계하는 노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칼을 휘두르고 차에 매달아 질주하다 세상의 질타를 당하고 산 속으로 숨어들어갔다지. 그렇게 막돼먹은 패륜의 기운만 묻어날 뿐이다. ‘최민수 70대 노인 폭행 의혹’ 사건이 아니라 ‘최민수 70대 노인 폭행’ 사건으로 남았다. 400억 원 규모 한-미-일 합작영화 <스트리트 오브 드림즈>의 출연은 무산됐다. 드라마 <한강> 출연료 미반납을 이유로 2번에 걸쳐 피소되면서 반갑지 않은 구설수에 다시 올랐다. 언론은 악재가 겹쳤다고 보도했다. 물론 사연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민수의 연기 경력은 끝장난 것처럼 보였다. 아니, 정상적인 사회 활동이 더 이상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다. 세상은 누군가에 대해 한 번 내린 판단을 쉽게 뒤집지 않는다. 그것이 왜곡된 진실이라도 마찬가지다. 굳이 헤집어 진실을 따져볼 의지 따윈 드물다.

그러나, 저 떠들썩했던 ‘최민수 70대 노인 폭행 의혹’ 사건은 재판까지 가지도 못했다. 사건이 검찰로 송치된 이후 최민수는 두 번 서울 서부지방 검찰청에 출석했다. 처음은 단독 조사, 두 번째는 유씨 노인과의 대질 조사였다. 최민수는 변호사조차 대동하지 않았다. 경찰 조사 때부터 그랬다.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법이 공정한 판결에 따라 죄를 묻는다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겠다며 굳이 변호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지난 6월 27일 서부지검은 최민수에 대한 폭행 및 협박 혐의에 대해 모두 ‘혐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무혐의였다. 기소되지 않았다. 항간에는 화해조로 거금의 합의금이 오고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거기 합의금 같은 건 없었다. 최민수는 죄가 없음이 밝혀지고 나서도 산에 머물렀다. 언론은 전만큼 시끄럽지 않았다. 정정보도는 당연히 없었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나

지 난 4월 21일 오후 1시경, 최민수는 운동을 마치고 하야트 호텔을 나섰다. 자기 소유의 지프 랭글러를 타고 이태원을 향했다. 늘 그곳을 경유해 집으로 가곤 했다. 그래서 이태원을 지나다보면 종종 오토바이나 지프차에 올라탄 최민수를 목격할 수 있었다.

이 태원 소방 사거리를 약간 미치지 못해 갑자기 도로가 막히기 시작했다. 신호 대기가 아니라 아예 차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은 최민수가 차에서 내렸다. 50미터 전방에 견인차가 길을 막고 있었다. 견인차는 D주차장 앞에 서있는 BMW 자가용을 견인해가려 했다. 이를 방해하고 있는 건 D주차장 직원들과 이 주차장을 사용하는 갈비집의 사장 유씨 노인이었다. 유씨 노인은 그 지역 유지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용산 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찰들과도 대부분 안면이 있을 정도라 경찰서를 찾았던 최민수측 일행들이 놀랐다는 후문이다.

이들의 다툼 탓에 체증이 발생한 것이다. 도로는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좀체 이런 걸 참지 못한다는 최민수가 상황에 합세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최민수는 견인차가 BMW를 견인해갈 수 있도록 도우려 했다. 결국 시비는 최민수와 유씨 노인의 몸싸움으로 옮겨 붙었다. 노인이 먼저 최민수의 멱살을 잡았고, 상호 몸싸움을 동반한 실랑이 중에 최민수가 입고 있던 셔츠 상단 단추가 모두 뜯겨 나갔다(이 뜯겨진 셔츠도 경찰에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이에 대해 보도한 언론은 없었다). 최민수가 했다는 ‘폭행’은 이때의 몸싸움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폭력행사는 아니지만 멱살을 뿌리치기 위해 밀치는 것 역시 폭행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최민수가 주위 이목이 있으니 일단 주차장 사무실로 가서 이야기하자 제의했다. 사무실 안에서도 다툼이 계속 이어졌다. 이때에 대한 진술은 이해당사자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최민수는 때리려는 것처럼 손을 들기는 했으나 폭력을 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유씨 노인은 최초 출동한 지구대 경찰들에게 최민수가 군화발로 처참히 짓밟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최민수는 바이커들이 종종 신는 큼직한 워커를 신고 있었다. 거기에 밟혔다면 건장한 청년이라도 무사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씨 노인은 결과적으로 상반신에 동전만한 멍이 들었을 뿐이었다.

