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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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ad Not Taken
by 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피천득 옮김)

2007/12/22 19:21 2007/12/2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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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셨다?"
/김영봉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


대학교에 다닐 때, 종종 종교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던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때문에 기독교에 관심이 있었지만,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질문이었습니다.

가끔 기회가 되면 저는 그 친구에게 예수님을 믿어 보라고 권하곤 했는데, 그가 한 번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야, 너희 기독교인들은 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갖다 붙이냐?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지 않니? 우리 어머님을 보고 느끼는 점인데, 밤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채어 넘어져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니, 도대체 나는 이해를 할 수 없다.” 그 때 제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궁색한 답변에 제 스스로가 멋쩍었던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소식이 끊겼었는데, 몇 년 전 우연히 연락이 되어 만나 보니, 감사하게도 신앙의 길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던졌던 질문이 지금도 제 뇌리에 울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너무나도 자주 만나기 때문입니다. 대화 중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많이 입에 올릴수록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에게 갖다 붙여 해석해야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합니다. 제가 만났던 한 선교사께서는 거의 매 문장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제게 믿음이 부족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얼마나 듣기에 거북하던지요!

질병에 걸리면, “하나님이 병을 주셨다”거나, “하나님이 치셨다”고 말합니다. 사업이 망하거나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셨다”거나 “하나님이 시험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몇 년 전 거대한 쓰나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을 때도,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석했었습니다.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이 응답을 주셨다”,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 주셨다”, “하나님이 보여 주셨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몇 년 전에 만난 어느 부인이 생각납니다. 시카고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그 여인을, 저는 그 모친의 장례식에서 만났습니다. 처음 만나는 동양인 목사에게 그 여인은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겉으로는 유복한 중산층 백인처럼 보이는 그 여인은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 여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몇 년 전에 에이즈(AIDS)로 잃었습니다. 그 아들은 동성애자였는데, 수년 동안 에이즈로 고생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엄마로서 그 고통을 견디기에 얼마나 어려웠을까 싶어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친지들이 내뱉는 위로의 말이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이 고통을 주신 겁니다”라는 위로의 말이 제일 싫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라고, 정색하며 대들곤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말 습관에 큰 불편을 느낍니다. 첫째, 많은 경우 사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질병을 앓아 보아 압니다만, 병은 대부분 저의 잘못된 생활 습관이 키우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어 무리해 놓고 병이 났는데, 왜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겁니까?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사업 확장을 해 놓고, 그로 인해 부도를 냈을 때, 왜 “하나님이 시험을 주셨다”고 말하는 겁니까? 경황없이 허둥대며 살다가 자동차 사고를 냈을 때,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느냐?”고 말하는 겁니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도 탓할 사람이 없어 하나님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압니다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렇게 어려움을 자초했을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잘 극복해 내면, 고난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혹은 “고난이 내게 오히려 유익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게 병을 주셨습니다”라고 비약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하게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간의 삶을 오해하게 됩니다. 이 어법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조정하는 인형과 같아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되, 로봇처럼 혹은 인형처럼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용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과 방향을 가지고 계시지만, 억지로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찾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만 인간이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는 어법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해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인 삶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것인지요! 그런데 믿음 좋다는 사람이 이 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 생활에 대해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 영성 생활이라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손에 들린 인형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대 극단도 진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계신 것처럼, 그리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연이나 우리 자신의 선택 만으로 말미암았다고 보는 것도 잘못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다만,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시며, 그 관계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자유의지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살게 되는 동시에 가장 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불가항력적인 사건이나 사고 혹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우리에게 유익하게 변모됩니다. 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집트의 총리로서 형들을 만난 요셉이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창 45:8). 매사를 하나님께 갖다 대는 ‘믿음 좋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맞아,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긴 것도,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한 것도, 누명을 쓰고 감옥에 떨어졌던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신 거야”라고 단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형들을 시켜서 자신을 팔아넘기게 하고, 보디발의 아내를 조종하여 자신을 유혹하게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악행이지만, 요셉이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때, 인간들이 그에게 행하는 모든 악행들을 하나님이 이용하셔서 결국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 내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토마스 켈리(Thomas Kelly)는, 믿는 사람은 인간사가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Testament of Devotion). 한 차원은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인간적인 차원입니다. 우리는 그것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 차원은 신적인, 영적인 차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하므로”(고후 5:7) 그런 차원이 있음을 믿어 알고 있습니다. 가령, 제가 어느 사람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서 더욱 중요한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저는 세례 의식에 마음을 쏟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고 해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끝마다 “하나님이…”를 반복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의 제3계명(“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대화 중에 최대한 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만의 독특한 어법이 생겼습니다. ‘신적 수동’(divine passive)라는 것이 그것인데, 대화 중에 하나님이 주어가 될 경우,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입에 두지 않기 위해 수동태로 만드는 어법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셨어!”라고 말하고 싶으면, 수동태로 바꾸어, “내가 위로 받았어!”라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주어로 두고 말하다가, 혹시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 싶어 마음을 썼던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 좋은 사람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혹시나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한국 교회에 신적 수동의 어법이 회복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IVP BOOKNEWS, 2007년 7-8월|제15권 제23호 통권75호)

2007/07/15 18:28 2007/07/1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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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의 일이다.

'청구회'의 정체와 회원의 명단을 대라는 추상 같은 호령 앞에서 나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어떠한 과정으로 누구의 입을 통하여 여기 이처럼 준열하게 그것이 추궁되고 있는가. 나는 이런 것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8월의 뜨거운 폭양 속에서 아우성치는 매미들의 울음소리만 듣고 있었다. 나는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아득한 그리움처럼 손때 묻은 팽이 한 개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답변해주었다. '국민학교 7학년, 8학년 학생'이라는 사실을.

