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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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보지 않을 때 아이는 말썽을 일으킨다. 야단이라도 맞아가며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처지, 특히 제일 사랑받고 싶은 엄마의 마음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느낌은 아이에게는 아주 견디기 힘든 일이다. 자기가 죽어도 엄마는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의 속내를 언제까지 외면하고 있을 것인가. 아이는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33쪽)

아이만 치료하는 일이 얼마나 소용없는 일인지 치료자들은 잘 알고 있다. 아이보다 엄머가 마음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엄마들은 자신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클리닉에 데려오는 일만 할 뿐이다. (40쪽)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만 집안일을 전혀 분담하지 않고 남편이 총각 시절과 다름없이 생활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를 만났다. 그 부인은 "남편이 취미로 하는 골프 연습이나 자기 계발을 위한 영어 학원 수강을 말리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남편을 배려하는 좋은 아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편에게 아빠 역할을 즐길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남편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렇게 미리 알아서 다 해주는 것이 좋은 아내의 자세라 여긴 것이다. 회식이나 업무상 미팅으로 늦게까지 술마시는 것도 남편의 일 중 하나니, 주말에는 쉴 수 있게 배려한다. 그러고는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자녀 교육 문제까지 혼자 도맡아 처리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71쪽)

우리는 그들보다 더욱 복잡하다. 여성은 학교교육을 받는 동안에는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하며 성취하는 개인으로 지낸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을 포함하고 살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 결혼 후 제일 힘든 점이 개인으로 자유롭게 살다가 갑자기 남편과 시집 식구를 포함하여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당하다고 몸부림치고 부부 싸움도 많이 한다. 하지만 차츰 모르는 사이에 자기 행동 단위를 넓혀 머릿속에 자녀와 남편, 그리고 시집 식구들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뒷전으로 밀어놓는다. 그러면 부부싸움은 줄어들지 몰라도 마음속에 갈등이 자라게 될 것이다. (74쪽)

그 부인은 아이를 겨우 재우고 노곤하게 잠든 사람을 깨워 ㅈ사랑 나누기를 청하는 남편이 귀찮다고 했다. '내가 피곤한 걸 몰라서 저러나'하는 원망까지 든단다. 직장에서 돌아와 얼마 안 되는 시간에 집안일은 물론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공부시킨 후 재우고, 겨우 쉬는 그 귀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부인이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하는 동안 남편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골프연습장에 다녀오고 TV를 보고 인터넷을 한단다. 집에 일을 들고 들어오는 때도 있다고 한다. 그 부인은 남편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다 하게 놔둔다. 아이에게 남편은 아빠가 아니라는 듯 책임을 면제해준다. 잠깐 놀아주는 것으로 아이에게 아빠는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엄마는 혼자 부모 노릇 다 하느라 피곤하다. 그렇게 모든 할 일을 다 하면서 일에 지쳐 잔소리하고 짜증내는 엄마가 된다. (83쪽)

엄마들은 "아이가 원해서 학원에 보내요"라고 한다. 언제부터 아이들이 원했을까. 동맹이라도 한 듯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니 친구 사귀려면 학원에 갈 수밖에 없다. 엄마 마음대로 원하지 않은 짧은 머리를 만들어놓고, 화내는 아이를 달래며 장난감을 사주는 엄마는 "네가 원하는 삶(머리 길이)을 살지 않고 엄마 말대로 살면(짦은 머리) 유산(장난감)을 물려줄게"라고 하는 셈이다. 아이들은 그 장난감(유산)의 유혹으로 자기 의지를 꺾는다. (88쪽)

아이가 성도착 문제로 치유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엄마가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치료를 주저했다. 신경정신과 치료 기록이 남는 것도 꺼림칙하고, 번듯한 집안이라는 평판을 잃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덮어두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 건강한 성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본인뿐만 아니라 배우자가 될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들 수 있고 심하면 성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일이라 문제가 심각한데도 외면한다. 가정 안에서 아버지나 오빠, 삼촌에게 성추행을 당한 아이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도 적합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엄마가 많다. 누가 알까 두려워 덮어두려고만 한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의 처지를 충분히 느끼고, 분노하고, 슬퍼하지 못하게 된다. 미해결 사건이 평생을 좀먹고 과거가 자신을 좀먹게 두니 비참한 어둠 속에서 살게 된다. (135쪽)

어린 시절에 받은 피해를 오해려 자신의 수치로 여기며 살게 되면 어린이 되어서도 억울한 처사에 순발력있게 대응할 수 없다. 고통을 당해도 무감각하든지 혼란스러워한다. 그래도 체면이 그렇게 중요한지 묻고 싶다. 아이의 인생보다 체면이 중요한가? 아이의 삶보다 귀한 체면이란 없다. (136쪽)

자녀의 반에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가 있으면 엄마는 "그 애와 놀지말라"는 말만 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바로 그 문제 아이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139쪽)

엄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자녀는 잘 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이 엄마의 마음을 얼마나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지 깜짝 놀라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부모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눈치 보고 귀를 쫑긋 세우고 살았으니 당연하다. 자녀가 엄마의 마음을 간파해서 "결국 돈 얘기하는 거 아니야"라 한다. "친구들과 좋게 지내라"는 말을 듣고도 "걔와 경쟁해야 하잖아"라고 말한다. 선생님을 존경하라"는 엄마의 당부에 "알았어. 선생님한테 잘 보일게" 대답한다. 아이들의 눈이 너무 정확해서 부끄럽고 마음이 아플 지경이다. (153쪽)

엄마들이 많이 하는 말 가운데 '이 정도는 기본'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기본이라는 말이 무섭다. 공부나 생활 태도 등 각 엄마마다 나름의 기준을 정해놓기 마련인데, 이 기준에 이르지 못했을 때 아이는 가차없이 정죄 받고, 기본도 못하는 아이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리고 당장 생사회복에 지장을 경험하게 된다. 엄마의 실망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 아이에게 매질이나 언어폭력보다 덜 두려울 것 같은가. 아니다. 경직된 엄마의 기준에 어긋났을 때 엄마가 보이는 작은 반응도 아이에게는 굉장한 위력으로 다가온다. (161쪽)

이제 자신의 느낌을 찾기 위해 기억 저편의 어린 시절 접어두었던 역사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잘못했을 때는 "넌 원치 않는 딸이었다"는 뼈아픈 말도 들어봤을 것이다. 반면 잘하면 잘하는 대로 "네가 아들이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기막힌 말도 들었다. 이렇게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없게 만들었으니,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무시하고 내 삶이 귀한 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못하고 뒷전에 밀려나 있어도 불만이라 느낄 줄 모른다. 자신의 느낌도 무시해서 내세우질 않는다. 이런 것을 우리사회에서는 겸양의 미덕으로 쳐주기 때문에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183쪽)

막상 아이들은 엄마 앞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어머니 상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이들이 받은 상처는 언제나, 자신을 더 없이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엄마와 연결되어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어머니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란 걸 우리는 안다. 현실이 각박하고 먹고 살기에 너무 바쁘고 어머니 자신이 참고 살아내야 할 삶이 힘들었기 때문이란 것 역시 안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191쪽)

가족은 서로 속일 수가 없다. 특히 자녀는 부모를 속속들이 보아왔기 때문에 속일 수 없다. 나는 아들이 작문 시간에 쓴 한 구절의 글에서 그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엄마는 나를 어른이 되어 알기 시작했지만, 나는 엄마를 태어나서부터 평생 알고 있다!" 자녀는 이렇게 엄마를 알고 있는데 정작 엄마는 아이를 모르고 있다. 간혹 엄마들이 "우리 애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라고 푸념하는 모습을 본다. 특히 하나 이상 자녀를 키우는 집 엄마들은 둘째를 향해 "언니는 안 그랬는데", "형은 다른데"라는 말을 곧잘 한다. 하지만 아이가 처한 상황을 알았다면, 왜 그 렇게 다른지 알 수 있을 텐데 알려 들지 않는다. (204쪽)

사람들은 "다 지나간 옛일을 지금 끄집어내면 뭐하느냐?"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덮어두고 묻어두고 있으면 영영 아무 느낌 없이 살게 된다. 내가 무엇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왜 슬픈지, 어떤 이유로 괴로운지 모른 채 불만스럽고 슬프고 괴롭게 사는 것이다. (222쪽)

그니처럼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에게서 문제가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 처음에는 어머니를 원망한다. 어머니에게 그런 마음을 표현하는 경우 "이제와서 어쩌라는 거냐" 하는 분도 있고 "몰라서 그런 것이니 미안하다" 하는 분도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머리로 알기만 한다고 해서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느꼈던 그 시절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자기 아픔을 될 수 있는 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우선이다. 물론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기억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모든 아이들은 어머니의 보호와 사랑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우호적으로 기억하려 한다. 어머니 역시 모든 것이 아이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사랑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237쪽)
2013/01/18 23:26 2013/01/18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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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를 읽다가 이렇게 뭉클하긴 처음이다...
 
"연애지침서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공략 대상으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 방법을 설파하느라 여념이 없다. 성공적인 연애를 위해 구사할 전략들을 나열하고,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흉내내기,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모방, 사랑을 가장한 목표 달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 루티 교수가 말하듯이 사랑은 요령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수많은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의 어린 날의 경험들, 노동 조건, 삶의 조건, 살아보고 싶은 삶의 모습, 욕망과 소망, 그리고 또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디테일들, 웃는 모습, 찡그리는 모습, 손의 느낌, 걷는 모습, 잠든 모습.
 
이 시대에, 이 고독하고 우울한 시대에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와는 마음을 나누고, 의미있는 관계를 맺고 , 그에게 만큼은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신비롭다고 할 만한 최초의 매혹에 끌리는 경험. 자신을 사랑하듯 남을 사랑해보는 경험. 너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 말하고 그것을 간절히 꿈꿔보는 경험. 상실과 결핍, 방황 끝에 충만함을 맛보는 경험. 한 사람을 통해 세계를 맛보는 경험. 한 사람을 사랑한 덕에 세계가 달라지는 경험. 온전히 이해받아 보는 경험. 자신을 벗어나보는 경험. 다른 사람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보는 경험.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경험...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이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들여다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우리에겐 무엇이 빠져 있는가. 사랑은 우리 삶에 일어난 시끌벅적한 사건이다. 조금은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사건이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생겨나지 않았을, 불가능했을 어떤 세계가 태어나는 사건이다."
 
- 정혜윤, <하버드 사랑학 수업> 추천사 중에서.

2012년 12월 27일

2012/12/27 23:22 2012/12/27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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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12쪽)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이상 면역학적 주제가 아니다. (13쪽)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이질성은 탈경계과정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닌다. 그것은 경계선, 통로, 문턱, 울타리, 참호, 장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과정을 가로막는다. 오늘날 삶의 모든 영역은 일반적인 난교 상태로 특징지어지며, 이는 면역학적 관점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이질성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16쪽)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폭력 현상으로서 면역학적 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 해당되지 않는다. (20쪽)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성 질환은 바이러스성 폭력과 같이 여전히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면역학적 도식을 따르며, 시스템에 적대적인 특이한 개별자나 이질성을 전제하는 개념으로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24쪽)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28쪽)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31쪽)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attention)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35쪽)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컴퓨터가 인간의 뇌보다 더 빨리 계산할 수 있고 엄청난 데이터를 조금도 토해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컴퓨터에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 백치가 보통은 계산기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 기계로 변신한다. (58쪽)

(한병철, "피로 사회" 중에서)

2012/12/01 22:55 2012/12/01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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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는 완전히 확신하고 있다...그는 자신의 관점으로 보는 '하나님의 의'가 '언약적 신실함'보다 더 깊은 의미이며 '법정적' 함의보다 더 깊은 의미라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라고 주장한다. (83)

'하나님의 의'가 실제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는 내가 알기로는 옛관점, 새관점, 가톨릭, 개혁주의, 복음주의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폭넓게 지지받는 관점은 체다카/디카이오쉬네가 일반적으로는 '규범에의 순응'을 의미하며, 이 의미가 하나님의 '의'라는 맥락에서 사용될 때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은 그것이 하나님 자신이 세운 규범, 다른 말로 하면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충실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패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본문들(이사야와 시편)이 압제받는 자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변호하시는 것에 대해 그의 '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과 맺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적 약속에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84)

파이퍼의 해석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전가(imputation) 교리 체계 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그의 특이한 정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전혀 분명하지 않다. 만약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라면 이 의를 믿는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86)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내내 창세기 15장을 반복해서 인용하며, 이 사실은 바울이 말하려는 내용을 강력하게 암시해준다...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상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통하여, 전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이것이 내가 바울에 관한 글을 쓰면서 줄임말로서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 위대한 내러티브가 바울 자신에 따르면 창세기 15장, 신명기 27-30장, 다니엘 9장 같은 '언약적인' 본문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87)

로마서 3장 1절~8절의 주제는 하나님의 속성과 사람의 실패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불충성'은 그들의 믿음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요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를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그 위임에 충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파이퍼에 반대하여 로마서 3장 5절의 "디카이오쉬네 떼우'를 '언약적 신실함'으로 번역하여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다.(88-89)

파이퍼는 그의 전체적인 논의 안에서 법정적인 비유의 중요성을 격하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는 극히 설득력이 없는 시도이다...첫 번째에서 다말, 두 번째 예에서의 다윗이 소유하게 되는 '의'의 상태는 히브리 소송에서 법정이 그들이 옳다고 판결을 내렸을 때 무죄를 선고받은 피고나 유리한 판결을 받은 원고가 소유하게 되는 상태로서, 절대 그 재판을 판결한 판사의  '의'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89-90)

파이퍼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한 그의 관심으로 본다. 이는 이를테면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이 결국 자신에게로 귀착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당연히 그러한 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창조로부터 언약을 거쳐 새 예루살렘까지 흘러가는 위대한 성경 이야기는, 자신이 아닌 그 외의 모든 것의 번영과 안녕에 대한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인자한, 창조적인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불러도 괜찮다면 하나님의 관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한다...물론 하나님 자신의 영과엥 대한 관심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외부를 향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개념이 신적 나르시시즘의 형테로부터 구출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이 언제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 그리고 자격이 없는 피조 세계를 향해 풍성하고 인자한 사랑을 끊임없이 쏟아붓고 계시기 때문이다. (92-93)

2012/03/29 22:37 2012/03/29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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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일 낮
제가 고등학생이던 어느 주일 낮이었습니다. 오후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오신 아버지는 응접실에 있던 내게 말을 건 것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왜 이런거지?” 아버지가 내뱉은 의문문의 문장에 대답할지 말아야 할지를 잠시 망설였던 저는 조용히 되물었습니다.“아빠, 뭐가요?” 아마도 그 날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었나 봅니다. 비록 그 상대가 날마다 공부는 뒷전에 내팽개치고 놀기에 바쁜 아들이었을망정 말입니다.“어…그게 말이야…” 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성호야 내가 한참을 생각해도 잘 모르겠구나.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사람들을 교회에 많이 보내주시는지 말이야. 오늘 주일 예배 숫자가 5천명이 넘었어. 오늘 예배 후 차를 타는 대신 집까지 천천히 걸어오면서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도 정말 알 수가 없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나 같은 사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까지 이렇게 쏟아주시는 그 뜻을 도통 알 수가 없어.” '아니, 사람이 많아지면 좋은거지…별 이상한 걸 가지고 다 고민이네….'아버지의 불평 아닌 불평에 대답할 가치를 못 느낀 저는 내려놓았던 사과를 다시 집으며 보고 있던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얼마든지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단 몇 십 초에 불과했던 그 날의 기억이 아직까지 이렇게 생생하게 제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 날 제가 느꼈던 바로 그 ‘이상함’ 때문입니다. 좋아해야 할 일을 놓고 좋아하는 대신 고민하고 당황하는 아버지의 그 모습이 준 의아함 때문입니다. 비록 그 날 이후 아버지는 늘어나는 사람들이 주는 고민을 우리 가족들에게 드러내 얘기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무려 이십 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던 아버지의 그 당혹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라지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목회 전반에 대한 깊은 고민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 고민의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아버지가 지향하고 붙잡은 자신의 교회론과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오는 교회의 현실이 서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론
아마도 많은 분들은 아직도 3년 전 상암 운동장에서 열린 평양 부흥 100주년 기념 예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날 설교에서 절규에 가까운 회개의 메시지를 내뿜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혹자는 도대체 옥한흠 목사는 뭘 그렇게 잘못한게 많아서 함께 기뻐하고 감사해도 모자란 부흥 100주년에 저런 찬물 끼얹는 설교를 할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 날 하나님께서 100년 전 부어주신 그 부흥의 역사를 기억하며 감사와 찬양 대신 하나님 앞에 회개의 통곡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만이 갖고 있던 바로 이 오랜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로서 교회는 커졌고 사람들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자신이 믿고 붙잡고 가던 '교회론'에 걸맞는 결과를 교회 속에서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감 말입니다.