BMW의 견인이 완료되자 최민수가 자리를 떠나려 시도했다. 최민수가 사무실을 나서 자기 지프로 향하자 유씨 노인이 서둘러 신고를 했다. 사건은 이태원 지구대에 접수됐다. 최민수가 차를 출발해 50미터 가량 움직이다가 이태원 소방서 사거리에서 신호대기를 위해 멈춰 섰다. 그때 유씨 노인이 최민수의 출발을 막기 위해 지프 앞 보닛에 매달렸다. 마침 파란 불이 들어왔다. 당황한 최민수는 지프를 도로 갓길에 세우기 위해 차를 출발시켰다. 노인이 매달린 채로 지프가 수 미터 이동해 갓길에 멈춰 섰다. 수백 미터 질주 따윈 애초 없었다. 최민수가 노인을 지프 안으로 끌어들였다. 옆 좌석에 탄 노인과 최민수 사이에 다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 사건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는 지점이 여기서 발생한다. 지프의 기어 뒤쪽에 움푹 팬 작은 공간이 있었다. 평소 오프로드를 즐기는 최민수는 거기에 작은 나이프를 상비해둔 상태였다. 나이프 주머니를 아예 본드로 차체에 부착해놓았다. 유씨 노인은 나중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진술을 번복하기 전까지 최민수가 칼을 끄집어내 휘둘렀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최민수는 끝까지 칼에 손도 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결정적으로 최민수가 칼을 빼내 휘둘렀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증언이었다. 당시 증언을 했다는 박모씨는 “칼을 꺼내 휘둘렀다고 말한 게 아니라 최민수씨가 칼을 꺼내 휘둘렀다고 외치는 노인의 말을 들었다고 증언한 것”이었다며 더 이상의 설명을 회피했다. 명백한 위증이다. 그러나 처벌할 수 없다. 현행 법상 재판 중이 아닌 수사 과정에서의 위증은 처벌 대상이 아니다.

이 때 지구대의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했다. 경찰은 조사를 위해 지구대 사무실로 가야한다고 말했고, 최민수와 유씨 노인은 지프에 탄 채 그대로 지구대까지 이동했다. 지구대 사무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초반에는 고성을 지르며 서로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러나 곧 원만하게 화해했고 지구대 경찰 또한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유씨 노인의 말에 사건을 종결지었다. 모든 게 거기서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 날 이후 무슨 일이 있었나