그후 나는 서울지방법원 8호 검사실에서 또 한번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청구회 노래'인가?"검사의 반지 낀 손에 한 장의 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거기 내가 지은 우리 꼬마들의 노래가 적혀 있었다.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처럼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
어깨동무 동무야 젊은 용사들아
동트는 새아침 태양보다 빛나게 나가자 힘차게 청구용사들.
밟아도 솟아나는 보리싹처럼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
배우며 일하는 젊은 용사들아
동트는 새아침 태양보다 빛나게 나가자 힘차게 청구용사들.


여기서 '주먹 쥐고'라는 것은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추궁을 받았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준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끈질긴 심문이었다.

내가 겪은 최대의 곤혹은 이번의 전 수사과정과 판결에 일관되고 있는 이러한 억지와 견강부회였다. 이러한 사례를 나는 법리해석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 그 자체의 가공할 일면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는 특정한 개인의 불행과 곤혹에 그칠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성이 복재(伏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군법회의에서 이 '청구회 노래'의 가사를 읽도록 지시받고 '청구회'가 잡지사 '청맥사'를 의식적으로 상정하고 명명한 이름이 아니냐는 '희극적' 질문을 '엄숙히' 추궁받았다.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2007/04/15 18:22 2007/04/1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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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은 말합니다. 삶은 전부 이와 같으며, 지식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여러분 자신의 세계, 즉 여러분 자신의 전제나 내적 세계의 반영일 뿐이라고. 여러분은 아무 것도 신뢰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입니까? 세상에는 사랑, 지식, (의심이 아닌) 신뢰의 해석학과 같은 것이 있으며 이것들은 21세기에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저는 독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세계에서 이러한 믿음을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하라고 도전합니다.

(N. T. Wright, "The challenge of Jesus" 마지막 장 중에서)

2007/03/16 19:04 2007/03/16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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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태인이 고향이지만 아버지가 군인(공군 하사관)이었던 탓에 셀 수 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다. 전라 경상 충청 경기 할 것 없이 남한에서 비행장 있다는 고장은 다 살아봤고 그 고장에서도 이런저런 형편 때문에 수시로 이사를 다녀야 했으니 기억하는 이사 횟수만 스무 번은 넘는다. 여섯 살부터 초등학교 4학년까지 살았던 대구는 매미가 다닥다닥 붙은 사과나무의 환영과 가슴 아린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은 곳이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가리켜 말하곤 했다. 김상사 네는 전라도 사람 같지 않아.

그 희한한 칭찬은 어린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런 칭찬의 반복은 나로 하여금 전라도 사람이 어떤 큰 죄를 가진 사람인 모양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아버지에게 그 일을 따져 묻는 게 예의가 아니고 소용없는 일이란 걸 알아챘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나의 성장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게 뒤집힌 건, 스무 살 무렵이다.
머리는 텅 비고, 반항기만 가득했던 내게 반역으로 점철한 전라도의 근현대사가 갑자기 다가왔다. 머리통을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로 채워가며 나는 난생 처음 겪는 지적 체험에 감격했다. 내 어린 시절 눈에 담았던 그 산과 벌판, 그리고 내가 걷던 길들이 그대로 동학군의 땀과 피가 서린 곳이었다니, 와. 그 뒤로 나는 전라도 사람임을 자랑하게 되었다.
묻지 않아도 내가 전라도 사람임을 밝혔고, 특히 전라도 출신을 꺼릴 법한 상대나 자리라면 반드시 내 고향을 밝혀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하곤 했던 것이다. 피해 지역의 지역 감정도 좀더 엄격하게 조절되어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은 건 최근이다.

시사잡지 기자인 B는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대뜸 내 글 칭찬을 했다. 문장을 인용까지 해가며 하는 소리라 빈말은 아니었지만, 사람들도 많고 해서 점잔빼고 앉았다가 대신 고향을 물었다. 말씨로 보아 전라도 사람이 분명했기에 그걸 확인해서 우호감을 나누려는 수작이었다. 몰라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B는 정색을 하며 대답을 거부했다. 한참 후 다른 곳으로 술자리를 옮긴 후에야 나는 아까의 일을 물었다. 짐작대로 나는 광주가 집이고 얼마 전엔 5.18 보상금도 받았다. 하지만 전라도 사람끼리 배타적으로 뭉치고 하는 건 딱 질색이다.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이 나라의 지역 문제는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앉은 듯 싶지만, 그럴수록 이 나라가 단일 민족인 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고향 좀 다른 것 가지고도 이렇게 못 잡아먹어 난리인 사람들이 인종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몇 년 전 르완다에선 인종청소로 100만이 죽었고 오늘 유고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니할 말로 이 나라가 여러 인종이었다면 진작에 수백만은 죽어나가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전라도 문제는 빼고라도, 연변 동포에게, 굶주리는 북한 인민에게 한국인들이 보이는 야비함을 보라.

어릴 적 대구에서의 희한한 칭찬을 들려주었다. 매우 정열적이었던 증조할아버지는 만주를 거쳐 일본에 건너간 식솔들을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다. 동네사람들(일본인들)은 아버지 가족을 가리켜 말하곤 했다. 김상네는 조센징 같지 않아. 해방되던 해 아버지 가족은 연락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해가 바뀌도록 급우들(한국인들)로부터 매를 맞아야 했다. 급우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하곤 했다. 죽어라, 쪽발이 새끼. (99년 4월)
1999/04/16 19:23 1999/04/16 19:23