그만큼 아버지에게 '교회론'은 사랑의교회를 목회하는 내내 생명과도 같이 붙잡고 있던 가치였습니다. 아버지는 '교회론'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저에게 있어서 교회론은 목회자와 교회가 사는 생명과도 같습니다. 교회론이 왜 생명과 같으냐고 물으면 목회가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들을 영적으로 죽이느냐 살리느냐를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이냐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목회자는 진정한 목회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목회자의 생명을 결정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에게 중요한 교회론이 그가 목회하는 교회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을 때 그 사실은 아버지에게 말못할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점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현실이 충돌할 때 고민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그토록 붙잡고 있던 그의 교회론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 제가 관심을 갖는 교회론은 어떤 영역이나 분야가 아니고, 교회의 본질과 연결된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즉, 교회의 주체가 누군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인가 아니면 평신도인가?저는 교회의 주체가 평신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했고, 교회 주체인 평신도를 위해 목회자가 어떤 사역을 우선에 두어야 하는지, 성도들에게 주어진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신분과 소명이 무엇인지, 그것을 목회자로서 어떻게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지 등 이런 것을 고민하는 것이 저의 교회론의 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전통 목회는 평신도가 동원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저는 평신도를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주체, 동역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붙잡은 교회론의 핵심은 교회의 주체가 누구인가의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주체에 대한 재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어떻게 볼 때 목회자를 위해 존재했다면 이제 교회는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 아니었습니다. 이를 위해 평신도는 교회의 주체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그 말씀에 의지해 그리스도를 닮은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목사와 교사를 교회에 보내셨으며 이제 교회는 기존의 예배 공동체와 선교 공동체로서의 정체성 외에 훈련 공동체로서의 또 하나의 얼굴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평신도를 명실상부한 교회의 주체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그들에 대한 훈련이 필수적으로 필요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교회론이 꽃피기 위해 필연적으로 소그룹을 중심으로 한 제자훈련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자도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교회의 주체이자 주인이 평신도라는 사실과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는 것이 왜 서로 충돌할까요? 도리어 좋아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교회의 주체되는 평신도들이 늘어나니까 말입니다. 주체들이 늘어나면 교회도 더 강성해지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교회론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인 제자도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교회론을 실현하는 실천적 방안으로 제자도를 정리하며 그 내용의 핵심을 다음 두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1. 한 사람 철학
정말로 아버지는 한 사람을 붙잡고 사역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래 전 성도교회 대학부를 맡았을 때에도 당시 대학부에 남아있던 단 한 명의 학생, 지금의 방선기 목사님을 붙잡고 대학부를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교회를 시작할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이 볼 때 무식하고 답답한 방식인 소그룹 훈련에 매달려 매일을 씨름했습니다. 밤마다 제자훈련에 치중하다보니 새벽에 일어날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 많은 분들은 새벽기도를 인도하지 않는 이상한 목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커지며 더 이상 소그룹을 직접 인도할 수 없게된 이후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제자훈련 교재 집필에 진액을 쏟았습니다. 아버지에게 한 사람은 교회 전체였고 교회는 바로 한 사람이었습니다.

2. 섬기는 리더쉽
교회의 주체를 평신도로 이해하고 그들을 양육하는 사명을 하나님께 받았다는 그의 교회론을 근거할 때 아버지에게 목사가 평신도를 섬겨야 하는 존재임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혹자는 가르치는 사람이 어떻게 섬길 수 있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늘 같은 주인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생각할 때 가르치는 자가 사실상은 섬기고 있다는 점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그가 지향하는 예수님을 닮은 제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남을 섬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섬김의 모델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비롯한 목회자들에게 가장 먼저 적용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기에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동시에 성도의 종이다’라는 신념 아래 그는 자주 '이끌면서 섬기고 섬기며 이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주체는 평신도이며 주체된 그들을 바로 섬기며 이끌기 위해 목회자는 한 사람 철학으로 무장되어야 한다고 확신한 아버지에게 너무도 커버린 교회는 한 사람 철학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든 구조, 제대로 평신도를 섬기기 힘든 구조의 그 무엇으로 다가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 은퇴 후 저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 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너무 키워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너무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교회가 교회론과 제자훈련이 엇박자를 이룬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것은, 양이 많아져 버리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확률이 그만큼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제가 은퇴할 때 사랑의교회가 주일 출석 장년 교인수 2만 3천명, 전체 등록 교인수 5만 명, 벌써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지금 사랑의 교회는 어찌 보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제자훈련의 선두주자로서 교회론으로 볼 때, 그 정신을 잃어버릴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또 교회론의 본질에서도 위선자적인 입장에 빠질 수 있어 고민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정말로 내가 내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한 영혼에 최선을 다해 집중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과연 이렇게 클 수 있었을까? 아니, 결론적으로 이렇게 커진 상태에서 이제 더 이상 한 사람 철학을 바탕으로 한 나의 교회론 자체가 아예 가능이나 한 얘기일까?"


은혜 또 은혜
아버지의 사랑의교회 목회 내내 이런 고민 속에서 그가 하나의 돌파구로 붙잡은 길은 그냥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목숨을 건 설교준비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나날이 늘어나는 성도가 주는 내적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길, 그나마 많은 성도들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설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2004년 아버지가 조기 은퇴했을 때 많은 언론들은 모범적인 사역 계승이자 살신성인하는 지도자의 모습이라며 아버지를 일제히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제가 아들로서 볼 때 아버지가 조기은퇴를 결심한 진짜 이유는 89년에 잃은 건강이 주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매주 피말리는 설교준비가 영적 중압감을 더 이상 버텨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설교는 십자가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양심을 놓고 셈해야 할 몫이기도 했습니다.

" 흔히들 나를 보고 매주마다 수만 명의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느냐고 하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설교가 나에게 보람은 안겨주었을지 모르지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설교의 부담감 때문이었다. 설교에 실망하고 돌아가는 숨은 군중들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강대상에 서고 싶지 않을 때가 없지 않았다."

이런 아버지가 매주 다가오는 설교의 중압감 속에서 붙잡은 유일한 것은 다름아닌 더 큰 은혜에의 갈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역 전체를 꿰뚫는 이론적 개념으로서의 토대가 그의 교회론이라고 한다면 목사 옥한흠이라는 한 인간의 신앙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는 다름아닌 은혜에의 갈망입니다. 아버지는 그 중에서도 어린 시절 자신이 맛본 특별한 은혜에 대한 그리움을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내가 은혜에 취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은혜는 식지 않고 지속되었다. 성경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진하게 가슴을 울리는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지, 나는 이 기간에 넘치도록 맛보면서 살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이 강렬한 은혜의 맛이 서서히 식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그 은혜의 경지를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때에 받은 은혜가 내 한평생의 신앙생활과 목회의 질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받은 은혜의 질이 목회의 질을 결정한다는 아버지의 믿음은 그의 목회 내내 더 큰 은혜에의 사모함으로 드러났습니다. 무엇보다 목회자로서 받는 은혜의 깊이가 성도들의 신앙의 깊이를 결정한다는 그의 생각은 그에게 결코 쉽지 않은 짐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은혜에 대한 갈망이 간절한만큼 설교는 아버지에게 더 큰 무게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매주 설교를 놓고 그가 치르는 영적 전투는 피를 말리는 치열함 그 자체였습니다.

아버지는 어쩌면 단 한 번도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제대로 전달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은퇴할 당시 어느 방송에서 고백했듯이 자신의 부족한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설교를 통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데 대하여 성도들에게 미안해 하고 하나님 앞에 송구해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그렇게 무력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에 갈급한 아버지의 그 약함을 통해 성령께서 더 강하게 그의 설교를 통해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한국설교학회장이며 서울신대 설교학 교수인 정인교 목사는 아버지의 설교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 우선 주목할 것은 설교를 대하는 옥목사의 진지성이다. 옥 목사는 자신이 설교를 준비하는 작업을 ‘십자가’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란 벗어버리고 싶은 부담을 의미한다. 그가 설교를 이토록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전하는 설교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바른 말씀인가'에 대한 근본 질문에서 오는 고통이다. 옥목사는 바로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설교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고민과 고통이 그의 설교를 균형 잡힌 모범으로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 그의 설교에 묻어나는 설교자의 고민 그리고 말씀과의 치열한 전투 흔적이라는 진지성은 옥목사 설교를 설교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이다….중략….. 마지막으로 옥 목사에게서 보여지는 설교자로서의 특징은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설교자로서의 기품이다. 이 기품이란 본질적으로 그의 신앙적 인격과 투명한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에게서 배어나오는 진지함과 장중함은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신’으로 그를 각인시킨다. 이것은 최근 강단을 희극화시키고 가볍게 만드는 일부 ‘코미디형 설교자’와는 대별되는 모습이다. 그는 강단에서 결코 자신을 과장하지 않을 뿐더러 회중의 귀를 즐겁게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회중을 몰아붙이고 성도의 치부를 드러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접근은 일부 과도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말씀 전달자로서의 설교자에 대한 자각과 온전한 삶과 균형 잡힌 인격을 모토로 하는 것이다."

고독
아버지는 목사로서도 또 인간으로서도 고독했습니다. 무엇보다 설교자라는 짐을 숙명적으로 지고 사는 사람으로서 은혜에 대한 갈급함은 그를 필연적으로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고독은 아버지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였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알지 못해 그 큰 은혜를 사람에서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사람들과 어울려 놀 여유를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무겁고 크며 거룩한 존재일수록 설교는 그에게 엄중하며 생명을 다루는 문제였습니다. 항상 자신은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말하던 아버지는 하나님과 단 둘이 대면하는 인간적 고독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채찍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기 위해 찾은 답이 어떤 의미로 아버지에게는 '고독'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이런 목회자의 고독을 '날마다 죽는 목회자'라고 표현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이 고독의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오늘의 목회자들을 보며 깊은 우려를 표했습니다.

"(교회를 살리는) 가장 중요한 대안은 목회자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만 목회자도 사람이니까 잘못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외형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교회가 커지만 목회자가 대단한 인물로 부각되고, 그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하게 됩니다. 사방에서 끌어당깁니다. 적당히 거절하지 못하면 정신없이 자기 과시하는 데 애쓰게 됩니다. 양떼를 돌보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고 설교 준비를 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데, 생명을 짜는 설교 준비가 아닌 설교를 위한 설교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없어지고 건물만 남는 교회가 됩니다. 교회가 병들지 않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설교준비에 죽어야 하고, 밖으로부터의 유혹, 권력으로부터의 유혹, 인기에의 유혹을 철저히 끊고 자기가 죽을 때, 교인들의 숫자가 많아져도 그것을 커버할 수 있는 만큼의 큰 품이 생기게 됩니다. 그 밑에서 공부하는 부교역자도 다 본받기 때문에 위험성이 크지 않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버지가 좀 더 사람들과 어울리고 인생의 다양한 재미들을 즐기며 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육체의 병이라는 가시를 통해 그가 더욱 더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을 향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고독과 병을 보며 저는 약함 가운데 능력이 되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질병이 그의 설교를 듣는 누군가에게 치료의 원인이 되었고 그의 고독이 누군가에게 예수님과 동행하는 기쁨의 원천이 되었음을 잘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미안함
인공 호흡기를 낀 아버지는 어제 간신히 손에 들린 펜으로 이렇게 쓰셨습니다. "성도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아마도 아버지의 진심은 이것이었을 듯 합니다. "성도들에게 미안하다..."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성도들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깊이 더 넓게 보여주지 못하는 설교자로서의 미안함 뿐 아니라 자신의 교회론과는 달리 너무도 커 버린 교회 때문에 또한 성도들에게 미안해 했습니다. 아버지의 이 미안함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의 관심을 받고 있는 사랑의교회 건축 과정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교회론에 걸맞게 좀 더 제대로 목회했다면 결코 더 큰 교회 건물을 지어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더 큰 교회 건물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가 된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했습니다. 그랬기에 항상 불편한 환경 가운데서 예배 드리는 성도들을 보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랑의교회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보내주시는 데에는 분명 그 분의 거룩한 뜻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 확신 속에서 전체 성도가 다 교회 건축을 찬성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그가 생명을 걸고 함께 동역한 교회의 주인인 사랑의교회 성도들의 판단을 신뢰했습니다.

주일 오후 중환자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버지는 폐를 대신해 호흡하는 인공호흡기를 꽂고 24시간 꺼지지 않는 중환자실의 형광등을 바라보며 병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암투병을 기록한 그녀의 책에서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라고 썼습니다. 지금 아버지에게 그 한 순간 조차도 얼마나 길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는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느 날 자신이 무슨 고통을 제대로 알았다고 '고통에는 뜻이 있다'라는 책을 냈을까라고 하며 자조의 말을 내뱉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말은 안 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한번의 기회를 더 주신다면 이제는 고통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잘 전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분명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지난 몇 년 간의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결코 그렇게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70년이 넘는 평생동안 당신이 하나님으로 받은 축복과 은혜가 이토록 넘치는 데 지금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너무도 염치 없기 때문이라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좀 더 시키실 일이 남아있으면 분명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실 것이고 그게 아니면 가장 좋은 시간에 자신을 데려가실 것이라고요. 아버지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 하나님은 이용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유독 아버지의 설교들 결론이 '하나님을 사랑하라'가 많은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 모든 문제의 답이며 또한 인생의 본질이니까요.

저는 지금 저 중환자실에 홀로 누워 있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뭔가를 전하고 싶다면 그 메세지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작년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목회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회한을 피력했습니다.

" 사랑의교회는 양적으로 너무 비대해져 버렸습니다. 교회론대로 목회했다면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즉, 사랑의교회라는 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도록 좀 더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목회를 했어야 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이제 사랑의교회라는 한 교회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가 커가도록 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크게는 사랑의교회와 제자훈련의 철학을 함께 나누는 모든 교회들 그리고 작게는 저희 가족의 몫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교회 속에 파고든 세속주의를 향해 경계하며 지금 교회는 침체가 문제가 아니라 교회 본질이 파괴되는 문제 앞에 서 있다고 통탄했습니다.

" 교회가 처한 가장 심각한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속주의다. 세상적인 가치를 거의 다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입장에서 수용을 하되, 성경적으로 적당히 포장해서 수용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사람들이 다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한국 교회를 생각하며 세속주의가 이토록 교회 깊이 파고든 오늘날 유일한 치료약은 평신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제자로 자라나고 목회자는 한 명의 평신도를 위해 죽을 수 있는 한 사람 철학으로 거듭나는 것 밖에는 없다고 말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목회에 '엇박자'가 발생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그 '엇박자'를 통해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는 기막힌 '화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교회를 통해 만들어내셨던 아름다운 화음을 통해 영광 받으셨듯이 하나님께서 이 순간에도 싸우고 있는 '암'이라는 고통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시는 모든 성도들에게 가족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다시 한번 설교자 옥한흠을 강단에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옥성호


**기사출처: 이태형 국민일보 I미션라이프부 부장 thlee@kmib.co.kr

2010/09/19 21:10 2010/09/19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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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지변의 사고로 딸을 잃은 엄마가
한 세미나에서 자신이 겪은 감정을 말하는 도중
눈물이 복받쳐 말을 잇지 못하면서 발표가 중단되었답니다.
그랬더니 사회자가 슬며시 곁에 다가와
물컵을 건네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지요.
‘눈물도 말言이에요’

그 한마디로 깊은 날숨 같은 위로를 받았고
덕분에 감정을 잘 추스를 수 있었다는
그녀의 경험담을 전하는 일은 차라리 사족입니다.
자신을 그 엄마의 입장에 놓고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오는 문제이니까요.