바 로 다음 날 최민수의 이름이 ‘배우 C'로 명기된 사건 기사가 인터넷에 등장했다. 일간스포츠의 보도였다. 최민수의 매니저도, 유씨 노인의 가족도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뒤늦게 사실을 안 매니저가 유씨 노인이 경영하는 갈비집을 찾았을 때는 이미 케이블 방송 취재진들이 도착해있는 상황이었다. 취재진들이 인터넷에 보도된 기사 내용대로 가족들에게 사건을 설명했고, 가족들은 무척 흥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3일에는 용산경찰서에 사건이 다시 신고 됐다. 유씨 노인이 한 것은 아니었다. 경찰은 당시 사건을 목격한 제보자의 신고였다고 설명했다. 유씨 노인이 먼저 경찰의 호출을 받았고, 유씨 노인이 최민수에게 “제보자가 경찰에 신고했다고 하니 조사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연락해와 같은 날 최민수 역시 용산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 다음 날인 24일, 최초로 최민수의 실명이 거론된 기사가 등장했다. 쿠키뉴스의 보도였다. 기자는 “경찰에 따르면”이라는 단서를 단 채로 “교통체증이 심하자 최씨는 차에 앉은 상태에서 주변을 향해 큰 소리로 마구 욕을 퍼부었다” “최씨는 차에서 내려 유씨를 폭행했다” “대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으로 수차례 유씨를 때렸다” “최씨의 폭행에 놀란 유씨는 휴대전화로 ‘살려달라’며 인근 지구대에 신고를 했다” “최씨는 유씨는 매단 채로 200-300미터를 운전했다” “유씨가 떨어지지 않자 최씨는 오픈 지프차에 앉은 채로 소지하고 있던 등산용 칼을 꺼낸 뒤 본네트에 매달린 상태의 유씨를 향해 위협적으로 휘드르며 ‘죽인다’고 소리쳤다”고 상황을 서술했다. 경찰은 “경찰에 따르면”식의 인용이 가능할 정도로 제공한 정보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전달을 넘어선 수사나 감정의 개입이 눈에 띠는 기사다. 아니 기사라기보다 이건 차라리 소설에 가까웠다. 이후 타 언론사의 유사한 보도들이 일일이 사례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여론은 더할 수 없이 험악해졌다. 인터넷은 최민수를 향한 공격성 게시물로 넘쳐났다. 모두가 최민수를 증오했다.

최민수가 쿠키뉴스의 실명 보도 사실을 안 건 24일 최수종과 박수홍이 진행하는 <더 스타쇼>의 녹화 중간이었다. 이 날 촬영분은 전파를 타지 못하고 이후 폐기처분 됐다. 최민수는 공식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회견에 앞서 먼저 유씨 노인의 갈비집을 찾아가 무릎을 끓고 용서를 빌었다. 회견은 저녁 9시 30분 이뤄졌다. 그는 어쨌든 노인과 시비가 붙어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폭행혐의에 대해 다 인정하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전부가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 어제 진술을 다 끝냈다. 과장의 부분도 있다. 어차피 조사가 끝나면 다 밝혀질 것 같다”고 답했다. 더불어 "만약 그것(노인 폭행)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여러분들은 제발 나를 용서하지 말라. 진실은 밝혀지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이 유씨 노인측을 결정적으로 자극했다. 유씨 노인은 전치 2주의 진단이 나왔다며 고소할 뜻을 밝혔다. 28일 최민수가 노인이 입원해있는 병원을 문안차 방문했을 때 둘 사이에 화해가 이뤄지면서 비로소 유씨 노인의 마음이 풀렸다. 다음 날 유씨 노인은 폭행건과 관련해 최민수측과 합의키로 했다. 30일 경찰이 최민수와 유씨 노인을 다시 소환했다. 이날 조사에서 유씨 노인은 “당시 경황이 없어서 칼을 휘둘렀다고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 발짝 물러섰다. 또한 최민수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제출했다. 당시 경찰 관계자는 "목격자 조사 등을 거듭한 결과 주먹질이나 발길질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며 "최민수가 피해자를 매달고 수백 미터를 질주했다는 이야기 역시 크게 과장됐다"고 밝혔다. 이후 사건은 흉기 사용건에 한해 협박죄가 적용돼 5월 초 검찰로 송치됐다. 앞서 언급했듯이 검찰은 최민수가 흉기를 사용해 협박한 부분에 대해 6월 27일 최종적으로 무혐의를 선언했다. 서울 서부지검 황윤성 차장검사는 "폭행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최씨와 폭행당한 유모씨 사이에 합의가 이뤄진 사항이고, 흉기로 위협했다는 것도 실제로 칼을 뽑아 든 것으로는 보이지 않아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게, 최민수는 괴물이 되었다

어 떤 한 사람을 향한 불특정 다수 언론의 왜곡보도가 이토록 집중적으로 자행됐던 사례가 있었던가. 이 정도면 폭격이라 할만하다. 기자회견 직후 최민수는 잠시나마 자살을 염두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정정 보도를 요청하지 않았다. 더불어 구체적인 해명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명이 아닌 변명으로 들릴 말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고 어차피 시간이 다 해결해줄 것”이라며 스스로 거부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세상이 자신을 온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과연 죄가 없음이 판명됐다. 그러나 가끔은 비온 뒤에 굳지 않는 땅도 있는 법이다. 그는 이미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뒤였다.