부부 싸움 도중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너무 답답해서 울고 있는 아내에게
‘당신이 지금 울고 있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해보라’는
논리적 남편의 전략적 주문은
아내 입장에선, 일종의 재앙입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눈물도 말(言)입니다’ 같은
지혜와 아량을 발휘할 사람이 곁에 있다면, 축복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와 아량이 어른의 필수 조건인 것 같은 생각이
절실해지곤 합니다.
2009/12/03 22:55 2009/12/03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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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마일>은 외설적인 요소를 많이 완화시킨 상태로 에미넴으 노래와 실생활을 묘사하지만, 기독교인이 여기에 표현된 많은 영상을 보고 어안이 막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어떤 기독교 단체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요소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단히 편협한 태도를 취하는 탓에 소외 계층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다. (p152)

에미넴의 팬들은 화목하지 못한 가족관계, 경제 문제, 편부모 가정의 성장 환경, 여자친구와의 결별 등과 같이 영화가 묘사하는 에미넴의 난처한 상황에 자신들도 공감한다고 털어 놓는다. 기독교인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살핌으로써 그들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어쩌면 에미넴은 그런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교회에 상기시켜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p153)

"기독교인이 에미넴의 음악을 들어도 될까?"라고 질문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 질문에 집착하는 태도는 기독교인이 은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제한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이 말했다고 전해지듯이 에미넴은 사실상 "미국 미성년자들에게 소아마비 다음으로 가장 해로운 위협"일지도 모른다. 에미넴이 그 정도로 심상찮은 위협을 의미하긴 하지만, 정말 기독교인이라면 청취자들이 에미넴에 심취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만큼 매력적인 새로운 문화 아이콘을 창조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p156)

(사리스키, 절망과 속죄-에미넴에 대한 신학적 평가)

2009/11/02 20:13 2009/11/0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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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19일, 3선개헌반대 시국대강연회 연설 (효창구장)

▶ 미친 황소는 도살장으로
지난 6월 28일자 조간신문을 보니까 경기도 안성(安成)에서 황소 한 마리가 미쳐 가지고, 주인 내외를 마구 뿔로 받아서 중상을 입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황소를 때려 잡으려고 몽둥이를 들고 나섰지만 잡지 못해서 마침내 지서 순경이 와가지고 '칼빈' 총을 다섯 방이나 쏘아서 기어이 때려잡았습니다. 나는 이 신문을 보고 "과연 천도(天道)가 무심치 않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웃음) 왜? 대한민국에서 황소를 상징으로 한 공화당이 지금 미쳐 가지고 국민 주권을 때려잡을 3선 개헌 음모를 하니까, 미물 짐승인 황소까지 같이 미쳐서 주인한테 달려든 것이다 이것이에요. ("옳소!",환성·박수)

내가 오늘 여기 와서 "반공을 하고 국방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겠느냐?" 하는 것을 내가 여기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야당이 강연대회를 해야 돼! 왜? 서울시에서는 40만에 달하는 예비군을 오는 22일부터 소집하기로 했다가 신민당이 연설을 한다니까 어제 저녁부터 부랴부랴 서둘렀다 말이야. 여러분! 서울시가 아무리 그렇게 예비군을 소집하고 경찰관이 나와서 삐라를 뿌리고 해도 하느님은 우리 편이요 보시오. (환성·박수) 지금까지 오던 비가 오늘 오후 2시 정각부터 딱 그쳤어! (박수·환성)

3선 개헌을 반대하는 '데모'가 지난 방학 전에 전국에서 퍼졌습니다. '데모'를 제일 치열하게 한 데가 어데냐? 서울이 아닙니다. 경상도, 정권의 본고장인 경상도에서 제일 '데모'를 치열하게 했어! 그것도 朴正熙씨가 나온 경상북도라 그 말이여! 대구서는 대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고등학교가 총동원 됐어!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박정희씨가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면 그 대학교의 총장을 할 것이라는 소문의 영남대학교 학생들의 '데모'구호가 재미있다 그 말이여! 무엇이라 했느냐? "미친 황소의 갈 길은 도살장뿐이다." 그랬다 그 말이여! (박수·환성)

내 오늘 여기서 450만 서울 시민과 더불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마디 얘기 좀 해야겠어. 박정희 씨여! 당신은 지금 입으로 점잖게 무어라고 하지만, 당신 내심으로는 헌법 고쳐 가지고 71년 이후에도 영원히 해먹겠다는 시커먼 배짱 가지고 있는 것 사실 아니오?

3선 개헌은 무엇이냐? 이 나라 민주국가를 완전히 1인 독재국가로 이 나라의 국체를 변혁하는 것이여! 3선 독재가 통과되는 날, 3선 개헌이 통과되는 날에는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하는 조문은 장사 지내는 날이다. 이 말이여!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좌익독재뿐만 아니라 우익독재도 똑같은 적이여! ("옳소!",박수) 히틀러도, 도죠 히데기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음모에 의한 이 1인 독재도 민주주의의 적인 데는 다름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이 말이여! ("옳소!",박수)

아....... 이 나라가 누구 나란데! 이 나라가 박정희 씨 나라요? 이 나라는, 대통령은 바뀌어도 헌법은 영원한 것이여! 헌법은 박정희 씨보다 위여! 박정희 씨를 위하여 헌법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이말이여! ("옳소!",환성·박수)

아까 유진오 당수께서도 말씀했지만 놀라운 이야기여! 머....... 이번에 헌법을 고치면 지금 같은 준전시 하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안 하겠다? 이번에 개헌만 되면 71년에는 선거를 안 하겠다는 게여!
다시 말하면 털도 안 뽑고 그대로 먹겠다는 게여! (폭소)

공화당에 윤치영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 "박정희 대통령은 단군 이래의 위인이다." 이랬다 말이여! 단군 이래의 위인이니까 신라의 金庾信, 고려의 태조 王建, 이조의 世宗大王, 李舜臣장군보다 더 위대하다 그 말이여! 그런데 이 사람 대통령 바뀔 때마다 똑같은 소리를 한단 말이여! 과거 李박사가 사사오입 개헌 때도 "李박사는 개국 이래의 위인이다." 이랬어! 우리가 과거에 결혼식에 가면 축사를 많이 했는데 축사를 하는 사람마다 똑같은 소리를 해. 신랑은 대학을 나온 모범청년이고 신부는 가정에서 부덕을 닦은 요조숙녀(窈窕淑女)라고. (폭소) 아마 이 양반 대통령에 대한 아첨을 무슨 결혼식의 축사로 착각을 한 모양이여! (폭소·박수·환성) 이번에 '아폴로' 11호가 달 세계로 가는데, 안되었지만 이런 양반들을 실어다가 거기다 두었으면 대한민국이 편할텐데. (폭소·박수)

▶ 檀君 이래 폭군 된다
박정희 씨가 단군 이래의 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만일 박정희 씨가 3선 개헌을 그대로 추진했다가는 박정희씨가 단군 이래의 위인이 아니라 단군 이래의 폭군이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말을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하고 싶소.("옳소!".환성·박수) 남은 정치 생활해 가지고 평생을 국회의원 한 번 못된 사람이 수두룩한데 밤중에 한강 건너와 가지고 남의 정권 뺏어 가지고 10년 해먹었으면 됐지, 뭘.....다시 자기가 만든 헌법을 고쳐 가지고 또 해먹겠다는 것이여!(폭소·박수)
지난번 국회에서 金泳三의원이 "박정희씨는 독재자다." 이랬다 말이여! 공화당 사람들이 노발대발 했어! 그야 아무리 못생긴 사람도 대놓고 "너 이 자식 못생긴 놈" 이라고 하면 화 안내는 사람 없겠지요, 박정희 씨가 독재자냐? 아니냐? 단적인 증거가 있어! 명색이 민주국가에서, 명색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나라에서 국회의원이, 국민의 대표가 국민의 머슴인 대통령에 대해서 독재자라 했다 해서 그 말이 신문에 한 자도 못나간 그 사실이 "이 나라가 독재자가 지배한 나라" 라는 것을 반증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냐 말이여, 여러분! ("옳소!".환성·박수)

여보시오! 세계에서 민주주의 한다 해가지고 3선 개헌해서 영구 집권하는 민주주의가 어디 있소.(박수) 무슨 속담에 공자·맹자 10년 배워도 쫄쫄이란 문장 처음 듣고, 무당생활 평생 해도 목탁이란 귀신 처음 들어본다고 그러지만, 내 들어봐도 이런 민주주의가 있다는 소리 처음 들어봤어.

오늘날 이 나라 현실이 어떻습니까? 언론의 자유는 완전히 말살되었어. 신문은 신문기자나 편집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앙정보부가 밀어라, 빼어라, 높이 올려라, 아래로 내려라, 다 결정한다 그 말이여......
오늘날 신문기자같이 불쌍한 사람들이 없어.

국회는 어떻소? 지난 6·8선거가 온통 부정선거여! 나도 목포에서 박정희씨한테 좀 단단히 당해 보았어. (폭소) 이 양반이 직접 와서 목포에서 연설을 하고 전 국무위원들을 데리고 와서 회의까지 하고, 한 때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서 목포에 이사를 왔어. (폭소·박수) 선거가 끝나고 올라와 보니까 웬지 국회는 온통 가짜 투성이여! 진짜는 3분의 1도 못되고 3분의 2는 국민이 뽑은 게 아니라 중앙정보부나 경찰이나 면장·반장들이 뽑은 사람이다 그 말이여! ("옳소!") 이래 가지고 이 사람들이 국회에서 우리가 아무리 무슨 옳은 소리를 해도 듣지 않아! (폭소) 하도 분통이 터져서 "이 자식들아" 하고 한 번 달라들어 보자만. 웬걸, 공화당사람들은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많아서 유도가 3단, 당수가 5단이었다 그 말이여!(폭소) 해볼 수가 없어. (폭소) 이 다음에 국회의원을 국민이 뽑을 때 제발 당수 잘하고 유도 잘하는 사람 빼어 주었으면 좋겠어(폭소)

사법부는 어떻소? 사법부 독립은 지금 완전히 유린됐어! 동백림 사건 그 판결의 일부가 비위에 안 맞는다 해서 대법원을 빨갱이의 소굴로 몰았어! 대법원 판사들은 金日成이의 앞잡이로 몰았어! 노판사가 그만두고 나갔대!

학원은 지금 짓밟힐 대로 짓밟혀서, 학원은 이제 더 이상 진리의 탐구 장소도 아니요, 대학의 자치도 없는 것이요, 학생들이 나라의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가는 최루탄과 곤봉에 의해서 대가리가 터지고, 갈비가 부러지고 대학은 자유의 낙원이 아니라 창살 없는 감옥이요,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은 번호표 없는 죄수라는 것은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그 말이여! ("옳소!".환성·박수)

▶ 大學은 창살없는 감옥
이 나라의 국시인 민주주의는 지금 빈사 상태에 들어갔어. 국체는 이미 변혁 중에 있는 것이여, 여러분! 이 더러운 민주주의에 대한 원수들, 이 용서 못할 조국에 대한 반역자들, 나는 분노와 하염없이 통분된 심정을 금할 수 없으면서 내가 호소하는 것은 "하느님이여! 이런 자들에게 벌을 주소서, 국민이여! 궐기해서 이런 자에게 철추를 내리라"는 말을 나는 호소하고 싶습니다. ("옳소!".박수)
여러분! 나는 저기 계신 金九선생과 삼열사의 무덤 앞에서 여러분 앞에 맹세합니다. 나는 피로써 여러분께 맹세해! 나는 이 조국과 국민을 멸망과 불행의 진구렁 속으로 끌고 간 박정희씨의 3선 개헌에 대해서는, 내 이 사람의 정치적 생명뿐 아니라 육체적 생명까지 바쳐서라도 의정단상에서 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여러분 앞에 맹세합니다.("옳소!".환성·박수)

우리는, 우리 신민당 국회의원들은 우리의 집주소를 서대문 현저동 101번지로 옳긴 지 오래여!(폭소)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있다 이 말이여! 천명대로 우리의 목숨을 바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할 사람들은 아니여! 내가 여러분들한테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우리 신민당은 유진오 당수 중심으로 결속해서, 우리들의 눈동자가 새까마한 국민 여러분이 자유와 조국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단코 박정희 씨의 망국적인 3선 개헌을 저지하고야 말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 앞에 분명히 말씀한다 그 말이여!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온갖 정성과 온갖 결심으로써 박정희씨에게 마지막 충고하고 호소합니다. 박정희씨여! 당신에게 이 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일말의 양심이 있으면, 당신에게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할 지각이 있으면, 당신에게 4·19와 6·25때 죽은 우리 영령들 죽음의 값에 대한 책임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3선 개헌만은 하지 마라.("옳소!".환성·박수) 만일 당신이 3선 개헌을 했다가는 이 조국과 국민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죄악을 가져올 뿐 아니라 박정희씨 당신도 내가 몇월 며칠날 그렇게 된다고 날짜와 시간은 말 못하지만 당신이 제 2의 李承晩 씨가 되고 제 2의 '아유브 칸'이 되고, 공화당이 제 2의 자유당이 된다는 것만은, 해가 내일 아침 동쪽에서 뜨는 것보다도 더 명백하다는 것을 나는 경고해 마지않는 바입니다.("옳소!".환성·박수)

국민 여러분! 국체의 변혁을 꿈꾸는 3선 개헌을 분쇄합시다. 국민 여러분이여! 민주주의를 이 땅에 꽃피워, 우리 나라의 후손들에게 영광된 조국을 넘겨 줍시다. 여러분! 다 같이 궐기해서 3선 개헌 반대투쟁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결사의 용사가 될 것을 호소하면서 저의 말씀을 그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69년 7월 19일

김 대 중



'71년 장충단공원 연설' 전문 (1971. 4. 18)

‘독재·특권경제 끝내겠습니다”
연설을 시작하기 전 나의 경쟁상대인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건강과 건투를 빕니다. 나는 전국의 유세결과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제야말로 우리의 승리로 결정났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박정희씨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오게 됩니다. 나는 공화당이 그런 계획을 했다는 사실과, 이번에 박정희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온다는 확고한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야당이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더 이상 싸워나갈 힘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박정희씨는 며칠 전 대전에서 연설하면서 ‘나의 상대는 북괴뿐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김일성은 박정희 후보만의 상대가 아니라 3천만 국민의 대결상대요, 여러분과 나의 대결상대인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공산당을 키워주고 공산당을 승자로 만든 박정권의 독재와 썩은 정치와 특권경제를 우리가 다같이 종식시키지 않으면 이 나라는 장차 공산당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공산당을 이기기 위해서도 박정권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이 나라의 독재체제를 단호히 일소할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부터 4년 전 목포에 나를 잡으러 왔었습니다. 유명한 6·8 목포선거 당시 내가 박대통령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국회의원 부정선거한 것을 보니까 삼선 개헌할 목적 아니냐” 이랬더니 박대통령이 목포 역전에 2 만여명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습니다. “삼선개헌은 절대로 안한다. 내가 삼선개헌을 한다는 것은 야당놈들의 모략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2년이 못 가서 재작년에 절대로 안 한다는 삼선개헌을 해버렸습니다.

‘대통령은 두 번밖에 할 수 없다’는 헌법 제69조 3항은 누구도 고칠 수 없다고 헌법부칙에 못박아 앞으로 이 나라에서는 누구든 자기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 헌법을 고치는 일은 영원히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정권을 잡으면 정보정치를 일소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는 말만 민주주의입니다. 백성 민(民), 임금 주(主) 백성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백성에게 선거의 자유가 없습니다. 야당유세장엔 나오지도 못하고 가더라도 박수를 치지 못합니다.

중앙정보부는 언론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래서 신문과 방송이 사실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부정선거를 지휘하고 야당을 탄압하고 분열시키고 심지어 여당조차도 박정희 1인 독재에 반대한 사람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재작년 삼선개헌 때 반대한 공화당 국회의원들은 지하로 끌려가서 몽둥이로 맞고 온갖 고문을 당했습니다. 삼선개헌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공화당 의장직을 그만두고 탈당한 김종필이라는 사람이 오늘날 자기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정보정치의 압력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공산당을 이깁니다”
중앙정보부는 학생들을 괴롭히고 학자와 문화인들을 탄압하고 있으며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경제에 개입해서 모든 이권에 간섭합니다. 요즘도 경제인들을 수백명 불러다가 “김대중에게는 돈을 주지 말아라. 만일 돈을 주었다가는 너희 사업을 아주 망쳐놓겠다”고 협박해서 절대로 안 준다는 각서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각서를 썼다는 말도 밖에 나가서 안 하겠다는 각서를 또 한 장 받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독재의 본산입니다. 이 같은 정보정치를 그대로 놔두면 이 나라의 암흑과 독재는 영원할 뿐 아니라 국민 여러분의 권리와 자유가 소생될 길이 없습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중앙정보부를 단호히 폐지해서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킬 것을 여러분 앞에 약속드립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지방자치를 실시해서 민주주의 기초를 확립하겠습니다. 대통령 직속 하에 여성지위향상위원회를 두어서 우리 1천5백만 여성들의 교육과 생활과 사회적 대우에 대해 특별배려를 하고, 우리 여성들의 능력을 개발해서 지금까지 파묻혔던 여성들의 실력을 국가건설에 활용해 새로운 민족중흥의 힘을 발휘하게 할 것입니다. 여성문제에 대한 특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산당을 잡으려는 중앙정보부나 전국의 정보경찰들이 지금 공산당을 잡고있습니까. 내가 전국을 다녀보니까 그 사람들이 밤잠 안자고 잡으러 다니는 것은 공산당 간첩이 아니라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을 잡으러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공산당도 잡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을 정치적으로 악용해 사기를 떨어뜨리고 전력을 저하시키고 있습니다. 군대내 사고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고립돼버렸습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1년 이내 서울 5백50만 시민들이 안심하고 발 뻗고 잘 수 있는 국방태세를 완수할 것입니다. 첫째로 완전히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부가 서기 때문에 공산당이 발붙일 데가 없습니다. 모든 정보기관이 공산당 잡는 데 집중하니까 간첩이 얼씬도 못합니다. 국군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중립시키니까 오직 대공전투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국제적으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나서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되니까 우리 우방국가들이 더욱 도와주고 여기에 미군의 철수가 준비됩니다.

이번에 정권교체가 돼야만 민주주의가 승리하게 되고, 우리의 안보태세는 반석 위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가지 책임지고 말하겠습니다. 김일성은 앞으로 10년내에는 대한민국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38선을 돌파하지 못합니다. 김일성은 지금 그럴 힘이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 정치가 잘못돼서 우리 내부에서 사고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치를 하루빨리 시정해야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정권교체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향토예비군을 폐지한다고 말했더니 전국 국민들이 호응했습니다. 우리는 향토예비군이 없어도 예비역이 있어서 유사시 10분내 동원할 법과 제도가 있는 것입니다. 향토예비군은 민주주의 아래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향토예비군은 이중 병역의무입니다. 헌법위반입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향토예비군 중대장을 불러다 훈련시키는데 그것이 공산당을 잘 잡으라는 게 아니라 이번 대통령선거에 김대중 후보를 잘 때려잡으라는 얘기나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정권을 잡으면 국방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독재체제 강화에 악용되는 군사조직, 향토예비군을 전면 폐지한다는 것을 약속하는 바입니다.

공화당은 우리에 대해 생트집만 잡고 있습니다. 내가 볼 때 박정희 정권은 바뀌게 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선거 때는 야당이 비판을 하고 트집을 잡고, 여당이 정책대결을 하려고 하더니 이번에는 야당이 정책대결하고 여당이 트집만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화당이 이미 국민에게 내세울 밑천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4대국 한반도 전쟁 억제 방안’은 아까 유진산 당수가 말했기 때문에 내가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나라에서 제2의 일·청전쟁, 일·러전쟁을 하지 말아라. 뒷구멍에서 조정해 이 나라에 다시는 6·25같은 것을 일으키게 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뭐가 잘못입니까.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남북교류 문제에 있어서도 김일성이 전쟁을 포기하고 파괴분자를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 동포끼리 소식도 알아보고 체육경기도 하고 기자도 왔다갔다 하자, 뭐가 나쁘냐 말입니다. 세계에서 동족끼리 자기 부모형제간에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편지도 못하는 나라는 박정권 치하 대한민국뿐입니다.

국제정세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한 ‘4대국의 한반도 전쟁억제’ 방안은 내가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험프리 전 미국 부통령도 내 설명을 듣고 “당신의 그런 훌륭한 정책을 미국 지도자들이 다 알았으면 좋겠다”고 널리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 교수나 MIT대학의 윌리엄 교수 같은 사람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닉슨 대통령도 금년 연두교서에서 아시아에서의 안전보장은 4대국가에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박정희씨에게 조그마한 국내정치를 악용하려고만 하지 말고 크게 아시아와 세계를 내다보고, 50년과 1백년 앞을 내다보고 국가의 운명을 생각하는 대통령학을 공부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요즘 지방을 다녀보면 도처에 ‘중단없는 전진’이라고 써 있습니다. 박정권이 전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진은 무슨 전진입니까. 이 나라에서 중단없이 전진하는 것은 오직 부패입니다. 이 나라의 부정부패는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박정희씨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청와대 비서실의 책임자, 경호실 책임자, 박정희씨 처남, 박정희씨 처조카 사위….

독일같은 데서 1백만∼2백만원짜리 비싼 개를 사다가 사람도 못 먹는 쇠고기를 먹이는 이런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단단히 세금을 물려야 합니다. 노인은 땅 한 평 없는데 30만평·40만평짜리 골프장이 대한민국에 10개 이상 있습니다. 단단히 입장세를 내야 합니다. 3백만원·5백만원짜리 보석반지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은 사치세를 내야 합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냅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나라나 사회의 형편도 생각지 않고 사치와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유세와 특별세를 받는 일대 조세혁명을 단행할 것을 공약합니다.

군대와 국민은 하나
나의 공약에 대해 공화당이 실천가능성이 없다고 합니다. 이중곡가제와 도로포장, 초등학교 육성회비 폐지, 기타 지금까지 내가 한 공약에 모두 6백90억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예산 5천2백억의 1할5부만 절약해도 7백50억이 나옵니다. 오늘날 특정재벌과 결탁해 합법적으로 면세해준 세금만 1천2백억입니다. 정권을 잡아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면 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오히려 돈이 8백억이나 남는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박정권의 정신과 도덕을 무시한 정책을 시정해서 종교단체와 사회단체의, 또 문화인과 교육자들의 국민정신 재건과 국민도의 재건정책에 정부가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사회부패를 일소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하는 건전한 시민사회를 만들어 나라의 정신을 회복시키고 물질만능을 배격할 것입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국내외에 걸친 민주 거국내각을 실시하고, 군에 대해서도 내가 완전무결하게 장악·통솔할 것입니다. 민주국가의 군대는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군대도 그런 군대입니다. 군대와 국민을 따로 갈라놓아 생각하는 것은 박정권의 독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이번에 승리하면 군대는 3군 총사령관인 나의 명령에 복종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가 박정희씨와 공명선거에 대해 협의하려고 해도 그는 안 하려고 합니다. 서로 만나서 얘기하자고 해도 안 합니다. 국민 앞에서 TV나 라디오를 통해 토론하자고 해도 안 합니다. 독재적인 수법만 취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을 총동원해서 부정선거를 하고 있습니다.

4·19는 학생의 혁명이었습니다. 5·16은 군대가 저질렀습니다. 이제 오는 4월27일은 학생도 아니고 군대도 아닌 전 국민이 협력해서 이 나라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권교체한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우리가 이룩하자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7월1일은 청와대에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입니다. 서울시민 여러분, 7월1일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연금해제·사면복권 이후 서울에서의 최초 대중집회 연설 (1987.9.10 홍사단금요강좌)

민족발전을 위한 나의 정치철학
우리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도산 안창호(安昌浩)선생! 이 민족을 그토록 뜨겁게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셨던 우리들의 애국자 安昌浩 선생! 이 분은 독립투사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진실한 교육자였습니다. 이 분은 독립만이 목적이 아니라 민족의 발전이 목적이었습니다.도산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또 선양시키는 이 흥사단(興士團)에 와서 불초 이사람이 감히 민족발전을 위한 나의 생각을 말씀드린다는 것은 외람되기도 하지만,한편 생각하면 지극히 의의가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께 양해구할 것은,너무 열기를 내서 말하는 이사람이 좀 더운데 저고리를 벗어도 됩니까?(네)


우리민족을 생각할 때,아시아 대륙의 동쪽에 조그만 혹같이 붙어있는 한반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참으로 기적같은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중국을 보십시오.지금부터 4천년 전에 중국에서 일어났던 오늘의 한(漢)민족,이들이 양자강 이남까지 ·서쪽까지 ·동쪽까지 동화시켜왔습니다. 한 때 이민족들이 중국을 점령해서 많은 제국을 세웠지만,특히 원나라를 세워서 100년을 지배한 몽고족의 징기스칸이 했던 것, 동·서로 그 판도를 넓혀서 아시아 대륙의 최대패자(覇者)였던 몽고족,이 몽고족이 오늘날 모두 중국에 포함되어 버리고, 몽고인민공화국에는 150만 밖에 사람이 없습니다.또 1616년에 만주족이 청나라를 만들어 청조 300년을 통치했습니다. 중국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만주족은 한사람도 없이 증발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108년,한무제가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던 이래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종교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중국의 영향을 받아온 우리 한민족! 우리가 어떻게 하여 중국사람되지 않고 ,몽고사람·만주사람 다 중국사람됐는데 ,어떻게 우리만 되지않고 ,아시아 동쪽이 한반도가 오늘날 6천만 대민족이 -여러분 ! 6천만이면 얼마나 큽니까? 세계 160개 나라 중에 12번째 대민족입니다.영국보다 불란서보다 이태리보다 큰민족입니다.이런 대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교육수준이 높고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성취동기가 높은 이 민족이 여기 엄연히 있다,절대 중국사람되지 않는다,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민족을 생각할 때 과거 사대, 열등적인 역사관을 배제한다면,우리 조상들이야말로 이 어려운 지경에서 ,그 압도적인 영향속에서,우리 조선민족, 한민족의 자주성과 우리의 본질을 지켜온 우리조상들이 얼마나 위대한 조상들인지 새삼스럽게 감사하지 않울 수 없다 이거예요.만일 위대한 민족이 이웃나라를 함부로 강탈하고, 지배하고, 착취하고, 빼앗고 이런 민족을 위대한 민족 이라고 한다면 우리민족은 절대 위대한 민족이 아닙니다.

그러나 힘이 있어도 남을 침략하지 않고 그러나 내 주체성은 꼭 지키고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문화,독자적인 의식구조,독자적인 정치·경제·학문, 제도를 유지해 가는 그러한 평화적이고 자주적인 민족이 위대한 민족이라면 ,우리 한민족은 위대한 민족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겁니다.(박수)

여러분!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십시오.여기 안창호선생도 독립운동가의 한 분으로서 옥중에서 병을 얻어가지고 돌아가셨지만 세계에서 나라가 망했는데 근 40년동안,그 이상 이웃나라를 이리저리 방황하고 다니면서 독립군을 만들어 가지고 끝까지 투쟁한 그런 민족이 있습니까? 많은 식민지 민족이 있었지만 없습니다. 3·1운동이 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워서 불과 9년전에 있었던 제국제도를 폐지하고 국왕제도를 폐지하고 민주공화제를 만든,이러한 진취적인 민족,그래서 고난속에서 ,박해속에서 ,천대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간판을 짊어지고 상해에서 중경으로 옮겨다니면서 끝내 해방되는 날까지 우리의 명맥을 유지하려고 했던 이런 민족이 세계에 있느냐 이거예요.

이를테면 나는 지난번에 헌법 전문(憲法全文)을 만들때,이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고,또 그것이 다행히 넣어졌습니다만,나는 이런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의 해방은 미국의 승리 연합군의 승리 덕택이라는 말은 말은 안된다 이겁니다.만일 그렇다면, 카이로 회담에서, 포츠담 선언에서 한국 독립이 특별히 규정됐겠느냐? 한국의 독립이 그렇게 특별히 규정된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의 선열들이 만주에서, 시베리아에서, 중국대륙에서 목숨을 걸고 황야에서 이리떼의 밥이 되면서도 싸운 그 덕택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해방이 외세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라는 사대주의적인 역사관을 단호히 버려야 한다 이말이에요.(박수)

이렇게 쟁취한 해방이었는데, 해방 이후 42년은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민족발전이 저해된 그런 42년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조국이 둘로 갈라져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아무 책임도 없이 미·소 강대국이 멋대로 줄을 쳐가지고 우리를 두 동강이로 잘라놨어요. 그래가지고 북쪽은 공산주의 , 남쪽은 자본주의 또 이렇게 점령군의 영향을 받게 됐어요. 이러한 우리의 본의 아닌 분단, 통일신라 이래 1300년 동안 유지해왔던 우리의 통일국가가 이와 같이 외세에 의해 분단됐다는 그 사실뿐만 아니라, 역대 남북을 지배한 정권 배후에서는 이 외세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체제를 강요하고, 백성을 무시하고, 소수자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이렇게 해서 자기 나라에 굴종하고 추종하는 그런 체제를 강요하고,(박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민족의 발전을 저해한 최대 요인은 외세의 간섭이었다고 단언하면서, 그러한 외세의 간섭에 대해서 이것은 자기네들이 사적인 동기를 위해 여기에 영합하고 아부한 사대주의자들이 이 나라 민주발전을 망쳤다고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옳소!", 박수)

남한 내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우리의 민족발전을, 국민발전을 망친 것은 하나는 친일정권이요, 다른 하나는 군사정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박사, 명색이 애국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는 사람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파를 주위에 집결시켜 가지고 대한민국을 처음부터 친일파 일색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래서 군에는 광복군이나 독립군에 참가했던 사람을 제외되고, 만주군·일본군에 나갔던 일제의 고등계 형사들이 다 잡았고, 관리는 총독부 관리들이 다 잡았어요.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애국자들은 전부 소외되었을 뿐만아니라 김구선생의 경우에서 본바와 같이, 우리의 절대 애국자인, 일본놈들도 감히 죽이지 못했던 그 분이 친일파들 손에 의해서, 李承晩정권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것이 얼마나 민족반역적인 것인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박수)

나는 지금도 그렇게 억울하게 돌아가신 김구선생, 황량한 벌판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다 돌아가신 애국자들, 아버지 때문에 일제시대에 박해받고 공부도 못하다가 해방 후도 여전히 고통에 휩쓸려 교육을 못받은 그 후손들, 반면에 친일파의 자식들은 전부 고관대작, 부자 아버지 덕에 외국 유학도 가고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대대로 잘사는 그 사실, 이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李박사 치하의 현실인 것입니다. 李박사의 신념은 친일파적이었습니다. 그런데 李박사 시대가 끝나고 나니까 박정희라는 진짜 친일파가 등장했습니다.(웃음)

오늘의 정권이란 것도, 이 친일정권 박정희씨 가 친일파의 후계자들이요, 이 정권의 교관들이나 이 정부 이 사회의 소위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아버지가 친일파였고, 그 돈으로 외국 유학갔던 사랍들이요. 이런 자들이 이 나라를 계속 지배하고 있으니, 민족정통성이 서지 않는, 정의가 서지 않는, 올바르고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이 성공하지 못하는, 조국을 위해 몸바친 사람들이 버림받는 이런 사회야말로 민족발전을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사회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중략)  



제15대 대통령 취임사 (1998. 2. 25)

국난극복과 재도약의 새 시대를 엽시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수립 50년만에 처음 이루어진 여야 간 정권교체를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면서, 온갖 시련과 장벽을 넘어 진정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 여러분께 찬양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저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김영삼 전임 대통령, 폰 바이체커 독일 전 대통령,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전 대통령,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위원장 등 내외 귀빈을 비롯한 참석자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취임식의 역사적인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가 실현되는 자랑스러운 날입니다. 또한 민주주의와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려는 정부가 마침내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이 정부는 국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참된 [국민의 정부] 입니다. 모든 영광과 축복을 국민 여러분께 드리면서, 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봉사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3년 후면 새로운 세기를 맞게 됩니다. 21세기의 개막은 단순히 한 세기가 바뀌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혁명의 시작을 말합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탄생한 인간혁명으로부터 농업혁명, 도시혁명, 사상혁명, 산업혁명의 5대 혁명을 거쳐 인류는 이제 새로운 혁명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유형의 자원이 경제발전의 요소였던 산업사회로부터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정보사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보화 혁명은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들어, 국민경제로부터 세계경제시대로의 전환을 이끌고 있습 니다. 정보화 시대는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손쉽고 값 싸게 정보를 얻고 이용할 수 있는 시대를 말합니다. 이는 민주사회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전조에 전력을 다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 나 불행하게도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에게는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에 우리는 당면해 있습니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같이 밀려오는 만기외채를 막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나마 파국을 면하고 있는 것은 애국심으로 뭉친 국민 여러분의 협력과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그리고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EU국가 등 우방들의 도움 덕택입니다.