유씨 노인 잘못이 아니다. 시시비비는 늘 발생하기 마련이다. 상황이 급박했기에 판단이 흐려졌을 수도 있다. 모두가 그렇듯, 사람은 때때로 기억을 조작한다. 문제는 언론에 있었다. 악랄했다. 사건 초반, 모든 게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였다. 상식을 거스를 정도로 기이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언론들은 오보의 가능성 따위 얼마든지 감수하면서 기사를 내보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확한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무도 사실을 욕망하지 않았다. 정작 그들이 욕망했던 건 진실이 아니라 이슈였다. 정확한 사실전달보다 좀 더 빠르고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를 원했다. 뉴스 소비 행태가 인터넷 포털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황색 저널리즘이 유난히 강화됐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특히 인터넷 언론이 보인 행태를 주목해보자. 눈에 띠는 제목일수록, 자극적인 이야기일수록, 특종처럼 보일수록 더 나은 자리에 기사가 배치될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더 많은 구독자는 더 많은 광고를 의미한다.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최민수 아니라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돈만 된다면 순식간에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 언론이다.

이 사안과 관련해 최민수측에 사과를 하거나 정정 보도를 한 매체는 하나도 없었다. 엉뚱하게도 윤승환이라는 이름의 네티즌이 ‘최민수씨 사건내막, 언론의 코미디’라는 글을 써 인터넷에 게시하면서 사실을 전달하려 애썼다. 최민수는 이 글을 보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사건 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비호감을 사고 있었다. 그의 과장된 남성성과 눈에 띠는 자의식, 일반인의 상식을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내는 듯한 문어체 발언들을, 사람들은 싫어했다. 이 정도 규모의 매도는 개인 최민수에 대한 선입견이 전제되지 않고선 좀체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편으로 최민수는 보기 드물게 자기 목소리를 가진 배우였다. 자기 얼굴을 자기 소신을 자기 생각을 가진 배우였다. 더불어 그것을 거리낌 없이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시끄러운 시장판에서 배우 개인은, 엔터테이너 개인은 하나의 기업과도 같다. 뻐꾸기 마냥 빤한 말만 늘어놓는다. 느는 건 화장술뿐이다. 최민수의 말과 행동이 설사 호감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해도 우리는 그를 조금 더 아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언론은 뜨거운 기사거리를 앞에 두고 조금 더 신중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나중에라도 사과하고 최민수 개인의 명예 복원을 위해 조금 더 신경 써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최민수는 괴물이 되었다. 허지웅 기자 (<프리미어> '리얼 스토리')
2008/09/29 22:39 2008/09/29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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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들으면
/송한얼


나는요
노래를 들으면
무슨 느낌이 나요.

슬픈 노래는요,
내가 죽는 느낌이구요.
신나는 노래는요,
싸우는 느낌이에요.

(마주이야기2, "튀겨질 뻔 했어요" 중에서)
2008/09/18 22:37 2008/09/18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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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받는다는 것과
고통의 이미지가 찍힌 사진을 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고통의 이미지가 찍힌 사진을 본다고 해서
양심이나 인정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 망가져 버릴 수도 있다." 

(Susan Sontag, "On Photography" 중에서)
2008/09/06 22:35 2008/09/06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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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하우어와스는 자살을 그 행위자에 대한 판단으로 귀결시키지 말고 공동체로서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보듬어 주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로 보도록 합니다. 그는 이것을 '자살의 문법'(grammer of suiacide)이라고 명명합니다. 삶은 은총으로 주어진 선물인데, 그 선물을 서로 나누어 줌으로써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는 비극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살은 그 공동체의 실패를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상처받은 연약한 영혼들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없이 그들을 또다시 지옥간다는 말로 협박한다거나 장례마저 거부하는 것은 최소한 죽은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거니와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다운 행동이 아닙니다.

(김기현, "가룟 유다 딜레마" 중에서)

2008/07/20 20:06 2008/07/20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