올 한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 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을 요구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찌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냉정하게 돌이켜 봐야 합니다. 정치, 경제, 금융을 이끌어온 지도자 들이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에 물들지 않았던들, 그리고 대기업들이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문어발처럼 거느리지 않았던들, 이러한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파탄의 책임은 국민 앞에 마땅히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의 어려움 속에서도 국민 여러분께서는 놀라운 애국심과 저력을 발휘하셨습니다. 우리는 IMF시대의 충격 속에서도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의 위업을 이룩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 모으기]에 나섰고 이미 20억 달러가 넘는 금을 모아 주셨습니다. 저는 황금보다 더 귀중한 국민 여러분의 애국심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한편 우리 근로자들은 자기 생활의 어려움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임금을 동결하는 등 고통분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수출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지난 3개월 간 연속해서 큰 규모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애국심과 저력에 대해 세계가 경탄하고 있습니다.

근로자와 사용자 그리고 정부는 대화를 통한 대타협으로 국난극복의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저는 이 일을 이루어낸 노사정 대표 여러분께 국민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국회의 다수당인 야당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난국은 여러분의 협력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든 것을 여러분과 같이 상의하겠습니다. 나라가 벼랑 끝에 서 있는 금년 1년만이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온 국민이 이를 바라고 있다고 믿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이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외교 안보 그리고 남북문제 등 모든 분야에서 좌절과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정치개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국민이 주인대접을 받고 주인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국정이 투명하게 되고 부정부패도 사라집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어떠한 정치보복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정부가 고통분담에 앞장서서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한과 기능을 민간과 지방자치단체에 대폭 이양하겠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데에는 더욱 힘 쓰겠습니다. 환경을 보존하고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작지만 강력한 정부], 이것이 [국민의 정부]가 지향 하는 목표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의 경제적 국난을 극복하고 우리 경제를 재도약시키는 일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병행시키겠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습니다. 결코 분리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다같이 받아들인 나라들은 한결같이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시장경제만 받아들인 나라들은 나치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에서 보여준 바와 같 이 참담한 좌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들 나라도 2차대전 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같이 받아들여 오늘과 같은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발전하게 되면 정경유착이나, 관치금융, 그리고 부정부패는 일어 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겪고 있는 오늘의 위기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해서 실천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물가를 잡아야 합니다. 물가안정 없이는 어떠한 경제정책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똑같이 중시하되, 대기업은 자율성을 보장하고 중소기업은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양자가 다같이 발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철저한 경쟁의 원리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품질좋고 가장 값싼 상품을 만들어 외채를 많이 벌어들이는 대기업이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기술입국의 소신을 가지고, 21세기 첨단산업시대에 기술강국으로 등장할 수 있는 정책을 과감히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벤처기업은 새로운 세기의 꽃입니다. 이를 적극 육성 하여 고부가가치의 제품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벤처기업은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서 실업문제를 해소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대기업과 이미 합의한 5대 개혁, 즉 기업의 투명성, 상호지급보증 금지, 건전한 재무구조, 핵심산업의 설정과 중소기업에 대한 협력, 그리고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책임성 확립은 반드시 관철될 것입니다.
이것만이 기업이 살고 우리 경제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정부는 기업의 자율성을 철저히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나 기업의 자기개혁 노력도 엄격히 요구할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수출 못지 않게 외국자본의 투자유치에 힘쓰겠습니다. 외자유치야말로 외자를 갚고, 국내기 업들의 경쟁력을 강화하며,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농업을 중시하고 특히 쌀의 자급자족은 반드시 실현 시켜야 합니다. 농어가 부채경감, 재해보상, 농축수산물 가격의 보장, 그리고 농촌 교육여건의 우선적 개선 등 농어민의 소득과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겠습니다.

애국심과 의욕에 충만한 자랑스러운 국민 여러분과 같이 올바른 경제개혁을 추진해 나간다면, 우리 경제는 오늘의 난국을 반드시 극복하고 내년 후년부터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저는 확실히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를 믿고 적극 도와주십시오.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해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건강한 사회를 위한 정신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존중되고 정의가 최고의 가치로 강조되는 정신혁명 말입니다. 바르게 산 사람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하는 그런 사회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고통도 보람도 같이 나누고, 기쁨도 함께 해야 합니다. 땀도 같이 흘리고 열매도 함께 거둬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혁명과 바른 사회의 구현에 모든 것을 바쳐 앞장서겠습니다. 노인이나 장애인들도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따뜻하게 감싸주어야 합니다. 저는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한숨짓는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런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높은 교육수준과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21세기 정보화 사회에 큰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입니다. 새 정부는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가 지식정보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컴퓨터를 가르치고 대학입시에서도 컴퓨터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 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나가겠습니다.

교육혁명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대학입시제도를 획 기적으로 개혁하고 능력 위주의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청소년들은 과외로부터 해방되고, 학부모들은 과중한 사교육비로부터 벗어나게 하겠습니다. 지식과 인격과 체력을 똑같이 중요시하는 지덕체의 전인교육을 실현시키겠습니다. 이러한 교육개혁은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성취 하겠다는 것을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굳게 다짐합니다.

우리는 민족문화의 세계화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 담겨 있는 높은 문화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겠습니다. 문화산업은 21세기의 기간산업입니다. 관광산업, 회의체 산업, 영상 산업, 문화적 특산품 등 무한한 시장이 기다리고 있는 부의 보고입니다.

중산층은 나라의 기본입니다. 봉급생활자, 중소기업 그리고 자영업자 등 중산층이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여성의 권익보장과 능력개발을 위해서 적극 힘쓰겠습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 나 남녀차별의 벽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청년은 나라의 희망이자 힘입니다. 그들을 위한 교육과 문화, 그리고 복지의 향상을 위해서 정부는 아낌없는 지원을 세워 나가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21세기는 경쟁과 협력의 세기입니다. 세계화 시대의 외교는 냉전시대와는 다른,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외교의 중심은 경제와 문화로 옮겨갈 것입니다. 협력 속에 이루어지는 무한경쟁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무역, 투자, 관광, 문화교류를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우리의 안보는 자주적 집단안보가 되어야 합니다. 국민적 단결과 사기 넘치는 강군을 토대로 자주적 안보태세를 강화하겠습니다. 동시에 한미 안보 체제를 더욱 굳건히 다지는 등의 집단안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한반도에서의 평화구축을 위해 4자회담을 반드시 성공시키는데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분단 반세기가 넘도록 대화와 교류는커녕 이산가족이 서로 부모형제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냉전적 남북관계는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합니다. 1천3백여년간 통일을 유지해온 우리 조상들에 대해서도 한없는 죄책감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남북문제 해결의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1991년 12월 13일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이 바로 그것 입니다.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협력과 불가침, 이 세 가지 사항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이미 남북한 당국 간에 이루어 져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실천만 하면 남북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통일에의 대로를 열어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북한에 대해 당면한 3원칙을 밝히 고자 합니다.

첫째, 어떠한 무력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세째,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남북간에 교류협력이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북한이 미국, 일본 등 우리의 우방국가나 국제기구와 교류협력을 추진해도 이를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새 정부는 현재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경수로 건설과 관련한 약속을 이행할 것입니다. 식량도 정부와 민간이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지원하는 데 인색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북한 당국에게 간곡히 호소합니다.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나이 들어 차츰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남북의 가족들이 만나고 서로 소식을 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 최근 북한이 긍정적인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점을 예의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와 학술의 교류, 정경분리에 입각한 경제교류도 확대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한 남북간의 여러 분야에서의 교류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우선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의합니다.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새 정부는 해외동포들과의 긴밀한 유대를 강화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해외동포들이 거주국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면서 한국계로서 안정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적극 돕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전진과 후퇴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고난을 딛고 힘차게 전진합시다. 국난극복과 재도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갑시다.


반만년 역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얼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민족수난의 굽이마다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구한 자랑스러운 선조들처럼, 우리 또한 오늘의 고난을 극복하고 내일에의 도약을 실천하는 위대한 역사의 창조자가 됩시다. 오늘의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읍시다.

우리 국민은 해낼 수 있습니다. 6.25의 폐허에서 일어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선두에 서 겠습니다. 우리 다같이 손잡고 힘차게 나아갑시다. 국난을 극복합시다. 재도약을 이룩합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영광을 다시 한번 드높입시다.

감사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문 (2000. 12. 10)

국왕 폐하, 왕세자와 공주 등 왕실가족 여러분,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위원 여러분, 그리고 내외 귀빈과 신사 숙녀 여러분.

노르웨이는 인권과 평화의 성지입니다. 노벨평화상은 세계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격려하는 숭고한 메시지입니다. 저에게 오늘 내려주신 영예에 대해서 다시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수 많은 동지들과 국민들을 생각할 때 오늘의 영광은 제가 차지할 것이 아니라 그 분들에게 바쳐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국민의 민주화와 남북 화해를 위한 노력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세계의 모든 나라와 벗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노벨평화상을 저에게 주신 이유 중의 하나는 지난 6월에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과 그 이후에 전개되고 있는 남북 화해•협력 과정에 대한 평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노벨위원회가 긍정적으로 평가해 준 최근의 남북관계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6월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북한에 갈 때 여러가지 걱정이 많았지만 오직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일념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회담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남북은 반세기 동안 분단된 가운데 3년에 걸친 전쟁을 치렀으며 휴전선의 철책을 사이에 놓고 불신과 증오로 50년을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남북관계를 평화와 협력의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저는 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북에 의한 적화통일을 용납하지 않는다.둘째,남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도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 셋째, 남북은 오로지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협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통일에 이르기까지는 얼마가 걸리더라도 서로 안심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북한은 처음에는 우리 햇볕정책을 북한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여기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관되고 성의있는 자세와 노르웨이를 비롯한 전세계 모든 나라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는 마침내 북한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남북 정상회담 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북 정상회담은 예상했던 대로 참으로 힘든 협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민족의 안전과 화해•협력을 염원하는 입장에서 결국 상당한 수준의 합의를 도출해 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조국의 통일을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이룩하자,또 통일을 서두르지 말고 우선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 협력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둘째,종래 남북 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통일방안에 대해서도 상당한 합의점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북한은 우리가 주장한 통일의 전 단계인 ‘1민족 2체제 2독립정부’의 ‘남북연합제’에 대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형태로 접근해 왔습니다.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통일에의 제도적 접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셋째, 한반도에 미군이 계속 주둔해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안전을 유지하도록 하자는 데에도 합의했습니다.

북한은 지난 50년 동안 남한에서의 미군 철수를 최대 쟁점으로 주장했습니다. 저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강조했습니다. “미•일•중•러의 4강에 둘러싸여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특수한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는 우리로서는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필수불가결하다. 미군은 현재 뿐 아니라 통일 후에도 필요하다. 유럽을 보라. 당초 ‘나토’의 창설 과 미군의 주둔은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침략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공산권이 멸망한 지금도 ‘나토’와 미군이 있지 않느냐.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그 존재가 계속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은 뜻밖에도 종래의 주장을 접고 적극적인 찬성의 뜻을 나타냈는데, 이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참으로 뜻 깊은 결단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이산가족이 만나는 데 합의했으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원만하게 실천에 옮겨지고 있습니다. 경제협력에 대해서도 합의를 했습니다. 이미 투자보장, 이중과세방지 등 4개의 협정을 체결하는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우리는 그 동안 북한에 대해 인도적 차원에서 비료 30만t과 식량 50만t을 지원했습니다.그리고 사회•문화 교류에 대해서도 합의해 스포츠, 문화예술, 관광 교류 등이 점차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또한 남북간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 국방장관회담이 열려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데 합의했습니다.남북 간의 분단된 철도와 도로를 다시 연결하기 위해 양쪽 군이 협력하는 데에도 합의했습니다.

한편 저는 남북관계의 개선만으로는 한반도에서 평화와 협력을 완벽 하게 성공시킬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나아가 일본과 다른 서방국가들과도 관계를 개선할 것을 적극 권 유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 ‘클린턴’대통령, ‘모리’총리 등 미•일 양국의 정상에게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권고했습니다.

또한 저는 지난 10월에 서울에서 열렸던 제3차 ASEM 정상회의에서 유럽의 우방국가들에게도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북•미 관계와 유럽•북한 관계는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한반도의 평화에 결정적인 영향과 진전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제가 민주화를 위해서 수십 년 동안 투쟁할 때 언제나 부딪힌 반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으며 그러한 뿌리가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아시아에는 오히려 서구보다 훨씬 더 이전에 인권사상이 있었고 ,민주주의와 상통한 사상의 뿌리가 있었습니다. ‘백성을 하늘로 삼는 다. ’‘사람이 즉 하늘이다. ’‘사람 섬기는 것을 하늘 섬기듯 하라. ’이런 것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근 3,000년 전부터 정치의 가장 근본요체로 주장되어 온 원리였습니다. 또한 2,5000년 전에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내 자신의 인권이 제일 중요하다’ 는 교리가 강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권사상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상통되는 사상과 제도도 많이 있었습니다. 공자의 후계자인 맹자는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다.하늘 이 백성에게 선정을 펴도록 그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다.그런데 만일 임금이 선정을 하지 않고 백성을 억압한다면 백성은 하늘을 대신해 들고일어나 임금을 쫓아낼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존 로크가 그의 사회계약론에서 설파한 국민주권사상보다 2,000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이미 기원 전에 봉건제도가 타파되고 군현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공무원을 시험에 의해서 뽑는 제도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병행해서 임금을 포함한 고관들의 권력 남용을 감시하는 강력한 사정제도도 존재했습니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에 대한 풍부한 사상과 제도의 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아시아에서는 대의적 민주제도의 기구는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서구사회의 독창적인 것으로서 인류의 역사에 크게 기여한 훌륭한 업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서구의 민주제도는 민주적 뿌리가 있는 아시아에서 이를 채택할 때 아시아에서도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일본•필리핀 •인도네시아•태국•인도•방글라데시•네팔•스리랑카 등 수 많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동티모르에서 주민들이 민병대의 혹독한 학살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독립을 지지하는 투표에 참가했습니다. 지금 미얀마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가 고난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웅산 수지 여사는 미얀마 국민과 민심의 폭 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미얀마에 민주주의가 반드시 회복되고 국 민에 의한 대의정치가 다시 부활하는 날이 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는 절대적인 가치인 동시에 경제 발전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민주주의가 없는 곳에 올바른 시장경제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또한 시장경제가 없으면 경쟁력 있는 경제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민주주의적 기반이 없는 국가경제는 사상누각일 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98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과 함께 ‘생산적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지난 2년 반 동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생산적 복지의 병행 실천이라는 국정철학 아래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적극 보장하고 있습니다. 금융•기업•공공•노동 부문의 4대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습니다. 복지의 중점을 저소득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인력 개발에 둠으로써 이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개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을 조속히 마 무리함으로써 전통산업과 정보산업,생물산업을 삼위일체로 발전시켜 세계 일류경제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21세기는 지식정보화시대로서 부(富)가 급속히 성장하는 시대입니다. 동시에 정보화시대는 부의 편차가 심화되어 빈부격차가 급격히 확대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국내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빈부격차도 커져 갑니다. 이것은 인권과 평화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심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21세기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인권의 탄압과 무력의 사용을 적극 반대해야 합니다. 아울러 정보화에서 오는 새로운 현상인 소외계층과 개발도상국의 정보격차를 해소함으로 써 인권과 평화를 저해하는 장애요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존경하는 국왕 폐하,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마지막으로 제 개인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릴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독재자들에 의해서 일생에 다섯 번에 걸쳐서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습니다. 6년의 감옥살이를 했고,40년을 연금과 망명과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이러한 시련을 이겨내는 데에는 우리 국민과 세계의 민주인사들의 성원의 힘이 컸다는 것은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동시에 제 개인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첫째,저는 하느님이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속에 살아 오고 있으며, 저는 이를 실제로 체험했습니다.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 저는 한국 군사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이 긴급뉴스에 경악했었습니다. 한국의 정보기관원들은 저를 일본 해안에 정박해 있던 그들의 공작선으로 끌고 가서 전신을 결박하고 눈과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바다에 던져 수장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때 저의 머리 속에 예수님이 선명하게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붙잡고 살려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를 구원하는 비행기가 와서 저는 죽음의 찰나에서 구출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저는 역사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의 위협을 이겨 왔습니다.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서 사형 언도를 받고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그 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저는 죽음의 공포에 떨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 데는 ‘정의필승’이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저의 확신이 크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국민과 세상을 위해 정의롭게 살고 헌신한 사람은 비록 당대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반드시 승자가 된다는 것을 저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승자들은 비록 당대에는 성공을 하더라도 후세 역사의 준엄한 심판 속에서 부끄러운 패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국왕 폐하,그리고 귀빈 여러분.

노벨상은 영광인 동시에 무한한 책임의 시작입니다. 저는 역사상의 위대한 승자들이 가르치고 알프레도 노벨 경(卿)이 우리에게 바라는 대로 나머지 인생을 바쳐 한국과 세계의 인권과 평화, 그리고 우리 민족의 화해•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여러분과 세계 모든 민주인사들의 성원과 편달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2000. 12. 10.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 특별연설 (2009.6.11)

존경하는 선배 동지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많이 나와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6.15와 10.4선언을 생각할 때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 대통령과 저만이 북한에 가서 남북정상회담을 한 그 사건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과 저하고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습니다. 둘 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노 대통령은 부산상고, 저는 목포상고를 나왔습니다(청중 웃음).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돈이 없어 대학에 못 갔고 저도 돈이 없어 대학에 못 갔습니다(청중 웃음). 노 대통령은 대학 못간 뒤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가 됐고, 저는 열심히 사업해서 돈 좀 벌었습니다(청중 웃음). 그 후로 저는 이승만 정권, 노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등 독재정권에 분개해 본업을 버리고 정치에 들어간 것입니다.

정치에 들어가서 또 다시 반독재투쟁을 같이 하는 등 노 대통령과 저는 참으로 연분이 많습니다. 당도 같이 했고, 국회의원도 같이 했고, 그리고 북한도 교대로 다녀왔습니다. 이런 걸 가만히 보니까 전생에 노 대통령과 저하고 무슨 형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형님은 제가 되고요(청중 웃음). 제가 노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내 몸의 반쪽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것은 지나간 과거만 봐도 여간한 인연이 아닙니다. 제가 대통령할 때 노 대통령을 해양수산부장관을 시켰습니다.

저는 오늘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을 맞이해서 먼저 이명박 대통령과 북한에 대해서 몇 말씀하고 싶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우리 국민이 얼마나 불안하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개성공단에서 철수하겠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북한에서는 매일같이 남한이 하는 일을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 무력대항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60년 동안이나 이러고 있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강력히 충고하고 싶습니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합의해 놓은 6.15와 10.4를 이 대통령은 반드시 지키십시오. 그래야 문제가 풀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방적으로 철수한 금강산 관광을 다시 복구시켜야 합니다. 개성공단에 노동자를 위한 숙소를 지어주기로 우리가 약속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명박 대통령이 6.15와 10.4의 약속을 지키고, 금강산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한 것을 철회하고, 개성공단 숙소 건설을 약속한 것 등 우리의 의무사항을 우리가 이행하겠다는 것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박수).

다음에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에게 말씀하고 싶습니다. 저는 북한이 많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1994년 제네바협정을 해 가지고 북한은 핵을 포기했습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 경수로를 지어주고 경제 원조를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클린턴 대통령이 합의해 놓은 것을 부시 대통령이 들어서 완전히 뒤집어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불신이 생겨났습니다.

또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운동 중에 자기가 당선되면 북한과 이란의 수반들을 직접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자기의 대북정책은 부시 정책이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가 하던 정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북한의 기대가 아주 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중동, 러시아, 심지어 쿠바까지 대화하겠다고 손 내밀면서 북한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 한다는 것은 북한으로서는 참으로 참기 어려운 모욕입니다. 북한이 또 다시 속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극단적인 핵개발까지 끌고 나간 것은 절대로 지지할 수 없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6자회담에 하루 빨리 참가해서, 또 미국과 교섭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해야 합니다. 한반도 비핵화는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제가 이번에 중국에 가서 시진핑 부주석을 만나 1시간 정도 얘기했는데, 중국 지도자 누구를 만나 봐도 북한 핵을 반대하는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저는 중국이 북한 핵을 상당히 반대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북한이 핵실험을 하니까 중국이 상당히 엄격한 비난을 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대북결의안이 합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억울한 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핵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핵을 만들면 누구에게 쓰겠습니까. 거기에는 우리 남한 사람도 포함돼 있을 것입니다. 1,300년 통일국가, 5,000년 역사를 가진 우리가 우리끼리 상대방을 전멸시키는 전쟁을 해서 되겠습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를 계속해서 아직 오바마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발표 안했기 때문에 기다릴 필요 있습니다. 물론 초조한 심정은 알겠지만,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클린턴 정책을 따라가겠다고 한 말이 있으므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번에 클린턴 전 대통령이 한국에 와서 저와 만찬을 했는데, 클린턴 대통령은 저와 같이 한 햇볕정책을 실천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도 북한 핵에 대해서는 절대 반대고, 그러나 상대방에 대해 상응하는 대가를 주면서 상대방 기분도 챙겨가면서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건의를 했는데, 자기가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여사에게 전달하겠다는 말도 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북한이 요구한 안전보장과 경제재건, 미국과 일본과의 국교 재개 등을 미국이 존중하고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북한 핵 문제는 1994년 제네바 회담에서 합의되었고, 2005년 6자회담 9.19 합의에 의해서,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과 외교관계를 열고, 한반도는 평화협정을 맺고, 미국은 북한에 대해 경제적 지원을 한다는 것을 합의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교섭과 인내심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해야지, 핵 문제를 갖고 나온다는 것은 안 된다고 김정일 위원장에게 강력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결국 제가 말한 것은 외교는 윈- 윈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도 좋고 나도 좋아야 외교가 성공합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장거리 미사일까지도 포기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그러므로 북한에 줄 것은 줘야 합니다. 그래서 외교도 해주고 경제원조도 하고 한반도 평화협정도 맺어야 합니다. 다 합의되어 있는 얘기를 미국이 실천을 안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 되었을 때 제가 당선된 것처럼 기뻤습니다. 또 힐러리 여사가 국무장관이 되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의 아내이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북핵 문제는 제네바 합의에 의해서 한반도 비핵화가, 북한의 핵 포기가 결정됐고, 그리고 6자 회담 합의에 의해서 북한 핵 문제가 다 합의되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클린턴 대통령에게도 ‘무엇이 안 되냐, 북한도 합의했고, 미국도 합의했다. 오바마 정부는 부시하고 다른데, 왜 북한을 안심하게 하고 북한도 기다릴 수 있는 기회를 안 주고 이런 데까지 왔느냐’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께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도처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 전국에서 500만명이 문상을 한 것을 보더라도 지금 우리 국민들의 심정이 어떤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국민이 걱정하는, 과거 50년간 피 흘려서 쟁취한 10년간의 민주주의가 위태롭지 않느냐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불안합니다.

민주주의는 나라의 기본입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죽었습니까. 광주에서, 인혁당 사건 등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독재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극복했습니다. 그래서 여야 정권교체를 통해서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그 모든 민주주의적 정치가 계속됐습니다. 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나왔을 때 반드시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청중 박수).

저는 오랜 정치 경험과 감각으로, 만일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가 지금과 같은 길로 계속 나간다면 국민도 불행하고, 이명박 정부도 불행하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리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큰 결단을 내리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더불어 여러분께도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 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누구든지 양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인 줄을 알면서도 행동하면 무서우니까, 시끄러우니까, 손해 보니까 회피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국민의 태도 때문에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죄 없이 세상을 뜨고 여러 가지 수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양심에 합당한 일입니까.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명 문상객 중 10분지 1인 50만명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럴 순 없다. 매일 같이 혐의를 흘리면서 정신적 타격을 주고, 스트레스 주고, 그럴 수는 없다.’ 50만명만 그렇게 나섰어도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하고, 희생자들에 대해 가슴 아픈 일입니까.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간 화해 협력을 이룩하는 모든 조건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선거 때는 나쁜 정당 말고 좋은 정당에 투표해야 하고, 여론조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4,700만 국민이 모두 양심을 갖고 서로 충고하고 비판하고 격려한다면 어떻게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일어나고, 소수 사람들만 영화를 누리고, 다수 사람들이 힘든 이런 사회가 되겠습니까.


우리 국민들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을 반대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는 어디까지나 6자회담에서, 미국과의 회담에서 반대해야지, 절대로 전쟁의 길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통일을 할 때 100년, 1000년이 걸리더라도 전쟁으로 통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유와 서민경제를 지키고,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지키는 일에 모두 들고 일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희망이 있는 나라를 만듭시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2009.6.27)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교동에서 독일 〈슈피겔〉 지와 인터뷰를 하다가 비서관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때 내가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해지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상주 측으로부터 영결식 추도사 부탁을 받고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못했습니다. 정부 측에서 반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정부에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추도사는 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추도사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같이 유쾌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런 지도자와 한 시대를 같이했던 것을 나는 아주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저승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어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동안 부디 저승에서라도 끝까지 국민을 지켜주십시오.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십시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조문객이 500만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것이 한과 한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노무현의 한과 국민의 한이 결합한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입니까. 1980년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해서 박종철 학생, 이한열 학생을 포함해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런데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꿈같습니다, 정말 꿈같습니다.

이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은 “각성하는 시민이어야 산다.”, “시민이 각성해서 시민이 지도자가 될 정도로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해온 ‘행동하는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꼭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바르게 투표하면 됩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민주주의 안 하는 정부는 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일 때, 그것조차 못한다면 좋은 나라와 민주국가 이런 말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노무현 대통령은 타고난,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감각을 가진 우리 헌정사에 보기 드문 지도자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을 사랑했고, 가까이했고, 벗이 되고자 했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서민 대중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일하게 자신의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당한 조사 과정에서 갖은 치욕과 억울함과 거짓과 명예훼손을 당해 결국 국민 앞에 목숨을 던지는 것 외에는 자기의 결백을 밝힐 길이 없다고 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500만이 통곡했습니다.

그분은 보기 드문 쾌남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라던 사람답게 사는 세상,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뜻을 계속 이어가서 끝내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했다고 해도 서거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은 허망한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이 이어서 잘해주길 부탁합니다.

나는 이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가 그런 후배 여러분의 정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터뷰하고 오연호 대표 기자가 쓴 이 책을 보니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후에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책으로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공부하십시오.

그래서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해 계승하고, 극복할 것이 있다면 그 대안을 만들어내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2009.6.27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7월 14일 주한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 초청연설을 위해 준비했던 마지막 미발표 연설문

9.19로 돌아가자
존경하는 장 마리 위르띠제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 회장, 장 자끄 그로하 소장, 유럽연합의 각국대사, 그리고 이 자리에 오신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몇 말씀드리게 된 것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21 세기는 세계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세기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시대가 출현한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 동안 세계는 미국의 일방주의 시대였습니다. 세계는 미국과의 친소관계, 이해관계, 종교적 차이 등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후 세계는 달라졌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의 친소와 원근에 상관없이 대화를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세계는 그동안 미국의 이분주의에 고통을 겪다가 이제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대화와 협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 부풀어 오른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그 동안 소원하고 적대관계에 있던 이란, 시리아, 러시아, 쿠바 등과 대화를 시작하고 있으며 이슬람 세계와의 접근이라는 획기적인 자세도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반도 문제만은 예외가 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란, 북한의 지도자들과 직접 만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당선 이후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취했던 정책처럼 유연한 태도로 북한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를 크게 고무시켰습니다. 아마 북한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태는 우리의 기대처럼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오바마 정권은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 언급하지 않고 차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바마 정부의 태도에 실망하고 위협을 느낀 북한은 극단적인 반발자세로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문제를 둘러싼 북한 내부의 상황이 사태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만, 여하튼 북한으로서는 지금 절박한 입장에 처한 것은 사실입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서 안심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든지, 그것이 불가능하면 사생결단의 자세로 생존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북한은 핵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 정부를 이은 부시 정부는 당시 합의된 경수로 건설, 국교정상화, 경제협력 등의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그리고 북미간 실질적인 합의에 접근한 장거리 미사일 문제 협상도 부시 정권에 의해서 파기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하여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고, IAEA(국제원자력기구) 감시요원을 추방시켰으며, 핵실험까지 강행했습니다. 북핵 문제는 다시 꽁꽁 얼어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부시 정부는 6년 동안 북한에 온갖 압박을 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굴복하지 않았고 북한정권이 무너지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은 태도를 바꾸어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의 합의를 통해 핵문제 해결의 길을 열었습니다.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한다. 미국은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경제지원을 한다. 미국과 북한은 협력해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실현한다’ 등이 합의되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북한 핵문제 해결에 다시 희망의 무지개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다시 핵 사찰 문제, 에너지 지원 부진 등으로 혼미한 사태가 거듭되다가 부시 정권은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지도자와 직접 대화를 통해서 핵문제를 풀겠다는 오바마 정권이 등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바마 정권 하에서는 세계적인 문제들이 대화를 통해 유연하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북한과의 관계도 상당한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한반도 비핵화에 협조하는 동시에 2005년 9.19 합의에서 이루어진 북미 국교 정상화를 위한 관계개선 등의 약속이 지켜질 것으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태는 우울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북한 핵문제는 전쟁으로 해결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경제봉쇄도 중국이 협력하지 않는 한 성공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저는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해서 시진핑 국가부주석 등 여러 정치지도자들과 대화했습니다. 중국의 태도는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북한 핵을 절대 반대한다. 그러나 이웃국가인 북한에 대한 경제적 원조는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역사적, 지리적 관계로 봐서 이웃국가인 북한이 파멸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을 것입니다.

전쟁이 있을 수 없고, 경제제재가 큰 효과를 얻지 못한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대화와 협상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국제적 제재는 어느 정도 고통을 주겠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협상은 우방국가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이해를 주고받고 윈윈(win-win)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와도 얼마든지 협상을 해야 합니다. 북한의 근본적 목표는 국가안보와 체제보장, 북미 국교 정상화와 경제협력을 통한 국제사회의 진출입니다. 또한 한국과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 역시 북한으로 하여금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포기하게 해서 태평양 국가들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안전보장, 핵과 미사일 문제의 해결,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조건입니다. 이 조건에 대한 합의는 이미 2005년 9.19 선언으로 합의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북한은 완전무결하게 핵을 포기해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시켜야 합니다. 미국은 북한과 국교 정상화하고 북한을 국제사회에 편입시켜서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평화롭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원만한 해결의 길입니다.

변화를 내건 오바마 대통령은 오래된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종식시키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비핵화를 통한 점진적 관계개선'이라는, 장기간이 소요되는 단계별 접근방식을 지속하기에는 상황이 달라졌고, 사태가 급박합니다. 북한의 핵무장을 조속히 막아야 합니다.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라는 근본적이고도 포괄적인 접근방법으로 전환할 때가 되었습니다. 평화협정, 외교관계 수립, 경제협력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 함께 핵 폐기를 실현하는 일괄타결방식으로 한반도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다시 압축해서 말씀드리면 오늘의 북핵문제 해결방안은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길뿐입니다. 이 외에 대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원칙에 합의한 바 있습니다.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의 공동성명, 그것을 준수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도 좋고, 일본도 좋고, 중국도 좋고, 러시아도 좋고, 한국도 좋고, 북한도 좋은 것입니다. 다시 9.19 선언으로 돌아갑시다. 그리하여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안전, 협력의 시대를 열어갑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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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라딘 편집팀 블로그
   http://blog.aladdin.co.kr/editors/category/21893355?communitytype=MyPaper
2009/08/30 22:53 2009/08/30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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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인용들
1993년의 일이다. 13세의 조던 챈들러가 말했다. “마이클 잭슨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사진)은 알몸 수색을 당했고 언론은 그의 집에서 포르노 잡지와 어린이의 나체가 그려진 그림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잭슨과 섹스를 했고 입으로 하는 성행위까지 강요당했다는 챈들러의 진술 또한 연일 뉴스를 장식했다. 챈들러의 가족은 2330만 달러를 합의금으로 챙겼다.

2001 년의 일이다. 잭슨이 말했다. “소니는 아티스트로서의 제 재능을 파괴하려 해요. 모욕을 당해왔습니다.” 뉴욕 투어 중 할렘가를 지나던 참이었다. <인빈서블> 앨범 출시 이후 격해진 소니뮤직과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청중 가운데 누군가 소니를 욕하며 가운뎃손가락을 올리자 잭슨도 따라 했다. 그날 미국의 주요 언론은 일제히 마이클 잭슨의 상스러운 손짓을 수십 번씩 되풀이해 방송했다. 잭슨은 소니와의 연장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2003년의 일이다. 13세의 게빈 아르비조가 말했다. “마이클 잭슨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그는 잭슨의 도움으로 암수술을 받고 건강해진 상태였다. 200명이 넘는 증인이 소환됐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소년의 어머니를 신뢰할 수 없다는 증거가 속출했다. 수년에 걸쳐 결국 무죄판결이 내려졌지만 3억 달러에 이르는 소송 비용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2009년 6월25일, 소아성애자면서 성형중독자이고 흑인을 혐오해 백인이 되고자 했다는 마이클 잭슨이 죽었다. 어느 한쪽 주장을 일관되게 전달해왔던 언론의 바로 그 지면에는 잭슨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 회고하는 기사가 채워졌다. 고인이 반대했으나 소니가 일방적으로 발매했던 두 장의 히트곡 편집 앨범과 <스릴러>는 일주일 만에 31만 장이나 팔려나갔다. 소니와 소니뮤직의 회장은 “잭슨은 시인이고 천재였다”라고 입을 모았다. 잭슨에게 소아성애자라는 꼬리표를 남겼던 조던 챈들러는 당시 주장이 아버지의 강요로 이뤄진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다.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 자신을 용서해줄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없게 돼 원통하다고 덧붙였다. 조만간 챈들러의 자서전이 출간될 예정이다.

살아 있는 누군가는 깎아내려짐으로써 상품화된다. 이미 죽은 누군가는 신화화됨으로써 상품화된다. 어제 잭슨을 욕해 배를 채웠던 사람들이 오늘 잭슨을 우러러 다시 배를 채운다. 잭슨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바뀌었지만, 정작 그를 둘러싼 세계의 동기는 변하지 않았다. 진심과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괴물은, 그렇게 우상이 되었다.
2009/07/16 22:50 2009/07/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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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첫 번째 정리 by 노종문)

일시: 2009.5.25. 19:30~21:30
장소: IVP 2층 회의실
참석자
양형주(목사, 대전초원교회)
김명윤(목사, 수서교회)
노종문(목사, IVP 총무)

노: 톰 라이트의 훌륭한 기여는 지난 세기의 성서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해 놓은 방대한 내용들을 잘 정리해주고, 복음주의적으로 잘 소화하여 해설해 줌으로써, 그 거대한 지식의 축적물을 교회가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물고를 터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그 훌륭한 사례가 될 수 있는데, 학문적 성경 연구와 교회의 선포를 연결시켜 주는 소중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톰 라이트의 중요한 저서인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을 보면 그가 주로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기존의 유대인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와 세계관을 어떻게 전복시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통념적인 이야기 세계를 여러 면에서 전복시켜서 그들의 세계관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오늘날의 교회가 가진 통념적인 이야기 세계를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 동안 우리는 예수 믿고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이야기를 익숙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성경적 종말론과 소망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기독교인들의 이야기 세계를 다시 한번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동시에 교회를 위해 좋은 기여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김: 저는 조금 비판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뭔가 한 두 단계를 건너 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부활과 같이 신약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말하는 내용을 굳이 여러 가지 문화적인 설명으로 회피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당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비판적 질문을 제기한 것처럼 그 텍스트의 내용이 당시의 세계관과 신앙의 반영이 아니냐 하는 질문에 직면해야 하는데, 이 책은 단순히 텍스트 뒤로 숨었다는 느낌이 좀 듭니다. 텍스트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오늘날의 컨텍스트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건너 뛰는 느낌이 든다는 거죠. 앞 부분에서 1세기 상황을 분석하면서 텍스트를 설명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우리 시대의 상황은 텍스트의 해석에 대한 가능성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이미 내려진 결론에 대한 적용의 장으로만 한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계속 기대를 가지면서 읽어내려 갔는데 명쾌하게 안 풀린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사실 설교할 때 가장 걸리는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도 부활한다. 이게 어떻게 성립하느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건 나름대로 조명할 수 있어요. 그리고 성경이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 두 사건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이 책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우주적 사건이 되려면, 부활이 예수라는 특수한 경우에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으로 인류와 죽음과의 관계를 흔들어 놓은 사건이 되는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부활했답니다. 많은 증인이 봤어요. 근데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 부활했으면 여기 있어야지. 그 사람이 부활한 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되면 이건 아주 특수하고 희귀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은 될 수 있지만, 그걸 보고 나도 부활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저로서는 제일 큰 관심이었는데, 그 부분은 여전히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렇게 믿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양: 어떤 내용이 들어갔으면 하는 기대가 있으셨습니까?

김: 말하자면, ‘그가 우리같이 되심은 우리가 그와 같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와 같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설정해주는 기독론적인 장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그의 부활을 보고 우리가 우리의 부활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 하는 내용을 다루어주는. 예수님은 그때 부활했는데 우리의 부활은 아직 안 일어나고 있는 이 간극이 있잖아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있을 지 모르겠는데 우리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아직 없다는 거죠.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연결 고리가 나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봤는데 그게 끝까지 안 나오는 거에요.

양: 그것과 관련해서 뒷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보증이 되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보증’이라는 말에는 ‘첫 번째 납입금’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첫 보증으로 부활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되는 것이죠.

김: 아무튼 저는 그것까지 좀 더 시원하게 말해줬으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얘기도 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관련해서 저는 또 승천에 대한 의구심이 항상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 우리 가운데 있으면 간단한 문젠데. 도마의 경우처럼 누구든지 불신하는 사람 앞에 나타나서 만져봐, 하면 전도고 뭐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도마 이후로 이천 년 동안 만져지는 예수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그 어간에 있었던, 제자들이나 목격자 사이에 있었던 그 사건은 그 후로 재현되진 않았습니다. 그게 승천과 재림으로 설명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 활동하는 물질적 육신을 가진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서 우리가 보증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활 사건과 우리의 경험과의 연속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이 질문은 여기서 명쾌하게 다루지 않았는데, 다 설명 됐다고 생각하고 비껴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서 마음에 와 닿았던 내용은 우리가 오늘날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망할 세상이다, 벼랑으로 가는 차 기름칠 해서 뭐하냐, 이런 태도가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 행하는 모든 수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재창조 하신다고 설명하는 부분들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는 부활이라는 것이 1세기적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말할 순 없을까 하는 의혹이 좀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시각적으로 만져지고 경험되고,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존재론을 이야기하려는 그 태도가 특수한 하나의 세계관하고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니냐, 서구적인 세계관과 연결되어있는 존재론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아닐까요.

노: 제가 생각하기에는 부활을 설명하는 다른 어떤 세계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건인 것 같습니다. 보통 서구의 세계관에 두 가지 근원 즉, 헬라적 세계관과 히브리적 세계관이 존재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나는 물질 세계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물질 세계가 창조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세계라고 봅니다. 톰 라이트가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부활은 창조가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믿는 세계관을 확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바로 그것이 전통적인 기독교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저도 아쉬웠던 점을 하나 이야기 하면, 책의 뒷 부분에서 실천적 대안과 거룩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책에서는 성령님에 관한 언급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행전이고, 성령님의 선교거든요. 한국 교회에는 성령님에 대해 상당히 강조하고 있는데, 성령님을 빼고 하나님이 하시고 우리가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 어, 성령님은? 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지요. 지금이 성령의 시대라고 한다면 성령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역할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주었으면 했습니다.

노: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은, 성령님의 위치는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진술이 구체적으로 안되었는지 모르겠지만요. 성령님은 피조세계의 부활이라는 약속을 현재화하는 새 창조의 영이시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육체적으로 부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부재하시면서도 임재하시는 그 미묘한 역할을 감당하시는 분으로서 성령님이 계신 것이잖아요. 톰 라이트가 지적하듯이, 예수님이 교회와 지나치게 일치되면 교회는 예수님을 볼모로 잡고 승리주의적 태도를 가질 수가 있지만, 예수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는 지금 이 물질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일을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죠.
 
양: 예. 그런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독자들이 오해하기 쉽죠.

김: 그래서 저도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 드는 것이, 이 정도 이해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이것은 알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건너뛰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예요. 앞부분에서 부활을 증명하고, 그 사건의 의미와 충격을 서술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이게 전제가 되었다면 그 다음은 실천으로 넘어 가도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우리 입장에서는 조금 더 친절한 징검다리가 있었으면 좋았겠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 100페이지나 200페이지 정도 늘렸더라면 하는 소망이 조금...

노: 이 책의 원제목이 Surprised by Hope니까, 주로 Hope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Hope의 핵심 내용은 부활이고, 부활만 일어나면 그 다음에 자동적으로 오게 되어 있는 새로운 창조인 것 같습니다.

양: 사실 이건 엄청나게 충격적인 내용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Hope가 죽음을 이긴다는 것 아닙니까. 사실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떨고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데,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이 있다는 것이죠. 그 소망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죽음을 이기고, 이 세상을 장악한 악을 이기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것,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에요.
그렇다면 사실 보증이라는 말이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텔레비전을 살 때 돈을 일시불로 다 내지 않고 계약금만 주면 가져올 수 있잖아요. 그리고 집에 두고 계속 돈을 조금씩 내서 완전히 갚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부활도 우리에게 오는 거죠. 예수님의 부활이 첫 보증금을 내신 것과 같은 사건이죠. 그런 면에서 우리는 상당히 뚜렷한 비전이 있고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노: 저는 부활이 개인의 부활을 담보한다는 차원보다는 온 세상이 부활을 위해서 진행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지금 온 세상이 궁극적인 재탄생을 향해서 나가고 있다. 이게 역사의 의미다. 이런 말이 좀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복음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상당 부분이 소멸하거나 파괴되거나 망가지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는 건 좋은데 너무 많이 망가진 상태로 가니까 뭐 크게 소망스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회복의 비전, 고통과 고난 자체가 온전히 극복되는 그런 비전을 품게 만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말 중에, 과거에 일어났던 슬픈 일과 고통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채로 마지막만 좋으면 뭐하냐 그런 말이 있잖아요. 부활과 재창조의 복음은 일부분만 좋아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변혁되는 그 운동을 하나님이 지금 계획하시고 진행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온 우주의 변화라는 점이 굉장히 새로운 기대를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우종학씨의 [블랙홀 교향곡]을 읽었는데, 그 책을 보니 우주가 너무 넓은 겁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우주라는 공간에 비하면 지구는 이게 뭐 진짜 너무 말도 안 될 정도로 좁은 공간인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우주가 이렇게 넓은데, 만일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셨다면 이것은 어처구니 없는 공간의 낭비다. 그러므로 우주를 하나님이 만드셨을 리가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의 승천 이야기에 대한 해설에서, 예수님의 승천이 하나님의 통제실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그 곳에 들어가면 우주의 모든 공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그런 위치가 된다고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상상도 하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나중에 저 넓은 우주를 다 사용할 계획을 준비해 두셨는지도 모르겠다.

김: 그 말씀을 들으면서 방금 제가 찾던 유비가 하나 떠올랐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매우 흥미로웠던 것이 사고의 전환이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잡다한 사건들과 경험들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려고 했는데, 이제 부활이라는 곳에 지레의 받침대를 놓고 거꾸로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이 굉장히 신선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수많은 세계관적인 논의들을 청소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점을 명쾌하게 설명해줄 비유가 없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방금 떠오른 것이 뭐냐 하면 영화 [트루먼 쇼]입니다. 그 영화에서 트루먼이 완벽하게 지어진 스튜디오 세계 안에 살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장면에서 스튜디오 등이 하나 떨어집니다. 등이 떨어지는 것은 아주 작은 하나의 사건인데, 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세계 전체의 구조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면은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문은 사실 전체 공간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구명에 불과하지만 그 구멍의 존재 자체가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우주론을 다 무너뜨리는 한 구멍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허구성을 한 점이 폭로할 수 있는 거죠.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고 싶었지만 뭔가 잡히지 않았던 부분이었어요. 지금 다시 읽으면 이 한 점의 파워를 더 생생하게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 양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사고에 길들여져 있어서 한 사람 보다는 수많은 사람의 증거를 찾는 것이죠. 단 한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논하는 논리적 점프에 대한 부담감이 항상 있었는데 지금 얘기하다 보니까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해 천장에 구멍이 하나 뚫린 겁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또 다른 빛이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죠.

노: 그 비유가 아주 적절한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에 기독교 세계관에 관해 다시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이 현대의 다른 세계관과는 달리 존재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바닥에까지 내려가면 그 존재론적 기초의 기둥이 되는 사건이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단순한 선언적 명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며 그 사건 때문에 우주관 자체가 전혀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부활을 복음의 중심에 두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지금까지는 상대적으로 속죄 쪽에 너무 집중하다가 보니 부활이 복음에서 부차적인 요소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또한 속죄마저 개인 구원의 문제와 죽어서 천국 가자는 식의 메시지로만 해석이 되어 버리니까 복음의 어떤 전복하는 힘이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양: 그런데 이 책이 제시하는 복음의 전복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복음 운동이 과연 그런 모습이었는가 좀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였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공동체가 탄생한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로마 제국 체제 전체를 정복하고 뒤집는 어마어마한 운동이 일어났다기 보다는, 우리가 보통 선교라고 부르는 정도, 즉, 가서 복음을 전하고, 아레오바고 같은 데서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과 논쟁하고, 옮겨가고, 교회세우고, 또 옮겨가고, 이렇게 된 거잖아요? 물론 얼마 후에는 환난과 핍박이 있고, 그 환난 속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강한 비판의 메시지가 포함된 요한계시록이 나오기는 하는데, 정치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복음 전파로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는 성격이 달라진다는 느낌이 사실 있는 것 같습니다.

노: 사도행전에 기록된 교회가 복음전파하는 모습하고 이 책에 나타난 복음의 전복성에 대한 해석이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말이군요.

김: 이 책에서 파루시아(왕의 현존)라는 말을 설명할 때 그 부분을 좀 언급하는 것 같아요. 바울은 누가 정말로 세계를 다스리는가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며 그 단어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최근에 [복음과 상황] 인터뷰에서 김세윤 박사는 바울이 현실적인 로마제국에 대한 두 가지 생각, 즉, 로마가 궁극적인 통치자는 아니지만, 또한 로마제국이 이룬 평화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유리하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주권자가 예수님이라고 선포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굳이 그걸 가지고 로마제국과 대립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다. 구원자. 이런 의미 자체가 상당한 정치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었음에도 그 극단으로는 가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에 집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노: 그렇게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은 이유는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요구가 정치적 액션이 아니라, 뭐랄까 십자가의 길과 그 후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 이런 것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가 어떤 정치적인 액션이 아니었고, 그냥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갔는데 정치적인 세력과 충돌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교회도 그들이 받은 사명이 예수가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 정치적 핍박이 오면 받는 거고, 핍박이 없으면 즐겁게 또 계속 선포하는 것이었죠. 또 통치자들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잠정적인 권세로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관하실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전복시키는 것이 목표는 아니라는 것이 초대교회의 인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도 사실은 로마 제국이 그들을 핍박했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가 나온 거지 핍박이 없었다면 로마 제국을 그렇게 사단의 졸개로 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양: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를 쓴 로핑크는 당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대조 사회라고 말을 하잖아요. 제자 공동체가 그야말로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사회였고, 그래서 세속 체제와 너무나 대조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로마가 영향을 받아서 바뀌었다는 식으로 서술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글로벌 이슈를 갖고 적극적으로 액션을 취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끌어오는 노력 보다는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이루고 그로부터 어마어마한 공동체적 변혁력이 생겨나는 그런 그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지금은 문제가 되는 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너무 욕을 많이 먹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의 변화보다 먼저 교회가 대조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부분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요? 이런 부분이 이 책에는 생략된 느낌이 듭니다.

김: 무시했다고 생각되진 않는데 생략된 것 같습니다.

노: 저는 이 책이 제시하는 부활과 새 창조라는 비전을 중심으로 우리가 복음을 새롭게 재구성 한다면, 그리고 철저히 그 패러다임에 맞춰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우리 교회의 모습이 변화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수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로마 제국 내에서 미미한 존재였고, 그들의 공동체는 변두리의 소수자 공동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들의 복음전파는 전략적으로 보아도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오늘 한국 교회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이미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학적인 성찰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힘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인 집권자들과 힘있는 교회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노: 이 책에서도 잠깐 다루지만,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가진 내러티브 자체가 모던적이어서 발전과 진보의 패러다임으로 현실을 해석합니다. 한쪽은 경제 성장을 통해서 돌파구를 모색하는 것이고, 한쪽은 민주화 내지는 계급 투쟁을 통해 현실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지만, 양쪽 모두 모더니티의 진보의 환상을 안고 있습니다. 이런 내러티브는 그 틀 자체의 한계로 인해 약자의 문제라든지 악의 문제를 다룰 수 없었습니다. 현 정권이나 한국교회의 일부 흐름도 힘으로 뭔가 밀어붙이고 제압을 하여 평화도 만들고 발전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던적인 스토리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이 내러티브 자체를 좀 새로운 것으로 대치하고 현실 정치와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성숙함이 필요한데, 이것은 한국에도 없고 미국에도 없고 사실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더니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성경적인 내러티브를 써내야 할 과제가 있는 거죠. 예를 들면 약자 중심의 내러티브라든지, 출애굽 스토리와 같은 그런 종류의 내러티브로 한국 역사를 읽는 다든지, 뭔가 좀 다른 이야기로 우리의 삶을 읽고 그에 비추어 정치적 과제를 설정하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양: 사실 부활의 능력은 십자가를 전제로 했을 때 오는 거잖아요. 십자가는 우리가 제일 약하고 무력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건데, 사실 우리가 힘이 있을 때는 십자가가 사라지게 되죠. 저는 이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대안들이 교회가 어느 정도 사람이 있고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실은 우리가 십자가의 무력함을 통해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됩니다.

노: 결국 이 부활이 소망이 되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때인 것 같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며 경험되는 것인데, 부활 만을 강조하다 보면 아까 말씀하신 십자가의 길이 또 무시될 수 있겠네요.

김: 이 책은 여러 강연들을 엮으면서 정리를 했기 때문에 연결 부분이 느슨한 것 같습니다. 큰 덩어리는 두 가지인데, 부활에 대한 상세한 논의와 하나님 나라 운동의 현실적인 과제들 이 두 개의 큰 기둥이 있고 그 사이는 약간 느슨하게 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 한 권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 책은 복음주의적 사회참여를 위한 든든한 신학적 기초를 제시하는 결정판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명목상으로만 가지고 있는 사회 변혁 운동들은 뭔가 신학적 기초가 부족했고, 반대로 보수적인 진영에서는 왜 세상을 개혁해야 되는지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는데, 톰 라이트를 비롯하여 최근의 복음주의자들의 논의들이 사회참여와 복음 사이의 튼튼한 다리를 놓는 좋은 기여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소위 운동권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면서 내가 가졌던 당혹감은 내가 교회에서 만나는 청년보다 이 사람들이 더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윤리적으로 낫고, 의지도 강하고.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 사람들을 전도해서 우리 교회로 데리고 가면 타락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오히려 교회의 청년들을 이렇게 만들어야 되는 것 아니냐. 그들에게서는 정말 이 사회의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과 열정이 느껴지는데, 이들은 자기들끼리 신앙 공동체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의 이기적인 자아와 죄성에서 벗어나서 정말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헌신하는 존재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교회는 사람들을 자기 울타리 안에 꽁꽁 묶어놓고 있고,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통해 중요한 일들이 진행되니, 과연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손이 따로 하나씩 두 개가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어요.
요즘 나름대로 정리하는 생각은 끝이 다르더라는 거에요, 끝이. 인간적인 개혁이라는 것은 그 어떤 수많은 지뢰밭들이 있는 것 같아요. 죄성의 유혹과 성취의 결과물을 자기들이 취하려는 욕심들 때문에 개혁의 주체가 어느 순간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런 일들이 내 주변에서도 지난 20년 동안 종종 보이더군요. 부활과 신앙의 세계를 전제로 가지지 않은 인간적인 개혁이 갖는 수많은 덫들이 그때는 안 보였는데 지금은 조금씩 보이면서 정말 이 세상 개혁을 위한 토대가 복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노: 이 책에서 톰 라이트가 약간 미묘한 의미를 담아서 표현하는 경구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활을 말할 때,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 이라는 표현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이라는 거죠.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이고, 하나님 나라를 정말 건설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죠. 우리는 그 일을 기대하면서 지금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소명 받아 실행하는 것이고. 이런 긴장을 놓치면, 아까 말씀 하셨듯이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평가하면서 또 성취감을 맛보려고 하고 뭐 이렇게 되는데, 그것은 기독교적 사회참여를 천박한 수준에서 이해한 것이죠. 하나님 나라는 결국 하나님 주권에 의해서 오는 나라기 때문에, 우리는 기본적으로 기다리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큰 비전을 보면서 무엇인가 그것을 준비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고요.
초대교회가 로마사회에서 노예제도를 왜 대대적으로 뒤집어 엎지 않았을까. 그런 면을 보면 초대교회는 알았던 것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직접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오는 나라인데, 그걸 기다리는 중에 우리는 그 첫 열매를 누리면서 축하하고 있는 공동체다. 그런 정도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러면서 기뻐하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거다 곧 이루어질 거다’라는 기대와 전망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그래서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예상보다 지연이 되었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는 것 자체가 크게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가 첫 열매고 하나님 나라를 조금 미리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때는 하나님이 정하실 것이다’라는 패러다임 자체가 크게 바뀐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게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양: 근데 조금 아쉬운 것은, 지옥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으면 좋았겠는데…

김: 저도 그 부분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양: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에 대해서 천국 못지 않은 관심이 있잖아요. 단테의 신곡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지옥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묘사가 나오거든요. 이 책이 지옥에 대해 명확한 그림을 제시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 정도의 말로 마치니까 아쉽더라구요. 물론 신약성경이 지옥에 대해 더 자세히 제시하지 않는 것도 이유이긴 하지만요.
오늘날 교회에서는 지옥을 설교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시대적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지. 그럼에도 은근히 다 전제하고 있는 것이 지옥이거든요. 이 책의 한 장의 제목이 연옥, 낙원, 지옥인데, 연옥과 낙원까지는 좋은 설명을 하는데, 지옥은 전통적인 지옥 그림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넘어가는데 뭔가 허전한 느낌입니다.

김: 그것도 아마 일종의 컨텍스트와 관련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자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 이야기 조차 안 한다, 그런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대다수 영국 성공회 교회들이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기 때문에 자기는 분명하게 이렇게 말하겠다. 다만 이거보다 더 말하는 것은 자기 입장에서는 어렵다. 아무도 모르는 영역이다. 그 정도에서 멎은 것 같아요.

양: 가끔 지옥에 다녀 왔다고 말하는 분들이 묘사하는 지옥에 대해 들어보면 지옥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곳인데, (웃음) 좀 아쉽네요.

노: 성경 본문만으로 본다면 지옥에 대해 이 정도로 가르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상상력이 덧입혀지고 그것이 교회의 전통으로 내려와서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양: 하지만, 단테의 신곡에 그려진 지옥의 많은 장면들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내용을 기초로 쓴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계시록에 묘사된 지옥에 대한 기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계시록을 1세기의 이야기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우리가 종말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는 많은 부분이 계시록 때문이거든요.

김: 복음서 안에서도 양과 염소의 심판 장면이라든지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들어간다든지[마25:46],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막9:48]는 묘사가 나옵니다.

양: 사실 지옥에 대한 이런 묘사가 주는 종말론적 긴장이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노: 성경에는 죽은 악인의 영혼들이 머무는 음부와는 다른 최종 심판으로서의 형벌 받는 불 못이 분명히 나오지만, 이 불 못이 영원토록 지속하는가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는 겁니다. 불 못이 오랜 시간 후에 불이 꺼져버리느냐, 아니면 문자 그대로 영원히 계속 타느냐 이게 논쟁이 되었었죠.

양: 사실은 계시록과 복음서에서 지옥이 심판의 이미지로 종종 나타나니까, 지옥을 너무 무덤덤하게 축소해서 기술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노: 그러니까 현재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하는 죄에 대해서 분명히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다는 메시지 자체가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군요.

김: 톰 라이트는 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루살렘성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도시 밖으로 흘러가서 만국을 소성시키는 장면을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성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밖에 있는 사람이 완전히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생수의 강이 흘러나가고 그 강변에 치료하는 생명나무의 열매가 열리는 비전으로 마무리 된다는 거죠. 그 부분은 만유회복의 이미지인데, 우리는 이 부분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는 지옥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는, 우리는 구원을 누리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지옥에서 불타고 고통 받고 있다. 그럼 그게 무슨 구원이겠는가, 그건 양쪽 모두 영원한 저주로 느껴진다는 거죠. 이게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는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 위해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연옥과 같은 개념도 없고.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는 방식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생수가 어떻게 해서든 거기까지 흘러갈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저 사람들에게 전혀 연민의 정을 가지지 못할 정도로 저 사람들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완전히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므로 우리에게 고통과 연민의 감정이 없을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로 정리하면 어느 정도 설명은 되지만 여전히 우리는 찜찜하죠.

노: 이제 좀 정리를 하면서,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우리 교회와 독자들이 특별히 유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김: 지금까지 우리는 속죄론 중심의 복음을 전해왔는데, 그러다 보니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납득시키는 부분부터 전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죠. 그런데 만일 우리가 부활 중심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리고 특히 남성들의 경우 교회에 나오는 중요한 계기가 죽음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죽고, 죽음을 가까이서 보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것이죠.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진지하게 인식하면 그 안에 죄가 포함되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가 죽음 이후의 삶,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에 대해 안내를 해 준다면 자연스럽게 전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노인들을 전도하는 부분에서도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양: 요즘 웰-다잉이나 존엄사의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는데, 교회가 어차피 우리는 죽어야 될 존재인데 어떻게 죽어야 되고 죽음 이후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를 성경적으로 잘 제시하여 소개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정황에 적절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 이 책의 흐름도 죽음의 문제로 시작해서 부활을 말하고 더 큰 새 창조의 비전까지 확 나가고 있는데, 저자가 문제를 제기하듯이 죽음은 사람들이 여전히 모르는 세계이며 혼란이 많고 때로는 굉장히 공포스럽기도 한 존재입니다. 제 주변에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본 경험을 말하는 분들이 있고 저도 심리적으로 정말 공황장애와 같은 경험,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믿을만한 설명이 있고, 그 공포스러움에 대해서 복음이 뚜렷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그 메시지 자체가 안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가 교회에서 잘 가르쳐지고,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복음이 소개될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과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예수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의 소망,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 재창조의 첫 열매를 누리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런 식으로 복음이 좀더 생생하게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 죽음을 단순히 하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말하고, 죽음으로서 모든 고통이 끝난다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자살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어지죠. 내가 이 고통을 죽을 때까지 당해야 한다면 지금 죽음으로써 여기서 해방이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라고 말할 수 있죠. 죽음이 영원한 안식이라면 내가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왜 정죄하는가 물을 수 있죠.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보다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좋은 것인가를 확증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오래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한 분의 장례식에 참여해 보면, 죽음으로 이제 드디어 고통이 끝이 났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벗어나 예수님의 품에서 쉴 수 있구나 하는 기대가 생기는 거죠.

노: 그런 쉼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듯이 우리는 죽으면 주님 품에서 쉬는 것이죠. 그 약속은 정말로 좋은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좋은 약속, 부활의 약속이 그 뒤에 또 있는 것이고요.

김: 오늘날의 많은 삶의 모습들이 정말 지치고 힘들고 하니까 죽음을 오히려 환영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방향의 유혹을 받는 세대에서 삶이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려면, 그 복되고 기쁜 삶에 대한 가시적 증거가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 교회 공동체가 그런 증거를 보여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서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삶,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죽음과 삶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쁨, 이게 강력하지 않으면 이 육신에서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이거를 영원히 잊는 쉼을 선택하고 싶어지겠죠. 오늘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의미가 있고 기뻐야 이 삶을 영원토록 이어가고 싶은 소망이 생기는데, 이 경험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노: 그런데 이런 면도 있습니다. 저는 젊어서 죽은 후배의 삶에 대해서 묵상하며 이건 부활이 없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라면,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 친구의 인생의 모든 절정이 다 경험된 것이라면, 그것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아, 우리 인생의 꽃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비로소 피는 것이구나’라는 소망을 주죠. 또, 노인이 평생 고생을 참 많이 했는데, 그러면 그분의 인생이 정말 만족스러운 인생일까. 하나님은 그가 경험한 인생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삶, 꽃이 활짝 피는 상태를 아직 남겨두고 기다리고 계시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부활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성취를 기대하게 하는, 그래서 현세의 죽음 조차도 이길 수 없는 소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 이 책에는 어떻게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이 들어와 있고, 왜 우리 삶에 이런 불완전함과 고난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어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 분의 다른 책이 있죠?

노: 그 책은 제가 번역한 책인데,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라는 책입니다.

양: 저는 이 책이 교회에게 큰 과제를 남겨주는 책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해야 되느냐 하는 과제죠. 상당한 창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하셨지만 오늘날 교회는 힘이 많다는 것, 그리고 양극화 현상으로 힘이 없는 교회도 많다는 것,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교회가 연대하여 하나되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과제입니다. 교회 안에 아직은 불일치와 싸움과 신학적인 입장 차이들이 다양한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조화하여 각자 독자노선을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을 가지고 이 사회를 하나님의 정의와 생수의 강이 흐르도록 하느냐 하는 어마어마한 과제가 남겨져 있습니다.

노: 저는 그것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지금 성령님을 통해서 재창조의 일을 하고 계신데, 우리가 그걸 못 발견하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데 주파수를 맞추고 있거나, 하나님의 재창조역사와는 다른 우리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창조해 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눈 먼 자들을 눈 뜨게 하시는 메시아적 사역을 행하시는 그 현장 속에 교회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분리된 곳에 딱 진을 치고 '평안하다'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희망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가 중산층만의 종교 집단이 되어가는 위험스런 신호가 보이는 것 같아서요. 정말 성령님이 운행하시는 그 곳에 교회가 함께 있어야 되고 또 교회가 성령님의 그런 운행하심을 가시화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므로,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가 응답할 수 있는 민감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 제가 이 책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그림은 상당히 명쾌하고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신약 성경이 명확하게 제시하는 방향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혼란과 분열은 많은 부분에서, 성경을 가장 존중한다고 내세우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에 별로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은 데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 좀더 분명하게 형성이 된다면, 세부적인 차이들에 대해서 좀더 관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입장 차이를 관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해석함에 있어서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저 사람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든지 하는 판단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성경의 권위를 동일하게 인정하고 텍스트를 동일한 무게로 받아들이면서 부분적으로 다른 해석을 취한다면 상호간의 소통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 면에서 서로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가, 그런 내용을 성경에서 읽어냈느냐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성을 포용하는 데 주저함이 있는 것이죠.

양: 그런 면에서 우리가 대화는 많이 하지 않아요. 열린 대화 말입니다. 서구에서는 타 종교와의 대화까지도 진행되지만, 우리는 우리끼리의 대화도 잘 못하고 있죠.

김: 복음주의든 에큐메니컬이든 서로에 대해 너는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 라는 판단이 너무 강해요. 이것이 그저 실천 방식의 차이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갈등이 이 책이 제시하는 정도만이라도 성경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읽는다면 상당히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제일 큰 소득은 그것입니다. 성경의 핵심 메시지에 대해서,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하게 정리될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구나. 저는 지금까지 성경은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 다양성을 어떻게 조화할까에 혼란스럽게 고민해 왔었는데, 성경이 상당히 일관성 있는 그림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 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 저로서는 제일 큰 소득이었던 것 같습니다.

노: 우리가 핵심적인 어떤 진리, 부활이라든지 십자가라든지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사역이라든지 이런 핵심적 진리를 함께 충분히 많이 공유하고, 지옥 문제라든지 성경에 명확히 나오지 않아서 논쟁의 결말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로 열린 마음으로 겸손함을 가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는 부분에 대해서 좀더 깊이 연구하고 좀더 많은 대화를 해서 공통된 비전을 형성한다면, 훨씬 더 편안한 마음으로 역할을 분담할 수 있겠습니다.

양: 우리의 대전제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소망하며 하나가 되어 함께 일하자는 거니까, 그 점에서는 공감대가 형성될 것입니다.

노: 이렇게 마무리를 하면 좋겠습니다. 흥미롭고 도전적이고 진지한 대화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본 출처: IVP BOOKNEWS 7-8월호
   http://www.ivp.co.kr/booknews/index.php?bno=87&cid=225#Read_start
2009/06/26 20:47 2009/06/26 2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